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9권, 영조 20년 1744년 2월

싸라리리 2025. 9. 27.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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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경술

밤에 유성이 각성(角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우의정 조현명이 현도(縣道)를 통하여 소장을 올려 상직(相職)에서 해임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승지를 보내어 가서 효유하게 하였다.

 

이조 참의 윤급(尹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신(大臣)이 연중(筵中)에서 전 이조 판서의 일에 대해 논한 내용에, ‘동료 당상관이 스스로 자신의 뜻을 잘 지키지 못한 탓으로 정주(政注)에 치우친 점이 없을 수 없었다.’라고 했는데, 이른바 동료 당상관은 신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공사(公私)와 편정(偏正)에 대한 이야기는 으레 두 가지의 모양이 있게 마련인데, 어떤 사람은 피차를 논할 것 없이 오직 그 사람의 가부(可否)만 보는 것을 공정한 것으로 삼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가부는 따지지도 않고 오직 피차를 고르게 기용하는 것만 보는 것을 공정한 것으로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저 이 둘 중에 누가 참으로 공적으로 하여 사적인 것이 없으며 누가 참으로 올바르게 하여 치우친 면이 없게 한 것인가에 대해 세상에 반드시 변론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송인명이 상소하기를,
"당사자가 스스로 반성하여 혐의스러움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지나치게 하거하기에 이른다는 말입니까? 편정(偏正)에 관한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신이 또 이에 대해 따져 말함으로써 마치 장단(長短)을 가리는 것처럼 하여 동조(同朝)의 화기를 잃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였다. 전 이조 판서는 곧 이기진(李箕鎭)이다. 송인명은 탕평을 주장하고 윤급은 준론을 외쳤기 때문에 그 말이 이러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무신년031)  관무재(觀武才)는 인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기 위해 설행했던 것이고, 갑인년032)  의 관무재는 곧 내가 사복(嗣服)한 뒤 처음 행한 것이었는데 그 뒤에는 소소한 시재(試才)에 불과한 것이었으니, 이것이 어떻게 군민(軍民)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할 수 있겠는가? 지난번 성첩(城堞)을 수보하는 일로 하교하였는데 군병이 있은 연후에 성첩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번의 경과(慶科)는 사첩(史牒)에도 드물게 기재되어 있는 것이어서 경향(京鄕)의 많은 선비들이 반드시 모두 모여 관광(觀光)할 것이니, 이러한 때 군민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을 더욱 그만둘 수 없다. 내가 바야흐로 관무재를 설행하려 한다."
하니,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성상의 뜻은 비록 위로하고 기쁘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만 지금 나라의 저축이 탕갈되어 있고 재이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으니, 어찌 외면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경비가 드는 큰 폐단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가을을 기다려 설행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이 관무재는 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곧 위문하고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과거(科擧)가 겹쳐 있는 것이 금년 같은 해가 없는데 경과(慶科)의 정시(庭試)를 전례에 따라 초시(初試)로 설행한다면 어찌 기쁨을 기록하고 경사를 함께하는 뜻이 되겠는가? 관무재는 단지 첫날 친림(親臨)하여 시장(試場)을 개설하고 겸하여 문신의 정시를 설행하게 하며, 시험을 마친 뒤에 경과는 초시를 제외하고 전시(殿試)에 친림하여 관무재에서 직부(直赴)한 사람과 일체로 같이 전시에 붙이게 하면 경사를 함께 하여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는 뜻과 옛날의 규례를 따라 비용을 줄이는 방도 등 하나를 거행하여 세 가지를 함께 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의조(儀曹)033)  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문신 참하관을 구처(區處)할 방도가 없어 침체되어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으로 을묘년034)   방(榜) 이상은 아울러 6품으로 승진시켜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2월 4일 임자

임금이 세자를 거느리고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계묘년035)                  에 경종(景宗)을 모시고 이 전(殿)에 배알했었는데 오늘 봉심(奉審)에는 원량(元良)이 따라왔다. 지난 날을 추억하니 감회가 절로 깊이진다."
하고, 친히 절구 한 수를 지어 재실의 벽에 걸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계묘년에서 지금까지 22년이 되었는데
그해에 어찌 오늘이 있을 줄 알았겠는가.
훈시의 뜻 주야로 마음에 새겨 행하기 위해
부지런히 힘쓰고 정성껏 노력하는 옛날의 신하로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에게 하유하기를,
"‘부지런히 힘쓰고 정성껏 노력하는 옛날의 신하로다. [孜孜眷眷舊時臣]’라는 일곱 글자에는 깊은 뜻이 있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내조(乃祖)와 내부(乃父)의 아들이요, 손자들이니 모쪼록 이 시의 뜻을 본받아 내조와 내부가 열조를 섬기던 그것으로 원량을 섬겨 위로는 나를 저버리지 말고 아래로는 내조와 내부를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일어나 절하였다. 승지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동가(動駕)할 때 사복시 정(司僕寺正)이 진연(進輦)·진여(進輿)하는 것이 《오례의(五禮儀)》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근래 사복시 정이 유고하게 되면 그가 내승(內乘)을 겸대(兼帶)하고 있기 때문에 내승으로 하여금 체행(替行)하게 하는데 이는 매우 《오례의》의 본의가 아니니, 마땅히 외시(外寺)의 차관(次官)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체(事體)에 있어 구간(苟簡)스럽게 해서는 안되니 사복시 정을 구전(口傳)으로 차출하게 할 것을 기록하여 정식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지금 이 전(殿)의 칭호를 봉자전(奉慈殿)이라 일컫기도 하고 남별전(南別殿)이라 일컫기도 하고 영희전(永禧殿)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당초 건립했을 때의 칭호와 열조의 영정을 봉안하게 된 시말에 대한 연 월 일(年月日)을 사실대로 기록한 문가가 없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해 내어 한 통의 책자로 엮게 하여 예람(睿覽)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임금이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에게 이르기를,
"문장은 상하를 분변하기 위한 것이다. 대가(大駕)의 연(輦)을 메는 군사들이 이미 홍호의(弘號衣)를 입었는데 동궁(東宮)의 연을 메는 군사들이 입은 옷도 또한 같은 색깔이니, 매우 분별하는 뜻이 없다. 청의(靑衣)나 흑호의(黑號衣)로 고치게 하라."
하였다.

 

2월 6일 갑인

특별히 귀양가 있는 민창수(閔昌洙)를 방면시키게 하였다. 이에 앞서 경기 감사 유엄(柳儼)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이 순력(巡歷)할 때 민진원(閔鎭遠)의 묘소를 지났는데 무덤이 무너져 황량하여 매우 민망하고 딱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듣고 측은해 하면서 그 고을에서 보수하게 하라고 명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지난번 기백(畿伯)036)  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항상 탄식하고 있었는데 지난밤 꿈에 작고한 민 봉조하(閔奉朝賀)가 보였다. 아! 민창수를 그때 작처(酌處)한 것은 관전(寬典)이라고 이를 만한 것이었으니 이는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옛날을 추모해서인 것이다. 봉조하의 아들은 단지 민창수가 있을 뿐인데, 이렇게 고단한데다 또 대사(大赦)를 당했으니, 특별히 전리(田里)로 방귀(放歸)시켜 아비의 묘소를 지키게 하라."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유엄과 민창수는 인호(姻好)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 말로 임금을 감동시키려고 한 것이지 실상 그의 묘소에 간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2월 8일 병진

이익정(李益炡)을 이조 참판으로, 윤용(尹容)을 대사헌으로, 이철보(李喆輔)를 대사간으로, 윤봉구(尹鳳九)를 집으로, 이연덕(李延德)을 장령으로, 이제원(李濟遠)을 헌납으로, 유언민(兪彦民)을 지평으로, 민백창(閔百昌)을 정언으로, 김시형(金始炯)을 판윤으로, 서명빈(徐命彬)을 예조 참판으로, 서종옥(徐宗玉)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이때 한림(翰林)에서 패천(敗薦)된 사람은 다시 행공(行公)할 수 없게 되어 있었으나, 번번이 승륙(陞六)037)  을 허락하였으며, 피천(被薦)되었다가 저지당한 사람도 그렇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이에 대해 하문하니, 답하기를,
"한림(翰林)에서 패천된 사람은 옛날에는 다시 천사(薦事)에 해당시켰는데 중간에 와서 비로소 다시 천거하지 못하게 하는 규례가 있게 되었으며 또한 반드시 우선 삭직시켰다가 완천(完薦)되기를 기다려서 본직(本職)에 환부시켰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번번이 승륙을 허락하니 이는 이미 옛 구례에 어긋난 것이며 피천(被薦)되었다가 저지된 자도 특별히 출륙(出六)시키는 것은 더욱 의의가 없는 것입니다. 아직 분관(分館)038)  되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분관시켜야 하고, 이미 분관된 사람은 당연히 본관(本館)에 그대로 출사시키게 해야 하는 것인데, 어찌 한천(翰薦)에 저지당한 사람을 서둘러 출륙시켜 마치 발탁하여 권장시키는 것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드디어 이후로는 한림에서 패천된 사람과 저지된 사람에게 출륙을 허락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직장(直長)과 봉사(奉事)를 승부(陞付)시키는 것은 산정(散政)039)   때 해도 되지만 출륙(出六)시키는 것은 반드시 도정(都政)을 기다려서 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병조에서 곧바로 허사과(虛司果)를 내는 것은 산정에서도 혹 할 수 있지만 또한 반드시 생원(生員)·진사(進士)·음관(蔭官) 가운데 6품강(六品講)040)  의 합격자가 없은 연후에야 비로소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유학(幼學)이나 남행(南行)041)  인 시직(侍直)으로서 6품강을 거치지도 않은 사람을 곧바로 허사과로 승부시키고 있으니, 매우 일을 잘 살피지 못한 것임은 물론 또한 훗날의 폐단에도 관계가 됩니다. 마땅히 6품을 환수하고 해당 당상(堂上)을 추고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평안 병사 조윤성(趙允成)이 의주(義州)의 병비(兵裨)를 추치(推致)하려 했으나 부윤(府尹)        박사창(朴師昌)이 끝내 보내 주지 않은 것은 사율(師律)에 관계된다는 것으로 파출시킬 것을 치계(馳啓)하였다. 평안 감사        김약로(金若魯)는 박사창이 치적이 있고 또 진구(賑救)할 때를 당했다는 것으로 잉임시킬 것을 장청(狀請)하기를,
"군율을 무너뜨린 것 때문에 파직시킬 것을 논하였고 민사(民事)가 긴급한 것 때문에 잉임시킬 것을 청한 것은 군율과 민사 두 가지가 다 당연함을 얻은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어떤 이는 ‘만윤(灣尹)042)                  은 운향사(運餉使)를 겸대(兼帶)하고 있으니 곧 사명(使命)인 것이어서 병사가 멋대로 파직을 청할 수 없다.’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병사는 이미 도내(道內)의 주장(主將)인데 장령(將令)을 거역하였다면 변방에서는 사율(師律)이 중한 것이니 병사가 파직을 청하는 글을 올리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다.’라고 하기도 하여 여러 의논이 통일되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에는 벼슬보다 더한 것이 없고 군중(軍中)에는 기율이 중한 것이다. 평시는 긴급한 때와는 다르지만 사율은 반드시 평시에 미리 확립시켜야 한다. 그런 뒤에야 긴급한 때 명령이 행해질 수 있게 되는 법이니 병사는 논책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도신(道臣)은 마땅히 이런 청이 있어야 한다."
하고, 특별히 박사창을 서용하여 의주에 잉임시키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봄이 이미 깊어져 농사일이 바야흐로 바쁜데 경기의 각 고을에서 간혹 이때에 적곡(糴穀)을 받는 일이 있는 데도 있습니다. 이것이 군향(軍餉)을 이전(移轉)하는 것으로서 당연히 수납해야 되는 것입니다만 민폐가 되는 것은 큽니다. 각 군문(軍門)과 산성(山城)을 막론하고 당연히 수납해야 될 것도 아울러 정봉(停捧)시키고 가을을 기다려 수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선정신(先正臣) 장현광(張顯光)의 후손인 장지덕(張趾德)을 벼슬자리가 나는 대로 옮겨서 즉시 수령에 제수하여 향화(香火)043)  를 받들게 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영의정 김재로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2월 9일 정사

보덕(輔德) 민계(閔階)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연석(筵席)에 동궁께서 시좌(侍坐)하여 있었는데 전하께서 특별히 신 등을 인접하시고 전후의 어제(御製)를 내어 보이시고 이어 시를 읽고 뜻을 해석하여 동궁의 앞에서 앙달(仰達)하도록 하셨습니다. 아! 1백 년 동안의 당습(黨習)은 실로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어서 전하의 10년 동안의 조제(調劑)는 고심한 가운데 나온 것이었습니다. 동궁을 교도(敎導)하는 방도에 있어서도 당습(黨習)에 대해 면칙시키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기 때문에 심지어 이를 사구(詞句)로 형용하여 가슴에 깊이 새겨 행하라는 뜻을 명시하신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자(文字)로 훈교(訓敎)하는 것이 심법(心法)을 전수(傳授)하는 것만은 못합니다. 임금의 마음이 한 번 바르게 되면 조정은 바르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이고 임금의 마음에 치우침이 없으면 당습은 제거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제거될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전하의 총명하신 자질은 백왕(百王)들보다 월등히 뛰어나시고 대훈(大訓)의 하교는 돈어(豚魚)044)  도 믿게 할 만한데도 조정이 아직도 완전히 화평하지 못한 것은 어찌 한 마음의 찌꺼기가 혹 다 제거되지 않고 몸소 솔선하신 교화가 그 도리를 극진히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먼저 이 마음을 바로잡아 천리(天理)를 유행케 하시고 사사로운 뜻은 퇴청(退聽)케 하셔서 용사(用捨)하는 사이에 치우치게 하는 일이 없고 희로(喜怒)를 발하는 즈음에도 중도(中道)에 지나친 거조가 없게 하신다면 보고 느끼는 감화가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빠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동궁 저하께서도 반드시 귀에 젖고 눈에 익어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행하게 될 것이니, 보도(輔導)하고 훈교(訓敎)하는 유익함이 어찌 시구(詩句)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만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뭇 신하가 모두 인도하시는 교화 속으로 들게 되고 조정이 저절로 화합하여 힘을 합치는 아름다움이 있게 될 것이니, 이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2월 10일 무오

인정전(仁政殿)에서 문신 당하관의 제술(製述)을 행했는데 고례(古例)에 궁전뜰에 들어오지 않은 자는 금부에 내려 추고하게 되어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 부모가 병이 있어 나오지 않은 사람도 뒤섞어 금부의 추고를 시행해서야 되겠는가? 지금부터는 분간하게 하라."
하였다.

 

2월 11일 기미

이수항(李壽沆)을 도승지로, 임정(任珽)을 이조 참의로, 송익보(宋翼輔)를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교만해지는 데 대한 폐단을 논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보통 사람도 모두 그렇지만 제왕은 더욱 심하다. 국가의 치안(治安)이 오래 이어지면 교만한 마음이 생기기 쉬운 것이다. 당나라 현종(玄宗) 같은 이는 개원(開元) 연간과 천보(天寶) 연간에 판이하게 두 사람같이 되었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성교(聖敎)가 여기에 미치니 이는 국가의 복입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일찍이 도신(道臣)을 역임한 사람이 다시 그 도(道)의 수령이 되었을 경우에는 도신이 특별히 예를 더 갖추어 접대해서 영리(營吏)가 그 고을로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출입할 때에는 역말을 타게 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호사(好事)로 일컬어 왔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대신에게 하문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조정에서 관작(官爵)을 중히 여겨야 외방의 풍화(風化)가 올바르게 되는 것인데, 도백(道伯)을 역임한 적이 있는 사람을 다시 그 도의 수령으로 삼는 것은 조정에 있어서는 관방(官方)이 무너지고 외방(外方)에 있어서는 풍화가 손상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니, 이 뒤로는 그 도의 감사나 병사를 역임한 사람은 그 도의 수령으로 제수하지 못한다는 뜻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기록하여 정식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에서 경상도의 좌우 병사와 함경도의 남북 병사는 의당 구별을 두어야 하니, 해관하(該管下)에만 차임하지 말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하자, 임금이 허락하였다.

 

교서관에 명하여 《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을 중간(重刊)하고 그 판본을 춘추관에 소장하게 하였다. 당초에 종계(宗系)가 잘못되어 오랫동안 변정(辨正)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선조(宣祖)무자년045)  에 이르러 사은사(謝恩使) 유홍(兪泓)이 황지(皇旨)를 얻어내어 속찬(續纂)한 《회전(會典)》을 가지고 옴으로써 비로소 통쾌하게 선계(璿系)가 올바르게 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유홍이 돌아올 적에 산해관(山海館)의 주사(主事) 마유명(馬維銘)이 시(詩)를 지어 주자 유홍이 이를 화답하였다. 복명(復命)하고 나서 아울러 그 시를 아뢰니, 드디어 한때의 사신(詞臣)들에게 차운(次韻)하여 노래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어제시(御製詩) 한 수(首)와 소서(小序)를 내려 뭇 신하들에게 보였다는 것이 선조의 어제 속에 기재되어 있었다. 숙종(肅宗)신사년046)  에 서국(書局)에 명하여 간행 반포하여 널리 전하게 하고 《광국지경록》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또 그 운(韻)을 써서 지은 어제시와 소서를 아울러 내린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그 판본의 소재에 대해 하문하였으나 알아내지 못하였다. 이에 하교하기를,
"《광국지경록》은 우리 나라를 빛나게 한 책인데 운각(芸閣)047)  에 판본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하고, 이어 이 명이 있었고 또 그 운(韻)을 써서 지은 시 한 수와 소서를 아울러 내려 간행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종묘(宗廟) 공실(空室)의 문에 손상된 것이 있으니 날짜를 가려 수개(修改)하게 하기를 청하니,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공실의 문은 상시에는 여닫는 문이 아니고 또 목전의 시급한 걱정이 되기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이를 수리하기 위해서는 십이실(十二室)의 위패를 모두 이안(移安)했다가 환안(還安)해야 할 것이니 일이 매우 중대합니다. 앞으로 옥상에 비가 새는 것을 수개할 적에 아울러 고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12일 경신

급제(及第) 민백상(閔百祥)이 상소하여 자기 아버지 민형수(閔亨洙)를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하니, 임금이 좌의정 송인명을 불러 그 소장을 내어 보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민창수(閔昌洙)의 소장을 견주어 보면 8,9분은 감하여졌습니다. 위시(僞詩)를 보기 전에는 우상(右相)이 어떻게 그 허실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를 가지고 교참(巧憯)한 것으로 몰아넣었으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민창수의 소장은 김용택(金龍澤)을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다. 기유년048)  에 민진원(閔鎭遠)이 번안(翻案)시켜야 한다는 의논을 먼저 주장하였는데 이는 과연 나라를 위한 혈침(血忱)이었다. 그런데 일개 민창수 때문에 민가(閔家)가 혼탁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민창수의 의견이 잘못 들어가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민형수가 우상과 서로 수작(酬酌)할 때 어찌 그 시가 위작이라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위시(僞詩)임이 명백해진 뒤에도 이렇게 굳게 고집하는 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시를 듣고 대신에게 말한 것은 나라를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시를 보고 나서도 위작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장(無將)이다. 이제 우상이 그것이 거짓임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 유인하여 청대(請對)하게 했다고 하는 것은 매우 과중한 것이다. 삼수(三手)049)  의 이야기를 어떻게 감히 오늘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부도한 데 가까운 말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대훈(大訓)이 있은 뒤에는 삼수에 대한 말은 진실로 쓸 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말이 과하기는 합니다만 이미 아비를 위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한다고 했으니, 의당 참작하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민 백상이 아니라도 내가 마땅히 법문(法門)에 임어하겠다. 그가 아비를 위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이라면 정직하게 진달해야만 옳은 것인데 어떻게 감히 수미(首尾)를 꾸며서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멀리서 시상(時象)을 관망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니, 엄히 조처하여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어 그 소장을 불사르고 민백상은 남해현(南海縣)에 도배(島配)시키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변해(辨解)하기를,
"처음 민형수와 신이 함께 위시에 대한 일을 발론하였고 목소리를 같이하여 토죄(討罪)하기를 청했습니다만, 그때 그가 자송(自訟)하는 소장에서 간사한 실정이 다 드러났으니 다행스럽기 그지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민형수는 스스로 억울하게 여기지 않은 것인데, 그가 죽고 나서 그의 형, 아들이 서로 계속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있으니 신은 위 시에 대한 발론이 민형수에게 무슨 억울한 것이 있어 억울함을 하소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민창수의 소장과 신이 변해한 소장이 모두 남아 있으니, 묘당과 후원(喉院)으로 하여금 이 두 개의 소장을 가지고 계하(啓下)한 연설(筵說)과 고준(考準)한 다음 명백하게 분석하여 내리게 함으로써 신으로 하여금 백세(百世) 뒤에서도 스스로 폭백(暴白)될 수 있게 해주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민백상이 그 말의 시비가 어떠한 것인지는 논하지 않고 아비를 위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한다고 말하였는데 문득 중죄(重罪)를 받으면 효리(孝理)에 있어 손상이 있을까 염려스러우니, 마땅히 석방시킬 것을 명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2월 13일 신유

밤에 달이 토성(土星)을 범하였으며 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2월 14일 임술

밤에 달무리가 토성과 목성을 감돌았으며 또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으로 들어갔다.

 

임진하(任震夏)를 사간으로, 박필간(朴弼幹)을 장령으로, 김광국(金光國)을 정언으로 삼았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조관빈(趙觀彬)이 상소하기를,
"신은 부제조 이수항(李壽沆)과 세상이 다 알고 있는 혐의가 있습니다. 신의 사의(私義)에 있어 차마 좌석을 나란히 하고 주선(周旋)할 수 없음은 결연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그렇게 할 것이 아니다."
하고, 그 소장을 내어 주라고 명하였다. 이수항이 상소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역시 도로 내어 주라고 명하였다.

 

2월 15일 계해

달무리가 목성을 감돌았다.

 

2월 17일 을축

교서관에 명하여 사서·삼경·《사략》·《소학》 등의 책을 인출(印出)하게 하고, 하교하기를,
"이번에 간인(刊印)하는 것은 모두가 경서인데 어린 나이에 강하는 것은 더욱 신중히 살펴야 할 것이다. 더구나 훈의(訓義)에 한 글자라도 잘못되는 것이 있게 되면 이것이 어찌 상하가 부지런히 힘쓰는 뜻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창준(唱準)050)  을 계칙시키라."
하였다. 임금이 《만성통보(萬姓統譜)》를 가져다 열람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경성왕(慶成王)은 곧 고황제(高皇帝)의 손자인데 백 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니, 이는 옛날에 있지 않던 일이다. 북쪽으로 신주(神州)051)  를 바라보니 이제는 주씨(朱氏)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비풍(匪風)·하천(下泉)052)  의 생각을 금할 수 없다."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9일 정묘

심육(沈錥)을 호조 참의로, 이창의(李昌誼)와 이휘진(李彙晉)을 장령으로, 어석윤(魚錫胤)을 지평으로, 김상적(金尙迪)을 응교로, 서종급(徐宗伋)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도제조 유척기(兪拓基)가 미호(渼湖)에 물러가 있으면서 일이 있으면 들어오고 일이 끝나면 즉시 되돌아가곤 하였는데 이 직임에 제수되기에 이르러서는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책임이 중하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모시고 올라오라고 하유하였는데도 유척기가 어머니가 병들었다는 것으로 사양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에게 현후(眩候)가 있었으므로 약원에서 탕제를 올릴 것을 청하였는데 도제조가 들어온 뒤에야 된다고 하교하였다. 이리하여 유척기가 부득이 명을 받들었으나 곧 이어 또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과방(科榜)을 낸 뒤에 즉시 분관(分館)을 행하는 것이 곧 정식(定式)인데 근래 분관이 적체되어 과방을 낸 지 3,4년이 되어도 오히려 미처 분예(分隷)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본관(本館)의 관원을 나추(拿推)하여 재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민응수(閔應洙)가 말하기를,
"식년 동당(式年東堂)053)  의 이소(二所)는 으레 시장(試場)을 서학(西學)에 설치하게 되어 있는데 사학(四學)이 모두 무너져버렸으므로 비록 이를 수리하여 시장을 설행하려 해도 과거의 시기가 아미 박두하여 사세로 보아 제때 고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의당 형조나 한성부에 옮겨 설치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서(庠序)와 학교(學校)를 설치한 뜻이 어디에 있는가? 시소(試所)를 형조에 옮겨 설치하고 전후의 교수(敎授)를 아울러 추고하게 하라."
하였다. 민응수가 또 아뢰기를,
"관시(館試)에는 3백 점이 찬 뒤에야 응시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곧 법전에 기재되어 있는데 으레 액수를 채우기가 어려워서 매양 임시 변통하는 거조가 있습니다. 지금 관시에 응시할 사람들 가운데 3백 점이 찬 사람은 13인에 불과하고 백점이상 가점(加點)한 자는 겨우 6인이니, 통상적인 규칙으로 말한다면 전례에 의거 계품하여 차차로 승부(陞府)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원점(圓點)054)  을 50점으로 한정한 새로운 정식(定式)이 있어서 본관에서 전례에 따라서 거행하기에는 곤란한 바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고, 말하기를,
"몇 점까지 응시를 허락할 것인지 마땅히 참작하여 하교하겠으니, 50점 이상인 사람은 점수를 계산하여 써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새로 정식을 삼은 뒤 거재 유생(居齋儒生) 가운데 50점에 찬 사람이 2백 25명이었다. 성균관에서 아뢰기를,
"동당 관시(東堂館試)는 본래 강경(講經)을 위해서 설치한 것이므로 경(經) 공부를 하지 않은 유생들은 논한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고, 경 공부를 한 유생 20인만 써서 올리니, 임금이 특명(特命)으로 아울러 응시할 것을 허락하였다.

 

간원 【사간 임진하(任震夏)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침전(寢橏)의 감등(減等)을 청하는 일을 정지하였다.

 

2월 21일 기사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임순(任珣)을 정언으로, 이덕수(李德壽)를 우참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또 무신(武臣) 이의익(李義翼)에게 해서(海西)의 황당선(荒唐船)에 대한 일을 하문하니, 이의익이 황당선이 육지에 내려와 연해의 백성들과 교통하는 폐단을 성대히 진달하고 말하기를,
"지난번 유귀석(劉貴石)의 일로 말하면 저들의 대포(大布) 5필(疋)을 받고 한강(漢江)의 노정기(路程記)를 써주었으므로 저들이 우리 나라에 강도(江都)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하니, 진실로 적은 걱정이 아닙니다."
하였다.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어유봉(魚有鳳), 참의(參議) 심육(沈錥)에게 음식물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소학》에 훈의(訓義)를 내는 일 때문에 옥당관(玉堂官)을 나누어 보내어 세 유신(儒臣)에게 문의하게 하였는데 그들이 돌아옴에 이르러 박필주는 거처하는 집이 누추하고 자봉(自奉)이 말할 수 없이 단박(單薄)하다고 아뢰니, 임금이 한참 동안 차탄(嗟嘆)하고 나서 말하기를,
"심육의 청렴함은 내가 또한 알고 있다."
하고, 아울러 이 명을 내린 것이었다.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 밀창군(密昌君) 직(樴)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표덕(表德)055)  과 입학(入學), 관례(冠禮)와 가례(嘉禮), 그리고 빈궁(嬪宮)을 책봉(冊封)하는 예(禮)를 이미 이루었으니, 의당 《국조어첩(國朝御牒)》과 《선원보략(璿源譜略)》을 다시 수정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전(慈殿)의 주갑(周甲)이 앞으로 2년이 남아 있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바는 사체가 중대함이 있기 때문이다. 잇따라 계속 간인(刊印)할 필요가 없으니 먼저 어첩(御帖)을 수정하여 올리라."
하였다.

 

임금이 근신에게 하문하기를,
"정원과 옥당이 문안할 때 세자궁(世子宮)에 먼저 하고 그 다음은 현빈궁(賢嬪宮)에 하고 그 다음이 빈궁(嬪宮)에 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차례를 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니, 응교 김상적(金尙迪)이 아뢰기를,
"궁중에서는 의당 가인(家人)의 예(禮)를 적용해야 되고 외조(外朝)에 있어서는 의당 종통(宗統)을 중히 여겨야 될 것이니 빈궁의 문안이 마땅히 현빈궁의 앞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즉시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상고하여 보도록 명하였는데, 효장 세자(孝章世子)와 현빈궁은 모두 소주(小註)에 기재되어 있었다.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선원보략》에 이와 같이 되어 있으니, 유신(儒臣)의 말이 옳다. 문안하는 차례는 이에 의거하여 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2일 경오

우박이 내렸다.

 

2월 23일 신미

남태혁(南泰赫)과 신사관(申思觀)을 장령으로 삼았다.

 

임금이 양정합(養正閤)에서 옥당(玉堂)과 춘방(春坊)의 관원을 인견하였는데 왕세자가 시좌(侍坐)하였다.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향안(香案) 위의 청색지(靑色紙) 한 폭(幅)을 가져다 승지 홍상한(洪象漢)에게 주게 하고 말하기를,
"원량(元良)이 여기에다 글씨를 써 놓은 것이 이미 오래된 것 같은데, 내가 오늘에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하였다. 홍상한이 받들어 펴 보니 곧 왕세자의 예필(睿筆)로 ‘효도는 힘을 다해서 하고 충성은 목숨을 바쳐서 하는 것이 입신 양명하는 길이다.[孝當竭力 忠則盡命 立身揚名之道也]’라고 한 열 다섯 글자를 써놓은 것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단의 글은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千字文)》에 있는 것이고 하단의 것은 곧 《효경(孝經)》의 글인데 합쳐서 문장을 만든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일어나 절하고 찬송하였다. 어떤 이는 판(板)에 내걸기를 청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판에 내걸지 말자고 청하기도 하여 아까워하고 겸손해 하는 뜻을 보였다. 임금이 홍상한에게 명하여 하나를 모사(摸寫)하여 춘방에 보관하고, 승지(承旨)·사관(史官)과 옥당(玉堂)·춘방(春坊)의 관원들에게 아울러 반사하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춘방에서 첩책(帖冊)으로 만들도록 하라. 내가 마땅히 제목을 쓰겠다."
하고, 이어 ‘원량의 글을 가지고 이어 신하들을 면려한다.[將元良書 仍勉群工]’는 여덟 글자를 써서 홍상한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도 똑같이 모사하여 춘방으로 보내라."
하였다.

 

2월 24일 임신

이종성(李宗城)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삼았다.

 

2월 25일 계유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2월 27일 을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엊그제 이어할 때 숙배청(肅拜廳)의 창호(窓戶)를 바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탁지(度支)의 장관을 추고하라고 명하였었다. 그런데 숙배청이 본디 창호가 없는 것은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만들어서는 안될 창호를 창설한 것은 이미 긴요하지 않은 것이니, 추고하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창호도 철거시키게 하고 낭관(郞官)도 도태(陶汰)시키지 말게 하라."
하였다.

 

황해 수사(黃海水使)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당선(唐船)이 어채(漁採)하는 것을 이롭게 여겨 여름이 되면 오지 않는 해가 없는데 이를 인하여 연해의 백성들과 물건을 교역(交易)하는 등 그들이 법을 무시하고 멋대로 하는 습관이 더욱 조장되고 있습니다. 그들을 추포(追捕)하기 위해 온갖 계책을 다 썼지만 힘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지금에 있어 최상의 계책은 비선(飛船)을 많이 만들어 밤낮으로 바다 위에 띄워 놓고 당선의 어채의 이익을 빼앗는 것이 제일이기 때문에 먼저 비선 20척을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만 본영(本營)의 재력으로는 실로 착수하기가 어렵습니다. 감영의 유고전(留庫錢)과 병영의 별비전(別備錢) 각 2백 민(緡), 상정미(詳定米) 50곡(斛)을 특별히 획급해 주도록 허락하면 제때에 배를 만들어 쓸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그 말을 따를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은 간과(干戈)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戰船)을 만들었었는데 옹진(瓮津)이 아무리 피폐되었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帥臣)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
하였다. 형조 참판        이주진(李周鎭)이 말하기를,
"황해 수사가 새로 부임했기 때문에 이런 요청이 있는 것입니다만 1년에 거두어 들이는 어리(漁利)가 4,5천 냥에 가까워서 그 재력이 호곤(湖閫)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에게 어떻게 영곤(營閫)에 있는 물력(物力)의 풍박(豐薄)에 대해 비교하여 진달할 수 있는가?"
하고, 이주진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간원 【정언 김광국(金光國)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분사(分司)056)  와 계방(桂坊)057)  에 3일 동안 숙직을 궐하였으니, 병조의 당상과 낭관은 의당 파직시켜야 합니다. 남부 봉사(南部奉事) 유후(柳逅)는 출신이 미천한데다 본디 풍력(風力)이 모자라고, 판결사(判決事) 윤식(尹植)은 나이가 많고 의지가 쇠퇴하여 청결(聽決)하는 즈음에 모든 것을 하리(下吏)에게 위임시키고 있으니, 아울러 개차(改差)해야 합니다. 연산 현감(連山縣監) 정광겸(鄭光謙)은 자신이 음관(蔭官)으로서 법을 무시하고 교자(轎子)를 탔으니, 의당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기조(騎曹)058)   당상과 낭관의 일은 윤허하지 않았으나,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송인명이 진연(診筵)에서 말하기를,
"오부(五部)의 봉사(奉事)는 이미 사일(仕日)을 계산하여 준례에 의거 승진시키는 자리이니, 차례가 된 사람을 전관(銓官)이 어떻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오부의 봉사는 사옹원(司饔院)의 예에 의거 중서(中庶)059)  로서도 으레 승진될 수 있도록 계품(啓稟)하여 서로 바꾸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이어 정식으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성국(省鞫)060)   죄인에게 3차의 형신을 가해도 자복하지 않을 경우에는 추조(秋曹)061)  로 이송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지금 죄인 한운성(韓云星)은 전에 2차의 형신을 받았었으나 여러 달 동안 국문을 정지하였으므로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 1차 형신을 가한 뒤 전에 받은 형신과 합계하여 전례에 따라 이송시킨다면 너무 가볍고 헐한 데 관계되니, 마땅히 지금부터 다시 3차의 형신을 가한 뒤에 이송시키게 해야 합니다."
하니, 처음에는 이 청을 윤허했었다. 응교 김상적(金尙迪)이 아뢰기를,
"근래 국문을 정지한 것으로 인하여 즉시 가형(加刑)하지 않은 것은 죄인에 있어서는 비록 다행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마는, 성국의 죄수가 3차가 지나도록 실정을 자복하지 않으면 추조로 이송시켜 다시 구핵하게 하는 것은 그 법의를 따져 보면 반드시 죽이는 가운데에서도 실정을 알아내려는 것입니다. 지금 전에 받은 2차의 형신을 허락하지 않은 채 지금부터 다시 3차의 형신을 가한다면 법례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성왕(聖王)이 죄수를 신중히 심의하는 도리에 있어서 이렇게 하는 것은 부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말이 옳다."
하고, 속히 명하여 중지시키게 하였다. 한운성은 곧 아비를 시해한 죄인인데 오랫동안 왕부(王府)062)  에 잡혀 있으면서도 아직 자복하지 않은 자이다.

 

북병사(北兵使) 조호신(趙虎臣)이 아뢰기를,
"온성 부사(穩城府使) 성윤혁(成胤赫)이 전례에 따라 군관(軍官) 최수약(崔守約)을 보내어 청(淸)나라의 차인(差人)을 위문하게 했더니, 그 가운데 우호(禹胡)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갑자기 본부(本府)의 품관(品官)인 오세옹(吳世雍)의 안부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수약이 거짓말로 이미 죽었다고 했더니, 우호가 말하기를, ‘신유년063)  에 5냥의 삼(蔘)을 오세옹에게 주고 토산마(土産馬) 3필(匹)을 사도록 약속했었는데 2필을 아직 받아오지 못했으나, 이제 그가 이미 죽었다고 하니, 어찌할 수가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오세옹이 법을 무시하고 잠상(潛商)064)  한 일은 의당 구핵해야 하는데 본인이 곧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 오태일(吳泰逸)을 신문하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함경 감사 심성희(沈聖希)는 ‘태일’이라는 두 글자가 이미 우호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아들에게 아비의 죄를 증거하게 하는 것은 풍화를 손상시킨다는 것으로 장계하여 신문하지 말고 먼 곳에 정배(定配)시킬 것을 청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심성희의 말이 옳습니다. 마땅히 그의 요청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성윤혁은 변방의 일을 완만하고 소홀하게 여겼으며 조호신은 이런 성윤혁을 논하지 않았으니, 함께 죄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아울러 나처(拿處)할 것을 명하였다.

 

2월 28일 병자

박필균(朴弼均)을 대사헌으로, 이천보(李天輔)를 대사간으로, 박수(朴璲)를 헌납으로, 이태중(李台重)을 집의로, 이징하(李徴夏)와 윤빈(尹彬)을 장령으로, 남학종(南鶴宗)을 지평으로, 홍우한(洪羽漢)을 정언으로, 유건기(兪健基)를 동의금(同義禁)으로, 조영로(趙榮魯)를 승지로, 윤봉구(尹鳳九)를 진선(進善)으로 삼았다.

 

2월 29일 정축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2월 30일 무인

성균관에서 원점(圓點)이 찬 유생(儒生)들에게 시험을 보였다. 으뜸을 차지한 생원(生員) 심발(沈墢)은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으며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분수(分數)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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