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0권, 영조 20년 1744년 9월

싸라리리 2025. 9. 27.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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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을해

일식이 있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박성원(朴聖源)의 계본 때문에 차자를 올려서 그 허물을 인책하고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위로하여 유시하였다.

 

9월 2일 병자

공홍도(公洪道) 청산현(靑山縣)에 지진이 일어났다.

 

임금이 대신과 찬집청(纂輯廳)의 여러 당상관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병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는 부류는 다스리기가 도리어 쉬워서 한번 다스려진 다음에는 안정되어 아무 일이 없게 되었지만, 당인(黨人)에 이르러서는 겨우 다스려졌다가 다시 일어나므로 경들이 언제나 당인을 없애자고 경계하였었는데, 내가 반드시 그 들을 엄하게 다스리고자 하는 까닭은 곧 공자께서 소정묘(少正卯)를 주살한 뜻177)  이다. 오늘날 당파의 습성은 무신년178)  보다 넘침이 있어 나더러 의리를 알지 못한다고 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옥하(屋下)에서 큰 소리를 치는 자들은 반드시 이러한 무리들일 것이다. 약을 먹고서 정신이 어지럽지 아니하면 그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풀을 벨 때 뿌리가 남아 있으면 반드시 퍼져서 뻗게 된다. 경들은 그러한 습성을 느슨히 다스려서 다시 무신년의 습성을 조성하고자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신(臺臣)이 그 임금을 논박하여 바로잡는 데에 옛날에도 또한 이러한 일이 있었는가? 이것은 반드시 당파의 소굴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혹은 당파의 습성에 준엄하게 한 자가 없지도 아니합니다만, 또한 성상께서 이를 징계하고 권장하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죄가 있는 자는 엄하게 처벌하고 재주가 있는 자는 발탁하여 등용하여 좋아하고 싫어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보이어 한 시대의 추향(趨向)을 정한 다음이라야 세상의 도리가 바야흐로 바르게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미 진짜 당파의 괴수를 잡아서 엄하게 처벌하지 못하였으니, 조태언(趙泰彦)과 박성원(朴聖源) 같은 무리들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박성원에 대해서는 더욱 한결같이 죽이자고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그 기둥을 세우시어 대훈(大訓)을 내리셨으니, 만약 대훈을 침범하는 자가 있다면 용서할 수가 없겠습니다만, 이것은 치우치게 논란한 분수(分數)와는 다릅니다."
하였다. 이에 집의(執義) 권현(權賢)이 청대(請對)해 입시(入侍)하여 박성원의 새로운 계본을 모두 정지시키고, 또 말하기를,
"진실로 박성원이 과연 의견이 있었다면 혹은 상소를 올려서 논란하는 것도 가하겠습니다만, 발계(發啓)하기에 이르러서는 일이 지극히 무엄하므로, 성상의 하교에 이미 차율(次律)을 써서 빨리 섬으로 유배시키게 하였는데, 남해(南海)의 좋은 땅은 너무 가볍고 헐한 데에 관계되니, 마땅히 천극(栫棘)을 더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하기를,
"이번에 이러한 계청(啓請)은, ‘많은 쇠[鐵] 중에서 좋은 쇠소리가 나는 것이 있고 평범한 사람 가운데에서 조금 뛰어났다.’고 이를 만하다. 비록 부드럽고 연약한 점도 있으나 계청한 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권현이 다시 ‘부드럽고 연약하다.’는 하교(下敎) 때문에 인피(引避)하며 그 직임을 바꾸어 달라고 청하니, 임금이 그의 청대를 요구하고 계본을 정지시키자는 주장이 비록 대간(臺諫)의 체모를 얻기는 하였으나 구차스레 미봉(彌縫)한 것이므로 너그럽게 용서할 수가 없다고 하여 특별히 이를 허락하였다. 권현이 청대를 요구한 것은 대개 박성원을 변명하여 구원하려고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크게 장담하다가 등연(登筵)하기에 미쳐서는 갑자기 말을 바꾸어 고쳐서 도리어 가극(加棘)하기를 청하였으니, 그의 언어가 앞뒤를 뒤집어서 어그러지고 행동이 기괴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여러 신하들이 진연(進宴)할 것을 굳이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잠시 물러가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다시 신하들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이번의 일은 그것이 옛날 일을 뒤따라 행하고자 하는 것인데, 어찌 털끝만치라도 예대(豫大)하려는 뜻이 있겠는가? 그런데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구례(舊例)를 끌어다가 아뢰고 청하는 것이 특별히 나를 위하는 것만이 아니라 위로 대비전에 관계되므로, 그 도리에 있어서 굳이 거절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대비전에 들어가서 아뢰었는데 다행히 윤허를 받았다. 사람의 자식된 도리로써 부모의 뜻을 받들기를 먼저 해야 하는데, 소자(小子)가 어찌 감히 봉승(奉承)하지 아니하겠는가? 그런데 뜻이 비록 어버이를 받드는 데 있다고 하더라도 일을 크게 떠벌릴 수가 없다. 작년에 세 가지 연회(宴會)를 같은 날 행하였는데, 하물며 지난해의 구례가 있으니, 지금 어찌 차마 각기 연회를 베풀겠는가? 그것은 의조(儀曹)로 하여금 이 예로써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라 감사 정준일(鄭俊一)이 대간의 탄핵을 당하여 인의(引義)하고 부임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신이 이것을 아뢰니, 교체시키도록 허락하였다. 또 대신이 관동(關東) 지방의 양전(量田)할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신임 도신(道臣)이 사폐(辭陛)하는 날 신칙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새로 임명된 감사 윤득화(尹得和)가 이로 인하여 결정짓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특멸히 그를 교체시키게 하였다.

 

헌납 정언유(鄭彦儒)가 상소하였는데, 대략이르기를,
"어제 일을 처리하실 때에 입대(入對)하였던 3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죄와 벌을 받았는데, 그 연좌된 것이 무슨 말 때문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조(聖朝)께서 보통 때에 경악(經幄)에서 대신(臺臣)들을 대우하는 것이 다른 관료들과는 달랐으니, 비록 성상의 마음에 맞지 아니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조용하게 일깨우고 꾸짖어서 관대하게 처분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한데, 어찌 반드시 우레 같은 위엄을 경솔하게 더하시어 꺾어서 억누르는 것이 이와 같은 지경이 이르십니까? 전하께서 일을 처리하실 적에 언제나 격렬한 감정에 때때로 너무 치우치는데, 일이 결정된 뒤에 다시 반복하여 생각하고 헤아려 보면 또한 반드시 그 과중한 것을 뉘우치실 것입니다. 하나같이 모두 그러한 명령을 도로 거두어 들이신다면, 위대한 성인(聖人)께서 잘못을 포용하는 도량을 보이시는 데에 방해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노하여 정언유의 관직을 삭탈해서 도성문 밖으로 내치라고 명하고, 그 소장을 되돌려 주었다.

 

이주진(李周鎭)을 대사헌으로, 심성진(沈星鎭)을 대사간으로, 조경(趙擎)을 집의로, 이광식(李光湜)을 사간으로, 윤광천(尹光天)과 이규휘(李奎徽)를 장령으로, 민광우(閔光遇)와 박치륭(朴致隆)을 지평으로, 송시함(宋時涵)과 이게(李垍)를 정언으로, 조명건(趙明健)을 교리로 삼았다.

 

9월 5일 기묘

정희규(鄭熙揆)를 장령으로, 이하종(李夏宗)을 헌납으로, 조명택(趙明澤)을 형조 참판으로, 권혁(權爀)을 강원도 관찰사로, 원경하(元景夏)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승문원(承文院)에서 아뢰기를,
"사자관(寫字官)은 의관지인(衣冠之人)에 속하므로, 비록 죄과가 있더라도 잡아들여 현벌(懸罰)179)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이들을 마치 하례[下賤]로 보듯 하여 이런 등의 형벌을 쉽게 더하여서 장차 그들을 보존할 형세가 없어질 것입니다. 이후로는 각사(各司)에서 내리신 명령이 있지 아니한데도 다시 예전의 관습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에는 해당 관원을 정해진 법식에 의하여 파직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형조 참판 김상성(金尙星)이 상소하여 박성원(朴聖源)의 계본(啓本)에 대하여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임술년180)  에 사유장(師儒長)181)  으로서 유생들을 초계(抄啓)하라는 명령을 외람되게 받들었습니다. 그런데 유생[章甫]들의 일은 유생이 마땅히 이를 주관해야 하므로, 신이 한결같이 두 사람의 장의(掌議)에게 이 일을 맡겼던 것은 대개 여기에 나왔던 것이었고, 임석헌(林錫憲)의 이름도 또한 그 가운데에 들어갔었습니다. 이미 초계한다고 말하면서 신의 지친(至親)에게 관계되었으니, 신이 힘써 그를 뽑아버리지 못하였던 것으로써 신의 죄를 삼는다면, 대체로 누구인들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마는, 지금 세월이 오래되어 사건이 지나간 뒤에 와서 전연 없었던 사실을 가지고 신이 혐의스러움을 무릅쓰고 주장하여 경연(經筵)의 자리에 나아오게 하였다는 것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의 상황을 성명(聖明)께서는 굽어 통촉하소서. 이러한 일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다른 일이야 더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당파의 습성으로 계문(啓聞)한 것인데, 이번의 괴이한 행동을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는가? 경은 지나치게 인혐(引嫌)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진연청(進宴廳)의 초기(草記)182)  를 가지고 경인년183)  의 전례에 의하여 진휼청(賑恤廳)의 쌀 1천 곡(斛)을 지급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많지 않았는가? 작년의 예에 의하여 8백 곡을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지난해 연례(宴禮) 때에 기명(器皿)의 숫자를 감하였던 것에 대하여 신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였었는데, 금년에는 지난해와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앞에 팔진미(八珍味)를 늘어놓더라도 먹는 것은 입에 맞는 음식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어찌 많은 것을 취하겠는가? 내 생각이 단지 비용을 줄이려고 하는 데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하였다.

 

병조에 명하여 정익주(鄭翊周)를 등용하게 하였는데, 정익주는 중국 사람이었다. 그 할아버지 정선갑(鄭善甲)이 명나라 왕조가 멸망하자 마음으로 비통하게 여겨 머리를 깎고 우리 나라의 피로인(被虜人)들과 더불어 한패거리가 되어 나와서는 자기의 가문을 숨겼었다가, 그 아들이 과거에 부시(赴試)하게 되자, 비로소 그들의 세계(世系)를 말하였다고 한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에게 하순하여 그의 호적을 가지고 오라 명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그의 조부·증조부와 외조부는 모두 명나라 조정에 현직(顯職)이었으니, 반드시 사대부일 것이다. 전만추(田萬秋)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9월 7일 신사

지평(持平) 박치륭(朴致隆)을 갑산부(甲山府)로 귀양보냈다. 박치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가만히 보건대, 조정의 위에서 고식적이고 구차스러운 것을 좋은 계책으로 여기고 염치(廉恥)라는 한 절목은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병조 판서[騎判]의 구차스레 자리를 지키는 일과 이조 참판[亞銓]의 탄핵을 견뎌내는 일은 하나같이 어찌 염치가 이처럼 심하게 없습니까? 지난날 정광운(鄭廣運)이 다섯 차례 개청(啓請)한 것이 비록 금일의 긴급한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자기에게 해가 없는 일을 끝까지 수색하여서 그 책임을 막아보려는 계책으로 삼았던 것이니, 그 간고스럽고 구차스러운 태도가 스스로 그 가운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규휘(李奎徽)의 대관(臺官)의 관직은 이미 아무런 혐의스러워할 만한 단서도 없는데, 한밤중에 제수한 전지(傳旨)를 까닭없이 거만스럽게 어겼던 것은 별다른 의의도 없었던 것입니다. 신은 이 두 사람에게 이목(耳目)의 관직을 다시 제수할 수가 없다고 여깁니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 기사(耆社)에 들어가심은 우리 조정에 드물게 있는 성대한 일이므로, 팔역(八域)의 모든 생령들이 누구인들 즐거워하고 기뻐하면서 날뛰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런데 박성원(朴聖源)이 도로 중지할 것을 계청한 것은 그가 실로 대관(臺官)의 자리에 새로 들어가 일에 생소하고 경솔했던 것에 연유한 것입니다. 성상께서 그에게 절도(絶島)에 유배시키는 형률을 베푼 것은 다만 오리지 이 일 때문만이 아니라, 혹시 그가 당파의 습성에 협잡(挾雜)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이 너무나 애통하게 여기는 것은 언제나 성상께서 매우 노여워하실 때를 당하면, 여우나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 그 틈을 엿보아 슬그머니 말을 꺼내어 그 끔찍하고 간사한 계책을 꾸민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앞에서 조태상(趙台祥)이 있고 그 뒤에는 한사득(韓師得)이 있는데, 지금 또 권현(權賢)이란 자가 있어서 더욱 망칙한 짓을 심하게 합니다. 그 몸이 언관(言官)이 되어서 나라를 바로잡고 구원할 방책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돌연히 청대(請對)하기를 구하여 오로지 질투하고 아첨하려는 추태를 일삼는데, 그가 논하고 아뢰는 바도 또한 너무나 모호합니다. 그런데 박성원의 전계(前啓) 11조문을 하나같이 모두 정지시킨 것은 이것이 실로 전고(前古)에 있지 아니하였던 행동이었습니다. 대각(臺閣)에서 계청(啓請)하는 것을 정지하는 조처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그 사건의 체모가 어떠한지를 돌아보시지도 아니하고 까닭없이 경솔하게 정지하였으니, 단지 대각으로 하여금 임금의 명령을 순순히 받드는 자리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와 같이 해괴하고 수치스러운 사람을 대각의 자리에서 더러운 짓을 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권현을 사적(仕籍)에서 삭제시켜서 그로 하여금 사대부의 반열에 다시 섞이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밤중에 박치륭을 어전(御前)에 불러다가 그 당파의 습성이 무엄(無嚴)하다고 그를 엄하게 질책하였는데, 박치륭이 대답하기를,
"당파의 습성이란 것은 세력을 붙좇는다는 말입니다. 박성원은 특별히 하나의 작은 시골 출신으로서 세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신이 만약 당파를 위한다면 어찌 박성원에게 편당(偏黨)하겠습니까? 대각(臺閣)에서 계청(啓請)하는 것을 정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조금이라도 일을 뒤로 미루지 아니하고 대수롭지 않게 이를 정지하였기 때문에 논란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체직(遞職)하게 하였다. 박치륭이 말하기를,
"전지(傳旨)가 아직 하달되지 아니하였으니, 마음속에 품은 바를 말씀 드리고자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도 또한 왕첩(往牒)에 없었던 것이다."
하고, 드디어 명하여 투비(投畀)하게 하고 그 소장을 주게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잠깐 박치륭의 글 쓴 문투를 보니, 평상시에 돌연히 스스로 강개하게 생각하여 직기(直氣)로써 자임(自任)하는 자이다. 그 몸체는 대단히 작으면서도 당파를 위하는 마음은 그 몸체의 세 갑절이나 된다."
하였다. 그때 박성원과 정언유(鄭彦儒)가 서로 잇달아 쫓겨나 귀양을 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벌벌 떨고 아무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박치륭이 상소하여 권현을 배척하였고, 입대(入對)하여서도 또 버티면서 바른 소리를 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들리는 소문이 많았다.

 

임금이 승지에게 말하기를,
"동조(東朝)께 진연(進宴)할 적에 현빈(賢嬪)과 세자(世子)가 나란히 앉는 것이 그 관섭되는 바가 어떠할 것 같은가? 작(爵)을 바치는 예에서 빈궁(嬪宮)과 현빈궁(賢嬪宮)의 차례도 또한 장차 어떻게 두어야 하겠는가?"
하고, 이어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대신들에게 물어보게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가인(家人)의 예에서는 현빈궁이 윗자리에 있지만, 동궁이 행례할 적에는 이미 현빈궁의 뒤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빈궁이 행례할 적에는 또 현빈궁보다 먼저 있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성상의 하교와 같이 동궁과 빈궁이 한꺼번에 작을 올리고서 그리고 현빈궁도 또 곧 작을 올린다면, 이것은 빈궁이 동궁을 따라서 작을 드리는 것인데 현빈궁보다 먼저 하는 것이 아니므로 예에 조금 편안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만 동궁과 빈궁이 비록 한꺼번에 아울러 작을 바치더라도, 각각 작 하나씩을 바칠 것 같으면 좋을 것입니다. 혹시 작 하나를 둘이서 같이 올리면, 이것은 빈궁이 바치는 작이므로 끝내 궐전(闕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혹시 가인의 예를 써서 현빈궁이 먼저 작을 바치고 동궁이 뒤에 작을 바친다면, 오히려 좋을 것입니다. 현빈궁이 작을 바치는 것을 결코 동궁과 빈궁의 양쪽 작을 바치는 사이에 두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동궁은 종묘 사직을 이어받는 중요한 자리이므로 먼저 작을 바쳐야 하며, 빈궁은 옥체를 짝하는 예로 다음에 작을 바치게 하고, 그러한 다음에 현빈궁이 따로 작을 바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내연(內宴)은 마땅히 가인의 예를 써야 합니다. 그러나 동궁이 종묘 사직을 이어받는 중요한 자리이므로 작을 바치는 것이 현빈궁보다 먼저 하는 것이며, 빈궁은 동궁의 옥체를 짝하는 예로 한꺼번에 아울러 바치는 것입니다. 동조께서 각기 작을 받는다면, 마땅히 현빈궁이 작을 바치는 것이 비록 혹시 조금 뒤에 있을지라도 그것이 차례가 뒤바뀌었다고 볼 수가 없으며, 예절에도 방애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의조(儀曹)에서 의논한 바에 따라서 마련하도록 하라. 의주(儀註)는 내가 마땅히 내전(內殿)에서 참작하여 정하겠다."
하였다.

 

9월 8일 임오

윤득화(尹得和)를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9월 9일 계미

임금이 세자를 거느리고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서 선원전(璿源殿)을 배알하고, 이어서 기로소(耆老所)에 거둥하였다. 영수각(靈壽閣) 뜰의 동쪽에 나아가서 4배례를 행하고 영수각의 안으로 올라가서 서쪽으로 향하여 영내(楹內)에 앉고, 왕세자는 영외(楹外)에 앉았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기로 제신(耆老諸臣)·예관(禮官)·승지와 사관은 계단 위에서 모시었다. 기사(耆社) 당상관 신사철(申思喆)이 나아가서 영수각 안의 감실(龕室)을 열고,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과 예방 승지        조명리(趙明履)가 어첩(御帖)을 받들어 꿇어앉아 어전에 올리니, 임금이 친히 어첩에 ‘지행 순덕 영모 의열왕(至行純德英謨毅烈王)’이라고 썼다. 예관이 궤장(几杖)을 받들어 승지에게 주니, 승지가 이를 받아서 올렸다. 임금이 친히 이를 받아서 내시(內侍)에게 주고, 이어서 육상묘(毓祥廟)에 거둥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묘(私廟)에 가서 배알하는 것은 이것이 사묘를 영광스럽게 하는 예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옛날의 전장을 뒤따랐으므로, 감회와 기쁨이 한데 모였으니,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하정(下情)을 상달(上達)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하고, 어가가 돌아올 때에 광화문(光化門)에서 흥화문(興化門)에 이르러 경조(京兆)로 하여금 백성들의 상언(上言)을 받들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오늘 옛 마을로 다시 돌아온 것은 곧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풍패(豊沛)184)                  의 고사이다."
하고, 명하여 연추문계(延秋門契)의 8, 90세 노인들을 불러서 각기 그 나이와 구실[役] 이름을 물어보고, 해조로 하여금 쌀과 포목을 주게 하였다. 밤에 환궁하였다.

 

9월 10일 갑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서, 왕세자가 백관들을 거느리고 하례하는 것을 받았다. 드디어 교문(敎文)을 반포하기를,
"왕은 말하노라. 수역(壽域)185)  에서 교화를 뻗치니 하늘에서 기쁜 경사를 내려 주고, 영수각(靈壽閣)에서 그 아름다움을 짝하매 백성들과 더불어 경사를 함께 하노라. 대개 선무(先武)를 따르고자 하는 것이고, 감히 미문(彌文)을 일삼지는 아니하겠다. 생각건대, 나의 조그마한 말단의 자질(姿質)이 영장(靈長)의 업(業)을 외람되게 이어받아, 20년 동안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한갓 정사에만 부지런할 따름이었는데, 어찌 인수(仁壽)가 백성들보다 높음이 있겠는가? 춘추(春秋)가 1백 세의 반을 넘었으니, 그 모양 그대로의 용안(容顔)이 옛날과 같지 않다. 지나간 세월을 더듬어 뒤돌아보면서, 선조(先朝) 때에 남긴 규례를 감회 깊게 생각한다. 옛날 태조(太祖)께서 오래 사시어서 몸을 낮추어 기사(耆社)의 여러 언사(彦士)들과 나란히 하였는데, 영고(寧考)께서 이어받을 수 있어 전하여 소대(昭代)의 아름다운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보첩(寶帖)을 서로 받드신 것이 혹은 5, 6순 이후가 되어서 있었고 욕례(縟禮)를 치룬 경우가 심히 드물어서 겨우 3백 년 동안에 두번 보았을 뿐이다. 지난 사승(史乘)에서 드물게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소자(小子)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이를 바라겠는가? 서루(西樓)에서 남아 있는 필적의 기록을 읽으면서 즐겁게 흠모하는데, 동궁으로 어첩(御牒)의 제목을 쓰던 때를 생각하니, 감동되는 것이 있다. 종신[宗宰]의 상소에서는 고례(古例)를 끌어다가 말하였고 정신(廷臣)들도 부지런히 청하기를 힘써 선왕조의 일을 따르라고 힘써 권하였다. 기사(耆社)에 드는 나이[耆齡]에는 몇 살이 조금 모자라는데, 비록 예순을 바라보는 쉰한 살이라고는 하지만, 과인의 덕이 전대 열성(列聖)에 비할 때 실로 부끄러운데, 감히 두 선왕에 짝하여 세 사람이 되기를 기약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반드시 지나치게 겸손할 것도 없는데, 하물며 첨의(僉議)에서 끝내 굳이 안된다는 주장을 어렵게 여기는 데에야 말할 것도 없다. 목릉(穆陵)께서 만년에 남기신 유지(遺旨)는 오히려 나의 속마음을 감격시켰고, 송(宋)나라 현사(賢士)들 가운데 중년 나이로 기영회(耆英會)에 든 고사가 있다. 경편(瓊編)과 보묵(寶墨)에는 오히려 천일(天日)의 남아있는 빛을 생각하고, 영장(靈杖)과 채의(菜衣)에는 진신(搢紳)들의 옛 음영(吟咏)을 맛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전(眞殿)에 나아가서 먼저 배알(拜謁)하고 이에 수첩(壽牒)에 연달아 쓰노라. 그 중간에 어렵고 험한 일을 골고루 맛보았는데, 어찌 처음에 원하였던 것이 이와 같은 데에까지 미칠 줄 생각하였겠는가? 전후에 아름다운 경사가 서로 잇달으니, 거의 옛날의 천명(天命)이 지금부터 새롭게 되었다. 축수하는 술잔을 올려 즐거움을 받드니 진실로 날짜를 아끼는 마음을 펴게 되었고, 옻칠한 궤장(几杖)을 어루만지니 비창(悲愴)한 생각이 들어 당황하기가 새벽을 사이에 둔 것처럼 애통하다. 7묘(七廟)에 고유(告由)하여 밝은 제사를 지내고, 이를 《오례의(五禮儀)》에 기록하여 후세에 법칙을 남긴다. 은(殷)나라의 삼종(三宗)186)  이 왕위(王位)에 있은 햇수가 가장 장구하였던 것은 대개 삼가고 두려워하며 근엄하고 공손한 데에 연유되었고, 기주(箕疇)187)  에 있는 오복(五福)을 때로 모아서 펴 주었으니, 마땅히 왕도(王道)가 탕평(蕩平)하고 정직(正直)한 데에 힘쓸 것이다. 위(衛)나라 무공(武公)은 나이 90세가 넘었을 때에도 오히려 뭇 신하들에게 교대로 깨우쳐 줄 것을 바라며 학문의 공부에 부지런하였는데, 하물며 공자(孔子)같은 성인은 지천명(知天命)188)  의 나이에 감히 내가 쇠약해졌다는 탄식을 하지 않았던가? 거의 한마음으로 사리를 도모하여 즐거움을 사방의 신민들과 더불어 같이 기뻐하기를 바라노라. 이미 대정(大庭)에서 크게 부르짖고 이어서 은택을 온 세상에 내리노라. 이달 초10일 새벽 이전의 잡범(雜犯)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이를 면죄한다. 관직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더하게 하되, 자급이 다한 자는 대신 가자(加資)하게 하라. 아! 이극(貳極)189)  이 곁에 있는 것을 돌아보니, 이에 수령(壽齡)과 같이한 아름다움을 펴게 되었고, 여러 늙은이들과 함께 하게 되어 이에 오만하게 되었으니 걸언(乞言)190)  의 의리를 매우 바라노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자세히 알기를 바란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이종성(李宗城)이 지어서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45책 60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150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註 185] 수역(壽域) : 성세(盛世)를 이름.[註 186] 삼종(三宗) : 은(殷)나라의 세 임금을 이름. 즉 태갑(太甲:太宗)은 즉위 초에 방탕하다가 개과 천선하여 30여 년의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태무(太武:中宗)는 재위 75년, 무정(武丁:高宗)은 재위 59년 동안 왕업(王業)을 부흥시켰음.[註 187] 기주(箕疇) : 기자(箕子)의 홍범 구주(洪範九疇).[註 188] 지천명(知天命) : 쉰살.[註 189] 이극(貳極) : 왕세자.[註 190] 걸언(乞言) : 노인에게 좋은 가르침을 구함.

 

임금이 명하여 종신(宗臣) 가운데 나이 70세, 조관(朝官) 4품 이상 가운데 나이 70세, 5품 이하와 사서인(士庶人) 가운데 나이 80세인 사람은 모두 가자(加資)하되,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상은 자품을 바꾸지 말게 하였으니, 대개 기해년191)  의 고례(古例)를 따른 것이다.

 

임금이 기사(耆社)의 여러 대신들을 경현당(景賢堂)에서 인견하고 선온(宣醞)하며, 친히 지은 칠언시(七言詩) 한 구절에 대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이에 화답해서 글을 올리게 하였다. 이어서 은병(銀甁) 한 벌을 내리면서 말하기를,
"기해년에 성고(聖考)께서 이미 은배(銀杯)를 내려 주셨는데, 지금 내가 또 은병을 내리니, 이것을 머물러 두어 기사에서 간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기사의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고사를 뒤따르시어 기첩(耆帖)에 이름을 썼으니, 마땅히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편찬 기록하게 하여 먼 후세에 보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에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지어서 올리게 한다면, 반드시 찬양하는 말이 많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어첩의 자서문(自序文)을 친히 지었다.

 

9월 11일 을유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니, 세자가 곁에서 모시고 앉았다. 임금이 친히 권학문(勸學文)을 지어서 세자 빈객(世子賓客) 김약로(金若魯)로 하여금 세자의 앞에서 암송하여 설명하게 하였다. 세자에게 명하여 어제(御製)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편이라는 제목의 한 편을 읽게 하고, 하교하기를,
"어제 하례를 받고 오늘 강경(講經)을 여는 것은 곧 몸소 원량(元良)을 가르치려는 뜻이다."
하였다.

 

9월 12일 병술

사옹원(司饔院)에서 진연(進宴)할 때의 차비(差備)가 부족하다고 하여, 제조(提調) 4인과 부제조(副提調) 2인을 더하여 차출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것도 또한 구례였다.

 

지평 이사조(李師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박성원(朴聖源)의 계청은 무엄하기가 심하였으니, 오로지 엄하게 처분하기를 더하여야 마땅할 뿐인데, 어찌 이것 때문에 고뇌하시게 되어서 ‘차마 귀로 들을 수가 없다.’는 하교를 내리시기에 이르십니까? 그날 조정의 신하들은 진실로 초조하고 황급하게 입대(入對)하여 성상께 빨리 반한(反汗)하도록 청하는 것이 마땅할 것인데, 자기집에 번듯이 드러누워서 뻔뻔스럽게 놀라거나 움직이지도 아니하였으니, 입시(入侍)하지 아니한 중재(重宰)들을 모두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몇년 동안 고심하시는 것은 오로지 당파를 조정하려는 데에 있는데, 근래의 정주(政注)192)  가 대단히 편파적인 데에 관섭되어 국자감(國子監)에서 3망(三望)을 새로 허통(許通)시켜 순전히 등용하였으니, 그 신칙하고 권려하는 방도에 있어서 견책이 없을 수가 없겠습니다."
하니, 말하기를,
"그 ‘순(純)’ 자를 쓰는 것은 의도가 대개 당파에 협잡(挾雜)하려는 것이다."
하고,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장령 윤광천(尹光天)이 상소하기를,
"임금의 의지를 거스르는 자에게 위엄과 노여움을 문득 더하시니, 대소 신료들이 창황(蒼黃)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며, 감히 임금을 바로잡고 구원하는 한 마디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데, 지금부터 잇달아 이것을 경계하소서. 지난날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이 서로 잇달아 위패(違牌)하고 교묘하게 말을 꾸며서 구차스레 책임을 면한 것이 도피하여 숨거나 괴이하게 흩어졌던 자와 같음이 있으니, 모두 마땅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이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강원도 감사 권혁(權爀)이 본도에서 양전(量田)하는 일을 함부로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여 상소하고 사직(辭職)하기를,
"대개 본도의 토지는 척박하기가 다른 도에 비할 바가 못되는데, 회양부(淮陽府) 등 열 고을은 돌이 많고 토질이 메말라 곡식이 나지 않음이 또한 전체 도에서 가장 심합니다. 그 중에서 촌락(村落)의 근처로 분양(糞壤)이 미친 데에는 혹시 비옥하여 원전(元田)에 가합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이것은 10분의 1, 1백 분의 1 밖에 되지 않고, 그 나머지는 모두 척박한 하전(下田)입니다. 이른바 하루갈이라 하는 땅을 시험삼아 측량하여 산정한다면, 마치 10여 부(負)193)  가 되는 것과 같지만, 그 곡식의 소출은 1곡(斛)에도 차지 않습니다. 비록 그 땅에 지력(地力)을 다하도록 하더라도 그 조세를 충당하기에 부족하다면, 한번 타량(打量)한 뒤에는 그 형세가 반드시 땅을 내버려서 황폐화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일찍이 만력(萬曆)194) 계묘년195)  에 타량하여 양전안(量田案)을 만든 이후에도 끝내 법과 같이 부세를 부과할 수가 없었으며, 단지 화전(火田)의 예에 의하여 조세를 내게 하였을 뿐이었는데, 그대로 인순(因循)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 이미 2백 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 뒤에 갑자년196)  에 또 개량(改量)하는 정치를 시행하다가 폐지하고 실행하지 아니하였으며, 기축년197)  에 관동(關東) 지방의 서쪽 지역을 모두 타량하였을 때에도 이 열
고을은 도신(道臣) 고 봉조하(奉朝賀) 이태좌(李台佐)가 장문(狀聞)하여 자세히 아뢰었기 때문에 또 중간 철폐하고 실행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전자의 일들을 헤아려 보더라도 이미 이와 같이 증명되는 것인데, 그 형세상 끝내 부득이한 점이 있는데도 어찌 그대로 두지 않습니까? 지금의 개량(改量)하자고 의논하는 자들은 양단(兩端)이 있습니다. 전 감사 조명겸(趙明謙)의 의논에서는 양전(量田)하는 상법(堂法)을 말하였는데, 그 말을 들어보면 비록 쉽게 실행할 것 같으나 사정의 방애가 되는 조건들은 위에서 진술한 바와 같으며, 전 부사 구택규(具宅奎)의 상소에서 타량하는 법 가운데 조금 신축성을 더하여 요컨대 백성들을 편하게 하려는 계획을 하였으나, 일이 상법의 바깥에 있어서 또한 실행할 수가 없는 점이 있습니다. 의논하는 자가 또 말하기를, ‘지금 이번에 개량하라는 명령은 본래 위에 이익되는 뜻이 없고 또 본도에서 인삼의 구실[蔘役]은 또 다른 도에는 없는 것이지만, 모두 백성들의 결수(結數)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약 개량한 후에 하나같이 양전척(量田尺)에 따라서 전안을 만들어 두어 그 중에서 원전은 부세를 내도록 만든다면 실제 법은 대체(大體)를 지키게 되어 총수(總數)가 금일보다 넘지 않을 것이며, 그 속전(續田)을 행용(行用)한다면 이것을 해당 고을에 소속시키고 지금 각 고을에서 상세히 정한 숫자대로, 타량한 뒤에 남아도는 결수에다 군포(軍布)를 고루 징수하여 인삼 구실의 수요로 삼게 하되, 혹 지출과 수입의 많고 적은 것이 고르지 못한 것은 정리하여 바로잡고 헤아려 처리하여 분명하게 하도록 힘써서 백성들로 하여금 조세를 더 내는 일이 없게 하고 공용(公用)에 부족함이 없게 한다면, 전안을 만들 수가 있을 것이고, 경계(經界)를 바로잡을 수가 있을 것이며, 부세를 불리는 폐단도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이 한다면 공사(公私)에 방해됨이 없을 것이나 또 이것이 상법의 밖에 있으므로 신도 또한 그것이 반드시 행하여질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하지 못하겠습니다. 조정에서 설혹 이것을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만약 조정에 들어가서 의논하는 자가 있어 그 뒤에 가서 그 명령을 반대로 내리고 다른 고을과 똑같이 보아 일상의 부세를 부과한다면, 이들 열 고을의 전정(田政)은 장차 더욱 크게 허물어지고 백성들은 소생하지 못하게 되어 후일의 무궁한 걱정이 될 것이니, 이것이 신하가 크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마땅히 대신에게 물어보고 하교하겠다."
하였다.

 

9월 13일 정해

예조에서 임금의 탄일(誕日)에 하례(賀禮)를 올릴 것을 품신하니, 임금이 명하여 임시로 정지하게 하였다.

 

홍문관 제학 조관빈(趙觀彬)에게 명하여 9일제(九日製)를 반궁(泮宮)에서 설시하게 하였는데, 박창원(朴昌源)·임석헌(林錫憲) 등 7인을 시취하였다. 박창원과 임석헌에게는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198)  하게 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차등 있게 급분(給分)199)  하라 명하였다. 처음에 고관(考官)이 임석헌의 지은 글을 제1등의 자리에 두고 박창원을 제2등의 자리에 두었는데, 임금이 어필로써 일[一] 자를 박창원의 시원에다 썼었다. 개탁(開坼)하여 방방(放榜)하게 되자, 모두 급제를 주었다. 박창원은 곧 화평옹주(和平翁主) 부마인 박명원(朴明源)의 형이었다. 절일제(節日製)에서 두 사람에게 급제를 주는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임석헌은 일찍이 임술년200)  에 임금이 시학(視學)하였을 때에는 경생(經生)으로서 입시하니, 임금이 마음으로 그를 가상하게 여겼었는데, 세마(洗馬)가 되기에 미쳐서는 특별히 소견하고 《소학(小學)》 일부를 내려 주면서 세자를 보도(輔導)하는 책임을 힘쓰도록 하였으므로, 박성원의 상소에서 그를 배척한 것이 반드시 여기에서 연유되지 아니한 바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때에 이르러 등제(登第)하니,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임석헌이 공연히 박성원에게 공박을 당하였으니, 지금 다시 계방(桂坊)의 직임에 있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였다.

 

9월 14일 무자

사헌부에서 전계(前啓)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시강원(侍講院)에서 아뢰기를,
"왕세자께서 소대(召對)하실 책자를 사부(師傅)들에게 물었더니, 모두 《사략(史略)》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좋다고 하였다.

 

9월 15일 기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정실(鄭實)이 노모가 있다고 하여 그를 용서하여 주시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명하여 괴산군(槐山郡)으로 양이(量移)하게 하여 그 어미와 만나보도록 하였다. 김재로가 또 윤심형(尹心衡)을 내직으로 옮기자고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진상(金鎭商)·이진망(李眞望)처럼 출사(出仕)하지 아니하였다면 가할 것이겠으나 윤심형과 이태중(李台重)은 오로지 당론(黨論)만을 내었으니, 반드시 대훈(大訓)에 불만스러워서 그리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만약 작록(爵祿)을 사양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혹시 난시(亂時)를 당한다면 절개를 지키고 정의를 위하여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니, 비록 박성원 같은 부류일지라도 그 강직하고 과단한 것은 또한 취할 만함이 있으며, 윤심형과 이태중의 무리들이 그 작록을 사양한 한 가지 절목에서는 신 등이 앞으로 나아갈 줄만을 알고 뒤로 물러설 줄을 알지 못하는 것에 비교하면 또한 고상하다고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김재로가 평안 감사 김시형(金始炯)의 장주(狀奏)에 의하여 의주(義州)·용천(龍川)·철산(鐵山) 등 세 고을의 환상미(還上米)의 조세(租稅)는 절반을 대신 바쳤다가 내년 가을을 기다려서 본색(本色)에 도로 채워 놓도록 하고, 시노비(寺奴婢)와 내노비(內奴婢)가 신공(身貢)으로 바치는 면주(綿紬)는 3분의 1을 감하여 바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9월 16일 경인

월식(月食)하였다. 이보다 앞서 영관상감사(領觀象監事)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금번의 월식은 일분 정도 먹히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이것을 재이(災異)로 여기지도 아니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구식(救食)201)  하는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구식하는 것도 또한 친림(親臨)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또 임금이 금군(禁軍)에게 명하여 구례에 의하여 회자(回咨)를 가지고 용만부(龍灣府)로 내려 가서, 중국의 봉황성(鳳凰城)에 이를 전하게 하였다.

 

대신과 찬집청(簒輯廳〔纂輯廳〕        )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사조(李師祚)와 박치륭(朴致隆)은 사건이 비록 다르지만 마음은 한 가지 이니, 세상의 도리가 그러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고 상신(相臣) 최규서(崔奎瑞)가 일찍이 ‘홍의(弘毅)’ 두 글자를 가지고 임금께 앙면(仰勉) 하였었는데, 노성(老成)이 비록 죽었지만 그 말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비록 보통 재상들은 오히려, ‘세말의 초(醋)를 코로 빨아들인다.’고 말하였지마는, 인군(人君)이야 하루에 만기(萬幾)202)                  를 보시는 동안 어찌 뜻에 어긋나는 일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과연 마음이 넓지 못한 병폐가 있다. 내가 만약 ‘홍의(弘毅)’ 두 글자에서 서로 상반된 마음을 가졌다면 반드시 지금까지 참고 견디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몸은 상반된 마음을 가졌다면 반드시 지금까지 참고 견디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몸은 천승지국(千乘之國)의 임금이 되었지만, 그 신하들로 하여금 끝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경지[陶之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은 나의 부끄러운 점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성상께서 이들을 어거하시는 데에 그 방도를 얻지 못했을 뿐입니다. 혹은 형벌과 상을 밝게 하지 못하거나, 혹은 어전에서 말하는 자를 믿지 못하거나, 혹은 그가 당파(黨派)에 마음을 두지 않았는데도 성상께서 깊이 살펴보시어 그 실정을 얻지 못하여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로지 병든 곳을 깊이 살펴서 힘을 다하여 폐단을 제거하여 없애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은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반드시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드신다니, 나라를 근심하고 정사에 부지런한 마음을 누구인들 흠모하고 감탄하지 아니하겠습니까마는, 옥체를 이양(頤養)하는 방도가 아닐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기가 이에 모이지만 나는 피로한 줄도 모르겠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한권(翰圈)203)  의 법을 처음의 절목에 의하여 차점(次點) 이상을 취하게 하였다.

 

9월 17일 신묘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찬집청(纂輯廳)의 당상관 구택규(具宅奎)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수교(受敎)한 것이 대단히 번잡한 것은 까닭이 있어 그러할 것입니다. 묘당(廟堂)의 신하들이 일찍이 《대전(大典)》의 본의를 깊이 궁구하지 아니하고 임시하여 의견을 건백하므로 뜻밖에 넓고 좁은 의견이 많은데, 만약 혹시라도 임금의 윤허를 받으면 문득 수교를 기재하게 되니, 수교가 많은 것은 그 형세상 진실로 그러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대전》을 상고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주달(奏達)하는 자는 마땅히 죄를 주거나 금지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기고, 비국과 승정원에 명하여 이를 고찰하게 하였으며, 그 본전(本典)을 고찰하지 아니하고 경솔하게 먼저 품지한 것은 또 범례(凡例)로 기재하라고 명하였다.

 

9월 18일 임진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였다.

 

9월 20일 갑오

김유경(金有慶)을 대사헌으로, 윤봉구(尹鳳九)를 집의로, 조돈(趙暾)을 헌납으로, 이수덕(李壽德)을 지평으로, 정기안(鄭基安)을 정언으로, 조명정(趙明鼎)을 교리로, 김상복(金相福)을 수찬으로,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를 동지사 겸 사은 정사(冬至使兼謝恩正使)로 삼았다.

 

종부시(宗簿寺)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기사(耆社)의 큰 경사를 《국조어첩(國朝御牒)》과 《보략(譜略)》 중에 기록하여 넣는데,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을 용납하지 말고 마땅히 빨리 관청을 설치하여 수정(修正)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9월 21일 을미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으며,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문과(文科)의 전시(殿試)를 설치하여 박창원(朴昌源) 등 36인을 시취(試取)하였다. 바야흐로 명단을 개탁(開坼)하려는데, 갑자기 우르르 쾅쾅하는 하나의 천둥소리가 매우 빠르니, 임금의 얼굴색이 편안하지 못한 것이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9월 22일 병신

정석오(鄭錫五)를 판의금부사로, 홍득후(洪得厚)를 장령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천둥의 재이(災異) 때문에 차자(箚子)를 올려서 책면(策免)하기를 원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승정원과 홍문관에서도 또한 계사와 차자로써 진계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장령 윤광천(尹光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 증 영의정 성삼문(成三問)은 마땅히 그의 같은 종중(宗中)에서 가장 가까운 자를 취하여서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여야 합니다. 고 참봉 김가근(金可近)에게는 특별히 정려(旌閭)하라는 명을 내리시어 교화(敎化)를 세우도록 하소서. 최대윤(崔大潤)은 마땅히 괴원(槐院)의 예에 의하여 조용(調用)하여야 하는데, 분관(分館)할 때의 해당 관원을 논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진연(進宴)하는 일이 박두하는데, 큰 일이 서로 겹치니, 정시(庭試)의 초시(初試)를 우선 정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판의금부사 윤양래(尹陽來)는 승강이질하다가 공사(公事)를 행하지 못하여 사유령(赦宥令)을 지체하기에 이르렀으니, 즉시 변통(變通)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성삼문과 김가근의 일은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정시의 초시를 가볍게 정지할 수가 없다. 그 나머지는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9월 23일 정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천둥의 재이(災異) 때문에 면직할 것을 원하니, 임금이 위로하여 유시하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송인명이 언로(言路)를 막아버리는 폐단을 논하여 말하기를,
"지금 말을 하다가 죄를 받은 자들이 많이 사유(赦宥)를 입지 못하였는데, 마땅히 그들에게 너그러운 사유를 더하여야 합니다."
하고, 김재로가 말하기를,
"금일에 대관(臺官)이 되는 것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말이 상궁(上躬)에 관계되면 분수를 범한 죄로 돌리며, 의논이 자기와 다르게 되면 당파의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저와 같은 당의 사람을 끌어당겨 논하면 그 자취를 덮어주려 한다고 말하며, 피차의 사람들을 아울러 논하면 이를 호대(互對)한다고 말하니, 지금의 대관(臺官)이 또한 어렵지 아니하겠습니까?"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대불경(大不敬)이라는 세 글자를 전하께서 언제나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급암(汲黯)204)  과 하후승(夏侯勝)205)  과 같은 무리는 그 말에서 직절(直截)하였던 것이 많았는데, 만약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오늘날의 세상에 살게 한다면, 그들인들 대불경의 죄목을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김재로가 말하기를,
"인조조(仁祖朝)에 심대부(沈大孚)가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제택(第宅)의 일을 논한 상소에서 말이 임금에게 저촉되고 간범되는 것이 많았었지만, 그에게 큰 죄를 주지 아니하였던 것에서 간언(諫言)을 용납하였던 인조 대왕의 성덕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은 그 소장을 베껴서 썼는데, 감히 이것을 올려서 성상의 예람(睿覽)에 대비하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것을 받아서 읽어보고 말하기를,
"경이 풍자하려는 뜻이 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
하였다. 김재로와 송인명은 그 뜻이 박성원을 구해서 풀어주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임금은 이를 받아들일 뜻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어서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지평 이수덕(李壽德)이 나아와서 말하기를,
"안자(顔子)는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아니하고 허물을 두 번 되풀이하지 아니하였는데, 성상께서는 언제나 갑에게 진노(震怒)한 것을 을에게 옮기는 병폐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일을 말하는 것인가?"
하자, 이수덕이 말하기를,
"조중회(趙重晦)의 일로 인하여 상하의 언로가 크게 막힌 지 몇 개월에 이르렀는데, 3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하나같이 모두 죄를 받았습니다. 김유(金濰)와 김시위(金始煒) 등은 이미 의망(擬望)하여 낙점(落點)을 받았었는데, 다른 일로 인하여 다시 검의(檢擬)한 전관(銓官)을 죄주었으니, 이것이 갑에게 진노하여 을에게 옮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얼굴색이 변하여서 말하기를,
"네가 김유와 김시위를 구원하고자 하는가?"
하자, 이수덕이 물러가서 엎드리고, 또한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진연청(進宴廳)에 하교하기를,
"삼가고 두려워하면서 덕을 닦고 반성하는 때에 절약(節約)하는 것이 마땅하다. 외연(外宴)에서는 대탁(大卓)의 대선(大膳)과 소선(小膳)을 특별히 감하여 줄이도록 하고, 내연에서는 동조(東朝)께 바치는 것 이외에는 대전과 중전에는 대탁의 대선을 감하며, 세자 이하에게는 소선을 감하여서 나의 스스로 비용을 줄이고자 힘쓰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불타 버린 뚝섬[纛島]의 강촌(江村) 1백 수십 호에 휼전(恤典)을 베풀어서 백목전(白木廛)을 감하고, 실화(失火)한 사람이 받을 호조목(戶曹木)은 호조·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응당 내려 주어야 할 값을 3년까지 기한하여 미리 내려 주어서 진휼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의 말을 따른 것이다.

 

임금이 명하여 관서(關西) 지방에서 재이(災異)를 당한 고을에 구(舊) 신포(身布)와 구 환곡(還穀)을 차등 있게 정지하라고 명하였는데, 도신(道臣)이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병조 판서 정석오(鄭錫五)와 이조 참판 이익정(李益炡)을 면직하고, 서종옥(徐宗玉)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9월 24일 무술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민계(閔堦)를 사간으로, 어석윤(角錫胤)과 김상철(金尙喆)을 수찬으로, 심악(沈)을 발탁하여 동래 부사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직(司直)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였는데, 그 첫머리에서 겨울철에 천둥한 것으로써 진계하고 또 이르기를,
"우리 군왕의 거룩하신 덕은 한(漢)나라와 당(唐)나라보다 훨씬 뛰어나시니, 백세(百世)의 뒤에 가서 백세(百世)의 왕을 헤아려 본다고 하더라도, 확실한 자기 논리를 가진 선비들은 거의 우리 임금을 삼대(三代)의 임금보다 더 높다고 하겠으나, 오직 한 가지 일만은 태평 성대에 커다란 흠이 되니, 대각(臺閣)이 배척당하여 버림받고 언로(言路)가 막혀서 통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아! 당파(黨派)의 습성이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편파적인 말들이 그 사이에서 만들어지므로, 전후로 대각(臺閣)이라는 명칭을 가진 자들이 입을 다물고 머리를 꾸벅거리며 서로 관망만 하고 유배당한 일이 서로 잇따랐으니, 이는 모두 여러 신하들이 나라를 저버린 소치인데, 또한 어찌 청사(靑史)에 빛나는 아름다운 일이 되겠습니까? 의원이 병을 고치는 데에 있어서 약성이 높은 약제르 투여하면, 병을 반드시 치료하지도 못할 뿐더러 손상시키는 것은 몸의 원기(元氣)입니다. 전하께서 다스리려는 것은 당파의 습성이지만 대각의 기세가 또한 어찌 이것으로 인하여 여지없이 위축되고 소멸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천하 후세에서 전하의 고심(苦心)하신 일을 알지 못하고 만에 하나 그 자취를 잡아내어 이를 논하는 자들이 전하에게 대각을 너무 야박하게 대우하였다고 말한다면, 어찌 지극한 덕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언론을 징계하시니, 설사 후일에 조정에서 크게 권세를 잡고 농간을 부리는 자가 있더라도 누가 기꺼이 국가를 위해서 이것을 말하겠습니까? 유식한 선비들이 남몰래 근심하고 남몰래 통탄한 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박성원(朴聖源)의 사건이 또 터졌는데, 그의 망언(妄言)이 어떠한지를 논할 것 없이 언관(言官)을 가두고 귀양보낸 것은 이미 청조(淸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니,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성인(聖人)이 성인(聖人)다운 까닭은 그가 하늘과 땅 같은 도량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오활(迂闊)하고 괴탄(怪誕)한 말일지라도 전하께서 일소(一笑)에 붙이시고 그에게 죄를 주지 않는다면, 어찌 하늘과 땅의 커다란 도량보다 빛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은 박성원과 면목을 서로 알지 못하고, 그 명성과 소문을 서로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서북 지방의 고을인 은산(殷山)에서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은산 사람들 가운데 혹 와서 신을 보는 자가 있어서, 박성원이 은산 현감(殷山縣監)이었을 때에 정치를 한 것이 깨끗하고 부지런하였으며 공사(公事)의 여가에는 책을 읽었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신은 마음속으로 그를 기억하였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문득 박성원의 사람됨을 물었더니 그가 진실로 곤궁하지만 학문에 부지런하여 숭상할 만한 점이 많이 있다고 모두들 말합니다. 그가 외따로 떨어진 누추한 시골 구석에 살아서 사체를 알지 못하는 것 같은 것은 아마도 심히 형벌을 내릴 것이 못된다고 여깁니다. 소외되고 비천한 선비는 고귀한 근신(近臣)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만약 그로 하여금 절해(絶海)의 풍토병[瘴癘]이 많은 땅에서 병들어 죽게 한다면, 이처럼 전에 없었던 나라의 경사를 당하여 화기(和氣)를 맞아들이는 방도가 심히 못될 것입니다. 또 듣건대, 박성원에게는 늙은 어미가 있다 하니, 정리가 가엾고 불쌍합니다. 대저 유우석(劉禹錫)이 범죄를 짓자, 배도(裵度)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위로 태후(太后)를 받들고 계신데 유우석에게도 어미가 있으니, 마땅히 불쌍하게 여겨야 합니다.’206)  라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전하의 석류(錫類)207)  하신 어짐으로써 유독 한 사람의 박성원을 천지가 화합(和合)하는 가운데에 용납할 수가 없겠습니까? 박치륭(朴致隆)에 대해서는 말을 다하지 아니하였다고 정광운(鄭廣運)을 질책한 것을 가지고서 말을 다하였다고 자임(自任)하는 자와 같이 여김이 있는 듯하니, 그가 언론을 다하려고 했다면 말을 할 만한 것을 어찌 한정할 수 있기에 도리어 몇 마디 안되는 말을 주어 모아서 두 전조(銓曹)를 치우치게 부추김에 있어 여기에서 말을 다하고 말겠습니까? 이것은 적흑자(翟黑子)208)  를 저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이 매우 명백하고 솔직하지는 못하지만, 삼가 생각건대 그 상소가 바야흐로 처분을 엄하게 내린 때에 들어갔고 연대(筵對)가 주상을 가까이 모신 자리에서 왔으니, 또한 뇌정(雷霆)이 진노하거나 태산(泰山)이 위압한다고 이를 만하다 하겠습니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성낸 개구리에게도 용사(勇士)를 구하였다고 하는데, 신은 성주(聖主)께서 언관이 나와 간하기를 바라는 정성이 어찌 백왕(伯王) 용사를 구하던 것뿐만이겠습니까마는, 박치륭 같은 자도 또한 성낸 한 마리 개구리의 숫자에 채워질까 염려스럽습니다. 옛날에 옥(獄)을 잘 다스린 자는 그 죽을 가운데에서도 반드시 살 수가 있는 방도를 구하여 얻으면 기뻐하였다 하는데, 전하께서 말을 들으실 적에는 반드시 이러한 방법을 옮겨다가 적용하시어 여러 신하들이 나와서 말할 적에 그 죄를 줄 수 있는 가운데에서 반드시 용서할 수 있는 단서를 구하여 얻어지면 용서해 주고 반복하여 다시 이를 구하여도 얻지 못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죄를 준다면, 하나같이 천리(天理)를 따르게 되어 처분이 적당함을 얻을 것입니다. 인주(人主)의 자리가 지극히 높고 그 위엄이 지극히 엄하므로 범한 것이 있을까봐 걱정하지 않지만, 언제나 범하지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에 건도(乾道)에서는 이를 ‘지나치다[亢]’라고 경계하며, 신도(臣道)에서는 이를 ‘범(犯)한다’라고 권면하였으니, 성인의 뜻이 이처럼 깊은 것입니다. 삼가 더군다나 춘궁 저하(春宮邸下)께서 보통보다 지혜가 뛰어난 자질로써 풍성하고 형통하는 세상을 맞이하였으니, 전하께서 자손에게 편안함을 끼쳐주는 계책은 겸손하고 관대한 것을 제일 첫번째 주의로 삼으시는 것이 마땅할 것이며, 지나치게 높고 대단히 급하게 하는 방도를 보이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으나, 이것을 능히 채용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이제부터 모든 장주(章奏)와 문서(文書) 가운데에 ‘천(天)’ 자는 한 자씩 간격을 두어서 쓰게 하였는데, 이때 연신(筵臣) 중에 건원릉(健元陵)의 비문에서 천(天) 자를 극행(極行)에 썼다고 앙진(仰陳)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임금이 이러한 명을 내렸다.

 

9월 28일 임인

정배 죄인 이목(李穆)이 배소(配所)에서 도망쳐 돌아오자 도신(道臣)이 장계하여 그 죄를 청하니, 붙잡아다가 처리하라 명하였다. 이목은 종실 파춘수(坡春守)였다.

 

김광세(金光世)를 대사간으로, 송성명(宋成命)을 형조 판서로, 조영로(趙榮魯)를 승지로, 서지수(徐志修)를 교리로 삼았다.

 

9월 29일 계묘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하례를 드리니,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의 탄식일이었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판위(版位)에 나아가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치사관(致詞官)이 임금의 앞에 나아가 북향하여 축사 읽기를 마치자,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함(函)을 받들어서 내시에게 건네주고, 제용감(濟用監)의 관원은 예물함을 받들어서 내시에게 건네 주었다. 임금이 모두 꿇어앉아서 이를 받아 예방 승지(禮房承旨)에게 명하여 차비문(差備門) 밖에다 바치도록 하였다. 승지가 복명(復命)하자, 비로소 내전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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