5월 2일 갑신
신사건(申思建)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정보(李鼎輔)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중협(李重協)을 승지(承旨)로, 조관빈(趙觀彬)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구성임(具聖任)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5월 5일 정해
오랜 가뭄으로 인하여 북교(北郊)에 나아가 몸소 기도하겠다는 분부가 있었는데, 대신(大臣)과 약원(藥院)에서 여러 번 몸소 기도를 행하여 성체(聖體)에 손상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섭행(攝行)하기를 여러 차례 계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보욱(李普昱)을 승지로 삼았다.
5월 6일 무자
임금이 보여(步輿)를 타고 북교(北郊)에 나아가 막차(幕次)에 들어갔다. 이때에 날씨가 매우 더웠으나 임금이 오히려 법복(法服)을 벗지 않고 단정히 앉아 있었으며, 또 환시(宦侍)로 하여금 부채를 부치지 말도록 하였으니, 대개 가뭄을 민망히 여겨 경건하게 기도하는 뜻이 불같은 더위를 당하여 뜨거운 곳에 있으면서도 또한 감히 조금도 게을리지 않았다.
5월 7일 기축
임금이 북교(北郊)에서 기우제(祈雨祭)를 행하고, 창의문루(彰義門樓)에 역림(歷臨)하여 옛일을 추상(追想)하여 시(詩)를 짓고, 이를 새겨 걸도록 명하고, 정사 공신(靖社功臣)의 성명 또한 판자에 열서(烈書)하도록 명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후세 임금으로 하여금 이곳을 지나면 반드시 척연(惕然)히 성조(聖祖)께서 중흥(中興)하신 어려움을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소현묘(昭顯廟)에 치제하도록 분부하였으니, 소현묘가 연로(輦路)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나는 길에 숙빈묘(淑嬪廟)에 참알(參謁)하고, 환궁함에 미쳐서는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도중에서 고로(故老)를 불러 계해년149) 반정(反正) 때의 일을 물으니,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인정문(仁政門)에 들어오기에 미쳐 비가 억수처럼 내리니, 임금이 섬돌 위에 앉아서 이조 참판 이익정(李益炡)을 불러 삼당(三黨)을 참작해 등용하여 공도(公道)를 넓히라는 뜻으로 신칙하고, 별유(別諭)를 내려 판부사 유척기(兪拓基)를 돈소(敦召)하고 사관(史官)에게 함께 오도록 명하였다. 이때 유척기가 외방에 있은 지 거의 4년이 되었는데, 조야(朝野)에서 다시 조정에 들어오기를 기대하였으나, 유척기는 매양 상소함에 문득 ‘부죄신(負罪臣)’이라 일컫고 관함(官銜)을 쓰지 않았었다. 그래서 별유에 먼저 장두(章頭)의 폄칭(貶稱)을 버리라는 하교가 있었느나, 유척기가 또 힘써 사양하고 명에 응하지 않았다.
5월 9일 신묘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사면(辭免)하기를 원하고, 또 말하기를,
"과연 혹시라도 억울함이 있어 마땅히 신설해야 할 자이겠습니까? 만약 억울한 자가 있는데도 신설되지 못하였다면 그 원통하고 억울함이 맺혀져 오늘날의 가뭄을 초래하였으리라는 것은 이치로 보아 혹 괴상할 것이 없으니, 그 지극함을 쓰지 않음이 없는 도리에 있어서 속히 처분을 내리심이 마땅합니다."
5월 12일 갑오
신사철(申思喆)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윤양래(尹陽來)를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이희하(李希夏)를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박태신(朴泰新)을 전라도 우수사(全羅道右水使)로, 정여직(鄭汝稷)을 공홍도 수사(公洪道水使)로 삼았다.
추국(推鞫)을 행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호남 사람 김은창(金殷昌)이 순영(巡營)에 고변(告變)하였는데, 감사가 장문(狀聞)하고 잡아 보내니, 본부에 국청(鞫廳)을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김은창을 국문(鞫問)하니, 김은창이 공초(供招)하기를,
"〈신은〉 본래 호남 임실(任實) 사람으로, 중간에 사방으로 유리(流離)하다가 영남에서 승려(僧侶)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호남 땅에서 강세발(姜世發)이란 자를 만나 머리를 기르고 속세(俗世)로 돌아와 강세발에게 감여술(堪輿術)150) 을 배웠으며, 여러 해 동안 따라다니다가 정분이 매우 친밀해졌습니다. 금년 봄에 강세발이 갑자기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과연 무신년151) 에 역당(逆黨)에 들어가 남태징(南泰徵) 대장(大將)의 사환(使喚)이 되었었는데, 변란이 일어난 후에 요행히 모면한 자가 거의 백여 명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죽은 자가 많다. 그런데 그 잔당(殘黨)의 이름을 열록(列錄)하여 도목(都目)을 만들고 무신년처럼 다시 거사(擧事)하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또 진안(鎭安)에 거주하는 무인(武人) 전창서(全昌瑞)와 더불어 도당(徒黨)을 모았는데, 그 숫자가 3백 명이 되며, 삼남(三南)의 사인(士人) 유일신(柳日新) 등 15인이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3년을 기다린 후에 모모인(某某人)과 결탁하여 함께 거사(擧事)하려 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전창서를 신문하니, 전창서가 공초하기를,
"신의 처음 이름은 창서(昌緖)이고 등과(登科)한 이름은 상조(相朝)인데, 김은창과는 원래 안면(顔面)을 안 일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연일 추문했으나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또 유일신과 강우현(康友賢) 등을 신문하였으나 모두 자복하지 않았다. 5월 12일부터 국옥(鞫獄)을 설행하여 6월 11일에 이르러 비로소 끝이 났다. 강우현과 김은창을 대질(對質)시켰는데, 애당초 안면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곧바로 석방하였으며, 전창서·유일신을 여러 차례 신문하였으나 마침내 정실(情實)이 없으므로 드디어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김은창이 다른 사람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하였다고 자복하였으므로, 결안(結案)하여 정형(正刑)하였다. 강세발(姜世發)과 그 아들 강선필(姜善弼)을 찾을 만한 주소(住所)가 없었으므로 끝내 체포하지 못했다. 이른바 도목(都目)이란 것은 모두 허명(虛名)을 거짓 기록한 것이었으며, 남 대장(南大將)이란 대개 남태징(南泰徵)을 가리킨 것이니, 옥정(獄情)이 매우 허황하였다.
5월 13일 을미
박필부(朴弼傅)를 진선(進善)으로 삼았다.
사간 김상적(金尙迪)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어제 삼가 예조의 초기(草記)에 대한 비답을 보았더니, 보사제(報謝祭)를 설행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번의 우택(雨澤)은 오히려 흡족하지 못하여 전답(田畓)에 비를 바라는 것이 더욱 간절하므로, 산천(山川)에 우사(雩祀)를 다시 부지런히 드리게 되었는데, 한편으로 기도를 하고 한편으로 보사제를 올리는 것은 혹 번독(煩瀆)한 데에 가깝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더라도 또한 늦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보사제의 규모를 어찌 장대(張大)하게 하겠는가? 한편으로 기우제를 지내고 한편으로 보사제를 올리는 것은 상례이다. 비록 흡족하지는 못하지만, 수보(水報)가 한자 남짓한데 보사의 예를 궐함이 옳겠는가? 지난해에도 우단(雩壇)에서 이미 거행하였었다."
하였다.
장령 허채(許采)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강도(江都)는 천험(天險)의 요새이니 곧 국가의 보장(保障)입니다. 석축(石築)의 공역(工役)을 지금 이미 시작하였는데 그 범위가 넓고 물력(物力) 또한 거창하니, 시일이 지체되는 것은 형세에 있어 당연한 일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마땅히 여러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각기 파수(把數)를 한정해 주어 한꺼번에 굳게 쌓도록 한다면 강도 백성의 힘을 펴게 할 수 있고 길이 금성 탕지(金城湯池)152) 의 견고함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선두포(船頭浦) 일대는 옛날 제방을 쌓은 것이 이미 평지가 되었는데, 만약 이 포구(浦口)를 돌로 연달아 쌓지 않는다면, 다른 곳을 아무리 굳게 쌓더라도 이는 아홉 길 높이의 산을 쌓는 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허사로 돌아가는 격이 될 것이니, 또한 묘당(廟堂)과 상의하여 한꺼번에 완축(完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5월 14일 병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제 이 국옥(鞫獄)에 관한 일은 비록 그 허실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나, 이미 국청(鞫廳)을 설행하였으면 국가의 사체에 있어 범홀(泛忽)히 넘길 수 없는데, 헌부의 인원이 갖추어지지 않음으로 인하여 국청의 집무(執務)를 2일이나 정지하였습니다. 설령 헌부의 신하들이 사소한 혐의가 있다 하나, 사체가 중대함에 비추어 서로 버틸 때가 아닌 듯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오늘 패초(牌招)를 어긴 헌부의 여러 신하들을 아울러 나처(拿處)하고, 신칙하지 않은 정원과 구차히 보충한 전조(銓曹)는 모두 중추(重推)하여 경계함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오늘날 한재(旱災)가 혹심하여 조금이라도 재해를 없애는 도리는 죄수를 소결(疏決)하는 한 가지 일에 달려 있습니다. 전일에 이미 계달하였으나, 또한 다시 지체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온갖 법도가 모두 해이해져 모든 일이 다스려지지 아니하고, 조정의 규모와 기상이 한결같이 안일(安逸)하고 게으름만 피우니,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신은 아마도 걱정스러운 사단(事端)이 한때 유행하는 재앙에 그치지 않을 듯합니다. 다시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척연(愓然)히 경계하고 크게 분발함으로써 천심(天心)을 감동시키는 근본을 삼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김은창(金殷昌)의 일은 비록 허황되지만, 목욕 청토(沐浴請討)153) 하는 의리에 있어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겠는가? 나처하는 데에 그칠 수 없으니, 먼저 삭직(削職)한 뒤에 나처하도록 할 것이며, 전관과 정원을 문비(問備)154) 하는 것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5월 15일 정유
달이 남두성(南斗星)을 범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6일 무술
예조에서 아뢰기를,
"춘당대(春塘臺)에서 석척 동자(蜥蜴童子)155) 가 기우제를 지낼 때 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정문(肅靖門)을 열어 3일 만에 그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형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 이 큰 가뭄은 봄부터 여름에 이르도록 비록 가랑비는 내렸으나 단 솥에 물을 뿌린 데 지나지 않았을 따름이고, 마침내 한 번도 큰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연일 구름이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고 마치 음울(陰鬱)하고 불평한 기운이 있는 듯하였으니,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죄수를 소결(疏決)하는 일이 비록 화기(和氣)를 반드시 감동시켜 돌이킬지 알지 못하나, 성명(成命)을 내린 지 이미 8, 9일이 지났는데도 재앙을 소멸시키는 방책에 대해서는 태평하게 지체하고 있으니, 오히려 어떻게 하늘의 뜻을 돌려 단비 얻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마땅히 근시(近侍)를 보내어 경기 지방의 명산(名山)에 두루 기도를 올려 신령(神靈)마다 정성을 드리지 않음이 없는 분의(分義)를 다하고, 또한 여러 신하들을 불러 모아 실정(實政)을 강구할 것이며, 경연(經筵)의 소대(召對)와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들어오는 규례 같은 것도 제때에 거행하도록 명하여 한편으로는 재앙을 그치게 하여 백성을 구제하고 한편으로는 근본을 바루어 밝은 정사를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 권면한 것이 가상하니, 마땅히 힘쓰겠다. 그리고 진달한 바는 3일이 지난 후에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5월 17일 기해
김상석(金相奭)을 대사간으로, 박필부(朴弼傅)를 사복시 정으로 삼았다.
5월 18일 경자
큰 비가 내렸다. 예조에서 수표교(水標橋)의 물이 1척임을 아뢰니, 태묘(太廟)에 보사제(報謝祭)를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또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비답을 내리기를,
"가뭄이 이와 같고 국사(國事)가 해이해졌는데, 경이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으로 어찌 이를 양해하지 않는가? 또 배표(拜表)할 날짜를 이미 가려서 정하였는데, 이 어찌 경이 한결같이 시골에 있을 때이겠는가?"
하고, 인하여 같이 오도록 한 승지에게 전유(傳諭)하도록 명하였다.
장령 유우기(兪宇基)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난적(亂賊)을 다스리는 법은 지극히 엄중한 것이니, 해가 오래 되고 일이 옛날에 있었다 하여 조금이라도 제방(隄防)을 늦출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선조(先祖) 경신년156) 이후에 역모(逆謀)를 범하여 처벌받은 자의 자손 가운데 감히 서로 잇따라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자가 거의 수십여 명에 이른다고 하니, 그 방자하고 무엄함은 이미 말할 것도 없습니다마는,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바야흐로 또 이 무리들을 신설(伸雪)하여 재앙을 그치게 하고 화기를 인도하는 방도로 삼으니, 어찌 해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상께서 죄안(罪案)을 상고하여 다시 품의하라는 하교가 비록 흠휼(欽恤)하는 어진 마음에서 나왔으나 이를 빙자하여 흉역의 무리가 번복하여 죄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어 놓는다면 그 왕법(王法)에 있어서 도리어 어떠하겠습니까? 아! 지나간 사첩(史牒)을 상고하건대, 비록 군사를 일으키거나 무고(巫蠱)를 한 역적이 있었으나 그 흉독(凶毒)하고 참혹함이 어찌 무신년157) ·경술년158) 과 같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전하의 신민(臣民)이 된 자는 지금 와서 생각하더라도 간담(肝膽)이 땅에 떨어져 이 역적들과 함께 한 하늘 아래에서 살고 싶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앞으로 백년이라도 하루같이 여길 것인데, 오직 저 대신은 경술년의 옥안(獄案)을 특별히 끄집어 내어 심지어 그 원통함이 맺혀 있다고 하며 오늘날 한재(旱災)를 초래한 까닭을 이 옥사(獄事)에 핑계대어 참으로 신설(伸雪)할 만한 일을 신설하지 않는 것이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신은 진실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아! 한재를 당해 죄수를 소결(疏決)하는 것은 원래 옛부터 내려 오는 일입니다마는, 재앙을 그치게 하거나 옮겨 가게 하는 방도는 또 오르지 이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로 전하께서는 대월(對越)하는 정성을 더욱 힘쓰시고, 묘당에서는 보필(輔弼)하는 도리를 다하되, 언로(言路)를 넓혀 억누르는 위엄을 가하지 않고 백성의 고통을 상문(上聞)하여 어린아이를 보살피 듯하는 은혜가 아래에 미치게 한다면, 천심(天心)이 기뻐하여 단비가 거의 때에 맞추어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재앙을 구제하는 대책이란 한갓 천고(千古)에 없는 역안(逆案)을 신설하고자 하는 것이니, 이 어찌 이치에 합당한 일이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일이 선조(先祖)에 관련된 것과 그 이름이 무신년·경술년의 옥안(獄案)에 들어 있는 자는 특별히 소결(疏決)의 문안(文案)에서 모두 뽑아 버려 거론하지 말도록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 일은 이미 역옥(逆獄)에 관계된 것이니, 스스로 하소연하는 무리들은 애당초 엄금함이 마땅하였는데 정원에서는 예에 따라 계하(啓下)하고, 병조에서 신칙하지 못하여 마침내 직분을 유기(遺棄)한 죄를 모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견책(譴責)을 시행하여 훗날을 징계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처럼 가뭄을 민망히 여기는 즈음에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무리를 해조와 정원에서 어찌 막을 수가 있겠는가? 진달한 바는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수찬 원경순(元景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전하께서 한재(旱災)를 당한 이래로 몸소 기도를 올리신 것이 세 차례에 이르렀고, 주방(酒房)의 찬품(饌品)을 감손하고 옹주의 혼구(婚具)를 재감(裁減)하기에 이르렀으니, 감무을 민망히 여겨 스스로 경계하고 성찰하신 데 대하여 누군들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먼저 유사(有司)가 제공하지 않는 것과 외인(外人)이 알지 못하는 것부터 일체 삭감하여 무릇 재억(裁抑)하고 절약(節約)하는 데 관계된 방도가 순수하여 한결같이 불쌍히 여기는 정성에서 나와 털끝만큼이라도 사람들이 지켜보는 데 따르는 뜻이 그 사이에 섞이지 않아야만 저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무릇 한재를 만나 죄수를 구휼(救恤)하는 일은 성명(成命)을 내렸는데도 여러 날 지연하였으니, 수화(水火)에서 건지기를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하는 뜻에 아마도 부족함이 있는 듯합니다. 또 적당히 헤아려 재처(裁處)할 즈음에 혹시라도 선후의 차례를 잃었거나 경중(輕重)의 마땅함에 어긋나서, 악역(惡逆)에 관계된 자도 혼동하여 석방되고, 죄가 생재(眚災)에 관계된 자가 용서받지 못한다면, 더욱 화기(和氣)를 인도하여 재앙을 그치게 하는 효과가 없고, 한갓 제방(堤防)을 무너뜨리고 혼란을 조장(助長)하는 데로 돌아갈 것이니, 이것을 또한 신은 깊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권면한 바는 마땅히 힘쓰겠다."
하였다.
5월 19일 신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한재가 혹심하다 하여 공사(公私)간의 토목(土木)의 역사를 중지하고 가을의 숙성(熟成)하기를 기다리라고 명하였으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정언 홍익삼(洪益三).】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국청 죄인을 발포(發捕)할 때에 도사(都事)가 규피(規避)함으로 인하여 가도사(假都事)로 대행(代行)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당차(當次)의 도사를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5월 20일 임인
이조 판서 이기진(李箕鎭)이 시골에 있으면서 끝내 명에 응하지 않으므로, 대신이 드디어 연석에서 체임을 허락하기를 청하니, 민응수(閔應洙)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병상(李秉常)을 판돈녕부사로, 이덕수(李德洙)를 좌참찬으로, 권적(權𥛚)을 대사헌으로, 윤동형(尹東衡)을 대사간으로, 윤광의(尹光毅)를 부응교로, 유우기(兪宇基)를 수찬으로, 남태기(南泰耆)를 정언으로, 이기헌(李箕獻)을 장령으로, 이창유(李昌儒)를 지평으로, 박준(朴㻐)을 헌납으로, 이명곤(李命坤)·조명리(趙明履)를 승지로, 정석오(鄭錫五)를 발탁하여 판의금부사로, 유엄(柳儼)을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이때에 비가 잠깐 내렸다가 도로 가무니, 임금이 장차 선농단(先農壇)에서 기우제를 올리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정지하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정원에서 아뢰기를,
"선농단의 동쪽과 서쪽에 여역(癘疫)으로 죽은 자의 초빈(草殯)이 있고, 그 근처의 백성들 또한 역질에 전염된 자가 많습니다. 청컨대, 몸소 기도한다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드디어 대신을 시켜 대행(代行)하라고 명하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을 보내어 헌관(獻官)으로 삼았다. 임금이 후원(後苑)에서 향을 피우고 기도하였는데, 이날 과연 비가 내렸다.
5월 21일 계묘
찬선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한재(旱災) 때문에 진계(陳戒)하니, 비답하기를,
"경을 만나 본 지 오래 되어 경을 생각함이 깊었었는데, 이와 같이 간곡히 권면하니 경을 보는 듯하다. 원소(原疏)는 유중(留中)하여 그 뜻을 마음 속에 간직하는 자료로 삼겠다. 경은 이 은근한 뜻을 본받아 잘 조섭하여 나의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2일 갑진
정언 홍익삼(洪益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청의 위관(委官)을 차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도 금부의 여러 당상들이 끝내 사진(仕進)하지 않고 있습니다. 설령 이 옥사가 부실(不實)하다 하더라도 여러 날 동안 지연하는 것은 온당치 않으니, 사진하지 않은 금부의 여러 당상들은 모두 중추(重推)를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그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5월 23일 을사
우윤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여 진계(陳戒)하고, 인하여 어사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억울한 옥사(獄事)를 심리(審理)하기를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무신년159) ·경술년160) 이래로 역안(逆案)에 관련된 무리들에 대하여는 진실로 국법이 있다면 경솔히 신설(伸雪)을 의논하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금중(禁中)의 심수(深邃)한 곳에서 격고(擊鼓)하는 자가 잇달았고, 연로(輦路)의 엄숙한 곳에서 상언(上言)이 분운(紛紜)하였으므로, 도로에서 파다하게 전하기를, ‘아무개가 격고한 것은 어느 재상이 부탁한 것이고, 아무개가 상언한 것은 어느 재상이 주간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그 사실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하나, 만약 전해 들은 말과 비슷하다면 감히 친족과 인아(姻婭)의 사사로움으로 인하여 기강을 업신여기고 제방(堤防)을 무터뜨리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것이니, 신은 그윽이 세도(世道)를 위해 길게 탄식하는 바입니다. 경술년의 역옥에 이르러서는 고 상신 홍치중(洪致中)·이집(李㙫)·조문명(趙文命)이 처음부터 끝까지 안치(按治)하였는데, 이 세 대신들은 모두 공평하고 성실하였으니 어찌 외람된 일이 많았을 리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그 권면한 것은 마땅히 힘쓸 것이며, 진달한 바는 당장 상신(相臣)에게 하교하겠다."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체차되기를 원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장령 유우기(兪宇基)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경술년161) 의 옥안(獄案)에 대한 일을 논열(論列)한 바가 있었는데, 저 대신이라고 하면서 성대하게 지척(指斥)을 가한 자는 곧 신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니, 신은 이에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난 봄에 죄수를 소결(疏決)하였을 때 금부 당상 조상경(趙尙絅)·정언섭(鄭彦燮)이 경술년 옥안 가운데 들어 있는 몇 가인(家人)들이 격고(擊鼓)한 데 대한 회계(回啓)의 일을 가지고 연중(筵中)에서 발론하자, 마침내 옥안을 상고하여 대신들과 의논하여 품처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근래에 듣건대, 신이 외방에 있었기 때문에 거행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침 한재가 이와 같아서 염려스러움을 이루 형언할 수가 없고, 성명(成命)이 또 신으로 말미암아 지연되었으니, 마음에 매우 불안합니다. 그러므로 사소(辭疏) 가운데 신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품의하여 결정하라는 뜻으로 대략 언급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이 옥사에 대해 실은 그 이면의 곡절을 상세히 알지 못하므로, 사연을 만들어 범연히 논평한 데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며, 그 사이에 굳이 기필한 것이 없었으니, 이제 그 상소의 말을 상고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5월 26일 무신
부사직 윤급(尹汲)이 상소하여 그 조부 윤계(尹堦)가 황해도 관찰사로 있었을 때 통관(通官) 장효례(張孝禮)와 문답한 사실을 갖추어 진달하여 오성운(吳星運)이 격고(擊鼓)하여 끌어댄 무함을 변명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너의 소장을 보고 본사(本事)를 명백히 알게 되었다. 그 할아비를 위하여 등문(登聞)하면서 범람하게 끌어댄 것을 어찌 족히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저 숙종(肅宗)경신년162) 에 죄를 받아 죽은 오시수(吳始壽)가 말한 ‘신강(臣强)’의 설(說)은 윤계가 또한 장효례에게 들었다고 하였는데, 그때에 윤계가 두 번 상소하고 두 번 공초(供招)하여 무함임을 밝혔었다. 이에 이르러 오성운이 격고하여 그 할아비 오시수를 위해 원통함을 하소연하였고, 다시 윤계를 끌어대어 증거를 삼았으므로, 윤급이 상소하여 변명한 것이었다.
부교리 박춘보(朴春普)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섭향고(葉向高)163) 가 위충현(魏忠賢)164) 을 두둔한 사실을 논평하였다. 또 말하기를,
"재신(宰臣)의 소장에 이르기를, ‘선류(善類)를 보전하고 나라를 위하여 협조하였는데, 도리어 유신에게 매우 미움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아! 예로부터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은 그 형세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어서 한 번 다투게 되면 소인이 반드시 이기게 되고 군자는 반드시 패(敗)하게 되며, 아울러 등용하면 마침내 군자는 모두 물러가고 소인만 머무르는 데에 이르는 것입니다. 무릇 이른바 조정한는 것은 양편이 모두 사류(士類)로서 언론(言論)이 약간 긋나는 경우에는 조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한 편은 군자가 되고 한 편은 소인이 되는 경우에는 얼음과 숯불이 그릇을 함께 할 수 없고, 향초(香草)와 악초(惡草)가 한 떨기에서 날 수 없는 것이니, 군자와 소인이 한 조정에서 함께 협동하고 조제(調劑)하여 그 나라를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아름다운 규모와 선량한 말은 어느 서적(書籍)에든지 없는 곳이 없는데, 반드시 섭향고의 문집(文集)을 외람되게 어좌(御座) 앞에 올리는 것은 진실로 맹자(孟子)의 이른바 임금을 존경하는 뜻이 아니니, 신이 비록 만 번 깊이 미워하는 배척을 받는다 하더라도 또 어떻게 전하를 위해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속(世俗)이 점차 변하고 인심(人心)이 날로 험악하여 사부(士夫)의 풍절(風節)이 시들어 떨치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위충현 같은 역적도 마침내 보호하는 데에 이르고, 보호하는 논의가 또 후세에 배척받지 않았는데, 오늘날 재신이 깊이 사모한다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진실로 개연(慨然)하게 여깁니다. 무릇 재신은 명위가 이미 현달하여 그 언론(言論)과 추향(趨向)이 또한 세도(世道)에 관련되었는데, 평생 깊이 사모한 바가 섭향고의 조정하는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면, 신은 그 전해지는 폐단이 없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좌윤 원경하(元景夏)가 또 대거(對擧)하는 소장에 《명사(明史)》 동림 열전(東林列傳)을 끌어대어 말하기를,
"섭향고의 군자가 되고 소인이 됨은 스스로 백세(百世)의 공안(公案)이 있습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무릇 청탁(淸濁)이 서로 부딪칠 즈음에 천백 번 변화하여 기운을 먼저 차지하고 몸을 재빠르게 놀리는 자는 섭향고가 미워한 바인데, 신 또한 이를 미워합니다. 저 유신이 진실로 섭향고를 버리고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자세히 읽어 시비(是非)를 진실로 밝게 분별하고 어진 이와 간사한 자를 엄격히 구분하여 마침내 동림당(東林黨)의 좋은 군자가 된다면, 신이 마땅히 말채찍을 잡고 그 뒤를 따르겠습니다."
하니, 아울러 예사 비답을 내렸다.
정언 남태기(南泰耆)가 상소하여 가뭄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을 구제하는 대책을 진달하니, 임금이 원소(原疏)를 비국에 내려 품처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폐사군(廢四郡)165) 의 건너편에 청인(淸人)이 많이 몰려와서 배를 만들어 파저강(婆猪江)을 왕래하므로, 평안 병사와 강계 부사가 조정에 치계하고 금조(禁條)에 의하여 심양(瀋陽)에 이문(移文)해서 금지하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실로 염려할 만한 단서가 됩니다. 의주 부윤으로 하여금 우선 봉성(鳳城)에 통문(通文)을 보내어 묻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말하기를,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여 여러 도에 어사를 보내어 죄수를 심리하기를 청하였다. 만약 죄수를 소결(疏決)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도신이 있는데 어찌 어사를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하자,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미 비가 내렸으니, 이제 소결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가뭄을 민망히 여기는 것도 백성을 위하는 것이고, 죄수를 소결하는 것도 백성을 위한 것이다. 어찌 비가 내렸다 하여 소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곧 하교하겠다."
하였다.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아뢰기를,
"북평사(北評事)는 으레 옥당(玉堂)이나 전조 낭관(銓曹郞官)으로 차송(差送)하는데, 이제 비의(備擬)할 만한 자가 없으니, 마땅히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사(兩司)에서 가려서 차송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황해 병사 구선행(具善行)이 순행하여 점검한 후 치계(馳啓)한 가운데에 각 읍진(邑鎭)의 군병들이 대신 점검받거나 점검에 빠진 자와 군기(軍器)가 미비(未備)된 자 등의 수효가 매우 많았다고 하였는데,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구선행이 잘 시행했으니,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평상시에 대리로 점검을 받는 버릇을 엄중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만일 불의(不意)의 변란이 있을 경우 장차 어떻게 군병을 영솔(領率)하겠는가? 구선행이 이미 군법을 시행하지 못했고 병판과 훈장(訓將)도 또한 신칙하지 못한 실수가 있으니, 모두 지극히 그르다. 옛날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여산(驪山)에서 군병을 사열(査閱)하였을 때 군병의 위의(威儀)가 정제(整齊)되지 않았다 하여 곽원진(郭元振)을 참형(斬刑)에 처하고자 하였었다. 당나라 현종의 다른 일은 비록 본받을 것이 없으나, 이 일만은 매우 용단(勇斷)이 있었으니, 내가 본받고자 한다. 병판과 훈장은 중추(重推)하고, 병사는 파직하며, 수령은 나처(拿處)하도록 하라. 그리고 변장(邊將)으로서 이미 체직(遞職)된 자는 혹 파직하거나 혹은 삭직하게 하고, 현직에 있는 자는 해영(該營)으로 하여금 경중(輕重)을 구분하여 곤형(棍刑)을 집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외방의 장교(將校)를 모두 출신(出身)한 사람으로 차출한다면, 출신들은 소속된 데가 있고 양정(良丁)도 또한 얻기 어려운 폐단이 없을 것이니, 이로써 여러 도(道)로 하여금 정식(定式)을 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적당히 헤아려 정식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음관(蔭官) 이정섭(李廷燮)·서명순(徐命純)은 일찍이 별천(別薦)에 들어서 낭관을 겪었는데 서명순은 자품(姿稟)이 고상하고, 이정섭은 재식(才識)이 탁월합니다. 그리고 정희하(鄭羲河)는 고 상신 정호(鄭澔)의 아들로서 문학과 조행이 또한 속류(俗流)가 아니라고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세 사람들은 전조로 하여금 적당한 고을에 빈자리가 나는 대로 차례로 제수한다면 실효가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사직서 직장 이수이(李壽頤)는 고전(古典)에 해박하고 재주가 있으며, 저술한 《존주록(尊周錄)》은 비록 그의 스승 고 자의(諮議) 이태수(李泰壽)가 처음 지었으나, 이수이가 스승의 뒤를 이어 그 서적을 완성하였으니, 세도(世道)에 큰 도움이 있습니다. 청컨대, 특별히 조용(調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6품에 승진시켜 조용하도록 허락하였다.
간원(諫院) 【정언 홍익삼(洪益三)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병사 어유기(魚有琦)는 지난번 북교(北郊)에서 몸소 기우제를 지내시던 날에 창기(娼妓)를 데리고 풍악을 울렸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먼저 파직하고 뒤에 나문(拿問)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살인(殺人)하여 작처(酌處)한 죄인 김윤국(金潤國)은 연한을 정하지 말고 도로 배소(配所)에 보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사체(事體)를 얻었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과시(科試) 때에 과장(科場) 밖에서 제술한 사람 이세춘(李世瑃)·박내장(朴來章)은 모두 도로 충군(充軍)하고 사령(赦令)을 만나더라도 용서하지 말게 하소서. 정원(定員) 밖의 유생(儒生)을 데리고 과장에 들어간 황처규(黃處奎) 또한 전례에 의하여 충군하고 그 자신에 한정하여 부거(赴擧)를 허락하지 말게 하소서. 그리고 무과(武科)의 시관으로 사정(私情)을 쓴 사람 이희원(李禧遠)·성석신(成碩臣) 등은 모두 도로 충군하고 사령(赦令)을 만나더라도 용서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비록 사체(事體)는 얻었으나, 여러 차례 대사령(大赦令)을 겪었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맹휴(李孟休)는 역적 이잠(李潛)의 조카로서 공의(公議)에 버림받았는데, 전조에서 조금도 유난(留難)하지 않고 곧바로 병조 낭관에 의망(擬望)하여 이 무리를 부식(扶植)하였으니, 진실로 세도(世道)에 관계됩니다. 청컨대, 해조 당상을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와 이슬이 내릴 때에도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는데, 왕자(王者)가 사람을 임용함에 있어 어찌 그 사람에게 구애받겠는가? 수년 전에 이잠을 치죄한 것은 대개 제방(堤防)을 엄중히 하기 위한 것으로 악역(惡逆)에 관계된 것이 아니었으니, 비록 그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구애됨이 없을 것인데 더구나 그 조카이겠는가? 그 대책문(對策文)에 식견(識見)이 있어 바야흐로 시험삼아 임용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어찌 경조(京兆)의 낭관으로 늙게 할 수 있겠는가? 병조 낭관에 의망한 것이 오히려 늦었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대훈(大訓)에 훈유(訓諭)한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간직하고 있는 마음은 저 하늘에 질정할 수가 있다. 진달한 바는 지나치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5월 28일 경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한림 권점(翰林圈點)에 든 사람들을 불러 시험하였는데, 충(忠)과 질(質)과 문(文)으로 친히 책문(策問)하여 오언유(吳彦儒)·정원순(鄭元淳) 두 사람을 뽑았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배표(拜表)하는 일로 어제 겨우 도성에 들어왔으나, 본직(本職)에서 기필코 체차되려는 뜻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만약 편안하게 한때 행역(行役)하는 분의를 빙자하여 이를 인연하여 영진(榮進)할 계제로 삼는다면, 사람으로서 염의(廉義)가 없음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도성에 들어왔는데 어찌 다시 지나치게 인혐(引嫌)하는가? 모름지기 은근한 나의 뜻을 본받아 마음을 편안히 가져 사직하지 말고 함께 나랏일을 보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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