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임자
대사헌 윤득화(尹得和)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강(國綱)이 해이하고, 관방(官方)이 문란하고, 시비가 전도되고, 염치가 허물어진 것이 오늘날보다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가령 붕당의 폐습이 과연 이미 모두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위망(危亡)을 구제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옛 당파가 그대로 남아 있고 옛 당파 중에서 분리(分離)되고 취합(聚合)되는가 하면 또 각기 이광좌(李光佐)와 같은 괴상한 무리들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조정에 들어와서는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어 은총(恩寵)을 굳히는 계책을 삼고 나가서는 농락하여 다른 사람을 방어하는 방책을 삼았으니, 그 말을 들어보면 반은 검고 반은 희며, 그 행동을 살펴보면 음(陰)과 같기도 하고 양(陽)과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붙좇는 자는 끌어들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당(黨)이 없다.’ 하고,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는 배척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당을 부식한다.’고 합니다. 사사로운 원한을 갚음에 있어서 모두 ‘당’이라는 한 글자를 빌려서 오늘 한 사람을 진용(進用)하고 내일 한 사람을 물리쳐 이두(利竇)가 한 번 열리자, 염치없는 자들이 따라가고 이익을 탐하는 자들이 붙좇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렬한 무리와 조급하게 권세를 다투는 무리가 허둥지둥 붙좇으며 윗 사람의 뜻을 받들어 당로(當路)에 힘을 다하고, 동제(同儕)들을 함해(陷害)하여 권문(權門)에 공을 세우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지렁이처럼 규결(糾結)하고 도깨비같이 황홀하여 겉으로는 공사(公事)를 핑계대며 속으로는 그 사리 사욕을 도모하여 편안히 한 와굴(窩窟)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자중(自重)하는 자는 나아가고자 하면 차마 몸을 더럽힐 수 없고 물러나고자 하면 차마 성명(聖明)의 조정을 떠날 수 없어서, 국외(局外)에서 배회하여 조정의 반열에서 화합하지 못하니, 세상을 메우고 조정에 가득 찬 것은 오직 넘치는 사의(私意)뿐입니다. 비록 유언휘(兪彦徽)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는 탄핵을 받은 한낱 수령에 지나지 않는데, 스스로 대신을 찾아가 하소연하면서 자신을 논박한 언관(言官)을 무함하였으나, 대신이 꾸짖어 물리치지 못하고 이에 도리어 연석(筵席)에서 진달하고 유언휘에게 묻기를 청하여 그 보복할 계책을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하찮은 한낱 수령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기세와 권력이 족히 남을 위력으로 복종시키고 은혜를 베풀어 심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저번 헌신의 계사(啓辭)에서 정주(政注) 사이의 득실을 대략 논한 것은 관리들이 서로 급히 배척해서 언관(言官)으로 하여금 다시는 감히 입을 벌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대저 임정(任珽)이 작년에 배척당한 것은 그의 한 몸에 그칠 뿐만 아니라, 저번에 대계(臺啓)가 나왔을 때 또한 혼동하여 배척한 가운데 들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회에 따라 잠깐 계사를 내고 들이면서 공의(公議)가 비웃어 손가락질하는 줄도 모르니, 신은 그윽이 부끄럽게 여깁니다."
하였다. 또 언로를 열고, 절의를 면려하고, 시비를 밝히고, 국강(國綱)을 세우고, 관방(官方)을 소중히 여길 것을 부연(敷衍)하여 진면(陳勉)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마땅히 면려하겠다. 유언휘에 관한 일은 한 번 개유할 생각이었는데, 그 진달한 바가 옳다. 임정은 이미 그의 염우(廉隅)를 폈으니, 진달한 바가 지니치다."
하였다.
10월 4일 계축
김상로(金尙魯)를 부제학으로, 이태중(李台重)·조운규(趙雲逵)를 지평으로, 김시찬(金時粲)을 수찬으로 삼았다.
10월 5일 갑인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윤득화(尹得和)가 상소 가운데에서 논한 유언휘(兪彦徽)의 일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이 때문에 어찌 시애(撕捱)할 것이 있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7일 병진
조윤성(曹允成)을 평안도 병사로 삼았다.
10월 8일 정사
대사헌 윤득화(尹得和)가 또 진소하여 송인명(宋寅明)의 차자에 대해 변명하였는데, 침범하여 헐뜯는 말이 많았으므로 송인명이 드디어 인입(引入)하고 정사를 살피지 않았다.
남양 부사(南陽府使) 정내주(鄭來周)가 상소하여 본고을의 재해를 입은 백성들의 황급한 정상을 진달하고 진휼청의 쌀 8백 곡을 사서 요리하여 진휼에 보충하게 하되 진휼청에서 발매(發賣)하는 규례에 의하여 돈으로 환산하여 갚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남태혁(南泰赫)·박수(朴璲)를 장령으로, 윤광찬(尹光纘)·임상원(任象元)을 지평으로, 윤광의(尹光毅)를 집의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윤득화를 불러 책망하기를,
"경의 지위가 재신(宰臣)의 반열에 이르렀는데, 어찌 다시 당론을 일삼는가?"
하자, 윤득화가 인피하여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과연 당의 소굴이 있다면 앞으로 나라가 따라서 멸망할 것이니, 그 논열한 바는 스스로 모호한 데로 돌아갈 것이다. 조용히 처분하는 것 또한 예로써 부리는 도리이므로 그 청을 윤허하니, 경은 모름지기 스스로 면려(勉勵)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좌의정 송인명에게 돈독하게 유시하라고 명하였다.
예조 참판 이주진(李周鎭)이 막 장릉(莊陵)216) 을 봉심하고 돌아와서 영월 호장(寧越戶長) 엄흥도(嚴興道)의 특이한 충렬(忠烈)을 성대하게 진달하고 그 증직(贈職)을 더하고 제수(祭需) 또한 관(官)에서 지급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하대부(下大夫)의 벼슬을 추증하고 봄·가을의 제수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10월 9일 무오
비와 우박이 내리고, 또 사직단(社稷壇)의 소나무에 벼락이 떨어졌다.
정언 어석윤(魚錫胤)이 상소하기를,
"대사헌 윤득화(尹得和)가 인피하자 즉시 체차시킨 것은 언관을 대우하는 도리에 겸연(歉然)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삭직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윤득화에 대한 벌은 견책하여 체차하는 데 그쳤는데, 윤득화를 두둔한 자는 도리어 삭직에 이르렀으니, 위벌(威罰)이 이에 그 경중을 잃었다."
【태백산사고본】 43책 58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116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사법-탄핵(彈劾)
사신은 말한다. "윤득화에 대한 벌은 견책하여 체차하는 데 그쳤는데, 윤득화를 두둔한 자는 도리어 삭직에 이르렀으니, 위벌(威罰)이 이에 그 경중을 잃었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문과·무과의 방방(放榜)에 친림하였다.
10월 10일 기미
정원에서 천둥의 재변으로 인하여 진계하여 면계(勉戒)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더욱 힘쓰겠다."
하였다.
10월 11일 경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윤득화(尹得和)가 상소하여 배척한 것으로 인하여 차자를 올리고, 또 천둥의 재변을 들어 사면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저번에 이미 특별히 개유하였는데, 어찌 보상(輔相)이 이렇게 할 때이겠는가? 즉시 등대하여 나의 면유를 듣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2일 신유
구수훈(具樹勳)을 경기 수사로 삼았다.
10월 14일 계해
성균관에서 아뢰기를,
"어제 저녁 식당(食堂)에서 저녁밥을 먹고 있었을 때 어떤 놈이 칼을 뽑아 들고 사람을 뒤좇아 곧장 들어와서는 식당 앞에서 소란을 피우므로, 그 호패(號牌)를 상고해 보았더니, 바로 액례(掖隷)였습니다. 지극히 해괴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청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치죄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를 올려 사면하였는데, 말단에 이르기를,
"오늘날 육조 장관이 하나도 행공(行公)하는 자가 없으니, 옛날에 이른바 ‘국가가 텅 비었다.’는 말이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이조 판서 이기진(李箕鎭)은 애당초 말할 만한 정세가 없었습니다. 재신의 상소 가운데 한 구절의 말이 매우 어그러지고 격렬하여 적중한 논의가 아니었으나, 한 번 상소하고 스스로 인입(引入)한 것 또한 지나친 일이었으니, 이제 어찌 거듭 시애(撕捱)할 수 있겠습니까?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인혐(引嫌)한 것은 대개 영상이 신과 수작한 말 때문인데, 남곤(南閫)에 갑자기 승진시키고 도정(都正)을 거쳤기 때문에 주의했다는 것은 공과(公過)를 책비(責備)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종옥이 이로써 깊이 인혐하여 심단(尋單)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형조 판서 민응수(閔應洙)는 아무 뜻도 없이 인입하여 날로 위패(違牌)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중추(重推)해서 경계를 보이고 출사(出仕)하도록 독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 등이 서로 공경하고 화합하여 나라를 위해 힘쓴다면, 국가에 큰 다행일 것이다. 진달한 바는 아뢴 대로 하겠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미를 받아 광주(廣州)에 내려가 있으면서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귀주(貴主)의 혼인 때 마침 한재를 당했으므로, 특별히 의물(儀物)을 줄여서 절약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이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외면상의 의물은 비록 감손하였으나, 내면의 기구가 화사함이 여전하여 소박한 유가(儒家)의 자제는 감당할 수 없는 바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하의 이목(耳目)에 벗어나는 일이지만, 만약 전하께서 아셨다면 반드시 금지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있을 대혼(大婚)은 사체가 지극히 중대하여 진실로 의논하기 어렵습니다마는, 옛날의 성왕(聖王)은 재난을 당한 해에는 비록 제사에 쓰는 물품과 공어(供御)에 관한 물건 또는 감손한 적이 많았으니, 이는 경전(經傳)에 실려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미리 유사(有司)에게 신칙하여 그만둘 수 없는 예법(禮法)과 의장(儀仗) 이외에 무릇 낭비에 관계되는 것은 간략함을 따름으로써 국력을 펴게 하여 하늘의 아름다움을 맞이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를 진달한 말은 깊이 흠탄(欽歎)하는 바이니, 모두 아뢴 대로 하겠다."
하고, 원소(原疏)는 유중(留中)하도록 명하였다.
수찬 김시찬(金時粲)이 천둥의 이변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진면(陳勉)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그동안 성상께서 일찍이 유현을 돈소(敦召)하며 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리는 뜻을 자못 보이셨으나, 혹 동강(東岡)217) 을 굳게 지키거나 혹은 왔다가 바로 돌아갔으니, 아마도 성의가 지극하지 못하고 예의를 다하지 못하여 그런 듯합니다. 언로를 넓히지 못함이 근일보다 심한 적이 없어서 주저하며 결단하지 않은 것이 습속을 이루어 다방면으로 기휘(忌諱)하고 있습니다. 일이 묘당에 관계되면 혹 경알(傾軋)하는 죄에 걸릴까 염려하고, 말이 전조에 관계되면 고감(敲撼)하는 혐의를 곡진하게 회피하고, 권요(權要)를 범하면 비위를 거스릴까 두려워하고,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자를 논박하면 당동 벌이(黨同伐異)하는 죄에 빠질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심각한 일은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잗단 일은 족히 말할 것도 없으므로, 머뭇거리며 눈치만 살펴보다가 대부분 입을 다물고 마니, 신은 실로 개연스럽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18일 정묘
정형복(鄭亨復)을 대사간으로, 박필재(朴弼載)를 사간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정언으로, 이연덕(李延德)을 장령으로 송창명(宋昌明)을 지평으로, 윤급(尹汲)을 대사성으로, 민응수(閔應洙)·정석오(鄭錫五)를 지경연사로, 서명빈(徐命彬)을 동지춘추관사로 삼았다.
임금이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옛날 한(漢)나라 명재(明宰)는 동평왕(東平王) 창(蒼)에게 관내후(關內侯)의 인신(印信)을 주어 그 추배(趨拜)하는 자에게 모두 차도록 하였으니, 이는 종족을 화목하게 하고 착한 사람을 권장하는 뜻이었는데, 나이 90세의 기구(耆舊)이고 더욱이 선조(先朝)의 의빈(儀賓)이겠는가? 이제 원량과 더불어 같이 보게 되었으니, 어찌 정의를 표함이 없겠는가? 그 손자 박선원(朴善源)에게 우직(右職)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9일 무진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집의 윤광의(尹光毅)가 천둥의 이변으로 상소하여 면계(勉戒)의 말을 간략히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면계한 바는 마땅히 더욱 힘쓰겠다."
하였다.
10월 20일 기사
장령 이연덕(李延德)이 상소하여 면계의 말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하유하였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히늘이 천둥의 이변으로 경계를 보이고, 해가 또 한재로 인하여 흉년이 들었으니, 나랏일이 참으로 막막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득화(尹得和)의 당파의 소굴(巢窟)이란 말이 재앙을 빚은 단서가 되었는데, 모두 나의 부덕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김한철(金漢喆)이 일찍이 대당(大黨)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윤득화가 또 이를 말했으니, 어찌 조정에 참으로 당파의 소굴이 있겠는가?"
하자, 김재로가 말하기를,
"모두가 망령된 말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세자빈(世子嬪)을 간택(揀擇)하는 가운데 윤현동(尹顯東)의 딸은 그 집에 허물이 있으니, 발거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연유를 물었는데, 송인명이 말하기를,
"윤현동은 윤득화의 아들인데, 일찍이 족숙(族叔)에게 입후(立後)하여 그 양모와 간음한 일이 있었는데, 일이 발감됨에 따라 윤현동이 파양(罷養)되어 본종(本宗)으로 돌아오니, 이로부터 다시 사람 축에 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묻자 좌윤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대신의 말은 나라를 위한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진달한 것은 나라를 위한 충성인데, 대각의 관원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윤현동의 딸은 재간택에서 발거하고, 살피지 못한 허물은 신칙함이 마땅하니, 해조와 해부의 당상은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사행이 받아가지고 온 청황(淸皇)이 내린 두 글자의 편액은 걸 곳이 없습니다."
하자, 송인명이 말하기를,
"따로 다른 곳에 두었다가 저들이 만약 와서 찾는다면 내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재로가 고 상신 홍치중(洪致中)의 봉사손 홍익빈(洪益彬)에게 벼슬을 제수하여 조용하기를 청하고, 또 정세(情勢)로 보아 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을 체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10월 22일 신미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을 범하였다.
10월 23일 임신
조관빈(趙觀彬)을 호조 판서로, 정석오(鄭錫五)를 우참찬으로, 이익정(李益炡)을 대사헌으로, 김시찬(金時粲)을 헌납으로, 홍익삼(洪益三)을 정언으로, 민백행(閔百行)을 부응교로, 이기진(李箕鎭)을 동지성균관사로, 양평군(陽平君) 장(檣)을 진하 겸사은 정사로, 이일제(李日躋)를 부사로, 이유신(李裕身)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10월 24일 계유
한림 권점(翰林圈點)을 마치고 김양택(金陽澤) 등 4인을 선발하였다. 봉교 이의중(李毅中)이 상소하기를,
"한광협(韓光協)은 차점으로 참여하였는데, 이 사람은 비록 문벌은 훌륭하나, 허물이 있다고 합니다. 양료(兩僚)가 반드시 이 사람을 뽑은 것은 일찍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칙려한 아래에서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는가?"
하였다.
10월 27일 병자
수찬 원경순(元景淳)이 천둥의 이변으로 진소하여 면계(勉戒)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더욱 힘쓰겠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심양 문안사(瀋陽問安使) 조현명(趙顯命)과 서장관 김상적(金尙迪)이 복명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조현명에게 묻기를,
"피중(彼中)의 일이 어떠한가?"
하자, 대답하기를,
"겉으로는 태평한 듯하나 안으로는 진실로 좀먹고 무너져 가고 있으니, 신의 소견으로 수십 년이 안되어 천하가 반드시 크게 어지러울 것으로 여깁니다. 대개 정령(政令)은 모두 명예를 바라는 데에서 나오고 신하들은 아첨만 일삼고 있으며 대신은 용렬하고 정신들은 경박하니, 매우 걱정스러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원(中原)에 변란이 있는 것은 우리 나라의 걱정거리이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피국(彼國)에서 보내 준 궁시(弓矢)를 장차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는가?"
하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궁시를 보내 준 것은 대개 주왕(周王)이 제후에게 내려 주던 뜻을 모방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명(明)나라에서 내려 준 것이라면 내가 어찌 한낱 내관(內官)을 시켜 받게 하였겠는가? 지금 선처할 방도는 궁시를 누런 보자기에 싸서 내시에게 짊어지게 한 다음 칙사에게 황제가 내린 물건을 감히 찰 수 없음을 보이는 것이 또한 옳을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병술년218) 에 기로연(耆老宴)을 설행한 후 80세의 사족(士族)과 90세의 상한(常漢)에게 가자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례(故例)에 다만 주육(酒肉)을 내려 주는 줄로 알았는데, 이제 듣건대 가자했다 하니, 이는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 하고, 은전을 미루어 미치게 하는 성의(盛意)이다. 내가 이미 위로 자성의 뜻을 받들어 마지못해 진연을 받았으니, 옛날을 돌이켜 생각하건대, 어찌 그대로 넘길 수 있겠는가? 한결같이 병술년의 전례에 의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8일 정축
홍봉한(洪鳳漢)·최경흥(崔景興)·정준일(鄭俊一)의 딸을 삼간택(三揀擇)에 들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혼인을 허락하도록 명하였다.
10월 29일 무인
김재로(金在魯)를 가례도감 도제조로, 이병상(李秉常)·민응수(閔應洙)·조관빈(趙觀彬)을 제조로, 윤심형(尹心衡)·이천보(李天輔)를 도청 낭청으로 삼았다.
10월 30일 기묘
민응수(閔應洙)를 예조 판서로, 이하원(李夏源)을 판윤으로, 조상경(趙尙絅)을 판돈녕부사로, 이재(李縡)를 대사헌으로, 정익하(鄭益河)를 대사간으로, 안집(安𠍱)을 장령으로, 민계(閔堦)를 사간으로, 권신(權賮)을 헌납으로, 조재덕(趙載德)·황경원(黃景源)을 지평으로, 신위(申暐)·조명건(趙明健)을 정언으로, 김상적(金尙迪)·윤광의(尹光毅)를 교리로, 윤급(尹汲)을 이조 참의로 삼고, 이종성(李宗城)을 발탁하여 공조 판서를 제수하였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형을 죽인 죄인 한운성(韓云星)은 강상의 죄를 범했으니, 삼성 추국(三省推鞫)219) 하여 결안 정법(結案正法)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부교리 이창의(李昌誼)가 천둥의 이변으로 상소하여 면려(勉勵)하기를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바야흐로 힘쓰고 있지만 마땅히 더욱 힘쓰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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