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신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東朝)의 진연(進宴)을 가을로 기약하였는데, 가을철이 이미 이르렀으니 미리 품정(稟定)함이 마땅합니다. 자성(慈聖)께서는 모후(母后)로 계신 지 이미 수십 년이 되었고, 전하께서는 성수(聖壽)가 오순(五旬)이 되었으니, 금년을 어찌 그대로 넘길 수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을 돌이켜 생각하건대, ‘진연(進宴)’ 두 글자를 내가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연사(年事)가 풍년이 들 희망도 없는데, 감히 지나친 거조(擧措)를 하겠는가?"
하니, 김재로 등이 굳이 간청하고, 또 양로례(養老禮)를 먼저 행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은 차례가 있는데 양로(養老)라고 이름한다면 이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것이니, 만약 행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동조(東朝)께 진연(進宴)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행할 때가 아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힘써 간청하였느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또 하교하기를,
"어버이를 위하는 마음은 위 아래에 차이가 없다. 지금 기사(耆社)의 신하들은 옛날 선왕조 때에 시종(侍從)하던 사람들이 많으니, 내 마음에 감회가 새롭다. 전 참판 정수기(鄭壽期)와 이성룡(李聖龍)은 특별히 한 자급(資級)을 가하도록 하라."
하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전 참판 이하원(李夏源)은 나이가 바야흐로 80세인데, 품행이 단아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있으니, 일체로 가자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재로가 또 전 참의 유복명(柳復明)은 오랫동안 같은 벼슬에 적체되어 있었다 하여 품질(品秩)을 올려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차출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묘당의 추천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이조 참판에 제수했는데, 현재 전장(銓長)이 없었기 때문이다.
7월 2일 임오
어떤 별이 남두성(南斗星) 아래로 흘러갔다.
정우량(鄭羽良)을 이조 판서로, 정석오(鄭錫五)를 좌참찬으로, 조관빈(趙觀彬)을 우참찬으로, 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부제학으로, 조동정(趙東鼎)을 공홍도 수사로 삼고, 예조 참의 유건기(兪健基)를 특별히 발탁하여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7월 3일 계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7월 4일 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어떤 별이 왕량성(王良星) 아래로 흘러갔다.
임금이 장악원 낭관 박민수(朴民秀)·이해빈(李海賓)을 불러 보고 악장(樂章)을 이정(釐正)하는 일을 하문하니, 박민수가 말하기를,
"전악(典樂)에게 물어 보았더니, ‘절주(節奏)가 약간 늦어서 초헌례(初獻禮)를 마치고도 오히려 한 박자가 남는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박민수를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영성(靈城)은 곧 그대의 아우인데 내가 그 얼굴을 보고자 하니, 그대는 돌아가거든 그대의 아우에게 이 말을 전하여 곧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이때에 박문수(朴文秀)가 교외에 있었으므로, 임금의 하교가 이에 미쳤던 것이었다.
7월 5일 을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상신의 직임에서 해면시켜 주기를 원하고, 겸하여 양역 사정안(良役査正案)을 올렸는데, 양역 실총(良役實摠)이라고 이름하고 교서관으로 하여금 인쇄하여 여러 도에 반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지돈녕부사 박문수가 도성에 들어와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불러 보았다. 이에 박문수가 전번의 일을 끌어대어 그 억울한 정상을 낱낱이 변명하였는데, 말이 매우 지루하고 번거로왔다.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서울에 있으면서 직분을 보살피라고 명하였다. 인하여 영남 구관 당상(嶺南句管堂上)으로 차출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세 대신과 각도의 구관 당상을 불러 보고, 양정 실역(良丁實役)이란 책자를 내 보이면서 하교하기를,
"금번에 이정(釐正)한 것이 실효가 있었는가?"
하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이 책자를 이미 간행하라고 명하셨는데, 그 사정(査定)한 바는 액수(額數)를 정한 것이 아니고, 또한 액수를 균평하게 한 것도 아니며, 각 고을의 군사와 백성의 많고 적은 데에 따라 대략 액수를 옮겨 놓은 데 지나지 않을 뿐이니, 백성은 적고 군사가 많은 고을에는 반드시 실효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혹 고을은 큰데 군병이 적거나 혹은 고을은 적은데 군병이 많은 곳에는 사정(査定)하는 당상과 낭청으로 하여금 잔폐(殘廢)한 고을로서 군액(軍額)이 가장 많은 곳에 묘당에 의논하여 각기 1, 2백 명을 한정하여 다른 도와 고을의 백성은 많으나 군사가 적은 곳에 옮겨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월 6일 병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어떤 별이 하고성(河鼓星)아래로 흘러갔다.
조관빈(趙觀彬)을 예조 판서로, 박문수(朴文秀)를 형조 판서로, 이익정(李益炡)을 한성부 우윤으로, 윤급(尹汲)을 예조 참의로, 정우량(鄭羽良)을 동지성균관사로, 이덕중(李德重)을 공홍도 관찰사로, 장계군(長溪君) 병(棅)을 동지 사은 정사(冬至謝恩正使)로, 유복명(柳復明)을 부사로, 유우기(兪宇基)를 서장관으로 삼았다.
심양 문안사(瀋陽問安使) 우의정 조현명(趙顯命)과 서장관 김상적(金尙迪)이 하직 인사를 올리니, 임금이 불로 보고 선온(宣醞)181) 을 내린 다음 떠나 보냈다.
이조 정랑 한익모(韓翼謨)와 박춘보(朴春普)가 서로 미루고 입직하지 않았으므로, 이날 생기(省記)182) 를 궐하였는데, 임금이 여러 차례 하교하여 재촉하자 궁문을 닫기에 이르러서야 한익모가 비로소 문틈으로 생기를 올렸으며, 박춘보는 병을 핑계대고 끝내 오지 않았다.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제가 비록 명관(名官)이라 하나, 한낱 해당 낭관일 뿐인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는가?"
하고, 드디어 박춘보를 서수라 권관(西水羅權管)으로 삼아 길을 갑절로 하여 부임하게 하였는데 후에 대신의 구해(救解)로 인하여 명을 고쳐서 문천군(文川郡)에 투비(投畀)183) 하게 하였다. 임금이 전랑(銓郞)을 옥당(玉堂)과 돌아가며 차출하는 자리로 삼았었는데, 매양 교만하고 방자한 습관이 있으므로, 다시 일찍이 시종을 거친 자로서 의망(擬望)하여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또 한림 권점(翰林圈點)에 든 자를 소시(召試)할 때는 인원수에 구애하지 말고 비록 한 사람이라도 권점하는 데 따라 소시를 행하게 하고, 인하여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7월 7일 정해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7월 9일 기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이기진(李箕鎭)을 우참찬으로, 정수기(鄭壽期)를 지돈녕부사로, 이주진(李周鎭)을 예조 참판으로, 이태중(李台重)을 헌납으로, 민광우(閔光遇)를 정언으로, 민백행(閔百行)을 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에 청나라 황제가 북방을 순행하고 있었는데, 와전된 말들이 많이 일고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을 입시하라고 명한 것은 자강(自强)의 대책을 강구하려는 것이다."
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편안할 때에 위급함을 잊지 않는 것은 곧 오래도록 평안을 누리려는 까닭이니, 특별히 수신(帥臣)을 정선(精選)하여 변방의 경비를 엄중히 신칙하는 것이 국방(國防)을 견고하게 하는 방책입니다."
하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나라가 잘 다스려지면 외적(外賊)은 염려할 것이 못되나,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소장지변(蕭牆之變)184) 도 또한 걱정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명(明)나라는 이자성(李自成)의 변란으로 마침내 멸망하기에 이르렀는데, 만약 양연(楊連)185) 과 같은 어진이가 조정에 있었다면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한(漢)나라 조정에 급암(汲黯)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회남(淮南)이 감히 배반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인물(人物)이 있는 효험이다."
하였다. 좌윤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폐사군(廢四郡)은 땅이 넓고 비옥한데, 비워서 버려 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고 상신 남구만(南九萬)이 고을을 다시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실행되지 않았고, 고 상신 조문명(趙文命) 또한 다시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범월(犯越)이 자주 일어남을 염려하여 지금까지 전지(田地)를 묵히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렵다."
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시혁(金始㷜)이 벽돌로 성을 쌓는 것이 편의함을 진달하고, 강도의 형편을 손으로 지적해 진달하니, 임금이 삼군문(三軍門)으로 하여금 나누어 쌓도록 명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 유수(留守)는 나라 일에 유의하였으므로 능히 이처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춘방(春坊)에 있었을 때부터 내가 이미 그 사람됨을 알고 있었다."
하였다.
7월 10일 경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7월 11일 신묘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2일 임진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3일 계사
임금이 태묘(太廟)에 가을의 전알(展謁)을 행하였다. 금군 별장(禁軍別將) 및 육번장(六番將)의 입은 갑옷이 간혹 쇠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여 병조 판서에게 명하여 금군 별장 이의풍(李義豐)에게 곤형을 베풀어 다스리게 하였다.
간원 【정언 민광우(閔光遇)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동가(動駕)할 때 기병(騎兵)이 탄 말이 혹은 발을 절거나 혹은 수척하였는데, 구차하게 숫자만 채웠으니, 청컨대, 훈국의 우별장(右別將)을 태거(汰去)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4일 갑오
오광운(吳光運)을 대사헌으로, 임정(王珽)을 이조 참의로, 한익모(韓翼謨)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2품 이상의 관원을 이끌고 청대(請對)하자, 임금이 불러 보았다. 여러 신하들이 성수(聖壽)가 50이라 하여 진연(進宴)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5일 을미
대신이 경재(卿宰)를 이끌고 다시 구대(求對)하였는데, 또 장차 진연을 청하기 위함이었다. 임금이 불러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이어 하교하기를,
"이런 일로도 군신(君臣) 사이에 오히려 서로 믿지 않는단 말인가? 끝내 정지함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7월 16일 병신
태백성이 낮게 나타났다.
간원 【정언 민광우(閔光遇)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평안 병사 정찬술(鄭纘逑)은 북곤(北閫)을 꺼려하여 피하고는 기필코 체개(遞改)되고야 말았는데, 평안 감사를 제수하자 염치를 무릅쓰고 장차 부임하려 하니, 후박(厚薄)을 가리는 마음 씀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또한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7일 정유
대신과 비국 당상이 또 빈청(賓廳)에 와서 모여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불러 보았다. 여러 신하들이 진연(進宴)을 극력 청하였으나, 임금이 또 윤허하지 않았다. 물러가기에 미쳐 하교하기를,
"‘마음속에 맹세했다. [矢于心]’는 글자를 가지고 보더라도 내 마음에 정한 바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전에 대신들의 뜻을 보건대, 동조(東朝)께 상달한 일이 있는 듯하였는데, 비록 사가(私家)의 일로 말하더라도 그 부모에게 권유하여 그 아들의 일을 이루는 것이 도리에 있어 옳겠는가? 이러한 뜻으로 대신에게 전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빈청(賓廳)에서 성교(聖敎)를 받들지 않고, 대왕 대비전에 아뢰기를,
"자성께서 모후(母后)로 계신 지 이미 42년이 되었고, 성상의 보령이 오순(五旬)이 되었으니, 종사(宗社)에 있어서는 예사롭지 않은 경사이고, 자성의 마음에 있어서는 더 없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청컨대, 잔치를 베풀어 헌수(獻壽)함으로써 정례(情禮)를 펴게 하소서."
하자, 대왕 대비전에서 언문(諺文)으로 답하기를,
"주상(主上)의 춘추(春秋)가 오순이 되었으니, 내 마음이 기쁘다. 주상께서 옛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처창(悽愴)한 감회가 새로울 것인데, 나 또한 어찌 주상과 다르겠는가? 그러나 경 등의 청은 또한 신하된 도리에 있어 당연한 일이다. 내가 먼저 허락한 후에야 경 등이 마음을 펼 수 있을 것이므로, 이미 이러한 뜻을 주상에게 상세히 말했다."
하였다. 이날 밤에 임금이 빈청에서 아뢴 여러 신하들을 다시 인견하고 하유(下諭)하기를,
"자전께서 애써 타이르셨으니, 기쁘기 그지 없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사람의 아들된 자가 세월(歲月) 가는 것을 애석(愛惜)하게 여기는 것은 위래에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자전의 성수(聖壽)가 육순(六旬)에 가까워졌으니, 세초(歲初)에 몸소 하례(賀禮)하겠다는 미의(微意)가 있었으나 아직 개진(開陳)하여 마음을 돌리시게 하지 못하였다. 이제 자성께서 인자하신 마음으로 나의 나이 오순이 됨을 기뻐하셔서 군정(群情)을 받아들여 애써 따르시고, 심지어 ‘어찌 지나치게 고집하는가?’라고 나 소자(小子)에게 유시하셨다. 내가 고집하는 것이 어찌 한때 겸양(謙讓)하는 뜻이겠으며, 또한 어찌 대신과 경재의 마음을 몸받지 못하여 그러하였겠는가? 옛날 선왕께 헌수한 일이 완연히 어제와 같은데, 그 차마 하지 못하는 바는 바로 중유(仲由)186) 가 어버이를 추모(追慕)하던 그 마음인 것이다. 그런데 자성께서 평소 겸양하시던 마음으로 나를 위해 그 청을 윤허하셨으니, 어찌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그 전당(殿堂)에 앉아서 그 예절을 거행하는 것은 이 마음에 끝내 억제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 이는 비록 절목 사이의 일이지마는 이미 대신에게 유시하여 큰 탁자에 진수 성찬(珍羞盛饌)을 차리는 것은 이미 감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시경(詩經)》녹명장(鹿鳴章)187) 의 뜻을 본받은 데에 지나지 않으니, 옛날 신하들을 모아 군신(君臣)의 정의를 펼 뿐이다. ‘어연(御宴)’이라고 이름하여 나의 뜻을 보이려 하니 영화당(映花堂)에서 설행하고, 자전의 연회는 통명전(通明殿)에서 설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선정신 김굉필(金宏弼)·이언적(李彦迪)과 충신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하도록 명하였으니, 경상 감사 김상성(金尙星)의 장청(狀請)을 따른
것이었다.
정언 민광우(閔光遇)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함경도 도사 이하연(李夏演)은 남쪽 고을에서 논박받고 북막(北幕)에 무릅쓰고 부임하여 염우에 관계되는 바가 있으니,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배천 군수(白川郡守) 김방(金坊)은 늙어서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니, 그 직임을 개차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경성 안에서 음사(淫祀)를 설행함은 본래 금령이 있었는데, 근래에 듣건대, 흥인문(興仁門) 안에 모옥(茅屋)을 한 칸 세우고 온종일 모여서 낭자하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이런 요망한 물건을 궁성 가까운 곳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해부(該部)로 하여금 서둘러 훼철(毁撤)하고 당초에 영건(營建)한 사람을 적발하여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에 의하여 모두 시행하게 하겠다."
하였다.
장령 유건(柳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고부 군수(古阜郡守) 이동명(李東明)은 아주 무식한 자인데, 성품이 또 탐오하여 백성을 침학하는 정사를 낱낱이 들기가 어려우니, 삭파(削罷)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황해도 도사 조정구(趙鼎耉)는 용렬하고 비루하여 거조가 전도되었으니, 개정(改正)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검전(檢田)이 박두하였으니, 각도의 도사 가운데 시종을 거치지 않은 자는 한결같이 개차하게 하소서. 황해도 병사 이희하(李希夏)는 상관을 잘 섬겨서 발신(拔身)하여 물의가 떠들썩했으니, 또한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자는 아울러 시행하게 하겠다. 이희하에 관한 일은 지나친 데 관계된다."
하였다.
7월 18일 무술
민응수(閔應洙)를 수어사로 삼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진연(進宴) 때 선상 기녀(選上妓女)를 마땅히 52명을 써야 하는데, 이번 진연 때에는 수를 감하여 폐단을 줄이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기미년188) 에 진연하였을 때의 전례에 의하여 45명을 각도에 나누어 정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액수가 오히려 많으니, 그 가운데에서 또 10명을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자전의 마음에 우러러 보답하고 군정(群情)에 애써 따라서 어연(御宴)이라고 이름했으니, 심중(深重)한 뜻이 있었던 것이다. 무릇 여러 의절을 어찌 차마 옛날에 진연한 예(禮)를 모방하겠는가? 무릇 진연에는 으레 9작(九爵)을 행하는 것인데, 먼저 2작에는 치사(致詞)의 예절이 있으나, 이번의 연회는 자전의 뜻을 본받아 군신이 잔치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니, 그 치사하는 2작은 제거하고 오직 7작만 행할 것이며, 세자와 정부의 작헌(爵獻)은 그 가운데에 들어 있으니, 재신은 5원(員)만 수점(受點)하도록 하라. 갑오년189) 이후로 외연(外宴) 때에는 먼저 악장(樂章)을 창(唱)하는 전례가 있었는데, 이번의 거조에서는 번거로운 형식을 제거하였으니, 이 또한 그만두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갑오년 내연(內宴) 때부터 존숭 악장(尊崇樂章)을 선창하는 전례가 있었는데, 이번 자전께 진연할 때에는 경신년190) 에 이정(釐正)한 두 악장을 겸하여 선창하도록 하라. 악범(樂範) 가운데 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은 곧 국조(國朝)의 창업(創業)한 일이고, 하황은(荷皇恩)은 곧 황은에 대하여 감사하는 말인데, 하황은 1장을 자전께 진연할 때 마땅히 연주해야 할 것이니, 그것을 미리 익히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0일 경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존호 악장(尊號樂章)을 어연(御宴)에 쓰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겸양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0일 경자
동지 정사(冬至正使) 장계군(長溪君) 병(棅)이 어버이가 늙었다 하여 사면하고 가지 않는다고 대신이 말하니, 임금이 체차(遞差)하도록 허락하고, 능창군(綾昌君) 숙(埱)으로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1일 신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홍상한(洪象漢)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진연 도감 당상(進宴都監堂上)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이번의 어연은 자성의 뜻을 받들어 즐기고, 남은 기쁨으로 인하여 여러 신하들과 잔치하려는 것이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풍성하게 할 뜻이 있겠는가? 더구나 경인년191) 에 견주어 차등(差等)을 두어야 하니, 다만 오미(五味)만 행하되, 제1작(第一爵)·제2작은 세자와 의정이 행하고, 술잔을 올릴 재신도 한결같이 저번의 하교에 의하여 5원(員)만 수점(受點)하도록 하라. 내연(內宴)·외연(外宴)의 찬품(饌品)의 미수(味數)는 도감·주원(廚院)으로 하여금 써서 들여 품재하도록 하라. 그리고 내연·외연의 과반(果盤)의 그릇 수도 또한 전에 견주어 줄여서 내가 자전의 뜻을 본받아 감히 지나간 해에 견주지 못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행과(行果)는 대왕 대비전에 13기(器)이고, 대전(大殿) 이하는 8기이며, 미수(味數)는 대왕 대비전에 7미(味) 7기이고, 대전 이하는 5미 5기이다. 어연(御宴) 때에는 대전 및 세자궁(世子宮)의 행과는 8기이고, 미수는 대전이 5미 5기이고, 세자궁도 같다. 내선상(內宣床)은 10상(床)에 5미 3기요, 어떤 때의 선상(宣床)은 그 인원수에 따라 5미 3기이다.】 잔치에 참여할 여러 신하들은 시임·원임의 대신과 의빈(儀賓) 이외에 종신(宗臣)은 도정(都正) 이상이며, 문신은 기사(耆社)의 여러 관원과 육조 당상, 대사성·대사헌·대사간·승지·부제학 및 그날 〈입직할〉 한림·주서(注書)이다. 음관(蔭官)은 2품으로 바야흐로 실직(實職)에 있는 자와 일찍이 실직 총관(摠管)을 겪은 자와 그 이름이 충훈분(忠勳府)에 실려 있는 자이다. 무신은 장신(將臣)과 시임 총관(時任摠管)이다. 양도 유수와 부임하지 않은 도신과 그날 시위(侍衛) 및 시임 시종(侍從)·춘방(春坊)은 모두 연회에 참석하게 하였다.
진연 도감(進宴都監)에서 쌀 1천 곡(斛)을 전례에 의하여 진연의 용도에 충당할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2백 곡을 감하도록 명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진연과 상치(相値)되었으니, 청컨대, 정시 초시(庭試初試) 및 전시(殿試)를 늦추어 설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7월 22일 임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우박이 내렸다. 밤에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였다.
7월 23일 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원에서 근일의 성변(星變)과 박재(雹災)로 진계(陳戒)하니, 비답하기를,
"두려워하는 뜻으로 이미 상신에게 개유(開諭)하였는데, 더욱 힘쓰겠다."
하였다.
교리 민백행(閔百行) 또한 차자를 올려 진계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정원에 하유(下諭)하였는데, 더욱 힘쓰도록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장악원 제조 윤득화(尹得和)를 불러 보고 어연(御宴)에 아악(雅樂)과 일무(佾舞)를 사용할 것을 의논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모든 일은 예문(禮文)을 준용(遵用)하여 이름과 실상이 서로 알맞은 후에야 후세에 보일 수가 있다. 더구나 외정(外庭)에서 기악(妓樂)을 정지하게 한 것은 국조(國朝) 중엽 이후에 처음 시행하는 성대한 일이며, 또한 《회례연의(會禮宴儀)》도 준용했는데 이번에는 그 번거로운 형식을 줄이려는 것이다. 《악학궤범(樂學軌範)》을 가져다 보았더니, 연회(宴會) 때 아악(雅樂)과 속악(俗樂)을 겸하여 썼으며, 대저 향연(饗燕)에 현주(玄酒)192) 를 썼는데, 어찌 그 맛을 취하였겠는가? 그 옛날을 돌이켜 생각한 것이다. 기악(妓樂)을 정지하고 무동(舞童)을 쓰게 하였으니, 마땅히 옛 제도를 회복하여 한편으로는 계술(繼述)의 뜻을 보이고 한편으로는 담담(淡淡)한 뜻을 보이는 것이다. 의문(儀文)을 상고해 보건대, 9작(九爵) 가운데 5작은 아악을 연주하고 4작은 속악을 연주하였는데, 이번에는 다만 5작을 행하게 하고 이 뜻을 본받아 3작은 아악을 쓰고 2작은 속악을 쓰게 하였으니, 또한 내가 태강(太康)193) 을 경계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7월 24일 갑진
예조 판서 조관빈(趙觀彬)이 《내연의궤(內宴儀軌)》를 이정(釐正)하는 일을 상교(上敎)로 인하여 영상에게 찾아가 의논하고 청대하여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내(大內)에 관한 일은 경 등도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
하고, 의주(儀註)가 옛날과 지금의 다른 것과 마땅한 것에 대해 친히 점을 찍어 첨삭(添削)하도록 명하였다
7월 25일 을사
원평수(原平守) 이섭(李燮)·밀춘수(密春守) 이준(李焌)·밀안수(密安守) 이제(李悌)에게 모두 특별히 도정(都正)을 제수하여 연회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정언 남혜로(南惠老)가 상소하여 대략 면계(勉戒)의 뜻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옳다. 마땅히 면려(勉勵)하겠다."
하였다.
대사헌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의 진연(進宴)은 진실로 우리 전하의 천성(天性)에서 타고나신 효행(孝行)과 애일(愛日)의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하늘에서 비상(非常)한 견책을 내려 백성의 고통이 눈앞에 가득하니, 임금이 하늘을 섬기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성상께서 기쁜 마음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정성과 하늘을 두려워하여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아울러 행하여 서로 어긋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로(耆老)에게 은혜를 베풀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또한 태평한 시대의 성전(盛典)이지만, 경중(輕重)의 구별이 있으니, 이 재앙을 만난 때를 당하여 이것이 어찌 그만둘 수 있는데도 그만두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생각건대, 내일의 녹명연(鹿鳴宴)을 특별히 정지하도록 명하신다면 성덕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아! 우리 영고(寧考)께서는 풍재(風災)로 인해 진연을 파하고 연수(宴需)를 진휼에 보충하게 하셨었으니, 어찌 오늘날 마땅히 계술(繼述)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나의 이 거조가 어찌 마음에 즐겨서 하는 것이겠는가? 위로 자전의 마음을 받드는 것인미, 내가 만약 〈진연을〉받지 않는다면 애일(愛日)의 정성을 펼 도리가 없다. 이에 비록 억지로 거행하기는 하나 두려운 마음이 가슴속에 갑절이나 더하니, 나의 마음을 아는 자는 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연석에 불러들여 특별히 가장(嘉奬)하였는데, 이미 가장하고 그 일을 그만둔다면 어찌 나의 마음이라 하겠는가? 다만 이날을 아끼는 정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더욱 겸연(歉然)함을 깨닫게 되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오광운(吳光運)을 특별히 불러들이고, 동궁에게 명하여 시좌(侍坐)하게 한 다음 임금이 오광운에게 수서(手書)를 내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경의 정직함을 가상히 여기고 경의 충성을 표창하여 표리(表裏)194) 10필을 내리니, 경은 영수(領受)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세자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국가의 흥망(興亡)은 정직한 자를 포장(褒奬)하고 충성된 자를 표창(表彰)하는 데에 달려 있으니, 나라에 정직한 신하가 있으면 흥성하고 나라에 정직한 신하가 없으면 멸망하는 것이다. 오늘 내가 너를 시좌하게 하고 오광운을 불러들여 특별히 표리를 하사한 것은 너로 하여금 내가 정직한 신하를 장려(奬勵)하는 뜻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이어 사관에게 명하여 연설(筵說) 1통을 써서 춘방(春坊)에 보내어 세자로 하여금 살펴보는 자료로 삼게 하였다. 인하여 어연(御宴)의 이름을 양로연(養老宴)이라고 고치려고 하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어연을 정지해도 자전의 마음이 편안하다면 정지하는 것이 옳고, 어연을 정지하여 자전의 마음이 불안하다면 정지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오늘의 사세(事勢)는 성상께서 반드시 진연(進宴)을 받은 후에야 자전께서는 진연을 받을 것이니, 진연하기로 결정한 후부터 전하께서 세세한 절목 사이의 일도 불안해 하시니, 신의 생각에는 전하의 병통이 바로 이런 데에 있다고 여깁니다. 지금 연사(年事)가 흉년이 들었는데, 비록 풍성(豐盛)한 잔치를 거행하더라도 매양 절손하는 마음을 두어 신 등과 더불어 백성의 고통을 강구하여 나랏일을 상확(商確)한다면, 비록 진연을 거행하더라도 또한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버이를 위해 연회를 베풀면서 그 아들이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아들된 도리에 있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나는 경에 대해 개연하게 여긴다. 지금 세상에서는 명예(名譽)를 좋아하는 폐단이 많은데, 경의 이 말도 또한 명예를 좋아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어연을 정지하고자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순문(詢問)하고, 또 오광운에게 묻자, 오광운이 황공해 하며 대답하기를,
"성상께서 진연을 받지 않는다면 자전께서도 또한 진연을 받지 않을 것이니, 어연을 어떻게 정지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만약 이와 같은 줄 미리 알았다면 어찌 감히 진소(陳疏)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오광운이 이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오광운이 글을 잘하는데다가 언변과 지혜가 있어서 앞뒤로 상소하여 여러 차례 임금의 비위를 맞추니, 임금이 매양 공명 정직하다고 포장(褒奬)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상소하기에 미쳐서는 임금이 들어주기도 어렵고 또 꾸짖기도 어려워서 특별히 불러들여 포유(褒諭)하고, 지연의 정지 여부를 묻기에 이르러 오광운의 대답이 소장의 말과 상반(相反)되어 도리어 겸손한 태도를 지었으므로,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다."
【태백산사고본】 43책 58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09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註 194] 표리(表裏) : 옷의 안감과 겉감.
사신은 말한다. "오광운이 글을 잘하는데다가 언변과 지혜가 있어서 앞뒤로 상소하여 여러 차례 임금의 비위를 맞추니, 임금이 매양 공명 정직하다고 포장(褒奬)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상소하기에 미쳐서는 임금이 들어주기도 어렵고 또 꾸짖기도 어려워서 특별히 불러들여 포유(褒諭)하고, 지연의 정지 여부를 묻기에 이르러 오광운의 대답이 소장의 말과 상반(相反)되어 도리어 겸손한 태도를 지었으므로,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다."
7월 26일 병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정언 남혜로(南惠老)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저번에 평안 병사를 파직하라고 논박한 계사를 경솔하게 정계(停啓)하였으니, 사간 허욱(許沃)을 파직하소서. 형조 참판 이세진(李世璡)은 어리석어 착란(錯亂)한 일이 많아서 백성들의 원망이 늘어나고 있으니, 청컨대, 체차하소서. 죽산 부사(竹山府使) 심영(沈坽)은 정령(政令)이 해이(懈弛)하여 도둑이 횡행(橫行)하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7일 정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 【장령 이징하(李徵夏)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무산 부사(茂山府使) 전일상(田日祥)은 사람됨이 거칠고 패려한데다가 성품이 혹독하여 형장(刑杖)을 지나치게 쓰며 탐학을 자행(恣行)하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게 하소서. 북부 도사(北部都事) 유언민(兪彦民)은 일찍이 의영고(義盈庫)의 관원으로 있었을 때 공인(貢人)을 혹독히 부려서 낭자하게 원망을 샀는데, 이 직임을 맡기에 이르러 그 버릇이 점점 자라나 방민(坊民)들이 입은 폐단이 매우 많았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또한 윤허하지 않았다.
신치운(申致雲)을 승지로 삼았다.
밤에 임금이 진연청 당상(進宴廳堂上)을 불러들여 어연(御宴)을 양로연(瀁老宴)으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잇따라 환수(還收)하기를 힘써 청하고, 승지도 작환(繳還)하였으나 임금이 굳게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았는데, 새벽 종이 울릴 때까지 오히려 힘써 간쟁(諫諍)하니, 임금이 비로서 따랐다.
7월 28일 무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검열 오언유(吳彦儒)·정원순(鄭元淳)이 연명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엊그제 연중(筵中)에서 연교(筵敎)를 기록하여 춘방에 보내라는 명이 있었으나, 사관(史官)의 규례에 어긋나므로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참조하라고 했을 뿐이다. 어찌 사관으로 하여금 주서(注書)의 일을 행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이조 참판 원경하(元景夏)가 진소(陳疏)하여 사직하고, 끝에 면계(勉戒)하는 말을 덧붙이니, 비답하기를,
"전달한 바는 마땅히 면려(勉勵)하겠다."
하였다.
보덕 이광운(李光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기운이 생겼으니, 바로 책을 펴고 강학(講學)할 때입니다. 청컨대 빨리 지시(指示)를 내려 서연(書筵)을 열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바야흐로 하교하고자 하였는데, 그 진달한 말이 옳다. 전례에 의하여 개강(開講)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군덕(君德)을 면려(勉勵)하는 방도를 간략히 진달하였다. 이어 묘당과 전관을 신칙하여 공도(公道)를 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7월 29일 기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예조 판서 조관빈(趙觀彬)과 장악원 제조 윤득화(尹得和)를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하황은(荷皇恩)의 옛 사장(詞章)이 오늘날에 와서는 적합하지 않아서 내가 이제 새로 3장을 지었으니, 내연(內宴) 때에 쓰도록 하라."
하였다. 어제(御製)의 하황은의 사서(詞序)에 이르기를,
"국조(國朝)를 개창(開創)하고 황상(皇上)에게 조선(朝鮮)의 명호(命號)를 받았고, 중엽(中葉)에 이르러서는 다시 우리 황상에게 은혜를 입었으므로, 새로 사장(詞章)을 지어서 황은(皇恩)을 길이 전하노라."
하였다. 제1장에 이르기를,
"조선의 명호를 받아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였도다. 9장(章)이 찬란하게 빛나니, 팔음(八音)195) 이 장장(鏘鏘)하도다. 대대로 이어가며 동방(東方)에 길이 황은을 전하노라."
하고, 제2장에 이르기를,
"번방(藩邦)을 재조(再造)하였으니, 크게 황은을 받았도다. 높이 우러러 조현(朝見)하고자, 멀리 오색(五色) 구름을 향하여 절하였나이다. 새로 사장을 지으니, 속편(續編)이 문조(文藻)에 응하도다."
하였으며, 제3장에 이르기를,
"광명한 빛이 거듭 연면(連綿)하여 억만 년에 이르리로다. 성덕(聖德)을 돌이켜 사모하며, 빛난 선왕(先王)의 업적(業績)을 계술하리로다. 경건히 가송(歌誦)을 지어 전례(典禮)의 자리에 배헌(拜獻)하나이다."
하였다.
7월 30일 경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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