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기묘
초혼(初昏)에 유성이 천중(天中)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색이었다.
3월 2일 경진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이조 판서 이종성(李宗城)과 인아(姻婭) 사이라는 이유로 함께 양전(兩銓)에 있게 되는 것을 혐의하였는데, 누차 독촉하고 면려시켰으나 끝내 명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삭직(削職)시켰다.
정석오(鄭錫五)를 병조 판서로, 심악(沈)을 사간으로, 이규채(李奎采)를 정언으로, 김상로(金尙魯)를 경상도 관찰사로, 윤휘정(尹彙貞)을 우윤으로, 양정호(梁廷虎)를 승지로 삼았다.
3월 4일 임오
한학(漢學)을 강습한 문신(文臣)을 직접 시험 보여 으뜸을 차지한 전적(典籍) 노태관(盧泰觀)에게 숙마(熟馬)를 하사하였다. 처음 독습(讀習)하지 않고 곧바로 스스로 ‘불(不)’자를 쓴 자는 의금부에 내려서 영어(囹圄) 안에서 강습하게 하여 완전히 통달하기를 기다려 방송(放送)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이어 정식으로 만들라고 명하였다.
3월 5일 계미
대사헌 박필균(朴弼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듣건대 어떤 사람이 하나의 가사(歌詞)를 지어 남문(南門)에 내걸었는데 조정의 정령(政令)에 대한 득실을 방자하게 비방했으므로 문을 지키는 자가 이를 가지고 가서 병판(兵判)에게 고하였더니, 병판이 은밀히 기포(譏捕)하게 했다고 합니다. 근래 세변(世變)이 잇따라 발생하여 와언(訛言)이 생기기 쉬우니, 의당 좌·우포청(左右捕廳)으로 하여금 널리 기찰하여 체포하게 함으로써 기어이 잡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익명서를 조정에 알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임금이 직접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의 편제(篇題)를 지어 운각(芸閣)으로 하여금 간포(刊布)하게 하고 춘방(春方)의 관원에게 명하여 《고경중마방》을 동궁(東宮)의 좌병(坐屛)에 써서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 책은 곧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찬집한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또 춘방의 관원들을 불러 어제시(御製時) 한 수(首)를 내렸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거울을 닦고 마음을 연마하는 데는 자연히 방법이 있으나,
마음과 거울은 본디 밝고 빛이 나는 것이니,
명도(明道)와 이천(伊川)065) 은 바로 정로(正路)이며
회암(晦菴)과 궐리(闕里)066) 는 곧 본향(本鄕)이라네
하였다. 승지와 춘방의 관원에게 명하여 각기 문의(文義)를 진달하게 하였다. 세자(世子)에게 어제(御製)의 편제(篇題)를 읽게 하였는데 구두(句讀)가 명석하였고 목소리가 낭랑하였으므로, 임금이 매우 기뻐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특진관(特進官) 권적(權𥛚)이 말하기를,
"《성리대전(性里大全)》은 성학(聖學)의 근본인데 이 책은 판본이 희귀합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순천부(順天府)에 있다 하는데 이지러져서 인출(印出)할 수 없다고 하니, 마땅히 완영(完營)으로 하여금 개수하여 새롭게 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3월 7일 을유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을 석음각(惜陰閣)에서 인견하고 어필(御筆)로 ‘마음을 한가지로 집중하여 굳게 훈계를 지킨다. 공경함이 승하면 길하고 의로움이 승하면 따른다.[精一執中 固守乃訓 敬勝則吉義勝則從]’라고 쓴 열 여섯 글자를 선시(宣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선조(先祖)의 어필인데 곧 요순(堯舜)의 심법(心法)이요 아조(我朝)의 가법(家法)이다."
하고, 2본(本)을 판(板)에 새겨 하나는 즙희당(緝熙堂)에 걸고 하나는 세자궁(世子宮)에 걸게 하였다. 또 하나의 첩자(帖子)를 만들어 무왕(武王)이 사상부(師尙父)에게 훈서(訓書)를 받은 고사(故事)를 모방하여 사부(師傅)는 조복(朝服)을 입고 세자는 면복(冕服)을 갖추고 공경히 전해 주고 공경히 전해 받게 하였다.
전라 감사 조영국(趙榮國)이 아뢰기를,
"수신(帥臣)이 수령을 파출시키는 것은 군무(軍務)의 일에 관계된 것 이외에는 비록 통제사(統制使)라고 할지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선조(先祖)의 수교(受敎)에 있습니다. 연전에 좌수사(左水使) 이명상(李命祥)이 송전(松田)이 불탄 일 때문에 광양 현감(光陽縣監) 박동형(朴東亨)을 파출시켰었는데, 우상(右相)이 당시 도신(道臣)으로 있으면서 장문(狀聞)하기를, ‘수신(帥臣)이 혹 수령을 논죄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먼저 순영에 알린 뒤에 봉계(封啓)하는 것이 정식(定式)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우수사(右水使) 박태신(朴泰新)이 무장 현감(茂長縣監) 정권(鄭權)이 금송(禁松)을 함부로 베었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순영에 상의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계파(啓罷)하였으니, 이는 사목(事目)에 어긋나는 것으로 망령되고 경솔함이 극심합니다. 경칙(警飭)시키기 위해 병비(兵裨)를 잡아다가 추고하려 하니, 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보(回報)한 내용이 극히 패려스러웠습니다. 이는 체통에 관계되는 것이니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그의 죄를 품처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박태신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우승지 홍상한(洪象漢)을 비국 부제조로 삼았는데 대신(大臣)의 청을 따른 것이다. 김재로 또 말하기를,
"부(賦)는 고시(古詩)에 속하는 것으로 옛사람들은 운(韻)을 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근래에는 과거때 부(賦)에 운을 다는 것이 매우 정(精)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완전히 폐기하는 데에 이르지 않았었는데 이번 감시(監試)의 초시(初試)에서는 첫머리에서부터 끝까지 운을 달지 않은 자를 1등에 두었으니, 마땅히 담당 시관을 추고하여 경계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대신과 예조 당상·과각(館閣)의 당상 및 유신(儒臣)을 불렀다. 하교하기를,
"남의 아들이 되어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그 은혜를 갚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전에 사호(賜號)함으로써 존봉(尊奉)하는 도리로 삼았으니 어찌 대소(大小)의 문자(文字)에 항상 일컬음에 있어 사묘(私廟)의 호칭을 당저(當宁)에게만 쓰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묘호(廟號)와 묘호(墓號)를 정하는 것은 바로 전에 내린 바를 공경히 받들어 사친(私親)의 구호(舊號)를 높이는 것이 되니, 경 등은 즉시 의논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영의정 김재로, 좌의정 송인명, 예조 판서 민응수(閔應洙), 참판 서명빈(徐命彬), 참의 윤급(尹汲), 관각 당상 오광운(吳光運), 응교 김상적(金尙迪), 부응교 윤광의(尹光毅) 등이 묘호(廟號)는 육경(毓慶)이라 하고 묘호(墓號)는 소령(昭寧)이라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육경은 장릉(章陵)067) 의 옛날 원호(園號)와 음이 같다는 이유로 곧 육상(毓祥)으로 고쳤다.
3월 8일 병술
임금이 육상묘(毓祥廟)에 거둥하여 친제(親祭)를 행하고 다음날 환궁하니, 이는 곧 숙빈(淑嬪)의 기일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억유치례 부하여감[抑諛致禮復何餘憾]’이라는 여덟 글자를 직접 써서 이를 새겨 묘궁(廟宮)에 걸게 하였다. 처음 임금이 현빈(賢嬪) 및 세자빈(世子嬪)과 함께 육상묘로 나아가려 하다가 이어 하교하기를,
"모든 일은 마땅히 시작을 삼가서 폐단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두 빈(嬪)이 함께 전배(展拜)하려 하는 것은 정례(情禮)에 있어 당연한 것으로 체모(體貌)가 중하기는 하지만 이는 곧 사례(私禮)인 것이다. 만일 이를 방조(旁照)하여 행한다면 후비(后妣)들이 마음대로 사례를 행하는 것이 나를 연유하여 시작될까 염려스럽다."
하고, 드디어 중지시켰다.
3월 9일 정해
임금이 육상묘에서 효장묘(孝章廟)로 임어하였다가 밤 2경에야 비로소 회가(回駕)하였다. 효장묘는 창의궁(彰義宮) 안에 있는데 그 궁은 곧 임금의 구저(舊邸)이다.
3월 11일 기축
달이 태미 서원(太徽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지평 남학종(南鶴宗)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시원(試院)의 일에 대해 놀랍고 통분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 거자(擧子)들의 호적의 허물을 고준(考準)할 즈음에 정사주(鄭師周)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이미 호적이 없고 또 보거자(保擧子)068) 의 성명도 몰랐기 때문에 빼내려 하니, 시관(試官) 홍덕망(洪德望)이 자기의 칠촌 조카라고 하면서 감히 비호하는 말을 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미 어긋난 단서가 드러났는데 어떻게 시관의 친족이라 하여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하니, 홍덕망이 갑자기 노기를 발하면서 말하기를, ‘기필코 이 사람을 빼내려 한다면 나는 여기에 있을 수 없다.’고 하고서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다시 좌석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국시(國試)의 엄중함은 생각하지 않고 사사로이 좋아하는 사람만을 곡진히 비호할 일만 생각하고 있으니, 매우 방자스러운 것은 물론 거조 또한 매우 패려스러웠습니다. 과장(科場)을 중히 여기는 방도에 있어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3월 12일 경인
달이 목성으로 들어갔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신(大臣)·예관(禮官)과 함께 육상묘의 축식(祝式)을 논의하여 정하였다. 임금이 아들이라고 일컫고 휘(諱)를 쓰려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버이를 받드는 도리를 구차스럽게 하면 그것은 성심(誠心)이 아닌 것이다. 내가 마땅히 다시 생각하겠으니 경 등도 익히 의논하라."
하였다.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어유봉(角有鳳)에게 문의하게 하니, 박필주가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 새로운 법식을 정함에 있어서는 널리 참작하여 어긋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축(祝)이 없다면 그만이겠지만 있다면 이에 따라 조처해야 합니다."
하고, 어유봉은 말하기를,
"제왕가(帝王家)는 종통(宗統)을 계승하는 것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어휘(御諱)를 쓰는 것은 경솔히 논의할 수 없을 듯합니다. 사친(私親)이라는 두 글자에 이르러서는 정으로나 예의 뜻에 있어 혐의스럽거나 구애되는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단지 이 두 글자는 사가(私家)에서 은혜를 주로 하는 상례적인 호칭에서 나온 것이고 분명한 고례(古禮)에 전거(典據)가 있지 않으니, 축사(祝辭)에서 이렇게 칭도(稱道)하는 것은 근엄한 체통에 흠이 있게 될 것 같습니다. 따라서 곧바로 봉호를 일컫는 것이 사의(事宜)에 마땅한 것만 못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또 예조 판서 민응수(閔應洙)에게 명하여 영상·좌상에게 문의하게 했으나 오래도록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민응수를 불러서 말하기를,
"나의 의견은 구차스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 축식을 고치려 했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즉시 강정(講定)하지 않으니, 어찌 개연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가의 종통을 계승한 것이 비록 중하기는 하지만 이미 모자(母子)의 의(義)가 있으니, 축문에 이름을 쓰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여러 신하들이 어버이 제사를 지내면서 정승·판서 라고만 쓰고 이름을 쓰지 않는다면 그 마음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위의 한 글자는, 덕종실(德宗室)은 세자로서 추숭(追崇)되었기 때문에 사왕(嗣王)이 아들이나 조카라고 쓰지 않은 것이니, 나의 마음은 결정되었다. 이미 국왕이 사친(私親)에게 삼가 제사지낸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국왕이 누구이겠는가? 내가 또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아들의 도리와 손자의 도리는 차차로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축식(祝式)의 휘(諱)를 쓴 아래 장차 ‘당저(當宁) 때의 축문’이라고 주(註)를 달려 한다.’
하고, 이어 육상묘의 축문의 서식을 쓰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국왕 휘(諱)라고 한 데에다가 ‘만일 관원을 보낼 경우에는 삼가 신(臣) 모(某)를 보낸다고 하고 혹은 삼가 내시(內侍)를 보낸다.’고 주(註)를 달고 휘(諱)자 아래에는 ‘당저 축문(當宁祝文)’이라는 네 글자를 쓰라. 또 ‘삼가 모빈(某嬪) 수양 모씨(首陽某氏)에게 제사드립니다. 삼가……청작(淸酌)과 서수(庶羞)를 진설하여 영정에 올립니다.’라고 쓰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위의 한 글자는 묵묵히 국전(國典)을 생각해 보니 마음이 넓어지게 되었고 아래의 한 글자는 차마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했으니, 이는 나의 뜻이 아니다. 비록 대사(大祀)는 아니더라도 명산(名山)·거천(巨川)의 제사에도 모두 그렇게 쓰는데 지금 이 축문에만 그렇게 쓰지 않았으니, 마음이 편하겠는가, 편치 않겠는가? 축식을 써서 내리면서 그 아래에 주(註)를 달게 한 것은 이 또한 예(禮)를 삼가는 뜻인 것이다.
하였다. 이른바 위의 한 글자란 곧 ‘자(子)’ 자이고 아래의 한 글자란 곧 어휘(御諱)이며 이른바 그 아래에다 주(註)를 달았다고 한 것은 곧 당저 축만(當宁祝文)이란 네 글자인데 이는 당저가 아니면 휘(諱)를 쓰는 것이 부당하는 뜻인 것이다.
예조 판서 민응수가 말하기를,
"소령묘(昭寧墓)의 수직인(守直人)에 대한 명호(名號)를 대신(大臣)에게 문의하였더니, 영상은 ‘마땅히 전수(典守)라고 일컬어야 한다.’고 하였고, 좌상은 ‘마땅히 서제(書題)라고 일컬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궁임(宮任)의 예(例)와 같이 전감(典監)이라고 명명하고 6결(結)을 급복(給復)하도록 하라."
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3월 13일 신묘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친림(親臨)한 가운데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조관빈(趙觀彬)을 발탁하여 판의금(判義禁)으로, 심육(沈錥)을 좨주(祭酒)로, 이양원(李養源)을 자의(諮議)로, 이창의(李昌誼)를 검상(檢詳)으로, 김상복(金相福)을 정언으로, 한종제(韓宗濟)를 장령으로, 윤광소(尹光紹)를 사서(司書)로 삼았다. 정사(政事)를 마치고 나서 이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나아가 말하기를,
"조금 전에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의망(擬望)하여 들인 것은 또한 염정(恬靜)함을 권장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윤심형(尹心衡)은 급제한 지 거의 30년 가깝게 되었는데 그 사이 네 번이나 도감(都監)에 차임되었습니다만 끝내 명을 받들지 않았으니, 그의 지조가 우뚝하여 아무도 따르기 어렵습니다. 심악(沈)도 그러하여 집이 너무 가난한 탓으로 그의 아내가 직접 물을 긷는가 하면 오래도록 죽을 먹으면서 구차스럽게 살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 서적을 연구하고 있으니, 그의 청렴하고 개결한 지조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심을 일으키게 합니다. 염치를 면려하고 풍성(風聲)을 세우는 도리에 있어 마땅히 먼저 이런 사람들을 권장해서 기용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 정사(政事)에서 서명순(徐命純)·이정섭(李廷燮)·정희하(鄭羲河)를 모두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의망했었는데 음정(蔭正)은 대체로 극선(極選)인 것이다.
3월 14일 임진
대사간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형을 시해한 죄인은 강상(綱常)에 관계된 것이 중대한데도 왕장(王章)을 아직 가하지 않아서 지금껏 천지 사이에 숨을 쉬고 있으니, 이는 국좌(鞫坐)가 해를 넘기면서 연기되고 있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한번의 형신(刑訊)을 겨우 치르고 나면 두어 달 있다가 비로서 가형(加刑)하기 때문에 죄인으로 하여금 그 사이에 기간을 넉넉히 얻어 몸을 회복시킬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무릇 성국(省鞫) 죄인에게 잇따라 3차의 형신을 가해도 자복하지 않을 경우에 추조(秋曹)로 이송(移送)시키는 것은 대개 잇따라 형신을 가하여도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여 추조로 하여금 안치(按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죄인은 해를 넘기면서 세 번 형신을 받았으므로 잇따라 형신을 가하면서 엄히 신문한 것과는 다른 점이 있는 데도 단지 국전(國典)이 그렇다 하여 전례에 따라 이송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추조의 형신은 겨우 장수(杖數)만을 갖출 뿐이어서 일차 죄인(日次罪人)069) 은 옥중(獄中)에서 늙어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이렇게 하게 되면 죄인에게 행운을 만들어 줄 뿐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다시 순문(詢問)하여 만일 도로 왕부(王府)로 이송시킬 수 없다면 속히 엄하게 형신을 가하여 핵실함으로써 기어이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그리고 이 뒤부터는 성국(省鞫)에 관계된 모든 죄인은 잇따라 형신을 가할 수 없어서 세월을 끌다가 오래 되어 차수(次數)가 찬 경우에는 그대로 왕부로 하여금 다시 신문하게 할 것을 영원히 정식으로 삼아 윤상(倫常)을 번한 죄인이 요행히 살 수 있는 길을 막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관무재(觀武才) 때문에 거둥할 시기가 멀지 않았는데 전에는 돈의문(敦義門)은 여닫는 것이 일정하지 않았었습니다만 근년에 여염(閭閻)이 깨끗하지 못하고 궁장(宮墻)에서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부득이 닫아 버렸었습니다. 지금의 환궁(還宮)하시기 전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임시로 연 연후에야 인마(人馬)의 출입이 편리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일부터 열고, 환궁한 뒤에도 그대로 열고 닫고 하라. 이 뒤로 다시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더라도 다시 품하지 말고 그대로 전처럼 여닫게 하라."
하였다.
함경남도 병사 신사경(申思冏)이 아뢰기를,
"각도(各道)의 병사가 두루 순력(巡歷)할 때 속오군(束伍軍)과 세초군(歲抄軍)을 일체로 점고하고 상세히 조사하여 장문(狀聞)하도록 새로 조정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로(北路)는 막 기근과 여역을 겪은 탓으로 군정(軍丁) 가운데 도망하거나 죽은 사람의 숫자가 매우 많아서 각 고을에서 아직도 마감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방금 농사철을 당하였는데 여러 날 모여서 기다리게 하면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니, 우선 각 고을에서 충정(充定)을 끝마치기를 기다려서 우후(虞候)를 보내어 점검하여 보게 하거나 혹 추조(秋操) 때 거행하게 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 말하기를,
"조정의 명령이 내렸는데도 아직껏 마감하지 못했으니 엄히 계칙하지 못한 잘못을 면할 수 없습니다. 신사경은 의당 문비(問備)070) 하고 경책(警責)을 가해야 합니다. 우후를 때도 아닌데 보내는 것은 또한 폐단이 있으니 가을을 기다려 순점(巡點)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신(道臣)이 백성을 위해 장문하는 것은 그래도 가한 일이지만 수신(帥臣)이 어떻게 감히 군액이 아직 충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장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우호를 시켜 대신 점고하게 하려 하였으니 편한 것만 취택하려는 의도가 현저하게 있으며, 마감하지 못한 수령에 대해서도 또한 죄주기를 청하지 않았으니 수신의 체통을 크게 잃었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감처(勘處)하게 하고 순점(巡點)하는 것은 새 수신에게 가을을 기다려 행하게 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이 아뢰기를,
"군정(軍丁)의 마감은 으레 세말(歲末)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북(西北)의 군정(軍政)은 사체가 더욱 특별한 것이니, 전 병사 조동점(趙東漸)이 세후(歲後)에 체직되어 돌아오면 마땅히 일체로 나문(拿問)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겨 그대로 따랐다.
이에 앞서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강도(江都) 각진(各鎭)의 변장(邊將)들에 대한 조석(朝夕)의 늠료(廩料)를 아직도 잇대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마음을 내어 수거(修擧)하겠습니까? 군향(軍餉) 가운데 각진에 분속(分屬)시킨 것이 1, 2백 석에 불과한데, 이것을 진민(鎭民)에게 나누어 주고 그 모곡(耗穀)을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참작하여 더 지급한다면 향미(餉米)를 개색(改色)하는 것과 각진을 더 보조해 주는 방도에 있어 둘 다 마땅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강화 유수 김시혁(金始㷜)이 장문하기를,
"본부(本府) 각진의 변장들에게 매달 주는 늠료가 수십 두(斗)에도 차지 않고 병조에서 급대(給代)하는 베도 또한 남은 것이 없습니다. 전에 획급하여 준 환곡도 각각 1백여 석에 불과한데 지금 더 지급하여 준다고 해도 각진의 창고가 곧 본부의 창고이니 여기 것을 옮겨 저기다 저축하는 셈이어서 조금도 손해나 이익되는 것이 없습니다. 비록 모곡(耗穀)을 면제하고 해마다 개색(改色)한다 하더라도 이를 본창(本倉)에 쌓아 두는 것보다는 나아가 그래도 각 진보(鎭堡)에 조금이나마 보조할 수 있는 방도가 될 것이니, 청컨대 향미(餉米)를 1백 석을 한도로 모곡을 면제해 주고 더 지급해 주게 하소서."
했는데, 대신이 복주(覆奏)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경상 좌병사 심해(沈瑎)가 아뢰기를,
"동래(東萊) 별기위(別騎衛)의 금년 춘등(春等)의 시재(試才)를 마땅히 절목에 따라 설행하여야 하는데, 대포를 쏘고 말을 달릴 곳이 모두 백성의 전지(田地)입니다. 지금 밀·보리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데 인마(人馬)가 이를 짓밟는다면 반드시 실농할 폐단이 있으니, 마땅히 가을을 기다려 합쳐 시재(試才)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소망을 따르소서."
하니, 임금이 춘추(春秋)를 합쳐 시재하게 하는 것을 영원히 정식으로 삼도록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제도(諸道)의 향천(鄕薦)은 각기 정해진 숫자가 있어서 경기(京畿)는 2인을 초과할 수 없는데도 기백(畿伯) 유엄(柳儼)은 억지로 원용(援用)할 수 없는 사례를 원용하여 6인을 천거하기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잘못된 것입니다. 이미 이조(吏曹)에서 중추(重推)하고 있습니다만, 이조에서 만일 도신이 천거한 것이 전례에 어듯난 것이라면 마땅히 도로 보내어 다시 수정하여 아뢰게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단지 전례에 따라 첫 번째와 두 번째의 2인을 조용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 6인 가운데에서 취사(取捨)하여 세 번째와 다섯 번째에 있는 사람을 발탁하여 조용한 것은 끝내 미안한 데에 관계가 됩니다. 해당 이당071) 도 또한 추고하고 전규(前規)에 따라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사람을 조용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3월 15일 계사
월식이 있었다.
3월 16일 갑오
대사간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와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는 국가에서 산림(山林)에 묻혀 있는 유일(遺逸)의 선비를 대우하기 위한 것이어서 이 직임은 막중한 것입니다. 따라서 취사(取捨)할 즈음에 통의(通擬)하는 순서를 분촌(分寸)만큼도 어긋나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엊그제 대정(大政) 때 좨주는 숙덕(宿德)이 있는 시람을 버리고 1인으로 단부(單付)했으며 자의는 신통(新通)된 사람이 오랜 명망이 있는 사람을 누르고 수망(首望)으로 의망(擬望)되었으니, 취사를 마음대로 하고 통의(通擬)를 전례에 어긋나게 한 것이 너무 심합니다. 좨주는 그 직임이 지극히 중하고 그 선발이 지극히 엄한 것이어서 선정(先正) 가운데 제현(諸賢)들도 덕이 있는 이에게 명한다는 반열에 미치지 못하고서 이 직임을 역임한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이 직임을 선출하지 않으려면 몰라도 만일 선출한다면 지금 산림의 숙망(宿望)을 지닌 사람으로 본래 적임자가 있으니, 진실로 이렇게 취사하는 것도 부당합니다. 또 단부(單付)하는 경우도 간혹 전례가 있습니다만 비망(備望)할 만한 사람이 있는데도 1인만 단부했다는 말은 못들었습니다. 자의의 통의에 대해서는 신이 정격(政格)에 과연 일정한 법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새 사람을 오래된 사람 앞에 세워 순서를 착란시켜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정관(政官)에게 견책을 가하는 형전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 말을 옳게 여겨 전관(銓官)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이종성(二宗城)이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지난달 차대(次對) 때 대료(大僚)가 산림의 선비를 초빙하자고 청한 것을 인하여 성교(聖敎)에 이르기를, ‘심육(沈錥)은 상당한 직명(職名)이 없지만 부를만하다.’ 하시고, 이어 찬선(贊善)의 품질(品秩)이 어떠한가?’라고 하문하시므로, 신이, ‘찬선과 좨주는 모두 종2품이며 진선(進善)은 당하관(堂下官)이어서 심육에게는 모두 합당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는데, 이는 곧 신이 전조(銓曹)에 들어오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물러 나와서 추후 들으니 찬선과 좨주는 모두 정3품인데, 찬선은 심육이 이미 역임했기 때문에 그 후의 강연(講筵)에서 신이 전일 잘못 대답했다는 것으로 인죄(引罪)하고, 이어 아뢰기를, ‘찬선(贊善) 두 자리는 이미 인원이 찼으니, 심육은 마땅히 좨주(祭酒)에 임명하겠습니다.’ 하니, 상교(上敎)로 기꺼이 윤허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물러 나와서 빈청(賓廳)에 있는 두 정승에게 고하고, 또 정안(政案)을 상고하여 보니, 통정 대부(通政大夫)로서 좨주(祭酒)를 겸한 사례가 전후를 통하여 매우 많았으며, 또 모두 단부(單付)하였기 때문에 도정(都政)이 있던 날 전례에 따라 진달하고 명을 받들고 나서야 비로서 단부(單付)하였던 것입니다. 그 선발이 엄하고 직임이 중하기 때문에 위에 품하여 보고 아래에 고한 다음 반복해서 삼가고 정녕하게 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니 간신(諫臣)의 이른바 취사(取捨)했다는 말은 신의 생각으로는 미칠 바가 아닙니다. 자의(諮議)에 대한 일은 백 년 이래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으로 배의(排擬)한 것으로 때로 승강(陞降)케 한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데, 심지어는 삼망(三望)을 다 고치고 바꾸어 새로 의망된 자로 바꾼 경우도 또한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두어 달 전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전 진선(進善) 박필부(朴弼傅)는 숙덕(宿德)과 중망(重望)이 있는 사람인데도 내려서 부망(副望)에 넣고 윤봉구(尹鳳九)를 올려다가 수망(首望)에 넣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자의와 진선은 함께 극선(極選)인 것인데도 간신(諫臣)이 전례에 어긋난다고 공척(攻斥)하는 것이 유독 오늘날에 이렇게 엄하니, 이것이 참으로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버린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아!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하기 어려운 것이고 물색(物色)은 드러나기 쉬운 것이어서 계교하는 단서가 매양 명장(名場)에 있으므로 식자(識者)들의 걱정과 탄식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죄주자는 의논이 옮겨 산림에까지 파급되었으니, 이는 세도(世道)의 복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답을 내렸다.
그뒤 수일 만에 이천보가 또 상소하기를,
"좨주를 차임하는 데 있어 이미 연품(筵稟)을 거쳤고 또 대신(大臣)에게 고하였으니, 또한 스스로 변명할 단서가 충분합니다. 유자(儒者)의 직임은 오직 산림에 있는 것인데 공의(公議)가 이미 묘당(廟堂)의 천거를 그르게 여겼으니 대신의 결단을 취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 연품한 것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또 그렇지 않은 점이 있으니, 국가에서 유자를 기용하는 데 있어서 자격(資格)을 논함은 불가합니다. 오직 우리 효종조(孝宗朝)에서 처음으로 겸좨주(兼祭酒) 한 자리를 설치하여 당시 제현(諸賢)들을 대우하였습니다만, 3품직을 제수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 숙종조(肅宗朝)에 이르러서는 간혹 그런 예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반드시 당세의 1인(人)인 뒤에야 그렇게 했으니, 숙덕(宿德)이 있는 이를 버리고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제수하기를 지금처럼 했다는 것을 신은 또 아직 못들었습니다. 따라서 단부(單付)로 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것은 논할 만한 것이 아닌 것으로 정관(政官)이 스스로 취사하지 않았다고 이르는 말을 그 누가 믿겠습니까? 중신(重臣)이 또 찬선은 이미 인원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부득불 단부했다고 말을 했습니다만, 유자의 직임은 그 선발이 지중한 것인데 그것을 서료(庶僚)를 분배(分排)하는 것처럼 비의(備擬)해서야 되겠습니까? 자의에 대한 일은 그 망(望)을 무단히 승강시킨다는 것을 신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전번의 진선(進善)의 망(望)을 가지고 증언(證言)하여 보겠습니다. 자의와 진선은 모두 극선(極選)이지만 자의는 유자가 처음 나아가는 직임이어서 그 선법(選法)을 뛰어 넘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진선에 견주어 더욱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선의 망(望)에 대해 신이 그때 정관(政官)의 말을 들으니 삼망(三望)이 모두 신통(新通)이어서 주의(注擬)할 즈음에 혹 박필부(朴弼傅)가 구망이 될 것을 우려하여 정리(政吏)에게 통문(通問)한 뒤에야 비로서 의망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중신(重臣)이 이른바 내려서 부망(副望)에 넣고 올려서 수망(首望)에 넣었다고 한 것에 대해 신은 그 말의 내력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이종성도 상소하기를,
"간신(諫臣)의 재소(再疏)는 그 말이 매우 성대하여 자못 사람으로 하여금 현혹케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지난번 진선의 망(望)은 바로 박필부(朴弼傅)의 대신이어서 박필부를 부망(副望)으로 의망한 것인데 이제 이에 삼망(三望)이 모두 신통(新通)이었다고 하였으니, 이것도 오히려 이런데 다른 것이야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아울러 우악한 비답을 내려 양쪽을 화해시켰다. 그 후 한 달 남짓해서 이종성이 마침내 인혐하여 체직되었다.
지평 이민곤(李敏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가에 십수 년 이래로 있어 온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나 작년과 금년에 청대(靑臺)에서 주문(奏聞)한 것을 가지고 말해 보겠습니다. 아무 별이 모원(某垣)으로 들어가고 아무 별이 모지(某地)에 나타났으며 어느날 밤에 모기(某氣)가 있었다고 한 것은 우선 덮어 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두 차례 큰 별이 천천히 서쪽으로 떨어진 것과 요성과 혜성이 하늘에 뻗쳐 한 달이 다 되도록 교대로 나타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목도한 바이며, 태양 속에 흑기(黑氣)가 있는 변이와 영남에 8월에 눈이 내린 것과 태상(太常)에 벼락이 친 변은 이미 너무도 경악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친림하여 방방(放榜)하던 날은 순음월(純陰月)로 천둥이 폐장(閉藏)될 때인데도 바람과 우박이 몰아쳐 하늘이 캄캄한 가운데 벼락이 사직(社稷)의 나무를 쳤으며, 은진(恩津)에 머리가 둘인 아이가 출생된 것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었으니, 이것이 어찌 인류(人類)가 장차 사람 노릇을 할 수 없게 될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남록(南麓)과 북악(北嶽)에 호랑이와 표범의 발자국이 어지럽고, 지난 겨울의 일기가 봄날처럼 따뜻했고, 침침한 안개가 거의 10∼15일이 지나도록 있었으니, 신은 이것이 또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습니다. 8, 9년 이래 팔도의 가뭄과 장마가 고르지 않았던 탓으로 남쪽에 풍년이 들면 북쪽은 기근이 들기도 하고, 서쪽에 풍년이 들면 동쪽은 흉년이 들기도 했는데, 더구나 3년 동안 여역이 치성하여 사망한 사람이 무수하였으니, 전쟁의 참혹함도 이보다 더 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해에 가뭄이 들어 농사가 이미 시원치 않았는데, 중추(仲秋)에 서리가 일찍 내려 백곡(百穀)이 제대로 여물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역을 겪으면서 간신히 살아 남은 백성들이 또 이런 큰 흉년을 만났으므로 기전(畿甸) 사이에 있는 사람들은 얼굴에 사람의 기색이 없는 실정이니, 위태롭고 다급하여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 마치 불이나 물 속에 빠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한심스럽기 그지없으니, 바로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대오 각성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하면서 재변을 없애고 백성을 구제할 방책을 생각해야 하는데도 지금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에서는 지성으로 두려워하는 뜻이 없어서 상례에 따라 내리는 구언(求言)하는 전지마저도 또한 내리지 않았으며, 낭묘(廊廟)와 삼사(三司)에서는 간혹 진계하는 말이 있기는 하였으나 거의 모두 겉치레로 응하는 데에서 그쳤습니다. 이와 같이 천재(天災)는 말할 것도 없고 인심마저 이러하니, 어찌 반드시 나라가 망할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아! 지나간 여러 세대를 헤아려 보건대 어느 세대인들 붕당이 없었겠니까만, 한쪽 모퉁이에 처해 있는 작은 나라에서 문호를 나누어 뿌리를 깊게 박고 공고히 얽혀 수백 년을 거쳐 오면서 계속 서로 살해하였으므로 원한이 날로 극심해져 벽루(壁壘)가 이미 견고해졌고 과굴(窠窟)이 너무 깊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나라가 망해도 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 어찌 아조(我朝)처럼 극심한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임금은 백성의 부모인데 한 가문 안에서 다투어 살해하기를 마지 않는 것을 본다면 피차를 차별없이 평등하게 사랑하는 마음에 있어 죽음에 함닉(陷溺)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구해(救解)하여 구제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조제하여 온 것은 실로 성명(聖明)의 고심과 혈성에서 나온 것인데 오늘날 신하된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뜻을 잘 받들어 성의에 부합되게 하지 못하고 지존으로 하여금 위에서 걱정하고 고뇌하게 만든 것은 실로 뭇 신하들의 죄인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백 년 동안의 고질적인 폐단을 변혁시켜 일세(一世)의 아름다운 풍속을 만들어내는 데는 반드시 그 방도가 있을 것이니, 이는 이미 사사로운 뜻을 가진 하찮은 지혜로 억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범상한 속류가 감당할 수 있고 지조가 있어서 마음이 공평하고 사리에 밝은 자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편의함만 차지하여 시비를 혼동하는 방술로써 매양 한 등(等)을 낮추고 한 격(格)을 내리니, 이는 대개 스스로 너무 지나친 것을 억제하고 심각한 법문(法文)의 적용을 금단하여 살상과 분란을 종식시키는 방도로 삼으려는 데 의탁하고 있으니, 전하의 살리기 좋아하는 큰 덕과 붕당을 미워하는 본심에 있어 이런 사람들에게 위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리와 형세가 또한 이와 같고 저 우러러 찬송하면서 받들어 따르는 한두 대신(大臣)에 대해 그들의 마음이 나라나 개인에게 흉화(凶禍)를 끼치게 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이는 또한 본정(本情)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존위(尊衛)하고 부호(扶護)하는 것이 이미 그렇게 절연(截然)하지 못했고 징토(懲討)하고 방제(防隄)하는 것 또한 너무도 엄절하지 않아서, 장주(章秦)에 드러나 있는 언의(言議)를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또한 감히 기주(箕疇)072) 의 탕평(蕩平)에 대해 참으로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고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이 갑술년073) 에 옥사를 완만히 한 것이 실로 뒷날 난적들의 구실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사림들이 지난 일을 탓하고 있습니다. 신이 그의 손자 남극관(南克寬)이 유고(遺稿)를 간행한 것을 보았는데, 이잠(李潛)을 선생(先生)이라고 일컬었고, 이명세(李命世)가 신사년074) 연석(筵席)에서 한 말을 한때의 망발에 불과하다고 했다가 그도 또한 곧이어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말을 되돌려 스스로 해명한 바 있습니다만, 그의 아들 이유익(李有翼)이 드디어 무신년075) 의 극적(劇賊)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 한마디 일 하나의 어긋남으로 해서 그 말류의 폐단이 끝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전에 모두 함께 눈으로 본 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비를 혼동해 논하는 자들은 충의의 기운을 저상시키고 난적의 구실을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손들이 영세토록 잘 살기를 도모하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또한 사가(私家)의 복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강신(强臣)과 반장(叛將) 가운데 승국(勝國)076) 의 최충헌(崔忠獻)이나 정중부(鄭仲夫) 같은 부류가 없어 제어하기 쉽고 부리기가 쉬워서 반드시 난망(亂亡)하거나 경복(傾覆)되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최충헌·정중부의 화(禍)는 한때에 그쳐 그 화가 짧았지만 공광(孔光)·호광(胡廣)의 화(禍)는 백 년이나 흘러와 그 화가 길었던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최충헌·정중부는 누구든지 토죄할 수 있지만 공광·호광은 성인이 아니면 토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국가의 치란은 언로의 통색(通塞)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이 고명하시니 이를 모르지 않으시겠지만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뭇신하들이 말 때문에 죄를 얻은 경우가 모두 몇 번이었습니까? 당론이 생긴 이후 대각에 공론(公論)이 있은 적이 드물었으니 이는 전하께서 한결같이 당론으로 보아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뜬 말을 전정시키고 경알(傾軋)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여긴 것에서 온 것에 불과합니다. 이는 또한 전하께서 잘못을 바로잡음에 있어 지나치게 곧게 한 것으로 난망의 근원이 반드시 여기에 근본한다는 것을 모르신 처사입니다. 조정에서 하는 일이 있어도 대간이 발계하면 전지가 반하되지 않고 백사(百司)가 감히 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역대(歷代)에 없던 것입니다. 오직 성조(聖朝)에서만 그렇게 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억만 년 동안 실추시켜서는 안되는 법전입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성지(聖志)에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양사(兩司)의 계사가 있어도 또한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행한 것이 매우 많아서 드디어 대각의 말이 꺼리는 것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전에 대각의 직임을 중히 여긴 이유는 신하의 권한을 가차(假借)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하지 않고는 임금의 지나친 거조를 중지시키고 권신이 멋대로 하는 행동을 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대각에 공론이 없다고 하면서 갑자기 조종의 좋은 가법(家法)을 훼손시킨다면 이는 때묻은 것을 싫어하여 옷을 불태우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아! 전하께서는 요순(堯舜)의 자질로 공맹(孔孟)의 학문을 익히셨으니 어찌 간언을 막고 말한 자를 죄주는 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마는, 단지 평일에 당론을 싫어 하는 마음에서 말을 듣는 즈음에 시비를 가릴 겨를도 없이 번번이 위노를 먼저 발하시는데, 한 가지 두 가지가 될수록 더욱 격앙되고 한 번 두 번 거듭할수록 점점 더 어긋나게 되어 진탕(震蕩)을 겪을 때마다 세도(世道)는 수십 층이나 낙하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아비는 그 아들을 경계시키고 형은 그 아우를 면려시켜 국가의 일에 대해 심각하게 말하지 않는 것을 제일의 의리로 삼아서 진실로 성덕의 궐실과 정령에 잘못이 있음을 듣고서도 들어가 등대해서는 구차스럽게 입막음만 하고 나와서 남에게 말할 때는 서로 바라보고 너털웃음을 웃습니다. 따라서 모두 내직을 사양하고 외직으로 나가는 것을 시의(時義)에 있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잔한 작은 고을도 명관들이 다투어 차지하려 하고 웅번(雄藩)이나 삼사(三司)에 제수하는 명패(命牌)가 오면 도로의 사람들이 서로 웃으면서 귀박(鬼朴)이라 이르고 한 번 제배(除拜)되면 사피하느라 분분한가 하면 벼슬에 오래 있게 되면 서로 조위하고 곧바로 체직되면 서로 경하하는 실정입니다. 근일 이름이 시종에 들어 있는 사람이 거의 수백 명이 넘는데, 아침에 제배되었다가 저녁에 체직되어 열흘 동안도 직임에 있지 않습니다. 논사(論思)하는 자리와 언의(言議)하는 직임이 얼마나 긴중(緊重)한 것입니까? 그런데 이것을 하나의 놀이하는 도구와 웃음을 전하는 마당으로 만들었으니, 만일 불칙한 변란이 아침 저녁에 박두해 있다 하더라도 전하께서는 어디를 통하여 들을 수 있겠습니까? 유신(儒臣)을 의금부에서 추문하는 법이 신은 어느 때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이미 한때의 잘못된 규례로서 으당 고쳐야 하는 것인데 어찌 이 폐단이 갈수록 더욱 가중될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근년에 이르러서는 유신으로서 나오지 않는 사람은 곧바로 의금부에서 추문하도록 전지를 받들었으며, 대관으로서 외방에 나가 기한을 넘긴 자는 먼저 체직시키고 나서 잡아오는 것을 법제로 정하여 영갑(令甲)에 기재하였습니다. 조정의 명을 어긴 데 좌죄(坐罪)되고 그 자취가 오만한 것에 관계가 된다면 이는 진실로 나태한 관원을 동칙(董飭)하고 무너진 기강을 일으켜 엄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국체를 손상시키고 염치와 분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이 일보다 더한 것은 있지 않습니다. 대저 염치와 분의는 나란히 행하여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오륜(五倫)의 항목 가운데 오직 군신(君臣)에게만 하나의 의(義)자를 붙인 것은 성인의 뜻을 대체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관직을 받지 않는다고 번번이 구금하여 가두는 벌을 적용하고 있는 것은 이는 용관(冗官)·산직(散職)에 있는 사람도 이렇게 구사(驅使)해서는 안되는 것인데 더구나 경악(經幄)의 자리나 대성(薹省)의 직임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욕을 주는 법전을 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제하는 것은 한(漢)나라·진(秦)나라처럼 했던 나라가 없었습니다만, 이런 법도(法度)가 있다는 말을 못들었는데, 성명(聖明)의 조정에서 이런 법을 창안해 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점점 더 잘못된 것을 답습하여 갈수록 더욱 가중됨으로써 신하로서 삼사에 그 이름이 들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퇴라는 두 글자를 쓸 수 없게 만들어서 속박하고 다그침이 도리어 서도(胥徒)와 조례(皁隷)보다 더 심함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자신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 과목을 통하여 출신하려 하겠습니까? 노예처럼 대하고 우마처럼 다그쳐 아침에는 하리(下吏)로 대하였다가 저녁에 경연에 올라오게 하여 도리를 진달하여 큰 덕을 보좌하게 하고 풍릉(風稜)을 진작시켜 관원들의 잘못을 탄핵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 또한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아! 보상(輔相)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깊은 식견과 먼 앞을 내다보는 사려가 없는 탓으로 다투어 조속히 고치게 하지 못하고서 전의 관습만 답습하면서 봉승하고 있는 것이 애석할 뿐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진달한 것은 마땅히 힘쓰겠다."
하였다.
임금이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 어영 대장 박찬신(朴纘新)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김성응이 말하기를,
"관무재(觀武才) 때에 대장은 으레 작문(作門) 밖에 있으면서 신전(信箭)으로 부름이 있어야만 참현(參現)할 수가 있습니다만, 대장을 부를 때는 마땅히 기(旗)를 써야 하는 것이요 신전을 쓰는 것은 부당합니다. 고 상신(相臣) 이완(李浣)이 대장으로 있을 적에 열무(閱武)할 때를 당하여 위에서 두 번이나 신전을 보냈어도 끝내 명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상하가 모두 깜짝놀랐었습니다만 유독 신의 선조인 신 김좌명(金佐明)만이 ‘이완은 결코 무단히 명을 어길 사람이 아니니 군문에 하문하여 보소서.’ 하니, 이완이 드디어 황공하여 대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득이 교룡기(交龍旗)로 부른 연후에야 비로소 나아왔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 신전으로 대장을 부른 것이 이미 잘못된 규례였다."
하였다. 임금이 하문하기를,
"모검(牟劍)의 모(牟) 자 뜻을 경 등이 알고 있는가?
하니, 박찬신이 대답하기를,
"왜검(倭劍)을 모검이라고 하는데 칼을 만든 사람의 성이 모(牟)이기 때문에 모검이라고 일컫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융복(戎服)에 대한 명령은 한편으로는 교외에서 관무(觀武)할 때는 마땅히 이것을 입어야 하겠기에 그렇게 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무진년077) 의 고사를 따른 것이다. 훈련 도감과 어영청 두 영(營)이 선상(先廂)078) 이 되는데 훈국(訓局)은 좌선(左旋)이 되고 어영(御營)은 우선(右旋)이 된다. 이미 융복을 입고 단(壇)에 오르면 사율(師律)은 마땅히 엄해야 하는 것이니, 오군문(五軍門)의 대장(大將)으로 하여금 먼저 참현하게 하라. 그리고 소개문(小開門)·승장포(升帳砲) 이하는 아울러 제거하게 하라."
하였다.
3월 17일 을미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세마대(洗馬臺)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를 행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하문하기를,
"어찌하여 세마대라고 하는가?"
하니,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옛날에 세마루(洗馬樓)가 있었다고 하는데 생각건대 이를 인하여 얻어진 이름인 것 같습니다만, 그 뜻은 상세히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쏘인다.[浴沂風舞雩]’는 것을 제목으로 20운(韻) 칠언 배율(七言排律)을 짓는 것으로 문관들에게 정시(庭試)를 보여 통정(通政) 이하 9인을 뽑았다. 으뜸인 박경행(朴敬行)은 승륙(陞六)시키게 하고 그 나머지도 시상하였다. 저녁에 환궁하였다. 당초 장교(將校)와 군병(軍兵) 가운데 무신년079) 에 출정하여 정탐한 군공이 있는 자와 군공이 있는데도 아직 군문에 예속되지 않은 자로서 오군문(五軍門)·호위청(扈衛廳)을 막론하고 일찍이 군문의 명목에 들어 있던 사람은 모두 초시(初試)를 면제시키라고 명하였다. 제주(濟州)의 무사(武士) 가운데 서울에서 늠료(廩料)를 받는 사람은 이미 관무재의 초시를 치렀으나 이 뒤에 관무재를 보일 때는 서북(西北)의 부료인(付料人)의 예(例)에 따라 일체 초시를 면제시킬 것을 정식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3월 18일 병신
하교하기를,
"이번의 관무재는 무사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기 위한 뜻에서 실시하는 것인데, 삼군(三軍)을 위하여 단지 첫날만 임어했으나 나의 간절한 마음은 그 뜻이 장전(帳殿)에 있으니, 무릇 사예(射藝)를 행할 적에는 한결같이 친림했을 때처럼 재촉하는 일이 없게 하고 줄이는 일도 없게 하라는 뜻으로 모화관에 신칙시키라."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9일 정유
사헌부 【장령 윤빈(尹彬)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내승(內乘)과 훈련원 정(訓鍊院正)은 모두 무신(武臣)의 극선(極選)인데, 내승 허수(許樹)와 훈련원 정 정운철(鄭運喆)은 모두 범상한 무부(武夫)로서 본디 명성이 없고 자급과 경력도 천박하니 아울러 개차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0일 무술
하교하기를,
"상을 먼저 주고 나중 주는 것은 이미 전례가 있으니, 먼저 시험한 장교와 군병에게는 모레 친림하여 상을 내릴 것이다. 후에 시험한 사람들에게는 승지로 하여금 상을 내리게 하라."
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3월 21일 기해
주강을 행하였다.
3월 22일 경자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 나아가 관무재에서 입격된 장교와 군병들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또 문신의 정시(庭試)의 참방인(參榜人)에게도 일체로 시상했는데 밤이 깊도록 파하지 않았다. 입직(入直)한 옥당(玉堂) 김상적(金尙迪)·윤광의(尹光毅)가 나아가 말하기를,
"예로부터 군대를 거느린 신하는 밤에 금중(禁中)에 머물 수 없는 것인데 이제 밤이 이미 깊었습니다. 궁문을 활짝 열고 군병들이 북적대는 것은 신중하게 하는 방도가 아니니 속히 대내로 환어(還御)하소서."
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하찮은 유신(儒臣)이 어찌 감히 삼군(三軍)을 의심한단 말인가? 두 유신(儒臣) 가운데서도 급하고 완만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고, 김상적은 파직시키고 윤광의는 체차시키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이수항(李壽沆)이 간략하게 구해(救解)하느 말을 하니, 또한 체직시켰다.
정언 김광국(金光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문신(文臣)에게 상을 내릴 즈음 구애되는 단서가 없지 않았습니다. 문시(文試)와 유과(儒科)는 구별이 있는 것이어서 작질에 순서가 있고 체모도 본디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만일 과차(科次)로 선후를 정한다면 저 박경행(朴敬行)은 여항(閭巷)의 한 소아(小兒)일 뿐이므로 버젓이 이름 있는 사대부들의 위에 두는 것은 부당한 것이고, 자급(資級)으로 차례를 매긴다면 오늘의 상은 이에 과거를 광영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어서 고등(高等)을 하등(下等) 아래에 둘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즈음에는 빈소(嚬笑)가 광영이 되지 않는 것이어서 사체가 곤란하니, 마땅히 성명(成命)을 중지하고 전대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준절히 꾸짖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사람을 기용하는 방법이 그 재능을 돌아보지 않고 단지 문지(門地)만 취하므로 마음속으로 항상 개연스럽게 여겨 왔었다. 중국의 제도에서는 서길사(庶吉士)와 한림(翰林)이 어느 것이 먼저였는가? 아! 사대부도 또한 여염에 있었는데 어떻게 여염을 비루하게 여길 수 있단 말인가? 소아로 지목한 것은 소아가 소아라고 기롱한 것이라고 이를 만하다. 이런 이야기는 전일의 대유(大諭)에서 이른바 용렬하고 녹록한 자라고 한 그것이다."
하였다. 곧이어 또 대각(臺閣)에 나아가 스스로 논열(論列)하지 않아서 대풍(臺風)을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삭직시켰다.
김약로(金若魯)를 대사헌으로, 임순(任珣)·황경원(黃景源)를 지평으로 삼았다.
3월 24일 임인
지평 황경원(黃景源)이 상소하기를,
"지난번 전하께서 유사에게 명하여 대보단(大報壇)의 아악기를 만들라고 명하신 것은 매우 성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관각(館閣)에서 정한 악장에는 의종 황제(毅宗皇帝)의 성덕을 송축한 것이 한마디도 없는 것을 신은 삼가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숭정(崇禎) 9년(1636) 남한산성이 포위되었을 적에 의종 황제가 총병(摠兵) 진홍범(陳洪範)에게 조명(詔命)하여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는데, 군사가 막 출동하려 할 때 포위가 이미 풀렸기 때문에 비록 공을 이룬 것은 없지만 그 덕의(德義)는 얼마나 후한 것이었겠습니까? 지금 국가에서 이미 황단(皇壇)을 건립하고 악장을 만들었는데도 의종이 군대를 출동시킨 의리에 대해서 조금도 칭송하지 않는 것은 아름다운 덕을 논술하여 명신(明神)에게 천고하는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명사(明史)》를 상고하시고 유현(儒賢)에게 묻고 관각에 하교하시어 황단(皇壇)의 악장에 빠진 부분을 보충하게 하소서. 지금 관각의 신하 가운데 오광운(吳光運) 같은 자는 태학(太學)의 여러 학생들이 관(館) 앞에서 서서 죄를 성토한 자인데도 이에 태연히 피혐할 줄을 모르고 아직까지 문임(文任)에 그대로 있으니, 진실로 부끄러움이 없는 자입니다. 어찌 그런 사람을 이런 일을 의논하는 데 참여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하문하기를,
"조정에서 원래 오광운에게 악장을 지어 올리게 한 일이 없는데 황경원이 갑자기 진소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자,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대보단은 단지 신종 황제(神宗皇帝)만 제사지냈을 뿐 의종 황제는 제사한 적이 없으니 이 소장에 대해서는 신 또한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광원의 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오광운이 전번에 올린 소장의 내용 때문에 반유(泮儒)080) 들이 황감(黃柑)을 반사할 때 축출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고 한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일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야 알겠다. 오로지 오광운을 축출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인데 한 말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
하고, 이어 황경원을 삭직시켰다. 오광운이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신의 문병(文柄)은 남들이 노려보는 자리여서 반드시 화살의 표적이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을 알아준 것에 감격하고 위명(威命)에 핍박되어 억지로 14년 동안 자취를 거두고 있던 끝에 나아왔는데 신인들 어찌 헤아림이 없어 그렇게 했겠습니까? 참으로 인신(人臣)의 진퇴는 반드시 명백하게 하는 것이 요구되므로 험난한 길이 조금 평탄해지면 성은(聖恩)을 보답할 계제가 있게 될 것이고, 놀라운 기미가 다시 움직여진다면 한번 물러나는 데 있어 고집할 만한 말이 있게 되었기 때문에, 우선 배회하면서 효상(爻象)을 관망하고 있었는데 과연 대신(臺臣)의 말이 나왔습니다. 아! 조아(爪牙)를 은밀하게 배포해 놓은 장소에 서서 한 무리의 인재를 모으는 길을 방해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통쾌하게 할 수 없게 만들고서도 태연히 피혐할 줄 몰랐다면 그것은 슬기가 없다고 말해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비록 신이 슬기가 없다고 하더라도 굳게 앉아서 이것을 기다릴 것이니, 대신이 신의 처지를 위해 한 말은 참으로 후합니다. 신은 이것을 보고 실소가 나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만, 이른바 부끄러움이 없다고 한 것은 곧 비부(鄙夫)의 제목인 것입니다. 비부는 임금을 섬길 수 없는 것인데 인신(人臣)이 이런 제목을 얻고서도 얼굴을 들고 다시 조신(朝臣)의 앞자리에 선다면, 아! 참으로 부끄러움이 없게 되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의 말을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바야흐로 과거를 설행하게 되어 있는데 오광운이 당시 문임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미워서 축출하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3월 25일 계묘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시사(試士)한 다음 장주(張澍) 등 10인을 뽑았다. 임금이 시관(試官)에게 밥을 내려 주고 시식(侍食)하도록 명하였는데, 여러 해사(該司)에서 즉시 갖추어 대비하지 못하자 각 해관(該官)들을 모두 나처하라고 명하였다. 예조의 절목 가운데 시관에게 음식을 주는 것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당 당상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방방(放榜)을 끝내고 나서 시신(侍臣)이 다시 흑단령(黑團領)을 갖추고 대가를 수행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말하기를,
"친림한 그날 창방(唱榜)하고 회가(回駕)할 때에는 시신은 마땅히 조복을 입어야 하는데도 흑단령으로 마련하였으니 이는 의주(儀註)가 잘못된 것이다. 해당 예조 당상을 추고하게 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근년에는 무과 출신(武科出身) 가운데 사부(士夫)는 반드시 부방(赴防)하게 하고 중인과 서얼 이하는 자원에 따라 부방하거나 납미(納米)하는 것으로 정식을 삼은 바 있습니다. 근래 듣건대 병조에서 일체 모두 분방(分防)하여 보내기 때문에 중인과 서얼 가운데 원치 않는 자도 감히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전의 정식을 어찌하여 폐각(廢閣)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듣건대 이들이 부방하게 되면 그곳에 폐를 끼치는 것이 매우 극심하다고 하니, 근년의 하교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서북인(西北人)은 부방하지 않아도 의당 변방의 일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또한 부방시키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선행(李善行)을 판결사(判決事)로, 이사조(李師祚)를 주서(注書)로 삼았다.
3월 27일 을사
헌부 【장령 윤빈(尹彬), 지평 임순(任珣)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친림하여 방방(放榜)하는 것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데 어사화(御賜花)와 홍패(紅牌)를 두루 나누어주지 못한 탓으로 무거 출신(武擧出身) 가운데 맨손으로 물러 나온 사람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명색이 당일 창방(唱榜)인데도 다음날에야 비로소 어사화와 홍패를 내렸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던 일인 것입니다. 해사(該司)의 담당 낭관(郞官)을 나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정언 김상복(金相福)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친림하여 상을 내리는 것은 진실로 군민(軍民)을 사랑하고 돌보시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밤이 깊도록 임문(臨門)하여 종누(鍾漏)가 이미 울렸는데도 대궐의 문을 닫지 않았다면, 직책이 경악(經幄)에 있는 신하로서 진달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설령 성심(聖心)에 걸리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갑자기 위노를 가하여 경솔하게 죄벌을 시행하기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엊그저께 두 유신을 체파(遞罷)시키라는 하교는 마땅히 반한(反汗)081) 하셔야 합니다. 은대(銀臺)082) 의 직책은 그 지망(地望)이 청현(淸顯)한 곳입니다. 저 양정호(梁廷虎)란 자는 범한 것이 중하여 저지당한 지 오래인데, 이제 갑자기 다시 승선(承宣)에 의망(擬望)했으니, 정관(政官)에게도 계칙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엄한 비답을 내리고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곧이어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3월 28일 병오
황해 수사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하여 당선(唐船)을 추축(追逐)한 일에 대해 논하고 다시 물력을 획급하여 비선(飛船)을 많이 만들게 할 것을 거듭 청하니, 임금이, 수신(帥臣)이 전지(傳旨)를 따르지 않고 소장을 진달한 것은 체모에 관계되는 점이 있다는 이유로 그의 소장을 되돌려주게 하였다.
평안 감사 김약로(金若魯)가 아뢰기를,
"의주(義州)의 소곶참(所串站)에서 불이 나서 83호(戶)가 불에 타고 13명이나 불에 타서 죽었으니 매우 놀랍고 참혹한 일입니다. 전에 평양(平壤)에서 불이 났을 때 조정에서 곡물을 제급한 전례가 있으니, 회계에 붙인 모곡(耗穀) 2백 곡(斛)을 구하여 나누어 진휼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본도(本道)로 하여금 휼전을 시행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정시(庭試)에 춘당대(春塘臺)에 친림하여 당일에 창방(唱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인 것입니다. 때문에 예조·호조에서는 춘당대의 전례를 범연히 알고 있었던 탓으로 당초 시관(試官)의 공궤(供饋)를 마련하지 않았다가 이런 군색함을 야기시키게 된 것이니 명백하게 정식을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의(聖意)가 이미 과장(科場)을 엄하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으니, 이 뒤로는 알성(謁聖)과 춘당 대시(春堂臺試)에도 예빈시(禮賓寺)로 하여금 응당 준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3월 29일 정미
남태량(南泰良)을 대사간으로, 이주진(李周鎭)을 대사성으로, 이중조(李重祚)와 이형만(李衡萬)을 정언으로, 이제화(李齊華)를 지평으로, 이태중(李台重)을 수찬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응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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