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기묘
밤에 혜성(彗星)이 실수(室宿) 도내(度內)의 벽수(壁宿) 서쪽에 나타났는데, 빛깔은 담적색(淡赤色)이고 간방(艮方)을 가리키고 있었다.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하유하기를,
"매년 농사를 장려하는 일이 으레 겉치레가 되고 있다. 나의 심기(心氣)는 오직 백성의 일에 전력하고 있는데 백성의 근본이 되는 것은 농사이다. 이 칙계(勅戒)를 삼가 본받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일 경진
밤에 혜성이 실수 도내의 벽수 서쪽에 나타났는데, 크기는 천랑성(天狼星)만하고 꼬리의 길이는 2장(丈)쯤 되었으며 빛깔은 담적색이었고, 간방(艮方)을 가리키고 있었다.
경상 감사 김상성(金尙星)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보(邸報)001) 로 인하여 삼가 듣건대, 성상(聖上)께서 신료들의 인접을 거절하시고 기무를 오랫동안 폐기한 탓으로 중외가 진동하여 들끓고 대소 신료들이 초조하고 당황해 하니, 서울과 멀리 떨어진 영외(嶺外)의 어린아이들까지도 분주하게 오가면서 서로 고하기를 마치 위망(危亡)의 화가 당장 임박한 것처럼 한다고 합니다. 아!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아! 저 뭇 신하들은 참으로 전하를 저버린 죄를 졌지만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야 또한 무슨 죄이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우러러 경종(景宗)의 부탁을 받든 것은 곧 숙종(肅宗)께서 편안하게 하기 위해 걱정하시던 서업(緖業)인 것이니, 환하게 하늘에 계신 영령도 반드시 위에서 깜짝 놀란 것입니다. 전하의 이 거조는 뭇 신하들을 끊어 버리기 위해서는 차마 할 수 있는 것일지라도 만백성의 기대를 어떻게 차마 저버릴 수 있으며, 비록 만백성은 관계없는 것처럼 여기는 일을 차마 할 수 있을지라도 양성(兩聖)의 부탁을 어떻게 차마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대저 요순(堯舜)의 도(道)는 효제(孝悌)뿐입니다. 전하의 성효(聖孝)가 우뚝하게 뛰어나심을 어느 누가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뭇 신하들 가운데 성심(聖心)을 모르는 사람들은 장차 반드시, ‘일개 조중회(趙重晦) 때문에 이런 비상한 거조가 있게 되었다.’라고 할 것입니다만, 신은 전하께서 이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상의 일단의 고심은 세도(世道)를 크게 혁신시켜 뒷날 할 말이 있게 하기 위한 것인데, 뭇 신하들이 이를 저버렸기 때문에 격뇌(激惱)가 갈수록 가중되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신민(臣民)을 사절하고 깊은 구중 궁궐 속에 계시게 되면 천지(天地)가 막히고 상하(上下)가 단절되어 그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유독 아홉 살이 된 원량(元良)을 위한 만년(萬年)의 계책은 세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종묘와 태후에 대해 어찌하시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대유(大諭)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장령 심익성(沈益聖)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상하의 뜻이 막혀 온 조정이 초조하고 당황해 할 때를 당하여 대사간 조적명(趙迪命)은 거처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도 일이 다 지나가고 정해진 뒤에야 비로소 몇 마디 말로 진달하였고, 곧이어 또 정단(呈單)하여 체직(遞職)되기를 도모했으며, 대사성 이종백(李宗白)은 태연히 성균관에 들어가 시사(試士)하고 과경(課經)하는 일을 마치 평온한 평상시처럼 하였으니, 아울러 파직시켜야 합니다. 후원(喉院)002) 의 여러 신하들은 그저 두려워하기만 하면서 아무 동정(動靜)이 없다가 수삼 차의 장주(章秦)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서둘러 진계(陳啓)하여 완만하게 청대(請對)했으니, 또한 견책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조중회에게 가죄(加罪)할 것을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상소를 도로 내어 주고 삭직(削職)시키게 하였다.
승지 김상로(金尙魯)가 임금에게 말하기를,
"옥당(玉堂)에서 올린 차자의 체례(體禮)는 대각(臺閣)에서 올린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인데 비답이 없이 도로 내려 보내는 것은 실로 전에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받아들이고 추후 옥당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내렸다. 이에 앞서 교리 한익모(韓翼謨)가 차자를 올렸는데도 비답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월 3일 신사
밤에 혜성이 실수(室宿) 도내(度內)의 벽수(壁宿) 서쪽에 나타났는데, 크기는 천랑성(天狼星)만하고 꼬리의 길이는 2장(丈)쯤 되고 빛깔은 담적색(淡赤色)이었으며, 간방(艮方)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1품 중신(重臣)을 보내어 사직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섭행하게 하고 하교하기를,
"지금의 이 마음은 오직 나의 백성들에게 있으니, 나의 풍년을 기원하는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뜻을 본받아 향소(享所)에 계칙하라."
하였다.
1월 4일 임오
임금이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재로(金在魯),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경기 감사 유엄(柳儼)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나에게 만일 지나치게 존대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갑진년003) 에 상신(相臣)이 진달(陳達)했을 적에 하나의 ‘대(大)’자에 대해 어찌 겉으로 꾸며서 상례의 사양을 할 수가 있겠는가? 아! 내가 부덕하고 배움이 모자라기는 하지만 이미 계체(繼體)의 명을 받들어 선덕(善德)을 실추시키지 않고 삼가 방국(邦國)을 지켰으니, 선인(先人)을 높이고 광명스럽게 한 것이 크다. 이번의 대유(大諭)속에 있는 ‘존(尊)’이란 한 글자에 대해서는 나에게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임금을 높이면 선인도 높이게 된다는 그런 뜻이었다. 우리 조가(朝家)의 법이 이미 엄정하여서 옛날부터 전해온 훈계가 한(漢)·당(唐) 때보다도 탁월하였으니, 어찌 감히 이와 같은 해괴한 말들을 오늘날에 진달할 수 있겠는가? 한번의 거조를 부정(不正)함에 놀라운 거조가 느닷없이 발생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오늘날에 아첨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곧 나의 가법(家法)을 문란케 하고 나의 조정의 근저를 문란케 하는 것이다. 만약 엄중히 방지하여 뿌리를 끊지 않으면 뒷날 무슨 얼굴로 능침(陵寢)에 배알하고, 선왕의 영혼을 뵐 수 있겠는가? 만일 다시 제론(提論)하는 자에게 마땅히 엄중히 다스릴 것이니, 이런 뜻으로 중외에 밝게 유시(諭示)토록 하라."
하였다. 이때 임금이 조중회의 일 때문에 정신(廷臣)에게 노여움을 품고 있었는데, 종신(宗臣) 전은군(全恩君) 이돈(李墩)이 망령되게 임금이 사친(私親)을 추숭(追崇)하려는 뜻이 있는 것이라고 헤아리고, 이에 상소하여 한(漢)나라 문제(文帝)와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임금에게 추숭할 것을 청하였으나 승정원에서 물리치고 봉입(捧入)하지 않았으며, 임금도 하교하여 엄히 지척(指斥)하고 또 이 전교를 내린 것이다. 이어 경기(京畿)의 재해(災害)를 입은 곳에 대해 대동미(大同米)를 차등을 두어 감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나리포(羅里浦)의 곡식 5천 곡(斛)을 제주(濟州)로 이급(移給)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는 본도(本島)에서 흉년이 들었음을 고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1월 5일 계미
초혼(初昏)에 혜성이 맑은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보였는데 형체의 크기와 꼬리의 길이는 구름이 짙은 때문에 측후(測候)할 수 없었다.
조관빈(趙觀彬)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1월 7일 을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중회(趙重晦)와 조태상(趙台祥)은 그 말은 다르지만 그 귀결점은 모두 신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두면(頭面)을 서로 바꾸어 기정(奇正)이 잇따라 나왔는데, 숨겨진 예봉(銳鋒)과 보이지 않는 독으로 뒤를 담당하였으므로 더욱 두려워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일단 상직(相職)에서 해임되면 모두 무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1월 8일 병술
혜성이 위수(危宿) 도내(度內)의 실수(室宿) 서쪽으로 옮겨서 나타났는데 성체(星體)는 천랑성(天狼星)에 견주어 조금 컸고 꼬리의 길이는 2장(丈)쯤 되었으며, 빛깔은 담적색(淡赤色)이었고 간방(艮方)을 가리키고 있었다.
1월 9일 정해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정사(正使) 판중추부사 김흥경(金興慶), 부사(副使) 낙풍군(洛豐君) 이무(李懋)를 보내어 풍산 홍씨(豐産洪氏)를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책봉하니, 빈은 세마(洗馬) 홍봉한(洪鳳漢)의 딸이었다. 그 교명문(敎命文)에 이르기를,
"왕은 이르노라. 저사(儲嗣)는 일국(一國)의 근본이고 그 배필은 만복의 근원인 것이다. 이처럼 중대한 혼인은 반드시 간택을 신중히 하는 것이 대저 고금의 공통된 의리이고 곧 풍화의 기틀이 되는 것이다. 생각건대 원량(元良)이 숙성하여 다행히 종조(宗祧)를 부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지위가 이극(貳極)004) 에 높았으니 일찍이 역내(域內)의 민심이 매여 있었고, 예(禮)는 삼가(三加)005)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곤내(梱內)의 보좌가 바로 시급하게 되었다. 건도(乾道)는 반드시 곤화(坤化)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乾道必資坤化]고 하는데 더구나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또한 가정의 정제(整齊)에 근본함이겠는가? 이에 훌륭한 원빈(媛嬪)을 구하기 위해 이름난 가문에서 두루 선발하였노라. 아! 너 홍씨(洪氏)는 대대로 경복(慶福)을 누려온 집안에서 태어나 품질(稟質)이 정숙하고 단아하여 상서로운 화기가 이미 용의(容儀)에 드러나, 과단성 있게 스스로 살폈으므로 행동이 저절로 규도(規度)에 맞으니 여스승의 가르침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더구나 출생한 것도 동갑(同甲)인데 하늘의 배필에 견줄 정도로 아름다워 경사(慶士)도 모두 가하다 하였고 귀서(龜筮)006) 도 좋다고 하였다. 이에 정사(正使) 모관(某官) 모(某)와 부사(副使) 모(某)를 보내어 부절(符節)과 예물을 갖추어서 그대를 왕세자빈에 책봉하노니, 그대는 공경히 총장(寵章)을 입고 아름다운 모범에 힘써서 효경(孝敬)을 돈독히 하여 삼전(三殿)을 받들고 자혜(慈惠)를 미루어 육궁(六宮)을 화목하게 하라. 그리고 사치가 흉덕(凶德)임을 알아서 몸소 검소함을 실천하고 연안(宴安)은 곧 짐독(鴆毒)이니 반드시 일에 부지런하라. 다스림은 내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기업(基業)을 만년토록 공고하게 하고, 복은 하늘이 거듭 명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니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백세토록 면면히 이어가게 하라. 영원히 이 훈계를 유념하여 시종 해이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 나는 이제 부탁할 사람을 얻었으니 끝없는 홍운(鴻運)을 점칠 수 있다. 너는 주야로 덕을 도와 좋은 모유(謨猷)를 후손에게 남겨주는 일에 변치 말기 바란다. 그래서 이에 고시하는 바이니, 마땅히 상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44책 59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22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註 004] 이극(貳極) : 세자.[註 005] 삼가(三加) : 관례(冠禮) 때에 세번 관(冠)을 갈아 씌우는 의식. 초가(初加)에는 입자(笠子)·단령(團領)·도아(絛兒), 재가(再加)에는 사모(紗帽)·단령·각대(角帶), 삼가(三加)에는 복두(幞頭)·공복(公服)을 씌웠음.[註 006] 귀서(龜筮) :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점을 쳐서 그 일의 길흉을 가리는 것으로, 귀(龜)는 불에 태워 금이 트는 것으로 점을 치는 것이고, 서(筮)는 점대를 가지고 점을 치는 것임.
대사간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비답하기를,
"원량(元良)의 집지(執贄)007) 가 가까운 시일 안에 있어야 하는데, 숙덕(宿德)을 지닌 사람이 의당 보도(輔導)해야 하겠기에 도헌(都憲)008) 에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여 경이 와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니, 이런 깊은 뜻을 본받아 즉시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박필주가 또 상소하여 병을 핑계대면서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유(大諭) 가운데 학문으로 이름난 무리들이라고 한 하교가 있었는데 성의(聖意)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상세히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신이 유망(謬妄)한 탓으로 이런 하교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대개 신과 같이 불초한 사람이 학문을 했다는 거짓 명성을 얻은 것을 항상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었는데, 지금 성유(聖諭)는 바로 신의 몸을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성의에 과연 미안스럽게 여기는 점이 있으셨다면 분명히 설파하시는 것이 조금도 불가할 것이 없는데도 이에 범연히 혼동해 지척하면서 짓밟고 무시함으로써 당세에 학명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불안한 마음을 품게 하였으니, 이는 성덕에 손상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옛날 송(宋)나라의 신하인 명도(明道) 정자(程子)는 인재(人材)에 대해 논하게 된 것을 인하여 임금인 신종(神宗)을 경계하기를, ‘폐하께서 어찌하여 천하의 선비를 경시(輕視)하십니까?’ 하니, 신종이 말하기를, ’짐이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소신(小臣)도 또한 원컨대, 전하께서 신 등의 일 때문에 누(累)가 타인에게 미치지 않게 해 주셨으면 사류(士類)들에게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면유하였다.
사직의 서쪽 담장 밖에 호랑이 발자국이 낭자했으므로 비국(備局)에서 삼군문(三軍門)으로 하여금 쫓아서 잡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월 11일 기축
초혼(初昏)에 혜성이 서방의 하늘가인 위수(危宿)의 도내(度內)에 나타났는데 별의 크기와 꼬리의 길이는 구름이 짙게 끼어 측후할 수 없었다.
이날 왕세자의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임어하니 궁관(宮官)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문(東門)을 경유하여 들어와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한 다음 서계(西階)로 올라가 자리에 나아가 서남쪽을 향하여 섰다.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가 술을 술잔에 따르고 사옹원 정(司饔院正)이 찬탁(饌卓)을 올리니, 왕세자가 자리에서 내려와 술을 입에 댔다가 떼고 나아가 어좌(御座) 앞에 꿇어앉았다. 임금이 명하기를,
"가서 너의 아내를 맞이하여 나의 종사를 받들게 하되 엄하게 거느리도록 힘쓰라."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신 모(某)는 삼가 교명을 받들겠습니다."
하고, 사배(四拜)를 행한 다음 서계(西階)로 내려와 어의궁(於義宮)으로 나아가 빈(嬪)을 맞이하였고 대내(大內)로 돌아와 초례(醮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초계(醮戒)는 중한 것이다. 이후로 가례(嘉禮)의 초계 때에는 진찬관(進饌官)을 사옹원 정으로 차출한 것을 기록하여 항식으로 정하게 하라."
하였다. 사옹원 정이 천찬(薦饌)하는 것은 곧 《오례의(五禮儀)》에 기재되어 있는데도 근래에는 으레 가함(假銜)으로 정(正)아라 일컬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1월 12일 경인
혜성이 서쪽 하늘가에 나타났는데 저녁 햇살과 함께 없어져서 전도(躔度)009) 의 소재와 별의 크기, 꼬리의 길이는 모두 자세히 측후하지 못했다. 밤에 유성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3척쯤 되었으며, 빛이 땅을 비추었다.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고 사면령을 내리기를,
"왕은 이르노라. 정비(鼎匕)010) 에 상서가 응결되니 일찍이 만백성의 기대가 매일 데가 있게 되었고 진저(震邸)에서 아내를 맞이하니 비로소 대혼(大婚)의 의식을 보게 되었다. 이에 십행(十行)의 윤음(綸音)을 반포하여 팔방(八方)에 경사를 알린다. 생각건대 나는 덕이 부족한 몸으로 늦게 현저(賢儲)를 얻었는데 면질(綿瓞)011) 의 노래가 일어나니 본손과 지손이 성대하기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고, 요도(夭桃)012) 의 노래를 전파해 읊으니 항상 실가(室家)가 화목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어찌 부모의 지극한 마음일 뿐이겠는가? 진실로 종가의 대계를 위한 것이다.
왕세자빈 홍씨는 덕은 규예(嬀汭)013) 처럼 아름답고 경사롭게 심원(沁園)014) 에서 자랐으며, 길쌈하고 책 읽는 것은 아보(阿保)의 아름다운 교훈을 따라 행하였고 금반(衿鞶)과 환패(環珮)는 규곤(閨梱)의 아름다운 용모를 꾸몄다. 군자의 좋은 배필임은 이미 사중(四重)015) 에 합치하였고 성대한 의식(儀式)은 이에 백량(百兩)016) 을 갖추었다. 이미 금년 정월 11일(기축)에 세자에게 초계(醮戒)하여 친영(親迎)을 마치었다. 가아(佳兒)와 가부(佳婦)가 좋은 짝을 이루니 도(道)는 인륜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영색(令色)과 영의(令儀)가 매우 아름답게 빛나니 덕은 곤순(坤順)에서 도움받게 되었다. 규도(規度)는 변조(拚棗)017) 에 어김이 없을 것이 진실로 만복의 근원을 연 것이고, 장경(莊敬)은 부계(副筓)018) 를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니 육궁(六宮)의 칭송이 높이 오를 것이다. 다행히 원량(元良)이 아름다운 배필을 두었으니 길이 장락(長樂)019) 의 융숭한 기쁨을 받들게 되었다.
뇌우(雷雨)의 은택은 사방으로 흐르는 법이니 잘못된 하자를 깨끗이 탕척하여야 하며, 천지의 인(仁)은 널리 입게 되는 것이니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파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달 12일 매상(昧爽) 이전의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사유(赦宥)하여 주고, 벼슬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씩 올려 주되 자궁자(資窮者)는 대가(代加)하게 하라. 보록(寶籙)이 크게 응하니 인지(麟趾)020) 의 교화가 떨치고 순희(純禧)021) 를 성대히 맞이하니 연익(燕翼)022) 의 모유(謨猷)가 양양(洋洋)하리라. 때문에 이렇게 교시하는 것이니 마땅히 상세히 알아야 한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官提學) 원경하(元景夏)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44책 59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23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 사법-행형(行刑)
[註 010] 정비(鼎匕) : 《주역(周易)》의 진괘(震卦)에 나오는 말로서, 원래는 종묘에 제사지낼 때 쓰는 기구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임금이 장자(長子)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임.[註 011] 면질(綿瓞) : 《시경(詩經)》 대아(大雅) 면장(綿章)을 가리킴. 수박 덩굴이 처음에는 작은 것이 나중에는 커져서 마구 뻗어 나가는 것처럼 국가의 장래가 무궁하기를 축원하는 내용임.[註 012] 요도(夭桃) : 여인이 시집가는 것을 읊은 노래로 《시경》 주남(周南)의 도요장(桃夭章)을 가리킴.[註 013] 규예(嬀汭) : 규수(嬀水) 북쪽이라는 말로 옛날 순임금이 살던 곳. 요임금이 그의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그곳에 있는 순임금에게 시집보낸 데서 나온 말로, 여기서는 곧 세자빈이 아황과 여영처럼 아름답다는 뜻으로 쓰임. 《서경》 우서(虞書) 요전(堯典)에 나옴.[註 014] 심원(沁園) : 동한(東漢) 명제(明帝)의 딸 심수 공주(沁水公主)가 전원(田園)을 갖고 있었던 데서 나온 말로 공주를 일컫음. 여기서는 세자빈 홍씨의 6대조 홍주원(洪柱元)이 선조(宣祖)의 딸인 정명 공주(貞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진 사실을 말함.[註 015] 사중(四重) : 중언(重言)·중행(重行)·중모(重貌)·중호(重好)를 말하는데, 《법언(法言)》 수신(修身)에 나옴.[註 016] 백량(百兩) : 제후의 딸을 시집보낼 때에는 수레 1백 대를 동원하여 보낸다는 데에서 온 말로 성대한 혼인을 치르는 것을 말함. 《시경》 소남(召南) 작소장(鵲巢章)에 나옴.[註 017] 변조(拚棗) : 며느리가 시부모를 뵐 적에 대추나 밤 등의 폐백(幣帛)을 담는 상자인데 며느리로서의 예의를 잘 지켰다는 뜻으로 쓰였음. 《예기(禮記)》의 혼의(婚儀)에 나옴.[註 018] 부계(副筓) : 귀부인이 정장을 할 때 하는 머리 장식.[註 019] 장락(長樂) : 임금의 어머니를 가리킴. 장락은 궁명(宮名)인데, 한(漢)나라 때 임금은 미앙궁(未央宮)에 거처하고 모후(母后)는 장락궁에 거처한 데서 온 말임. 또 장락궁이 동쪽에 있었으므로 모후를 흔히 동조(東朝)라고도 하였음.[註 020] 인지(麟趾) :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비(后妃)의 덕(德)이 자손 종족(子孫宗族)까지 선화(善花)한 까닭에, 황후(皇后)·황태후(皇太后)의 덕(德)을 가리키는 말임. 《시경(詩經)》 주남(周南) 인지지(麟之趾)장에서 시인이 후비의 덕을 노래하였음.[註 021] 순희(純禧) : 큰복.[註 022] 연익(燕翼) : 조상이 자손을 도와 편안하게 하는 것.
전교(傳敎)하기를,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어찌 오늘이 있을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것이 어찌 부덕한 내가 이루어놓은 것이겠는가? 진실로 열성조께서 깊고도 두터운 은덕을 베풀어 그것이 살과 뼈에 흡족하게 젖은 소치인 것이다. 이제 우러러 보답하려 한다면 이 백성을 버리고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아! 신하된 사람은 삼대(三代)로 임금에게 권해야 할 것이요, 한(漢)·당(唐)으로 권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돌아보건대 오늘날의 우리 백성들이 어찌 한나라 문제(文帝)가 봄에 조서(詔書)를 내리던 그때와 같겠는가? 아! 묘당의 신하들은 마음을 다져 먹고 백성을 보호하고 구제할 방책을 강구토록 하라."
하였다.
이하원(李夏源)을 대사헌으로, 이정욱(李挺郁)을 사간으로, 황경원(黃景源)과 박홍준(朴弘儁)을 정언으로, 윤광의(尹光毅)를 부응교로, 원경순(元景淳)을 수찬으로 삼았다.
1월 13일 신묘
매상(昧爽)에 혜성이 동방(東方) 하늘가에 나타났다. 모양·색깔, 꼬리와 길이와 전도(躔度)는 동이 트면서 밝은 빛이 나서 측후할 수가 없었다. 태백성(太白星)이 낮게 나타났다.
가례(嘉禮) 때의 노고로 정사(正使)·부사(副使)와 도감(都監)의 여러 신하들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전교관(傳敎官)인 승지(承旨) 이명곤(李命坤)과 윤휘정(尹彙貞), 사옹원 부제조 원평 도정(原平道正) 섭(爕), 상례(相禮) 허옥(許沃), 도청(都廳) 이천보(李天輔)와 민백행(閔百行), 보덕(輔德) 김상신(金相紳), 필선(弼善) 이광운(李光運)에게도 아울러 가자(加資)하게 하였고, 천찬관(薦饌官)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 이형중(李衡中)에게는 처음에는 준직(準職)에 제수하라고 명했었는데 이조에서 참하관에게 준직을 제수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여 전례에 따라 6품으로 승진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월 13일 신묘
권신(權賮)을 헌납으로, 조원명(趙遠命)을 판윤으로 삼았다.
1월 14일 임진
혜성이 또 동방의 하늘가에 나타났는데, 성체(星體)는 금성(金星)에 견주어 조금 크고 빛깔은 담적색(淡赤色)이었다.
관상감이 아뢰기를,
"본감(本監)의 첨성대에서는 막힘없이 바라볼 수가 없어 혜성이 낮게 내려간 뒤에는 측후할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본감의 관원으로 하여금 남산(南山)에 올라가 관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동시에 정고(呈告)하여 상직(相職)을 해면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6일 갑오
매상(昧爽)에 혜성이 또 동방에 나타났는데 성체(星體)는 금성(金星)보다 조금 크고 꼬리의 길이는 1장(丈) 7, 8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담적색(淡赤色)이었고 건방(乾方)을 가리키고 있었다. 밤에 달이 태미원(太微垣) 안으로 들어갔다.
홍상한(洪象漢)을 승지로, 조명리(趙明履)를 대사성으로, 윤득화(尹得和)를 대사간으로, 김상적(金尙迪)을 교리로 삼았다.
찬선(贊善) 어유봉(魚有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성심(聖心)에 격뇌(激惱)되는 바가 있어 합문(閤門)을 닫고 조정에 나아가 시사(視事)하지 않자, 허다한 날들을 대소 신료들이 오래도록 청대(請對)를 하였는데도 명을 얻지 못하자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다가 결국 서로 이끌고 문을 밀치고 들어가기에 이르렀으니, 성명(聖明)의 비상한 거조가 어찌하여 여기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이는 아마도 전하의 춘추가 높아져 지기(志氣)가 점점 해이해져서 함양(涵養)하는 공부가 충실하지 못하고 능히 다스리는 노력이 아직 공고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의 일동 일정(一動一靜)과 일어 일묵(一語一默)은 모두 원량(元良)께서 보고 느끼고 본받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연기(年紀)가 쇠모(衰暮)했다 하여 퇴저(退沮)함이 있어서는 안되며, 또한 시상(時象)과 폐습(弊習) 때문에 오뇌(懊惱)하는 바가 있어서도 안됩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큰 일을 하려는 뜻을 분발하여 더욱 부지런히 학문에 뜻을 두고 더욱 힘써 학문을 부지런히 하시게 되면, 원량의 성덕을 성취하는 그 근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가납하였다.
헌납 권신(權賮)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지는 전하의 부모이고, 대신(大臣)은 전하의 팔 다리이고, 대각(臺閣)은 전하의 눈귀이고, 여민(黎民)은 전하의 적자(赤子)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상황을 살펴보면 요사스러운 혜성이 3개월 동안 없어지지 않고 있고 태백성이 또한 낮에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부모의 노여움이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이며, 삼공(三公)이 서로 이끌고 인입(引入)하여 낭묘(廊廟)가 한때에 텅 비었으니 이는 팔다리를 폐기한 것이며, 말할 책임을 맡은 관원이 비록 있다지만 한 해가 다 가도록 논계하는 일이 없어서 대청(臺廳)에 먼지가 일고 있으니 이는 눈귀가 막혀 있는 것이며, 애통해 하는 교서를 부지런해 내렸지만 해마다 흉년이 겹쳐 백성이 궁핍해도 호소할 데가 없으니, 이는 일국(一國)의 적자들이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형세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멸망하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더구나 이 네 가지를 겸하여 가지고 있는데도 나라를 잘 보존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하늘에 보응하는 일을 실상으로 하고 겉치레로 하지 않으신다면 인애하는 하늘이 감응하는 것이 북을 치면 소리가 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될 것이니, 혜성을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으며 태백성을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랫사람을 성심으로 대하면 전하의 신하된 사람으로서 그 누가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분주하지 않겠으며 의지할 데 없고 고할 데 없는 사람들 또한 어찌 모두 춘대(春臺)의 고무(鼓舞)하는 가운데 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재신(宰臣)이 상소를 올리고는 멋대로 나가는 것은 정성이 전혀 없는 행위이니, 이에 대해 약간의 견책을 시행하는 것을 그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곧바로 영어(囹圄)에 내려 곤욕을 가하였으니, 이는 총신(寵臣)을 면려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이조 참판 원경하(元景夏)가 갑자기 상소하 고 도성(都城)을 나갔으므로 임금이 그가 곧바로 떠난 것을 노엽게 여겨 하옥시켰다가 얼마 안 있어 풀어 주었는데, 권신이 말한 재신은 곧 원경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세도(世道)가 날로 더욱 비하됨에 따라 인심도 날로 더욱 함닉되어 변괴가 잇따라 발생하고 기정(機穽)이 삼엄하게 벌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전에는 도움을 주던 사람도 지금은 그만두기를 바라고 있고 세상에 증험해도 효상(爻象)이 또 이러합니다. 따라서 정신(廷臣)들이 기필코 죽기를 한하고 고집하면서 분수를 이끌어 스스로 뜻을 세워 행하려는 사람이 신 등뿐만이 아닙니다. 이는 진실로 또한 만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조처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7일 을미
혜성이 또 동방에 나타났는데, 성체(星體)는 금성에 견주어 조금 컸고 꼬리의 길이는 2장쯤 되었으며, 빛깔은 담적색(淡赤色)이었고, 건방(乾方)을 가리키고 있었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무리가 토성과 목성을 감아 돌았다.
임금이 세자와 세자빈을 데리고 태묘(太廟)에 알현했다. 기일에 앞서 유사가 빈궁(嬪宮)의 위차를 제일실(第一室)의 문밖에다 서쪽을 향하도록 설치하였는데, 임금이 너무 핍존(逼尊)된다 하여 제십이실(第十二室)의 문밖에다 북쪽을 향하여 옮겨 설치하게 하였다. 묘현례(廟見禮)를 행하고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말하기를,
"내전(內殿)의 묘현례는 갑술년023) 복위(復位) 때 처음 행한 뒤에 병자년024) 에 단의 왕후(瑞懿王后)께서 행하시고, 임오년025) 에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서 행하였는데, 의문(儀文)이 아직 완비되지 않아서 대전(大殿)과 세자는 모두 뜰 아래에서 행례(行禮)하고 유독 빈궁만 문밖의 계단 위에다 위차를 설치한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하고, 명하여 《대명회전(大明會典)》과 《대명집례(大明集禮)》를 상고해 보게 하였더니 모두 뜰 위에서 행례하게 되어 있었고, 문 밖에다 북쪽을 향하여 위차를 설치하게 되어 있었다.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북향한 것은 바로 내가 정한 것인데 고례(古禮)와 은연중 합치되었다.
하였다.
한성부에서 아뢰기를,
"역종(逆宗)의 여얼(餘孼)인 이인환(李人煥)·이인욱(李人煜) 형제가 사면령으로 인하여 사유되었는데 이들이 독기를 머금고 분을 뿜어 강촌(江村)의 백성 서태명(徐泰明)이란 자를 구타하여 보복할 계획을 세우려 했으니, 그가 국가의 기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령(生靈)들에게 해를 끼친 죄는 마땅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월 18일 병신
사서(司書) 홍익삼(洪益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왕세자께서 서연을 열지 않은 것이 이미 4개월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추운 겨울이 서연을 여는 데 방해롭고 예후(睿候)가 간혹 미령하였고 대례(大禮)가 또한 앞에 당한 데 연유된 것이기는 합니다만, 권강(勸講)하는 직책에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한폭(寒曝)026) 의 걱정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조속히 한두 명의 강관(講官)으로 하여금 날마다 나아가 접견하고 의리에 대해 강설하게 하소서. 또 아침·낮·저녁에 서연을 여는 여가에는 위의(威儀)를 간략하게 하고 또 소대(召對)를 내려 조용히 강하고 토론하는 것을 가인(家人)이나 빈우(賓友)들이 하는 것처럼 한다면 자연스럽게 학문이 진취될 뿐만 아니라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걱정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민간의 질고와 농사와 간난에 대해서도 마땅히 문자(文字)의 과한(課限) 이외에 언급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춘방(春坊)027) 에 명하여 내일부터 전례에 의거하여 서연을 품하게 하였다.
1월 19일 정유
밤에 달이 항성(亢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진연(診筵)에서 승지 홍상한(洪象漢)에게 말하기를,
"의문(儀文)은 예(禮)에 있어 중요한 것인데 《오례의(五禮儀)》를 지금 바로잡아 고치고 있으니, 중궁(中宮)·빈궁(嬪宮)의 묘현의(廟見儀) 가운데 잘못된 것도 고쳐서 내리게 하라. 묘현례 때 전하(殿下)의 대차(大次)는 종묘(宗廟)의 동문(東門) 밖의 재전(齋殿) 안에다 설치하고 중궁전(中宮殿)의 위차는 재전의 동쪽의 마땅한 지점에 설치하게 되어 있으며 【만약 왕세자가 수가(隧鴐)할 경우에는 소차(小次)를 재전 안의 적당한 곳에 따라 설치하며 세자빈도 같이 행례(行禮)할 경우에는 소차를 중궁전의 위차(位次) 뒤에 적당한 곳에 설치한다.】 전하의 판위(版位)는 묘정(廟庭)과 영영전(永寧殿)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또 【왕세자의 판위는 상의(常儀)와 같게 한다.】 입위는 종묘와 영녕전의 문밖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다고 하여 【왕세자는 단지 전알(展謁)만 행하고 묘문(廟門) 밖 소차에 머물러 있고 만약에 세자빈도 같이 행례(行禮)할 경우에는 왕세자의 입위는 전하의 입위 뒤에 동쪽으로 가깝게 하되 서쪽을 향하게 한다.】 이 책의 전의 의문(儀文)에 ‘하루 전에 설치한다[前一日設]’고 한 아래와 전의가 설치한다.[殿儀設]’고 한 위의 사이에 첨서(添書)하며, 종묘와 영녕전에서의 왕세자빈의 묘현의에는 왕세자의 배위(拜位)는 묘정(廟庭)과 영녕전의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만일 어린 나이여서 전하가 데리고 행할 경우에는 전하의 판위 뒤에다 상의(常儀)와 같이 설치한다.】 또 입위(立位)는 종묘와 영녕전의 문 밖에다 동쪽으로 가깝게 하여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며, 【전하가 데리고 행할 경우에는 중궁전의 묘현의와 같다.】 세자빈의 배위(拜位)는 조계(阼階) 위에다 동쪽으로 가깝게 하여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고 했는데, 이를 그책 전의(前儀) 속의 하루 전에 설치한다[前一日設]고 한 아래와 그날[某日]이라고 한 위의 사이에 첨서(添書)하여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상신(相臣)에게 묻게 하여 의주(儀註) 가운데 부록(附錄)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사서(士庶)의 동추(同樞)도 오히려 3대를 으레 추증하는데, 더구나 국군(國君)의 사친(私親)을 아버지만 추증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이어 이조에 명하여 인빈 김씨(仁嬪金氏)·숙빈 최씨(淑嬪崔氏)에게 아울러 3대를 추증하게 하고 이묘(二廟)에 고유(告由)하게 하였다.
1월 20일 무술
매상(昧爽)에 혜성이 동방에 나타났는데 성체(星體)는 금성에 견주어 조금 컸고 꼬리의 길이는 2장쯤 되었으며, 빛깔은 담적색(淡赤色)이었고 감돌아 곤방(坤方)을 가리켰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형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기를,
"세자 빈객(世子賓客)이 형옥관(刑獄官)을 겸대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전례가 있으니, 본직(本職)을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사간 이정욱(李挺郁)이 상소하여 경학(經學)을 궁구한 선비를 돈소(敦召)하여 동궁을 교도(敎導)하게 할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상벌이 한번 문란해지면 인심이 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천찬관(薦饌官)에게 곧바로 준직(準職)을 제수하고 두 승지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게 한 일은 옛날에 있지 않던 일로 상을 외람되이 시행했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좌의정 송인명을 인견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자주 내리시니, 전하의 근면하신 덕으로 국세와 민사(民事)가 이렇게 위태로운 것은 생각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편하고 안일함만 도모하여 도리어 나이 어린 원량(元良)에게 수고로움을 남겨 주려 하십니까?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만 번 죽음을 받는 한이 있어도 결코 봉행할 수 없습니다. 신이 올린 심단(尋單)은 오로지 근일의 일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릇 만절(晩節)을 잘 보존하기는 어려운 것이어서 《서경(書經)》에도, ‘시작은 있지 않은 이가 없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이는 드물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상께서는 일찍이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때의 일을 가지고 하교하신 적이 있습니다만 명나라 신종(神宗)이 만기(萬機)를 게을리한 것과 숭정제(崇禎帝)가 뭇 신하를 의심한 것은 실로 감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근일 하교하신 뜻을 다시는 마음에 머물러 두지 마시어 국세가 반석처럼 안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상(時象)을 돌아보니 세념(世念)이 다 없어지지만 한 조각 고심만은 시종 한결같다. 따라서 이렇게 한 연후에야 돌아가 황형(皇兄)의 얼굴을 배알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위에 있으면서 원량에게 일을 맡겨 기무를 익히게 하여 지려(志慮)를 조장(助長)하게 하는 것을 나는 현재의 제일의 의의로 여겼었는데 이제 경의 말을 들으니, 나의 마음이 감동된다. 경 등이 이로 인하여 먼저 물러가려 하니, 이는 상하가 서로 미더워하지 못한 탓인 것이다. 이제부터 내가 고쳐 도모하겠으니 경 등은 모쪼록 이런 뜻을 본받아 함께 국사를 해 나가도록 하라."
하자, 송인명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시니 종사가 다행합니다."
하였다. 이때 우의정 조현명은 소장을 올리고 양주로 갔고 영의정 김재로와 송인명은 함께 정고(呈告)하여 임금의 마음이 매우 불쾌한 상태였다. 이에 이르러 김재로와 송인명이 또 소장을 올려 상직(相職)에서 해임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함께 올라오게 했는데 송인명이 명을 받들고 먼저 들어왔다.
이천보(李天輔)를 승지로, 조경(趙擎)을 헌납으로, 조운규(趙雲逵)를 정언으로 삼았다.
1월 21일 기해
달이 방성(房星)을 범하였다.
1월 22일 경자
혜성이 해돋이 때 희미하게 보였는데 성체(星體)가 있는 것 같았으나 곧 소재(所在)를 잃어버렸다.
임금이 사은 정사(謝恩正使)인 양평군(楊平君) 이색(李穡), 부사(副使) 이일제(李日躋), 서장관(書狀官) 이유신(李裕身)을 불러서 접견하고 선온(宣醞)하라 명하고 위유 면려하여 보냈다. 이에 앞서 청나라 황제가 심양(瀋陽)에 나와 있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영접했는데 사신이 돌아올 때 수서(手書)와 안마(鞍馬)의 하사가 있었으므로 또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게 한 것이다.
1월 23일 신축
집의 윤봉구(尹鳳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잘못이란 우연히 그렇게 된 경우도 있고 하려고 해서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횡거(橫渠) 장씨(張氏)는 마음에서 생겨나고 생각에서 발하여진다는 것으로 폄우(砭愚)028) 의 글에서 발명(發明)하였습니다. 전하의 전후에 있었던 지나친 거조에 대하여 지난번 내리신 비망기(備忘記)에서 이미 두루 말씀하였는데 3,4년마다 반드시 한 번씩 있었으니 임어(臨御)하신 지 수십 년에 이런 거조가 모두 몇번이나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한 가지 일 때문에 격뇌(激惱)하실 경우 본사(本事) 이외에 번번이 별건(別件)의 비상한 거조가 있어 왔는데 이번은 전일보다 또 더한 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혹 격뇌한 끝이라서 우연히 이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여기기도 했습니다만, 두 번 세 번에서 다시 네 번 다섯 번에 이르러서는 매양 우연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뭇 신하에 대해 격뇌할 경우에 고의로 이런 비상한 거조를 하심으로써 경동(警動)시키려고 그러시는 것은 아니십니까? 이와 같은 일은 한나라 고조(高祖)의 전도된 여술(餘術)에 불과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평일에 매양 요순(堯舜)처럼 되기를 스스로 기약하고 계셨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십니까? 무릇 사람이 모르고서 한 것은 그 잘못이 작지만 알고서 한 것은 그 잘못이 큰 것입니다. 이는 실로 사사로운 뜻에 뿌리를 둔 것으로서 그 본원을 끊어버리지 못한 때문에 일에 따라 발현되는 것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세밀히 점검하여 보소서. 갖가지 병통의 근원은 모두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만사의 근본이고 임금의 한 마음은 또 천하의 대본(大本)인 것입니다. 임금이 요순(堯舜)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요순 같은 정치가 있게 되는 것으로, 한(漢)·당(唐)의 성세(盛世)와 쇠세(衰世)도 그 임금의 마음에 연유하여 그림자가 메아리처럼 반응이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전하의 마음속에 있는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의 소장(消長)과 승부(勝負)는 단지 이 세도(世道)에서 증험할 수 있는 것이어서 전하의 정녕한 하교를 기다리지 않아 사람마다 모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고요히 보존되었을 때의 마음을 더욱 엄히 지니시고 의념(意念)의 싹을 더욱 엄밀히 살핌으로써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는 공부에 추호도 미진함이 없게 하신다면 손을 마주 잡고 단정히 앉아 독경(篤敬)하는 마음만 지니고 있어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성색(聲色)을 크게 하지 않아도 백성들을 교화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납하고 말하기를,
"즉시 올라와서 나의 원량을 보좌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는 병 때문에 달려오지 않았는데 임금이 수서(手書)로 도승지 유건기(兪建基)에게 명하여 가서 유시하게 하니, 김재로가 비로소 명을 받들고 입대하였다.
특별히 이조 판서 이기진(李簊鎭)을 내쳐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이조 참판 원경하(元景夏)를 내쳐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삼았다. 두 사람은 함께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완만함과 준엄함이 각기 달랐기 때문에 가부(可否)를 논함에 있어 오랫동안 서로 잘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원경하는 소장을 올리고 도성을 나갔으며 이기진도 곧바로 여주(驪州)로 돌아갔기 때문에 원경하를 하옥시켰었다. 이때에 이르러 원경하를 불러서 하문하기를,
"요석(僚席)과 서로 구애가 되었기 때문에 피하여 떠났는가?"
하니, 원경하가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임금이 둘 다 그르게 여기고 진정시키기 위해 상신(相臣)에게 순문(詢問)하여 아울러 내쳐서 외방에 보임시키고 특별히 이종성(李宗城)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백성을 잘 보존시키는 정사를 하는 것이 곧 내가 고심하고 있는 것인데 가부(佳婦)를 보고부터 더욱 영구히 이어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수령을 잘 가리지 않으면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고통에 허덕이는 백성을 보존시킬 수가 없다. 한나라 선제(宣帝)가 나와 함께 다스릴 자는 오직 진실로 이천 석(二千石)029) 뿐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하니,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하나의 수령을 가리지 않으면 온 경내(境內)가 다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현읍(縣邑)이 잘 다스려진 연후에야 조정이 잘 다스려지는 것이고 전하께서 조정을 잘 다스리는 것은 오직 학문·사변(思辨)과 고금의 치란의 자취를 살펴보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자,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좌윤(左尹) 오광운(吳光運)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삼대(三代) 때 나라를 향유(亨有)한 것이 장구했던 것은 저사(儲嗣)에게 관인(寬仁)으로 훈계한 때문이었습니다. 한나라는 관대함을 바탕으로 하여 나라를 세웠으며 고조(高祖)·혜제(惠帝)·문제(文帝) 때에는 반역자를 제외하고는 귀근(貴近)으로서 죄를 받아 죽은 사람이 있지 않았으니, 이것이 4백 년의 기업을 수립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경제(景帝) 이후 법을 쓰는 것이 점차 준엄하여져 조조(晁錯) 등 여러 사람이 억울하게 죽은 경우가 있었으니 대체로 대(代)를 이은 임금은 깊숙한 궁궐에서 생장하여 뭇 신하들을 점점 가볍게 보게 되는 데 반하여 임금의 수단은 점점 민활해져 가는 법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나라 이후 관인(寬仁)하기로는 당(唐)·송(宋) 같은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역년(歷年)이 가장 장구했었던 것입니다. 명나라가 나라를 창립한 공업은 탕왕(湯王)·무왕(武王)보다도 나았지만, 역년이 장구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식자들은 모두 너무 엄중하고 급하게 한 소치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성상께서는 일마다 후대에게 좋은 모유(謨猷)를 남겨 주는 방도에 대해 유의하고 계시는데 격뇌되었을 때는 간혹 하교하는 말을 가리지 않으시어 ‘속히 방형(邦刑)을 바루기 위해서는 평형(烹刑)에 처해야 한다.’고 한 하교도 있으셨는데 이는 진실로 성상의 망발인 것입니다. 이것이 가설적인 말이기는 합니다만 임금은 희언(戱言)이 없는 법이고 저사(儲嗣)를 훈도하는 도리도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기호(畿湖)와 해서(海西)에 바야흐로 흉년이 들었으니 큰 경사가 있는 때에 마땅히 휴식(休息)시킬 것을 생각해야 된다는 이유로 제도(諸道)의 봄 조련(操鍊)을 정지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정석오(鄭錫五)가 경연관은 명경과 출신이 무릅쓰고 겸대(兼帶)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극력 사퇴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정석오는 명경으로 급제했기 때문이었다. 아조(我朝)의 과목(科目)에 명경으로 사람을 뽑아온 지가 오래되었다. 퇴계(退溪)·율곡(栗谷) 등 여러 현인들이 모두 명경으로 진출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는가? 그런데 말류(末流)의 폐단이 오로지 구두(口讀)만을 숭상했기 때문에 드디어 제술과(製述科)와 나뉘어 둘이 된 것이다. 심지어 속언(俗諺)에 하찮게 업신 여겨 ‘명경과(明經科)’라고 부르기에 이르렀으니 이 명경과에 급제한 사람은 지위가 숭품(崇品)에 이르러도 감히 경연관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체차되고야 말았다. 과거가 옛날과 같지 못한 것이 이러하니,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이주진(李周鎭)을 대사헌으로, 정형복(鄭亨復)을 대사간으로, 권현(權賢)을 집의로, 홍득후(洪得厚)와 정광운(鄭廣運)을 장령으로, 이광식(李光湜)을 사간으로, 김시찬(金時粲)을 헌납으로, 정기안(鄭基安)을 지평으로, 김선행(金善行)과 송창명(宋昌明)을 정언으로, 정석오(鄭錫五)를 판의금부사로, 유척기(兪拓基)를 내의원 도제조로, 윤봉구(尹鳳九)를 전선으로 삼았다.
1월 24일 임인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1월 25일 계묘
임금이 옥당의 관원을 불러서 접견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소학》의 글을 익히 완미하고 독실하게 좋아했으니 감히 《소학》의 도리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다만 나의 의지만은 그와 같았다. 그런데 그 대문(大文)의 출처가 혹 상세하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세종조(世宗朝)의 사정전(思政殿)에서 훈의(訓義)를 내었던 고사를 따라 문학이 있는 사람과 더불어 장(章)마다 주(註)를 달아 선정전 훈의라고 명명하려고 하니, 옥당의 여러 신하들은 오로지 찬집을 관장하고 참찬관 김상로(金尙魯)·이천보(李天輔)와 홍문관 제학 오광운(吳光運)으로 하여금 함께 참고하게 하라. 친히 서문을 지어 내리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소학》의 쇄소(灑掃)·응대(應對)에 관한 예절(禮節)은 곧 《대학(大學)》의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동궁을 교회(敎誨)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나도 또한 만년에 쓰고 싶다. 어느 날 내가 세자를 불렀더니 막 밥을 먹고 있는 중이었는데 뱉아내고 대답하기에 내가 물어 보았다. 그런데 대답하기를, ‘《소학》에 밥이 입에 있으면 토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어린 나이에도 이런 의리를 아는 것이 어찌 글을 읽은 효험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승지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무과(武科)의 강규(講規)는 다른 것에 견주어 더욱 어렵습니다. 거자(擧子)들 가운데 권세가 없는 사람은 맞힌 화살의 숫자가 많다 해도 권세 있는 자가 맞힌 화살의 숫자가 적을 경우에는 많이 맞힌 사람을 억눌러 적게 맞힌 사람의 아래에다 두려고 하고, 글뜻을 구문(鉤問)할 때는 기필코 석방시키려고 하며, 심지어 녹명 단자(錄名單子) 속의 일점 반획(一點半畫)도 반드시 까다롭게 적발하여 발거(拔去)시킴으로써 먼 고장의 거자들이 이 때문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폐단을 엄히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시(武試)의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엄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6일 갑진
밤에 유성이 장성(張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5,6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푸른 색이었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영경연사 송인명도 함께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심(正心)·성의(誠意)는 나누어 두가지 일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성의는 뿌리이니 나무에 뿌리가 없으면 반드시 말라 죽는 법이다. 사람이 성의가 없다면 어떻게 진보해 나갈 곳이 있겠는가? 상하가 서로 힘쓰는 것이 좋은 것이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러하시니, 학문하는 방도를 깊이 체득하신 것입니다."
하였다. 유신(儒臣) 김상적(金尙迪)이 말하기를,
"소동파(蘇東坡)의 만언소(萬言疏)에 이른바, ‘오늘 한 가지 일을 행하고 내일 또 한가지 일을 행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깊이 생각해야 될 부분입니다."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수어사(守禦使) 민응수(閔應洙)가 본청(本廳) 별고(別庫)에 저장된 갱미(粳米) 2백 곡(斛), 중미(中米) 2천 곡은 곧 긴급할 때 어공(御供)에 쓰기 위한 것인데, 세월이 오래 되어 썩고 손상되었으니 개색(改色)하는 준례에 의거하여 기내(畿內)의 군민(軍民)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에 도로 거두어 들임으로써 손상되는 폐단을 제거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당한 국가에서 어공물(御供物)로써 출납(出納)하고 염산(斂散)한다는 것은 매우 구차스러운 일이다. 지부(地部)030) 의 전세(田稅)와 서로 바꾸도록 하라."
하였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를 황해도 수군 절도사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박문수는 홍계희(洪啓禧)의 무함을 받고서부터 교외에 나아가 살면서 도성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지난 겨울 임금이 정신(廷臣)들을 인접하지 않았을 적에 박문수가 교외에서 도성으로 들어와 청대(請對)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자 드디어 하루에 세번 소장을 올려 간하였다. 일이 안정되자 다시 소장을 올리고 도로 돌아가니 임금이 하교를 내려 분의(分義)에 의거하여 질책하고 내쳐 외직에 보임시켰다.
1월 27일 을사
이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말하기를,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은 곧 신의 아내의 형이니 연지친(連枝親)과 같은 정의가 있어 법률상 마땅히 상피(相避)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서종옥이 또한 상소하기를,
"인친(姻親)에 혐의를 두는 것은 국전(國典)에서 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양전(兩銓)에 상피를 통용하는 것은 공의(公議) 또한 엄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또한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9일 정미
밤에 유성이 천선성(天船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1월 30일 무신
판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소하여 약원 도제조에서 해임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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