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무신
밤에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尺)쯤 되었다.
김시형(金始炯)을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4경(更)에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숭정전(崇政殿) 남계(南階) 위로 나아가 직접 하향 대제(夏享大祭)의 서계(誓戒)083) 를 받았다. 이조 판서가 서문(誓文)을 읽는 것이 상례인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정세(情勢)를 인혐하면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찬례(贊禮) 또한 아관(亞官)이 대행한 전례가 있다고 하여 참판 이익정(李益炡)을 시켜 읽게 하였다. 이어 해조(該曹)에 명하여 이 뒤로 판서가 유고하면 추이(推移)하도록 부표(付標)하여 정식으로 삼게 하였다.
4월 2일 기유
지평 임순(任珣)이 상소하여 10조(條)를 논하였는데, 첫째는 성지(聖志)를 분발할 것, 둘째는 언로를 넓힐 것, 셋째는 용사(用捨)를 공평하게 할 것, 넷째는 기강을 확립시킬 것, 다섯째는 신공(臣工)을 면려시킬 것, 여섯째는 절검을 몸소 행할 것, 일곱째는 학교를 일으킬 것, 여덟째는 장적을 밝힐 것, 아홉째는 호포(戶布)를 징수할 것, 열째는 군제를 이정할 것 등이었는데 대개 진부한 것이었다. 용사를 공평하게 해야 된다는 데 대해 대략 논하기를,
"동인(東人)·서인(西人)의 당론은 처음 전당(銓堂)의 통색(通塞) 때문에 발론된 것인데 그 뒤 당습이 어긋나고 격화되면서 번번이 전조(銓曹)를 고감(敲撼)시킨 것으로 인하여 점점 가중되었으니, 이것이 성명(聖明)께서 기필코 낭천(郞薦)을 파기시키게 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미 낭천을 파기시켰으니 사람을 기용하는 권한은 모두 전당(銓堂)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대저 낭관의 지위는 낮은 것인데 통색(通塞)을 주장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무궁한 폐단을 끼치게 되었는데 더구나 지위가 높고 책임이 무거운 전당(銓堂)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문신으로서 처음 대간이나 시종에 통망(通望)하는 것은 대략 홍문록(弘文錄)084) 의 규례를 모방하여 이조의 세 당상과 삼사의 장관이 회동하여 완록(完錄)한 뒤 이를 인하여 의망하게 한다면 전당의 권한이 조금 줄어들게 되어 경탈(傾奪)하는 습성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학교를 일으켜야 한다고 한 것에 대해 대략 논하기를,
"공경(公卿)과 시종(侍從)으로 하여금 각기 선비 가운데 문행(文行)이 있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관각(館閣)의 여러 신하들이 학관(學官)과 함께 천거받은 선비들을 모아 놓고 모두에게 경서를 강하게 할 때 반드시 문의(文義)를 질문하고 논란하여 정밀하고 조잡한 것을 변별함으로써 그 높고 낮음을 정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날짜를 가려서 각기 경의(經義)·부(賦)·표(表) 등의 문자(文字)를 시험하여 입격자를 뽑되 강경(講經)에서 구두를 잘 떼지 못하거나 제술(製述)에서 문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에는 대관으로 하여금 적발하여 거주(擧主)를 죄주게 하소서. 외방에 있어서는 주현의 수재(守宰)가 각기 그 고을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경시관(京試官)·감사(監司)·도사(都事)가 준례에 의거하여 시취(試取)하게 하되, 경외(京外)의 액수를 알맞게 헤아려 분정하여 편중되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입선(入選)된 자로 하여금 번을 나누어 관학(館學)에 거처하게 하고는 대사성이 수시로 고강(考講)하고 제술하게 하여 서로 권면하게 하되, 혹 과실이 현저하게 드러나거나 학업을 폐기한 사람이 있으면 즉시 조금도 용서 없이 재사(齋舍)에서 쫓아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부(政府)에서 합좌를 행하는 규례에 따라 사중삭(四仲朔) 때마다 여럿이 모여 고강한 다음 그 가운데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사제(賜第)해야 합니다. 대비(大比)085) 가 있는 해에는 그대로 초택(初擇)086) 의 규례를 모방하되 조금 더 주밀하게 해야 합니다. 사서·삼경을 통강(通講)하게 한 연후에 초장(初場)에서는 경의(經義)와 사론(史論)을 시험하고, 중장(中場)에서는 부(賦)·표(表)를 시험하며, 종장(終場)에서는 책문(策文)을 시험하여 한 도(道)의 획수(劃數)를 통계하여 원액(元額)을 채워야 하며, 전시(殿試)는 반드시 시무책을 시험하여 차례를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도정(都政) 때에는 오늘날 관천(館薦)의 법규처럼 각각 3, 4인을 뽑아 초사(初仕)의 자리에 보임하는데, 한번 식년을 치른 뒤에 다시 법대로 천거하게 하여 등제와 초사자의 부족한 액수를 보충시키도록 절목을 정하여 영구히 준행하게 한다면 현명한 인재들이 거의 기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호포의 징수에 대해 대략 논하기를,
"존비와 귀천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인구를 기준으로 하여 대·중·소·잔호(殘戶)를 정하되, 5구(口)까지를 잔호로 삼고 10구까지를 소호로 삼고 15까지를 중호로 삼고 20구까지를 대호로 삼아야 합니다. 또 중·대호를 두 등급으로 나누어서 각기 호조(戶調)를 징수하되, 1등인 대호는 배 3, 4필을 징수하고 그 나머지 중·소·잔호는 모두 이에 따라 체감시키며, 의지할 데 없는 환과 고독(鰥寡孤獨)의 부류들은 모두 견면시켜 준다면 빈민과 서류(庶類)들은 소호를 벗어나는 경우가 드물 것이어서 부역이 심히 가벼워질 것이고, 중호 이상은 대부분 전태과 장획(臧獲)087) 이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2필이니, 3필의 부역을 내어도 감당하지 못할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고, 군제의 이정에 대해 대략 논하기를,
"먼저 수어(守禦)·총융(摠戎) 두 청(廳)을 파하여 장단(長湍)·광주(廣州) 두 고을에 붙여 사호(使號)를 겸하게 하되, 한결같이 제도(諸道)의 병영처럼 한다면 경표하(京標下)088) 가 일이 없어질 것이고 따라서 먹는 사람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군문(三軍門)089) 의 노약자와 부재자를 점차 태감시키고 금위영(禁衛營)에 헤아려 머물러 둔 훈국(訓局)의 군사 2천 인과 어영(御營)의 군사 1천 인은 영구히 혁파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기병 10만을 두 군문에 나누어 예속시키되, 매 영(營)에 1천 인씩을 정해 주고 돌려가면서 상번(上番)하게 하는 것을 한결같이 오늘날 금어군의 규례와 같게 하여 연곡(輦轂)090) 의 숙위에 대비하게 한 다음 그 나머지는 제도(諸道)의 감사·병사에게 나누어 예속시키게 하소서. 다시 진관(鎭管)의 옛 제도를 회복시킨 다음 이어 각진(各鎭)의 영장(營將)과 수재(守宰)가 매달 조련하게 하는 법을 파하게 하고, 병사가 반드시 농한기에 합쳐 조련하여 크게 열병하게 한다면 사람들이 다투어 권면하게 되어 군대가 반드시 쓸 만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4월 5일 임자
정언 이형만(李衡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실(鄭實)은 한 대신을 논했다가 장기(瘴氣)가 있는 바닷가로 귀양가서 1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의당 성세(聖世)에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민백상(閔百祥)이 귀양간 것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또한 아비를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한 것이었습니다. 아! 대신은 진실로 전하께서 예모로 대우하는 사람이며 정실은 전하의 삼사(三司)이고 민백상은 민형수(閔亨洙)의 아들입니다. 대신의 지위가 높은 것을 돌아보고 두려워하여 삼사에 있는 사람이 감히 그 일에 대해 논하지 못하고 아들된 사람이 감히 아비를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하지 못한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조중회(趙重晦)를 죄준 이래로 한 사람도 다시 조중회의 일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는 데 대해 신은 실로 상심하고 있습니다. 대저 조중회의 상소는 어리석어서 성인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의 마음만은 성실하여 다른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때 전하께서 한마디 하교하시기를, ‘너의 말은 지나친 것이다.’ 하였다면, 상하가 모두 무사했을 것인데 도리어 천고에 없던 지나친 거조를 하심으로써 일국의 신민들로 하여금 놀라운 나머지 죽고 싶게 만들었으니, 아!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옛날 우리 효종(孝宗)께서는 일 때문에 김홍욱(金弘郁)을 죄주면서 구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사죄로 다스리겠다고 한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는데도 이내 다시 마음이 편치 않아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어떤 간신(諫臣)이 대각에 나와서 간하니, 효종께서 기뻐하여 일어나서 말하기를, ‘국가가 비로소 망하지 않겠다.’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대성인(大聖人)이 세도(世道)를 걱정하고 언관을 격려하는 뜻으로 전고에 뛰어난 일입니다. 지난번 전하께서 조중회에 대해 노하신 것은 본디 성조(聖祖)께서 당일 노하였던 것만 못했는데도 여러 신하들은 혼이 나가고 기가 죽어서 전하께서 ‘사죄에 해당시켜야 한다.’고 하면 여러 신하들도 ‘사죄에 해당시켜야 합니다.’라고 하고, 전하께서 ‘마땅히 살려야 한다.’고 하면 여러 신하들도 ‘마땅히 살려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국가에 급박한 일이 있으면 다시 절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세 신하의 죄를 사면하여 주시어 일세(一世)로 하여금 성의(聖意)를 환히 알게 하소서."
하였다.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대노하여 이 형만을 기장현(機張縣)에 귀양보냈으며, 그의 소장을 봉납(捧納)했다 하여 승지를 체직시켰다.
4월 7일 갑인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태묘(太廟)에 나아가면서 대문(大門) 밖에 이르러 연(輦)에서 내리려 할 때 임금이 승지를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정로(正路)에서 연(輦)에서 내리는 것은 끝내 미안스러우니, 이 뒤로 연여(輦輿)는 정로 서쪽에 두고 옥교(玉轎)는 정로 동쪽에 둘 것이요 정로 중앙에 두게 하지 말라."
하였다. 망묘례(望廟禮)를 행하고 이어 전내(殿內)로 들어가 봉심(奉審)한 다음 영영전(永寧殿)으로 나아가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4월 8일 을묘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종묘(宗廟)의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행한 다음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하였다가 저녁에 환궁하였다.
4월 9일 병진
밤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또 달무리가 목성을 감쌌다.
4월 10일 정사
밤에 달이 목성을 범하였다.
정언 이중조(李重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종래 두 유신(儒臣)은 마음에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했는데 이는 그 직책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체직시키고 파직시켰으며 이들을 구하려 한 지신(知申)091) 에게까지 파급시켰습니다. 그리고 하찮은 유신이라는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저 유신이 그 몸은 비록 하찮을지라도 그 벼슬은 돌아보건대 중하지 않겠습니까? 김광국(金光國)이 박경행(朴敬行)을 논한 것이 진실로 사리에 맞지 않은 것이기는 합니다만, 소아(小兒)가 소아를 기롱한 것이라는 하교는 왕언(王言)은 간중(簡重)해야 하는 체모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성명(聖明)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지난번 조태상(趙台祥)의 소장이 나오자 인심과 세도가 다시 말할 수 없게 되었으며, 홍경보(洪鏡輔)가 언문으로 기초(起草)하고 허채(許采)가 이를 번역하여 등서(謄書)해서 일세(一世)에 전파시킴으로써 진신(縉紳)들에게 수모를 끼쳤습니다. 저 조태상은 남의 사주를 받아 당로자에게 아첨하였으니 진실로 책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홍경보가 대신의 의견을 거짓으로 전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을 꾀어서 자신이 영달을 꾀하는 발판으로 삼으려 했으니, 그 정상이 공교하여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아울러 삭판(削版)시키는 형률을 시행해야 합니다. 당후(堂后)092) 는 실관(實官)으로 참하(參下)의 청선(淸選)에 관계되는 것인데, 주서(注書) 이훈(李塤)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자로서 미련하여 일에 밝지 못하니 마땅히 개정(改正)하여 사로(仕路)를 맑게 해야 합니다. 안변 부사(安邊府使) 정언섭(鄭彦爕)은 한때의 희로(喜怒)로 인하여 형장을 함부로 사용하여 관속과 읍민 가운데 쓰러져 죽은 사람이 거의 수십 명이 넘기 때문에 온 경내에 원성이 들끓고 있으나 호소할 데가 없습니다. 도신(道臣)에게는 마땅히 중추(重推)를 가해야 하고 정언섭은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잡아들여 고을 백성들에게 사죄해야 합니다. 유세복(柳世復)은 장단 부사(長湍府使)로 있을 때에 백성의 무덤을 파내고 자기의 선조를 이장했는데 스스로 나아와 잡혀서 가벼운 죄벌을 받았습니다만 그 산소는 그대로 있습니다. 홍치기(洪致期)는 가평 군수(加平郡守)로 있을 적에 그 고장에서 대대로 살아온 집안 후손의 산을 겁탈하고는 여러 대(代)의 무덤들을 억지로 파내게 하고 세 개의 분묘를 이장한 다음 묘막(墓幕)을 크게 지었는데, 그가 체직되어 돌아오는 데 이르러서야 격고(擊鼓)하여 원통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런데도 해부(該府)와 본도(本道)에서 일례(一例)로 덮어두었으니 의당 법에 비추어 감처(勘處)해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가납하였다. 그리고 조태상·홍경보·허채·정언섭·유세복·홍치기의 일은 모두 그 청을 따랐다. 수일 뒤에 장령 한종제(韓宗濟)의 계사에 따라 홍경보·조태상·허채는 모두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보냈다.
영의정 김재로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홍경보 등이 죄에 관련된 것이 모두 전한 사람의 말과 같습니다만 이는 집안에서 하는 해괴한 습관에 불과한 것으로 원래 위를 범한 무거운 죄에 견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철저히 핵실하지 않은 채 단지 풍문에 전하는 말에 의거하여 곧바로 사죄(死罪)에서 한 등을 낮춘 형률로 감처하였으니, 더욱 국체(國體)에 있어 마땅한 것이 아님은 물론 또한 뒷날의 폐단에 관계가 됩니다. 마땅히 우선 귀양 보내는 것을 정지시키고 엄히 핵실하여 감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드디어 세 사람을 하옥시키고 누차 형문하였으나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으니, 임금이 대로하여 잇따라 엄한 하교를 내려 형신을 가하려 하자 조태상이 비로소 바로 실토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홍경보와 절교한 글을 올렸는데 당초 권유하여 모의한 곡절이 그 글에 기재되어 있었다. 임금이 처음에 직접 보려고 하였으나 연신(筵臣)의 진달로 인하여 중지하고 다시 영원히 사적(仕籍)에서 삭제시키고 방귀 전리(放歸田里)시키라고 명하였다. 처음 홍경보가 김재로와 인아(姻婭) 사이여서 요구한 것이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드디어 원망하여 조태상을 사주하여 상소하게 하였었는데, 조태상이 듣지 않을까 염려하여 거짓 대신(大臣)의 말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속였다. 조태상은 본디 이(利)를 좋아하고 주견이 없는 사람이어서 ’조중회의 죄를 논하면 임금이 반드시 기뻐할 것이고 여러 대신들도 방금 엄명에 핍박되어 죽음에서 헤어나려 해도 할 수가 없으니, 또한 반드시 즐겨 듣고 거스르는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여겨, 드디어 함께 상의하여 소장을 지어 올렸던 것이다. 세 정승의 연명(聯名)으로 된 차자가 나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홍경보에게 속은 줄 알고서 분을 이기지 못하여 사람을 대하게 되면 번번이 말을 하였다. 또 날마다 홍경보의 집에 여노(女奴)를 보내어 타매하였으므로 그 일이 드디어 세상에 크게 전파되었는데 모두 그 말을 전하면서 비웃었다.
4월 11일 무오
박필부(朴弼傅)를 집의로, 조돈(趙暾)을 정언으로, 이수항(李壽沆)을 형조 참판으로, 조관빈(趙觀彬)을 예문관 제학으로, 서종옥(徐宗玉)을 형조 판서로, 민응수(閔應洙)를 발탁하여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새로 급제한 조재호(趙載浩)는 공신의 적장자로 일찍이 상호군을 역임했는데 이제 현감으로서 등제했습니다. 무변(武弁)으로서 상호군을 역임하고 등제한 사람에게는 으레 가자(加資)하여 왔으므로 마땅히 문신과 다름이 없어야 하니, 이 전례에 따라하여 가자하고 진용(進用)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조재호는 곧 고 상신(相臣) 조문명의 아들이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2일 기미
밤에 유성이 남쪽 하늘 맑은 구름 사이로 나왔다가 손방(巽方)의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4일 신유
동지중추부사 유복명(柳復明)이 상소하여 관서(關西) 연로(沿路)의 폐단을 논했는데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막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이를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4월 16일 계해
주강을 행하였다.
김상성(金尙星)을 대사간으로, 박필재(朴弼載)를 사간으로, 조창래(趙昌來)와 한덕량(韓德良)을 장령으로, 이구령(李耉齡)을 헌납으로, 윤광찬(尹光纘)을 정언으로, 이광익(李光瀷)을 지평으로, 김상적(金尙迪)을 응교로, 윤광의(尹光毅)를 교리로 삼았다.
4월 19일 병인
주강을 행하였다.
종신(宗臣) 광양 부수(光陽副守) 이재(李梓)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용(金墉)의 변(變)093) 에 천이(天彝)가 모두 무너졌으므로 우리 인조(仁祖)께서 대의(大義)를 분발하여 윤상(倫常)을 밝히고 인기(人紀)를 확립시켰으며, 우리 숙종(肅宗)께서는 금원(禁苑)에다 제단(祭壇)을 축조하여 황은(皇恩)에 보답하기를 도모하였으며 만동(萬東)이라는 편액(扁額)을 내려 일세(一世)를 권장하였습니다. 우리 경종(景宗)께서는 일찍이 국본(國本)을 정하여 대업(大業)을 잘 전수하였으므로 오늘날 끝없이 태평스런 기반을 열게 되었으니, 전하께서는 삼성(三聖)의 성대한 공렬(功烈)을 잘 선양하시는 뜻에서 몇 글자의 현호(顯號)를 추후하여 올리심으로써 성효(聖孝)도 펴시고 여정(輿情)도 위로하소서."
하였는데, 정원에서 벼슬도 미천하고 사람도 미미한 자가 감히 종묘의 일을 논할 수 없다고 일찍 하교한 적이 있다는 것으로 봉입(捧入)하지 않고 연중(筵中)에서 아뢰니, 임금이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승지에게 이르기를,
"상단에서 청한 것은 일개 종신(宗臣)으로서 경솔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단의 일은 내가 아는 것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송(宋)나라의 영종(英宗)이 인종(仁宗)에게 추후하여 진호(進號)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하고, 도로 내어 주라고 명하였다. 이어 이 뒤로는 이런 소장은 봉입하지도 말고 또한 품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형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추관(秋官)은 상례적으로 강관(講官)을 겸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빈객(賓客)의 직임을 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교리 한익모(韓翼謨)가 나아가 말하기를,
"분치(分懥)·공구(恐懼)·호락(好樂)·우환(憂患) 이 네 가지는 사람의 칠정(七情) 가운데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만, 진실로 털끝만큼이라도 치우치게 되면 마음에서 발현되어 정사(政事)를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항상 고심(苦心)이라는 두 글자로 하교하셨는데, 성인의 마음은 거울처럼 텅 비어 저울대처럼 공평하기 때문에 비록 호락(好樂)의 마음이 있어도 치우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고(苦)라는 한 글자를 마음속에 지니고 있으시니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고, 특별히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하여 그의 순실함을 권장하였다.
헌납 이구령(李耉齡)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조태상(趙台祥) 등의 의처(議處)를 중지하고 다시 함문(緘問)하게 하여 그 허실을 핵실하게 함으로써 국체(國體)를 보존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끔찍하고 공교로운 자취가 이미 남김없이 드러났는데 함문을 하여 하나의 곡경(曲逕)을 만들 필요가 뭐 있겠느냐? 청한 것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임금이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을 불러 권무 군관(勸武軍官)094) 의 일에 대해 하순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이것이 어찌 당초 이를 설치한 의도이겠는가?"
하고, 삼군문(三軍門)의 대장(大將)을 추고하라고 명하고 정선(精選)하여 권장하라고 계칙하였다. 이때 임금이 삼군문에 명하여 권무 군관 가운데 여력(膂力)이 있는 자들의 이름을 초록하여 들이게 했는데도 모두 없다고 앙대(仰對)했기 때문이었다.
4월 20일 정묘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4월 21일 무진
지평 이제화(李齊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광덕(李匡德)은 재주가 민첩하고 학문이 넉넉한데 한번 죄를 범한 것 때문에 영원히 성세(聖世)의 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덕수(李德壽)는 나이 많고 병이 깊어 진실로 힘을 다하도록 독책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서울에 불러다 놓고 수시로 연석(筵席)에 나오도록 허락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한다면, 그 위인이 성인의 말과 행적을 만이 알고 있어 성학(聖學)의 공력(工力)에 도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광운(吳光運)도 예로써 대우하는 신하로서 평소 스스로 일에 따라 끝까지 말하고 성의를 다하여 계옥(啓沃)할 것을 기약했습니다만, 혼자서 외롭게 서서 도와 주는 사람이 없는 탓으로 끝내 스스로 편안함을 얻지 못하더니, 지금은 또 병들었다고 고하고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강악(講幄)을 둘러보아도 함께 시(詩)와 서(書)를 강론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옛말에 인재(人才)를 얻기가 어렵다고 하더니 그 말이 미덥지 않은가?’ 했는데,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박춘보(朴春普)는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시종(侍從)하던 신하인데 처음 권관(權管)에 제수했다가 결국 먼 변경으로 귀양 보내었습니다. 비록 이미 이루어진 일이어서 간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이것이 어찌 성조(聖朝)의 지나친 거조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누차 소명을 어긴 모든 조신들에게 번번이 위벌을 가하면서 조금도 헤아려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두 전관(銓官)은 그 죄가 앞질러 행한 것에 불과한데도 끝내는 내쳐 외방에 보임시키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평일 돌보아 감싸주는 뜻에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일찍이 대사마(大司馬)를 역임했던 중신을 폄척하여 수곤(水閫)의 직임에 처하게 했으니, 이 또한 국체를 손상시킨 것은 물론 예로 부린다는 의의에도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답을 내렸다.
집의 박필부(朴弼傅)가 고향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뭇 관료들을 접대할 때 위노가 너무 성대함을 면하지 못하시어 항상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친 거조가 간혹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또한 누차 내렸으므로 대소 신료들이 놀라서 몸둘 바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뭇 신하들의 죄이기는 합니다만 중화(中和)의 덕(德)에 혐의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극기 복례(克己復禮)하는 공부에 미진한 점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는 뛰어난 기상이 너무 드러나서 함축하는 아량이 부족하고 천노(天怒)를 쉽게 발하여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심을 제거하지 못한 탓인 것으로 직언(直言)과 정론(正論)이 혹 뜻을 범촉하여 거스르게 될까 염려스럽고 조정에서 꺼림 없이 마구 간쟁하는 이에게 화가 미치게 될까 우려됨은 물론, 충당(忠讜)의 길이 막히고 영합하고 아첨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는 지경으로 순치(馴致)될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신은 참으로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하고, 또 송나라의 유학자 여조겸(呂祖謙)이 일생 동안 노여워한 일이 없었던 것을 인용하여 경계하니, 비답하기를,
"그 권면한 말은 마땅히 힘쓰겠다."
하였다.
4월 24일 신미
이에 앞서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조중회(趙重晦)의 일을 당하고부터는 양주(楊州)에 나아가 거처하고 있었는데 또 민백상(閔百祥)의 소장 때문에 누차 상소하여 상직(相職)을 사퇴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승지를 보내어 함께 오게 하였으나 끝내 명에 응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상소하여 극력 사퇴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고 돈면하였으며 예조 판서 민응수(閔應洙)에게 명하여 가서 효유하고 함께 올라오게 하였다. 조현명이 부득이 명을 받들었는데 임금이 인견하고 위유하였다.
4월 25일 임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 말하기를,
"안주(安州)의 남당(南塘)에서 실화(失火)하여 근 3백 호가 잇따라 불에 탓는데 도신(道臣)이 호마다 각각 모소미(耗小米) 1석씩을 지급해 주고 묘당으로 하여금 회감(會減)095) 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마땅히 그 청을 따라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외방의 염선(鹽船) 가운데 강두(江頭)에 와서 정박해 있는 것을 모두 내사(內司)에 예속시키게 한 것은 사체(事體)나 명목(名目)에 있어서 진실로 미안스러운 것은 이미 말할 것도 없고 그 말류의 폐단을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염전(鹽廛)의 도고(都庫)가 부리는 침학이 매우 극심하기 때문에 선인(船人)들이 스스로 내사에 예속되기를 원하고 있다고 하니, 마땅히 통렬히 금단해야 됩니다."
하고, 부제조 홍상한도 도고의 폐단을 상세하게 진달했다.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도고가 나온 뒤로부터 하찮은 땔나무 묶음도 강민(江民)들이 임의로 매매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염선을 내사에 예속시키는 것을 파기하게 하고 도고는 각별히 금단하게 하라."
하였다. 조현명이 문언박(文彦傳)의 고사096) 를 원용하여 정실(鄭實)·민백상(閔百祥)을 방면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언박이 당개(唐介)를 부르라고 청한 것은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인데 뒷사람이 이를 모방하는 것은 사심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경이 문언박을 본받으려하니, 나는 마땅히 송나라 인종(仁宗)을 배울 것이다. 정실에 대해서는 그 청을 따를 수 없으나 민백상은 특별히 석방하겠다."
하였다. 조현명이 또 말하기를,
"홍주(洪州)·옹진(甕津)은 모두 바닷가의 지역인데 이기진(李箕鎭)은 본디 풍점(風漸)097) 이 있고 박문수(朴文秀)는 독한 학질을 앓고 있으니, 두 중신은 조정에서 마땅히 진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경하(元景夏)도 조정을 오래 떠나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모두 내직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호조 판서 조관빈(趙觀彬)을 파체(罷遞)시키고 김약로(金若魯)로 대신시켰다. 이에 앞서 조관빈이 김재로(金在魯)와 미세한 일 때문에 노여움을 발하여 소장을 진달했는데 가리지 않고 말한 것이 많았다. 그런데 김재로가 단지 상소하여 변해(變解)만 했을 뿐 죄를 청하지 않았으나, 조관빈이 이 때문에 버티면서 오랫동안 행공(行公)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대신에게 하문하니,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조정의 체통에 관계되는 것이니 질책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자, 이에 파직시킬 것을 명하였다. 형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말하기를,
"반사(頒赦)한 뒤에 그 죄가 도년(徒年)에 해당되는 자는 일체 모두 방송(放送)시키라는 것으로 이미 전교가 있었습니다만 이번 제도(諸道)의 장문 가운데에는 도년으로 방송하지 않아야 할 자들도 모두 석방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3인은 모두 죄를 범한 정상이 용서하기 어려운 데 관계되는 자들로 처음 감사(減死)를 명했다가 다시 도년으로 정했기 때문에 문장을 만들어 회계(回啓)해서 그 기한을 채우게 할 것을 청했는데 묘당에서는 반박하는 것으로 여겨 그르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하문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당초 죄를 관대하게 처분할 때 분명히 살피고 신중히 해서 감등(減等)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감등하게 되면 곧 도년(徒年)으로 되는 것인데 국가에서 정령(正令)을 미덥게 해야 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정리(情理)가 가증스럽다는 것으로 그대로 둘 수가 있겠습니까? 이 뒤로 감등시킬 때 각별히 신중하게 하여 사전(赦典)이 있을 적에 도년은 경중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방송시키도록 정식으로 삼아서 시행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민응수(閔應洙)를 이조 판서로, 민계(閔堦)를 사간으로, 이하종(李夏宗)을 헌납으로, 이게(李垍)를 정언으로, 민광우(閔光遇)와 송창명(宋昌明)을 지평으로, 안집(安𠍱)을 장령으로, 이종성(李宗城)을 예조 판서로, 원경하(元景夏)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민응수(閔應洙)를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삼고, 특별히 홍산 현감(鴻山縣監) 조재호(趙載浩)를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4월 27일 갑술
지진이 있었다.
간원 【정언 이게(李垍)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제관(祭官)을 꺼리고 피하는 것이 고질적인 폐단으로 굳어져 자주 차임되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모면하는 것을 고상한 취미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향(香)은 받을 시기가 박두한 지금 탈을 부리려는 사람들이 분분하니, 마땅히 해조(該曹)에 계칙하여 제관을 가려서 차임하게 하소서. 이광덕(李匡德)은 죄를 진 것이 어떠합니까? 방귀 전리(放歸田里)시킨 것도 이미 형정(刑政)이 사의에 어긋난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 지평 이제화(李齊華)가 감히 재주가 민첩하고 학문이 넉넉하다는 등의 말로 극력 찬양하면서 멋대로 영호(營護)하고 있으니, 이를 엄히 징계하지 않으면 뒷날 기강과 분의를 간범하는 의논이 장차 발자국을 잇따라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마땅히 삭직시켜야 합니다. 강원도 향시(鄕試)의 출방(出榜) 때 모두 사정(私情)을 썼다는 이야기가 온 도내에 전파되어 유생들이 소장을 올려 그 죄를 성토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해당 세 시관(試官)은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관방(官方)의 문란함이 근일보다 더한 적이 없었는데 김유문(金裕門)의 동지(同知)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서추(西樞)098) 의 직책은 그것이 산만(散漫)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품질(品秩)은 경월(卿月)099) 과 대등하고 반열은 판추(判樞)의 다음입니다. 역관(譯官)의 무리는 장쾌(駔儈)100) 에 불과한 자들인데도 조금도 어렵게 여기지 않고 태연히 수의(首擬)하였으니, 해당 전관(銓官)은 마땅히 중추(重推)하여 각별히 계칙함으로써 다시는 역관을 서추에 의망(擬望)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제관과 동지에 대한 일은 윤허하였으나 나머지는 모두 따르지 않았다. 수일 뒤에 사간 민계(閔堦)가 또 상소하여 이제화(李齊華)에 대해 논하면서 파직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4월 29일 병자
헌부 【지평 민광운(閔光運)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장령 이인호(李仁好)는 어떤 인품을 지닌 사람인지도 모른 자인데 외람되이 대선(臺選)에 통의(通擬)하였으므로 물의가 시끄럽게 비등하고 있으니, 마땅히 개정(改正)해야 됩니다. 전 정평 부사(定平府使) 이의복(李宜復)은 형장을 함부로 사용한 것이 끝이 없으니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형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상소하여 이게(李垍)의 계사(啓辭)에 대해 변해하기를,
"지난 겨울 대료(大僚)101) 가, 역관이 공로를 세웠으니 마땅히 권장하는 거조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경연에서 ‘양전(兩銓)으로 하여금 조용(調周)하게 하소서.’라고 청하자, 성상의 하교에, ‘병판(兵判)이 방금 입시해 있으니 먼저 서전(西銓)에서부터 거행하되 반드시 도제조에서 문의하여 합당한 자를 취한 다음 이번에 심양(瀋陽)에 데리고 갔던 사람들과 함께 수용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명을 듣고 나서 동추(同樞)에 마침 빈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도제조에게 간문(簡問)한 다음 처음에는 홍만운(洪萬運)을 의차(擬差)했었습니다만 뒤에 또 김유문(金裕門)으로 대치하였습니다. 김유문은 곧 심양에 갈 때 데리고 갔던 사람입니다. 설관(舌官)으로서 서추(西樞)에 차임된 자가 예로부터 얼마나 많았습니까? 지금 이추(李樞) 또한 영구히 지사(知事)에 임명하여 그 반열이 판추(判樞)의 다음입니다만 장쾌(駔儈)라는 것으로 구애받았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개의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였다. 곧이어 대신의 진백(陳白)에 따라서 다시 해조(該曹)에게 역관의 추함(樞銜)은 전대로 하고 구애받지 말라고 명하였다.
4월 30일 정축
임금의 체후(體候)에 흠절(欠節)이 있었으므로 내국(內局)의 제조(提調) 이하에게 본원(本院)에 숙직하라고 명하였다. 또 월성위(月越尉) 김한신(金漢藎), 금성위(金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궐내(闕內)에서 숙직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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