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정미
진선(進善) 윤봉구(尹鳳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생각건대 보통 사람으로 헤아려 보면 50세는 노쇠해 가는 나이이고, 신기(神氣)를 완전히 배양하는 공부로 말한다면 전하의 오늘은 바로 정자(程子)가 말한 기혈(氣血)이 바야흐로 완전한 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 영위(榮衛)에 손상이 없을 수 없어 옥후(玉候)가 간혹 미령한 때가 많았습니다. 질병이 오는 것은 성인이라도 면할 수 없는 것이니 혹 음식을 삼가고 절선(節宣)을 살피는 방도에 미진한 점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송유(宋儒) 여조겸(呂祖謙)의 말에, ‘양생(養生)과 양심(養心)은 그 방법이 같다.’고 했는데, 이는 대개 가슴속으로 항상 화예(和豫)하고 관평(寬平)함을 깨달아서 일이 닥치면 그에 응하는 것이 저절로 절도에 맞게 되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몸에 덕기(德氣)가 넘쳐 흘러서 온갖 병이 모두 제거된다는 뜻입니다. 왕자(王者)가 정치를 함에 있어 만기(萬機)가 지극히 번거로워 해가 기울도록 겨를이 없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그 분한(分限)에 따라 모든 일을 각기 그 일에 맡기게 되면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면서 하루 종일 일을 해도 한 것 같지 않게 됨은 물론 방촌(方寸)이 허명(虛明)하여 하나의 물사(物事)도 있다고 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어찌 피로하고 번뇌하여 병을 유발시킬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병을 치료하는 데는 반드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먼저 하소서. 옛날 선조(宣祖)께서 병이 치유된 경사가 있자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큰 병을 앓고 난 끝에는 선단(善端)이 발현된다는 말을 진달하여 면려했었으니, 전하께서도 마땅히 이 점에 더욱 면려하소서. 무릇 사람이 큰 병을 치유하고 나면 아무 영위(營爲)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사의(私意)가 물러가게 되는 것이어서 물이 줄어 연못이 텅 비는 것과 같은 진경(眞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단지 순수한 천리(天理)와 온화한 선단(善端)만이 있게 되는 것이니 여기에 불을 붙여 나아가듯 확대하고 충만하게 하되 일상 생활에 조금도 간단(間斷)이 없게 한다면, 이는 또 마음을 배양하는 요법(要法)인 것이고 인자(仁者)는 반드시 오래 산다는 이치인 것이어서 장차 성수(聖壽)가 끝이 없어 만세토록 태평을 이루는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신민(臣民)들이 축원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으니 전하께서 유념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상히 여기면서 말하기를,
"즉시 올라와서 나의 원량(元良)을 보좌하도록 하라.
하였다.
형을 시해한 한운성(韓云星)을 베었다. 한운성은 상천(常賤)인데 형수를 음간(淫奸)하고 형을 찔러 죽였으므로 성국(省鞫)을 설치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자백을 받아 법을 바루었다.
진휼을 잘했다는 이유로 부평 부사(富平府使) 어유붕(角有鵬)을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용천(龍川)의 전 부사(府使) 조재언(趙載彦)은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렸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오늘 아침 동몽례(童蒙禮)를 강할 때 교관(敎官) 송문흠(宋文欽)은 제배된 지 여러 달이 되었는데도 끝내 훈하(訓下)한 것이 없었을 뿐더러 궐강(闕講)하기에 이르렀으니, 절목에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춘조(春曹)121) 는 장고(掌故)를 맡은 관서인데 전해 오는 등록(謄錄)이 산만하게 뒤섞여 고증하여 근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문별로 나누어 유취(類聚)해서 등서하려고 하는데, 정랑(正郞) 이맹휴(李孟休)가 박식하여 의탁할 수 있으니, 그에게 마땅히 이 역사(役事)를 전담하여 관장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그 사람을 시험해 보려 한다."
하고, 그대로 따랐다. 이 책은 곧 본조(本曹)에 소장되어 있는 《춘관지(春官志)》이다.
6월 3일 기유
소대를 행하였다.
6월 5일 신해
조관빈(趙觀彬)을 우참찬으로,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윤광의(尹光毅)를 응교로, 윤득징(尹得徴)을 사간으로, 정언유(鄭彦儒)를 장령으로, 조경(趙擎)를 헌납으로 삼았다.
호조 판서 김약로(金若魯)가 상소하여 관서(關西)의 전최(殿最)를 체당(替當)시켜 봉진(俸進)하게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아뢰었다. 이는 김약로가 새로 관서백(關西伯)에게 체직되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대신에게 순무하니,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새 감사(監司)가 기한이 찬 뒤에 근무 실적를 고과하여 전최(殿最)하게 하는 것은 사체(事體)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직에 있는 신임 감사를 버려두고 기필코 전임 감사에게 체당(替當)시켜 집에서 봉진(封進)하게 하는 것은 일이 매우 구간(苟簡)스러우며, 또 전최를 엄명(嚴明)하게 하는 의의가 아니 것입니다. 관서(關西)와 영남(嶺南)의 전최는 신임 감사로 하여금 기한이 차기를 기다려서 진봉하게 하고, 각도(各道)에도 의당 이것을 정식으로 삼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청하기를,
"이 뒤에 한권(翰圈)이 있을 적에는 나이 60세가 된 사람은 거론하지 않을 것을 절목에 첨가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처음 윤근(尹勤)이 1점을 받은 사람으로서 피선되었었는데 소시(召試)할 때 나이가 56세였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60세인 사람이 사필(史筆)을 잡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50세가 되도록 한 자급도 없는 사람은 분관(分館)한 뒤에 출륙(出六)시키는 것이 바로 국조(國朝)의 고전(古典)인 것이니, 윤근은 마땅히 곧바로 출륙시켜야 한다.’ 하니, 수찬 이창의(李昌誼)가 말하기를, ‘나이 50세가 넘은 사람은 응시하지 못하게 하면 모르지만 윤근은 이미 응시하였고, 또 으뜸을 차지했으니 처음부터 부직(付職)하지 않고 출륙시키는 것은 매우 법을 미덥게 하는 뜻이 아닌 것이다. 오늘 부직하고 내일 승륙(陞六)시켜도 불가할 것이 없다.’고 했는데, 임금이 그의 말을 옳게 여겨 전례에 따라 부직하고 이어 즉시 승륙시키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이때에 이르러 대신이 이런 청을 하게 된 것이다.
문학(文學) 이중조(李重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언섭(鄭彦燮)은 부임한 지 반년도 못되어 함부로 죽인 사람이 10인이 넘으니 그가 형장을 잔혹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監司) 심성희(沈聖希)의 소장에는 대단한 기세로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있는 힘을 다하여 벗어나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사람을 죽인 것의 다과(多寡)는 그 숫자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미 자복한 것만으로도 또한 많이 죽였다고 이를 만합니다. 더구나 신이 들은 바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만일 전하께서 특별히 다시 조사하게 하여 진실로 나란히 죽은 사람들이 원통해 할 만한 것이 없고 참으로 도신(道臣)이 한 말과 딱 들어 맞는다면 신은 망언을 한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그리고 삼가 듣건대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유세복(柳世復)·홍치기(洪致期)가 분산(墳山)을 파서 옮긴 데 대한 당부(當否)를 하문하시니, 수령이 경내의 산을 점유한 경우에는 나처하게 되어 있는데도 파서 옮긴 데 대한 조항은 없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경내의 빈 땅도 오히려 모점(冒占)하는 것을 금한다면 법을 설립하면서 파서 옮기거나 파서 옮기지 않는 데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사리상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세복·홍치기처럼 강제로 백성의 무덤을 파내게 한 다음 법을 무시하고 입장(入葬)했는데도 산을 점유한 율(律)을 인용하여 오늘날처럼 끝내 무사하게 조처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소중한 것인데 함부로 살해한 수령에게 전하께서 조금도 죄를 가하지 않으시며, 무덤을 파낸 것은 잔인한 해독을 가한 짓인데도 금령을 무시한 수령을 전하께서 왜곡되게 관대한 처분을 내리시니, 옛 성왕(聖王)이 백성을 사랑하는 은혜와 드러난 뼈를 묻어 준 인자함에 견주어 보건대 어찌 혐의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그 소장을 보고 나서 대신에게 하문하니,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그 소장에 이미 ‘들은 것이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 한 조항에 대해서는 마땅히 이중조에게 함문(緘問)해야 합니다. 유세복·홍치기의 일에 대해서는 그 사실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세상 사람들이 산가(山家)의 말에 동요되어 가끔 근거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뒤로 만일 수재(守宰) 가운데 경내의 산을 점유한 자가 있을 경우 반드시 파서 옮기는 것을 통렬히 금한 연후에야 잔약한 백성이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니, 이 한 조항은 마땅히 영갑(令甲)에 드러내어야 합니다."
했는데,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중조의 함답(緘答)이 온 데 이르러 금부(禁府)에서 아뢰기를,
"정언섭의 처음 공초에 이미 10인이 쓰러져 죽었다고 자수했으니 지금 10인 이외에 더 조사하여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죄명이 숫자에 따라 증가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장(杖) 1백에 고신(告身)을 빼앗는 것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하였다. 조현명이 또 말하기를,
"금년에는 호중(湖中)에 비가 상당히 흡족하게 왔는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천안(天安)·직산(稷山) 두 고을에는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혹시 형옥에 원통한 것이 있어 위로 천화(天和)를 간범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놀라서 말하기를,
"이는 한(漢)나라 때 동해군(東海郡)의 일122) 과 같은 것이다."
하고, 이어 어사(御史)를 보내어 살피게 할 것을 의논하였다. 조현명이 수찬 윤광소(尹光紹)를 천거하니 임금이 특명으로 윤광소를 호서(湖西) 두 고을의 염찰사(廉察使)로 삼았다. 인견하여 한(漢)나라 때의 우공(于公)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효유하고, 또 말하기를,
"기전(畿甸)을 지나는 길에 호서(湖西)와 가까운 고을에 만일 불법을 저지른 일이 있으면 듣는 대로 돌아와서 아뢰라."
하였다.
이석표(李錫杓)를 대사간으로, 박필부(朴弼傅)를 집의로, 심익성(沈益聖)을 장령으로, 이수해(李壽海)와 김상철(金尙喆)을 정언으로, 홍익삼(洪益三)을 수찬으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0일 병진
임금이 예조에 하교하기를,
"때를 맞추어 내리는 비가 장마가 되어 날짜가 거듭 되어도 그치지 않고 있다. 지금이 6월이기는 하지만 농사를 손상시킬 우려가 없지 않다.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고 장마가 들면 기청제를 지내는 것이 상례이니, 기청제에 관한 한 조항을 대신에게 순문하라."
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대답하기를,
"3, 4일 동안 내리는 비는 농가에서 기다리던 끝에 있는 것인데 만일 그대로 다시 비가 오지 않는다면 도리어 농사를 손상시킬 우려가 없지 않으니 기청제에 관한 한 조항은 이제 경솔히 의논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6월 11일 정사
헌납 조경(趙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강진 현감(康津縣監) 신근(申)은 자기의 서자(庶子)를 본토(本土)의 부민(富民)을 협박하여 결혼시키고 나서 며느리를 보는 날 그 부민을 관문(官門)으로 데려다가 강제로 그가 나누어 줄 전토의 문권을 받아 냈습니다. 이같은 거조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니 마땅히 삭판(削版)시켜야 합니다. 예산 현감(禮山縣監) 이하석(李夏錫)은 하나의 하찮은 일 때문에 경내의 연소한 선비를 잡아다가 하루에 잇따라 혹독한 형장을 가하여 운명하기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풍문을 다 믿을 수는 없다는 이유로 모두 해부(該府)로 하여금 조처 하도록 명하였다.
이조 참의 이종백(李宗白)이 상소하여 고 상신(相臣) 이회(李會)123) 의 고사를 인용하여 한 고을을 주어 노부모를 봉양하게 해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사은사(謝恩使) 양평군(陽平君) 이장(李檣)과 이일제(李日躋)·이유신(李裕身) 등이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불러서 접견하였다. 이일제에게 청나라[彼中]의 사정과 연로에서 들은 것에 대해 하문하니, 이일제가 말하기를,
"신 등이 관(館)에 있을 때 서반(胥班)이 역관(譯官)에게 말하기를, ‘5냥의 은자를 뇌물로 주면 회자(回咨)에 어휘(御諱)를 쓰지 않게 하겠다.’ 했는데, 신 등은 사체에는 부당하지만 저들이 이미 이런 말을 했으니 우리가 거절할 것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열 장의 국서(國書)에 모두 어휘를 쓰지 않았으니 이 한가지 일을 가지고도 기강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회자의 글을 가져다 보고 나서 웃으면서 말하기를,
"과연 쓰지 않았구나. 그러나 번국(藩國)의 자문(咨文)에 국왕의 이름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관들에게 분부하여 이 뒤로는 이렇게 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사간 윤득징(尹得徵)이 상소하여 한권(翰圈)의 외람되고 잡된 폐단에 대해 논하니, 임금이 분명하게 지적하여 말하지 않고 아리송하게 한 것을 미워하여 불러서 접견하고 핍박하여 하문하였다. 윤득징가 그제야 비로소 박혼원(朴混源)·이환(李渙)으로써 대답하니, 임금이 윤득징의 의도가 한권을 저패(沮敗)시키려 한다고 하교하며 준절히 꾸짖고 이조에 명하여 다시는 청선(淸選)에 검의(檢擬)하지 말게 하였다.
6월 13일 기미
승지에게 명하여 상번 향군(上番鄕軍)들을 불러 모아 질고에 대해 하문하고 조목별로 나열하여 진달하게 하니, 도망한 지 16년이 되었는데도 대정(代定)을 허락하지 않아서 인족(隣族)에게서 징발한 자도 있고, 부자 4인이 아울러 군역에 응한 자도 있고, 나이 60세가 넘었는데도 아직껏 군적에 예속된 자도 있었는데 모두 조사하여 면제시키도록 명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내가 어찌 이들에게 기림을 받고 싶어서 이렇게 하겠는가? 진실로 그들이 억울하고 고통스러워도 상달할 길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겨서이다."
하였다.
교리 서지수(徐志修)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서한(西漢)의 조서(詔書)는 간중(簡重)하고 관대(寬大)하여 매우 왕언(王言)의 체통을 얻은 것이니, 수시로 이를 읊조린다면 인심을 광박(廣博)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더욱 어린 나이에 살피고 돌아보는 자료로 쓰기에 합당하니, 춘방관(春坊官)으로 하여금 동궁(東宮)에 써서 올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에 따르고 그 책을 《한조초(漢詔抄)》라고 명명하였다.
6월 14일 경신
헌부 【지평 남태기(南泰耆)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사은 동지 정사(謝恩冬至正使) 양평군 이장(李檣)이 돌아올 때 우회하여 그의 아들 임소에 들어갔었으니, 마땅히 중추해야 합니다. 지난 겨울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했다가 밤이 되어서 환궁하실 때 문밖에 있던 군사들이 성문 위에 많이 모여 있다가 각기 군장(軍裝)을 성 아래로 던지고 성가퀴를 타고 어지러이 내려왔습니다. 이는 주장(主將)이 된 자가 잘 신칙하지 못한 소치이니, 해당 군문(軍門)의 대장을 중추하여 경계를 보이고 군사는 조사해 내어 법에 의거 징계하여 다스리게 하며, 문부장(門部將)은 종중 과죄(從重科罪)하소서. 귀성(龜城)의 전 부사(府使) 최성(崔晟)은 당초 본읍(本邑)의 성묘(聖廟)를 수보하겠다는 것으로 예조에 보고하고서 무단히 다른 장소에 옮겨서 건립했으니, 마땅히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傳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6일 임술
윤광의(尹光毅)를 사간으로, 이규휘(李奎徽)를 장령으로, 조운규(趙雲逵)를 수찬으로 삼았다.
6월 18일 갑자
예조에서 아뢰기를,
"장맛비가 지리하게 내려 갤 기약이 없으니 화곡(禾穀)의 손상이 안타깝습니다. 입추 전에 기청(祈晴)한 것은 이미 전례가 있으니, 사문(四門)의 영제(禜祭)124) 를 마땅히 날짜를 가리지 말고 설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6월 19일 을축
어유룡(魚有龍)을 대사간으로, 임순(任珣)을 지평으로 삼았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성중(李成中)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부수찬 조운규(趙雲逵)가 아버지 조영국(趙榮國)이 현재 부제학의 직임을 띠고 있다는 것으로 상소하여 체직시켜 달라고 청하기를,
"옥당관(玉堂官)은 상피(相避)가 없다고 하나, 인정에 불안한 점이 있으니, 법례(法禮)도 또한 때로는 굽힐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6월 20일 병인
초혼(初昏)에 유성(流星)이 천봉성(天棓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6월 23일 기사
윤득재(尹得載)를 교리로, 조재민(趙載敏)을 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무변(武弁)들의 당습(黨習)은 마땅히 통렬히 금단해야 하는데 선전관(宣傳官) 등이 당론으로 인해 신진의 가부에 대해 지색(枳塞)하고 있습니다. 또 지난번 성상의 체후가 미령할 때 주식을 장만하여 남산(南山)에서 모여 활쏘기를 했다고 합니다. 무식한 무부(武夫)들이어서 책할 가치도 없기는 합니다만 그 습성은 통분스러운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무부들이 당론을 주장하는 것을 통렬히 증오하여 일찍이 선전관(宣傳官)에게 신칙하기를,
"만일 문관들이 당론을 주장하는 것을 본받으면 반드시 효수하여 삼군(三軍)에게 보이겠다."
했었는데, 김재로의 말을 듣고는 임금이 대로하여 드디어 건명문(建明門)으로 나아가 군용(軍容)을 진설하고, 선전관 이의익(李義翼) 등을 잡아들이게 하고, 그 가운데 5인을 적발하여 얼굴에 회(灰)를 바르고 두 손을 뒤로 묶어 군중(軍中)에 돌면서 보이게 하고 장차 효시하려 하였다. 이에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서 중관(中官)을 시켜 말을 전하여 중지할 것을 권하니, 임금이 이에 사형을 감면하고 나누어 정배(定配)하였다.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자전께서 하교하시고 성상께서 효심으로 따르신 덕분에 수십 인의 목숨을 온전히 살렸으니, 국운이 영원할 것을 기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번의 거조로 세 가지 선(善)함을 이루었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하였다. 임금도 본디 위엄을 보이려고 했을 뿐 실제 베려는 의도는 없었으며, 대신과 여러 신하들도 이런 임금의 의도를 헤아려 알고 있었으므로 둘러서서 보기만 할 뿐 간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바야흐로 임금이 문에 나아갔을 적에는 대간(臺諫)들이 대청(臺廳)에 있다가 나아와 길가에 엎드려 맞이하였으나 또한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은, 지색(枳塞)당한 선전관 가운데 한 사람인 이광천(李光天)은 곧 김재로의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에 그의 호소에 따라 입시하여 고한 것이라고도 했다. 이때 선전관이 모두 잡혀 들어갔으므로 명을 전할 사람이 없자 옥당(玉堂)·춘방(春坊)의 사람 다섯을 문겸(文兼)으로 차임하여 선전관의 일을 행하게 명하였는데 그들이 임금 앞에서 뛰어다니며 외쳐 부르는 것이 한결같이 무인들이 하는 것처럼 하였다. 임금이 본디 문관들의 교만함을 기필코 굽혀 억제하려 했기 때문에 매양 동가(動駕)할 때를 당하면 소란을 잘 금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번번이 병랑(兵郞)에게 곤장을 치기도 하고 혹은 옥당을 만호(萬戶)·권관(權管)으로 출보(黜補)하기도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고 탄식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이형만(李衡萬)의 정리(情理)가 가긍하다는 것을 우러러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자(王者)는 효로 다스리는 것이니 석방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4일 경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명하여 선전관에게 가죄(加罪)하는 전교를 쓰게 했는데 누누이 거듭된 말이 수백 글자나 되었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나아와 말하기를,
"엊그제의 처분은 실로 과중(過中)한 것이 많았는데도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뜻을 받들어 따르기만 일삼았을 뿐이었습니다. 이 일이 지극히 미세한 것인데 어찌 조정에 올릴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일 16인의 머리를 과연 궐문에 매어 달게 되었다면 이것이 무슨 경상(景象)이란 말입니까? 그러나 끝내 베었다면 이것이 지나친 거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강은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초의 처분은 찬배시키는 데 그쳤으므로 국체(國體)가 더욱 실추되었습니다."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성상의 춘추가 높으시고 옥체가 미령하신데 단지 10세 된 원량만 있을 뿐이니, 국세가 어떠합니까? 신이 오늘 돌아와 우러르니 천안(天顔)이 옛날 같지 않고 용수(龍鬚)가 거의 다 하얗게 세었으니, 성체(聖體)를 삼가고 조섭하는 일이 어찌 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매양 이런 데에 너무 지나치게 격뇌하시는 것입니다. 지난번 한림(翰林)의 소시(召試)는 이를 영사(領事) 감사(監事)에 맡기시면 되는 것이고 선전관을 처치하는 일은 양국(兩局)의 대장(大將)과 병판(兵判)에 맡기시면 또한 족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상께서 직접 행하여 할 일이겠습니까? 모든 일을 상세히 하려 하면 낮추어서 유사(有司)의 일을 행할 걱정이 있기 때문에 옛날 면류(冕旒)로 귀를 가린 것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박문수가 황해 수사(黃海水使)에서 체직되어 돌아왔었다. 임금이 안색을 고치고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옛날 한나라 무제는 ‘오랫동안 급암(汲黯)을 보지 못했다.’고 한 말이 있었는데, 경의 이 말은 참으로 나의 약석(藥石)이다. 내가 당론을 증오하는 마음이 늘 가슴속에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인데 특별히 경을 위하여 중지하겠다."
하고, 이어 대신(大臣)에게 말하기를,
"영성(靈城)의 이른바 조정에 올려서는 안된다는 말이 참으로 옳다. 유신(儒臣) 또한 마땅히 구대(求對)해야 되는데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내가 경 등에 대해 개연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는 신 등의 죄입니다. 성상께서 매양 잘 진간(進諫)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신 등을 오늘처럼 책망하신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경 등의 잘못이 아니다. 나에게 지나친 거조가 많았기 때문에 경 등으로 하여금 진간(進諫)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니, 이 또한 나의 허물인 것이다."
하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전하의 이 하교는 말 한마디가 나라를 흥기시킬 수 있다고 이를 만합니다."
하였다. 수일 뒤에 임금이 또 대신(大臣)에게 말하기를,
"나의 엊그제 일은 한번 당인(黨人)을 제거하려는 뜻에서 한 것이다. 이것이 비록 고심한 데서 나온 것이지만 내가 한 무부(武夫)의 머리를 매어단다면 훗날의 사왕(嗣王)이 간신(諫臣)의 머리를 매어 달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유약하게 하는 것이 끝내 폐단은 있겠으나 죽이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 폐단이 더욱 큰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역사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해 보이려 한다."
하였다. 이때 임금이 박문수의 아룀이 있은 뒤로부터 잇따라 뉘우치는 하교를 내리니, 이에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분분히 말하지 않을 것을 가지고 자책하였다. 조현명이 또 말하기를,
"궁관(宮官)을 통하여 세자가 지은 시를 얻어 보니 만대토록 태평을 누릴 수 있는 기상이어서 기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하고, 이어 ‘서당에서 글 읽기를 좋아하니[書堂好讀書] 글 뜻을 저절로 알 수 있도다. [文義自可知], 꾀꼬리 노래하고 제비 춤추니 바로 기쁜 빛이로다. [鸝歌燕舞正喜色]’한두 구(句)를 외고서 아뢰기를,
"예질(睿質)이 탁월(卓越)하지만 배양하는 도리를 조금이라도 완만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몸소 가르치고 실천으로 인도하신 연후에야 성취하는 효험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항(閭巷)에서 전하는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듣건대 작년에 사신이 와서 유리 병풍을 바쳤다고 하는데, 전하께서는 춘추가 높고 덕이 높으시니 어찌 귀로 듣고 눈으로 보시는 오락에 동요되시겠습니까마는, 동궁께서는 바야흐로 어린 나이이시니 이런 기이한 완호물을 어찌 가까이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진실로 옳다. 나도 또한 좋아하지 않아서 이미 치웠다."
하였다.
6월 25일 신미
관상감에서 아뢰기를,
"낮의 시각은 일영(日影)으로 측후할 수 있어서 큰 착오가 없습니다만 밤의 시각은 중성(中星)을 모르기 때문에 단지 누각(漏刻)에만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주(更籌)125) 가 고르게 맞게 할 수 없어서 파루(罷漏)가 이르기도 하고 늦기도 합니다. 이는 바로 주관(周官) 설호씨(挈壺氏)의 직책인데, 허술함이 이와 같으므로, 지난해 절사(節使)의 사행길에 본감(本監)의 관원 안국빈(安國賓)이 중성에 대한 신법을 얻어 가지고 와서 낮에는 오영(午影)126) 을 참고하고 밤에는 중성을 고증해 보니, 시각을 헤아리는 법이 참으로 주밀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역서(曆書)를 이미 시헌력(時憲曆)을 쓰고 있으니 중성도 마땅히 저 신법을 따라야 합니다. 오는 입추일부터 금루(禁漏)에서 측후하여 누주(漏籌)를 바르게 고증할 방도를 마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6월 26일 임신
이에 앞서 형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총관(摠管)으로 입직했었는데, 임금이 밤에 불러서 접견하고 형옥을 신중히 심의하라는 뜻을 면대해서 거듭거듭 신칙하니, 서종옥이 말하기를,
"율문(律文)이 복잡하여 관리들이 봉행하기가 현란스러우니, 마땅히 한번 이정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증수 대전 속록 찬집청(增修大典續錄纂輯廳)을 설치하여 형법을 산정하게 하였다. 여기에 당상관과 낭관을 두고 삼공(三公)이 이를 구관하게 했는데, 전후의 《속록(續錄)》과 《수교(受敎)》·《전율통고(典律通考)》등을 가져다가 복잡하고 중복(重複)된 것은 제거하고 어긋나는 것을 이정하여 모두 품재(稟裁)를 거치게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전일 《소학(小學)》의 훈의(訓義)는 성종조(成宗朝)의 일로 인하여 성취했는데, 오늘 이 책은 또 세종조(世宗朝)의 일로 인하여 장차 성취하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어느 때를 기다림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도 같다. 경 등은 반드시 속히 완성시켜 나의 계술(繼述)하는 뜻을 이루게 하라."
하였다.
이일제(李日躋)를 비국 당상으로 특별히 차임했는데, 비국 당상을 중비(中批)127) 로 차임한 것은 이일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지평 오명수(吳命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왕도와 패도가 나뉘는 것은 한 생각에 달려 있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삼대(三代)로 기약을 하여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도리를 행하소서. 붕당의 화는 한 생각의 차이에 달려 있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갑자기 의심과 노여움을 가하지 마시고 함께 마음 깊이 화목한 지경에 이르게 하소서. 기강을 확립하는 것은 상벌을 신중하게 하는데 달려 있고 언로를 여는 것은 당직(讜直)한 말을 용납하는 데 달려 있으니, 또한 더욱 마음을 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한 것은 마땅히 살피고 유념하겠다."
하였다.
6월 27일 계유
한여름이라는 이유로 형방 승지(刑房承旨)에게 명하여 전옥서(典獄署)에 달려가서 죄가 가벼운 죄수를 관대하게 처결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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