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8권, 영조 19년 1743년 9월

싸라리리 2025. 9. 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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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경진

어떤 별이 삼기성(參旗星) 아래로 흘러갔다.

 

간원 【정언 윤광찬(尹光纘)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비변사는 곧 당(唐)나라의 평장사(平章事)요, 송(宋)나라의 추밀원(樞密院)인데, 근래에는 문득 돌아가면서 차출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비국 당상 권적(權𥛚)은 자급과 이력이 넉넉하나 간국(幹局)은 실로 장점으로 여길 바가 아니니, 청컨대 개차하소서. 근래에 기강이 허물어지고 조정의 반열이 문란해졌습니다. 저번 산릉에 거둥하셨을 때 경기 감영의 편비(褊裨)가 백관이 반열(班列)을 이룬 앞에서 방자하게 말을 타고 달렸으나, 압반 감찰(押班監察)이 태연히 금지하지 않았으며, 규찰하는 헌부에서도 심상하게 보아 넘겼으니, 청컨대 감찰을 나처(拿處)하고, 해당 대신(臺臣)을 파직하고, 감영의 편비는 유사(攸司)로 하여금 과치(科治)하게 하고, 도신은 추고하게 하소서. 전 병사 최명주(崔命柱)는 죄범이 지극히 중하여 폐고(廢錮)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성교(聖敎)에서도 서용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갑자기 군문(軍門)에 차출했으니, 물정(物情)이 해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청컨대 사적(仕籍)에서 영원히 삭제하고, 해당 장신(將臣)을 중추하게 하소서. 전 선공감 가감역 허지(許砥)는 기한이 아직 차지 않았는데 뒤섞여 의망하여 낙점을 받기에 이르렀으니, 비록 초기(草記)로 인하여 개차하기는 하였으나 살피지 못한 실수는 모면하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해당 전관을 추고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고, 감찰과 감영의 편비 및 추고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9월 2일 신사

헌부 【지평 조명정(趙明鼎)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일에 법강이 더욱 해이해지고 제방(堤防)이 크게 허물어져서 전조에서 주의할 즈음에 전혀 두려워하거나 삼가지 아니하여 이원정(李元禎)·홍우원(洪宇遠)의 손자와 같은 사람도 모두 재랑(齋郞)의 의망에 들게 되었습니다. 무릇 이원정과 홍우원 등의 죄범이 지극히 중하여 선조(先祖)의 처분이 엄절했음을 온 나라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자가 없고 동료들도 또한 이론(異論)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조금도 지난(持難)하지 않고 임의로 수록하였다가 청문(聽聞)이 크게 해괴하게 여기고 물의(物議)가 떠들썩하자, 비로소 소장을 올려 자수(自首)하여 마치 애당초 알지 못한 것처럼 하였습니다. 입조(立朝)한 지 수십 년이 되어 벼슬이 대총재(大冢宰)에 이르렀는데, 선후(先后)를 무함한 흉소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청컨대,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을 종중 추고하고 영릉 참봉 이학중(李學中)은 태거(汰去)하게 하소서. 전조의 상피(相避)하는 규례는 본시 바꿀 수 없는 법칙입니다. 지금의 이조 낭관이 비록 통색(通塞)에 참섭한 일은 없지만, 응당 피해야 할 혐의는 비록 해방 승지나 병조 낭관이라 하더라도 또한 모두 있는 것이니, 법례가 지극히 엄중하여 감히 어길 수 없는 것이며, 옥서(玉署)·춘방(春坊)은 비록 계청하여 아울러 의망하는 전계가 있었으나, 이는 일찍이 이미 통의(通擬)를 거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새로 통의하는 데 이르러서는 사체가 자별한데, 금번 설서에 새로 통의된 두 사람도 하나는 이조 낭관의 형이요 하나는 이조 낭관의 아우인데도 계청했다고 핑계대고 방자하게 통의하고는 조금도 꺼려하는 뜻이 없었으니, 자못 사사로움을 제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이조 당상은 모두 중추(重推)하고 해당 낭관은 파직하소서. 창성 부사(昌城府使) 노계정(盧啓禎)은 사조(四祖)를 허위로 기록하고 성명(姓名)을 바꾼 것만 해도 족히 그 평생의 단안(斷案)이 될 것입니다. 저번에 호곤(湖閫)에 제수된 것도 이미 외람된 일인데, 탐욕을 부려 법을 어긴 정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비국의 관문(關文)을 빙자하여 금산(禁山)의 소나무를 함부로 베었으며, 심지어 초빈(草殯)을 발굴하여 시체가 있는 관판(棺板)을 조사하고, 만약 낙인(烙印)이 없으며 도벌(盜伐)로 몰아 문득 속전(贖錢)을 징수했으니, 그 잔인하고 혹독한 폐해가 이미 썩은 백골에까지 미쳤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다시 목민(牧民)의 자리에 둘 수 없으니, 청컨대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평양 서윤(平壤庶尹) 조진태(趙鎭泰)는 본래 용렬한 사람으로서 윗사람을 잘 섬겨 발신(發身)하였고, 앞뒤의 관직에 있으면서 명예를 구하는 데 전념하여 웅부(雄府)에 승차(陞差)되었으니, 지극히 외람된 데에 관계됩니다. 청컨대 개차하소서. 비인 현감(庇仁縣監) 문천경(文天擎)은 본래 한미한 사람으로서 전혀 식견이 없어서 흉년이 든 잔폐한 고을을 결코 감당하기 어려운 줄 알고 있으니, 청컨대 개차하소서. 동몽(童蒙)을 가르치는 관직은 그 책임이 매우 커서 실로 처음 입사(入仕)하는 자의 극선(極選)의 자리이니, 진실로 문학과 조행이 있는 선비가 아니면 함부로 제수할 수가 없습니다. 동몽 교관(童蒙敎官) 정항령(鄭恒齡)은 경박하고 용렬하며 지벌과 명망이 모두 보잘것없으니, 청컨대 개차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9월 3일 임오

해 가운데에 흑기(黑氣)가 있었다.

 

9월 4일 계미

해 가운데에 흑기가 있었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5일 갑신

해 가운데에 흑기가 있었다.

 

부사직 이우신(李雨臣)이 상소하기를,
"수인(囚人) 권숭(權崇)의 공사에 김씨 가문을 무욕(誣辱)한 일로 인하여 그 몹시 패악한 말이 신의 집에까지 미쳤으니, 온 집안에서 머리를 마주 대하여 놀라서 통분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고 도정 신 김수일(金壽一)의 아내는 바로 신의 족증조(族曾祖) 고 참판 신 이소한(李昭漢)의 딸입니다. 이제 권숭이 김수일의 아내를 무함하고자 하여 심지어 말하기를, ‘〈병자 호란(丙子胡亂) 때에〉 전 가족이 사로잡혔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정귀(李廷龜)의 여러 손자가 동시에 사로잡혔다가 차례로 속환(贖還)되었다.’고 하였으니, 이정귀는 곧 신의 고조 고 상신 문충공(文忠公)입니다. 아! 강도(江都)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신의 한 가문 안에 열녀와 효자의 정문(旌門)이 지금에 이르도록 밝게 빛나고 있는데, 권숭의 무욕이 이처럼 극도에 이른 것은 참으로 뜻밖의 일입니다. 병자년205)  ·정축년206)  의 호란을 당하여 신의 조부 고 판서 신 이일상(李一相)은 수찬으로서 남한 산성에 호종(扈從)하였고, 신의 증조 고 판서 이명한(李明漢)은 그때 부상(父喪) 중에 있었는데 그 아우 이소한과 더불어 조근(朝覲)하기 위해 남한 산성에 달려갔다가, 적기(賊騎)가 이미 가득하였으므로, 부득이 분문(奔問)의 길을 통하기 위하여 강도로 내려가서 어미를 받들고 여러 가족과 함께 마니산(摩尼山) 아래에 숨어 있었습니다. 성(城)이 함락되던 초기에 적병이 핍근(逼近)해 오므로 이소한이 그 어미를 위해서 적병의 형세를 늦추려고 속여서 적병을 이끌고 가게 하니, 신의 증조 이명한이 그 틈을 타서 늙은 어미를 부축하고 그 아내 및 중자부(衆子婦)와 질부(姪婦)와 조카딸인 김수일의 아내와 여러 어린아이들을 이끌고 배 한 척을 빌려 타고 교동(喬桐)으로 향하여 떠났습니다. 신의 종조 고 진사 신 이만상(李萬相)과 고 부제학 신 이단상(李端相)은 어수선한 가운데 서로 헤어지게 되었고, 신의 조모와 종조 급제(及第) 신 이가상(李嘉相)과 족증조모는 모두 순절하였습니다. 족증조 이소한은 그의 아들 고 판서 이은상(李殷相) 4형제 및 나이 어린 두 딸과 적진 가운데 있었는데,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적장(賊將)에게 부탁하여 사대부로서 적에게 사로잡힌 자를 석방하기를 청하니 적장이 허락하였습니다. 이때에 금한(金汗)207)  이 영(令)을 내리기를, ‘이정귀의 자손이 만약 포로 가운데에 있으면 모두 놓아 보내라.’고 하였으므로, 족증조 이소한이 적진 가운데 있은 지 하루만에 가족들과 석방되어 돌아왔습니다. 신의 종조 이만상과 이단상은 각자 흩어져 금한의 명이 있었음을 알지 못하였다가, 강화하는 날에 이르러 외종형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이 인조 대왕(仁祖大王)께 진달함으로 인하여 비로소 금한의 명령을 가지고 적장에게 말하여 송도에 이르러서야 석방되어 돌아왔습니다. 아! 신의 가족이 강도에서 병화(兵火)를 피한 사실은 이상 진달한 바에 지나지 않으니, 권숭의 공초에 이른바, ‘온 가족이 사로잡혔다가 차례로 속환(贖還)되었다.’는 말은 스스로 허망한 데로 돌아간 것입니다. 아! 신의 족증조 이소한이 적진에 빠진 것은 노모를 위해 한때 앙화를 늦추기 위한 계책이었는데 즉일로 석방되어 돌아왔고, 종조 이만상과 이단상은 어린 나이로 위급한 분기점에서 흩어졌다가 또한 석방되어 돌아왔으니, 어찌 속환되고 속환되지 않음을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신의 고조의 여러 손자들이 차례로 속환되었다고 말하였으니, 온 가족을 통틀어 무함함이 어찌 이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저 권숭은 김씨 가문에 대하여 원한을 갚으려는 데 급급하여 허망한 말을 지어내어 백여 년이나 지난 일을 가지고 남의 선조를 무함하니, 그 말의 조리가 없는 것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단 말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진달한 바를 살펴보았는데, 함부로 공술하여 남의 선조를 무욕한 것은 참으로 해괴한 데에 관계된다. 어찌 족히 변명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전 군수 김시민(金時敏) 등 48인의 연명소(聯名疏)에 이르기를,
"신의 가문이 권숭(權崇)의 혹독한 무욕을 입었으니, 그 통분하고 절박한 정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저번에 신의 아우 김시신(金時愼)이 억울함을 하소연하여 신의 가문이 권숭의 가문과 애당초 원한을 맺은 연유와 권숭의 집에서 원래 사정을 두고 독해(毒害)를 부린 것과 터무니 없는 사실을 꾸며 무함한 정상을 이미 논열(論列)한 바 있습니다. 이제 또 권숭의 공사를 본즉, 종이에 가득히 구무(構誣)한 말들이 모두 차마 보고 들을 수도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이에 신들이 곧바로 가슴을 찌르고 배를 갈라서 원수와 더불어 천지 사이에 함께 살고 싶지 않았으니, 신 등은 눈물을 삼키며 진달하겠습니다. 대개 권숭의 가문에서는 신 등의 가문을 원망하고 미워하여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온 가문을 욕되게 할 계책을 삼고, 제 가문에서 스스로 지어내어 스스로 전파한 말을 가지고 마치 남이 말한 것처럼 꾸며대어 앞장서서 방자하게 헐뜯었습니다. 이에 이은상(李殷相)의 아비 고 참판 신 이소한(李昭漢)의 행장(行狀) 가운데 ‘선부군(先府君)은 앞서 가고 가족이 모두 따랐다.’는 말과 이소한의 아내가 자결할 때에 ‘자녀와 노복들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을 끌어대어 자녀가 모두 사로잡혔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또 그의 딸은 곧 신의 조모가 되는데, 당초에 이소한과 그의 형 고 판서 신 이명한(李明漢)이 모두 상중에 있는 몸으로 그 노모인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의 부인, 아들과 조카 및 부녀들을 데리고 함께 강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성이 함락되던 초기에 이정귀의 부인과 이명한의 부처와 이명한의 차자 이가상(李嘉相)의 아내와 이은상의 아내 및 신의 조모는 모두 강변에 나가 배를 타고 교동(喬桐)으로 들어갔으며, 이은상의 여동생 한 사람은 그 전에 이미 외숙(外叔)을 따라 남읍(南邑)에 가서 있었고, 이은상의 아우 이홍상(李弘相)의 아내 또한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이소한은 그 노모에게 환난이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 적병을 속여서 이끌고 갔는데, 이소한의 아내와 이은상 4형제와 두 어린 딸이 모두 그 뒤를 따르다가 성 밑에 이르러 이소한의 아내는 이소한이 끝내 보전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남몰래 먼저 자결하였습니다. 대개 이소한은 반드시 죽게 될 것을 스스로 분별하였고, 이소한의 아내와 이은상 형제는 남편과 아비를 따라 함께 죽고자 하였으며, 그 나머지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밖에 부녀자들은 이정귀의 부인을 부축하여 죽을 땅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둘로 나뉘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선부군은 앞서 가고 온 가족이 모두 뒤따랐다.’는 말과 ‘선비(先妣)가 허리띠를 목을 매고는 자녀와 노복들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는 것은 이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로써 온 가족이 모두 뒤따랐다고 말하여 이소한의 집안 온 가족이 모두 그 가운데에 들어 있었다고 말한다면, 이소한의 대부인 이하가 배를 타고 교동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선정신 김상헌(金尙憲)의 문집(文集)과 고 상신 이경석(李景奭)의 문집에 더러 나오고 있으니, 저 권숭도 감히 그렇지 않다고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른바 대부인은 곧 이정귀의 부인이요, 이른바 이하라는 것은 곧 여러 부녀자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 가족 가운데에서 이소한을 따라가지 않은 자도 이미 많았던 것입니다. 비록 이소한의 자부와 딸로써 말하더라도 유독 신의 조모만 이소한을 따라가지 않았을 뿐이 아닙니다. 이은상의 아내가 따라가지 않은 것은 이은상이 그 아내를 위해 지은 제문(祭文)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온 가족이 모두 따라갔다는 말로써 한 사람도 누락됨이 없다고 한다면, 이은상의 아내와 이홍상의 아내 및 남읍에 있었던 딸도 또한 그 가운데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 권숭이 또 신의 증조 고 판서 신 김광욱(金光煜)이 이명한의 곁에서 신의 조모를 보고 이명한과 결혼하기로 언약한 일을 맹랑(孟浪)한 말이라고 이르고 있으니, 아! 통분스럽습니다. 이 일은 신의 증조의 난시 일기(亂時日記)에 분명히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선배와 장로(長老)들이 모두 상세히 말하고 있는데, 그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가 말하기를, ‘신의 조모가 모상(母喪)을 당하여 성복(成服)하기도 전에 의혼(議婚)했다는 것은 이것이 어찌 사람의 윤리(倫理)에 있어 차마 할 일이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또 몹시 요망한 말입니다. 그때에 신의 조모의 일행은 이미 교동에 들어가는 배를 탔고 이소한의 아내는 강도의 성 밑에서 자결하였는데, 피차가 멀리 떨어져 있어 생사(生死)를 서로 알지 못했으니, 상(喪)을 당하여 성복하는 일을 어찌 논할 수 있었겠습니까? 속환(贖還)의 설(設)에 이르러서는 그가 아무리 악독하다 하더라도 또 어찌 감히 이렇게 극도로 패악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신의 조부는 그때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북녘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벗어나 돌아올 일을 주선하지 않은 바 없으나, 신의 조모의 경우에 있어서는 당초에 이미 교동에 들어가 편안히 머물러 있었으니, 어찌 다시 ‘속환’ 두 글자를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더욱이 분통한 것은 권숭의 말이 일찍이 신의 가문과는 뼈에 사무친 깊은 원수로 여기지도 않았으니, 오로지 나라를 위해 간택(揀擇)을 신중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처럼 하여 천청(天廳)을 현혹시키려는 계책으로 삼은 것입니다. 신의 집안의 오래 된 일을 신의 비록 낱낱이 상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저 국가에서 간택 단자를 받아들이는 일이 있을 적이면 신의 조부와 여러 자손들이 전례에 의거하여 간택 단자를 올린 것이 한두 집에 그치지 않았고, 또한 한두 차례에 그친 것이 아니었으나, 단자를 발거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때의 유사(有司)의 신하가 간택을 신중히 여기는 뜻에 소홀하고 나라를 위한 충성이 요망한 권숭에게 미치지 못해서 그러했겠습니까? 또 듣건대, 권숭의 조부 권의형(權義衡)이 생존하였을 때 신의 집안을 무욕한 말을 열서(列書)하여 한 책자(冊子)를 만들어 반드시 원수를 갚을 계책으로 삼고는 그 책자를 사람을 만날 때마다 문득 내보였다고 하였으며, 또 듣건대, 권숭의 아비 권집(權䌖)은 매양 이야기가 신의 집에 미치면 말하기를, ‘김의 가문은 우리와 한 하늘 아래에 살 수 없는 원수이니, 비록 백세 후에라도 반드시 보복해야 한다.’고 하였다 하니, 권가가 신의 집과 절치 부심(切齒腐心)해 온 것은 온 세상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진실로 뼈에 사무친 깊은 원수로서 신의 집을 대하지 않았다면, 그 찾아서 들추어내어 날조(捏造)함이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의 온 가족들이 밤낮으로 절치 부심하고 있으니, 청컨대 그 거짓을 꾸며 사람을 무함한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였으니, 이는 대개 권숭의 5세조 권게(權垍)가 젊었을 때에 김씨의 집 동산에서 몰래 과일을 따다가 김씨 집 종에게 맞아서 죽었는데, 권씨의 자손들이 한 책자를 만들어 백세 후에라도 반드시 보복할 뜻을 이에 붙였으므로, 김시민의 소장 가운데에 사사로운 원한이라고 말한 것은 이를 가리킨 것이었다. 비답하기를,
"이런 해괴한 거조를 어찌 족히 변명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유학(幼學) 이국보(李國輔)가 또 상소하여 권숭의 공사에 그 증조 고 판서 이은상(李殷相)의 문집 가운데 말을 들추어낸 일을 변명하였는데, 김시민(金時敏) 등의 소사(疏辭)와 한결같았다. 비답하기를,
"네가 진달한 바를 살펴보았는데, 함부로 공술하여 남의 선조를 욕한 것은 참으로 해괴한 데에 관계된다. 어찌 족히 변명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유학(幼學) 박경윤(朴景潤)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을 효종(孝宗)의 묘정에 추배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또 윤허하지 않았다.

 

판결사 윤식(尹植)이 상소하여 민폐를 진달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직 대관(大官)이라야 사람을 천진(遷進)할 수 있는 것이다. 전번에 한 승선이 사람을 임용하는 방도를 올렸는데 감히 영성(靈城)을 천거했으니, 영성이 어찌 승선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이광덕(李匡德)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있으나, 연좌된 죄가 매우 무거운 때문인데, 내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다시 장해(瘴海)를 건넜겠는가? 승선의 일은 그르니, 중추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하교에서 지적한 승선은 곧 신치운(申致雲)이었는데,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파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여러 신하들이 진연 의주(進宴儀註)를 의정(議定)하여 올렸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의 진연은 동조(東朝)를 위한 애일(愛日)의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매양 심양(瀋陽)의 일에 대한 관심 때문에 간혹 꿈에 나타날 때도 있다."
하자, 송인명이 말하기를,
"낮에 생각하는 바를 밤에 반드시 꿈을 꾸는 법이니, 성상께서 일을 당하여 애태우는 것이 아마도 지나친 듯싶습니다. 그러나 깊은 연못에 임하고 엷은 얼음을 밟으며 썩은 새끼로 말을 어거하듯이 조심하는 것은 또한 임금이 국운(國運)을 장구(長久)하게 하는 방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연에 반드시 예주(醴酒)를 쓰고자 함은 원량(元良)으로 하여금 지주(旨酒)를 경계하도록 하려는 것이며, 반드시 아악을 쓰고자 함은 원량으로 하여금 음탕한 정성(鄭聲)208)  을 내치도록 하려는 것이다.
바야흐로 세자빈을 간택하는 때를 당하여 나라의 흥망이 이에 달려 있으므로, 십분 삼가고자 하지 않음이 아니었는데, 원량의 의사는 용모를 취하지 않고 숙덕(淑德)을 구하고자 한다 하니, 그 마음이 진정 기특하다. 저번에 ‘관의(寬毅)’ 두 글자를 써서 동궁(東宮)에 내리고 인하여 그 합(閤)의 이름을 삼았으니, 대개 항상 눈에 접하여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엄의(嚴毅)는 본디 좋으나 한갓 엄의하기만 하면 폐단이 있으니, 반드시 관대함을 겸해야 옳을 것이다. 세자가 지나치게 침묵하므로 경 등과 낯이 익숙하지 못했을 것이다. 근래에 듣건대, 계방(桂坊)209)  에서 문의(文義)를 진달하지 않는 자가 많은데 유독 부수(副率) 임석헌(林錫憲)이 문난(問難)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문의를 해석하는 것이 많다 하니, 이는 특별히 제수한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므로,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가 계방에서 구임(久任)한 것으로써 특별히 6품에 승진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내가 동궁에 있을 때에 계방의 윤동원(尹東源)·이진수(李眞洙)·양득중(梁得中)·이현모(李顯謨)·심육(沈錥) 등은 모두 경술(經術)이 있었고, 내가 문의를 잘 설명하는 곳이 있으면 심육은 반드시 일어나 절을 했으니, 그 질박함이 귀중하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호남의 만호와 첨사가 술에 취해 싸우다가 서로 살상한 것은 실로 변괴에 관계됩니다. 수사(水使)가 효시(梟示)하고 장문(狀聞)한 것이 사체(事體)에 있어 옳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당초에 아랫사람을 검칙(檢飭)하지 못하여 이런 변괴를 초래하였으니, 경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사 박태신(朴泰新)은 중추하고 함께 취한 변장(邊將)도 아울러 나처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취중에 빚어진 일이고, 수신(帥臣)의 처치가 마땅함을 얻었으니,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이재(李縡)와 이덕수(李德壽) 등을 유시해서 불러들여 서연(書筵)에 출입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남 유생이 이재를 불러들이기를 청한 상소는 참으로 어리석다. 화전(花田)에 있는 이재가 저들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이들은 모두 모군(募軍)들이고 유생이 아니다."
하자,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미 유생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저들이 비록 무상(無狀)하다 하더라도 사교(辭敎)가 박절한 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는데 이러한 유생들을 어찌 통렬히 배척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원량을 보필하고 인도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외방에 있는 유신들을 모두 올라오게 하라."
하고, 이어 이재와 이덕수 등을 돈소(敦召)하라고 명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유생의 상소에 또 양송(兩宋)210)  을 묘정에 배향하기를 청하였는데, 추배(追配)하는 것은 그 일이 중대하니,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묘무(廟廡)의 엄숙한 자리가 아마 장차 엄숙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한 번 이 폐단이 열리게 되면 배향을 청하는 사람이 반드시 장차 잇달게 될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안주 목사(安州牧使) 이일제(李日躋)가 강변에 보류(堡壘)를 쌓고 영애(領阨)를 방수(防守)하는 것을 한결같이 강변의 규례에 따를 것을 청하였으며, 또 그 부근에 혹은 주막(酒幕)을 개설(開設)하고 혹은 승사(僧寺)를 설치하여 보살피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 청을 들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이일제의 치적과 이력이 뛰어남을 성대하게 진달하고, 승진(陞進)시킴이 마땅하다고 하니, 임금이 특별히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지평 조명정(趙明鼎)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계 가운데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을 종중 추고하고, 영릉 참봉 이학중(李學中)을 태거(汰去)하고, 이조 당상을 모두 종중 추고하고, 해당 낭관을 파직하고, 창성 부사(昌城府使) 노계정(盧啓禎)을 사판하고 삭제하고, 평양 서윤(平壤庶尹) 조진태(趙鎭泰)와 비인 현감(庇仁縣監) 문천경(文天擎)과 동몽 교관(童蒙敎官) 정항령(鄭恒齡)을 개차하라는 계사는 모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연석에서 승지 신치운(申致雲)이 감히 먼저 말을 꺼내어 인재를 천진(薦進)한다 하면서 성명을 지적하여 진달한 것은 이미 지극히 외람된 일이 있습니다. 이광덕(李匡德)에 이르러서는 방금 죄로 인해 삭직한 가운데 있는데, 또한 수용(收用)하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는 일입니다. 이에서 족히 그 방자하고 무엄함을 볼 수 있으니, 파직하라는 명은 죄는 무거운데 벌이 가볍습니다. 청컨대 삭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2품의 관직은 곧바로 덕망(德望)이 있는 자에게 주는 중요한 벼슬인데, 안주 목사 이일제는 대신의 진달로 인하여 갑자기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승진되었으니, 포장(褒奬)한 바가 무슨 공로이며 상전(賞典)을 베푼 바가 어떤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금번에 특별히 승진시킨 것은 자못 아무 명목(名目)이 없는 데에 가까우니, 특히 명철한 임금은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는 것도 아꼈던 뜻이 아닙니다. 청컨대 가자(加資)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오래 침체되어 있으므로 매양 그 재능을 아깝게 여겨왔다. 이제 청한 바는 대각(臺閣)의 체례(體例)에 지나지 않으며, 그 승천한 것도 또한 아무 이유 없는 것이 아니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조명정이 인피하여 물러가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명정은 한림에 있을 때부터 기재가 있음을 알았는데, 이제 근일에 대각에서 침묵을 지켜왔던 부끄러움을 말끔이 씻어버렸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논한 바는 모두 이판(吏判)의 공죄(公罪)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우원(洪宇遠)과 허목(許穆)의 손자를 등용한 것으로써 본다면 그 사심(私心)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9월 9일 무자

밤에 토성(土星)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위 장성(將星)을 범하였다.

 

9월 10일 기축

박사창(朴師昌)을 의주 부윤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수원 부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대관(臺官)이 사문(私門)에서 형장을 쓰는 것은 이미 법에 벗어나는 일인데, 더구나 사사로운 일로 공차(公差)를 형벌할 수 있겠습니까? 장령 민우(閔堣)는 한 잗단 일로 인하여 군자감 낭관(軍資監郞官)으로서 명을 받들고 시골에 내려가 있는 자의 종을 잡아들여 형장을 시행했습니다. 이는 훗날의 폐단에 관계되는 일이니, 그대로 버려둘 수가 없습니다. 해당 대관은 파직하고 낭관은 유약하여 직무를 감당하지 못했으니, 또한 나처(拿處)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민우는 사판에서 삭제하고, 낭관에 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북도 어사의 서계 가운데 온성(穩城) 사람 서천현(徐天玄)은 나이 1백 14세이고, 단천(端川) 사람 정차운(鄭次雲)은 또한 나이 1백 1세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희귀한 일입니다. 이 두 사람을 특별히 가자하고, 그 고을에서 매월 한 번씩 존문(存問)하게 하는 것이 실로 노인을 우대하는 도리에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재로 또 말하기를,
"종묘서 직장 장지덕(張趾德)은 바로 장현광(張顯光)의 봉사손(泰祀孫)인데, 사람됨이 순실(純實)하고 근각(謹慤)하며 겸하여 경학에도 밝습니다. 수령의 연한이 다만 1년이 남았는데, 유현의 자손은 전에도 발탁하여 조용(調用)한 일이 많았으니, 곧 6품에 승진시켜 속히 목민(牧民)의 임무를 시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회덕(懷德)의 사인(士人) 이소(李熽)는 학문과 식견이 동류에서 뛰어나고, 조행(操行)이 독실하여 고을 사람들이 신임하여 복종하니, 청컨대, 계방(桂坊)에 조용하게 하소서. 맹산(孟山) 사람 길세환(吉世煥)은 고려의 명신 길재(吉再)의 후손인데, 독실한 뜻으로 학문을 익혔으니, 청컨대, 조용하게 하소서."
하였고, 송인명이 말하기를,
"고 징사(徵士) 김창즙(金昌緝)의 아들 김용겸(金用謙)은 과거의 공부를 폐지하고 학문을 익힌다 하니, 전조로 하여금 조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이어 하교하기를,
"대신이 각자 사람을 천거하니 나 또한 할말이 있다. 옛말에 이른바, ‘세상은 모두 흐리지만 나는 홀로 맑다.’는 것을 내가 조태만(趙泰萬)에게서 보았다. 성질은 간혹 과격하나 그 사람은 유일(遺逸)인데, 자리를 불사른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는 또한 그 기개를 볼 수 있었다. 특별히 자급을 올려 증직하고, 그 자손 또한 조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동궁에 있었을 때에 조태만이 시직(侍直)에 있었는데, 그때에 김일경(金一鏡)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마침 익위사에 와서 앉아 있다가 일어나 감에 미쳐 조태만이 그가 앉았던 자리를 불사르고 그 겸종(傔從)을 채찍질한 일이 있었다. 임금이 그 사실을 듣고 현명하게 여기더니, 이에 이르러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9월 11일 경인

어떤 별이 천원성(天苑星) 아래로 흘러갔다.

 

이달 17일에 월식(月食)이 지하(地下)에서 있었는데, 예조의 진계로 인하여 구식(救食)211)  하지 않고 다만 재계(齋戒)만 행하였다.

 

임금이 사옹원 점거 제조 밀창군(密昌君) 직(樴)과 예조 참판 이주진(李周鎭)과 장악원 제조 윤득화(尹得和)를 불러 보았다. 밀창군 직이 말하기를,
"진연 때에 유자(柚子)를 쓰는 것이 마땅한데, 아직 봉진(封進)한 것이 없으니 다른 과일로 대신 써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령 제때에 맞추어 온다 하더라도 태묘에 천신(薦新)하기 전에는 진연에 쓸 수 없으니, 다른 과일을 대신 쓰도록 하라."
하였다.

 

장악원에 명하여 저번에 손수 지은 하황은(荷皇恩) 3장을 특별히 《궤범(軌範)》의 서문 아래에 넣어 간행하도록 하였으니, 대개 존주(尊周)하고 옛날을 사모하는 성의(聖意)를 붙인 것이었다.

 

9월 13일 임진

대왕 대비전에 진연하였으니, 이날이 곧 임금의 탄신일이었다. 다음날 조정에서는 전정(展庭)에서 문후(問候)하였다.

 

9월 15일 갑오

큰 별이 남쪽 하늘 가에서 나와 서쪽에 떨어졌는데, 형체가 영두성(營頭星) 같았다. 관상감에서 보고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겼다.

 

홍상한(洪象漢)을 승지로, 오광운(吳光運)을 대사헌으로, 정필녕(鄭必寧)을 대사간으로, 박필재(朴弼載)를 집의로, 권상일(權相一)을 장령으로, 윤경주(尹敬周)를 정언으로 삼았다.

 

헌부 【장령 이징하(李徴夏)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관을 추함(推緘)하는 것은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대각의 지론(持論)은 명백하고 정직함을 중하게 여기니, 진실로 정주(政注)하는 사이에 착오가 있어서 나타나는 대로 경계한다면 설혹 까다롭고 과격하다 하더라도 오히려 용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조명정(趙明鼎)이 정관을 논박한 것은 그렇지 아니하여 겉으로는 관사(官師)의 규계(規誡)를 핑계대면서 안으로는 뒤흔드는 술법을 부렸으니, 이미 극도로 옳지 못한 일입니다. 낭관을 파직하도록 청하기에 이르러서는 당초에 한마디도 파직을 논한 말이 없었는데, 전조의 당상을 추고하는 계사에 해당 낭관을 느닷없이 제기하여 무겁게 감처(勘處)하도록 단정한 그 의도가 남을 핍박하는 데 있었으며, 천청(天廳)을 어지럽혀 몰래 경알(傾軋)했으니, 엄중히 징계함이 마땅합니다. 청컨대 지평 조명정을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부호군 이재(李縡)가 상소하여 부름에 응하지 않으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올라오기를 재촉하였다.

 

9월 16일 을미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서 어연(御宴)을 거행하였다. 상례(相禮)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문(東門)을 거쳐 들어와 자리에 나아가 사배(四拜)를 행하고, 예를 마치자 전(殿)에 올라 속악(俗樂)과 아악(雅樂)을 연주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옛 규례에 진연에는 술 9작(九酌)을 행하였는데 이날은 다만 7작을 행하였다. 왕세자가 제1작(第一爵)을 올리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제2작을 올리고, 판부사 유척기(兪拓基)가 제3작을 올리고, 밀창군(密昌君) 직(樴)이 제4작을 올리고,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이 제5작을 올리고,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제6작을 올렸으며,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제7작을 올렸다. 승지가 유지를 선포하기를,
"삼가 경 등이 올린 술잔을 들고 비로소 아악을 쓰고, 춤은 육일무(六佾舞)를 쓰고, 술은 예주(醴酒)를 썼으니, 이는 모두 구례를 감하여 겸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바야흐로 꽃을 올릴 때에 임금이 옛날을 추모하여 은연중에 눈물을 흘리며 한참 동안 소매를 들어 씻었다. 예를 마치자, 하교하기를,
"금부와 형조의 가벼운 죄수를 특별히 석방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번의 이 거조는 내가 어찌 즐겨서 하는 것이겠는가? 위로 자전의 뜻을 받들어 마지못해 거행하였는데, 옛날을 돌이켜 생각건대, 사모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더하다.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니, 이는 옛날을 계술하는 도리이다. 더구나 자전을 받들어 헌수(獻壽)하고, 기구(耆舊)의 신하들과 더불어 연회를 같이하였으니, 〈《대학(大學)》〉 혈구장(絜矩章)에 ‘위에서 노인을 노인으로 대접하면 백성들의 효행이 일어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바로 혈구(絜矩)의 뜻인 것이다. 맹자(孟子)는 또 이르기를,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면 왕노릇을 할 수가 있다.’ 하였다. 해조로 하여금 병술년212)  의 전례에 따라 〈서울에 있는〉늙은 백성에게 모두 술과 안주를 내려주고 외방의 늙은 백성에게도 여러 도로 하여금 식물을 주도록 하여, 내가 옛일을 따라서 아랫사람에게 은혜를 미루어 미치게 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왕손(王孫)의 부녀로 생존해 있는 자는 다만 임양 부인(臨陽夫人)뿐인데, 나이 80이 넘었다. 저번에 그 집에 거둥했던 일이 지금도 추억이 된다 해조로 하여금 연수(宴需)를 후하게 주어 그 손자로 하여금 잔치를 베풀게 하라. 백세에 가까운 늙은 도위(都尉)가 오늘 술잔을 올린 것 또한 드문 일이다. 옛날을 생각하니, 이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금평 도위 박필성에게 특별히 구마(廐馬)를 내려주고, 또 그 자손에게 잔치를 베풀 연수를 주어 내가 옛일을 돌이켜 보며 노인을 높이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적이 생각건대, 오막살이에 사는 가난한 백성들이 과연 함께 즐거워하겠는가? 아! 우리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겠는가? 혹 얼굴을 찌푸리지나 않겠는가? 이런 때에 백성을 구제하고 보호하는 정사를 더욱 강구함이 마땅하다."
하고, 우선 가장 오래 된 환곡(還穀) 1년조에 대해 정봉(停捧)했던 것을 감면해 주라고 명하였다. 대신 이하 당하관에 이르기까지 어연에 참여하여 전에 오른 자가 모두 1백 40인이었다.

 

9월 17일 병신

조정에서 문안했으니 연례(宴禮)를 순조롭게 마친 때문이었다.

 

9월 18일 정유

진연 때의 진작관(進爵官) 및 도감(都監)의 당상과 낭청 이하에게 말과 현궁(弦弓)의 상전(賞典)을 차등을 두어 내렸으니, 그 수고로움을 기념한 것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금번의 거조는 내가 어찌 즐겨서 한 일이겠는가? 위로 자성의 뜻을 받들어 술잔을 올려 기뻐하였으니, 만약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선왕의 성덕과 자성의 깊은 어진 마음을 계술(繼述)할 수 있겠는가? 이미 상신에 개유하였고, 또 오래 된 환곡을 감면해 주었으니, 임금된 도리는 백성을 애휼할 뿐이다. 경외(京外)의 백성을 소요스럽게 하는 정사는 명년을 한정하여 일체 정지하게 하여 옛일을 본받아 백성을 애휼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이 경인년213)  에 진연한 후 경외의 옥수(獄囚)를 소석(疏釋)한 옛일을 끌어대어 여러 도에 분부하여 옥안(獄案)을 상고하여 장문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그리고 기구 대신(耆舊大臣)을 돌이켜 생각하여 고 상신 김우항(金宇杭)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하라고 명하였다. 또 이종성(李宗城)을 세자 시강원의 빈객(賓客)으로 삼도록 명하고 불러 하유(下諭)하기를,
"원량(元良)의 성품이 강의(剛毅)하니, 경이 인자한 술법으로 보필하여 그 강의함을 조화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이 양남(兩南)의 군작미(軍作米)214)   5천 곡(斛)을 강도(江都)에 보내어 성을 쌓는 경비에 보태어 쓰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9월 19일 무술

임금이 장악원 제조 윤득화(尹得和)를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외연(外宴)에 비로소 무동(舞童)을 썼는데, 1작(爵)에는 초무(初舞)이고, 2작에는 아박(牙拍)이고, 3작에는 향발(響鈸)이고, 4작에는 무고(舞鼓)이고, 5작에는 광수무(廣袖舞)이고, 6작에는 다시 향발이고, 7작에는 다시 광수무를 추었으니, 이는 선조(宣祖)이후 백 년 가깝게 기악(妓樂)을 정지하고 무동을 쓴 새로운 제도이다. 이로써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실어 후일 상고하는 자료로 삼도록 하라."

 

헌납 이위보(李渭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 녹사의 무리들이 잠화(簪花)215)  를 약탈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전에 없던 일입니다. 대개 지금의 헌부는 곧 한(漢)나라 때의 어사(御史)입니다. 한나라 고조(高祖)가 숙손통(叔孫通)으로 하여금 조의(朝儀)를 제정하게 하고 의례를 어긴 자는 어사가 문득 끌어 가자, 조정의 반열이 엄숙해졌습니다. 이로써 논한다면 어제 입시한 헌신은 직무(職務)를 저버린 실수가 있으니 특별히 견책을 베푸시고, 해당 금훤랑(禁喧郞)은 당초의 하교에 의하여 나문(拿問)하여 엄중히 처치하게 하소서. 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은 여러 차례 중대한 임무를 맡아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공인(貢人)에게 폐단을 끼쳐 도성 백성들의 원망을 초래하였습니다. 진연의 한 절차에 있어서도 유사(有司)의 신하는 더욱 삼가는 것이 마땅한데, 응당 지급할 물건을 제때에 주지 아니하여 구차한 일이 많았다고 하니, 파직의 벌을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장령 이징하(李徴夏)는 본래 용렬한 무리로서 남의 응견(鷹犬)이 되어 이번의 처치를 앞장서서 담당하고 이를 말한 사람은 논열(論列)하여 파직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러한 대각(臺閣)의 체통은 일찍이 없던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길이 대각의 천망에서 삭제하여 징계함이 마땅할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큰 전례(典禮)가 이미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절목을 어찌 신칙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 진달한 바가 모두 지나치다. 이징하에 관한 일은 이러한 버릇을 오늘날에도 어찌 감히 서로 부리는가?
하였다.

 

9월 21일 경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도제조 김재로(金在魯)가 청하기를,
"선정신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효종의 묘정에 배향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청하기를,
"화양동(華陽洞)은 선정을 향사하는 곳인데, 근일에 화전(火田)으로 인하여 사우(祠宇)의 근처까지 밭을 했다 하니, 마땅히 공전(公田)과 바꾸어 주고 개간을 금지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9월 23일 임인

어떤 별이 누성(婁星) 아래로 흘러갔다.

 

9월 25일 갑진

어떤 별이 규성(奎星) 아래로 흘러갔는데, 크기가 바리때만하였다.

 

이기진(李箕鎭)을 이조 판서로, 이덕수(李德壽)를 발탁하여 공조 판서로, 이기진(李箕鎭)을 판의금부사로, 홍상한(洪象漢)을 대사간으로, 정이검(鄭履儉)을 승지로, 이천보(李天輔)를 사간으로, 최규태(崔逵泰)를 장령으로, 김상철(金尙喆)·김선행(金善行)을 지평으로, 윤광의(尹光毅)·한익모(韓翼謨)를 교리로 삼았다.

 

9월 27일 병오

이명곤(李命坤)을 승지로, 이재(李縡)·이종성(李宗城)을 빈객으로, 윤득화(尹得和)를 대사헌으로, 이광운(李光運)을 사간으로, 이명희(李命熙)를 동지의금부사로, 정여직(鄭汝稷)을 남병사로, 이경철(李景喆)을 공홍도 병사로 삼았다.

 

9월 29일 무신

임금이 몸소 세자빈을 간택하고 홍봉한(洪鳳漢)·최경흥(崔景興)·윤현동(尹顯東)·윤상정(尹尙靖)·홍익빈(洪益彬)·심성희(沈聖希)·심악(沈)·정준일(鄭俊一)의 딸을 재간택(再揀擇)에 들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이장(李彛章)을 지평으로, 조명건(趙明健)을 정언으로, 홍경보(洪景輔)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이 직무를 맡긴 것은 의도하는 바가 있는 것인데, 어찌 지나치게 고집하는가? 곧 나와서 행공(行公)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30일 기유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서 경과(慶科)의 정시(庭試)와 전시(殿試)를 설행하고, ‘많은 수레로 맞이한다. [百兩御之]’는 것으로 제목을 삼도록 명했으니, 대개 왕세자의 가례(嘉禮)가 가까워진 때문이었다. 조영로(趙榮魯) 등 15인을 뽑았는데, 직부(直赴)하게 한 자가 또한 11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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