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기묘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을 사옹원(司饔院)으로 옮겨 숙직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뜸을 맞았는데 원임(原任)·시임(時任) 대신들이 사현합(思賢閤)에 입시하였으니, 곧 와내(臥內)이다. 임금이 의관(醫官)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의 병은 곽란도 아니고 회충도 아니다. 바로 기(氣)와 가래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징후는 산기(疝氣)이다.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본말(本末)이 있고 내표(內表)가 있는 것이어서 먼저 본(本)과 내(內)를 다스린 연후에는 말(末)과 표(表)는 저절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병을 다스리는 것은 고을을 다스리는 것과 같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이는 삼우(三隅)102) 를 반증(反證)할 수 있는 것이다."
하니, 도제조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사람의 한 몸은 한 나라와 같은 것이어서 이미 원기(元氣)가 있으면 외사(外邪)가 어떻게 감히 침범할 수 있겠습니까? 제왕(帝王)의 50세는 곧 보통 사람의 6,70세에 해당되는 것인데 성상께서 침선(寢饍)과 의대(衣襨)에 대해 조심하고 보호하는 것이 도리어 여염집의 소년이 병을 조심하는 것만큼도 못하시니, 신은 이를 안타깝게 여깁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나이는 늙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하였다. 이때 임금이 목면으로 된 침의(寢衣)를 입고 소자모(小紫帽)를 썼으며 이불 하나 요 하나가 모두 명주로 만든 것이었으며 병장(屛障)도 진설하지 않았다. 또 기완(器玩)도 없어서 화려하고 몸을 편하게 하는 제구가 여항(閭巷)의 호귀(豪貴)한 집에 견주어도 도리어 그만 못한 것이 있었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 나와 임금의 검소한 덕에 대해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5월 4일 신사
임금이 백성의 일이 바야흐로 바빠졌다는 것으로 도신(道臣)·수령(守令) 가운데 아직 사조(辭朝)하지 않은 사람은 아울러 재촉하여 내려보내게 하였다. 고례(古例)에 정후(庭候)할 때는 조신(朝臣)이 사출(辭出)할 수 없기 때문에 내린 조처였다.
5월 5일 임오
임금의 병이 조금 나아지자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에게 물러가 본원(本院)에서 숙직하라고 명하였으며, 두 도위(都尉)에게도 출직(出直)하라고 명하였다.
5월 6일 계미
예조에서 임금의 병환이 평복(平復)되었다는 이유로 고묘(告廟)·반교(頒敎)·진하(陳賀)하는 예(禮)를 행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나의 학문이 부족한 탓으로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여 이에 성인의 병을 삼가라는 훈계를 소홀히 하였으니, 바야흐로 매우 부끄럽다. 따라서 일을 크게 벌리는 것은 나의 마음이 아니니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 우의정 조현명이 빈청(賓廳)에 나아가 다시 아뢰어 굳게 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임금이 경상 감사 김상로(金尙魯)를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영남은 본디 인재의 부고(府庫)이니 경은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정원에 하유하기를,
"정원에 머물러 있는 공사(公事)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날마다 긴요한 것과 긴요하지 않은 것을 가려서 들여오도록 하라."
하였다. 고례(古例)에 숙직할 때는 공사를 출납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밀린 것이었다.
5월 10일 정해
약원의 숙직을 파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약원의 여러 신하들이 하루에 두 번씩 들어와 진찰했는데 이 또한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오부(五部)에 명하여 계천과 도랑을 치게 하였다. 또 위군(衛軍)으로 하여금 경회루(慶會樓)의 연지(蓮池)를 치게 했는데 이때 바야흐로 오래 가물었기 때문이었다.
5월 11일 무자
약원에서 숙직한 노고가 있었다는 이유로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제조 정석오(鄭錫五), 부제조 이춘제(李春躋)에게 아울러 가자(加資)하였다.
형방 승지(刑房承旨)에게 명하여 추조(秋曹)의 수도안(囚徒案)을 가져다가 그 가운데 죄가 가벼운 자는 석방하게 하였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행 도승지(行都承旨) 이춘제(李春躋)를 이제 자헌 대부(資憲大夫)에 승진시켰습니다. 전에도 비록 자헌 대부를 도승지로 삼은 경우가 있었으나 특별히 제수하는 경우에 나오기도 했고 혹은 특별한 하교로 더 의망(擬望)한 데서 나오기도 하였으며, 혹은 자급(資級)을 올린 뒤에 계품(啓稟)하여 그대로 제수하기도 했고, 혹은 계품으로 인하여 본직(本職)에서 체직시키기로 한 전례가 있기도 했습니다. 이는 정2품을 정3품의 직임에 제수하는 것이어서 상격(常格) 이외에 관계되는 것이니,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미 전례가 있다는 이유로 특별히 그 직임에 그대로 둘 것을 명하였다.
이주진(李周鎭)을 대사헌으로, 이휘항(李彙恒)을 장령으로, 유언호(兪彦好)를 정언으로, 서종급(徐宗伋)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이창의(李昌誼)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교리 한익모(韓翼謨)가 상소하기를,
"마음을 다스리는 것과 병을 치료하는 것은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아닌 것이니,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증세에 대응하는 조제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납하였다.
찬선(贊善) 박필주(李弼周)·어유봉(魚有鳳), 집의 박필부(朴弼傅) 등이 약원에서 이직(移直)했다는 말을 듣고 모두 도성(都城) 밖에까지 왔다가 임금의 체후(體候)가 평복(平復)되었다는 말을 듣고 소장을 올려 고하고 돌아갔는데, 임금이 아울러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예조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기우제를 행하라고 명했는데 이날 비가 내리자 우선 이후의 날씨를 살펴보고 다시 품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약원의 여러 신하와 대신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대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몸을 요양하는 동안 경 등이 이미 입시하였으니, 백성들의 일에 대해 진달할 만한 것이 있는가?"
하니,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계품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조현명은 말하기를,
"신이 심양(瀋陽)의 사행(使行) 때 차자(箚子)를 올려 수군(水軍) 2천 5백 명을 황해 수영(黃海水營)에 획급시켜 줄 것을 청했었는데, 서종옥(徐宗玉)이 ‘새로 만드는 규례인데 숫자가 너무 많으니 추포 무사(追捕武士)103) 를 옮겨 주어 수군의 부족한 숫자를 보충하게 하는 것이 낫다.’ 하여 의논에 모순이 야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관문(關文)을 보내어 수사(水使) 박문수(朴文秀)에게 문의했더니, 박문수가 비국에 보고하기를, ‘새로 만드는 것도 폐단이 있고 이보(移補)하는 곳도 곤란하다. 옹진(瓮津) 한 고을에서 서울로 상납하는 각색 군보(軍保)가 도합 4백 88명이니, 이를 수영으로 획급해 주고 나서 그 본액(本額)을 다른 곳으로 이정(移定)한다면 그런 대로 가까스로 군대의 모양을 이루게 할 수 있겠다.’고 했으니, 그의 말을 따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14일 신묘
수찬 이창의(李昌誼)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여러 해 동안 수고하시면서 건강을 상하신 것은 오로지 지성으로 잘 다스려지기를 추구하신 데서 나온 것입니다만, 조정의 형상을 통렬히 증오하실 경우에는 성기(聲氣)가 너무 드러나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백성의 고통을 돌보고 걱정하실 경우에는 총명(聰明)을 또한 지나치게 번뇌(煩惱)하시는가 하면 중도(中道)에 지나친 거조도 또 수시로 발로함이 있어서 결국 옛 성왕(聖王)이 편안한 마음으로 순응하여 사물을 각기 그 사물에 맡겨 둔다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게 되었기 때문에, 단지 영위(榮衛)104) 에 손상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 병의 근원이 은밀한 가운데 이루어지고 간혹 행해지는 조처가 중도에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그 고질적인 폐단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분분하게 된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비국의 여러 당상들이 오늘 아침에 신칙했는데도 또다시 어지러이 패초(牌招)를 어기고 있으니 아울러 중추(重推)하여 경계하고 면려시키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그대로 따랐다.
5월 15일 임진
예조에서 아뢰기를,
"전에 정탈(定奪)한 대로 기우제를 설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관상감에서 아뢰기를,
"칠정력(七政曆) 가운데 자기(紫氣)·일요(一曜)를 청나라[彼中]에서는 임술년105) 부터 비로소 첨입했습니다만,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절일(節日)의 사행(使行) 때 본감(本監)의 관원 안국빈(安國賓)을 역관(曆官) 변중화(卞中和)·김재현(金在鉉)과 동행시켜 흠천감(欽天監)의 관원인 대진현(戴進賢)·하국신(何國宸)을 통하여 자기의 추보법(推步法)·좌향법(坐向法)·연길법(涓吉法)과 교식(交食) 등 신법(新法) 가운데 미진했던 조목을 빠짐없이 배워 가지고 오게 했었습니다. 그리하여 역관(曆官)으로 하여금 기왕의 것을 추구하게 하였더니 대부분 꼭 들어맞았으니, 오는 을축년106) 부터 첨입시키게 하소서. 시헌력(時憲曆) 가운데 좌향을 이정하여 진상하고 반행하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배워 가지고 온 역관(曆官)에게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에 따라 논상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뒤에 이조의 복계(覆啓)로 인하여 아울러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5월 16일 계사
하교하기를,
"이런 한더위를 당하여 영어(囹圄)에 있는 죄수들이 안쓰러우니 금오(金吾)와 추조(秋曹)로 하여금 깨끗하게 씻도록 신칙하여 오물과 습기가 사람을 상하게 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7일 갑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8일 을미
임금의 체후가 평복되었다는 이유로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진하(陳賀)했는데 권정례(權停禮)로 하였다.
이종백(李宗白)을 이조 참의로, 홍상한(洪象漢)을 전라도 관찰사로, 정형복(鄭亨復)를 대사성으로, 윤광의(尹光毅)를 검상(檢詳)으로, 안종대(安宗大)를 전라 좌수사로, 신덕하(申德夏)를 황해 수사로, 윤광신(尹光莘)을 공홍 수사(公洪水使)로 삼았다.
헌부 【지평 송창명(宋昌明)·민광우(閔光遇)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진하(陳賀)가 얼마나 성대한 행사입니까? 그런데 외반(外班)은 당초 모양을 이루지 못했고, 먼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투느라 분란스러워 차서를 잃어서 엄숙하고 공정히 하는 의범(儀範)이 없었으니, 해당 압반 감찰(押反監察)107) 은 마땅히 해부(該府)로 하여금 감처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5월 19일 병신
임금이 약원의 여러 신하와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大臣)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시 한 수를 지어 벽에 붙여 놓았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지금에 조제(調劑)하는 일에 대해 물으려 한다면
웃으면서 뜬구름을 가리키고 또 마음을 가리킨다네."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이 아뢰기를,
"옛날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지은 시에, ‘외로운 회포 펴기 어려워 홀로 누대에 기대어 섰다.[孤懷難攄獨倚樓]’한 내용이 있었는데,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이것 때문에 진계(陳戒)했으며, 얼마 안 있어 임진 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전하의 이 시에 대해 신은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음영(吟詠)하는 사이에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임금은 하루에 만기(萬畿)를 살피는데 어떻게 뜬구름처럼 무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이 시는 곧 나의 고심을 표현한 것이다."
하였다. 이때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대할 적마다 대리(代理)시키려는 뜻을 보였으므로 조현명이 아룀이 이러하였던 것이다.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경과(慶科)의 정시(庭試)에 대해 품정(稟定)하고 이어 말하기를,
"당(唐)·송(宋) 이후 오로지 과목(科目)에 의거하여 사람을 기용해 왔는데, 과법(科法)이 한 번 문란해지면 사람을 뽑는 근본이 잘못되는 것입니다. 근래 과거의 폐단이 특별히 심하여 변통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초시(初試)에는 액수(額數)를 감한 다음 책상자를 엄히 수색하고 군막에 각기 한 사람씩 두게 함으로써 법령을 엄하게 한다면 그 폐단을 조금 개혁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연신(筵臣)들에게 하문하였다. 어떤 이는 행해야 된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법이 더욱 주밀하면 간사함이 더 많이 생겨날 것인데 이 법을 행하게 되면 또 어떤 모양의 간사한 폐단이 생길 줄 모르니 행해서는 안된다고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군막을 설치하는 것은 끝내 폐단이 있을 것 같다. 책상자를 수색하는 것은 의당 옛 금령을 엄히 신칙시켜야 한다."
하였다.
임금이 평안 감사 김시형(金始炯)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경을 아끼는 마음에 어찌 외방으로 내려 보내고 싶겠는가마는, 한편으로는 쉬게 하려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서번(西藩)을 진정시키려는 것이다. 그리고 도성을 위하는 계책은 외방의 번리(藩籬)를 중하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경은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 등이 도당(都堂)108) 에 모여 홍문록(弘文錄)의 간택(揀擇)을 행하여 뽑았는데, 6점을 받은 사람은 남유용(南有容)·서지수(徐志修)이고 5점을 받은 사람은 윤동준(尹東浚)·임상원(林象元)·유언호(兪彦好)·김상철(金尙喆)·윤득재(尹得載)·송창명(宋昌明)·조재민(趙載敏)·이익보(李益輔)·엄우(嚴瑀)·신위(申暐)·어석윤(魚錫胤)·홍익삼(洪益三)·조운규(趙雲逵)·이창수(李昌壽)·김상복(金相福)·홍중효(洪重孝)·조명정(趙明鼎)·조돈(趙暾)·조재덕(趙載德)·황경원(黃景原)·민백창(閔百昌)·임박(任璞)·조명건(趙明健) 등 25인이었다. 수일 뒤 임금이 당록(堂錄)을 가져다 보고 어필로 남유용·황경원·임상원·조재덕·유언호 5인의 이름을 지우고 그들의 이름 아래 각각 여덟 자를 써넣었다. 남유용에게는 ‘스스로 대훈을 범했으니 사면받은 것만도 다행이다.[自犯大訓 共赦幸矣]’ 했고, 임상원·조재덕·유언호에게는 ‘대훈을 돌아보지 않고 제방을 엄히 하지 않았다.[不顧大訓 不嚴隄防]’했고, 황경원에게는 ‘지난번 소장은 놀라운 것이었는데 어떻게 이제화(李齊華)에게 견줄 수 있겠는가?[頃章司駭 奚齊華] 하였다. 이는 이제화가 관록(館錄)에는 들어 있었는데 당록(堂錄)에는 빠졌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황경원은 오광운(吳光運)을 논한 적이 있었고 임상원·조재덕·유언호는 한권(翰圈)109) 이 있을 때 권목형(權穆衡)·이우화(李宇和)에게 권점(圈點)을 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임금의 하교가 이에 미친 것이었다.
5월 21일 무술
이때 가뭄이 극심하였었는데 18일(을미)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이날에야 그쳤다.
5월 22일 기해
한림(翰林)의 소시(召試)110) 를 행하였는데 고관(考官)을 입시하게 하여 과차(科次)를 정하고 윤근(尹勤) 등 5인을 뽑았다. 처음 별겸 춘추(別兼春秋)111) 임상원(林象元) 등이 회권(會圈)112) 할 때 3점 이상 15인을 뽑도록 명했는데 이우화(李宇和)·권세숙(權世橚)이 이에 참여되었다. 이우화는 그의 아버지 이거원(李巨源)이 목호룡(睦虎龍)의 교문(敎文)을 지은 적이 있고 권세숙은 그의 증조 권기(權愭)가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안율(按律)하라는 계사(啓辭)에 참여한 적이 있었으며, 권목형(權穆衡)은 권익관(權益寬)의 조카인데도 2점을 얻었기 때문에 시의(時議)가 자못 분분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연석(筵席)에서 흠을 잡아 말하기를,
"이 권점은 잘된 것이 아닙니다."
했는데, 이 때문에 권점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인혐(引嫌)하면서 사퇴하고 소시(召試)에 응시하지 않았다. 임금이 누차 엄한 하교를 내려 독촉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으므로, 이에 관각(館閣)에 명하여 다시 권점을 치게 하였다. 이우화·권세숙을 빼내고 대략 증손(增損)시켜 25인을 뽑았는데 역시 3점 이상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리하여 성천주(成天柱) 등 8인은 입정(入庭)하였으나 김양택(金陽澤) 등 6인은 그래도 들어오지 않자 임금이 대로하여 1점 이상도 아울러 뽑도록 명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소시를 행하지 않으면 내가 장차 수라(水剌)를 들지 않겠다."
하고, 또 그들의 부형(父兄)을 가두고 해도(海島)로 귀양 보내려 하였다. 3일 사이에 정원에 내린 엄중한 교지가 거의 수십여 차례나 되고 위노가 계속 가중되었으므로, 궐내가 온통 진동하였다. 김양택 등이 비로소 응시하니 임금이 기언관(奇彦觀)을 종성(鍾城)에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다. 기언관은 고(故) 명신(名臣) 기대승(奇大升)의 후예이다. 임금이 그가 명현(名賢)의 후손이라 하여 어필로 특별히 한권(翰圈)에 2점을 더해 주어 선발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김양택 등이 함께 같이 나아와 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이 그가 향곡(鄕曲)의 사람을 권장하여 발탁하는 뜻을 생각하지 않고 곧 당목(黨目)을 배웠다는 것을 미워하여 특별히 심하게 죄를 주어 임상원·조재덕·유언호·김양택·이현중을 문외 출송(門外黜送)시켰는데, 임상원·조재덕·유언호는 사사로이 좋아한다는 것으로써 이우화·권목형에게 권점을 친 때문이었고, 김양택은 사람들을 응시하지 못하게 창도한 때문이었고, 이현중은 소시(召試)의 대책(對策)에 놀라운 말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전라 감사 홍상한(洪象漢)을 파직시켰는데 그의 아들 홍낙성(洪樂性)이 사람들을 따라서 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일 뒤에 또 하교하기를,
"한번 한권(翰圈) 소시(召試)에 대한 신령(新令)이 내린 뒤에 이를 우습게 보고 명을 어긴 것이 전후 일관된 상황이었다. 이번의 이 놀라운 거조는 이의중(李毅中)의 무리가 시작한 것에 연유된 것이니, 그 말단만 다스리고 근본을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의중·조중회(趙重晦)·신위(申暐)는 삭직시키고 이를 규정(糾正)하지 않은 여러 대관(臺官)들도 아울러 파직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는 이의중 등이 회천(回薦)113) 에서 권점으로 바꾸는 시초를 당하여 소시에 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후하여 죄준 것이었다.
5월 23일 경자
수찬 이창의(李昌誼)를 승지로 삼았는데 특별히 제수한 것이었다.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지난번 영록(瀛錄)114) 을 직접 지우신 것은 실로 전에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5,6인의 재능이 애석할 뿐만 아니라 후왕(後王)이 이를 전례로 삼게 되면 사람들이 모두 성지(聖旨)를 거스리는 것을 꺼려 드디어 아첨하는 풍조가 이루어질까 염려스럽습니다. 이것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록(弘錄)을 당여(黨與)를 심는 계제로 삼기 때문에 내가 일부러 억제한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바야흐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촉한기(蜀漢紀)를 강하다가 ‘유비(劉備)가 스스로 즉위하여 한중왕(漢中王)이 되었다.’고 한 데 이르러 검토관(檢討官) 윤광소(尹光紹)에게 하문하기를,
"주자(朱子)가 ‘스스로 즉위하였다.’고 썼는데 선유(先儒)들은 ‘스스로 즉위할 수 없다.’는 것으로 유비를 비난했으니, 이것이 과연 어떠한가?"
하니, 윤광소가 말하기를,
"한(漢)나라 헌제(獻帝)가 조적(曹賊)115) 에게 제재를 받고 있으므로 제후(諸侯)들이 품명(稟命)할 데가 없었으니, 소열(昭烈)이 스스로 즉위한 것은 곧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백성의 소망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의리에 어긋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장정옥(張廷玉)이 찬술한 《명사(明史)》에 우리 태조(太祖)가, ‘스스로 즉위하였다.’고 썼는데 지난번 대신(大臣)이 유비가, ‘스스로 즉위했다[自立]’는 두 글자를 가지고 해석하였으나 나의 마음은 끝내 석연하지가 못하였다."
하니, 윤광소가 말하기를,
"성조(聖祖)께서 여대(麗代)의 운이 다한 때를 당하여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사람들의 소망에 좇아 난폭한 임금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제하시니, 역수(曆數)가 저절로 돌아온 것이고, 품승(稟承)할 데가 없으니 그 형세가 스스로 즉위하는 데로 돌아갈 뿐입니다. 옛날 당(唐)나라 고조(高朝)가 대왕(代王)에게 선위(禪位)를 받았는데 선유(先儒) 범씨(范氏)가 명분을 바루어 군대를 일으키지 않고 아울러 궤정(詭正)을 썼다고 기록했습니다. 만일 당나라 고조가 수제(隋帝)를 내치고 스스로 즉위하여 구구하게 선대(禪代)하는 조잡한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면 선유들이 반드시 정(正)임을 허여하고 기롱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고려의 국운이 끝날 때는 실로 수(隋)나라의 말년과 흡사했는데야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성조(聖祖)께서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한 것은 진실로 선유들의 정명론(正名論)에 부합되는 것으로, 비록 선대(禪代)받았다고 하더라도 실상은 혁제(革除)한 것입니다. 고려 말의 신왕(辛王)에 대한 분변은 우선 그만두고 설사 진짜 왕씨(王氏)였다 하더라도 성조(聖祖)의 이 거조는 어찌 그만둘 수 있는 일이었겠습니까? 걸(桀)·주(紂)가 어찌 우(禹)·탕(湯)의 후손이 아니겠습니까마는, 탕(湯)과 무왕(武王)이 오히려 방출하였는데도 후세에서 이를 기롱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신왕(辛王)의 진위(眞僞)에 대해서는 분변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스스로 즉위한 것을 숨길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말이 명쾌하고 시원하게 풀렸다. 지금부터는 ‘자립(自立)’이라는 두 글자에 대한 의혹을 환히 이해하게 되었다."
하였다.
5월 25일 임인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한사득(漢師得)을 대사간으로, 권현(權賢)을 사간으로, 박춘보(朴春普)를 장령으로, 박홍준(朴弘雋)과 정기안(鄭基安)을 지평으로, 이광익(李光瀷)과 남혜로(南惠老)를 정언으로, 서지수(徐志修)와 한익모(韓翼謨)를 교리로, 박필재(朴弼載)와 조돈(趙暾)을 수찬으로, 윤광의(尹光毅)를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5월 26일 계묘
서명빈(徐命彬)을 대사헌으로, 조영국(趙榮國)을 부제학으로, 이광식(李光湜)을 집의로, 남태혁(南泰赫)과 홍득후(洪得厚)를 장령으로, 김상구(金尙耉)와 이민곤(李敏坤)을 지평으로, 한덕량(韓德良)과 유건(柳謇)을 정언으로, 심악(沈)을 응교로, 이정욱(李挺郁)을 사간으로, 어석윤(魚錫胤)을 교리로, 정준일(鄭俊一)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사서(司書) 윤광소(尹光紹)를 수찬으로 삼았는데 특별히 제수한 것이었다.
대사간 한사득(韓師得)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조정의 기강이 엄하지 않아 아랫사람이 임금의 명을 무시하는 것이 곧 고질적인 폐단으로 굳어졌습니다만, 이번의 소시(召試)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때 특별한 교지를 누차 내렸는데 글의 뜻이 매우 엄중하였으며 또 성후(聖候)가 바야흐로 요양 중에 있었으니, 응시하는 사람들에게 사소한 사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힘써 명을 따라야 하는 것은 신하의 분수가 그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도 끝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시 여지없이 국체(國體)를 무너뜨려 손상시켰으니 분의로 헤아려 보면 진실로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이현중(李顯重)의 일은 더욱 놀랍고 망령스러운 것으로 최초에는 거만하게 집에 있으면 유독 궐하(闕下)에 나와서 기다리지 않았고, 억지로 입정(入庭)하기에 이르러서는 그의 대책(對策)에서 말을 가리지 않고 했으니,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전혀 없고 괴이하고 패려스러운 말은 많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삭출(削黜)시키는 가벼운 견책으로는 진실로 그 죄를 징계하기에 부족하니, 마땅히 귀양 보내는 법전을 시행해야 합니다. 대각(薹閣)에서는 규피(規避)하는 것을 예삿일로 여겨 새로 제수한 여러 대관들도 혹은 외방에 가 있다고 일컫기도 하고, 혹은 이유없이 패초(牌招)를 어기기도 하니, 아울러 견파(譴罷)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현중은 간략히 처분했으니 그대들이 진달한 대로 조처하는 것이 옳다. 해남현(海南縣)으로 멀리 귀양 보내도록 하라. 이밖에 청한 것도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이때 임금이 소시를 어긴 오만한 사람들에 대해 죄주기를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울러 많은 대간을 파직시켰다. 연석(筵席)에서 매양 이목관(耳目官)에 대해 개연스럽게 여기는 하교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한사득의 이 소장이 있은 것이다.
5월 27일 갑진
응교 윤심형(尹心衡)을 내쳐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삼았다. 윤심형은 본디 사환(仕宦)을 즐겨 하지 않는데, 그의 숙부 윤봉조(尹鳳朝)의 일이 있은 이후 더욱 당세(當世)에 마음을 끊고 관직(館職)에 나아가지 않은 지가 이미 십수년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말하기를,
"내가 윤심형을 만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그가 산림(山林) 속 은둔하는 고답(高踏)을 숭상하는 선비가 아니라면 유독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찌 없겠는가? 유신은 그에게 이런 뜻을 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심형이 부득이 나아와서 숙배하고 나서 곧이어 또 패초를 어기고 행공(行公)하지 않으니, 임금이 그를 하옥시키고 하교하기를,
"부자 사이라 하더라도 지금은 구애될 것이 없는데 더구나 유자(猶子)116) 사이겠는가? 그가 임금을 섬기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이 가슴속 깊이 축적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윤심형이 다시 버틴다면 이는 임금은 임금답지 못한 것이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한 것이다."
하고, 이어 패초하라고 명하였는데 또 어기니 임금이 노하여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수일 뒤 교리 어석윤(魚錫胤)이 말하기를,
"윤심형이 지난번 하교를 받들고 감격하여 나와서 숙배한 것은 한번 경광(耿光)117) 을 우러르고 싶은 소원에서 나온 것인데, 마침 인접하심이 드문 때를 만났던 탓으로 아직 등대(登對)함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연석(筵席)을 열 때에 입시하게 한다면 어찌 달려와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는 윤심형으로 하여금 경성(鏡城)에서 늙게 만들려고 했었다. 이제 유신의 말을 듣고서 그 본의를 알았으니 어찌 다시 부를 날이 없겠느냐?"
하였다.
자의(諮議) 이양원(李養源)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어려서 배우고 장년이 되어 행하는 것이 선비의 도리인 것이다. 너는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나의 원량(元良)을 보좌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이민곤(李敏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종전에 올린 한 상소에서 한두 대신에 대해 논급했는데 우규(右揆)118) 의 소장에, ‘은밀히 해독을 끼치고 저주를 행하는 행위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게 만든다.’ 했고 또 ‘저 사람이 이미 머리를 숨기고 말을 했으니 신은 따져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아! 신이 논한 것은 실로 직분을 극진히 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던 것이니 관계된 것이 또한 매우 중대한 것이었습니다. 대신이 처음에는 비록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진실로 두려운 마음가짐으로 고치기를 도모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그 타매하는 말이 신이 은밀히 해독을 끼치고 저주하였다는 데 이를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신의 소장에서 한두 대신이라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대신으로 있는 자가 누구이기에 이에 머리를 숨긴 말이라고 합니까? 이미 스스로 모골이 송연하다고 했으니 대신도 또한 반드시 스스로 돌아보아 스스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사리를 분변해야 할 것이 있으면 분변하는 것이 무방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따져 말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상신(相臣)을 기척(譏斥)하고 그 말이 놀랄 만하다는 이유로 삭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조현명이 상소하여 변해하기를,
"대신(臺臣)이 대신(大臣)을 논하는 것은 가하지만 대신을 욕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고, 또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지난번 이민곤이 상소하여 탕평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죄상을 국가에 흉해를 끼치는 것으로 귀결시켰으니, 그 말이 매우 참흑하며 이제 또 추한 욕을 가한 것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전하께서 신 등과 함께 탕평을 주장한 것은 끝에 가서 난역이 있을까 우려한 것인데, 저 사람은 탕평책이 역종(逆種)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신이 어떻게 도움을 받아 임금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위유하기를,
"대훈(大訓)을 물 속에 던져버리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한갓 수고롭기만 할 뿐인 것이다."
하였다.
5월 28일 을사
예조·병조에서 말하기를,
"경과(慶科)의 정시(庭試)에 문무(文武) 초시(初試)의 액수는 마땅히 몇 사람을 뽑아야 하겠습니까?"
하니, 5백 인을 뽑으라고 명하였다.
입직한 옥당(玉堂)을 불러들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읽게 하고서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나의 근력으로 어찌 유신(儒臣)을 인접할 생각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미 입직하라고 계칙해 놓고 한번도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자못 유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부른 것이다."
하였다.
우참찬 이덕수(李德壽)가 졸(卒)하였다. 이덕수는 문장이 박아(博雅)하여 일대(一代)의 종장(宗匠)으로 일컬었으며, 이조·예조 판서를 역임했고 문형(文衡)을 맡았었다. 조정에 벼슬한 지 수십 년 동안 크게 보익한 것이 없었으나, 인품이 순근(醇謹)하고 관박(款朴)하였다. 노쇠함에 이르러서는 조금 염정(廉精)에 흠이 있다고 일컬었다. 부음을 듣자 임금이 철조(輟朝)하고 애도하면서 말하기를,
"그는 충근(忠勤)한 뜻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마음으로 항상 의지해 왔었는데 슬픈 마음이 간절하다."
하고, 관에서 돕는 일을 상례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말하기를,
"옛날에는 매일 상참(常參)을 행하였기 때문에 대간(臺諫)이 대청(臺廳)에 나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이른바 성상소(城上所)라는 것은 대간으로 하여금 항상 성(城) 위에 앉아 있게 한다는 뜻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예로부터 이목(耳目)의 관원에게는 당초 조리(調理)하라는 비답이 없었는데, 지금은 여러 대관들이 상당히 많다고 말할 수 있는데도 곧이어 또 단자(單子)를 올리기 위해 감찰(監察)로 하여금 다시청(茶時廳)에 회좌(會坐)하게 하고 있으니, 백부(柏府)119) 가 이러하다면 미원(薇垣)120) 도 알 만하다. 그런데 정원에서는 전례를 답습하여 품하니, 이는 불찰(不察)에 관계가 된다."
하고, 해방 승지(該房承旨)를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5월 29일 병오
승문원(承文院)에서 아뢰기를,
"봉록(俸祿)이 있는 관원은 모두 액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원(本院)의 사자관(寫字官)의 녹료(祿料) 원과(元窠)는 33인인데 근래 공로가 있어 따로 녹직(祿職)에 붙여진 사람이 점점 증가하여 53과가 되기에 이르렀으므로, 실로 잇대기 위한 방도를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무단히 감제(減除)하기도 곤란하니 지금부터 시작하여 본인이 사망한 경우 그 대신으로 전보(塡補)하지 않음으로써 차자를 숫자를 감하여 40(員)을 원액으로 하고, 조정의 중대한 문자를 선사(繕寫)할 때에는 옛 규례에 따라 사자관(寫字官) 가운데 오랫동안 근무하고 필재(筆才)도 있는 사람을 가려서 보내되, 전함(前銜)을 가진 자들이 상전(賞典)을 희망하여 서역(書役)에 차임되기를 도모하는 자는 엄한 책벌을 가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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