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경술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12월 2일 신해
혜성(彗星)이 벽수(壁宿)과 규수(奎宿) 사이로 옮겨 나타났는데, 빛깔은 담적색(淡赤色)이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쯤 되었으며, 간방(艮方)을 가리켰다.
하교하기를,
"요순(堯舜)의 도(道)는 효제(孝悌)뿐이다. 이제 나의 심정은 이미 상신에게 하유(下諭)하였고, 다만 감군(監軍)에게 군호(軍號)를 내린 것은 뜻한 바가 있었는데, 그 신하가 아무 말이 없으니, 어찌 신하가 있다고 하겠는가? 마땅히 한번 전배(展拜)하여 이 마음을 조금 펴고자 한다."
하였다. 약원에서 한 자가 넘는 많은 눈이 내리고 날씨가 음산하고 춥다 하여 전배의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약원의 여러 신하들과 교리 한익모(韓翼謨)가 청대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을 업신여긴 죄는 토죄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어버이를 위한 전배(展拜)는 막으려 하는가?"
하였다.
12월 3일 임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임금이 숙빈묘(淑嬪廟)에 거둥하고, 이어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에 나아갔다. 이때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옹주의 집 낭하(廊下)에 늘어앉아 반열이 모양을 이루지 못한 채 기상이 침통하였는데, 임금이 바야흐로 몹시 노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밤이 되었는데도 임금이 오히려 회가(回駕)하지 않으니, 정원·옥당 및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청대하였으나, 임금이 대답도 하지 않다가 2경(二更)에 비로소 환궁하였다.
12월 4일 계축
혜성(彗星)이 실수(室宿)의 도내(度內)에 옮겨 나타났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여러 재신(宰臣)을 이끌고 구대하기를 세 번 청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정원과 옥당에서 청대하였으나, 또한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조태상(趙台祥)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중회(趙重晦)가 장황하게 하나의 소장을 올려 일을 말한다고 핑계대었으나, 앞뒤의 두 조항은 진실로 외람되게 침핍(侵逼)하는 죄과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예절(禮節) 사이에 어떻게 조처하겠습니까?’라고 한 말에 이르러서는 전하께서 원래 삼헌(三獻)한 예(禮)가 없었으니, 그 소장에서 논한 바는 저절로 허망한 데에 돌아갔으나, 그 정례(情禮)를 우러러 헤어리지 못하고 실상에 아주 어두어서 성상을 핍박하는 말을 경솔하게 발설하여 성심을 거듭 슬프게 하였으니, 참으로 몹시 해괴하여 탄식할 일입니다. 따라서 지위가 삼공(三公)에 있는 자는 마땅히 작은 혐의를 돌아보지 말고 단서마다 조목을 열거하고 정상을 참작해서 죄를 청하여 처분이 적당한 데 귀착되도록 힘쓰고, 성상의 뜻을 인도하는 것 또한 성상의 노여움이 과격한 데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진실로 대신의 책무인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두려워하여 웅성거리고 각자 머뭇거리며 마침내 한마디도 변백(辨白)함이 없었습니다. 다만 처분이 성상으로부터 나오기만 기다린 채 감단(勘斷)하는 말을 그 입에서 발설하고자 하지 않았으며, 죄수를 심리하는 자리가 겨우 끝나자마자 바삐 물러가곤 하였습니다. 잇따라 모이는 비국의 자리에서도 한갓 관망만 일삼으며 상하가 서로 버티어 종일 어긋나고 막혀서 성심을 불안하게 하고 공무를 폐지하게 이르렀으니, 이 어찌 성실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는 도리이겠으며, 우리 전하께서 20년 동안 의지하여 믿었던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소장이 들어가자 또한 유중(留中)하였다.
12월 5일 갑인
이때에 대소(大小)의 공사(公事)를 유중 불하(留中不下)한 지 이미 6일이 되었으므로, 정원(政院)에서 뭇 신하를 불러 보기를 계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연명 차자를 올리기를,
"정언 조태상(趙台祥)의 소장을 보았더니, 신 등이 조중회(趙重晦)의 죄를 청토(請討)하지 않은 데 대해 논하기를, ‘머뭇거리며 관망만 하였고, 감단(勘斷)하는 말을 입 밖에 발설하려 하지 않았다.’고 하기에 이르렀는데, 참으로 그 말과 같다면 신 등의 죄는 죽어도 남음이 있습니다. 또한 신 등이 조중회에 대하여 조치하는 바는 원래 이에 해당한 논설이 있었는데 이제 그의 말은 이와 정반대이니, 밝은 조정의 대간 반열에서 이러한 언론이 있을 줄은 뜻하지 않았습니다. 대저 전하께서는 일찍이 지나치게 천단(擅斷)하시는 일이 없었고, 지극한 정리(情理)를 펴려고 한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조중회가 이미 지난 일을 제기하여 경솔하게 논함으로써 성상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성효(聖孝)를 손상되게 하였으니, 이는 조중회의 죄입니다. 비록 신 등이 어리석으나 또한 그가 악역(惡逆)·범상(犯上)에 돌아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다만 전하의 지극한 효성(孝誠)에 문득 격렬함을 촉발시킨 바가 있었으니, 이는 전하께서 성효(誠孝)가 지나침으로 인하여 천지와 같은 큰 도량에 허물이 됨을 깨닫지 못하신 것입니다. 세월이 오래되어 일이 지나가서 심기(心氣)가 화평해지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뉘우치실 것입니다. 신 등은 분의(分義)가 부자 사이와 같은데, 어찌 감히 한갓 격렬한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받들어 좇을 계책을 삼아 차마 전하께서 전에 없던 과실을 이루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전일한 혈성(血誠)은 이 사리(事理)를 가지고 반복해서 개도(開導)하여 성명(聖明)의 조정에서 간신(諫臣)을 죽였다는 이름이 없도록 함으로써 무궁한 후세까지 성덕이 빛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조중회를 감단(勘斷)하자는 의논은 단지 신 등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실로 전하에게서도 나오지 않게 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른바 ‘관망하고 머뭇거렸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신(臺臣)이 일을 말한 것으로 죄를 얻게 되면, 그 말이 비록 망령되더라도 삼사(三司)에서 으레 쟁집(爭執)하는 것이니, 조종조의 승평한 세대의 일은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이런 일이 없으니, 이미 세도(世道)가 변한 것입니다. 조태상은 오직 쟁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따라서 그 뜻에 영합하여 대신을 협박하고 언관(言官)을 죽이고자 하기에 이르렀으니, 부앙(俯仰)하여 헤아리는 바는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이 외람되게 대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오늘날 조정을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 신 등의 죄이며, 또한 전하께서 이를 인도해 놓은 것입니다. 신 등은 생각이 이에 미치니, 실로 통곡하고 차라리 잠이 들어 몰랐으면 합니다."
하였다. 옛 규례에 재일(齋日)에는 장소(章疏)를 정원에 머물러 두었다가 재일이 지나야만 비로소 들여왔으며, 대신의 소장과 차자는 비록 재일이라도 정원에서 반드시 미품(微稟)하여 입계(入啓)하였다. 그런데 이때는 임금의 노여움이 풀리지 아니하여 정원에서 품의하여도 또한 살피지 않았으므로, 차자를 정원에 머물러 둔 지 6일 만에 조태상의 소장과 함께 모두 도로 내주었다.
12월 6일 을묘
정원과 옥당에서 합문(閤門) 밖에 엎드려 청대하고, 대신이 여러 재신들을 거느리고 합문 밖에 엎드려 청대하였는데, 두 번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약원에서 진후(診候)를 청하였느나, 또한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7일 병진
대신과 경재와 정원·삼사에서 합문 밖에 엎드려 청대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8일 정사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이때에 임금이 조중회(趙重晦)의 일로 몹시 노하여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지 않았는데, 대신 이하 삼사(三司)에 이르기까지 합문 밖에 엎드려 청대한 지 무릇 4일이 되었으나, 또한 윤허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리 김상적(金尙迪)이 배달(排闥)226) 의 의논을 먼저 제창(提倡)하였으므로, 드디어 서로 잇따라 희정당(熙政堂) 앞뜰에 들어가 각기 거적자리를 깔고 관(冠)을 벗어 놓고 뜰 아래 엎드려 저녁부터 새벽에 이르렀으나 끝내 유음(兪音)이 없으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합문 밖으로 물러나왔다. 그런데 유독 승지, 옥당 한익모(韓翼謨)·김상적(金尙迪)·윤광의(尹光毅), 장령 허채(許采), 지평 조명정(趙明鼎), 사관(史官) 등은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내전(內殿)의 문 밖에 나아가 엎드리니, 임금이 비로소 불러 보기를 허락하였다.
12월 9일 무오
임금이 청대(請對)한 시임·원임의 대신(大臣)과 정원·삼사의 여러 신하들을 희정당(熙政堂)에서 불러 보았다. 임금이 조중회(趙重晦)를 청토(請討)하지 않았다 하여 하교하여 여러 신하를 몹시 책망하니, 김재로(金在魯) 등이 말하기를,
"조중회는 참으로 광망(狂妄)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 등은 성상으로 하여금 간신(諫臣)을 죽였다는 이름을 받게 하지 않으려고 하니, 대벽(大辟) 이하는 오직 전하께서 재량하여 처분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에 입시한 대신(臺臣)을 삭직하라고 명하였으니, 조중회의 죄를 청토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이어 조중회를 삭직하라고 명한 뒤에 또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사령(赦令)이 있기 전에는 용서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12월 11일 경신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하교하기를,
"배달(排闥)하는 일은 우리 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서, 이 또한 문식(文飾)에 치우친 소치이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하물며 내전(內殿)에서 지척(咫尺)인 곳이겠는가? 그때의 유신 김상적(金尙迪)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감률(勘律)하도록 하라."
하였으니, 대개 김상적이 배달(排闥)의 의논을 먼저 제의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관(中官)의 임무는 궁문(宮門)을 지키는 데 지나지 않는데, 여러 신하에게 휩쓸려 따른 것은 후일의 폐단에 크게 관계된다 하여, 그날 차비 중관(差備中官)을 또한 해부로 하여금 감처하게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연명 차자를 올려 여덟 가지 큰 죄목을 스스로 논열(論列)하여 사면하기를 청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2월 12일 신유
세 대신 및 판부사 김흥경(金興慶) 등이 유신(儒臣)을 감률하라는 하교에 대하여 홀로 그 죄를 요행히 모면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모두 대죄(待罪)하니, 임금이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게 하였으나, 김재로 등이 모두 도성 밖으로 나갔다.
12월 13일 임술
혜성(彗星)이 실수(室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다.
12월 14일 계해
혜성이 나타났다.
12월 15일 갑자
혜성이 나타났다.
12월 16일 을축
혜성이 나타나고, 달이 헌원성(軒轅星)으로 들어갔다.
12월 17일 병인
혜성이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6, 7척쯤 되었으며, 어떤 별이 실성(室星) 아래로 흘러갔다.
12월 18일 정묘
혜성이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7, 8척쯤 되었으며,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와 경기 감사 유엄(柳儼) 및 가례 도감 당상 이병상(李秉常)·조상경(趙尙絅)·민응수(閔應洙) 등이 또한 청대(請對)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9일 무진
혜성이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가 1장(丈)쯤 되었다. 달이 목성(木星)을 범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때 마음에 잊히지 않는 것은 오직 군민(軍民)의 녹(祿)이다. 도목정(都目政)을 오늘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로(金尙魯)를 승지로, 채응복(蔡膺福)을 사간으로, 심익성(沈益聖)을 장령으로, 이민곤(李敏坤)을 지평으로, 유언호(兪彦好)를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20일 기사
혜성이 실수(至宿)의 도내(度內) 벽수(壁宿)의 서쪽에 나타났는데, 별의 형체는 크기가 남하대성(南河大星)만하고, 꼬리의 길이는 1장(丈) 2, 3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담적색이고, 간방(艮方)을 가리켰다.
정원에서 청대(請對)하였는데, 수찬 이창의(李昌誼)·장령 심익성(沈益聖)·정언 유언호(兪彦好) 또한 함께 청대하니, 하교하기를,
"대유(大諭)를 전하고자 하니, 청대한 여러 신하들은 모두 합문(閤門) 앞으로 나오라."
하였다. 이때에 임금의 노여움이 오히려 풀리지 아니하여 신료들을 인접하지 않고, 기무를 수응하지 않은 지 이미 10여 일이 되었다. 세 상신은 도성 밖으로 물러나갔고, 승지와 삼사(三司) 및 재신(宰臣)들이 다시 나아가 청대하였으며 번갈아 소장을 올려 진계(陳戒)하였으나, 일체 응답하지 않았었다. 이날 여러 신하들을 합문 밖에 불러들이고 윤음(綸音)을 내려 마음을 털어놓고 화하게 유시했는데, 무룻 수천마디에 이르렀다. 이에 전후로 유중(留中)하였던 차자와 소장 수십여 도에 대해서도 모두 비답을 내리고, 또 사관을 보내어 세 대신에게 돈유(敦諭)하여 들어오게 하였다. 그 윤음에 이르기를,
"예로부터 제왕은 창업한 임금이 있고 중흥(中興)시키는 임금도 있으며, 번저(藩邸)에서 들어와 승통한 임금도 있는데, 승통한 임금은 왕위를 이어받은 데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창업이나 중흥시킨 임금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나 또한 승통한 사람이다. 나의 경력한 바를 어찌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수수(睢水)에서 고난을 격은 것이나227) 광무제(光武帝)가 맥반(麥飯)으로 요기한 데228) 에 비길 수 있겠는가? 아! 이관후(李觀厚)의 소장은 지금까지도 마음이 괴로우니, 임금된 것이 어찌 즐겁겠는가? 그러나 부탁의 소중함을 돌아보고 원량의 나이 어림을 생각하여 억지로 마음을 억제해 왔다. 아! 저 당론은 신축년229) ·임인년230) ·무신년231) 으로 이미 은감(殷鑑)을 삼았었다. 합문(閤門)을 닫고 수라를 물리친 것은 그 근본이 어디에 연유한 것인데, 배달(排闥)한 것이 몇 차례이고 관(冠)을 벗고 대죄한 것 또한 몇 번이었던가? 대훈(大訓)을 한번 반포하니 흑백이 분명하였고, 훈유(訓諭)를 몸소 내리니 저 하늘에 맹세(盟誓)할 수 있었는데, 아! 오늘날 여러 신하들은 무슨 마음을 먹고 이를 심상하게 보아 이 고심(苦心)을 막으려 하는 것인가? 전에는 윤득화(尹得和)가 있었고 뒤에는 조중회(趙重晦)가 있어서 대신을 쫓아내려 하니, 그 마음은 곧 편당(偏黨)하는 것이다. 아! 내가 일찍이 옛날 조심하던 덕(德)을 본받아 털끝만큼도 지나치게 받든 예가 없었다. 사묘(私廟)에 전배하여 심회(心懷)를 펴고자 함은 아들된 도리이니, 또한 어떻게 지나친 예라고 하겠는가? 앞의 김유(金濰)의 무리나 뒤의 조중회 또한 명류(名流)를 배운 자들이었던가? 합문을 닫은 일은 내가 어찌 즐겨 했겠는가? 김상적(金尙迪)의 임금을 위한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배달(排闥)하는 일은 후일의 그 폐단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이목(耳目)의 직임을 맡은 관원이 서로 머뭇거리는데, 조태상(趙台祥)의 해괴한 거조와 허채(許采)의 미봉책(彌縫策)은 또한 무슨 마음이었는가? 기무(機務)를 정지하고 한번 유시하려 한다. 원량의 가례(嘉禮)가 이미 가까웠고 이해도 또한 곧 바뀌게 되었다. 무룻 조신(朝臣)들은 이런 의리를 깨닫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우리 원량을 보필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조중회의 소장은 그 근본이 김유(金濰)와 김시위(金始煒)에게서 말미암았다 하여 김유 등을 대망(臺望)에 천거한 전관을 삭직하라고 명하였다.
장령 허채(許采)가 상소하기를,
"위원 군수(渭原郡守) 박종성(朴宗誠)은 오로지 탐독(貪黷)만 일삼았고, 귀성 부사(龜城府使) 최성(崔晟)은 용렬하고 탐포(貪暴)하며, 횡성 현감(橫城縣監) 안윤복(安允福)은 도살의 금법을 범하여 여러 사람에게 공궤했습니다. 청컨대, 모두 파직하소서. 고창 현감(高敞縣監) 유응기(兪應基)는 혼모(昏耗)하고 무식하니, 청컨대, 체개(遞改)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사과(司果) 윤봉구(尹鳳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보은(報恩)의 춘추사(春秋祠)에 공자(孔子)의 영정을 봉안하고 주자(朱子)를 배향한 지 대개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지난 기유년232) 에 본원이 규모(規模)가 조잔한 때문에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의 영당인 산앙사(山仰祠)로 옮겨 봉안하려고 하였는데, 의논이 간혹 어긋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주자의 창주 정사(滄洲精舍)에 송조 칠현(宋朝七賢)을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에게 낮추어 배향한 사례와 성주(星州) 천곡 서원(川谷書院)에 정자(程子)·주자(朱子)를 주향으로 삼고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을 낮추어 배향한 사례를 이끌어 공자·주자의 영정(影幀)을 산앙사(山仰祠)로 옮겨 봉안하고, 송시열을 낮추어 배향하고 인하여 산앙사를 춘추사(春秋祠)로 편액(扁額)을 고쳤습니다. 전하께서 특별히 엄교(嚴敎)를 내리신 것은 대개 대성인(大聖人)을 후현(後賢)의 사우에 내려 봉안한 때문인데, 다만 그 옮겨 봉안하게 된 한 절차가 신의 말로써 말미암은 것이었으니, 그 허물은 실로 신에게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 일을 어찌 다시 끌어낼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대개 작년에 사원을 훼철하였을 때 윤봉구(尹鳳九)가 이로 인하여 삭직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직첩(職牒)을 돌려주교 복직시켰으므로 소장의 말이 이와 같았다.
대사헌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상께서 학문함에 반드시 자주 되풀이되는 뉘우침은 없어야 할 것인데, 오히려 이와 같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정자(程子)가 복왕(濮王)233) 의 전례(典禮)에 대하여 논하기를, ‘비록 대통(大統)에 전념(專念)함이 마땅하나, 사친(私親)에 대한 은혜를 어찌 일체 끊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고, 우리 나라 선정신 이이(李珥)도 선묘조(宣廟朝)께서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당(祠堂)에 몸소 제사지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홍문관의 관원으로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니, 그 말이 함께 《경연일기(經筵日記)》에 실려 있습니다. 그 당시 선묘조께서 친히 지낸 제사가 만약 봄·가을 정제(正祭)였다면, 위로 종묘를 받드는 데 있어서 융성함을 견준 것으로 의심하여 정지하기를 청한 말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만약 혹 따로 작헌례(酌獻禮)를 올려 정례(情禮)를 편다면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 행하는 바가 매년 한두 차례 전배(展拜)하여 효성을 편다면 이는 실로 나이 50세에 부모를 사모하는 심정에서 나온 것이니, 온 나라 사람들이 누가 부당하다고 하겠습니까? 오직 지극한 심정이 있다 하여 혹 마음에 내키는 대로 곧장 행하여 동가(動駕)가 일정함이 없게 됨을 면치 못한다면 지인(知仁)의 과오라고 하겠으나, 실로 지나침이 없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저 조중회의 소장은 이미 위곡(委曲)함이 부족하고 또 경망(輕妄)한 데에 관계되니, 본디 죄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다른 뜻이 없고 다만 군부의 진선 진미(盡善盡美)함을 바란 것뿐이니, 어찌 깊이 죄줄 것이 있겠습니까? 설령 죄를 준다 하더라도 또한 그 정상의 경중을 참작하여 해당되는 율로 감처(勘處)함이 마땅할 것이니, 어찌 사형에 이르겠습니까? 성교(聖敎)의 감죄(勘罪)한 바는 아마도 적중하지 못한 듯하니, 신은 그윽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중회에 관한 일은 이미 처분을 내렸고, 또 대유(大諭)에 유시했으니, 경은 모름지기 양해하라. 원량의 가례가 가까워졌으니, 곧 올라와서 이 뜻에서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사관에게 가서 전유(傳諭)하도록 명하였다.
회양 부사(淮陽府使) 구택규(具宅奎)가 상소하여 양전(量田)을 고쳐 시행하는 편의(便宜)를 진달하고, 겸하여 호역(戶役)의 폐단을 논하였으며, 오래 된 환곡(還穀)을 감면하여 흉년에 목전의 위급함을 펴게 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12월 21일 경오
혜성(彗星)이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는 1장(丈) 4, 5척쯤 되었고, 빛깔은 담적색이었으며, 간방(艮方)을 가리켰다.
사직 유복명(柳復明)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와 상소하여 서울의 부상(富商) 이진철(李震哲)이 화폐를 숨겨 들어가서 몰래 매매(賣買)한 죄를 진달하고 형배(刑配)하여 후일을 징계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2일 신미
혜성(彗星)이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가 1장(丈) 6, 7척 가량 되었다.
12월 23일 임신
혜성이 나타났다.
정언 유언호(兪彦好)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면계(勉戒)의 말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그 면계는 옳으나, 이미 유시하였는데 무엇을 또 유시하겠는가?"
하였다.
12월 24일 계유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홍문관 제학 오광운(吳光運)을 불러 반궁(泮宮)에서 황감제(黃柑製)를 설행하게 하고, 수석을 차지한 진사 이만회(李萬恢)를 직부 전시하도록 명하였다.
12월 25일 갑술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조중회(趙重晦)의 상소로 인하여 상소하여 대변(對辨)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중회가 신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심양(瀋陽)에 갔을 때의 일을 논박하였는데, 그 말이 심히 준열하여 신이 실로 두렵고 부끄럽습니다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50리 밖에 나가 지영(祗迎)한다는 것은 저들이 그렇게 지휘한 것이지 신의 뜻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안마(鞍馬)는 종전부터 절사(節使)에게 으레 내려 주는 물건이었고, 심양에 있었을 때 곧 이미 비장(裨將) 이만유(李萬囿)에게 주었으니, 신이 무슨 관여한 바가 있겠습니까? 황은(皇恩)이 망극하다는 말은 장계와 묘당에서 왕복한 문서에 이런 말이 없었고, 가정의 사서(私書)는 외인이 볼 수 없는 것이니, 대관(臺官)이 어디에서 이것을 얻어냈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그 스스로 지어내어 스스로 전파하고는 스스로 비웃는 것이니, 신의 알 바가 아닙니다. 득의 양양하게 돌아왔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그 말이 참으로 지나칩니다. 신이 외람되게 중임을 맡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으니, 비록 억지로 슬픈 사색(辭色)을 지으려 하여도 또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허황되고 가소로움이 이와 같으니, 춘추(春秋)의 의리가 아마도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피곤함은 참으로 심하니, 진실로 대신의 반열에 얼굴을 들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체척(遞斥)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마땅히 면유(面諭)하겠다. 상신은 상신의 체통이 있고 연소한 명관(名官)은 연소한 명관의 체통이 있는 법인데, 경을 위하여 개연스럽게 여기는 것은 경에게 오히려 소년의 경박한 기습(氣習)이 남아 있는 것이다. 나의 뜻을 모두 개유하였는데, 경이 어찌 마음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또한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수찬 이창의(李昌誼)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상적(金尙迪)이 배달(排闥)을 제론(提論)한 거조는 곧 사태가 급박하여 걸음을 늦출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니,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그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후폐에 관계된다고 하여 옥중(獄中)에 가두었으니, 이 어찌 성명(聖明)의 정사에 어긋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김상적에 관한 일은 이미 대유(大諭)에 유시하였으니, 이는 후폐를 막으려는 뜻이다. 이미 칙려하는 뜻을 보였으니, 특별히 석방하여 상신들이 나올 길을 열어 놓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6일 을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도성에 돌아왔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왕세자의 가례(嘉禮) 납징(納徵)을 행하였다.
12월 27일 병자
혜성이 나타났다.
하교하기를,
"탐라(耽羅)에서 진상 물품을 압령(押領)하여 오던 사람들이 바다 가운데에서 표류하다가 3개월 만에 왔으니, 그 돌보아 줌이 마땅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옷감을 주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8일 정축
혜성이 나타났다.
윤휘정(尹彙貞)을 승지로, 이익정(李益炡)을 대사간으로, 한현모(韓顯謨)를 예조 참의로, 이징서(李徴瑞)를 경상도 우병사로, 이경기(李景琦)를 공홍도 수사로 삼았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또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돈유(敦諭)하도록 명하였다.
장령 한원진(韓元震)이 전의 일을 끌어대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지난 일을 가지고 어찌하여 시애(撕捱)하는가? 사직하지 말고 올라오라."
하였다.
12월 29일 무인
혜성이 나타났는데, 크기는 천랑성(天狼星)만하고, 꼬리의 기이는 1장 7, 8척쯤 되었으며, 간방(艮方)을 가리켰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세자의 가례에 대한 고기(告期)를 행하였다. 예를
마치자, 예조 판서 민응수(閔應洙)가 말하기를,
"세자빈 조현례(朝見禮) 의절 가운데, ‘대왕 대비전에게 이미 초부(醮婦)의 의례를 행하였으면 높은 데에 통속(統屬)된다는 뜻으로 하룻 동안에 중궁전(中宮殿)에게 다시 초부(醮婦)의 의례를 행할 수 없다.’는 것은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의 의논이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조현례는 구고(舅姑)가 소중한데 궁중전에 빠뜨리고 행하지 않는다면 예절에 결함이 될 듯하니, 양일로 나누어서 조현례를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영상과 좌상의 의논에 따라 행하라고 명하였다.
이해에 여러 도에 여기(癘氣)가 크게 번져 사망자가 6, 7만 명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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