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 계미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또 지난번의 일을 끌어대어 진소하고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다시 면유를 듣도록 하라."
하였다.
사직 권영(權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망령되게 유언휘(兪彦徽)가 역적을 도운 죄를 논박하였다가, 유언휘의 아들이 격고(擊鼓)하여 도리어 꾸짖는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대신이 그의 도리어 꾸짖는 말을 전석(前席)에서 진달하면서 신이 관직에 있었을 때 불법(不法)을 저질렀다고 하며 신을 무함하려 하였으며, 유언휘가 대신의 집에 찾아가 알소(訐訴)하자, 대신은 또 곡진하게 따라서 진달하여 신의 그 말을 원한을 갚으려는 죄목으로 돌렸으니, 홀로 조정의 체통이 허물어지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를 올려 대변(對辨)하기를,
"탄핵받은 사람이 말한 자를 헐뜯는 것은 참으로 근거 없는 일이지만, 신이 이미 불행히 그 말을 들었으므로 경솔하게 진달하였던 것인데, 이것이 어찌 족히 여러 말을 늘어놓아 교계할 일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모두 예사 비답을 내렸다.
11월 5일 갑신
이종성(李宗城)을 형조 판서로, 오광운(吳光運)을 좌윤으로, 이철보(李喆輔)을 승지로, 윤봉구(尹鳳九)를 집의로, 임상원(林象元)을 정언으로, 구성임(具聖任)을 동지의금부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금번 권숭(權崇)에 관한 일을 당초에 당습(黨習)으로 생각했는데, 그후에 들으니 당습이 아니라 곧 사사로운 원한이었다. 아! 사람이 비록 사사로운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남의 선조(先祖)를 욕하면서 무함할 수 있겠는가? 김수일(金壽一)의 아내가 과연 그 무함한 것과 같았다면, 그 뒤에 명공 거경(名公巨卿)들이 어찌 김씨 가문과 연혼(連婚)하였겠는가? 더구나 전에도 간택(揀擇)에 또한 참여해 든 일이 있었는데, 막중한 국혼(國婚)에 어찌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겠는가? 김광욱(金光煜)의 일기(日記)에 더욱이 명백한 증거가 있으니, 김씨 가문의 무망은 저절로 흔쾌히 신설(伸雪)될 수 있을 것이다. 권숭이 이러한 해괴한 거조를 한 것은 나라의 체통에 관련됨이 있으니, 권숭의 관직을 삭탈하고 성문(城門) 밖에 내쫓아 세상의 사사로운 원한을 품고 남을 무함하는 자를 징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 【장령 안집(安𠍱)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정의 체통은 존경함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혹시라도 이를 무너뜨려 손상시킨다면 구경(九經)220) 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사직 권영(權瑩)의 상소는 그 말이 남을 침범하고 핍박함이 많아서 전혀 가리지 않았으므로, 체례가 크게 허물어졌습니다. 청문(聽聞)이 자못 해괴하게 여기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11월 6일 을유
지평 황경원(黃景源)이 상소하여 한림 권점(翰林圈點)에 관한 일을 논하기를,
"성천주(成天柱)는 본래 지벌과 명망이 부족한데도 또한 준점(準點)의 열(列)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는 다름 아니라 호대(互對)의 규례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권익관(權益寬)은 죄범이 지극히 중한데, 그 친조카가 등과한 지 오래지 않아 갑자기 당후(堂后)의 천망(薦望)에 들었습니다. 청컨대 승지는 중추하고 주서는 파직하소서."
하니 바답하기를,
"권익관에 관한 일은 진달한 바가 지나치다."
하였다.
지평(持平) 조재덕(趙載德)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10여 일이 되도록 대간을 패초하라고 계하(啓下)하지 않아서 정원에 내려진 휴지(休紙)에 섞여 들어갔으나, 후설(喉舌)의 신하는 진품(陳稟)하지 않았고, 그때의 대신(臺臣) 또한 승지에게 죄주기를 청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으니, 승지와 대관(臺官)을 모두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동교의 비옥한 전지는 완전히 도성 백성들의 명맥(命脈)에 관계되는데, 그 태반을 권문 세가(權門勢家)에서 억지로 사면서 염가(廉價)로 강탈하였으니, 백성들은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반촌(泮村) 한 구역은 다른 사람의 입주(入住)를 허락하지 않는 곳인데, 갑자기 재상의 아들들이 함부로 점거하였습니다. 해부(該部)에서 조사하여 보고하였으나, 한성부에서는 묻지도 않으니, 모두 조사하여 다스림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탐오와 사치의 풍조에 대해 논하기를,
"관고(官庫)의 수만 냥 재물을 까닭 없이 가져왔는데도 발탁하여 등용하는 데 겨를이 없고, 웅번(雄藩)의 그년의 녹봉을 하나도 남김없이 가져갔는데도 자손에게 음직(蔭職)을 주었으며, 직임이 탁지(度支)에 있으면서 그 자신을 엄숙히 단속하지 않아서 자제들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시민(市民)들이 혹은 정소(呈訴)하기에 이르렀으며, 한 번 군무(軍務)를 담당하자 내 집과 같이 오래 있으면서 백가지 물품을 만드니, 감색(監色)이 그 책응(責應)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는데, 앞뒤로 무릇 수천 마디에 달했다.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아뢴 대로 할 것이며, 그 면계(勉戒)한 바는 마땅히 힘쓰겠다."
하였다. 조재덕의 상소는 시폐(時弊)를 논평한 바가 많았으나 모두 그 사람의 성명을 드러나게 지적하지 않았서 사람들이 많이 그르게 여겼다. 후에 부제학 김상로(金尙魯)가 연석에서 배척함으로 인하여 드디어 조재덕이 파직되었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세 동지사(冬至使)를 불러 보고 위유(慰諭)하여 보냈다.
11월 8일 정해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저번에 연석에서 하교를 받들었는데 호대(互對)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기시는 듯하였습니다. 무릇 임금이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 오직 재능이 있는 어진이를 선택하는 것이니, 사람을 물색(物色)하고 분배하여 의망하는 것은 참으로 구차한 듯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당화(黨禍)는 한편을 진용(進用)하고 한편을 물리치는 데에서 발생하였으니, 이를 구제하는 방도는 참작하여 임용하는 데 귀착되지 않을 수 없는데, 참작하여 임용하는 정사는 호대하는 데 귀착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논의하는 자들이, ‘호대하는 것은 그르다.’고 하는데, 그 말이 좋은 듯하나, 그 실상은 호오(好惡)가 다르다 하여 임용하거나 버릴 수는 없으니, 마침내 한 편을 등용하고 한 편을 물리치는 데로 돌아갈 뿐입니다. 호대의 정사를 시행한 지 이미 20년이 되었는데, 그 이해(利害)와 득실(得失)이 종전의 한 편을 등용하고 한 편을 물리친 데 비교하여 어떠합니까? 이는 대개 신이 신의 형에게 받은 것인데 만약 이를 병통으로 여긴다면, 신의 술책은 끝장이 난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경연(經筵)을 정폐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지금 다행히 신록(新錄)을 재촉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제학 김상로(金尙魯)는 정식(定式)하여 엄중히 신칙한 후에도 억지로 시애(撕捱)하고 있으니, 신의 생각에는 종중 추고하여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또 논하기를,
"대신(臺臣)이 윤현동(尹顯東)의 딸을 간택(揀擇)에 섞어 넣어서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부득이 말하게 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대관을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구슬을 꿰듯이 이어서 성을 쌓는 것은 병법(兵法)에서 꺼리는 바이니, 탕춘대(蕩春臺)에 성을 쌓는 것은 결단코 할 수가 없습니다. 도성에 이르러서는 허물어지는 대로 수축하는 것을 진실로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니, 신의 생각에는 지금부터 각 군문에서 수축을 전담하고, 호조와 병조에서는 재정을 참작하여 보조해 주되, 이에 의거하여 정식을 삼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부제학에 관한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그 나머지는 등대(登對)할 때에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11월 8일 정해
필선(弼善) 이광운(李光運)이 상소하여 《사략(史略)》 1책(冊)을 동궁(東宮)에게 진강(進講)하게 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마땅히 대신에게 묻겠다."
하였다.
11월 10일 기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선천(宣川)의 좌현(左峴)과 동선령(洞仙嶺)의 안팎에 있는 전답은 모두 원전(原田)·속전(續田)을 구분하여 속전은 모두 묵혀서 나무를 심어 관방(關防)을 굳게 할 것이며, 도성을 증축하는 의논을 혁파하고 각 군문으로 하여금 사면(四面)을 분담하여 허물어지는 대로 수축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 조관빈(趙觀彬)과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 및 양사의 여러 대관(臺官)을 파직하라고 명하였으니, 세자빈을 간택할 때에 윤현동(尹顯東)의 딸을 봉단(俸單)에 섞어서 넣었기 때문이었다. 조관빈은 그 당시 예관이었고, 김성응은 판윤이었으며, 대관들은 그 허물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우의정 조현명의 차자로 청한 것에 따른 것이었다.
11월 11일 경인
화성(火星)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조상경(趙尙絅)을 호조 판서로, 이병상(李秉常)을 공조 판서로, 윤득화(尹得和)를 호조 참판으로, 이종백(李宗白)을 대사성으로, 이성중(李成中)을 대사간으로, 민우수(閔遇洙)·임사하(任師夏)를 지평으로, 권해(權賅)를 장령으로, 허옥(許沃)을 사간으로, 조경(趙擎)을 헌납으로, 유언민(兪彦民)을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13일 임진
세자빈의 삼간택(三揀擇)의 예(禮)를 거행하여 세마(洗馬) 홍봉한(洪鳳漢)의 딸이 간택되었다.
11월 14일 계사
임금이 대신과 가례청 당상을 불러 보고 묻기를,
"세자빈의 조현례(朝見禮)의 의주(儀註)에 자전에 대한 집지(執贄)하는 예가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도제조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예(禮)에 이르기를, ‘무릇 높은 사람을 알현할 때에는 반드시 집지한다.’ 하였는데, 하물며 빈궁이 자전을 알현할 경우이겠습니까? 가령 예문에 실려 있지 않고 전례가 또한 없다 하더라도 이는 새로 규례를 제정하는 것이 진실로 도리에 합당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와 곤전은 동서로 마주 향하여 앉고 자전은 중앙에 좌정(坐定)하여 예를 받을 것이니, 이로써 확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 대제학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오례의(五禮儀)》를 이정(釐正)하도록 하였다.
봉교 이의중(李毅中)이 또 상소하여 한광협(韓光協)이 한림 권점(翰林圈點)에 합당하지 못함을 논하고, 그 조부 한배하(韓配夏)의 일을 뒤쫓아 제기하니, 임금이 엄교(嚴敎)를 내리고 이 의중을 삭직하게 하였다.
11월 15일 갑오
비와 우박이 내리고,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날씨가 추워졌기 때문에 옷이 얇은 군사에게 유의(襦衣)를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6일 을미
밤에 달이 북하성(北河星)을 범하였다.
이정욱(李挺郁)을 사간으로, 민백창(閔百昌)을 지평으로, 이병상(李秉常)을 판돈녕부사로 삼았다.
대사헌 이재(李縡)가 진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원량을 보도(輔導)하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이므로, 경의 면직을 허락한다. 경이 진출할 길을 열어 주었으니, 경은 이 뜻을 본받아 올라와 행공(行公)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7일 병신
장령 이인호(李仁好)가 상소하였는데, 대략이르기를,
"저번에 유언휘(兪彦徽)는 탄핵받은 후에 자신의 허물을 말한 대관(臺官)을 무함하여 보복할 계책을 이루려 하였으니, 그 뜻한 바가 참으로 해괴하고 통분스럽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율을 시행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전 장령 안집(安𠍱)은 다른 사람의 말이 대신을 배척하고 핍박하였다 하여 진소한 사람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으니, 대간의 체통을 손상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않는 벌을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유언휘에 관한 일은 이미 처분하였는데, 어떻게 다시 더할 수 있겠는가? 안집이 진달한 바는 대개 체통을 위한 것이었다. 처음 이 직책에 제수되었는데, 그가 감히 협잡을 하였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여 《심경(心經)》을 강(講)하였다.
11월 18일 정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고 밤에 토성(土星)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에 들어갔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찬선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세자를 교양할 방도를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가례를 이미 정하였으니, 보도하는 일이 더욱 급하다. 소장에 진면(陳勉)한 것은 매우 감탄(感歎)하는 바이다. 이때에 협찬(協贊)하는 일은 오직 경을 믿고 있으니, 경은 이 뜻을 본받아 안심하고 올라오도록 하라."
하고, 이어 사관에게 명하여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홍문록의 권점을 행하여 남유용(南有容) 등 16인을 뽑았다.
11월 19일 무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0일 기해
어떤 별이 남하성(南河星) 아래로 흘러갔고,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호조 참판 윤득화(尹得和)가 또 상소하여 지난번에 한 말을 거듭 아뢰고 대신을 헐뜯어 배척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전번에 체차하도록 허락한 것은 참작하여 헤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이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으면 자신을 반성함이 옳은데, 대신을 침범하여 배척하면서 말을 가리지 않은 허물이 있다."
하고, 드디어 윤득화를 파직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한림 권점의 법을 또 고쳐서 일찍이 한림을 거친 자와 시임 한림(時任翰林)이 함께 모여 권점을 행하고 품지(稟旨)를 써서 들여 몇 점 이상을 뽑아 비로소 소시(召試)에 나아가도록 하였으니,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당초에 임금이 한림 천망의 폐단을 매우 싫어 하여 권점으로 고치고 회천(回薦)221) 을 혁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봉교 이의중(李毅中)과 검열(檢閱) 오언유(吳彦儒)·정원순(鄭元淳)이 권점을 행하여 김양택(金陽澤)·신회(申晦)·성천주(成天柱)·한광협(韓光協) 등 4인을 뽑았는데 이의중이 한광협을 추론(追論)하고, 지평 황경원(黃景源)은 또 성천주를 논박하였다. 이에 오언유·정원순이 또한 상소하여 그 권점을 모두 취소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었다.
11월 21일 경자
박필주(朴弼周)를 대사헌으로, 이명곤(李命坤)을 승지로, 허채(許采)·한원진(韓元震)을 장령으로, 조명채(曹命采)를 지평으로, 이게(李垍)를 정언으로, 이태중(李台重)을 헌납으로, 권적(權𥛚)을 호조 참판으로, 조관빈(趙觀彬)을 지경연사로, 김진상(金鎭商)을 동지 경연사로 삼았다.
11월 22일 신축
객성(客星)이 벽수(壁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는데, 별의 형체는 혜성(彗星)과 같았다.
11월 23일 임인
객성이 나타났다.
옥당관(玉堂官) 이창의(李昌誼)·윤득재(尹得載)·조명정(趙明鼎)을 측후관(測候官)에 차출했으니, 관상감의 계청을 따른 것이었다.
정언 이게(李垍)가 성변(星變)으로 인해 상소하여 진계(陳戒)하니, 비답하기를,
"오늘날의 폐단은 오로지 당(黨)에 연유한 것이니, 하나의 공(公) 자로 칙려(飭勵)하여 스스로 힘씀이 마땅한데, 어찌 먼저 장황한 말을 늘어놓는가?"
하고, 원소(原疏)를 유중 불하(留中不下)하였다.
사간 이정욱(李挺郁)이 또한 상소하여 진계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원소는 유중(留中)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초복(初覆)을 행하였다. 황주(黃州)의 양가녀(良家女) 김자근련(金者斤連)은 나이 20세가 되도록 출가(出嫁)하지 않았는데, 그 이웃 사람이 아내로 맞이하고자 하여 그 부모에게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웃 사람은 원래 완패(頑悖)한 자로서 처녀의 집에 몰래 들어가 겁간(劫奸)하고자 하였으나 처녀가 큰 소리로 외쳐 모면하였는데, 그 이웃 사람이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내가 이미 그 처녀와 간통(姦通)했으니 다른 데로 시집갈 수 없다.’고 하였다. 처녀가 그 소문을 듣고 억울하여 분통하여 스스로 월파루(月波樓)의 절벽 아래에 투신(投身)하였으나, 남의 구원을 얻어 회생(回生)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저들은 친족이 번성하지만 나는 몹시 잔약하여 마침내 그 수욕(羞辱)을 받을 것이니, 차라리 한 칼로 같이 죽어 흔쾌히 억울함을 씻는 것만 못하다.’ 하고, 드디어 남장(男裝)하여 칼을 품고 새벽에 이웃 사람의 집을 찾아가 그를 찔러 죽이고, 스스로 잡혀서 관가(官家)에 나아갔다. 도신이 그 정상을 계문하니, 임금이 친히 판부(判付)하기를,
"살인(殺人)에 대해 상명(償命)222) 하는 것이 비록 법문(法文)에 실려 있으나, 절개를 세워 세상을 권장함은 왕자(王者)의 도리이니, 특별히 용서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천(信川)에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사람을 죽여 그 고기를 먹은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가엾게 여겨 말하기를,
"한 사람이 살 바를 얻지 못하더라도 왕자(王者)는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인데,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 먹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하고, 죽여야 마땅한지 그 여부를 여러 신하들에게 순문(詢問)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사람을 죽여 고기를 먹은 자는 법에 있어서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 정상이 비록 불쌍하나 법에 있어서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선 삼복(三覆)을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박춘보(朴春普)의 귀양을 풀어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4일 계묘
혜성(彗星)이 벽수(壁宿)의 도내(度內) 규수(奎宿) 서쪽에 나타났는데, 별의 형체는 크기가 왕량성(王良星)만 하였고, 꼬리의 길이는 1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담적색(淡赤色)이었고, 간방(艮方)을 가리켰다.
윤봉조(尹鳳朝)를 부제학으로, 조적명(趙迪命)을 대사간으로, 조중회(趙重晦)를 정언으로, 이태중(李台重)·김상적(金尙迪)을 교리로, 정찬술(鄭纘述)을 황해도 병사로, 신사경(申思冏)을 남병사로, 조국빈(趙國彬)을 경상도 우병사로 삼았다.
11월 25일 갑진
혜성(彗星)이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2척쯤 되었다.
11월 26일 을사
혜성(彗星)이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2,3척쯤 되었다.
11월 27일 병오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호랑이가 경성에 들어왔다.
11월 28일 정미
지진(地震)이 일어나고, 혜성이 나타났다.
윤봉구(尹鳳九)를 진선으로 삼았다.
정언 조중회(趙重晦)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언로가 막힌 것이 요즈음보다 심한 적이 없어서 장주(章奏)의 사이에 한마디 말이라도 뜻에 거슬리면, 전하께서 문득 당론(黨論)으로 의심하여 찬출(竄黜)하고 천극(栫棘)하는 것이 앞뒤에 연달았고, 심지어는 항양(桁楊)과 질곡(桎梏)으로 다스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대각(臺閣)에서는 결단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것이 습속을 이루었고, 조정에서도 풍도와 기절이 사라지고 꺾였는데, 점차 변하여 풍속이 허물어지고 세도가 점점 낮아졌으니, 어찌 크게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천재 지변이 나날이 더하여 사직단(社稷壇)의 나무에 벼락을 친 변괴는 더욱 마음을 놀라게 하는 일입니다. 인애(仁愛)하신 하늘의 경고(警告)가 깊고 간절한데, 자신에게 허물을 돌려 구언(求言)하는 거조를 보지 못하였고, 정원과 옥당의 진계(陳戒)도 매우 적막하여 들을 길이 없으며, 비지(批旨) 또한 범연히 수응(酬應)하는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이렇게 하고도 어떻게 하늘의 뜻을 돌리고 재앙을 소멸할 수 있겠습니까?
종묘를 봉심하고 수개하는 것은 으레 봄 가을 중월(仲月)에 행하는 것이 국전(國典)에 실려 있는데, 금년 가을에는 무슨 연고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초순 전에 행했어야 할 봉심을 공연히 그믐께로 미루어 수개를 9월로 연기하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종묘 사직보다 막중한 일이 없는데, 대관(大官)이 이러하니 서료(庶僚)들을 어찌 책망하겠습니까? 게으른 관원을 신칙하고자 하면 대관(大官)들부터 먼저 사직하여야 합니다. 전하께서도 또한 스스로 유의하여 정성으로 자신을 책망하려 하고 숨기는 바가 없어야 하며, 널리 언로(言路)를 열어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소서. 신이 듣건대, 공자께서 맹의자(孟懿子)223) 의 효도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를, ‘어김이 없어야 한다.’ 하고, 이어 또 풀이하기를, ‘살아서는 예(禮)로써 섬기고 죽어서는 예로써 장사지내고 예로써 제사지낸다.’고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해석하기를, ‘사람이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예를 준행하여 구차스러움이 없으면 어버이를 높임이 극진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서인(庶人)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제왕의 효도이겠습니까? 무릇 종묘(宗廟)가 소중한 까닭에 전배(展拜)와 향사(享祀)에 대해 오히려 일정한 제도가 있는데 전하께서 사묘(私廟)에 대해 생각이 나시면 문득 행차하시니, 번거로움을 면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인주는 한 번 동작하는 것도 급히 서두르는 것은 마땅하지 못한데, 전배할 때마다 갑자기 명을 내리므로, 유사(有司)는 미처 청도(淸道)하지 못하고 호위군은 미처 대오를 정제할 겨를이 없으며, 진신(搢紳)과 사민(士民)들도 분주(奔走)하여 황혹(愰惑)해 하니, 무릇 신료(臣僚)가 된 자로서 누군들 근심하여 민망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한두 소관(小官)들이 엄중한 견책을 당한 후로는 문득 기피(忌避)하게 되었습니다. 저번에 전교하여 중삭(仲朔)에 전배하겠다고 하신 한 조항을 가지고 보더라도 전하께서 사묘(私廟)에 몸소 시향(時享)을 행하신다는 뜻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실로 대수롭지 않은 작헌(酌獻)과는 다른 바가 있습니다. 제사의 의절은 반드시 삼헌(三獻)을 갖추어야 하고 삼헌에는 또 반드시 축문(祝文)이 있어야 하므로 예절 사이에 구애되는 바가 많은데, 전하께서는 어떻게 조처하실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인주의 한 몸은 곧 신인(神人)의 주(主)가 되니, 교사(郊社)와 능묘(陵廟)에 대한 일이 아니면, 하루도 궁궐을 떠나 다른 곳에서 유숙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전하께서는 조금도 의심하거나 어려워함이 없이 마음대로 행하시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아마도 선왕조의 헌장(憲章)을 삼가고 후손에게 수범(垂範)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무릇 무궁한 것이 정리인데, 다만 정리에 맡긴 채 예절(禮節)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선왕의 제도를 장차 시행할 곳이 없어질 것인데, 또한 어찌 성인(聖人)의 ‘어김이 없게 하라.’는 훈계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이는 크게 어긋나는 예의에 관계되는데,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삼사(三司)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그치기를 간(諫)하는 자가 없었으니, 오히려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실로 여러 신하들의 허물이지만, 또한 전하께서 그렇게 하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아! 국가에서 피폐(皮幣)와 주옥(珠玉)으로써 〈청(淸)나라를〉 섬겨온 지 이에 백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열성조(列聖朝)에서 와신 상담(臥薪嘗膽)하신 뜻과 지사(志士)들의 비풍(匪風)·하천(下泉)224) 의 감상(感想)은 일찍이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은 채 매양 망궐례(望闕禮)와 진하(進賀) 등의 일을 만나면, 문득 ‘근례(近例)에 따라 행하라.’고 말하였으니, 비록 성실하지 못한 듯하나 여기에서 또한 본심은 속이기 어려움을 알 수 있으며, 길이 천하 만세에 할말이 있는 것도 또한 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심양(瀋陽)의 사행(使行)이 상규(常規)에 벗어나서 50리 밖에서 지영(祗迎)하는 큰 은전(恩典)을 입어 황은(皇恩)이 망극하다는 말은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준마(駿馬)와 금안(金鞍)으로 득의 양양하게 돌아왔는데, 전하께서는 또 특별히 의장(儀仗)과 고취(鼓吹)를 내려 영접하셨습니다. 그윽이 듣건대, 선조(先朝) 때에 또한 일찍이 강희(康熙)의 금자(金字)로 쓴 편액을 가져온 일이 있었으나, 이러한 전례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전에 없던 규례를 창출함으로써 한때의 재능을 자랑하여 빛나게 하고, 온 도성의 백성들에게 보게 함으로써 광영(光榮)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이에 명색이 선비라는 자들 또한 연은문(延恩門)과 모화관(慕華館)의 앞길에 많이 늘어서 있었으니, 세도(世道)가 이에 이르고서야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또 삼가 듣건대, 연중에서 대신이 별도로 한 전각(殿閣)을 만들어 그 보내 온 편액을 걸고 또 성상(聖上)께서 거둥하실 때 그 보내 온 궁시(弓矢)로 의장(儀仗)을 만들어 좌우에 진열하여 하사한 물건을 영광스럽게 하기를 청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과연 전하는 말과 같다면 이 얼마나 그릇된 일이겠습니까? 그나마 다행히도 성상의 학문이 고명(高明)하셔서 윤허를 내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오늘날 천하에 예의(禮儀)가 바른 나라는 오직 우리 나라뿐입니다. 저들이 사해(四海)를 석권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편방(偏邦)에 무슨 어려움이 있어서 홀로 그 풍속에 따르게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다름 아니라, 조신(朝臣)과 위포(韋布) 가운데 충신(忠臣)·의사(義士)가 가끔 나타나 그들의 마음을 두렵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세교(世敎)가 여지없이 허물어졌으니, 이로부터는 3백 년 동안 유지해 오던 예의의 나라가 장차 모두 오랑캐의 지경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오직 저 황단(皇壇)에 드리는 규벽(圭璧)225) 마저 장차 거의 성실하지 못한 허위(虛僞)에 돌아갈 것이니, 이것이 어찌 우리 영고(寧考)께서 대보단(大報壇)으로 명칭한 본의(本意)이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면, 신은 몹시 마음이 애통합니다.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임종할 때 그 문인(門人)과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인통함원 박부득이(忍痛含冤迫不得巳)」라는 여덟 글자를 죽음으로 지킴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에 진실로 느낀 바가 있어서 감히 무릅쓰고 올립니다."
하였다. 황은이 망극하다는 말은 혹자의 말에 ‘조현명(趙顯命)이 심양에 있을 때 올린 봉계(封啓)에 이 한 구절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조현명의 계사에는 실로 이 말이 없었으니, 대개 조중회가 잘못 들은 것이었다.
11월 29일 무신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이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임금이 조중회(趙重晦)의 소장에 몹시 노하여 여러 신하들을 대하여 책상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조중회(趙重晦)가 나를 몹시 모욕하였으니, 대개 다시는 이 자리에 임어하지 않겠다."
하고, 인하여 동궁(東宮)에게 전위(傳位)할 뜻을 보였는데,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많았다. 여러 신하들이 잇따라 들어가 극력 간쟁(諫諍)하여 비로소 정지하게 되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조중회의 상소로 인하여 의금부에서 대명(待命)하다가 연석의 하교가 진박(震迫)함을 듣고 서로 잇따라 입대(入對)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조중회는 한낱 망령된 사람인데, 성덕(聖德)에 무슨 관련이 있기에 이렇게 하교하십니까?"
하고,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는 나이가 젊어서 명예를 얻기 좋아한 소치입니다."
하고,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 죄에 따라 엄중히 조치함이 마땅하니, 지나치게 사기(辭氣)를 허비하시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임금은 자신이 조중회에게 직접 죄를 주지 않고 여러 신하로 하여금 먼저 죄를 청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은 조중회를 중형(重刑)에 처하자니 차마 못할 일이고 죄를 주지 않자니 임금의 노여움이 또 점점 격렬해질 것이므로, 온 조정에서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정언 조태상(趙台祥)이 입시하여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태상이 조중회의 죄를 논핵하지 않는다 하여 임금이 하교하기를,
"직책이 언관(言官)에 있으면서 임금을 모욕한 사람을 보고도 청토(請討)할 의리를 알지 못하니, 이러한 대관(臺官)은 내가 그 낯에 먹칠을 하고 싶다. 조중회는 내가 마땅히 처분하겠다."
하였다.
11월 30일 기유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59권, 영조 20년 1744년 1월 (0) | 2025.09.27 |
|---|---|
| 영조실록58권, 영조 19년 1743년 12월 (0) | 2025.09.26 |
| 영조실록58권, 영조 19년 1743년 10월 (0) | 2025.09.26 |
| 영조실록58권, 영조 19년 1743년 9월 (0) | 2025.09.26 |
| 영조실록58권, 영조 19년 1743년 8월 (0) | 2025.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