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8권, 영조 19년 1743년 6월

싸라리리 2025. 9. 26.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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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임자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3일 갑인

금성(金星)과 목성(木星)이 서로 범하였다.

 

사옹원 첨정 김치겸(金致謙)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에 오성운(吳星運)이 그 할아비 오시수(吳始壽)를 위해 원통함을 하소연하였습니다. 대저 오시수의 옥사(獄事)는 곧 ‘신강(臣强)’의 설(說)이었는데, 그 언근(言根)은 장효례(張孝禮)이고, 이를 전파(傳播)한 자는 여러 역관(譯官)들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장효례는, ‘내가 말하지 않았다.’하였고, 여러 역관들은 ‘우리는 전파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감사와 병사에게 이를 물어 보았더니, 또한 ‘우리는 들은 일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널리 반문(盤問)하였으나, 마침내 모두 증험할 바가 없었습니다. 오시수의 말 또한 여러 차례 바뀌고 갈수록 더욱 군색해졌으므로, 비록 그의 혈당(血黨)인 김덕원(金德遠) 같은 자도 또한 감히 죄가 없다고 하지 못하고 똑같은 목소리로 토죄(討罪)하기를 청하니, 마침내 부생(傅生)을 의논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두루 세 조정을 거쳐 60년이 지난 뒤에 방자하게 원통함을 하소연하였으니, 이미 지극히 무엄한 일입니다. 또 신의 생부(生父) 고 집의 김창흡(金昌翕)의 사서(私書) 가운데에 있는 말을 들추어내어 그 할아비는 용서할 만한 단서가 있는 것처럼 만들었고, 신의 조부 고 상신 김수항(金壽恒)이 옥사를 안핵(按覈)한 것을 법을 남용하여 죄에 얽어 넣은 것으로 돌렸으니, 그 현혹시키고 은밀히 떠보려는 버릇은 공교하게 꾸미려 하다가 도리어 졸렬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하물며 그 끌어댄 바 신의 아비의 서찰 가운데에, ‘선인(先人)이 경중(輕重)을 참작하고 억울함을 심리(審理)한 것이 많았다.’고 한 말에서 신의 조부가 불쌍히 여기며 기뻐하지 않은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옥사의 전말과 신의 조부가 불상히 여기며 기뻐하지 않은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옥사의 전말과 신의 조부가 안핵한 사실은 신의 조부의 신유년166)   차자(箚子)와 신의 백부(伯父) 김창집(金昌集)의 갑술년167)   소장에 모두 실려 있으니, 원하건대, 아울러 가져다 보시고 조금이나마 살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진달한 바를 보고 그 일을 분명히 알았다. 외람된 공사(供辭)에 대해 어찌 족히 변명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지평 이창유(李昌儒)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백관(百官)의 게으름이 날로 갈수록 더욱 심하여 국좌(鞫坐)의 탈품(頉稟)168)  을 예사로 여기고,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여러 번 늦추어 밤을 범하였고, 총재(冢宰)169)  의 중임과 탁지(度支)170)  의 직무(職務)를 비워둔 지 여러 달이 되었으며, 백성을 침학하는 버릇과 사치를 숭상하는 풍속을 규금(糾禁)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정품(政稟)과 패계(牌啓)에 이르서는 오랫동안 답을 내리지 않았으니, 분발하시는 뜻이 아마도 처음만 못한 듯합니다."
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장령        홍득후(洪得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훈련원 도정 유광신(尹光莘)은 일찍이 북곤(北閫)으로 있었을 때에 상중(喪中)에 있는 그 지방의 사인 형제를 잡아들여 가쇄(枷鎖)를 씌워 관아(官衙)에 두고 그 곁에서 기악(妓樂)을 크게 연주하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평소에 예절을 안다고 하니 이 풍악을 들어 보라.’고 하였다고 하므로, 진신(搢紳)들이 이 말을 전하여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화(敎化)를 손상시키고 풍속을 무너뜨렸으니 관직을 삭탈함이 마땅합니다. 전 전라 병사        신만(申漫)은 남곤(南閫)으로 있었을 때부터 사람들의 말이 낭자하였는데, 체직(遞職)되어 돌아오기에 이르러서는 1백 필(疋)에 가까운 짐바리[卜駄]가 앞뒤에 뻗친 실상을 길을 가던 자들이 목도(目睹)하였으니, 사적(仕籍)에서 삭제하여 염의(廉義) 없는 자들이 경계삼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광신에 관한 일은 혹시 지나친 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풍교(風敎)에 관계된 일이니, 그대로 얼버무려 넘길 수는 없다. 신만에 관한 일은 뜬소문을 어찌 모두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일이 탐장(貪贓)에 관계되니, 어찌 사적(仕籍)에서 삭제하는 데에 그치겠는가? 아울러 해부로 하여금 나처(拿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종묘 악장(宗廟樂章)은 추향 대제(秋享大祭)를 기다려 이정(釐正)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일이 전례(典禮)에 관련되니, 좌상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구성(九成)171)                  의 뜻이 없으니 산삭(刪削)해도 가(可)하고 첨가(添加)해도 가하겠지만, 전부터 쓰던 것을 이제 갑자기 고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경(詩經)》 송(頌)의 악장(樂章)에도 또한 자구(字句)가 많거나 적은 곳이 있으니, 이제 만약 그 2장(章)에서 한데 모아 합하여 1장을 만든다면 9장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10장 가운데에서 1장을 뽑아내고 9장으로 만들더라도 무방할 듯합니다. 대저 선조(宣祖)의 공덕이 지극히 성대하다 하더라도 그 악장(樂章)을 혹시라도 다른 세실(世室)에 쓴 것은 매우 의의(意義)가 없으니, 혹시 그 1장을 뽑아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대답도 또한 이와 같았다. 우윤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태종실(太宗室)의 현미장(顯美章)과 원경 왕후실(元敬王后室)의 정명장(貞明章)은 악장이 비록 다르나 뜻은 같으니, 모두 감란(戡亂)의 공훈을 찬양한 것입니다. 무릇 주송(周頌)의 옹편(雝篇)은 곧 무왕(武王)이 문왕(文王)에게 드리는 시(詩)인데, 문왕과 태사(太姒)를 아울러 1장에서 송덕(頌德)했으니, 신의 생각에는 이 뜻을 본받아 현미장과 정명장을 합하여 1장을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용광(龍光) 1장은 곧 태종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명나라에 조현(朝見)한 일을 찬양하여 기술한 것이니, 용광으로 머리를 삼고 현미장과 정명장을 합하여 1장을 만든다면 선후가 도치(倒置)될 염려가 없겠는가?"
하자, 사간        김상적(金尙迪)이 말하기를,
"선묘조(宣廟朝)의 악장(樂章)을 빼자는 의논이 옳은 듯합니다. 이미 이정하고자 했다면 빼는 것이 옳을 것이고, 만약 미안하다고 생각하면 빼는 것이나 합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널리 순문(詢問)하여 조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이정하고자 하는 것은 중난(重難)하고 신중(愼重)하게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그 후 빈대(賓對)에서 또 종묘 악장(宗廟樂章)의 일을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물었는데, 송인명이 말하기를,
"중광장(重光章)을 빼는 것은 일이 매우 난편(難便)합니다. 만약 현미장과 정명장 2장을 합하여 1장을 만들어 구성(九成)의 숫자를 갖춘다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제6장, 제8장을 합주(合奏)하여 현미정명 1장이라 일컫고 《악원의궤(樂院儀軌)》에 싣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조현명이 아뢰기를,
"인신(人臣)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탄핵받은 자가 앞뒤로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정실(鄭宲)이 논한 두 조항(條項) 같은 것은 없었으니, 하나는 ‘요순(堯舜)의 전수(傳授)가 광명 정대하지 못했다.’는 것이요, 하나는 ‘군부(君父)를 협지(脅持)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말한 ‘왕위(王位)의 전수가 광명 정대하지 못했다.’는 것은 신이 지난해에 ‘이천기(李天紀)·김용택(金龍澤)의 무리가 요망한 말을 지어내어 빛나고 밝게 전수한 체통에 누를 끼쳤다.’고 한 말을 지적한 것인데, 이는 또한 대훈(大訓)에도 소상히 게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두 절미(去頭截尾)하고 한 구절(句節)만을 제기하여 신이 망령되게 전수한 대사(大事)를 훼방한 것처럼 하였으니, 그 뜻이 어찌 음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협지’ 두 글자에 이르러서는 인신으로서 차마 듣지 못할 말입니다. 설령 신이 과연 참으로 권간(權奸)으로서 임금을 위협하고자 하더라도 전하의 명성(明聖)으로 어찌 신의 협박을 바겠습니까? 작년에 크게 유시한 비망기(備忘記) 중에 협지의 하교가 있었으나, 이는 대개 범연히 논평한 것이요, 신을 지적한 것이 아니었는데, 정실의 무리들이 이로써 구실을 삼아 신의 죄안(罪案)을 만들었으니, 천 년 후에도 협지했다는 지목을 신이 어떻게 변명하겠니까?"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힘써 사직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어찌 그 임금을 협박하겠으며, 내가 비록 연약하나 또한 어찌 경에게 협박을 받겠는가? 광명 정대하게 전수한 체통에 누를 끼쳤다는 것은 이천기와 김용택에게 죄준 바이니, 이것이 어찌 경의 죄가 되겠는가? 경은 혐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조현명이 심양(瀋陽)에 가는 사행(使行)의 일로서 방물(方物)을 품정(稟定)하고, 이어 관서(關西)의 은자(銀子) 8천 냥을 가지고 가서 뜻밖의 수요(需要)에 대비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청나라 황제가 수천 리를 순행하는데, 그 사이의 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 행차가 심양에 당도하지 않고 중도에서 노정(路程)을 바꾼다면, 사명(使命)을 전달할 곳이 없어져서 돌아오거나 뒤좇아가거나 모두 난처한 데에 관계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해년172)  의 예에 의하여 그 행차를 뒤좇아가서 사명을 전달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경조 당상 김성응(金聖應)·원경하(元景夏)에게 말하기를,
"인조(仁祖)께서 잠저(潛邸)에 계셨을 때의 호적(戶籍)을 이미 본궁(本宮)에 봉안 했으니, 효종(孝宗)께서 잠저에 계셨을 때의 호적 또한 경조에서 상고해 내어 함께 봉안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 김상적(金尙迪)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검열 이의중(李毅中)이 아뢰기를,
"전에 《황명정사(皇明正史)》 가운데 열조 본기(列朝本紀)와 조선(朝鮮)이 첨부된 권(卷) 5, 6책(冊)을 함께 본관에 내렸었는데, 그 후 유신의 진달로 인하여 사신이 무역해 온 것도 있다 하니, 호조로 하여금 그 값을 지급하게 하고 원책자(原冊子)를 사국(史局)에 비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6월 5일 병진

함경도 명천(明川)에 비와 눈이 내리며 스산한 바람이 3일 동안 밤낮없이 거세게 불었으며, 역질(疫疾)이 한결같이 치성하였다. 무산(茂山)·삼수(三水)·갑산(甲山) 등지에 서리와 눈이 내리고, 크기가 계란만한 우박이 쏟아져 민가(民家)가 많이 무너졌다고 도신이 계문(啓聞)하였다.

 

6월 6일 정사

영두성(營頭星)이 동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길이가 1장 남짓 하였다. 모양은 병(甁)과 같고, 빛은 횃불과 같고, 그 운행하는 것이 지연(紙鳶)과 같았는데, 불불하는 소리가 있었다.

 

6월 9일 경신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을 불러 말하기를,
"성변(星變)이 매우 두렵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 꼬리가 매우 큰데 흐르는 속도는 느렸습니다. 신이 일관(日官)에게 물어 보았더니, 진지(晋地)의 분야(分野)에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피차(彼此)의 분야를 논할 것이 있겠는가? 오직 힘쓰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다. 교리 윤광의(尹光毅)가 말하기를,
"속담에 주전(鑄錢)하는 해에는 으레 한재가 많다고 하는데, 쇠[金]와 불이 용사(用事)하니, 그 이치가 혹 그럴듯 합니다. 2, 3개월 늦추어 주전한다면 온갖 방도를 다하지 않음이 없는 뜻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에서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6월 10일 신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새로 강도(江都)로부터 봉심(奉審)하고 돌아왔는데, 임금이 강도의 형편을 물으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고 상신 김석주(金錫胄)는 참으로 국가에 공로가 있었습니다. 돈대(墩臺)를 쌓은 후에는 다시 적선(賊船)이 정박할 염려가 없으니, 이곳은 진실로 하늘이 만든 제일의 관방(關防)입니다."
하고, 이어 산천의 형세를 조목별로 열거하여 진달하였다. 또 말하기를,
"벽돌로 성을 쌓은 것은 지금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효묘조(孝廟朝) 때에도 일찍이 경영하였으나, 미처 시행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대저 선조(先朝) 때부터 이내 축성(築城)에 많이 이용하여 위급한 변란(變亂)이 있을 때에 의뢰할 곳으로 삼았습니다. 유수 김시혁(金始㷜)이 이미 10리의 축성을 마쳤는데, 또 벽돌로 쌓는 것이 석축(石築)에 견주어 쉽고 공역도 수월하니, 아직 수축하지 못한 곳은 삼군문(三軍門)에 분속시켜 완축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인하여 송인명으로 하여금 처음부터 끝가지 구관하게 하였다. 송인명이 또 강화에서 순절한 세 충신의 자손을 녹용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또한 허락하였다. 지평 임집(任)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장흥 부사(長興府使) 남익엽(南益燁)이 진휼(賑恤)을 설행한다고 핑계대고 부민(富民)에게 혹형(酷刑)을 가하여 진자(賑資)를 독징(督徵)한다고 전하느 말이 낭자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11일 임술

형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수인(囚人) 이존경(李存敬)의 아비가 그의 계집종이 피살된 일을 가지고 정장(呈狀)하였으므로, 바야흐로 추핵(推覈)하고 있는데, 이미 한 아들로 하여금 본조에 정장하여 신에게 침욕(侵辱)을 가하였고, 또 그 아들 이존경으로 하여금 격고(擊鼓)하게 하고는 신의 먼 친족을 끌어대어 이르기를, ‘그의 말을 들어 좌지우지한 바가 있다’고 하는 등 반드시 신을 쫓아내어 안핵(按覈)할 수 없게 하고야 말려고 하니, 마땅히 징계를 가하여 나라의 기강을 보존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등대하여 품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부응교 유광의(尹光毅)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다스리기를 구하는 마음은 비록 간절하시지만, 그 요령과 대도(大道)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뜻을 세움이 견고하지 못하고 규모 또한 크지 못합니다. 따라서 사람을 임용함에 있어서 항상 서로 대립하는 졸렬한 방법에 구애받고 있으며, 묘당의 신하들도 지극히 공정한 도리로 성명(聖明)의 다스림을 돕지 못하여 간혹 사사로운 청탁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로(言路)의 폐색(閉塞)에 이르러서는 요즘보다 심한 적이 없었으니, 전하께서 비록 국가의 대계(大計)를 듣고자 하시지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또 서북은 도성(都城)과 거리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본래 왕화(王化)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니, 무마(撫摩)하고 위안(慰安)하는 도리가 기보(畿輔)와 더욱 다름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문관과 무관 가운데 등용할 만한 인재가 또 어찌 없겠습니까마는, 하나도 수습하지 않으시니, 신의 생각에는 서전(西銓)과 도신(道臣)·수신(帥臣)에게 각별히 신칙하여 무릇 내직과 외직의 빈자리와 고을의 무임(武任) 자리를 재능에 따라 가려서 임용함으로써 위로하여 기쁘게 하는 방도를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평안도 삭주(朔州)에는 한재가 심하고, 은산(殷山) 등 세 고을에는 충재(蟲災)가 있고, 철산(鐵山)에는 해일(海溢)이 있었으며, 이산(理山) 등 15 고을에는 박재(雹災)가 있었는데, 도신이 계문(啓聞)하였다.

 

6월 12일 계해

임금이 가뭄을 민망히 여겨 장차 우사단(雩祀壇)에 몸소 기도하려고 하는데, 먼저 스스로 인책하는 뜻으로 친히 윤음(綸音)을 써서 내리고 경조(京兆)로 하여금 미리 청도(淸道)173)  하도록 하였다.

 

6월 13일 갑자

헌납 박준(朴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의 급선무는 진휼(賑恤)의 대책을 미리 강구하는 것만한 것이 없는데, 그 요령은 오직 절용(節用)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무릇 어용(御用)의 복식과 여러 가지 하사하는 물건을 절약하는 데에 힘쓰시고, 안으로 여러 궁방(宮房)으로부터 밖으로 경대부에 이르기까지 일체 사치의 풍습을 제거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개성부 경력 위창조(魏昌祖)는 집이 북관(北關)174)  에 있는데, 그 권속(眷屬)을 데리고 오는데 인부와 말값이 1천 냥에 이르도록 많았다 하니, 외람된 경비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사람됨이 용렬하고 비루하여 부임하는 날 으레 공궤하는 다담상(茶啖床)을 돈으로 대신 받았다고 합니다. 신의 생각에 위창조는 특별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유수 조명교(曺命敎)는 이를 금지하지 못했으니, 또한 추고(推考)하여 경책(警責)함이 마땅할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권면한 일은 마땅히 힘쓰겠으나, 과연 진달한 바와 같다면 해괴한 데에 관계되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치하도록 할 것이며, 추고하는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장차 우사단(雩祀壇)에 나아가려 하는데, 약원의 여러 신하들이 날씨가 덥다 하여 몸소 기도하기로 한 명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백관과 군사들이 더위를 무릅쓰고 호가(扈駕)하는 것은 또한 염려스럽다. 내가 무신년175)   변란 이후 밤에도 옷을 벗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가뭄 끝에 비가 내리면 기뻐하였고, 여러 날 장마가 지면 근심하였으니, 한 번 비가 오고 한 번 개는 것 또한 모두 마음에 걸렸었다. 비록 군사와 백성을 위해 우선 정지했으나, 마음속으로 일찍이 근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니, 연신(筵臣)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이 하교는 위로 하늘을 감동시킬 것입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인빈(仁嬪)176)                  의 사우(祠宇)를 일찍이 송현(松峴)의 본궁(本宮)에 옮겨 봉안(奉安)했다가, 또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의 집에 옮겨 의창군(義昌君)·낙선군(樂善君)과 한 사당에 함께 봉안하였었는데, 이는 사체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니, 따로 봉안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예조 판서        정석오(鄭錫五)로 하여금 증(增)의 집에 가서 묻도록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정석오가 아뢰기를,
"다섯 감실(龕室)을 함께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인빈의 사우를 한 감실에 함께 봉안하는 것은 사체가 미안하니, 별묘(別廟)에 봉안함이 마땅하다. 여천군이 또 곧 대수가 다하게 되었으니, 별묘를 세운 뒤에 그 후일의 대책은 어떻게 해야 마땅하겠는가?"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봉사(奉祀)하는 자는 한결같이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규례에 의하여 도정(都正)을 세습(世襲)하도록 하는 것이 또한 한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하교하기를,
"묘우(廟宇)는 체통이 중한 것인데, 더구나 사체(事體)가 더욱 중대한 것이겠는가? 비록 봉사하더라도 두 왕자(王子)와 한 감실(龕室)에 함께 봉안하는 것은 크게 사면(事面)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인빈의 사우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가을을 기다려 별도로 세우고, 비록 친진(親盡)177)                  한 뒤에라도 봉사하는 자는 마땅히 관직을 세습(世襲)하게 하여 고 도정 이홍일(李弘逸)의 예에 따라 곧바로 돈녕부 정(敦寧府正)에 제수할 것이며, 만약 승자(陞資)한 자가 있으면 도정(都正)이나 동지돈녕부사 이상의 자리에 승수(陞授)하도록 하라."
하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이것은 백세토록 바꾸지 못할 제도이니, 일후에 벗어나지 말도록 함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이제 이 하교는 깊이 참작하여 헤아린 바가 있어서 오늘날 정식(定式)하였으니, 후세에서 본받도록 하라. 아! 나의 사왕(嗣王)은 이 하교를 준수하여 조금도 벗어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소결(疏決)을 행하였는데, 송익휘(宋翼輝)의 문안(文案)에 이르러서는 그대로 두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광의(李匡誼)는 송익휘의 근본이 되는데, 이광의는 출륙(出陸)시켰으나 송익휘는 아직 감등(減等)하지 않았으니, 법리(法理)로 논한다면 아마도 공정하지 못한 듯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의는 무심(無心)한 데에서 나왔지만, 송익휘는 무심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에 대하여 제방(堤防)을 엄중히 하였으니, 변개(變改)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니, 동지의금부사 홍경보(洪景輔)가 말하기를,
"송익휘의 일은 지친(至親)인 대신을 끌어댔으니, 그 정상이 통분스럽지만, 정리(情理)와 법도(法度)를 참작한다면 용서할 만한 점도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형조 판서 정유량(鄭羽良)에게 묻자, 정우량이 말하기를,
"법리로 논한다면 이광의에 견주어 약간 가벼우니, 참작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부응교 윤광의(尹光毅), 정언 홍익삼(洪益三)의 대답 또한 여러 신하의 의견과 같으니, 임금이 비로소 위리 안치(圍籬安置)에서 풀어주어 강진현(康津縣)에 출륙하라고 명하였다.

 

6월 14일 을축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5일 병인

비가 내렸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단비가 흡족하고 아침에 바로 개었으니, 백성을 위해 비록 다행스럽기는 하나, 어찌 비를 얻었다고 하여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는가? 상하(上下)가 더욱 마땅히 힘써 천심에 우러러 보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임집(任)이 상소하여 언로(言路)를 열어 놓을 것과 군덕(君德)에 힘쓸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권면한 일은 마땅히 힘쓰겠다."
하였다.

 

6월 16일 정묘

판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가 강교(江郊)로부터 들어와 입시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위유(慰諭)한 다음 머물러 있으면서 동궁(東宮)을 보도하도록 명하였다. 유척기가 모친의 병 때문에 사직하고 돌아가 봉양하기를 굳이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유척기가 임금의 뜻을 거스려 상신의 직책을 사면하고 강교에 물러가 있은 지 거의 4년이 되었는데,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여러 차례 돈면(敦勉)을 가하니, 이에 이르러 비로서 명을 받들었다.

 

6월 20일 신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동지돈녕부사 이형종(李亨宗)을 명소(命召)하고, 대원군(大院君) 사우(祠宇)에 방제(傍題)178)  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물으니, 이형종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수를 썼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별묘(別廟)에 봉안하였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대원군을 창빈(昌嬪)179)  과 함께 별묘에 봉안하고, 인하여 기제사(忌祭祀)를 행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대원군의 예에 의하여 인빈(仁嬪)의 별묘를 다시 세우고, 두 왕자의 사우도 또한 사체가 중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영건(營建)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넉넉히 도와주도록 하라. 이제 원경하(元景夏)의 말을 듣건대, ‘오원(吳瑗)의 집에도 사우가 없어서 공주의 신주를 정침(正寢)에 봉안했다.’고 하니, 공주의 사우를 세울 때에도 또한 해조로 하여금 그 경비를 도와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행검(行檢)이 바르지 못하고 성의가 천박하여 아래로 대료(大僚)에게 푸대접을 받아 오직 잡아놓고 부리는 일만 하였고, 위로 성청(聖廳)에 신임받지 못하여 전후에 실정을 하소연함이 모두 겉치레로 돌아갔으니, 도목정(都目政)180)  이 기한을 넘긴 것도 신의 죄가 아님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며칠 후 대신 김재로(金在魯)와 송인명(宋寅明)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리기를,
"민응수는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어겨 나라의 체통을 손상시켰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이조 참판 이익정(李益炡)도 또한 당한 바가 있는데다 평상시에 소명을 어기었으니, 아울러 체차(遞差)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21일 임신

권적(權𥛚)·이중협(李重協)·한사득(韓師得)·이보욱(李普昱)·조명리(趙明履)·이명곤(李命坤)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정식(定式)한 것은 체모가 더욱 존엄하니, 전배(展拜)함이 마땅하다. 내일 인빈(仁嬪)의 사우에 전배하고, 회가(回鴐)한 후에 내시와 예관을 보내어 인빈과 왕자의 사우에 치제(致祭)하고, 임양군(臨陽君)에게도 치제하겠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덕종실(德宗室)의 축문(祝文)에 국왕(國王) 신(臣)이라고 쓴 것은 대개 칭호를 어렵게 여긴 때문이었다. 후일 경묘실(景廟室)에 대하여도 원량(元良)의 후손(後孫)의 경우 인종실(仁宗室)의 예에 의하여 효증질손(孝曾姪孫)이라고 칭호함이 마땅할 듯하며, 왕후실(王后室)에는 덕종실과 같이 함이 마땅할 듯하다."
하고, 주서에게 명하여 향실(香室)에 가서 인종 왕후(仁宗王后)와 명종 왕후(明宗王后) 양실(兩室)의 축문을 상고하도록 하였다. 주서가 돌아와 아뢰기를,
"인종 왕후실에는 ‘조비(祖妣)’ 두 글자가 있고, 명종 왕후실에는 ‘조비’ 두 글자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6월 22일 계유

임금이 인빈(仁嬪)의 사우에 거둥하였다. 해조에 명하여 대원군 사우의 예에 따라 수리하도록 하고, 임양군(臨陽君) 부인에게 식물(食物)을 내렸으며, 안흥군(安興君) 숙(埱)과 해은군(海恩君) 당(爣)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숙빈(淑嬪)의 사우에도 두루 전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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