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신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2일 임자
어떤 별이 남두성(南斗星) 아래로 흘러갔다.
유건기(兪健基)를 도승지로, 조병빈(趙炳彬)을 정언으로 삼았다.
8월 3일 계축
왕세자빈(王世子嬪)의 간택 봉단(揀擇捧單)이 지체된 때문에 하교하여 준절히 책망하고, 경조의 당상·낭청을 중추(重推)하고 오부(五部)의 관원은 태거(汰去)하게 하였다. 그리고 봉단(捧單) 가운데 부조(父祖)에 현관(顯官)이 없는 자는 빼도록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판윤 김성응(金聖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간택 단자(揀擇單子)는 각 해부(該部)의 관원이 며칠 전에 이미 거두어 본부에 바쳤습니다. 그런데 참군(參軍) 권숭(權崇)·서희수(徐喜修) 두 집안은 간선에 적합하지 못하다 하여 발거 하고자 하므로, 신이 이 때문에 오가며 서로 논란하였으나, 권숭이 끝내 듣지 않고 그 두 단자를 가져가고는 내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해조의 초기(草記)가 지체되었던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진달한 바를 보건대, 참작함이 마땅하다. 오부의 관원을 서용하여 잉임(仍任)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집의 채응복(蔡膺福)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강도(江都)에 성을 쌓는 한 가지 일은 크게 이해(利害)에 관계되는데, 셀 수 없는 경비를 소모하고 궁핍한 백성을 부려서 헐기 어려운 토성(土城)을 철거(撤去)하고, 깨뜨리기 쉬운 벽돌로 쌓는다는 것을 신은 진실로 그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찬술(鄭纘逑)은 쇠뇌를 쏘는 자 가운데 명망을 쌓아온 사람이니, 대소의 곤임(閫任)에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작년에 북곤(北閫)에서 개체(改遞)된 것 또한 대신이 진달한 데에서 나온 것으로서, 실제로 병이 있었던 것이지 애초에 그가 싫어하여 회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초에 발계(發啓)한 것이 물의(物議)에 맞지 않았으므로, 정계(停啓)한 대각(臺閣)은 참으로 체통을 얻은 것이었는데, 도리어 그 정계한 것을 허물하여 심지어 견파(譴罷) 하기를 청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씀이 너무 심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강도의 일에 대하여는 헤아린 바가 깊었는데, 천박한 소견으로 어찌 갑론 을박(甲論乙駁)할 것인가? 더구나 한낱 무신(武臣)을 위하여 억제하고 부식하기를 또 어찌 이처럼 근간하게 한단 말인가?"
하였다.
8월 4일 갑인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유복명(柳復明)을 공조 참판으로, 이정보(李鼎輔)를 병조 참의로, 홍중징(洪重徵)을 병조 참지로, 정휘량(鄭翬良)을 승지로, 김시찬(金時粲)을 수찬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공자(孔子)가 삼간 바는 곧 재계(齋戒)이었으니, 3일을 치재(致齋)함은 왕공(王公)으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도리이다. 그런데 정원에서는 재일(齋日)의 규례를 따르지 않고 한만한 장주(章奏)를 보통 전례에 따라 받아들이고 거짓 알지 못하는 체하였으니, 정원에 있는 여러 승지를 모두 중추(重推)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5일 을묘
임금이 사묘(私廟)에 나아가니, 왕세자가 거가(車駕)를 뒤따랐다.
8월 6일 병진
임금이 사묘(私廟)에 몸소 제사를 지내고 이어 돌아오는 길에 효장묘(孝章廟)에 들러 환궁(還宮)하였다.
8월 7일 정사
행 사직 구성임(具聖任)이 상소하여 도성을 지키는 계책을 진달하였는데, 그 조항이 무릇 16개항에 이르렀다. 비답하기를,
"이는 바로 나의 뜻과 같으니, 사민(士民)을 버리지 않는 것에 대해 어찌 경의 소장을 기다리겠는가? 다만 이것은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니니, 진달한 바 16조항은 조용히 상확(商確)하겠다."
하고, 원소(原疏)를 유중(留中)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의 종가(宗家)에서 봉사(奉祀)하는 일은 김후연(金後衍)의 둘째 아들로 계후(繼後)하기로 정하였으나, 양가(兩家)에서 주고받은 문서가 없어서 법례에 구애되는 입안(立案)을 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시비(是非)를 가리기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자성께서 오히려 하교하지 않으시니, 자성의 성덕을 이에서 또한 볼 수 있다."
하고, 이어 해조(該曹)에 명하여 특별히 입후(立後)를 허락하라고 하였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금번의 간택 단자를 한성부 참군 권숭(權崇)이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임의로 발거하여 말썽을 일으켰으니, 태거하는 데 그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고 상신 김우항(金宇杭)을 천장(遷葬)할 때 소용되는 물건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8월 8일 무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 【장령 이구령(李耉齡)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동부 도사(東部都事) 신세동(愼世東)은 당직(當直)을 궐하여 파직되었는데, 경조 당상이 장황한 말로 초기(草記)을 올려 방자하게 잉임시킬 것을 청하였으니, 이러한 사체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청컨대 경조의 해당 당상을 체차(遞差)하게 하소서. 그리고 한낱 무변(武弁)을 두둔하여 대각(臺閣)에 수치를 끼쳤으니, 청컨대, 집의 채응복(蔡膺福)을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채응복에 관한 일이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8월 9일 기미
지평 홍정보(洪正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번에 대사헌의 소장에 대해 비록 쾌히 윤허(允許)를 내리지는 않았으나, 간(諫)하는 자를 포상하고 강직한 자를 용납하는 뜻이 신료(臣僚)들을 용동(聳動)시켰습니다. 그날 대신이 진달할 절목(節目) 등의 일을 유사(有司)에게 맡기자는 말은 진계(陳戒)하는 뜻에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명예를 좋아하는 일이 있었기에 전하께서는 지나치게 의심과 노여움을 가하시어 사교(辭敎)가 박절하였으니, 성덕(聖德)에 누가 됨이 어떠하겠습니까? 엊그제 여러 승지를 추고하라는 비망기(備忘記)에 거짓 모른체했다고 하교하시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진실로 대성인(大聖人)의 사기(辭氣)에 큰 결흠(缺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선으로서 이러한 엄교(嚴敎)를 받았으면 배호(陪扈)한 뒤에 곧바로 인피(引避)해야 마땅한데, 마침내 소장을 올리는 일이 없으니, 이는 참으로 거짓 모른체한 것이라고 이를만 합니다. 신의 생각에 비망기 가운데 〈‘거짓 모른체했다[佯若不知]’는〉 글자를 즉시 도로 거두시고 여러 승지들을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첫 조건은 이미 영상에게 개유(開諭)하였으니, 어찌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비지(批旨) 가운데 네 글자는 그 진달한 바가 옳으니,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그러나 바야흐로 임금을 면려(勉勵)하면서 또다시 네 글자로 승선을 배척했으니, 스스로 몸을 닦고 임금을 면려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크게 그렇지 않은 바가 있다."
하였다.
경상도 유생 성헌주(成憲柱) 등 수백여 인이 상소하여 전 우참찬 이재(李縡)를 소환(召還)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르기를,
"이재의 학문은 몸소 행하여 마음으로 깨달아 참으로 알고 실지로 행동하였으므로, 의(義)와 인(仁)이 순수하고 도(道)와 덕(德)이 성취되었으니, 정주(程朱) 이후의 학자(學者)로서는 이를 당할 사람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전번에 원량(元良)을 위하여 바야흐로 돈소(敦召)하려 하였으니, 어찌 그대들의 간청함을 기다렸겠는가? 그런데 온 영남의 유생들이 소장을 올렸으니, 일이 너무 번거럽다. 물러가 학업을 익히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양정합(養正閤)에 나아갔다. 도정(都政)에 친림(親臨)하니, 왕세자도 시좌(侍坐)하였는데, 전조(前朝)의 왕씨(王氏) 자손을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다. 오수채(吳遂采)를 부제학으로, 오광운(吳光運)을 홍문관 제학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집의로, 이하종(李夏宗)을 헌납으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주관한 정사(政事)였다. 정사를 마치자, 여러 신하들에게 선온(宣醞)하고, 친히 칠언시(七言詩) 2구를 지었는데, 이르기를,
"몇해 동안 지닌 뜻 언제나 이루어질 것인가?"
오로지 원량이 장성하기를 기다려 나의 마음 이루리라."
하였다. 이어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해 올리도록 명하였다.
8월 10일 경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14일 갑자
유복명(柳復明)을 호조 참판으로, 정익하(鄭益河)를 대사간으로, 조명정(趙明鼎)을 지평으로, 황경원(黃景源)을 정언으로, 윤광의(尹光毅)를 사간으로, 이익정(李益炡)을 강화 유수로 삼았다.
8월 15일 을축
서리가 내리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봄·여름에 큰 가뭄이 있었는데, 또 이른 서리가 내려서 곡식을 죽였으므로, 연해(沿海) 지방이 가끔 적지(赤地)를 이루었다.
8월 16일 병인
서리가 내리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민응수(閔應洙)를 형조 판서로, 정석오(鄭錫五)를 판윤으로, 김시형(金始炯)을 판의금부사로, 이종성(李宗城)을 대사헌으로, 권영(權瑩)을 대사간으로, 이중경(李重庚)을 공조 참판으로, 권적(權𥛚)을 좌윤으로, 정준일(鄭俊一)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어찬선(魚贊善)이 내가 허물을 가린 채 나쁜 줄 알면서도 하고야 만다고 나를 위해 경계한 것을 내가 잊지 않았다. 오늘은 숭릉(崇陵)196) 의 기신(忌辰)의 재일(齋日)인데, 아주 잊어버리고 장차 평상복(平常服)으로 경 등을 보려고 하였다가, 깨닫고는 비로소 옷을 고쳐 입었다. 천하의 만 가지 일은 모두 마음에 따라 해나가는 것인데, 나의 정신이 이러하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숭릉의 기신은 명릉(明陵)197) 의 기신과 차이가 있는 듯하니, 3일 동안 재계하는 것은 아마도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지나친 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들된 자는 부모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야 하는 법인데 옛날을 추억해 생각하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강도(江都)에 축성(築城)하는 것과 도성을 지키는 데 대한 편의 여부를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여러 신하들의 대답이 약간 차이가 있었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을 잠시 이야기하여 결정할 수는 없으니, 오직 성상께서 조용한 가운데 헤아려 처결하시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7일 정묘
임금이 경기 감사 유엄(柳儼)을 소견(召見)하였다. 이때에 심양 문안사(瀋陽問安使)의 행차가 있었는데, 경외(京外)에서 어수선하여 뜬소문이 크게 떠도니, 임금이 몹시 근심하여 도성을 지키는 것과 강도(江都)에 들어가는 것의 편의 여부를 유엄에게 물었다. 이에 유엄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외적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자, 유엄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약소 국가입니다. 몽고(蒙古)가 공격해 오면 청인(淸人)의 경우와 같이 접대(接待)해야 하고, 비록 서달(西韃)이 공격해 온다 하더라도 또한 이와 같이 할 뿐입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아무 대답 없이 주서를 돌아다보며 이르기를,
"이런 말들은 모두 기록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우리 나라는 참으로 약소 국가이다. 그러나 유엄의 대답한 말은 어찌 이다지도 무례(無禮)하단 말인가? 식자(識者)로 하여금 한심하게 여길 만하니, 임금의 대답이 없었던 것도 마땅한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43책 58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11면
【분류】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사법-치안(治安) / 외교-야(野)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우리 나라는 참으로 약소 국가이다. 그러나 유엄의 대답한 말은 어찌 이다지도 무례(無禮)하단 말인가? 식자(識者)로 하여금 한심하게 여길 만하니, 임금의 대답이 없었던 것도 마땅한 일이다."
8월 18일 무진
조경(趙儆)을 평안도 병사로, 정수송(鄭壽松)을 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8월 19일 기사
임금이 하교하여 무신으로서 일찍이 병사와 수사를 지낸 자가 전립(氈笠)에 상모(象毛)를 제거하는 폐단과 공복(公服) 아래에 군복을 착용하지 않는 버릇을 신칙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옛날 감녕(甘寧)198) 이 머리에 거위 깃을 꽂으니, 휘하의 군졸 1백 기(騎)도 함께 꽂았었다. 지금 내삼청(內三廳)의 7번(番)이 깃을 다는 것 또한 이러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 장수가 된 자도 군졸과 함께 달아야 마땅한데, 다만 수기(手旗)를 빙자하고 있으니, 이는 무슨 뜻인가? 한결같이 달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0일 경오
임금이 정릉(貞陵)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이어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작헌례를 마치자, 본릉의 참봉 유성제(柳聖躋)를 불러 묻기를,
"혜신 옹주(惠愼翁主)의 묘(墓)는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유성제가 말하기를,
"저 홍살문[紅箭門] 안의 나무가 무성한 곳이 바로 묘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묘갈(墓碣)의 길이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유성제가 말하기를,
"그 길이는 외방 고을의 선정비(善政碑)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혜신 옹주는 어느 때 옹주인지 알지 못하는데 《선원보략(璿源譜略)》에도 이미 실려 있지 않으니, 봉릉(封陵)하였을 때의 의궤(儀軌)와 사가(私家)의 문자를 널리 상고하고, 앞으로 실록(實錄)을 포쇄(曝曬)할 때에 또한 사관으로 하여금 상고해 내도록 하라."
하였다. 회가(回駕)할 때에 사리평(沙里坪)에 이르자, 장대(將臺)에 나아가 열무(閱武)하였다. 부총관 윤광신(尹光莘)을 불러 하교하기를,
"평소에 너의 용력(勇力)을 알고 있었는데, 내가 한 번 시험하고자 한다. 네가 훈국의 진영(陳營) 안에 돌입하여 영전(令箭)199) 을 뽑아 오도록 하라."
하였다. 윤광신이 명을 받고 나가 훈국의 진영에 돌입하려고 하였는데, 훈국의 진영에서 굳게 막고 받아들이지 않고 마병(馬兵)과 별무사(別武士)가 좌우의 문 날개에서 공격(攻擊)하니, 윤광신이 거의 에워싸이게 되었다. 임금이 내승(內乘) 이장오(李章吾)를 불러 하교하기를,
"네가 가서 도와주도록 하라."
하니, 이장오가 명을 받들고 나아갔다. 조금 후에 윤광신이 영전 56개와 철타자(鐵打子) 1개를 빼앗아 가지고 오고, 이장오도 철타자 1개를 빼앗아 가지고 왔다. 임금이 여러 차례 칭찬하고 윤광신에게 태복마(太僕馬)를 상주고 이장오에게 표피(豹皮)를 내려 주었다. 또 군용(軍容)이 자못 정제되고 진법(陣法)이 문란하지 않았다 하여 훈련 대장과 어영 대장에게 각기 말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경기 감사와 각무 차사원(各務差使員)을 불러 보고, 서리가 내린 후에 곡식이 여물지 않은 상황을 하문(下問)하였다. 광주 부윤(廣州府尹) 서명형(徐命珩)이 본주 아래편에 있는 7면(面)은 부성(府城)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외창(外倉)을 설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 안에 곡식을 저축하는 데 힘쓰지 않고 도리어 따로 외창을 설치할 것을 청하니, 이는 한갓 도둑에게 양식을 갖다 주는 바탕이 될 뿐이다."
하고, 특별히 중차하도록 명하였다. 이날 관왕묘(關王廟)에 두루 임어하여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고, 이어 숙종(肅宗)이 관왕묘를 두고 지은 칠언 절구(七言絶句)를 차운(次韻)하고, 〈편액(扁額)에〉 새겨 걸도록 명하였으며, 남 관왕묘(南關王廟)에도 날을 가려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돌아와서 흥인문(興仁門)의 누각에 임어하여 성첩(城堞)을 두루 살펴보고 대신과 여러 재신들을 불러 축성(築城)에 대한 편의 여부를 물었다. 이때 도성을 중축하고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혹자는 ‘동성(東城)의 지형이 낮으니 치첨(雉堞)을 설치하고 여장(女牆)을 증축함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므로 임금이 친히 성첩에 올라가 살펴본 것이다. 임금이 교장(敎場)에서 관왕묘로 향할 즈음에 양사(兩司)의 대신(臺臣)들이 도중에서 청대(請對)하자, 임금이 말을 멈추고 불렀는데, 여러 대신들이 미처 추창(趨蹌)해 나가지 못하니 임금이 그 지체되는 데 노하여 모두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관왕묘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청대한 것은 반드시 나에게 성첩에 오를 것을 간(諫)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앞서의 명을 정지하였다. 또 광평 대군(廣平大君)의 사당에 치제하라고 명하였으니, 그 사당이 연로(輦路)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평은 곧 세종조(世宗朝)의 대군(大君)이다.
8월 22일 임신
달이 정성(井星)을 범하였다.
8월 23일 계유
서종급(徐宗伋)을 좌참찬으로, 정수기(鄭壽期)를 우참찬으로, 오광운(吳光運)을 동지춘추관사로, 이승원(李承源)을 동지의금부사로, 한광조(韓光肇)를 정언으로, 김종태(金宗台)를 사간으로, 유우기(兪宇基)를 헌납으로, 민우(閔堣)를 장령으로, 홍경보(洪鏡輔)를 지평으로 삼았다.
대사간 권영(權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간택 단자(揀擇單子)를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권숭(權崇)이 감히 시기를 틈타 간악한 계교를 부리려고 단자를 뽑아 가지고 돌아가 사단을 일으키는 데에 이르렀으니, 권숭의 이 일은 세도(世道)에 크게 관계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모두 알고 있는 세수(世讎) 때문에 한없이 해괴하고 패려한 말을 지어내어 곧바로 한 번의 거조로 백호(百戶)에 가까운 세족(世族)을 상해(傷害)하려 하였으니, 이러한 교묘하고 음참한 무리는 한번 구문(究問)하여 그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원한을 갚으려는 폐습(弊習)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재령 군수(載寧郡守) 유언휘(兪彦徽)는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문객으로서 한세량(韓世良)을 위해 소장을 썼는데, 얼마 전에 영남 고을에서 서도(西道)의 군수로 승천(陞遷)했습니다.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제방(堤防)을 엄중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권숭의 거조가 비록 해괴하였으나,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니, 진달한 바가 지나치다. 유언휘에 관한 일은 대훈(大訓)의 아래에서 어찌 이같이 할 수 있는가?"
하였다.
사간 윤광의(尹光毅), 헌납 이하종(李夏宗), 장령 이구령(孝耉齡), 지평 홍정보(洪正輔) 등이 상소하여 동성(東城)에서 전좌(殿座)했을 때 청대하였으나 구대(求對)를 허락하지 않고 경솔하게 언관(言官)을 체차한 일로써 면계(勉戒)를 대략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성첩(城堞)에 올라 두루 살펴본 것은 구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깊은 뜻이 있었다. 이러한 부유(腐儒)의 의논이 후일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더구나 이구령은 그날 입시한 신하로서 종일 묵묵히 있다가 동문에 이르러 갑자기 구대하였고, 도중에 말을 멈추었으나 또한 잠자코 있었으니, 이 무슨 거조인가? 그러고도 항장(抗章)했으니, 더욱 해괴하다."
하였다.
지평 조명정(趙明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거가(車駕)를 수종한 네 대신(臺臣)은 이미 체차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비록 성명(成命)을 즉시 환수하셨으나, 문득 이미 체차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감히 대각(臺閣)으로 자처하여 입을 열고 일을 논할 수가 없을 것인데, 서로 잇따라 진소(陳疏)하였으니, 염의가 손상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네 대신을 빨리 체개(遞改)함이 마땅할 줄로 여깁니다. 무시(武試) 이소(二所)의 시관 유준(柳濬)은 병이 깊고 혼모(昏耗)하여 거의 일을 보살피지 못하니, 또한 체개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에 앞서 강화 유수 김시혁(金始㷜)이 벽돌을 구워 10리까지 외성(外城)을 개축하였는데, 공역과 경비가 크게 절약되었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그 말을 받아들여 이미 삼군문(三軍門)으로 하여금 힘을 합하여 계속 쌓게 하였는데, 30리를 개축할 경비를 합계하면 쌀 3만 곡(斛)이 산출되었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그 일을 주관하여 군교(軍校)를 보내어 석회(石灰)를 구워 벽돌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이 분운하여 불가하다고 여겨 혹자는 말하기를, ‘도성을 지킬 수 있으니 강도에 전념할 필요가 없다.’ 하였고, 혹자는 말하기를, ‘지금 연사(年事)가 흉년이 들었으니 망령되게 큰 공역을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으며, 혹자는 말하기를, ‘강도의 옛날에 쌓은 토성(土城)이 원래 완전하고 좋은데, 이제 이를 허물고 벽돌을 쌓아 성을 만드는 것은 다만 외관만 아름다울 뿐이요, 실제로는 견고하지 않다.’고 하니, 임금이 의심하여 여러 신하들을 불러 그 편의 여부를 순문하였다. 송인명은 ‘〈변란이 있을 경우〉 반드시 강도로 돌아가야 하며 도성은 반드시 지킬 수가 없다.’ 하였고, 구성임(具聖任)은 ‘도성을 지킬 수 있으니 강도에 축성함은 양책이 아니다.’ 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명백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변란이 있을 경우 내가 어떻게 차마 나의 적자(赤子)를 버리고 가겠는가? 도성은 결단코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옛날 윤탁(尹鐸)200) 이 〈진양(晉陽)으로〉 보장(保障)의 땅을 삼았었으니, 보장이 될 곳은 미리 경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굴 거영(時屈擧贏)201) 은 옛사람이 기롱한 바이니, 강도에서의 삼군문(三軍門)이 축성(築城)하는 공역은 정지하도록 하라. 그리고 다시 비국으로 하여금 강화 유수에게 전곡(錢穀)을 획급하고 이수(里數)를 정하여 해마다 계속 쌓게 하되 1년에 10리를 쌓는 것으로 한정하고, 그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상소하여 상벌(賞罰)을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이 해마다 전곡을 획급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여기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전곡을 넉넉히 지급하지 않고 유수로 하여금 스스로 마련하여 성을 쌓도록 독책한다면, 백성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는 적은 경비를 아껴 백성의 원망을 사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정언 황경원(黃景源)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형조 참판 이세진(李世璡)을 체차하는 일과 죽산 부사(竹山府使) 심영(沈坽)을 파직하는 일은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화 유수는 책임이 지극히 중대하여 이 성을 쌓는 때를 당하여는 더욱 인재를 정선(精選)해야 합니다. 새로 제수된 강화 유수 이익정(李益炡)은 자급과 이력(履歷)이 넉넉지 않은 것은 아니나 보장(保障)의 직임은 실로 적임자가 아니니, 청컨대 개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방백(方伯)을 지냈으니, 묘당에서 천망(薦望)한 것이 또한 늦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논열(論列)한 것이 지나치다."
하였다.
8월 26일 병자
어떤 별이 삼성(參星) 아래로 흘러갔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강화 유수 이익정을 체차하도록 허락했는데, 대간(臺諫)의 탄핵을 만나 억지로 부임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전 유수 김시혁(金始㷜)을 잉임시키고, 인하여 축성의 공역을 감독하여 성과를 이루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고 판서 송진명(宋眞明)이 평안 감사로 있고 이일제(李日躋)가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있었을 때 강변과 영애(嶺阨)에 성보(城堡)와 관방(關防)을 설치하고 부근의 백성들로 어린 작대(魚鱗作隊)하는 일을 상의하여 제도를 정했었는데, 근래에 듣건대, 일체 포기하고 다시 거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본도로 하여금 신칙하여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경조 낭관(京兆郞官) 권숭(權崇)이 사사로운 원한으로 사람을 무함했으니, 뒷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됩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조사해서 처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8월 27일 정축
어떤 별이 우림성(羽林星) 아래로 흘러갔다.
8월 28일 무인
어떤 별이 구진성(鉤陳生) 아래로 흘러갔다.
서명빈(徐命彬)을 형조 참판으로, 이성룡(李聖龍)을 지돈녕부사로, 이위보(李渭輔)를 헌납으로, 남학종(南鶴宗)을 지평으로, 윤광찬(尹光纘)을 정언으로, 이광식(李光湜)을 집의로 삼았다.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의 대정 때 참봉에 부의(副擬)된 홍일환(洪日煥)은 곧 고 판서 홍우원(洪宇遠)의 후손인데, 자못 명망이 있다 하므로 신이 과연 의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비로소 듣건대, 홍우원이 을묘년202) 에 올린 한 소장은 죄가 지극히 중하다고 하니, 그 자손을 갑자기 의논하여 녹용할 수 없습니다. 영릉 참봉(英陵參奉) 이학중(李學中)은 바로 영남 사람으로 신은 고 참판 이원록(李元祿)의 손자로 알고 있었는데, 추후에 듣건대, 이원정(李元禎)의 후손이며 상중(喪中)에 있다고 합니다. 이는 경신년203) 이후에 폐족(廢族)이 되었으니 또한 천거에 넣을 수 없으며 더구나 상중에 있는 사람을 어리석게 비의(備擬)하여 낙점(落點)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홍일환에 있어서는 신이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의망하였고, 이학중의 경우는 신이 그 근본과 유파(流派)를 잘못 듣고 의망하였으니, 이에 대한 죄벌을 받음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잘못 알고 하였으니,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막중한 총재(冢宰)의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군(禁軍)의 장수가 거위 깃을 꽂는 일은 특교(特敎)를 받들어 발령(發令)하였고, 아울러 요대(腰帶)도 일체 대오(隊伍)의 방색(方色)204) 과 같이 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군제(軍制)를 이미 이정(釐正)한 것입니다. 금위영과 어영청의 보군(步軍)은 애당초 표의(標衣)가 없었는데 각부(各部)의 초관(哨官)은 표의가 있으니, 혹 창설한 후에 인순(因循)하여 고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까, 또는 특별히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까? 대개 표의와 수기(手旗)는 신분을 식별하기 위한 것이고, 행진(行陣)하는 사이에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또 표의만한 것이 없는데, 오직 이 표의가 없으므로, 장수는 군사를 알지 못하고 군사는 항오(行伍)를 알지 못하여 매양 교련할 때에 교사(敎師)들이 손으로 향군(鄕軍)을 이끌고 안배해 서서 진(陣)을 이루니, 참으로 해괴합니다. 금위영의 군사는 모두 1백 25초인데, 돌아가며 번을 교대하는 자가 5초입니다. 따라서 매월 그믐에 신번·구번 각 5초씩 합동하여 조련하는데, 어영청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보군 12초의 표의를 해영(該營)으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여 거둥할 때나 조련할 즈음에 나누어 착용함으로써 항오를 이루어 오방(五方)의 제도를 준거하는 것은 아마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바라건대, 모두 재처(裁處)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옳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좌윤 권적(權𥛚)이 상소하여 도성을 지킬 계책 27조항을 진달하였는데, 오활한 말이 많았다. 답하기를,
"구성임(具聖任)의 비답에 이미 유시하였다. 만약 소회(所懷)가 있으면 비국 당상(備局堂上)에게 면대하여 말함이 옳은데, 어찌 굳이 소장을 올릴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공흥·전라 양도의 유생 오동혁(吳東爀)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을 효종의 묘정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관의합(寬毅閤)에서 진연청(進宴廳)의 여러 당상을 불러 보았는데, 의장(儀仗)과 습의(習儀) 등의 절목을 품의하여 재결한 것이 많았다. 임금이 윤득화(尹得和)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 ‘관간어중 강의입지(寬簡御衆剛毅立志)’ 8자(字)를 써서 동궁에게 주었는데, 이 합(閤)을 또 관의(寬毅)라고 이름하였으니 경은 편액을 써서 올려 걸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9일 기묘
어떤 별이 필성(畢星) 아래로 흘러갔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 김종태(金宗台)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직산 현감(稷山縣監) 김백련(金百鍊)이 사조(辭朝)할 때 신에게 들르지 않았으므로, 과연 하리(下吏)를 잡아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백련이 말을 달려 곧장 시원(試院) 문 밖에 이르러 사모(紗帽)와 단령포(團領袍)를 벗어서 시원의 문 밖 사장(沙場)에 던져 놓고 갔으니, 그 거조가 몹시 패악합니다. 파직하는 벌을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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