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병오
지평 정기안(鄭基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에 주원(廚院)147) 의 이직(移直)으로 백료들이 매우 황급한 때를 당하였는데, 저들 선전관(宣傳官)이란 네 사람은 감히 제멋대로 모여 술을 마셨습니다. 천리(天理)와 인심이 여지없이 퇴패하였으니, 마땅히 해당 관청으로 하여 금 이들을 잡아와서 심문하고 엄격하게 조사하여 무거운 형률에 따라서 죄를 부과하소서. 선전관은 곧 무신의 극선(極選)인데, 지난번에 이 무리들이 가부(可否)를 협잡하였기 때문에 성상께서 지나친 거조(擧措)가 있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지금 본 병부의 우두머리가 된 자는 더욱 마땅히 근신하여야 할 터인데, 금번에 관원들을 임명할 때에 구차스레 자리를 충원한 것이 허다하였으니, 해당 전장(銓長)을 신중하게 간선(簡選)하도록 분명하게 신칙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새로 임명한 전라 감사 정준일(鄭俊一)은 명망과 경력이 화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성격이 본래 유약하고 재능과 기량도 그다지 없으니, 개차(改差)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김해 부사 김후(金𣖔)도 사람됨이 용렬하고 무식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형편없는데, 천첩(賤妾)의 오리비를 관아 가운데에 데려다가 놓고 여리(閭里)를 횡행하면서 뇌물 받는 것을 크게 열어 놓았으니, 마땅히 그 관직을 파면하여서 백성들의 폐해를 없애야 합니다. 양주 목사 조두수(趙斗壽)는 재능이 아무 것도 없으며 또 늙고 병들어서 그 직임을 감당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개차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선전관과 병조 판서의 일만을 윤허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때 임금이 능침(陵寢)에 거둥하는 날을 이미 택하였는데, 승지 이창의(李昌誼)가 말하기를,
"능침에 거둥하기 위해서 출궁(出宮)하는 시각이 축시(丑時)는 너무 이르고 진시(辰時)는 너무 늦습니다. 그러나 인시(寅時)와 묘시(卯時)는 모두 꺼리는 바가 있으니, 인시와 묘시 사이에 갑시(甲時)가 있어 별 탈없이 좋다고 합니다. 마땅히 이때에 출궁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 영상(領相) 이광좌(李光佐)가 언제나 ‘임금의 도리는 정도(正道)를 따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였는데, 어찌 간시(間時)를 쓸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으나, 이창의가 굳이 청하자, 임금이 비로소 마지못하여 이를 따랐다.
사신은 말한다. "옛날에 요(堯)임금이 역법(曆法)을 만든 것은 인시(人時)를 공경하게 전수(傳受)한 데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고, 고(孤)·허(虛) 따위의 흉일을 마땅히 기휘해야 한다는 기록이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갑시·을시(乙時) 따위의 말이 있으니 미혹된 것이 심하다. 성상이 처음에는 비록 정도를 인용하여 이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나, 끝내 마음이 흔들려서 허락하는 실수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태백산사고본】 45책 60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43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옛날에 요(堯)임금이 역법(曆法)을 만든 것은 인시(人時)를 공경하게 전수(傳受)한 데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고, 고(孤)·허(虛) 따위의 흉일을 마땅히 기휘해야 한다는 기록이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갑시·을시(乙時) 따위의 말이 있으니 미혹된 것이 심하다. 성상이 처음에는 비록 정도를 인용하여 이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나, 끝내 마음이 흔들려서 허락하는 실수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8월 3일 정미
평안도 삼화현(三和縣) 등 열 아홉 고을에서 푸른 벌레가 곡식을 먹었는데, 포제(酺祭)를 행하였다.
8월 4일 무신
이보다 앞서 예조 판서 민응수(閔應洙)가 아뢰기를,
"지난날에 세자빈(世子嬪)이 묘현(廟見)할 때에 배위(拜位)와 의절(義節)은 위에서부터 고쳐 썼으므로, 이하는 마땅히 이것에 의하여 의주(儀註)에 첨가하여 넣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영상(領相)이 말하기를, ‘중궁전(中宮殿)이 배위는 마땅히 월대(月臺) 위에다 설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가례(家禮)》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무릇 특별한 배위는 모두 양쪽 계단 사이에 북쪽으로 향하여 설치한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이것을 참조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명회전(大明會典)》에서 황후의 배위를 참고하면, ‘모두 한가운데에서 북쪽으로 향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번의 배위를 명백히 의논해서 정한 다음이라야 의주 가운데에 넣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대전(大殿)의 전알(展謁)하는 자리는 계단 아래에 있고 중궁의 묘현하는 자리는 계단 위에 있으며, 대전의 입위(立位)는 종실(終室)의 지게문 밖의 동쪽에 있고 중궁의 입위는 제1실(第一室)의 지게문 밖의 서쪽에 있는데, 그 동쪽·서쪽과 위·아래의 다른 자리는 예제(禮制)에 관계되는 바가 어떠한가? 이것들이 예제에 의심스럽다면 의논해서 정하지 아니할 수가 없으니, 대신과 유신들에게 물어보아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응수가 또 말하기를,
월대 위에서의 배위가 한가운데인지의 여부도 또한 한가지로 물어보아 의논하되, 그것을 의논하여 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의주에 넣으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민응수가 또 말하기를,
"《오례의(五禮儀)》에서, ‘여자는 시아비와 시어미를 뵈올 때에 4배(四拜)를 행하지만 사당을 뵈올 때에는 단지 재배(再拜)를 행하며, 남자는 모두 재배(再拜)만을 행하지만 초례(醮禮) 때에 이르면 4배를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남녀의 배례(拜禮)를 비록 하나같이 《오례의》에 따라 바로잡아서 고치고자 하나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중국 황조(皇朝)의 예절에서 4배·8배(八拜)하는 것과 우리 열성조(列聖朝)의 의절과도 또한 같지 아니하니, 마땅히 두루 물어 보아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또한 명하여 한가지로 수의(收議)하게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월대 위에서 양쪽 계단 사이의 자리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어리석은 의견을 우러러 말씀드렸으니, 다시 의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4배·8배가 마땅한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책에서 증거할 만한 문자(文字)를 찾아서 보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억측하여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대전과 중궁전의 배위에서 위·아래와 동쪽·서쪽의 차이가 있는 것은 비록 예제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혹 위·아랫자리로써 내외(內外)를 구분하고 혹 동쪽·서쪽의 자리로써 음양(陰陽)을 구분하였으니, 반드시 전혀 아무런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특히 배위가 양쪽 계단 사이에 있는 것과 입위가 동쪽·서쪽으로 나누어진 것은 아마 서로 방해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배례에 대해서는 비록 《가례》에서 ‘협배(俠拜)한다.’는 기록을 가지고 보더라도, 여자의 배례가 남자의 배례보다 갑절이나 더한데, 이것은 예제의 뜻에서 당연한 것입니다. 4배하는 것이 남자의 배례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된다면, 8배하는 것이 여자의 배례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됩니다. 만약 시아비·시어미를 뵈올 때나 초례 등의 큰 의절이 아니라면, 스스로 마땅히 배례의 숫자를 상쇄함이 있어야 할 것이니, 반드시 번문 욕례(繁文縟禮)라고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전 사과(司果) 윤봉구(尹鳳九)는 말하기를,
"주공(周公)의 예절에서는 태묘(太廟)의 대향(大享)에 왕공(王公)이 초헌(初獻)하고 후부인(后夫人)이 아헌(亞獻)하는데, 초헌과 아헌의 배위는 위·아래의 차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문공(朱文公)의 《가례》에서는 비록 사가(私家)의 예절이기는 하지만, 주인과 주부(主婦)의 자리는 계단 아래에 같이 있으니, 이것을 참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대전과 중궁전의 배위는 마땅히 위·아래의 차이가 있지 아니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절에서 전례를 인용하여 임금을 높이려는 혐의가 있는데, 이미 대전의 배위를 중궁전의 배위와 같이 계단 위에다 둘 수가 없다면, 중궁전의 배위는 대전의 배위와 함께 계단 아래에도 같이 설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기(禮記)》의 예기편(禮器篇)에 이르기를, ‘임금은 동조(東阼)에 있고 부인은 서방(西防)에 있다. 해[大明]는 동쪽에서 나오고 달은 서쪽에서 나오는데, 이것이 음양의 분수이며 부부의 위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횡거(橫渠) 장재(張載)는 말하기를, ‘동쪽에서 희준(犧樽)에 잔질하고 서쪽에서 뇌준(罍樽)에 잔질하는데, 부부가 같이 섬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써 본다면, 남자는 동쪽에 자리하고 여자는 서쪽에 자리하는 것이 본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대전의 입위가 동쪽에 있고 중궁전의 입위가 서쪽에 있는 것은 실로 고례(古禮)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한가운데에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가례》에서 ‘주부가 아들을 낳고 묘현할 때와 관자(冠者)가 배현(拜見)할 적에 모두 양쪽 계단 사이에 있다.’고 하였는데, 영상이 경연에서 아뢴 것 가운데 특별한 배위가 모두 계단 사이에 있다는 것도 또한 근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례의》와 중국 황조 예제에 배례하는 숫자가 같지 아니한 것은 지금 알 수가 없습니다마는,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남자는 재배하고 부인은 4배하는 것을 협배라 한다.’고 하였는데, 협(俠)은 《운회(韻會)》에 ‘아우른다[幷]’라는 뜻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부인은 절하면서 읍(揖)하는 것이 없고 머리도 땅에 대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를 협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황조의 예절에서 황제가 4배하기 때문에 황후는 8배하는 것인데, 주가가 협배한다는 말도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대전이 이미 4배한다면 중궁전은 황조의 예절에서 8배하는 것에 의하는 것도 또한 예제의 뜻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고, 전 군수 박필부(朴弼傅)는 말하기를,
"대전께서 묘현할 때에 배위가 이미 계단 아래에 있게 된다면, 중궁전의 배위에 다름이 있다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듯합니다. 《주례(周禮)》에서 태묘에 대향할 적에 왕공(王公)과 후부인(后夫人)의 배위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배례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남자와 부인의 구별이 없었기 때문에 《통전(通典)》 등의 여러 책에서는 비록 부인이 모두 재배한다고 말하였지만, 주자는 ‘남자가 재배하고 부인은 4배하는 것을 협배라 한다.’고 하였으니, 오늘날에 마땅히 따라서 행해야 할 바는 아마 이것에 지나지 아니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에서 여러 신하들의 의논과 품신을 가지고 임금의 재가(裁可)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배위와 동쪽·서쪽으로 서로 향하는 것은 《오례의》에서 이미 《개원례(開元禮)》에 따랐는데, 유신 윤봉구·박필부가 헌의한 것도 또한 그러하니, 동쪽·서쪽으로 서로 향하는 것을 옛날 그대로 하라. 왕비와 세자빈의 배위는 모두 계단 아래에 설치하되, 왕비의 길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게 하고 세자빈의 길은 서쪽에서 북쪽으로 향하게 하라. 대전과 동궁의 입위도 또한 정하(庭下)에 의하여 본래대로 판위(版位)를 설치하도록 하라. 협배에 대해서는 주문공의 《가례》를 가지고 문의하였던 것인데, 황조의 전례와 우리 나라 조정의 구전(舊典)에는 모두 협배의 예가 없었던 것이니, 왕조에서는 마땅히 왕조의 예제를 따라야 한다. 협배의 예는 그대로 두도록 하라."
하였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각도에 전 가족이 정배(定配)된 사람들은 금번에 이미 명하여 형률을 고쳐서 죄의 등급을 감형하게 하였는데, 마땅히 이를 도류안(徒流案)에 옮겨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능침(陵寢)에 거둥할 때 어가(御鴐)를 수행하는 각사(各司)에 당상 아문(堂上衙門)이 있으니, 모두 장관으로 하여금 어가 수행하게 하는 것을 이로부터 그대로 관례를 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소덕문(昭德門)을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불렀는데, 옛날에는 초루(譙樓)가 없었다. 금위영(禁衛營)에 명하여 이를 짓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보고하므로 소의문(昭義門)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8월 5일 기유
의빈부(儀賓府)에서 경강(京江)의 염선(鹽船)에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것을 본부에 속하게 해서 공용(公用)에 충당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이보다 앞서 염선은 내사(內司)에서 세금을 거두어 들였는데, 대신이 혁파할 것을 아뢰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의빈부에 속하게 하였다.
수찬(修撰) 홍중효(洪重孝)가 상소하기를,
"지난번에 5,6명의 무변(武弁)들이 교만하고 방자했던 것은 정말로 매우 가증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위협과 노여움을 더하여 오림문(午臨門)에서 거드름을 피운 것이 거의 무기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한두 유신들의 전계(陳戒)에 대하여 비록 ‘뒷날 억지로라도 저들을 억눌러서 제어하기를 더할 것이다.’라고 하셨으나, 그들을 가차(假借)함이 적지 않았으므로, 말의 뜻이 공평함을 잃었음은, ‘크도다. 임금님의 말씀이시여!’라는 뜻에 대단히 부족합니다. 후일 마땅히 이를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개수 도감(改修都監)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집을 짓기 시작하기를 너무 급히 하지 말라. 백성들이 마치 자식이 어버이를 돕듯이 몰려올 것이로다.’ 하였는데, 능침(陵寢)의 역사를 할 때에 소민(小民)들이 만약 옛날 선왕의 깊은 인정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마땅히 용감하게 달려올 것이다. 차사원(差使員)으로 하여금 천천히 일을 감독하여 신칙히게 하고, 채찍을 휘둘러 사람을 때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찬집청(纂輯廳)에 하교하기를,
"문장(文章)은 위·아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2품 이상은 비색(緋色) 옷을 입고 당상관 정3품은 홍색 옷을 입으며 종3품 이하는 청색 도포를 입고 7품 이하는 녹색 도포를 입는데, 비록 그 옛날 제도를 회복하기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번에 《대전(大典)》을 속성(續成)할 적에 이를 기록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후세 왕들을 기다려 이를 참조하고 취사 선택하여서 당상관 이상은 비색 옷을, 당하관 이하는 홍색 도포를 입게 하려는 것이다. 조복(朝服)과 제복(祭服)은 본 《대전》의 뜻과 같지만, 마땅히 《속대전(續大典)》 가운데에 추가하여 기록하여야 할 것이다. 내가 어릴 때에 보니, 흑단령 흉배(黑團領胸褙)는 문관의 당상관 이상이 학(鶴)이고 당상관 이하는 백한[鷳]이었는데, 지금은 당상관과 당하관의 제도가 뒤섞였으니, 이것은 습속의 잘못된 것이다. 만약 옛날 전장(典章)에 따라서 이것을 바로 잡는다면 등급이 너무 많아져서 더욱 고치기가 어려울 것이다. 《속대전》 가운데에 이것에 의하여 추가하여 기록하고, 그것을 조신(朝臣)으로 하여금 조용하게 바로 잡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근신에게 이르기를,
"이 일은 비록 조그마한 것이지만, 이를 급히 서두른다면 폐단이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세월을 두고 마련하여 저절로 바로잡혀지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후일 수십 년이 지난 뒤에 당하관이 마침내 녹색의 도포를 입던 옛날의 제도를 회복하게 되었다.
8월 6일 경술
홍정명(洪廷命)과 유건(柳謇)을 장령으로, 윤광소(尹光紹)를 지평으로, 홍익삼(洪益三)을 정언으로, 김상성(金尙星)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혜화문(惠化門)에 옛날에는 문루가 없었는데, 임금이 어영청(御營廳)에 명하여 이를 창건하게 하고 편액을 걸었으니, 곧 세속에서 일컫는 바 동소문(東小門)이었다.
8월 7일 신해
임금이 명릉(明陵)에 나아갔는데, 장차 그 개수(改修)하는 역사를 친히 보고자 함이었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서 능침의 역사를 하는 군사들에게 음식물을 내려 주었는데, 임금이 도신(道臣)에세 면유(面諭)하여 이를 골고루 나누어 주어서 두루 여러 사람들에게 미치게 하였다.
임금이 연서 비각(延曙碑閣)을 봉심(奉審)하게 하였는데, 조명리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비의 전면·후면에 채워진 글자가 주홍색인데, 대단히 흐려졌으니, 반드시 풍우(風雨)에 손상된 것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에 명하여 초둔(草芚)으로 둘러치는 것을 3년에 한 번씩 고치게 하였다.
인입(印入)한 효자 고 참봉(參奉) 이지남(李至男)의 집에 정문(旌門)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지남의 집은 충신·효자·열녀가 있어서 작설(綽楔)148) 에 들어 문미(門楣)가 빛났었는데, 임금이 연로(輦路)에서 이를 보고 가상히 여겨 이러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임금이 참포(黲袍)와 오서대(烏犀帶) 차림으로 명릉(明陵)에 나아가서 전알례(展謁禮)를 행하고, 능침 위를 봉심(奉審)한 뒤에 수도각(隧道閣)에 나아가서 사초(莎草)하여야 할 틈이 벌어진 곳을 친히 살펴보고서 하교하기를,
"오지 않을 때에는 날짜가 가는 것이 너무나 더디더니, 이미 온 다음에는 더욱 더 황급하구나!"
하고, 이어서 익릉(翼陵)과 경릉(敬陵)으로 나아가서 전알례를 행하고, 봉심하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8월 8일 임자
임금이 친히 고유제(告由祭)를 행하고 승지에게 이르기를,
"어찌 오늘 밤에 이곳에 와서 제사를 행하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 내가 여한이 없도다."
하고, 이어서 능침 위로 나아가서 친히 시역(始役)하는 것을 돌아보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능침 위에 틈이 벌어진 곳에 흙을 체[篩]로 쳐서 채우고 공이를 사용하여 가볍게 다질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소차(小次)에 돌아와서 유악(帷幄)을 걷고 멀리 바라보기에 편하게 하였다. 역사가 이미 끝나자, 임금이 다시 능체(陵體)를 봉심하였다. 조금 깎아내기를 더하였으나, 하나같이 후릉(厚陵)의 체제에 의하여 높이를 5척 8촌으로 하였다. 임금이 능관(陵官)을 불러서 앞으로 나오게 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능히 제때에 첨소(瞻掃)하지를 못하겠으므로 능침을 수호하는 여러 가지 절차를 오로지 그대들에게 맡기고 간다. 내가 친히 보지 않는다고 하여 조금이라도 그 마음을 해이하게 하지 말고, 나의 하늘 끝까지 다하려는 흠모의 정을 본받도록 하라."
하고, 또 김재로에게 이르기를,
"능침 아래에서 하룻밤을 더 유숙하는 것이 나의 지극한 소원이지만, 자유롭게 할 수가 없도다. 역사하는 군인들과 장수(匠手)들에게 경이 직접 홍전문(紅箭門) 밖에서 술과 음식을 먹이되, 그들로 하여금 흠뻑 취하고 배불리 먹은 다음 집에 돌아가게 하라."
하였다. 드디어 친히 고안제(告安祭)를 행하고, 이어서 능침에 직별하는 예를 행하였다. 신시(申時)에 어가가 출발하여 환궁하였는데, 밤이 이미 초경(初更)이었다.
임금이 도신(道臣)과 차사원(差使員)을 주정소(晝停所)에 불러서 보았는데, 경기 감사 이기진(李箕鎭)에게 유시하기를,
"이번의 능침의 역사에는 백성들도 또한 고생이 많았다. 경은 모름지기 그들을 구휼(救恤)할 방책을 강구하여 등대(登對)해서 아뢰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여러 수령들에게 백성들의 폐단을 두루 물어보고, 이기진에게 호피(虎皮)를, 지방관 이도현(李道顯)에게 궁시(弓矢)를 직접 내려 주었다.
8월 9일 계축
장령 유건(柳謇)이 상소하기를,
"어제 제사에 배종할 때에 봉상시(奉常寺) 부봉사(副奉事) 이중빈(李重彬)은 제사의 반열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의막(依幕)에 거만하게 앉아서 하례(下隷)를 구타하고 술과 음식을 토색질하였으니, 마땅히 도태시켜 버려야 합니다. 인의(引儀) 가운데 대신들을 인접(引接)할 때에 즉시 대령하지 아니한 자도 또한 마땅히 그 성명을 조사해서 잡아다가 심문하고 엄하게 처벌하도록 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개수 도감(改修都監)의 당상관 김재로(金在魯) 등이 복명하니, 임금이 정시합(正始閤)에서 이들을 인견하였다. 여러 능침의 정자각(丁字閣)의 석선(席縇)은 옛날에 생초(生綃)로써 장식하였는데, 임금이 개수할 때에는 모조리 이것을 면주(綿紬)로 바꾸었다.
어가(御駕)를 수행한 군사들을 호궤(犒饋)하도록 명하였다.
경상도 대구(大丘) 등지의 고을에서 풍우(風雨)가 크게 일어나 나무가 꺾이고 지붕이 날아갔으며, 개천의 물이 불어서 넘쳐 표몰(漂沒)한 인가(人家)를 헤아릴 수가 없었는데, 압사한 자와 익사한 자가 58인이었다. 거제(巨濟)와 웅천(熊川) 등지의 고을에서는 황충의 재이(災異)가 있었다.
공홍도(公洪道) 연해의 고을에서 해일이 있었고, 이산(尼山)과 연산(連山) 등의 고을에서는 지진이 있었는데, 소리가 은은(隱隱)하게 동쪽 방향에서 일어나 서쪽 방향에서 멈추었다.
8월 10일 갑인
개수 도감(改修都賢) 도제조(都提調)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려 주었다. 제조(提調) 김약로(金若魯)와 이종성(李宗城)에게는 품계를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올려 주었다.
8월 11일 을묘
박춘보(朴春普)를 장령으로, 윤광찬(尹光纘)과 한광조(韓光肇)를 정언으로, 임순(任珣)과 이광익(李光瀷)을 지평으로, 이종성(李宗城)을 예문관 제학으로, 조관빈(趙觀彬)을 홍문관 제학으로, 조돈(趙暾)을 수찬으로, 윤광소(尹光紹)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총융청(摠戎廳)의 순조(巡操)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는데, 소속된 고을에서 능침의 역사에 많이 동원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하교하기를,
"금번에 개수(改修)하는 역사는 장릉(莊陵)의 역사 후에 처음이다. 추모의 정으로 인하여 내가 몸소 도감(都監)의 역사를 봉심(奉審)하고 감독한 것이다. 행행(幸行)의 공급을 한꺼번에 거행하였으니, 경기의 궁핍한 백성들이 어찌 곤란하지 않았겠는가? 직접 그 곤란한 모습을 목격하였는데, 만일 백성들을 구휼하는 정치가 없다면 이것이 어찌 옛날 성왕(聖王)들의 뜻을 우러러 본받는 것이겠는가? 이미 경기 관찰사에게 하문하여 12고을의 사정을 뽑아서 아뢰도록 하였다. 금년에 환상미(還上米)의 군량미 가운데 새로이 모손(耗損)된 것은 일절 아울러 탕감하게 하라. 양주(楊州)·고양(高陽)의 백성들이 여러 능침을 받드니, 더욱 마땅히 구휼하는 뜻을 보여야 할 것이다. 산성(山城)의 군량미는 특별히 절반을 보류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전 동래 부사 정이검(鄭履儉)을 잡아와서 심문하게 하였는데, 정이검의 비장(裨將)이 공목 감관(公木監官) 전우장(田雨章)·김윤하(金潤河)·박태석(朴泰碩) 등과 함께 몰래 각 고을의 하납미(下納米) 1천 5백 곡(斛)을 팔아서 전(錢) 6천 민(緡)과 교환하여 사사로이 스스로 나누어 썼다가, 그 반분(半分)을 취하여 전우장 등으로 하여금 요량하여 일을 미봉(彌縫)하게 하였었다. 그러나 그 나머지 미곡 태반을 전우장 등이 혹은 함부로 낭비하고, 혹은 훔쳐다가 먹었는데, 전후에 들여다가 왜인들에게 지급하여 준 것은 겨우 1백 70여 석(石)뿐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사건이 발각되자. 새로 부임한 부사 김한철(金漢喆)이 장계(狀啓)를 올려 전우장 등의 죄를 청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전우장 등 세 사람은 똑같이 나쁜 짓을 하고 서로 구원하려 하였으니, 모두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모두 마땅히 국경 상에서 효시하여 변방 사람들을 권려하여야 합니다. 정이검의 비장은 그 주수(主帥)를 속이고 공적인 재화를 마음대로 썼으니, 또한 죄를 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마땅히 경옥(京獄)으로 붙잡아와서 형신(刑訊)하여 추국한 다음에 정배(定配)하도록 하소서."
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사건이 교린(交隣)과 관계되고 또한 변방의 사정과도 관계되니, 엄하게 징계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하나같이 모두 효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이검도 또한 그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죄를 면하기가 어렵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장은 곧 부사의 이목(耳目)이요, 조아(爪牙)인데, 어찌 당사자가 이런 따위의 일을 범할 수가 있겠는가? 지금 모든 사람과 그 비장을 아울러 효시한 다음이라야 변방의 사람들이 두려움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청컨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고, 정이검도 또한 마땅히 먼저 파직시킨 다음에 붙잡아 오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뒤에 본도의 도신(道臣)이 조사하여 아뢴 것으로 인하여 전우장 등을 효시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절도(絶島)에 보내어 종으로 삼았으며, 정이검은 금천(衿川)에 유배시켰다. 이어서 전후의 동래 부사로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10년을 한정하고 적발하여 형률에 따라 처단하라고 명하였다.
조현명이 또 말하기를,
"지난번에 강계(江界)에서 일어난 마상(馬尙)의 사건 때문에 청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청하였었으나, 성상께서 이를 곤란하게 여겼습니다. 추후에 자세히 들으니, 이른바 황표(皇標)라는 것은 곧 강희제(康熙帝) 시절에 변방의 백성들에게 지급하여 그들로 하여금 금산(禁山)을 출입하면서 삼(蔘)을 캐서 세를 바치게 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마상은 모두 산동(山東) 지방에서 몰래 와서 삼을 캐는 백성으로 관표(官標)가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한 무리들은 염장(鹽醬)과 양식을 반드시 우리 나라의 간사한 백성들에게 의존할 것인데, 양국의 경계인 사람들이 살지 않는 지역에 피차의 간사한 백성들이 왕래하고 교통(交通)하여 조만간에 어떠한 양상의 사건이 발생할지를 알 수가 없으니, 어찌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미년149) 욕자(辱咨) 가운데에, ‘차후에 혹시 비류(非類)의 월경(越境)하는 일이 발생하는데도 조선에서 능히 이것을 금지하여 막지 못한다면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한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사건을 저들이 만약 알게 된다면 반드시 우리를 힐책하는 단서로 삼을 것이니, 그것을 장차 무슨 말로써 이에 답변할 것입니까? 마땅히 먼저 도신(道臣)과 변신(邊臣)을 작년의 예에 의하여 사군(四郡)의 국경을 파수하게 하여 피차의 간사한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 서로 교통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그리고 피중(彼中)에 자문을 보내어 말하기를, ‘정미년에 있었던 자문의 뜻이 엄중하므로 감히 마음을 다하여 국경을 방어하고 지키지 아니할 수가 없었는데, 이 무리들이 모두 일컫기를, 「우리가 우리의 국경을 왕래하는 것은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마음대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왕래하기를 저자 드나들듯하다가 필경에는 변문(邊門)에 사건을 일으켜서 대방(大邦)에 누를 끼칠 형세가 반드시 이를 것이니, 바라건대, 금단(禁斷)을 더하라.’고 한다면, 사리(辭理)가 분명하고 바르게 되어서 후일의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성상께서 언제나 우리쪽에서 먼저 사건을 일으켜서 혹시라도 나라에 욕될까 염려하시는데, 그러나 이것은 피국(彼國)의 난민(亂民)들로서, 저들이 금지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인하여 사건이 발각된다면 나라에 욕되는 것이 더욱 염려스러울 것이니, 먼저 자문을 보내어 사건의 진상을 보고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청나라에서 황태후(皇太后)와 황후(皇后)에게 아뢰는 표문(表文)의 법식을 새로이 고쳐서 우리 나라에 보내어 왔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본래 황태후와 황후에게 표문으로 아뢰던 예가 없었으므로, 대신들이 이러한 뜻을 회자(回咨)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하교하기를,
"옛날에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유조(遺詔)에, ‘산의 원형(原形) 그대로 따라 능을 만들고 재량하여 물이 흐르게 하라.’고 하였는데, 내가 마음속으로 항상 이를 흠모하였다. 그러나 요순(堯舜)을 본받고자 한다면 마땅히 우리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할 것이니, 어찌 한(漢)나라를 본받겠는가? 우리 태종조(太宗朝) 때에는 사방석(四方石) 앞의 1편(片)을 특별히 2편(片)으로 만들었으며, 우리 성조(聖朝)께서는 병풍석(屛風石)을 없앴는데, 이것이 사왕(嗣王)의 준법(準法)이라고 일컬을 만하다. 우리 성고(聖考) 때에 이르러 능상(陵上)의 석물(石物)들은 후릉(厚陵)150) 의 제도를 모방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는데, 지극히 검소한 덕이 놀랍고도 훌륭하였다. 사람의 자식이 된 자가 선대(先代)를 위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덜하고자 하겠는가마는, 지금 개수(改修)로 인하여 능침을 높고 둥글게 봉토(封土)하는 데에도 또한 후릉의 제도를 모방하여 시행하였는데, 이것도 또한 계술(繼述)하려는 뜻이다. 그러나 그때에 하교한 것이 이와 같았으나 당초에 능침을 봉토할 때의 상설(象設)에 비교하여 그것이 또한 조금씩 차이가 있게 되었으니, 이것도 또한 역사를 감독하는 신자(臣子)가 감히 하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 의릉(懿陵)에 있어서는 비록 경자년151) 의 제도를 모방하였지만, 이 뒤에 세월이 아주 오래 되어 능침을 점차 높이고 크게 하는 폐단이 없지 아니할런지를 어찌 알겠는가? 차후의 사왕(嗣王)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계술하는 데에 먼저 한다 하여도, 또한 능침을 높고 크게 만드는 폐단이 어찌 없겠는가? 아! 과연 이와 같이 한다면, 이것은 전대에는 박하게 하고 후대에는 후하게 한 것이니, 한밤중에 일어나서 생각해 보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두려운 마음이 있게 된다. 이때를 기준하여 영원히 일정한 제도를 만들지 아니할 수가 없다. 아! 인자(人子)가 근본에 보답하는 도리는 영구적인 것을 먼저 할 것인데, 어찌 일시적으로 보기 아름다운 것에 두겠는가? 이 뒤로는 원묘(園墓)와 능침의 제도에서 상설의 규모는 하나같이 이 제도를 따르고 한자 한치라도 더하지 말게 하되, 후일에 자손되는 자가 지나치게 높이고 숭앙하려고 생각하여 이 법식을 준수하지 아니한다면 이것이 어찌 효도이겠는가? 나도 또한 이것으로 인하여 하교할 것이 있다. 지난해에 후릉(厚陵)을 봉심(奉審)하라는 주문(奏聞)에서 이미 깨달은 바가 있었고, 금번에 여러 능침을 봉심하는 데에도 또한 묵묵히 말없이 헤아리는 바가 있었다. 혼유석(魂遊石)과 하박석(下磚石)은 오히려 후릉의 제도가 아닌데, 이후로는 이것도 또한 마땅히 후릉의 제도를 따라야 할 일로 법식을 정한 의주(儀註)를 길이 후세에 남겨 줄 방도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지난날에 종신(宗臣)의 상소에서 성상을 기사(耆社)에 들도록 청하였는데, 대저 인군(人君)이 기사에 들어가는 것은 곧 몸을 낮추고 굽히는 것이지, 영광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뭇 신하들이 전하께 송축(頌祝)하는 정성은 바야흐로 천만년을 기약하려고 합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수령(壽齡)이 겨우 쉰 살을 넘겼는데, 어찌 갑자기 기로(耆老)라는 칭호를 군부(君父)에게 더하겠습니까? 신 등의 마음은 진실로 이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조정의 열성(列聖) 중에서 오로지 태조(太祖)와 숙종[肅廟]만이 기사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태종(太宗)·세종(世宗)·세조(世祖)·중종(中宗)·선조(宣祖) 같은 5,6분의 성조께서는 보주(寶籌)가 또한 쉰 살을 넘기셨으나 모두 기사에 들어가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우리 선군(先君)께서 행하시지 아니하던 바입니다. 또 전하께서 전후에 여러 차례 귀로 들을 수 없는 말씀을 내렸으나, 금일에 신자가 되어서 어찌 감히 기로라는 두 글자를 성상께 돌아가게 하겠습니까? 우선 6, 7년을 기다렸다가 의논하더라도 늦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바야흐로 《속대전(績大典)》을 편찬하고 있는데, 기로사(耆老司) 조문 가운데 장차 당저(當宁)라는 두 글자를 빼버리려는 것을 나는 유감으로 여긴다. 비록 경들이 이를 말하지만, 외임 선생안(外任先生案)에 부자(父子)가 잇달아 기록된다면, 어찌 귀한 게 아니겠는가? 또 기해년152) 이후라면 우리 선군께서 행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름을 기첩(耆帖)에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고사(故事)를 따르고자 하는 것뿐인데, 어찌 물외(物外)의 한인(閑人)을 구하여 만드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언제나 고심하는 분부를 내리시는데, 비록 신하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또한 봉조청(奉朝請)을 삼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신 등이 더욱 감히 봉승(奉承)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경의 말이 지나치다."
하였다.
밤에 형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을 인견하고, 이어서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먼저 서종옥에게 명하여 호서 지방의 어사(御史) 윤광소(尹光紹)가 보낸 별단(別單)을 읽게 하였는데, 친히 오래 된 죄수를 판결하여 섬에 유배된 자들을 완전히 석방한 것이 많았다.
해남(海南)의 연해 고을에서 해일이 일었고, 또 충재(蟲災)가 있었다.
8월 14일 무오
임금이 유신 윤광소(尹光紹)를 소견하고 《속오례의(績五禮儀)》의 식례(式例)를 하순하였다. 윤광소가 말하기를,
"옛날에 대가(大駕)·법가(法駕)·소가(小駕)의 의장(儀仗)이 있었는데, 각기 스스로 같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의장고(儀仗庫)에서 두 등급으로 나누어 만들어서 단지 대가·소가의 의장만을 사용할 뿐입니다. 법가의 의장은 처음부터 사용하지 아니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잘못 전통을 계승한 데에서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만, 책의 서례(序例)에서는 그 잘못된 예를 기록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례의》에 식례를 정한 것을 가지고 준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5일 기미
예관(禮官)을 보내어 증 찬성 최태일(崔泰逸)과 증 판서 최말정(崔末貞)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으니, 곧 육상묘(毓祥廟)의 조부와 증조부였기 때문이다. 능침에 거둥할 때에 어가가 그 무덤을 지나갔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8월 16일 경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좌의정 송인명(宋寅明)과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이 듣건대,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달이 밝아지는 것과 같고, 해가 떠오르는 것과 같으며, 남산의 무궁함과 같고, 송백(松柏)의 무성함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신하들이 임금을 축수하는 말들입니다. 금일에 신 등의 마음은 실로 천세 만세토록 무강(無彊)하시기를 바라는 데 있겠으나, 종신(宗臣)을 돌아본다면 7,8년을 오래 기다리는 데에 능히 참지 못할 것 같으니, 또한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의 성헌(成憲)을 살피시어 길이 허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숙종[肅廟]께서 이미 시행한 일이 후세의 법규가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맞이할 임신년153) 은 곧 숙종의 기해년154) 인데, 3백 년 동안 전례가 없었던 성전(盛典)을 이때를 기다려서 다시 거행한다면, 어찌 계술(繼述)하는 선행(善行)에 영광을 더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의 심기(心氣)로써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나는 묵묵히 말이 없는데, 경들은 어찌 이와 같이 그것을 나에게 기대하는 것과 같이 하는가? 이는 지난날의 하교에 대하여 요량을 적게 한 것이다. 지난날의 하교는 곧 한인(閑人)의 하교이다."
하였다.
8월 17일 신유
문학(文學) 유언민(兪彦民)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덕(聖德)이 매우 자비로워 몸소 가르치는 데 모범을 보이시니, 무릇 세자[儲君]를 인도하여 도와준 여러 방도가 진실로 남은 유감이 없습니다마는, 유독 현덕(賢德)을 초빙하는 길이 아직도 소루한 편에 속하니, 어찌 깊이 애석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지금 덕을 수양하고 있는 산림(山林) 가운데 사문(斯文)의 중망(重望)을 짊어진 세자 빈객(世子賓客) 신 이재(李縡)와 찬선(贊善) 신 박필주(朴弼周) 같은 사람은 모두 이미 동궁(東宮)의 관속(官屬)이 되었으나, 실지로는 일찍이 서연[冑筵]에 나와서 참여하여 개발하고 보도하는 도움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전하께서 사람을 초치하는 것에 미진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8월 19일 계해
이조에서 아뢰기를,
"새로 임명한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병상(李秉常)에 대해 본조에서 규례를 잘 알지 못하여 행 유수(行留守)라고 하비(下批)하였습니다 본부의 선생안(先生案)을 추고하니, 고 판서 김신국(金藎國)이 보국 대부(輔國大夫)로서 유수를 겸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병상은 자급(資級)이 이미 보국 대부이니, 이러한 전례에 의하여 판돈녕(判敦寧)으로서 그대로 겸 유수(兼留守)의 임무를 띠도록 하비를 고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병조 판서 정석오(鄭錫五)가 아뢰기를,
"곤수(閫帥)의 자리에 신통(新通)할 때에, 전에는 일찍이 방어사(防禦使)를 거쳐야 하는 것을 규정하였었는데, 한번 변방 지역을 거쳐야 하는 법식을 정한 다음부터는 방어사의 이력(履歷)이 있는지 없는지를 구애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이번에 새로 곤수를 신통할 때에 단지 변방 지역의 이력만을 취할 것이겠습니까? 비록 변방 지역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방어사를 거치지 않았다면 마땅히 의망(擬望)을 통과시키지 않아야 할 것이겠습니까? 한번 품정(稟定)한 다음에야 일정한 법규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신구(新舊)의 정해진 법식을 채용하여 변방 지역과 방어사를 거친 다음에야 곤수의 자리에 의망을 갖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이날 도목 대정(都目大政)155) 을 행하였다. 임금이 이조에 하교하기를,
"생민(生民)의 휴척(休戚)은 수령에게 달려 있으므로,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선택하는 뜻을 일찍이 특별히 신칙하였다. 한(漢)나라에서 먼저 했던 바는 오직 훌륭한 관리를 뽑는 것이었는데, 내가 구하는 바 또한 오로지 순리(循吏)156) 뿐이다. 순리의 다스림이 비록 효과가 느리고 더딘 것 같지만, 그것이 백성들에게 미치는 효과는 반드시 명예를 추구하는 관리보다 갑절이나 더할 것이다. 순리를 채용하기에 힘써서 잘못된 폐단을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원경하(元景夏)를 도승지로, 송능상(宋能相)과 윤택후(弓澤厚)를 장령으로, 조명정(趙明鼎)을 대사성으로, 윤급(尹汲)을 이조 참의로, 정언유(鄭彦儒)를 헌납으로, 윤광의(尹光毅)를 응교로, 윤학동(尹學東)을 정언으로, 정원순(鄭元淳)을 검열로, 조동제(趙東濟)를 전라 좌수사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민응수(閔應洙)와 병조 판서 정석오(鄭錫五)의 인사 행정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찬집청(纂輯廳)의 당상관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목노비(木奴婢)는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가?"
하니, 여러 대신들 가운데에 아는 자가 없었다. 임금이 윤광소(尹光紹)를 불러서 물어보니, 윤광소가 말하기를,
"주(周)나라 말엽에 목노비가 있었는데, 꼭두각시 인형 같은 종류였습니다. 옛날에 꼭두각시 인형을 쓰던 법이 있었기 때문에 후일에 순장(殉葬)의 폐단이 생기게 되었으니, 대개 그 꼭두각시 인형을 쓰는 법을 변화시키고자 하다가 목노비를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례(周禮)》와 《의례(儀禮)》를 상고하더라도 모두 이러한 기록이 없고 단지 경전(經傳)의 통해(通解)에 나올 뿐이니, 이것은 후세에서 본받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으로 인하여 또 순장을 하지 않을 것을 어찌 알겠는가? 이를 없애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혹은 말하기를,
"그러한 일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니, 미땅히 깊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국장(國葬)이나 예장(禮葬)에서 목인(木人)을 사용하는 것은 이것이 순장을 대신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공자(孔子)께서 꼭두각시 인형을 만든 자를 비난하여 배척한 것은 꼭두각시 인형의 폐단이 전환하여 순장을 대신하였기 때문이었다. 목인으로써 대신하게 된 것이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를 알지 못하겠으나 이것을 사용하는 것은 불경(不敬)스러운 것인데, 지금 그 명칭을 그대로 둔다면 후일에 목인으로 인하여 다시 순장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옛날의 기록을 그대로 두는 뜻은 대개 신중히 하고자 함이고 지금 그 사용을 없애는 것은 곧 후세의 폐단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그 의조(儀曹)로 하여금 국장과 예장에서 특별히 순장을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국휼(國恤) 3년 뒤에 《오례의(五禮儀)》에서는 으레 결채(結綵)와 가요(歌謠) 등의 예가 있고, 대향(大享) 뒤에는 음복연(飮福宴)이 있는데, 성조(聖祖)께서 특별히 명하여 이것을 없애게 하였으니, 아! 훌륭하시었도다. 그런데 해당 조에서 오히려 고례(古禮)를 근거로 하여 이것을 품신하였으니, 근래의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지 말도록 하라. 비록 예사 비답을 내렸다 하지만, 그 혹시라도 떠벌리려고 하는 임금이 있어 옛날의 기록을 잘못 인용하여 범연히 의윤(依允)한다면, 아! 우리 성조(聖祖)와 성고(聖考)께서 추모하면서 차마 거행하지 않았던 훌륭한 효도가 장차 억제되고 시행되지 못할 것이니, 이후로는 그것을 의조로 하여금 수교(受敎)한 것으로써 성헌(成憲)을 만들고 예품(例稟)하지는 말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세마(洗馬) 홍봉한(洪鳳漢)이 동궁의 대혼(大婚)을 지낸 뒤에도 아직까지 승륙(陞六)157) 하지 못하고 있는데, 빈궁(嬪宮)의 부친으로서 그대로 9품의 관직에 있으니, 법의 본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지난날에 신 등이 연차(聯箚)를 올린 뜻은 대개 기로(耆老)라는 칭호를 군부(君父)에게 갑자기 차마 더할 수가 없다는 데에서 나온 것이데, 비지(批旨)의 ‘마음에 편안치 않다.’는 말씀에 황송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일에 이르러서 어찌 내가 그것을 처음으로 생각했겠는가? 스스로 정력(精力)을 헤아려보니, 앞날이 아득하였다. 또 어찌 8년이라는 긴 세월을 더 기다리겠는가? 만약 아들이 아비에 대해서라면 반드시 8년을 기다리려고 머물지 않을 것이니, 여기에서 임금과 아비의 다른 점을 볼 수가 있다."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범인(凡人)의 심정은 늙는 것을 싫어하여 족집게로 흰 머리털을 뽑는 데까지 도달하니, 신 등이 빨리 청하고자 하지 아니하는 것은 진실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상께서 신 등의 조그마한 정성을 살피시어 우선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특교(特敎)로써 이를 하더라도 불가(不可)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일의 임금과 신하는 전혀 틈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8월 20일 갑자
지평 유언술(兪彦述)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상하가 막히어 통하지 아니하고 언로(言路)가 막혀서 한 마디 말이라도 나타내고 한 가지 일이라도 논의하여 종묘와 사직을 위해 깊이 우려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대각(臺閣)의 책임을 맡은 자들의 죄입니다. 그런데 대각으로 하여금 이와 같이 하게 하는 것은 그 허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모두 전하께서 거만하게 스스로 성인인 체하면서 신료(臣僚)들을 얕잡아 보아서 조금이라도 뜻을 어기거나 거스르면, 갑자기 억누르고 제압하기를 더하시어 오로지 그 언론이 내 뜻을 어기지 못하도록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이후부터 보통이 아닌 지나친 거조가 단지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옛날의 견거(牽裾)158) ·절함(折檻)159) 한 자들과 같이 임금의 싫어하는 안색을 관계하지 않고 바로잡아 구원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이 대관(大官)은 임금의 뜻을 맞춰 주면서 명령에 잘 따르고, 소관(小官)은 의기 소침하여 물러가서 몸을 움츠리며 오로지 고식적인 미봉책(彌縫策)만을 주로 합니다. 이렇게 된 이후로 전하께서 비록 망국(亡國)의 거조가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목숨을 내걸고 전하를 위하여 말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보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조현명(趙顯命)과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을 인견하고, 어용(御容) 2폭을 내어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40세 때를 모사한 것이다. 한밤중에 생각해 보니, 영구한 방도는 진전(眞殿)과 같은 것이 없기에 이제 나의 은미한 뜻을 보이는 것이다."
하니, 이종성이 말하기를,
"강화도에 있는 장녕전(長寧殿)은 협착(狹窄)할 리도 없으니, 당저(當宁)의 어용을 같이 봉안(奉安)하더라도 아마 불가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예조 판서가 계달(啓達)하는 것이 바로 내 뜻과 합치된다. 나도 또한 장녕전을 생각한 바가 있다."
하고, 임금이 이어서 태령전(泰寧殿)의 중수한 상량문(上樑文)을 지어서 내려 주었는데, 이 전(殿)은 곧 어용을 봉안하는 곳이다.
8월 22일 병인
임금이 육조의 낭관(郞官)과 오부(五部)의 관원 및 궐내에 입직(入直)한 남행관(南行官)160) 을 소견(召見)하고, 직장(職掌)의 폐단을 두루 물어 보았다. 오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도성 안에서 빈궁하여 결혼할 나이가 지난 자들을 찾아서 물어보고 이를 아뢰게 하였다.
8월 23일 정묘
찬집청(纂輯廳)의 여러 당상관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연해(沿海)에서 고기를 잡고 해물을 채취하는 백성들이 바람과 파도에 표몰(漂沒)하면서 만번 죽을 고비를 겪고 살아서 돌아오는데, 또 형신(刑訊)을 당하니 왕정의 올바른 정치가 아니고 또 옛날 법전(法典)의 본의도 아니다. 그것을 없애도록 하라."
하였는데, 대개 포구에 사는 백성들로 표류하다가 왜인의 지경에 정박하는 자들이 혹시 거짓을 꾸미어 속이는 게 있을까 염려하여, 형배(刑配)하는 옛날 법전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이때 임금이 날마다 찬집(纂輯)하는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법 조문을 토론하여 확정하였고 그대로 둘 것과 산삭(刪削)할 것을 재정하여 관대하고 공평한 데에 힘써 따라서 일률(一律)161) 을 감형하여 섬에 유배시킨 자와 형신(刑訊)을 없애어 태장(笞杖)의 형을 받도록 한 것이 많이 있었는데, 여러 신하들 중에 혹은 세상이 쇠퇴하고 풍속이 교사하다 하면서 오히려 엄격하고 가혹하게 해야 마땅하다고 말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8월 24일 무진
임금이 승지를 불러서 친히 지은 《속대전(續大典)》의 서문(序文)을 내리며 《속대전》의 권수(卷首)에 적으라고 명하였는데, 후세 자손들에게 권면하여 신칙하라는 내용을 썼다.
강원도 삼척부(三陟府)에서 광풍(狂風)과 폭우가 한꺼번에 크게 일어나, 인가(人家)가 표몰하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1백 14인이나 되었다.
8월 25일 기사
유성(流星)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가 3,4척이나 되었다.
8월 26일 경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동래의 전우장(田雨章)을 조사하라는 사건에 대하여 동래 부사 김한철(金漢喆)이 영문(營門)에 보고하지 않고 직접 자신이 처단하였다는 것을 봉계(封啓)한 뒤에 늦게서야 비로소 등보(謄報)하였으니, 변신(邊臣)이 제멋대로 한 것은 변방의 사정을 엄하게 하고 체통을 중하게 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또 그 장계(狀啓)의 계본(啓本)에 혹은 「잔열(殘劣)하다.」라고 일컫기도 하고, 혹은 「어리석고 굼뜨다.」라고 일컬으면서 억지로 그 등급을 나누고자 하였으니, 마땅히 〈그에게〉 질책과 형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 도신(道臣)의 계본을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복주(覆奏)하니, 마침내 김한철을 파직하였다. 이어서 명하여 왜인(倭人)에게 공급하는 쌀을 작전(作錢)하여 이식을 늘리는 폐단을 거듭 금하게 하고, 이를 범하는 자는 탐장(貪贓)의 형률로써 처단하게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우마전(牛馬廛)은 곧 국초에 설치한 전포(廛鋪)인데, 마전교(馬廛橋)라는 명칭을 보더라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근래에 여러 상사(上司)의 각 군문(軍門)에서 이를 침해하였기 때문에 전포를 없애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전포 자리를 또한 논밭으로 개간하였으니, 보기에 지극히 한심스럽습니다. 마땅히 평시서 제조(平市署提調)로 하여금 특별히 주관하게 하여 다시 전포를 설치하도록 하고, 무릇 전인(廛人)에게 폐단을 끼치는 데 관련되는 단서를 일절 엄격히 없애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조현명이 또 말하기를,
"근래에 성균관(成均館)의 하인들이 우척(牛隻)을 향교(香橋) 주변에 많이 매어 두고 값을 논하여 매매하는데, 보기에 한심스럽습니다. 관장이 능히 이것을 금단하지 못하니, 해당 대사성(大司成)을 마땅히 중하게 추고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김재로가 또 연차(聯箚)를 올린 일 때문에 사과하면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옛날 전장(典章)을 그대로 따르시고자 하여 미치지 못하는 듯한 탄식이 있었고 신 등이 함께 번민하고 괴롭게 여기는 것을 또 ‘지나치게 걱정한다.’고 하교하시었습니다. 금일에 품지해 시행하고자 하여 짐짓 기사 당상(耆社堂上)을 인솔하고 같이 들어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이 처음에는 이미 종신(宗臣)의 상소를 비난하여 배척하다가 끝에 와서 또 아뢰고 이를 청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김재로가 해당 조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거행할 것을 굳이 청하니, 임금이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물어보았는데, 아무도 다른 말을 하지 아니하자, 드디어 이를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기해년162) 의 전례에서는 궤장(几杖)을 상의원(尙衣院)에서 만들어 들였으며, 어첩(御帖)은 궐중(闕中)에 받들어 들였는데, 동궁이 친히 여기에 글을 썼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해년이라면 어첩을 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마땅히 이에 연달아서 글을 쓸 것이니, 반드시 궐중에 받들어 들일 것은 없다. 내가 스스로 존호(尊號)와 왕(王)자를 쓰면 어떠하겠는가?"
하매, 김재로가 말하기를,
"선조(先朝)께서는 안질이 계셨기 때문에 동궁에게 명하여 대신 글을 쓰게 하였던 것이나, 지금 전하께서는 반드시 스스로 쓴다고 하여 혐의스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은 크고 작은 것이 없이 반드시 동조(東朝)께 보고한 다음이라야 시행할 수가 있다. 먼저 선원전(璿源殿)에 전알(展謁)하고 이어서 영수각(靈壽閣)에 나아가 전배(展拜)한 뒤에 어첩에 글을 쓸 것이니, 이후로는 이것을 가지고 전례를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이종성이 고묘(告廟)하고서 경사(慶事)를 치르기를 청하자, 임금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굳이 청하니 그제야 이를 윤허하였는데, 전문(箋文)을 올리는 이외에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은 단지 동조에게만 진헌하라고 명하였다. 이종성 등이 다시 진연(進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은 단지 고사(故事)를 따르고자 하는 것뿐이었는데, 이와 같이 한다면 이는 내가 예외의 이득으로 진연을 받는 것이다."
하였다. 대신들이 위로 동조를 받들었으므로 사체가 특별히 다르다고 하여 힘써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조께서는 언제나 나로 하여금 안정하고 동요되지 않으면 내 마음이 즉시 편안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조용히 조섭(調攝)하는 때를 당하여 만약 이러한 일을 듣는다면, 동조의 인자한 마음에서 반드시 불안하게 여길 것이다. 이 때문에 곤란하게 여기는 것이며, 나의 겸양이 아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내전(內殿)에서 진청(陳請)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교리 김상철(金尙喆)이 나아와서 말하기를,
"조금 전에 유사(有司)의 신하가 궤장(几杖) 올리는 것을 가지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곧 조정에서 연로(年老)한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만약 이 궤장을 가지고 몸을 편안하게 하는 물건으로 삼는다면, 장차 국사(國事)를 어디에 두려고 하십니까? 옛날 사람들의 반우(盤盂)와 궤장에는 모두 명문(銘文)이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이 궤장에 대하여 성탕(成湯)의 반명(盤銘)163) 과 무왕(武王)의 장명(杖銘)164) 같이 보신다면 성덕(聖德)에 더욱 빛남이 있을 것이며, 진청(陳請)하는 여러 신하들에게도 또한 반드시 빛남이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성상의 뜻을 여기에다 유념하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호조 판서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내사(內司)에서 명례궁(明禮宮)의 조세로 받아들이는 것이 크게 줄었다고 하여 실결(實結) 5백 결을 적당하게 획급(劃給)할 것을 계하(啓下)하여 이첩(移牒)하였는데, 명례궁은 원래 정한 면세가 1천 5백 결이었으나 그뒤에 또 추가한 면세가 수십 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실결을 달라고 청하여 5백 결에 이르렀으니, 민간(民間)의 결수를 가지고 정해진 법식 이외에 더 지급하여 주는 것은 정말로 곤란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래 정해진 면세 이외에 무단히 더 지급하는 것은 정해진 법식의 본의가 아니니, 그것을 중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7일 신미
《속오례의(續五禮儀)》의 책이 완성되어 이종성(李宗城)과 윤광소(尹光紹)가 모시어 바치니, 임금이 소견하고 선온(宣醞)하였으며 또 술과 안주를 찬집청(纂輯廳)에 내려 주었다.
형방 승지(刑房承旨)에게 명하여 의금부[金吾]·형조[秋曹]에 급히 나아가서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게 하였는데, 일기가 조금 차가워졌기 때문이다.
간원 【정언 윤학동(尹學東)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논박을 당하고 도리어 욕하는 것은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박문수(朴文秀)가 홍계희(洪啓禧)에게 반대로 욕을 한 것에 대해서는 그가 곧 간여할 일이 아닌데도 함부로 선조에게 욕하는 말을 더하였으며, 지금에 또 상소를 올려서 슬그머니 은어(隱語)를 사용하여 그 선조를 욕하였는데, 다시 윤리가 없어졌습니다. 마땅히 박문수를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때 박문수가 홍계희와 서로 다투며 상소를 올려 반대로 욕하였으나 임금이 오랫동안 비답을 내리지 아니하였었는데, 홍계희가 또 대소(對疏)를 올리니, 임금이 명하여 그 상소를 되돌려 주게 하고 그 글을 받들어 들인 승지를 체차(遞差)하도록 하였으며, 또 윤학동이 이쪽을 부축하고 저쪽을 억압하는 등 그 뜻이 불공평한 데에 관계된다고 하여, 그 관직을 체차하도록 하였다. 다음날 지평 유언술(兪彦述)이 승지와 대신(臺臣)을 체차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도록 계청(啓請)하였으나, 또한 따르지 아니하였다.
심성희(沈聖希)를 대사간으로, 이제원(李濟遠)를 사간으로, 이중조(李重祚)와 홍익삼(洪益三)을 정언으로 삼았다.
8월 29일 계유
임금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무릇 고유제(告由祭)를 반교(頒敎)하는 날에 행하는 것은 대개 교서를 반포하고 고유하기 때문이다. 금번에 태묘(太廟)의 고유제는 어가(御駕)를 출발시키는 날에 이를 행하고, 다음날 마땅히 교서를 반포할 것이니, 그 해조로 하여금 이것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개 기사(耆社)에 들어갈 때에 마땅히 고유하는 예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적장 충의(嫡長忠義)와 향실 충의(香室忠義)를 형조[秋曹]에서 가두고 치죄하는 것이 구례에 어긋남이 있다고 하여 왕부(王府)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품신하게 하였는데,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본부의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상고하니, 병진년165) 에 충의위(忠義衛)에서 숙직을 빼먹은 일 때문에 본부에서 가두고 치죄하였으나, 대신이 진백(陳白)함으로 인하여 적장 충의와 향실 충의를 논할 것이 없이 의금부에 압송하지 말고 형조로 하여금 추고하여 다스리게 하였던 일을 법식으로 정하소서."
하니, 옳다고 비답하였다.
지평 박성원(朴聖源)을 남해현(南海縣)에 귀양보냈다. 박성원이 대간에 나아가서 11조목을 아뢰었는데, 그 첫째에 이르기를,
"성상께서 기사(耆社)에 들어가시는 거조는 태조조(太祖朝) 때에 실지로 시작되었고 우리 숙종[肅考]께서 이를 계승하였으니, 금일에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은 태조와 숙종께서 이미 시행하였던 규범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종신(宗臣)의 상소에서 곧 망륙(望六)166) 두 글자로써 말을 하여 반드시 금년에 성상께 빨리 거행하게 하고자 한 것은 문득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열성(列聖)의 향년(享年)이 혹은 54, 5세가 되고 혹은 56, 7세가 되었을 때였으나 이것을 가지고 청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그 당시의 신자들이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 금일의 종신에 모두 미치지 못하여서 그러하였겠습니까? 진실로 조종의 고사를 가지고서 스스로 정해진 시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숙종께서 기해년167) 에 거행 하였던 것은 스스로 근거할 만한 사유가 있었는데, 지금 이것을 근거로 하여 금일에 마땅히 거행하여야 할 증거로 삼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옳은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날 대신[大僚]들이 경연에서 아뢰고 차자(箚子)를 올려서 간쟁(諫爭)한 것은 체모를 얻었다고 이를 만한데, 대저 성상의 숨은 뜻을 우러러 헤아리기에 미쳐서는 또 도리어 언사를 합하여 거행하기를 청하였고 마침내 윤허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진실로 그 일이 거행할 만하다면 전날에 간쟁하고 고집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으며, 이미 거행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엊그제까지 힘써 계청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전후의 거조(擧措)가 문득 둘로 절단되게 하였으니, 보필(輔弼)하는 자리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이처럼 구차스러운 논의가 있었습니다. 근일에 여러 신하들이 아첨하여 즐겁게 하는 짓을 일삼아서 성상의 뜻이 있는 곳이면 오로지 받들어 모시기에만 겨를이 없으니, 장차 임금의 마음으로 하여금 날로 거만하게 만들고 국가의 운세를 날로 고립되게 만들 것입니다. 오로지 이러한 한가지 일은 비록 크게 관계되는 바가 없는 것 같으나, 신은 깊이 우려하고 남몰래 탄식하기를 능히 스스로 그만두지 못합니다. 아! 조종께서 남몰래 도와주고 백령(百靈)이 함께 보호하여 성상의 수령(壽齡)이 1백 세까지 살 것을 기대하는데, 몇 년 동안을 기다리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기에 반드시 이처럼 급급하게 하십니까? 성상의 하교에서 이미, ‘고사(故事)를 따른다.’고 말씀하셨으니, 신은 계유년168) 에 거행한 다음이라야 비로소 태조의 고사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며, 임신년169) 에 거행한 다음이라야 비로서 숙종의 고사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신민(臣民)들이 우러러 축원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으니, 청컨대 우선 기사에 들어가신다는 명령을 중지하도록 하소서."
하고, 그 둘째에 이르기를,
"사관(史館)에서 새로 추천한 사람이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와 친혐(親嫌)이 있다면, 응강(應講)할 수가 없다는 것이 곧 조종조(祖宗朝) 때의 금석 같은 철칙입니다, 근래에 응강이 비록 변하여 소시(召試)로 되었지만, 혐의가 있다면 마땅히 상피(相避)하여야 하는 것은 진실로 피차에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서지수(徐志修)와 조재민(趙載敏)이 모두 시임 대신(時任大臣)의 조카인데도 친혐을 무릅쓰고 부시(赴試)하였으며, 그 사관의 관직을 이미 임명받게 된 직후에는 잠시 바로 전례를 끌어대어 체면(遞免)시켰다가 도로 즉시 경연에서 주달하여 출륙(出六)170) 의 명분으로 사관(史官)이 되었던 것입니다. 단 하루도 입직(入直)하지 아니하고 수사(修史)하지 아니하고서도 슬그머니 자품(資品)을 승진시켰으니, 이것은 곧 3백 년 이래에 아직까지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신진(新進)들이 조급히 다투어 승진하려는 습성은 실로 놀랄 만한 일이니, 청컨대 전 사관 서지수와 조재민의 승륙(陞六)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도록 하소서."
하고, 그 셋째에 이르기를,
"사관(史官)의 직임은 위로 인주(人主)의 언동을 기록하고 아래로 조신(朝臣)들의 선악을 기록하여 포폄 여탈(褒貶與奪)에 있어 조금도 숨기거나 꺼리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추천하거나 이끌어 줄 적에는 반드시 지극히 선택하기를 더하도록 합니다. 옛날에는 하번(下番)에 있은 지 10년이나 되었으되 그 교대시킬 자를 얻지 못하였던 일이 있었으니, 그 자리의 중요함이 진실로 이와 같았습니다. 근래에 공도(公道)가 행해지는 경우가 드물어서 추천을 잘못하는 일이 서로 연달았으니, 전하께서 깊이 이를 병폐로 삼으시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곧 이를 담당하는 자의 죄이고, 법이 훌륭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땅히 전하께서는 옛 전장(典章)을 고치지 말고 그 중에서 취하여서 이를 진작하고 권려할 것을 생각하소서. 그런데 지금에는 천거를 권점(圈點)171) 으로 고치고 응강을 소시로 고쳐서 처음에는 비록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이를 거행하게 하더라도 실제로는 관각(館閣)의 대신들이 주관합니다. 이른바 ‘권점’이라고 하는 것은 몇 사람이 들어와 참여하는 데에 지나지 아니하는데, 이미 선진(先進)들에게 두루 보이는 규정이 없기 때문에 각기 자기 당류를 끌어들여서 그 사당(私黨)을 구제하게 되므로, 회천(回薦)172) 할 때에 비하여 크게 돌아보고 꺼려하는 바가 없으며, 이른바 ‘소시’라고 하는 것은 거자(擧子)가 지극히 적어서 변별하기는 쉬운데, 합격시키고 떨어뜨리는 조종이 오로지 대신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전에는 응강을 스스로 하지 아니하는 자가 반드시 개강(改講)하도록 하여 그 진퇴(進退)하는 권리가 대신에게 있지 아니하였으나, 지금은 이것에 반대되어 그러한 유풍의 폐해가 반드시 대신의 사당(私黨)이 사관에 가득 채워지게 될 것이므로 비록 불법을 자행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사관은 감히 직서(直書)하지 아니할 것이며 대신도 또한 두려워하는 바가 없을 거이니, 그것이 심히 우려됨은 추천을 잘못하는 폐단뿐만 아니라 이것은 또한 능히 일정한 법으로도 삼을 수가 없습니다. 일을 잘못하는 경우가 서로 연달아서 권점으로 고치는 것이 잦아져 마침내 한 점을 얻은 자도 다 취하라는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러 처음에는 10여 인을 골라서 취하지만 점점 변천되어 3,40인의 다수로 될 것이므로 거조가 전도되고 난자함이 너무나 심할 것이니, 진실로 회천의 법을 두게 된다면 반드시 이와 같은 분란에는 이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서지수·조재민의 일과 같은 것도 또한 그 법을 바꾼 결과의 한 가지 폐해이니, 나이 50이 되어도 자품(資品)이 없는 경우에 이르러서는 으레 참하관(參下官)이 되지 못할 것이며, 그리고 나이 60에 한림(翰林)이 되어서는 눈이 어두워 일을 기록하지 못할 것입니다. 금일 직무를 맡기고 내일 출륙(出六)하였으니, 아! 공공연히 화려한 직함을 골라서 잡은 것이 그들 무리들에게는 진실로 요행일 것이지만 국가에는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이를 시행한 지 수년 동안에 여러 가지 폐단들이 이미 이와 같았으니, 이것보다 큰 폐단은 유추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마음과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으로 그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시는 것이 도리어 그 폐단을 불어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역사가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史亡則國亡]’라고 하였으니, 그것이 관계되는 바가 어찌 중대하지 않겠습니까? 금일의 조정 신하 중에서 어느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본 사건의 시비(是非)를 명백하게 설명하여서 성심(聖心)을 열어 주는 자가 없으며 다만 상하가 서로 부딪쳐 지나친 행동이 여러 번 일어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니, 신은 더욱 몹시 통탄하고 있습니다. 일을 만드는 자는 반드시 처음에 신중하여야 하는데, 하물며 이러한 변통(變通)이 이미 자손들에게 끼치는 계책이 된다면 화살에 따라서 표적을 바꾸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인데도, 다만 일시적으로 구차스럽게 미봉(彌縫)하고서 그쳤습니다. 지난 것은 비록 간쟁(諫爭)하지 못할지라도 오는 것은 오히려 고칠 수가 있을 것이니, 청컨대 사관(史官)에 인재를 취하는 법을 빨리 대신들로 하여금 6경(六卿)과 3사(三司) 및 본관의 당상관과 시종관(侍從官) 중에서 일찍이 사관의 관직을 거친 자들을 거느리고 대정(大庭)에서 회의하게 하되, 고전(故典)과 신식(新式)을 취하여 서로 참조하고 참작하여 헤아린 다음 위로 성상께서 재결하기를 기다려 영구히 준행하게 하소서."
하고, 그 넷째에 이르기를,
"작년에 성상께서 친림(親臨)하여 시학(視學)하신 것은 실로 드물게 있는 훌륭한 거조로 경연의 유신을 뽑으라고 명하셨으니, 더욱 학문을 존중하시는 성상의 뜻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국자감(國子監)의 직임에 있는 자는 마땅히 정밀하게 초선(抄選)을 더하여야 할 것인데, 이에 지친(至親) 중에서 범상한 1인의 거자(擧子)를 재생(諸生) 가운데에서 뽑아 경연의 자리에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가 앙대(仰對)하는 것은 분주하게 글귀에 응답하는 말에 지나지 아니한데도, 전하께서는 보시기를 진짜 현사(賢士)인 것같이 여기시어, ‘임석헌(林錫憲) 한 사람을 얻었다.’고 말씀하시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당초에 관직을 제수할 때에 이미 남다른 은전을 베풀었고, 재삼 도와주고 자리를 옮겨 주어 과분하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그를 천거한 자가 사정에 따르고 임금을 속였으며, 이를 담당하는 자가 함부로 요행을 구하고 사양하지 아니하였으니, 모두 지극히 한심한 것입니다. 사방에서 서로 비웃고 성상의 덕에 누를 끼쳤으니, 청컨대 시직(侍直) 임석헌을 도태시켜 버리고, 그때 해당 대사성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고, 그 다섯 번째에 이르기를,
"강원도 감사 조명겸(趙明謙)이 작년에 경주 부윤에서 도백(道伯)으로 승진하였는데, 대간에서 상소하여 준엄하게 논란하기를 또한 이미 여러 날 하였으나 그는 못들은 체하면서 급히 서둘러 감영에 부임하였으므로 온 세상에서 그를 욕하고 꾸짖은 지 실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진실로 일분의 공의(公議)라도 있다면 마땅히 감히 다시 조신(朝紳)의 자리에 끼지 말아야 할 터인데, 권세를 잡은 요인들에게 아첨하여 섬겨서 한 지방의 행정을 맡은 책임자로 거듭 임명되어 3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오로지 탐오한 짓만 일삼으며, 밤낮으로 하는 짓이 재산을 늘리는 일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아! 황장목(黃腸木)173) 은 얼마나 그 사체가 무거운데, 비국(備局)에 보고하는 장계(狀啓)의 제목이라고 빙자하고는 제멋대로 마구 찍어 베어서 판(板)으로 만들어서 운수하여 왔었고, 또 돈을 실은 짐바리가 간도(間道)를 따라서 서로 잇달았던 것을 사람들이 많이 목격하였으니, 그가 불법한 짓을 한 것은 이미 전부 열거하기 어렵겠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에는 패륜한 아들이 있어 함께 그 나쁜 짓을 이루어서 아름답지 못한 일들이 말로 전해져서 길거리에 파다하니, 이와 같이 탐오하고 비루하며 법을 꺼리지 않는 사람을 하루라도 선화(宣化)의 자리에다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강원 감사 조명겸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버리소서."
하고, 그 여섯째에 이르기를,
"함녕군(咸寧君) 박찬신(朴纘新)이 일찍이 역적 남태징(南泰徵)과 같이 찬계(竄啓)에 들었으니, 그 행동을 이미 알 만합니다. 요행히 훈적(勳籍)에 끼어서 도박으로 부귀(富貴)를 취하여 대장[戎垣]의 중임을 맡기에 이르렀으나, 본시 인망의 밖에 있었는데 특별히 재상 집안의 사인(私人)으로서 외람되게 자리를 차지하여 여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중간에 전망(前望)에서 발거를 당한 것에는 오히려 공의(公議)를 보게 되는데, 전후에 그가 대간(臺諫)의 상소에서 탄핵을 받은 것이 또한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지난번에 원임 대신(原任大臣)의 차자(箚子)에서도 또 탄핵을 당한 것이 보통 정보가 아니었으니, 그에게 있어서는 더욱 크게 불안한 단서가 될 터인데도 그 뻔뻔스럽게 두려움을 알지 못하며 염치가 없는 것을 무릅쓰고는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염치[廉隅]라는 한 가지 절목은 진실로 이러한 무리에게 책임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반열이 팔좌(八座)174) 에 이르렀으니, 일이 조정의 체모에 관계되어 결코 그대로 두고서 논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또 그가 집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패륜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오래도록 장수의 직임에 있으면서 오로지 탐오하고 음란한 짓만을 일삼으니, 물정(物情)이 더욱 이를 해괴하게 여기고 군정(群情)이 많이 원망합니다. 청컨대 함녕군 박찬신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고, 그 일곱째에 이르기를,
"근래에 법망(法網)이 크게 허물어져 서울의 각사(各司)에서 본직(本職)에 힘쓰지 아니하고 다른 일을 가로맡아서 소민(小民)들을 침탈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시험삼아 한 가지 사례를 가지고 말씀드리면, 포도 대장 정수송(鄭壽松)이 장씨 성을 가진 서얼(庶孽)의 빚을 징수하는 이를 인하여 최가라는 백성을 잡아다가 치죄하였습니다. 아! 이것이 어찌 포도청에서 관여할 일이겠습니까? 자신이 포도 대장이 되어 사심을 좇아 공권을 무시한 것이 이처럼 극심한데, 이것을 죄주지 아니한다면 권력이 없는 잔민(殘民)들을 보조할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포도 대장 정수송을 파직하고, 여러 관사에 신칙하여 본직에서 관장하는 일 이외에 감히 불법으로 백성들을 침탈하지 말게 하소서."
하고, 그 여덟째에 이르기를,
"전 충원 현감(忠原縣監) 이명곤(李明坤)은 바야흐로 그 고을에 재직하였을 적에 온갖 사무를 모두 폐지하고 오로지 제 이익만 차지하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전체 영내의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면서 모두 그가 빨리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좌천되어 교체된 뒤에도 또한 기꺼이 돌아가려고 하지 아니하고 태연히 관사(官舍)에 앉아서 사재(私財)를 거두어 들이는 짓을 다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출발하였습니다. 가흥창(可興倉)에 소속된 백성들이 그의 탐장(貪贓)한 숫자를 두 사람이 마주 대해 이야기하였다고 하여 잡아와서 질문하였는데, 한량없는 욕심과 놀랄 만한 행동은 하나만이 아니었으니, 이런 따위의 허다하게 많은 일들은 수의(繡衣)175) 가 안렴(按廉)했을 때에 빠져나가지 못했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하물며 저 수의는 성상의 특별한 지우(知遇)를 받았으니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심을 버려 직사(職事)에 마음을 다하여야 마땅할 것인데, 이명곤의 사건에 대하여 오로지 감추고 덮어 주기만을 일삼아서 다만 하리(下吏)와 향소배(鄕所輩)들을 대략 다스렸으며, 서계(書啓) 중에도 단지, ‘그가 깊이 병들어서 이속(吏屬)들이 농간을 부렸다.’는 따위의 말로써 간략하게 말하면서 무릇 그가 탐오한 일은 하나도 거론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물며 또 그가 관아의 동헌에 머물러 드러누워서 채방(採訪)하기를 일삼지 아니하고 나라에서 금지한 육식을 강제로 청하여 먹는 등 조금도 뒷일을 돌아보거나 꺼려하는 바가 없었으니, 남녘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이를 놀랍고 이상하게 여기지 아니한 자가 없었습니다. 청컨대 전 호서 어사(湖西御史) 윤광소(尹光紹)를 파직하고 전 충원 현감 이명곤을 잡아다가 신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고, 그 아홉째에 이르기를,
"전 광주 부윤(廣州府尹) 서명형(徐命珩)이 잔폐하고 혼미하여 전혀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당로(當路)의 고관들에게 아첨하여 섬겨서 그 관직의 경력이 자기 분수를 넘어 본부의 부윤을 제수받기에 이르러서는 하나도 선정(善政)이 없었으므로 잘 다스리지 못하는 정상을 일일이 거론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 중에서 가장 놀랍고 통탄할 만한 것은 곧 그가 본관에서 재임하던 때에 경내의 오포리(五浦里)에다 큰 집을 지었었는데, 남한 신성(南漢新城) 안에 있던 소나무를 베어다가 서까래를 만들어서 적미(糴米)를 바치는 우마로 이것을 실어 나르게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관직을 교체당하기 전에 역사를 끝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농사가 한창인 계절에 밤낮으로 백성들을 독려하였으므로 원망하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하였으니, 이것을 보고 듣는 자들이 모두 놀라서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그 몸은 청조(淸朝)의 법종(法從)을 거쳤고 그 지역은 왕성(王城)에서 지척에 있는데 방자하고 무엄한 것이 이와 같이 극심한 데에 이르렀으니, 이미 교체시켰다고 하여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전 광주 부윤 서명형을 잡아와서 심문하고 죄를 정하소서."
하고, 그 열째에 이르기를,
"일전에 성상께서 대신의 연석(筵度)에서 주달한 것으로 인하여 외임(外任)에 있으면서 집을 짓는 자를 금단(禁斷)하라고 엄하게 명하셨으니, 법망을 진작하고 권려하는 훌륭한 뜻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신이 이미 거개가 모두 집을 지었다고 말하였으니, 일일이 적발하여 합당한 형률을 시행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한갓 엄하게 신칙하도록만 한다면, 이미 그 죄를 저지른 자들을 징계할 길이 없을 것이며 또한 그 나머지 사람들도 권려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번에 논란하는 서명형의 사건은 다만 신이 익숙하게 들어서 알고 있는 것에 근거하였으나, 그 밖의 일은 능히 다 거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신의 말이 이미 이와 같다면 결코 그대로 내버려 두고서 묻지 아니할 수가 없으니, 청컨대 각도의 도신(道臣)들에게 분부하여 외관에 재임할 때에 전택(田宅)을 경영하여 둔 자를 일일이 조사해 내어 장계(狀啓)하게 하고, 또 그러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자수(自首)하는 것을 허락하여 그들에게 중하게 죄를 정하는 계기로 삼으소서."
하고, 그 열한 번째에 이르기를,
"외관(外官)으로 집이 가까운 자에 있어서 변장(邊將)은 그래도 괜찮겠지만 수령(守令)은 불가하고, 다른 도는 혹시 괜찮다 하더라도 서북 지방은 더욱 폐단이 있는데, 변방의 백성들이 그 장관을 업신여겨서 수령이 능히 그 직사(職事)를 거행하지 못하였던 것은 여러 곳에서 모두 그러합니다. 북청 부사(北靑府使) 한종제(韓宗濟)는 그 집이 본부에서 거리가 불과 하룻밤 정도인데 그 가족과 인척 가운데 경하(境下)에 살고 있는 자도 또한 많으니, 결단코 그가 무릅쓰고 부임하도록 맡겨두어서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북청 부사 한종제를 체차하고,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이제부터 서북 지방의 사람들을 일체 도내의 수제(守宰)에 임명하지 말도록 하여 그대로 정식을 삼으소서."
하였다. 계본(啓本)이 들어가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반드시 진신(搢紳)들을 모두 쫓아내려고 하는 계책이다."
하고, 이어서 박성원을 불러 들였다. 임금이 매우 노하여 자세하게 하교하기를,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사람들은 초(楚)나라가 아니면 조(趙)나라로 갔었는데, 한쪽 구석에 있는 조선은 남만(南蠻)과 북적(北狄) 이외에는 갈 만한 데가 없다. 이것이 무슨 심보인가? 내가 기미(機微)를 알아 차리고서 일찍이 물러났던들, 어찌 너에게 이처럼 곤욕을 당하겠는가? 조신(朝臣)이 혹시 비슷하지도 않는데 기사(耆社)에 들어가는 자가 있다면 이것을 반박하더라도 좋겠지만, 네가 감히 인군(人君)이 기사에 들어가는 것을 반박하는가? 존호(尊號)의 여덟 글자를 어찌하여 반박해서 바로잡지 아니하고 곧 이처럼 계달(啓達)하는가?"
하고, 그 계본을 일일이 들추어서 몹시 꾸짖었다. 박성원이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진달하고자 청하였으나, 임금이 그의 관직을 체차하라고 명하고, 드디어 대소 공사(大小公事)를 승정원에 머물러 두라는 명령을 내리었다. 승지 남태량(南泰良)이 말하기를,
"신의 팔뚝이 끊어지더라도 이와 같은 하교를 신은 감히 쓸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또 남태량의 관직을 체차하고 바로 승정원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렸으나, 승지 정필녕(鄭必寧)과 이창의(李昌誼)가 이를 반포하지 아니하고서 인하여 청대(請對)하자,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여러 승지들을 모두 체차하였다. 남소 위장(南所衛將) 송징태(宋徵泰)를 임시로 임명하여 승지로 삼고, 또 서명구(徐命九)·조명리(趙明履)·조상명(趙尙命)·조재호(趙載浩)와 응교 윤광의(尹光毅)·필선 박필재(朴弼載)를 특별히 제수하여 승지로 삼았다. 이때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병을 구실로 삼아 오래도록 출사(出仕)하지 아니하였는데, 임금이 비상한 하교를 내렸다는 소문을 듣고서 여러 재신(宰臣)과 3사(三司)를 거느리고 서로 잇따라 청대하니, 밤 2경에야 비로서 인견을 허락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우의정 조현명(趙顯命)도 또한 뒤따라 들어왔는데, 여러 신하들이 힘써 반한(反汗)176)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성색(聲色)의 좋음을 빨리 취득할 생각이 없었고 노인(老人)의 이름을 얻고자 하는 데에 지나지 하니하였는데, 경들은 아첨하여 마음을 즐겁게 하는 신하가 되었고 나는 아첨을 좋아하는 임금이 되었으니, 이것은 내가 매우 한스럽게 여기는 바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시 그 마음을 조제(調劑)하려는 뜻은 없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3백 년의 종사(宗社)와 대신(臺臣) 한 사람을 비교할 때 그 경중이 어떠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천승지국(千乘之國)의 위엄으로 박성원 한 사람을 다스리는 데에 무슨 곤란이 있기에 이와 같이 과격한 거조를 하십니까?"
하고,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는 한낱 괴귀배(怪鬼輩)에 지나지 않는데, 한 사람의 괴귀배로 인하여 사양하시는 하교가 어찌 갑자기 이와 같은 지경에까지 이르십니까?"
하고,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은 말하기를,
"이번 일은 앞으로 나가기만 하고 뒤로 물러남이 없는데, 만약 끝내 마음을 돌이켜서 말을 들어줄 수가 없다면 장차 궁문 앞에서 절규(絶叫)하는 일이 일어나서 동조(東朝)를 놀라시게 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조 판서의 말을 들으니, 능히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할 수가 없다. 이번의 하교는 도로 거두겠으나 마음은 거둘 수가 없다."
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일어나 축하하였다. 송인명이 박성원을 유배하여 추방하는 형률을 시행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일개 대신을 논하였더라도 홀로 발계(發啓)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군부(君父)의 일에 있어서 어찌 감히 청침(請寢)하는 계청을 하겠는가? 그렇다면 임금이 즉위하는 것을 청침하는 계청도 또한 하겠는가? 대간에서 비록 나라의 형벌을 시행하자고 바로 청할지라도 내가 어찌 반드시 윤허하고 따르겠는가만, 일제히 토좌하지 아니하고 팔짱을 끼고서 보고만 있으니, 대각(臺閣)의 기풍이 곧 이처럼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다."
하고, 드디어 박성원은 해도(海島)에 유배시키되 사령(赦令)이 내리기 이전의 범죄일지라도 사면하지 말며[不揀赦前], 입시한 3사(三司)의 관원들은 차등이 있게 혹은 출척(黜斥)하고 혹은 삭직(削職)하며 혹은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번에 헌신(憲臣)의 가슴속에 가득찬 당심(黨心)과 종이에 널리 퍼져 있는 사사로운 뜻은 내가 하교하기를 기다리지 아니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그 중에서 조명겸·서명형·이명곤은 사람들이 욕하는 암담한 죄과에 다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모두 해당 관부로 하여금 이들을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박성원은 임금과 소원한 신하로서 감히 말하기를 꺼리지 아니하였으니, 비록 그 마음이 과연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그 기백은 숭상할 만하고, 그 말도 또한 취할 만한 것이 많았는데, 특히 한 마디 말이 임금의 뜻을 거스렸기 때문에 그 몸은 귀양가고 그 말은 쓰여지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다. 아! 이 세상을 돌아보건대, 당파가 없는 사람을 어찌 얻을 수가 있겠 는가? 다만 그 말의 시비(是非)를 보아서 취사(取捨)하는 것이 옳을 터인데, 어찌 당인(黨人)이라고 지목하여 그 말을 다 버릴 수가 있겠는가? 조명겸의 무리는 하나같이 의금부에 나아갔으나, 곧 모두 죄가 없다고 밝혀졌다. 그러나 박성원이 논한 바가 또한 어찌 다 허망한 말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45책 60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47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역사-편사(編史) / 역사-사학(史學) / 사법-탄핵(彈劾)
[註 166] 망륙(望六) : 쉰한 살을 이름.[註 167] 기해년 : 1719 숙종 45년.[註 168] 계유년 : 1753 영조 29년.[註 169] 임신년 : 1752 영조 28년.[註 170] 출륙(出六) : 7품직에 있는 관원이 그 임기가 만료되고 성적이 좋은 경우에 6품으로 승급(陞級)하여 다른 직에 전임(轉任)함.[註 171] 권점(圈點) :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관원을 뽑을 때 후보자들의 성명을 죽 적어 놓고 전선관(銓選官)이 각기 뽑고자 하는 사람의 성명 아래에 찍는 둥근 점.[註 172] 회천(回薦) : 한림 권점(翰林圈點) 때 현임 한림(現任翰林)과 전임 한림(前任翰林)이 모여서 권점을 행하고, 그 천기(薦記)를 대신(大臣)과 관각 당상(館閣堂上)에게 돌려 보여 그것의 가부(可否)를 묻는 일.[註 173] 황장목(黃腸木) : 연륜(年輪)이 오래된 소나무로 목질(木質)이 양호하여 관곽(棺槨)을 만드는 데 적합한 목재.[註 174] 팔좌(八座) : 중국의 한(漢)나라에서 육조(六曹)의 상서(尙書) 및 일령(一令)·일복(一僕)을 통틀어 일컫는 말. 우리 나라에서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및 좌·우 찬성(左右贊成)의 일컬음.[註 175] 수의(繡衣) : 암행 어사.[註 176] 반한(反汗) : 명령을 취소함.
사신은 말한다. "박성원은 임금과 소원한 신하로서 감히 말하기를 꺼리지 아니하였으니, 비록 그 마음이 과연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그 기백은 숭상할 만하고, 그 말도 또한 취할 만한 것이 많았는데, 특히 한 마디 말이 임금의 뜻을 거스렸기 때문에 그 몸은 귀양가고 그 말은 쓰여지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다. 아! 이 세상을 돌아보건대, 당파가 없는 사람을 어찌 얻을 수가 있겠 는가? 다만 그 말의 시비(是非)를 보아서 취사(取捨)하는 것이 옳을 터인데, 어찌 당인(黨人)이라고 지목하여 그 말을 다 버릴 수가 있겠는가? 조명겸의 무리는 하나같이 의금부에 나아갔으나, 곧 모두 죄가 없다고 밝혀졌다. 그러나 박성원이 논한 바가 또한 어찌 다 허망한 말이겠는가?"
공홍도(公洪道) 이산현(尼山縣)에 지진이 일어나서 가옥이 뒤흔들렸다.
8월 30일 갑술
심성희(沈聖希)를 대사헌으로, 남태량(南泰良)을 대사간으로, 권현(權賢)을 집의로, 민계(閔堦)를 사간으로, 유건(柳謇)과 최익수(崔益秀)를 장령으로, 이규채(李奎采)와 이사조(李師祚)를 지평으로, 이언세(李彦世)와 홍우한(洪羽漢)를 정언으로, 한익모(韓翼謨)를 부응교로, 조운규(趙雲逵)와 송창명(宋昌明)을 수찬으로, 윤득화(尹得和)를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예조의 낭관(郞官)을 보내어 고려(高麗) 왕들의 여러 능침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3년 간격으로 한 번씩 간심(看審)하는 것이 관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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