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9권, 영조 20년 1744년 7월

싸라리리 2025. 9. 27. 15:50
반응형

7월 1일 병자

김상성(金尙星)의 품계를 올려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헌부 【지평 오명수(吳命修)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양역(良役) 가운데 당사자가 죽었는데 물고(物故)로 기재되지 않은 자와 나이가 찼는데도 탈하(頉下)128)  하지 않은 자와 도망한 지 이미 오래인 자는 마땅히 조사하여 이정함으로써 백골(白骨), 또는 인족(隣族)을 침징(侵徵)하는 폐단을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경외(京外)의 오랫동안 체류된 죄수는 마땅히 죄의 경중에 따라 즉결하게 함으로써 화기를 손상시키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외방 고을의 호장(戶長)이 정조(正朝)에 와서 기다리는 것은 겉치레에 불과한 것으로 폐단이 작지 않으니, 마땅히 내년부터는 정면(停免)시켜야 합니다.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성상께서 임문(臨門)하신 날을 당하여 한마디도 광구(匡救)하는 일이 없다가 연신(筵臣)이 그르다고 공척(攻斥)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거칠게 소장을 진달하였으니, 매우 구간(苟簡)스러운 데 관계됩니다. 아울러 파직시켜야 합니다. 한권(翰圈)에 피선된 구윤명(具允明)은 그 할아비가 대사(代射)하다가 충군(充軍)되었으니, 그의 손자로 하여금 한선(翰選)에 오르게 할 수 없습니다. 개정(改正)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양역과 체류된 죄수의 일은 윤허하였으나 나머지는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구윤명은 곧 구혁(具爀)의 손자이다.

 

7월 2일 정축

이기진(李箕鎭)을 경기 관찰사로, 유엄(柳儼)을 대사간으로, 안상휘(安相徽)를 사간으로, 안집(安𠍱)을 장령으로, 민원(閔瑗)을 헌납으로, 박성원(朴聖源)을 지평으로, 이경항(李景恒)을 장령으로, 이익정(李益炡)을 동지 사은 부사(冬至謝恩副使)로, 이하종(李夏宗)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세자 빈객(世子賓客)        이기진(李箕鎭)·조관빈(趙觀彬)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서우(暑雨)가 재앙이 되어 어른과 아이가 함께 병을 앓고 있습니다. 동궁 저하께서 이런 때 자주 강연을 여는 것은 성인이 병을 삼가하라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으니, 처서(處暑) 전까지를 한도로 마땅히 정강(停講)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아침 저녁 서늘한 때를 타서 편의에 따라 궁료(宮僚)를 인접하여 전에 배운 것을 다시 익히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영의정 김재로, 우의정 조현명 등이 헌신(憲臣)이 삼사(三司)를 파직시킬 것을 청한 계사 때문에 차자를 올려 인구(引咎)하기를,
"예로부터 임금의 지나친 거조는 한몸의 사욕에서 나온 경우가 많은데, 전하의 지나친 거조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가 지극히 공평한 혈성(血誠)에서 발로된 것인데 단지 그 발로된 것이 중도에 맞지 않은 것뿐입니다. 비록 모두 옷깃을 잡아당기고129) 난간을 부러뜨리면서130)   간쟁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으나 한번 두번 거듭되고 보니 그 거조가 잘못된 것이 큽니다. 신 등이 매양 우레 같은 위엄의 진동이 거듭될 때를 당하여 번번이 격뇌를 우려했습니다만 구차스러운 미봉책에 귀결되는 것을 면하지 못했으니, 불충한 죄에서 어떻게 도망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7월 3일 무인

관상감에서 아뢰기를,
"방서(方書) 가운데 《태을통종(太乙統宗)》·《도금가(淘金歌)》와 의기(儀器)가운데 대천리경(大天里鏡)은 모두 역가(曆家)에게 긴요한 것인데 본감(本監)의 관원 김태서(金兌瑞)가 많은 사재를 들여 간신히 사가지고 왔으며, 또 서양인 대진현(戴進賢)과 주법(籌法)에 대해 문의 논란하여 그 방법을 다 배워 가지고 왔으니, 마땅히 가자(加資)하여 뒷사람을 격려 권면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헌부 【장령 한덕량(韓德良)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조 호장(正朝戶長)을 파하자고 청한 일은 정지하였다.

 

7월 4일 기묘

평안도 위원(渭原) 등 고을에 큰비가 오고 우박이 내려 사람과 가축이 사태(沙汰)에 압사된 것이 많았다.

 

부사직(副司直) 구택규(具宅奎)가 대각(臺閣)의 계사로 인하여 상소하여 그 아버지 구혁(具爀)의 억울함에 대해 하소연하기를,
"옛날 선조(先朝) 신사년131)  에 비국에 명하여 훈구 자손 가운데 재주가 있어 장임(將任)에 차임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게 했는데, 그때 상인(相臣)과 장신(將臣)들이 모두 신의 아비 구혁으로 대답했기 때문에 특명을 내려 남행 선전관(宣傳官) 한 자리를 더 내어 제수하고 이어 내승(內乘)을 겸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불러 활쏘기를 명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맞힌 화살의 숫자가 차지 않으면 그때마다 애석해 하는 하교를 내렸기 때문에, 무릇 무예를 시험할 즈음에 사람들이 용동(聳動)하여 관람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뒤 호위청(扈衛廳)의 시사(試謝) 때 차비관(差備官)들이 몰래 화살의 숫자를 증가시켜 놓았는데 신의 아비가 은밀히 그런 기색을 살피고는 병을 칭탁하고 시소(試所)에서 곧장 돌아왔었습니다. 추후 시기(試記)를 보고 죄주기를 청하니 차비관들이 사실에 의거 공초를 올리기를, ‘저희들이 스스로 화살의 숫자를 늘려서 뒷날 발신(發身)할 계획을 삼으려 한 것이니 그는 실상 모릅니다.’ 했으니, 이 일이 근거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즉시 자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중에 편배(編配)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기는 했습니다만, 곧이어 정신(廷臣)들이 서로 교대로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므로 즉시 석방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 수용(收用)한 일의 정상은 이러한 것에 불과한데 저들이 이른바 ‘대사(代射)했다.’고 한 두 글자는 전혀 근거 없이 만들어 낸 말이니, 너무도 허황된 이야기입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에 하문하자 모두 구택규의 소장이 옳다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누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들과 손자는 또한 다르니 대각의 말이 너무 과하지 않은가?"
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지평 정기안(鄭基安)이 정계(停啓)하였다.

 

7월 5일 경진

소대를 행하였다.

 

이때 조신(朝臣) 가운데 외방에 있으면서 관직에 제수된 경우 기한이 지나도록 올라오지 않는 자는 번번이 의금부에 내려 추고하게 했는데, 또 새로 정식을 삼아서 어버이의 병 때문에 소장을 진달하고 말미를 받은 자는 그 말미의 기간을 계산하여 같은 예로 시행하게 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말하기를,
"어버이의 병 때문에 말미를 받은 자에 대해 기한을 정하여 금추(禁推)하게 하는 것은 효로 다스리는 정치에 손상되는 점이 있으니, 이 뒤로는 그대로 두라."
하였다.

 

7월 6일 신사

임금이 형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을 불러 찬집(纂輯)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다. 하교하기를,
"육형(肉刑)은 곧 한나라 조종(祖宗)의 법인데도 문제(文帝)가 오히려 이를 없앴다. 지금 이 전가 사변(全家徙邊)132)  의 형률은 처음 변방을 채우기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으로 선왕(先王)의 성의(聖意) 또한 긴박하게 징계하여 선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은 변방 백성이 이미 찼으니 변방을 채우는 것을 일삼을 것은 없다. 이는 마침 도망자들의 소굴이 되기에 족할 뿐이니 뒷날 변하여 사나운 역도(逆徒)가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삼대(三代)에는 충(忠)·질(質)·문(文)도 또한 손익(損益)시켰었으니 시대에 따라 조정하는 것이 또한 어찌 선왕(先王)의 덕의(德義)를 우러러 본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렇게 찬집할 때 단지 《대전(大典)》에 기재된 전가(全家)의 율(律) 두 조항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모두 장(杖)·유(流)로 고치도록 하라. 내가 2백 년 뒤에 비로소 바르게 고침에 있어 힘써 너그럽게 하려는 것은 조금이나마 은혜를 남겨 나의 마음을 드러내고 나의 백성들의 소망에 부응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나의 뜻은 단지 이 관(寬) 자뿐이고 원량(元良)에게 남겨줄 것도 또한 하나의 관(寬) 자이니, 경과 여려 낭관들은 모쪼록 이런 뜻을 알라."
하니, 서종옥이 일어나 절하면서 말하기를,
"전가 사변의 형률를 특명으로 감하게 하셨으니, 옛날에 성탕(成湯)이 그물의 한쪽을 풀어 놓게 한 인자함이 유독 아름다움을 독점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7월 7일 임오

헌부 【장령 한덕량(韓德良)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삼사(三司)를 파직시키라고 한 계청은 정지하였다.

 

7월 8일 계미

밤에 유성이 천중(天中)에서 나와서 동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사간 안상휘(安相徽)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의 비국 당상은 곧 옛날의 추밀(樞密)입니다. 이를 가려 선발함에 있어서 반드시 공의를 기다려 비로소 차하(差下)해야 하며, 이경(貳卿)에 차임되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각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일제(李日躋)는 슬기와 재주가 있다는 칭송을 받고 있으니 진실로 경력만 있다면 또한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승품(陞品)된 뒤에 아경(亞卿)의 실직(實職)을 아직 거치지 않았고, 그의 경력이 동지중추(同知中樞)에 불과한데도 갑자기 특차(特差)하라는 명이 내렸으므로 물정이 미덥게 여기지 않고 있으며, 물론 신중히 가린다는 도리에도 어긋남이 있으니, 마땅히 즉시 바르게 고쳐서 관방(官方)을 중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찬집청의 당상들이 《속전(續典)》의 율명(律名)을 품정(稟定)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연행(燕行)과 왜관(倭館)에서 잠상(潛商)하는 사람은 효시한다는 것이 근년에 정한 형률인데, 고율(古律)에서는 이것이 전가 사변(全家徙邊)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전가율(全家律)을 일체 모두 감등시킬 때 이것도 함께 정배(定配)하는 속에 넣었습니다만 신의 의견에 그것은 결단코 너무 가벼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상께서는, 효시는 군율이어서 법전에 기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으로 하교하였습니다만, 이는 또한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예컨대 세곡(稅穀)에 물을 타는 것을 수창(首倡)한 자는 또한 효시하라는 수교(受敎)가 있었으며, 이외에도 효시법이 《수교집록(受敎輯錄)》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 많습니다. 이제 이 형률을 감등시킨 것만 기재하고 효시법은 기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장차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법을 무시하는 사람이 반드시 많아질 것입니다. 이렇게 간사한 자들이 날로 불어나서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는 날을 당하면 더욱 어떻게 잠상들을 금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의 의견으로는 혹은 효수할 것으로 정하기도 하고 혹은 일률(一律)133)  로 결단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속전(續典)》에 기재한 후에야 징계하고 두려워하게 할 방도가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고, 형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은 말하기를,
"성교(聖敎)는 대체로 효시는 군율에 관계된다는 것으로 오형(五刑) 이외에 또 이 형률을 기재해서는 안된다고 한 것이니, 그 의도는 매우 성대합니다. 그러나 대신(大臣)의 말도 준수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동래(東萊)·의주(義州)의 잠상(潛商)들은 이미 변방의 일에 속하는 것이니, 비국에서 효시할 것으로 정탈(定奪)하여 사목(事目)으로 만들어서 병전(兵典)에 부치고, 세미(稅米)에 물을 탄 자를 효시하는 것은 승전(承傳)한 것으로 하여 호전(戶典)에 부치는 것이 사의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하여 서종옥의 말을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효시율은 당초 지만(遲晩)134)  ·다짐[侤音]135)  하는 일이 없다고 하니, 억울한 사람이 있어도 다시 말을 할 기회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매우 가증스러운 일이다. 이 뒤로는 반드시 율명(律名)을 먼저 언급하고 난 뒤에 비로소 다짐을 받게 함으로써 죄인으로 하여금 그 율명을 환히 알게 해야 한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나라에서 중하게 여기는 것은 사전(祀典)인데, 태묘(太廟)의 경우는 대향(大享)과 삭망(朔望) 때의 희생과 제물을 모두 헌관(獻官)이 간품(看品)하고 있으며 진전(眞殿)이나 능제(陵祭)에 이르러서는 일체 전사관(典祀官)에게 맡기고 있으니, 사체(事體)가 가볍다. 이 뒤로는 전사관이 기일에 앞서 향소(享所)에 나아가 숙설(熟設)하게 하고, 헌관은 향(香)을 받아 가지고 나아간 뒤에 다시 간품하여 사전을 중하게 하라."
하였다.

 

부사직(副司直) 원경하(元景夏)가 임금이 임문(臨門)하여 선전관(宣傳官)들을 회시(回示)한 일을 가지고 누누이 진계하고, 이어 아뢰기를,
"옥당(玉堂)·춘방(春坊)이 모두 본직을 띠고 있으면서 선전관의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관방(官方)에 구애되는 바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은 말이다."
하고, 본직을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문겸(文兼) 때문에 옥당을 체직시키는 것은 좀 타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니, 그 문겸을 체차시키고 옥서(玉署)와 춘방(春坊)을 역임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 돌아가면서 차임하라고 명하였다.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에게 《속오례의(續五禮儀)》를 찬수하도록 명하고 직접 서문을 지어 내렸다. 처음에 임금이 《오례의(五禮儀)》에 이정하고 증보할 데가 많다는 이유로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전 장령 유수원(柳壽垣)에게 그 일을 관장하게 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 덕수가 졸(卒)했기 때문에 다시 이종성(李宗城)에게 명한 것이다. 이종성이 유수원을 체차하고 윤광소(尹光紹)로 대신하게 할 것을 아뢰었다.

 

7월 12일 정해

공홍도(公洪道) 부여현(扶餘縣)에 큰 비바람이 치면서 우박이 내렸는데 그 모양이 연환(鉛丸)과 같았다.

 

7월 14일 기축

강도(江都)에 옛 토성이 있었는데 유수(留守) 김시혁(金始㷜)이 벽독을 구워 증축하여 이때에 이르러 공사가 끝났음을 고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조현명에게 명하여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조현명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지리(地利)와 형편(形便)이 남한(南漢)보다 낫습니다. 벽돌로 축조하여 견고하였고, 분첩(粉堞)이 웅장하고 위용이 있어 이를 경영하고 구획한 것이 유생(儒生)의 규모(規模)가 아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순실(純實)하여 쓸 만하다.
하고, 이어 동전(東銓)에 자리가 있는지를 하문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성역(城役)으로 재신(宰臣)에게 노고를 갚는 것은 신하를 예로 부리는 방도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단지 축성(築城)할 때 감독한 중군(中軍)·장교(將校) 이하를 본부로 하여금 장문하게 하고, 특별히 어사(御史)를 보내어 시재(試才)하여 군민(軍民)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였다. 조현명이 또 말하기를,
"벽돌 굽는 방법을 중국에서 배워 가지고 왔기 때문에 일은 반만해도 공은 배나 되어 그 이익이 무궁합니다. 앞으로 각 군문(軍門)과 와서(瓦署)로 하여금 그 법에 따라 구워 만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얼마 안 있어 특별히 김시혁을 발탁하여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 김상성(金尙星)이 그의 숙부(叔父)인 김시형(金始炯)이 바야흐로 서번(西藩)에 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영의정 김재로가 김상성을 찬집청 당상(纂輯廳堂上)으로 차임하고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제수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태묘(太廟)의 망제(望祭) 때 쓸 제물을 가서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승지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제물을 오시(午時)에 이미 진설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그날 새벽에 일찍 일어난다는 뜻이겠는가? 반주야(半晝夜)에 제찬(祭饌)을 진설하는 것은 예에 어긋나고 그 일이 편함을 취하는 것에 가깝다. 더구나 한 더위를 당하여 더욱 정결함을 다하는 데 흠이 된다. 신칙하여 이 뒤로는 전처럼 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7월 16일 신묘

소대를 행하였다.

 

7월 17일 임진

장태소(張泰紹)를 함경북도 병사로 삼았다.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명릉 참봉(明陵參奉)의 보고서를 가지고 와서 청대(請對)하고, 아뢰기를,
"능(陵) 위의 갑방(甲方)이 주저앉아 무너질 염려가 있는데, 사초(莎草)가 말라 손상된 곳에 빗물이 스며들어서 점차 무너져 앉아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는 일시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니 마땅히 근심을 염려하는 방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즉시 영의정 김재로와 이종성에게 명하여 가서 살피게 하고, 말하기를,
"명릉은 먼저 왕후(王后)의 능(陵)을 써서 후릉(厚陵)의 제도를 취하였기 때문에 상설(象設)이 상당히 좁다. 그 높낮이와 너비, 난간석(欄干石)의 원경(圓徑)을 상세히 재어 가지고 오라."
하였다. 다음날 김재로 등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본릉(本陵)의 난간석은 좁은데 능(陵)의 크기는 다른 능과 같은니 의당 붕괴되어 무너질 우려가 있습니다. 익릉(翼陵)으로 말하더라도 난간석의 원경이 1백 24척인데 보 본릉은 89척이었습니다. 이제 반드시 개봉(改封)한 후에야 뒷걱정이 없을 것인데, 새 흙으로 축조하는 것도 또한 매우 어려운 일이니, 우선 예전의 것을 조금 낮게 만들어서 너무 높게 하지 않는다면 그 역사(役事)가 다시 사초(莎草)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양릉 상개수 도감(兩陵上改修都監)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 김약로(金若魯), 예조 판서 이종성을 제조(提調)로 삼아 오로지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또 이종성에게 명하여 가서 후릉을 살펴보게 하였다. 이종성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능(陵)의 둘레는 77척 남짓 했는데 명릉은 89척이었으니, 그때 비록 후릉의 제도에 따라서 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나 척수(尺數)는 조금 더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그때의 하교가 있었으니 이제 마땅히 77척의 제도를 좇아 적용하여야 하는데, 사초(莎草)를 걷어낸 뒤에 그 형세에 따라 넓히거나 줄이거나 해야 할 것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개봉(改封)할 때 내가 친히 살피지 않을 수 없으며, 24년 동안 추모하여 온 회포로서 하루밤을 능 아래에서 묵는 것이 나의 지극한 소원이다."
하고, 이어 눈물을 줄줄 흘리니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효성에 감격하여 감히 한마디도 쟁난(爭難)하는 이가 없었다. 임금이 기전(畿甸)의 백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로 동가(動駕)할 때는 장릉(長陵)에 거둥할 때의 예에 따라 비국으로 하여금 저치미(儲置米)를 획급해 주라고 명하였다.

 

7월 18일 계사

호서(湖西) 두 고을의 염찰사(廉察使) 윤광소(尹光紹)가 복명(復命)하여 천안 군수(天安郡守) 조봉주(趙鳳周)는 함부로 죄없는 사람을 죽였고, 성환 찰방(成歡察訪) 김광국(金光國)은 탐오하여 불법한 짓을 저질렀으며, 직산 현감(稷山縣監) 심석현(沈碩賢)과 연기 현감(燕岐縣監) 유성동(柳星東)은 용렬하고 유약하여 직임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조목별로 나열하여 계문(啓聞)하였다. 임금이 불러서 접견하고 도내(道內)에서 치적이 가장 훌륭한 자를 하문하니, 윤광소가 충원 현감(忠原縣監) 한덕필(韓德弼)을 들어 대답하고 이어 충원의 형옥에 대한 일을 매우 상세히 진달하였다. 임금이 조봉주 등 4인은 먼저 파직시키고 뒤에 잡아들이게 하였고, 한덕필에게는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가자(加資)하라고 하였으며, 형옥에 대한 일은 추조(秋曹)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한덕필은 고 집의(執義) 한태동(韓泰東)의 손자이고 고 감사(監司) 한지(韓祉)의 아들이다. 누차 주읍(州邑)을 맡았었는데, 청간(淸簡)하고 잘 다스린다는 것으로 이름이 나서 가성(家聲)을 실추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7월 19일 갑오

이수항(李壽沆)을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7월 20일 을미

초혼(初昏)에 유성이 허성(虛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호조 판서 김약로(金若魯)가 아뢰기를,
"금년은 일찍 가물고 늦게 물이 졌으나 이미 대단한 재해는 없었으니, 연분(年分)136)  의 사목(事目)을 본조(本曹)에서 그 비총(比摠)137)  을 참작해 정하여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여 고르게 분배하게 하고, 경차관(敬差官)을 차송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7월 21일 병신

소대를 행하였다.

 

7월 22일 정유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가을의 전알례(展謁禮)를 행하고 나서 전내(殿內)를 봉심(奉審)하였으며, 다음으로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또한 그렇게 하였다. 이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배알하고 돌아왔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병진년138)  에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할 때 태묘에 전알하고 두루 진전(眞殿)에 배알하였는데 돌아올 때 전정(殿庭)의 헌가(軒架)는 마련하지 말라고 명하였었습니다. 금번에도 이 예에 따르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회가(回駕)할 때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전부(前部)·후부(後部)의 북과 피리를 진설만 하고 연주하지 않았으며, 창덕궁에서 경덕궁으로 돌아올 때 비로소 음악을 연주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들이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을 문묘에 종향(從享)시킬 것을 상소하여 청하였으나,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그 이름을 빌려서 경향(京鄕)의 사람들을 모아 광박(廣博)으로 능사를 삼고 있다는 것으로 책유하였다. 여러 유생들이 권당(捲堂)139)  하기에 이르니 동지성균관사 민응수(閔應洙)에게 명하여 누차 들어가도록 권하게 하고 비로소 식당(食堂)을 설행(設行)하였다. 대사성 정형복(鄭亨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태학(太學)에서 봉장(封章)을 올리는 규례는 기일에 앞서 청(廳)을 설치하게 되면, 경외(京外)의 장보(章甫)들이 풍문을 듣고 스스로 찾아와서 일체로 서명하므로 명록(名錄)이 많은 것은 그렇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명칭을 빌렸다고 하신 하교나 광박(廣博)하다고 일컬으신 것은 정외(情外)의 말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임금을 속였다는 지목은 인신(人臣)의 극죄(極罪)인 것인데, 이제 쉽사리 수선(首善)의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가하여 왕언(王言)이 한번 내려지자 많은 선비들이 낯을 가리고 기가 억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조(聖朝)에서 사기(士氣)를 부식(扶植)시키는 아름다운 뜻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사유(師儒)의 장(長)이 되어 선비들을 신칙시키지는 못하고 도리어 임금을 면려하고 나서니 사습(士習)이 언제 바루어지겠는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3일 무술

송징계(宋徵啓)를 대사간으로, 윤광의(尹光毅)를 사간으로, 김상철(金尙喆)을 교리로, 홍중효(洪重孝)을 수찬으로, 정희규(鄭熙揆)를 헌납으로, 정광운(鄭廣運)과 이제원(李齊遠)을 장령으로 삼았다.

 

7월 25일 경자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윤광소(尹光紹)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비록 강독하지 않으시더라도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전석(前席)에서 서로 강론하게 하고 들으시는 것도 좋습니다. 선조조(宣祖朝)에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이를 앙달하니, 부제학 신(臣) 김우옹(金宇顒)과 수찬 신(臣) 윤현(尹晛)에게 연석(筵席)에서 논란하도록 명하였는데, 당시에 이를 진학(進學)의 아름다운 규례로 전하였습니다.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시행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헌부 【장령 정광운(鄭廣運)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면시(面試)하는 법은 당나라·송나라 때 이미 행한 것이니 이번 가을 정시(庭試)를 시작으로 등제인(登第人)은 마땅히 방방(放榜)140)  한 다음날 어전에서 면시하여 요행을 바라는 습성을 막게 하소서. 도사(都事)와 경시관(京試官) 등 시험을 관장하는 사람들이 진실로 사자(士子)가 통정(通情)한 일이 있는데도 적발하여 무겁게 다스리지 않을 경우에는 삭직시키고 금고해야 하며, 경외(京外)의 시관(試官)도 마땅히 특별히 가려서 의망(擬望)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부(士夫)의 집에서 공물(貢物)을 몰래 사들이는 것을 엄히 금방(禁防)케 하고 발각된 경우에는 마땅히 금고율(禁錮律)을 시행해야 합니다. 유세복(柳世復)·홍치기(洪致期)가 법을 무시하고 이장(移葬)한 곳은 마땅히 일체 아울러 파서 옮기게 하고, 중외(中外)의 모든 관절(關節)도 마땅히 일체 금단시켜야 합니다. 이른바 다섯 가지 일은 아울러 찬수하는 각전(各典)에 넣어 후세에 전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등대(登對)할 때 마땅히 하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7월 28일 계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금년 강계(江界)의 마상(馬尙) 【배의 이름.】 이 많이 올라갔다고 하니, 마땅히 피국(彼國)에 자문(咨文)을 보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문을 보낼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저들이 만일 전지(前旨)를 봉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도리어 우리를 욕하면 아무 일도 없는 가운데에서 일을 발생할 우려가 있으니,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는 먼저 사람을 가려 보내어 엄금하게 하고, 혹은 어사(御史)를 보내어 염찰(廉察)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해도 끝내 금할 수 없다면 비로소 자문을 보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조정에 그래도 기강이 있어서 외임(外任)에 있는 사람이 감히 집을 짓지 못했었는데, 근래에는 거의 모두 집을 짓고도 태연히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니, 이것이 어찌 반드시 관물(官物)만을 가져다 쓰는 것이겠습니까? 혐의를 멀리 하지 않고 기탄함이 없는 것이 너무 심합니다. 이 또한 이목(耳目)의 관원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이 뒤로는 마땅히 특별히 금단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삼명일(三名日)141)  에 제도(諸道)의 방물(方物) 가운데 갑주(甲胄)는 연전(年前)에 우선 감하였다가 거의 다 복구시켰는데, 유독 북도(北道)만은 거듭 흉년이 든 탓으로 그대로 정감(停減)하였습니다. 지금은 가을철이 이미 이르렀고 위에 올리는 사체가 중하니, 북도의 갑주도 전례에 의거하여 봉진(封進)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까스로 소생한 백성을 또 어떻게 차마 지치게 할 수 있겠는가? 내년에 복구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종성이 또 말하기를,
"경릉(敬陵)의 방축(防築)을 지금 바야흐로 소개(疏開)하게 되었는데, 기영(畿營)에서 역정(役丁) 1천 명을 정송(定送)하였으니, 그 역사가 과연 호대합니다. 도감(都監)의 사역(事役)이 바야흐로 많은 상황이니, 방축을 소개하는 역사는 우선 도감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에게 폐단이 되는 것을 내가 어찌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는데도 곧바로 뒷날을 기다리자고 청하는 것은 사체에 있어 매우 잘못된 일이다. 예판(禮判)을 중추(重推)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예판이 참으로 경솔한 잘못은 있습니다만 성인(聖人)의 사기(辭氣)가 이렇게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폭발하는 기(氣)를 아직도 제어하지 못하시니 함양하는 공부에 흠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병통이지만 또한 허물을 보고서 인(仁)을 알 수 있는 것이다.142)  "
하였다.

 

헌부 【장령 정광운(鄭廣運)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단지 윤지(尹志)에 대한 일만 윤허하였다. 윤지는 곧 윤취상(尹就商)의 아들로 국옥(鞠獄)에 관련되어 정배(定配)되었었는데, 계해년143)  소결(疏決) 때 향리에 방축하고 종신토록 금고하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대신(臺臣)이 발계(發啓)하여 쟁집(爭執)해 오던 것을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윤허한 것이다. 새로 다섯 가지에 대한 계사를 발론했는데 임금이 이를 대신들에게 굽어 하문하였다. 등제 인(登第人)을 면시(面試)하라는 일에 대해 임금이 말하기를,
"이 청은 과체(科體)를 중하게 하기 위한 것이나 한 번 팽팽하게 했다가 한 번 늦추는 것은 위에서 행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였다. 거자(擧子)들이 통정(通情)한 일과 시관(試官)을 가려서 의망(擬望)하는 일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드러나는 대로 장문(狀聞)하게 하고, 공물(貢物)을 몰래 사는 일과 관절(關節)을 신칙시키는 일은 아울러 윤허하였다. 유세복(柳世復)·홍치기(洪致期)의 일은 왕부에 명하여 엄히 조사해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다섯 조항을 《속전(續典)》에 입록(入錄)하는 일에 대해 임금이 이르기를,
"이번에 찬집하는 것은 대개 법문이 번거로운 것을 안타깝게 여김인데, 한때 칙려하기 위한 하교를 또 첨록(添錄)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였다.

 

7월 29일 갑진

이병상(李秉常)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유언민(兪彦民)을 정언으로, 심악(沈)을 사간으로, 어유룡(魚有龍)을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삼았다.

 

헌부 【장령 정광운(鄭廣運)이다.】 에서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경외(京外) 군문(軍門)의 책응(策應)은 마땅히 일체 모두 혁파해야 합니다. 해당 낭관으로 하여금 문서를 정리하여 비국에 보고하게 하여 불시의 수요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추후하여 한림(翰林)의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들을 시험보였는데 친림(親臨)하여 과차(科次)해서 남태회(南泰會)·이기덕(李基德)을 뽑았다.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소시법(召試法)은 백세(百世)에 질정한다 해도 의심할 것이 없는데, 아직도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닙니다. 소시에 응한다는 것은 글이 없이는 가능한 것이 아니어서 그 책임이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전부터 재상(宰相)의 자제 가운데 편의한 대로 벼슬을 하던 사람들이 반드시 도리어 염피(厭避)의 뜻을 품었으니, 신의 뜻은 반드시 옥당(玉堂)과 서로 표리가 되게 한 연후에야 이 법이 완전하게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랑법(吏郞法)은 이제 이미 구처하였으니 한권(翰圈)에 관한 일도 잘 준행해야 한다. 그런데 근래 무변(武弁)들이 문신의 교만함을 본받으려고 서로 다투는 풍습이 있기 때문에, 나의 의견 또한 선천(宣薦)을 고쳐서 소시(召試)처럼 함으로써 인재를 뽑는 법을 엄하게 하려 한다."
하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서종옥(徐宗玉)이 말하기를,
"이는 한권의 다른 점이 있으니 또한 갑자기 법을 고쳐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경상도 선산(善山) 백성 가운데 모자가 일시에 벼락에 맞아 죽었으며, 전라도 순천(順天) 백성 가운데 부부와 6세 된 손녀가 함께 벼락에 맞아 죽었으며, 공홍도(公洪道) 서산(瑞山) 백성 세 사람이 밭에 나가 있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 면천(沔川)·당진(唐津)에는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종신(宗臣) 여은군(礪恩君) 이매(李梅)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주(全州)에 있는 태조 대왕의 진전(眞殿)에 대해 옛날에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자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선왕조(先王朝) 때에는 도신(道臣)이 장문하고 호남의 유생들이 소장을 진달했었는데 기미년144)  에 이르러 이성창(李聖昌) 등이 또 소장을 올려 청하여 성비(聖批)를 내려 윤허한 바 있었습니다만, 아직도 버려둔 채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릉(齊陵)의 예전 신도비(神道碑)는 곧 권근(權近)이 찬한 것인데 임진 왜란 때 적(賊)들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전에 도신(道臣)의 장청(狀請)으로 인하여 대신이 복주(覆奏)하니, 연사(年事)가 조금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아울러 영릉(英陵)의 옛날에 묻은 비와 함께 일체로 거행하게 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아울러 세우게 할 것을 명하여 열성(列聖)의 지덕(至德)을 드러내게 하소서. "
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 숙종 대왕께서는 보령이 59세에 여러 신하들의 소청(疏請)에 의거하여 태조(太祖)의 구례(舊例)에 따라 서루(西樓)의 고사(故事)를 좇았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도 춘추가 50을 넘어 60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숙종께서는 태조의 육순(六旬)의 나이에 이르지 않았어도 기사(耆社)에 들어가셨는데 우리 숙종의 영주(靈籌)가 59세이고 우리 전하의 춘추가 51세이니, 그 사이에 조금 차이가 나는 것 같지만 육순을 바라보는 것은 같습니다."
하고, 또 적겸모(狄兼謨)와 사마광(司馬光)의 고사145)  를 인용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순문한 다음 속히 소술(紹述)하는 성전(聖典)을 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답을 내렸다. 과차(科次)하는 시관(試官)들을 인견하고 비석을 세우는 일에 대해 순문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옛 고사를 상세히 모르고 있었다. 임금이 예조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순차적으로 거행하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아조(我朝)에도 기영회(耆英會)를 한 적이 있는가?"
하니,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고(故) 봉조하(奉朝賀) 이태좌(李台佐)와 김시환(金始煥)·정수기(鄭壽期)·이형좌(李衡佐)·조유수(趙裕壽) 등 여러 사람들이 기영회를 하였으며, 조정에서도 이원(梨園)의 음악을 내려 은총을 베풀었는데, 이광좌(李光佐)도 사마광(司馬光)의 고사를 인용하여 또한 들어갔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에 대해서도 나는 일찍이 목묘(穆廟)146)  께서 육순이 되기를 기다린 고사에 따라 과거에 진장(陳章)한 일이 있었으니, 이것은 또한 내가 겸양할 것이 아니라 곧 지극한 소원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이르다고 할 만하다. 나이 노쇠하고 고질병을 앓고 있으니 단지 속히 59세가 되어 선조(先朝)의 고사를 따르게 되기를 원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바랄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그 하교한 말이 누누이 수백 마디에 달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너무 번거롭습니다. 신 등이 바라는 바는 오직 성상께서 삼가하는 마음으로 생각을 맑혀 이양(頤養)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