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0권, 영조 20년 1744년 10월

싸라리리 2025. 9. 27.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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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갑진

상의원(尙衣院)에서 가포(價布)209)  를 궐봉(闕封)하였다고 하여 길주 목사(吉州牧使) 신사언(申思彦)을 파직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2일 을사

식년(式年) 문과와 무과를 방방(放榜)하였다.

 

10월 3일 병오

예당(禮堂)을 보내어 함경도에 있는 여러 능침전(陵寢殿)을 봉심(奉審)하게 하니, 5년마다 한 번씩 봉심하는 것이 관례였다.

 

사간 민계(閔堦)가 상소하여 천둥의 재이(災異)로써 진계하고, 또 말하기를,
"각 군문(軍門)의 책응(策應)에서 점점 줄어 없어지는 것을 막고 있는데, 그것을 혁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10월 4일 정미

임금이 대왕 대비전에 진연(進宴)하였는데, 진연이 끝나자 진연청(進宴廳)에 하교하기를,
"금번에 진연하는 것은 대개 기사(耆社)를 따르려는 예에서 나온 것이다. 이미 궤장(几杖)을 받았으니, 동조(東朝)께서 즐거워 하시도록 이바지하기 위하여 앞에다 궤장을 세워 놓고 이 가사(歌詞)를 노래하여 이에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알도록 하겠다."
하였다. 그 가사에 이르기를,
"보각(寶閣)에 우러러 절함이여
궤장(几杖)을 받아 왔다네.
동조를 받들어 즐겁게 함이여
예연(禮宴)을 크게 열었도다.
강릉(崗陵)처럼 오래 살기를 송축함이여
만수(萬壽)를 비는 잔을 드리도다."
하였다.

 

10월 5일 무신

해조(該曹)에 명하여 군사 가운데 얇은 옷을 입은 자에게 유의(襦衣)를 나누어 주었는데, 날씨가 추워졌기 때문이었다.

 

10월 6일 기유

정석오(鄭錫五)를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0월 7일 경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서 신하들의 진연(進宴)을 받았는데, 종신(宗臣)의 도정(都正) 이상과 의빈(儀賓),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기구(耆舊)의 여러 신하들, 친공신(親功臣)과 문신 정2품 이상에서는 실직·군함(軍銜)을 논하지 아니하고, 종2품 이상에서부터 당상관 정3품에 이르기까지는 바야흐로 실직에 있는 자와 비록 군함에 있을지라도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들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기백(畿伯)·승지·한주(翰注)·옥서(玉署)210)                  ·미원(薇垣)211)                  ·백부(柏府)212)                  ·춘방(春坊)213)                  에서는 바야흐로 시임에 있는 자들과 음관(蔭官)과 무신 2품 이상에서는 시임 장신(將臣)·실직 총관(摠管)인 사람과 비록 군함에 있을지라도 일찍이 장수의 직임을 지낸 자와 일찍이 동반(東班)의 실직 곤수(閫帥)를 거친 자 가운데 나이 70세 이상인 자들은 모두 참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일의 일은 즐거움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다만 그 날만을 점치고, 그 즉시 행하라.’ 하였다."
하였다. 왕세자가 첫번째 술잔을 올렸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판중추 부사 김흥경(興慶)·종신(宗臣)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호조 판서        김약로(金若魯)·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가 차례에 따라 의식대로 술잔을 올렸다. 임금이 기사(耆社)의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연회를 마치면 마땅히 옛날에 임금이 신하들에게 연회를 내려 주던 관례에 의하여 전전악(殿前樂)을 내려 주고, 의당 그 남은 찬(饌)을 가지고 본사(本司)에 회연(回宴)하도록 하라."
하고, 음식 한 쟁반을 봉조하(奉朝賀)        이의현(李宜顯)의 집에 보내라 명하니, 그가 노병으로 연회에 참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대탁(大卓)을 거두자, 입직한 군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도록 명하고, 연회에 참석한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주량에 따라서 술을 마시게 하였다. 또 서울과 외방의 서민(庶民)들 가운데 나이 80세 이상인 사람들에게 차등 있게 미곡과 고기를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나아와서 말하기를,
"《시경》의 소아편(小雅篇) 녹명장(鹿鳴章)은 곧 뭇 신하들을 연향(燕饗)하는 악장인데, 거기에 말하기를, ‘내게 주행(周行)을 보여 주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주행이란 것은 큰 도[大道]를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성왕(聖王)들이 연락(燕樂)할 즈음을 다하여 도움을 구하는 뜻이 이와 같이 간절하였습니다. 금일의 연회는 곧 성상께서 기사(耆社)에 들어가시는 초기로 기구(耆舊)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연석에서 주상을 모셨는데, 옛날에도 양로(養老)하고 걸언(乞言)하던 예가 있었으니, 여러 노신들을 불러서 노성(老成)한 신하들의 변론을 물어본다면 더욱 성덕(聖德)에 빛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고, 여러 노신을 선소(宣召)하라 명하자, 기사의 당상관 신사철(申思喆)·이진기(李震箕)·윤양래(尹陽來)·정수기(鄭壽期)·이성룡(李聖龍)·조석명(趙錫命) 등이 차례로 나아와서 부복(俯伏)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경들을 부른 것은 옛날 선왕(先王)들이 걸언(乞言)한 규범을 따르고자 함이니, 경들은 각기 말하도록 하라."
하므로, 신사철이 말하기를,
"금일에 나라의 형세와 인심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성산(聖算)이 점차 높아지셨다고 하여 갑자기 정사에 싫증이 나고 고달파 하는 뜻을 내시지 말고 분발하시는 것이 곧 노신의 바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어찌 힘쓰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윤양래가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인(仁)·덕(德)과 공명(公明)을 아울러 가지셨는데, 오로지 이 세 가지에 더 면려(勉勵)하시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고, 이성룡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오늘날 거행하신 일은 위로 자성(慈聖)의 뜻을 본받으신 것이고 한가로이 편안하게 지내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경》의 당풍편(唐風篇) 실솔장(蟋蟀章)에 이르기를, ‘지나치게 편안함이 없는가?’라고 하였으니, 옛날 사람들이 연락(燕樂)할 즈음에 깊이 걱정하고 멀리 염려한 것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신은 이것을 가지고 앙면(仰勉)하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이 더욱 좋다. 요(堯)임금과 걸왕(桀王)의 구분은 다만 털끝 만한 작은 차이뿐이었으니, 어찌 경계하지 아니하겠는가?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미 늙었으니, 지금 책임을 면할 줄을 알고 있다. 동궁(東宮)의 나이가 바야흐로 어리므로 더욱 보양(輔養)하는 것이 급하니, 경들의 아뢴 말들을 춘방(春坊)으로 하여금 글로 적어서 동궁에게 올리게 하겠다. 또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도 또한 마땅히 서로 힘써야 하는데, 경은 모름지기 경의 자식을 잘 가르쳐서 나의 원량(元良)을 섬기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정수기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 노인은 자식을 잘 가르쳤다."
하였는데, 이성룡의 아들 이형만(李衡萬)은 일찍이 간관(諫官)이 되었으나 언사(言事)로 죄를 얻었으며, 정수기의 아들 정우량(鄭羽良)과 정휘량(鄭翬良)은 자못 탕평책(蕩平策)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은 데까지 미쳤던 것이다. 이리하여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유신들이 서로 잇달아 임금에게 경계하는 말을 올렸는데 다시 ‘지나치게 편안함이 없는가?’라고 말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춘방관(春坊官)에게 명하여 글로 써서 세자에게 올리라고 하였는데, 원량(元良)이 바야흐로 이 자리에 있으니, 악공(樂工)을 불러서 이 실솔장을 노래하게 하여 동궁에게 들려 주도록 하라."
하니, 공인(工人)들이 곧 궁전의 계단으로 나아가 서서 실솔장을 노래하였다. 사직(司直)        권적(權𥛚)이 시위(侍衛)로서 바야흐로 연회에 임금을 모시다가 시를 지어 가지고 술에 취하여 나아와서 아뢰니, 승지가 그를 추국하자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녹비(鹿皮)를 상으로 주었다. 연회를 끝마치자 예방 승지(禮房承旨)가 진연청(進宴廳)의 당상관과 함께 어선(御膳)을 받아 앞에 있었고 기사(耆社)의 여러 신하들이 뒤에 있었는데, 향당악(鄕黨樂)을 연주하면서 앞에서 인도하여 가다가 곧바로 영수각(靈壽閣)에 이르니, 임금이 명한 것이었다. 밤이 새도록 즐겁게 마시다가 파하였고 종부(宗府)에서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금평위(錦平尉)는 곧 효종[孝廟]의 부마였는데, 이때 나이가 90세였으므로 특별히 명하여 지팡이를 붙들고 전(殿)을 올라와 술잔을 올리게 하였다. 임금이 술잔을 들고서 말하기를,
"특별히 경(卿)을 위하여 조금 마시겠다."
하고, 이어 어찬(御饌)을 내려 주어 자손들과 더불어 같이 즐거워하게 하였다. 또 비국(備局)에 하교하기를,
"나의 한결같은 마음은 위로 선왕조(先王朝)를 추모하고 아래로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계술(繼述)하는 방도는 따라서 보호하는 것이 중한데, 무릇 백성을 보호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정치에 관계되면 부지런히 강구할 것이고, 또한 여러 도(道)와 여러 고을에 마땅히 신칙하여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정책을 다하기에 힘쓰도록 하라."

 

10월 8일 신해

헌부 【장령 윤광천(尹光天)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회양(淮陽) 등의 열 고을은 그 땅이 척박하므로 척량(尺量)하여서 부세를 매길 수가 없으니, 마땅히 개량(改量)하라는 명령을 중지시켜야 합니다. 지난날 이중조(李重祚)가 상소하여 정언섭(鄭彦燮)을 논란하였던 것은 진실로 백성의 목숨을 아끼고 잔혹한 관리를 징계하려는 뜻에서 나왔지만, ‘그의 처첩이 구경하였다. [妻妾翫景]’라는 네 글자는 명부(命婦)를 거론하여 사체를 손상한 점이 있었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공홍도(公洪道)의 공주(公州) 등 다섯 고을과 전라도의 전주(全州)에서 크게 천둥하고 번개가 치면서 바람이 불었다.

 

10월 9일 임자

임금이 술과 안주를 충훈부(忠勲府)에 내려 주고, 또 수서(手書)를 내리기를,
"나라에 오늘이 있는 것은 훌륭한 임금을 섬겨서 나라를 구원한 호성 공신(扈聖功臣)들이 충성을 바친 공로이다. 옛날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관중(管仲)은 서로 구차(鉤車)를 경계하였고,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공적을 잊자 개자추(介子推)가 이름을 감추었다. 비록 법전(法殿)에서 잔치한다고 하더라도, 오직 옛날 무신년214)  의 분무 공신(奮武功臣)만은 기린각(麒麟閣)에 그 이름을 기록하여 이를 후세에 남기고, 단서 철권(丹書鐵券)으로 그 공적을 역사에 기록하는 등 이처럼 항상 마음에 두고 잊지 않는다. 특별히 다섯 항아리의 법온(法醞)과 세 쟁반의 어효(御肴)를 내려 주는데, 황류(黃流)215)  가 항아리에 있으니, 잔치를 내려 주는 것을 대신하고, 내 뜻을 종이에 써서 보여 교방(敎坊)을 대신 하노라. 아! 경들은 삼가 내 뜻을 본받아 이를 수령(受領)하고, 자손에게 힘써 신칙하여 당파(黨派)를 없애도록 힘쓰라. 두루 술과 안주를 내려 주니, 먹고 마시어 다 함께 술에 취하고 배를 불리도록 하라. 아! 지금의 이와 같은 뜻이 어찌 얕고 고루하겠는가?"
하였다.

 

진연청(進宴廳)의 당상관 이하로서 술잔을 올린 여러 신하들에게 차등 있게 상전(賞典)을 베풀었다.

 

수찬(修撰) 어석윤(魚錫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어제 내리신 전교(傳敎)를 보니, 갑오년216)  을 추억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성상께서 마음으로 슬퍼하고 추모하면서 어렴풋이나마 선왕(先王)의 미덕을 계술(繼述)하려는 뜻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러나 그 마음의 돌아가는 취향을 살펴보면 전혀 분려(奮勵)하려는 실상이 있지 아니합니다. 아! 금일에 계술하는 데에 급한 일이 어찌 다만 연회를 기로(耆老)의 신하들에게 내려 주는 것에만 그치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듣건대 우리 선왕께서는 경인년217)  과 신묘년218)  사이에 뜻과 기운이 깨끗하고 맑아서 나라를 다스리는 치도(治道)가 바야흐로 융성하였는데, 사흘 낮의 강연(講筵)과 5일 동안의 빈대(賓對)에서 게으르지 않고 더욱 부지런하였으며, 그밖에 정형(政刑)을 닦아 밝게 하고 나라의 법도를 진작시켜 엄숙하게 하는 방도가 처음 즉위할 때와 비교하여 하루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하의 금일은 바로 선왕의 신묘년과 같은 해인데, 근년 이래로 전하께서 점차 싫증이 나고 고달파하는 뜻이 있으며 뛰어나게 쇠약해진 늙은 기상이 있습니다. 무릇 힘써 정치하고 물건에 대응한다는 것은 상례(常例)를 인순(因循)하는 데 지나지 아니합니다. 목전(目前)에 바로 지나가는 일이라도 큰 뜻을 분발하시기에 이른다면, 여러 사람들이 듣고 용동(聳動)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금일의 국사(國事)는 선왕조의 이러한 시기에 비교하면 또한 뒤떨어지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세상의 도리가 점차 타락하고 나라의 기강도 점차 문란하여져, 하늘이 위에서 진노하고 백성들이 아래에서 원망합니다. 비록 전하로 하여금 정사에 분발하여 기강을 진작시켜 지금 하고 있는 것보다도 과단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이것을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쇠약하고 늙은 기백과 물러나고 움츠리는 기상을 가지고 장차 어떻게 이 어지러운 형세를 구제하려고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이때 공사(公事)가 많이 적체되어 대신들의 소비(疏批)도 3일 만에 비로소 내려 주는 경우가 있었고, 전지(傳旨)는 혹 10여 일 동안 내려 주지 아니하였으며, 정사의 비답(批答)도 혹은 며칠씩 묵는 지경에 이르렀고 정관(政官)들이 궐내에서 유숙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대간에서 상소하여 이를 언급하였던 것이다.

 

10월 10일 계축

천둥하고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콩과 같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여러 도의 임술년219)   이전 각년에 있었던 각양의 옛날 포흠(逋欠)을 하나같이 모두 내년 가을까지 기한하여 거두기를 중지하여 물려 주고, 여려 도의 영문(營門)에서 급채(給債)를 요판(料辦)하던 폐단을 일절 엄격히 금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는데, 대개 진연(進宴)하던 날에 백성들을 구제할 방도를 강구하라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월 11일 갑인

우박이 내렸다.

 

승정원과 옥당(玉堂)의 대신들이 천둥의 재이(災異) 때문에 함께 차자(箚子)와 계사(啓辭)를 올려서 진계(陳戒)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거룩하고 총명하시어 실로 하늘에 견책을 당할 것이 없는데, 다만 사람을 임용한 것이 거기에 적합한 사람을 쓰지 못했을 뿐입니다. 신은 아무런 자질이 없는 몸으로 재상의 자리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으나, 어느 한 가지 일이라도 성상의 정치를 우러러 도와드리지 못하고, 스스로 자주 저지르는 잘못과 허물이 얼마나 많은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양역(良役)은 하늘에 사무치는 백성들의 원망이 되는데도 신은 이를 구제하지 못하였고, 당론(黨論)은 나라를 망치는 고질병이 되는데도 신은 이를 고치지 못하였으며, 재사(才士)와 현인(賢人)이 엄체되어 있지만 신은 진작시키지 못하였고, 탐오하는 더러운 기풍이 넘쳐 흐르고 있으나 신은 이를 맑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함부로 말을 만들어 진신(搢紳)에게 마구 허물을 뒤집어 씌우는 것도 신은 이를 책망하지 못하였고, 함정을 설치하여 인물을 상해하는 것도 신은 이를 배척하지 못하였으며, 장옥(場屋)220)  에서 간사한 음모가 여러 가지로 나왔으나 신은 이를 막지 못하였고, 사대부의 염우(廉遇)가 모두 상실되었으나 신은 이를 부끄러워하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군부(君父)에게 반항하고 흉측한 억측을 마음대로 부려서 전하의 평이하고 명석한 이치를 손상시키는 자와 전하께서 즐거워하고 연락(燕樂)하는 계책을 어지럽히는 자를 신은 축출하지 못하였습니다. 인주(人主)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의 부탁을 받고서도 불충함이 이와 같았으니, 신이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있는데, 하늘을 어찌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금일의 재이를 부른 것은 신이고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신을 다스리고 신을 죄주어서 하늘의 견책에 사과하도록 하소서. 금일의 여론(輿論)에서 모두 말하기를, ‘언로(言路)가 통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대저 전하께서는 우(禹)임금과 같이 도리에 합당한 말을 들으면 공손히 절하는 덕[拜昌之德]이 있으나, 언로가 통하지 아니하는 것은 실로 언자(言者)의 말과 같으니, 이것은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전후에 사건을 말하는 자들이 대개 모두 당파와 사리(私利)를 협잡(挾雜)하였으므로 전하께서 그 은미(隱微)한 뜻을 통촉하시고 문득 이들을 반드시 유배하거나 추방하시어 한나라 안에 함께 있지 못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지극히 공정하고 심혈과 정성을 기울인 결과이지 사사로운 미움이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언자들의 속마음을 반드시 다 알지는 못하겠으나 유배가 잇달고 끊어지지 아니하는 것은 도리어 사람들의 청문(聽聞)을 놀라게 합니다. 이리하여 말없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풍조를 이루어서 언로가 갑자기 막혔던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언자가 스스로 막은 것이요, 전하께서 이를 막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직언(直言)하는 것을 듣지 않고 귀를 막은 지가 대개 오래되었습니다. 좋은 말이 숨어버리는데도 나라가 망하지 아니하는 경우는 있지 아니하였으니, 아!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대저 천둥하는 것은 깊숙한 곳에 움추린 것들을 진작시켜서 만물의 정을 소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마 하늘이 이 때문에 이를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모두 이에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작은 종이에다 글을 써서 종부시(宗簿寺)에 내리기를,
"갑자년 가을 9월에 영수각(靈壽閣)에 배알하고 기사(耆社)에 들어갔으며, 겨울철 10월에 동조(東朝)께 술잔을 받들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서 잔치하는데, 이것들을 《선원보략(璿源譜略)》에 기재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윤광천(尹光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의 사류(士類)들이 혹은 물러가서 전야(田野)에 살면서 도학(道學)을 강구(講究)하기도 하고, 혹은 산수(山水)를 즐겨 편안하게 지내면서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을 걱정하지 아니합니다. 이들은 정말로 그 걱정을 잊어버리지 못하는 자들입니다마는, 지금은 모두 이와 같으니, 이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그러한 사람을 말할 것 같으면 이재(李縡)·이하원(李夏源)·김진상(金鎭商)이 바로 그들입니다. 전하께서 구차스럽게 찬동하고 있는 자 십여 명과 이들 한 사람을 바꾼다면, 나라가 그래도 나라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초치(招致)하는 것은 전하께서 처치하심이 그 적당함을 얻는 데에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언관(言官)을 싫어하여 박대하시고 그 마음을 의심하고는 멀리하다가 매양 한 통의 상소가 들어가면 문득 대신(大臣)들에게 나아가서 이것을 결제하는데, 이러한 법이 한번 행해지면 언자(言者)들은 군상(君上)의 뜻을 저버릴까 두려워 하지 아니하고, 먼저 묘당(廟堂)의 대신들에게 잘못될까봐 염려할 것입니다. 옛날 한나라 위상(魏相)이 부봉(副封)의 제도를 아주 없애버렸으니,221)   대신의 도량을 깊이 얻었고, 대각(臺閣)의 체모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고 이를 만한데, 애석하게도 오늘날의 대신들은 그 식견과 사려가 위상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날 전하께서는 일의 시비는 캐내지 아니하고 먼저 이편저편의 당파에서 찾으십니다. 박치륭(朴致隆)이 양전(兩銓)을 논란한 것과 이사조(李師祚)가 전조를 공격한 데에 있어서 그들의 죄를 받은 것이 진실로 가볍고 무거운 차이가 있는데, 엄한 하교가 당파의 습성에 먼저 미쳤으니, 참으로 성상의 하교와 같다면 이사조가 정석오(鄭錫五)를 공격하고, 박치륭이 윤급(尹汲)을 공격한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그들이 협잡(挾雜)하지 아니하였다고 이를 만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언관(言官)을 유배시키고 언관에게 죄준 것이 몇 사람이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사색 당파가 어떠한지를 논하지 말고 진실로 명의(名義)를 간범하지 않은 자들은 일체 모두 석방하여 이미 지나간 뉘우침을 깊이 베푸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날 옥당(玉堂)의 여러 사람을 어필(御筆)로 지워서 없애 버린 것은 실로 대성인이 할 바가 못되니, 빨리 반한(反汗)하시어 성덕(聖德)을 빛내도록 하소서. 박성원(朴聖源)의 계청은 진실로 너무나 망령되고 경솔하였으나, 그 부도(不道)한 마음과 같은 것은 결단코 반드시 없었을 것이며, 오광운(吳光運)의 말은 정말로 그 본정(本情)을 얻었다고 하겠습니다. 옛날 송(宋)나라 소식(蘇軾)이 범공(范公)222)  의 소장을 보고 마침내 그 아래에다가 서명하였었는데, 신은 그 봉장(封章)을 일찍이 알아보고서 그 소장 아래에다 서명하지 못한 것을 한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일이 시상(時象)에 관계되는 것은 엄격히 그것을 방비하고 막아야 하는데, 어찌 느슨하게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윤광천은 본래 품행이 절도가 없어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는데, 시론(時論)을 따르고 붙쫓아서 비로소 대간(臺諫)의 선임에 통과하였었다. 그 상소의 뜻은 이재와 김진상에게 있었으나, 이하원을 아울러 거론한 까닭은 그들의 행적을 숨기고자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태백산사고본】 45책 60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54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註 221] 옛날 한나라 위상(魏相)이 부봉(副封)의 제도를 아주 없애버렸으니, : 위상(魏相)은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의 명상(名相). 옛 제도에 모든 상소(上疏)는 두 봉(封)을 만들어 그 한 봉에는 부봉(副封)이라고 써서 올리면, 대신(大臣)이 먼저 뜯어 보고 거기에 말한 것이 좋지 않을 때에는 물리쳐 버리고 임금께 아뢰지 않았었는데, 위상이 어사 대부(御史大夫)가 되어 처음으로 그 부봉 제도를 없애 버려 언론의 막히고 가리어짐을 방지하였음.[註 222] 범공(范公) : 범중엄(范仲淹)을 가리킴.
사신은 말한다. "윤광천은 본래 품행이 절도가 없어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는데, 시론(時論)을 따르고 붙쫓아서 비로소 대간(臺諫)의 선임에 통과하였었다. 그 상소의 뜻은 이재와 김진상에게 있었으나, 이하원을 아울러 거론한 까닭은 그들의 행적을 숨기고자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연(進宴)하던 날 《시경》의 실솔장(蟋蟀章)을 노래하도록 명하였던 것은 대개 깊은 뜻이 있었다. 나는 비록 이 장을 듣지 못하였지만, 어찌 황음하지 말라는 경계가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라의 체통(體統)을 계승할 저군(儲君)이 다만 안락한 것만을 알고 고생스럽고 어려운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니, 세자가 위로 동조(東朝)를 받들고 또 사친(私親)이 있는데, 연락(宴樂)이 항상 있을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찌 이것이 두렵지 않겠는가? 유신들은 춘방(春坊)의 관직을 겸하여 맡고 있으니, 모름지기 독서와 연락 가운데 어느 것이 좋은지, 동궁에게 물어보도록 하라."
하였다. 수찬 어석윤(角錫胤)이 뒷날 서연(書筵)에서 세자에게 이것을 물어 보았는데, 세자가 말하기를,
"모두 좋다."
하므로, 또 그 까닭을 물으니, 세자가 답하기를,
"좋다고 말하는 까닭은 시연(侍宴)하여 즐거움을 받들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날 왕세자가 시 한 연구(聯句)을 지어서 궁료(宮僚)에게 내려 주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해는 동쪽에서 솟아 사해(四海)를 밝히고
달은 중천(中天)에 솟아 만산(萬山)을 비취도다."
하니, 사람들은 중국 송나라 태조(太祖)가 지은 전간시(田間詩)의 기상이 있다고 일컬었다.

 

10월 11일 갑인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연(進宴)하던 날 《시경》의 실솔장(蟋蟀章)을 노래하도록 명하였던 것은 대개 깊은 뜻이 있었다. 나는 비록 이 장을 듣지 못하였지만, 어찌 황음하지 말라는 경계가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라의 체통(體統)을 계승할 저군(儲君)이 다만 안락한 것만을 알고 고생스럽고 어려운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니, 세자가 위로 동조(東朝)를 받들고 또 사친(私親)이 있는데, 연락(宴樂)이 항상 있을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찌 이것이 두렵지 않겠는가? 유신들은 춘방(春坊)의 관직을 겸하여 맡고 있으니, 모름지기 독서와 연락 가운데 어느 것이 좋은지, 동궁에게 물어보도록 하라."
하였다. 수찬 어석윤(角錫胤)이 뒷날 서연(書筵)에서 세자에게 이것을 물어 보았는데, 세자가 말하기를,
"모두 좋다."
하므로, 또 그 까닭을 물으니, 세자가 답하기를,
"좋다고 말하는 까닭은 시연(侍宴)하여 즐거움을 받들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날 왕세자가 시 한 연구(聯句)을 지어서 궁료(宮僚)에게 내려 주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해는 동쪽에서 솟아 사해(四海)를 밝히고
달은 중천(中天)에 솟아 만산(萬山)을 비취도다."
하니, 사람들은 중국 송나라 태조(太祖)가 지은 전간시(田間詩)의 기상이 있다고 일컬었다.

 

임금이 찬집청 당상관(纂輯廳堂上官) 구택규(具宅奎)에게 묻기를,
"《속대전(續大典)》 중에서 형전(刑典)을 고쳐 바로잡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구택규가 대답하기를,
"모두 백성들에게 편리한데, 다만 너무 너그러운 것이 흠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백성에게 이롭다면, 그 너그러운 것을 또한 어찌 상심하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궁전의 영선(營繕)을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그때 임금이 장차 창덕궁(昌德宮)에 도로 임어하려고 하니, 호조 판서 김약로(金若魯)가 아뢰기를,
"수리(修理)하는 일체의 일을 정지하거나 혁파하여, 성상(聖上)께서 놀라고 두려워하는 뜻을 진실로 나타내소서. 그러나 선정전(宣政殿)과 인정전(仁政殿)의 두 궁전은 곧 법전(法殿)이므로 지게문의 문지방을 고치고 칠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조[穆陵朝] 때에 3승(升)의 굵은 베를 가지고 이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 이 일의 착수는 옛날에 비하여 또한 이미 사치스럽다. 내가 본래 성질이 사치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지만, 법전(法殿)은 칠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차양(遮陽) 같은 것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옮겨 가는 것도 또한 좋을 것이다."
하였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그 비가 새거나 허물어진 정도가 심한 것은 수리하여 보수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은 감히 궁실을 지나칠 정도로 수리하여 우리 성상께서 비용을 아끼시는 뜻을 상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10월 12일 을묘

부수찬 김상철(金尙喆)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춘궁(春宮)에 계셨을 적부터 《육경(六經)》의 경지에 이르렀고 제자 백가(諸子百家)의 수준에 이르셨었는데, 지금 20여 년이 되었지만 오히려 또한 부지런히 공부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촌음을 아끼십니다. 하루에 세 번 강경(講經)하고 두 번 소대(召對)하면서 아직 궁중의 관청을 혹시 닫으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무더운 더위나 차가운 추위에도 옥체(玉體)가 피로한 줄도 완전히 잊어버리시는데, 저 유신(儒臣)이란 자들은 오히려 강경을 익히는 예와 토(吐)를 다는 일을 하는 데에 겨를이 없습니다. 근일 이래로 조강(朝講)과 야대(夜對)는 완전히 끊어져 그 소식을 듣지 못하였으며, 1개월에 한 번 강경하는 것도 또한 보기가 드물게 되었습니다. 비록 3, 4년 전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더라도, 빈대와 상참(常參)을 이미 시행하였었고,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져오거나 윤대관(輪對官)이 입시하는 일도 또 시행하였으며, 심지어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의 사폐(辭陛)하는 자들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반드시 인접(引接)하였으니, 그 강론하던 것이 나라의 일이었으며, 그 긍휼히 여기던 것이 백성들의 숨은 고통이었는데, 또 하물며 을야람(乙夜覽)223)  이 거의 반이 넘고 병침(丙枕)224)  이 되어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였으며, 동방이 아직 밝지 않았는데 정당(政堂)을 이미 개설하여, 금달(禁闥)에서 올리는 장주(章奏)가 정체되지 아니하였고, 후원(喉院)에서는 왕명을 출납하느라고 겨를이 없었습니다. 대저 어찌하여 근래에는 날마다 달라지고 달마다 같지 않아서 빈청(賓廳)에서 회좌(會坐)하는 것도 혹은 이미 모였다가도 곧 도로 정지하고, 정통(政筒)이 들어가더라도 혹은 하룻밤을 지나도록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으시니, 대신들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이 어찌 3일 만에 비로소 내려질 수가 있겠으며, 중신들의 사본(辭本)도 또한 4개월 동안 유중(留中)할 수가 있겠습니까? 적은 일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큰 일이야 어찌 다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온종일 공거(公車)에는 오랫동안 간언(諫言)의 글이 드물게 되었으며, 때로는 대원(臺垣)에서 단지 묵은 소장을 전달하는 것만을 볼 뿐이어서 조용하게 모두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크게는 참혹한 형벌[鼎鑊]을 당할까 두려워함이 있으며, 적게는 영해(嶺海)에 유배될까 하는 걱정이 있으니, 누가 비할 데 없이 귀중한 자신을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다 기꺼이 내던지겠습니까? 그래서 아비가 그 아들을 가르치고 형이 그 아우를 부추겨서 문득 말하기를, ‘네가 혹시라도 정사를 논하였는가? 네가 혹시라도 사람을 논하였는가?’라고 하면서 오로지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을 묘방(妙方)으로 삼고 말하지 않는 것을 집안의 계책으로 삼습니다. 비록 혹시 겨우 책임을 면하는 말이 있더라도 반드시 말하기를, ‘이 구절이 눈에 거슬리는가? 이 단락이 제지하였던가?’ 하고는 초안을 잡아 좌우에서 짐작하고 베껴 쓰기에 임하면 상하(上下)에서 점검하여 고치므로, 오로지 골자(骨子)가 없고 당착(撞着)이 없는 것만을 위주로 합니다. 다만 해당 관사에서 폐단을 변통(變通)하게 하고 군문(軍門)에서 책응(策應)을 혁파시킨 것만이 가장 대장(臺章)의 고론(高論)으로 되었으니, 금일의 풍속과 습관이 이와 같은데 어찌 이것을 치유할 수가 있겠습니까? 순전히 3망(三望)을 쓰자는 주장도 비루하고 야비하기가 심합니다. 이와 같은 언의(言議)가 족히 조정의 영광이 되지는 못할 것이나 그러한 말은 대각(臺閣)에서 나왔던 것으로, 한편으로는 탄핵을 참고 견딤으로써 남의 죄로 돌리며, 한편으로는 비록 탄핵을 당할지라도 일찍이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니, 어찌 대각의 논의에 깊고 얕은 것이 있겠으며 처신하는 의리가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어서 그러하겠습니까? 금일에 많고 많은 온갖 일들은, ‘성저(聖儲)를 보필한다. [輔聖儲]’라는 세 글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림(山林)에 있는 유일(遺逸)의 선비들이 이연(离筵)에 출입하게 되면 나라를 돕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한두 사람의 유신이 겨우 한 차례 소명(召命)을 받들었으나 도로 즉시 돌아가버렸습니다. 초치(招致)한 자들은 오지 아니하였고 왔던 자들은 머물지 아니하였는데, 뒤에 다시 돈독하게 예를 갖추어 그들을 불러들이는 거조가 있어 우리 원량(元良)을 보필하라는 하교가 계셨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지금 관례에 따른 비답을 내리실 뿐이니, 그 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변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한 번 초치하여서 오지 않으면 반드시 다시 초치하여야 하며, 두 번 초치하여서 오지 않으면 반드시 세 번째 초치하여야 합니다. 초치하여서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오게 하고, 오거든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머물게 하는 것은 오직 전하께서 힘써 쌓은 성의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0월 13일 병진

밤에 창덕궁(昌德宮)의 인정문(仁政門)에서 불이 났는데, 승정원에서 실화(失火)하여 인정문과 좌우 행각(行閣)이 잇따라 불탔으며, 연영문(延英門)에까지 이르렀으나 유독 대청(臺廳)만은 무사하였다. 열성조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다 불타 없어져서 깡그리 사라지고 남은 것이 없었다.

 

10월 14일 정사

밤에 객성(客星)이 각수(角宿)의 도내에 나타났다.

 

전 정언 이언세(李彦世)를 경성부(鏡城府)에 유배시켰다. 이언세가 전함(前銜)의 신분으로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금일의 삼공(三公)은 한심하다고 할 만합니다. 윗사람을 속이고 아랫사람을 세력으로 억누르면서 스스로 묘당(廟堂)의 계책이라고 일컬으며 나라를 좀먹고 백성들을 병들게 하여 집안의 계책으로 만들었는데, 꼭지에 이어지고 뿌리에 서리어 굳어져 깨뜨려 버릴 수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저들 송인명(宋寅明)과 조현명(趙顯命)은 이미 같은 패거리의 인물들로서 고질적인 습성이 있고 익숙한 곳을 잊어버리기 어려워서 겉으로는 비록 스스로 이런 습성에서 벗어나려는 형적이 있지만, 안으로는 그 종자(種子)를 다 끊어버리지 못하니, 그들이 나를 향한 정성이 없는 것도 또한 족히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김재로(金在魯)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 처지가 어떠합니까? 그는 스스로 교목(喬木)의 집안에서 태어나 삼조(三朝)를 두루 섬겼으니, 그의 선왕(先王)을 추모하고 전하께 보답하려는 의리에 있어 어찌 저들과 마음 달갑게 여기고 사악함을 비견할 수가 있겠습니까? 돌아보면 곧 자기 당을 성원하도록 결탁하여 안팎에서 서로 화답하고 응원하는데, 거의 송(宋)나라 진회(秦檜)225)  가 완안씨(完顔氏)226)  의 정탐꾼 노릇을 하던 때에 그러하던 것과 같다고 하겠으니, 신은 남몰래 애통하게 여깁니다. 신이 잇달아 시골 구석에 거처하였으므로, 김재로가 나라에 지은 죄를 진실로 일일이 다 들어서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 가운데에 가장 드러나는 것만을 모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흉악한 역적들을 비호하여 왕법(王法)을 파괴하였고, 인척을 사사로이 등용하여 모두 관리로 임용하였으며, 돈을 모으는 길을 만들어서 채수(債帥)227)  가 일어났었습니다. 그 밖에 아첨하여 총애를 굳히고 교화를 손상시켜 법도를 허물어뜨린 일들은 모조리 열거하기가 어렵습니다. 을사년228)  에 6적(六賊)229)  을 청토(請討)하였을 적에 기치(旗幟)를 세우고 두 갈래의 의논을 내었던 자는 누구였습니까? 지난해에 이광의(李匡誼)가 유배된 섬에서 육지로 내보낼 적에 자기 몸을 잊은 채 힘써 이를 청하였던 자는 누구였습니까?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흉악한 소장을 올려 요망한 박상검(朴尙儉)과 몰래 결탁하여 전하를 위태롭게 만들고자 도모하였으니, 맨 먼저 참여했던 7흉(七凶)은 마음속이 하나로 통하였는데, 그는 억지로 구별하여 힘써 공평하게 용서하자는 의논을 주장해서 왕법(王法)을 가로막아 굽혀, 마침내 양관(兩觀)의 형벌을 용서받게 하였고, 흉악한 역적의 괴수(魁首)를 양성하여 무신년의 변란230)  이 닥치게 하였던 것입니다. 아! 역적 김일경의 죄는 교문(敎文)에 그치지 아니하였고, 이진유(李眞儒)·박필몽(朴弼夢)의 흉악함은 역적 김일경보다 넘침이 있었으니, 반드시 토죄(討罪)해야 하고 용서하여 줄 수가 없는 의리와 역적을 풀어주었다가 환란이 일어날 염려는 부녀자나 어린 아이조차도 오히려 알고 있을 터인데, 유독 그는 어찌하여 스스로 왕법의 관례를 밝게 익히고 사변(事變)에 익숙하게 통달(通達)한 자라고 자부하면서, 도리어 목하(目下)에 누구나 쉽게 알고 있는 의리와 후일에 반드시 닥쳐올 염려에 대해서는 어두어서, 이에 천만 뜻밖의 의논을 내놓는다는 것입니까?
이광의의 죄는 말을 하자니 숨이 막힙니다. 그는 전하의 재주가 특별히 뛰어나다는 지우(知遇)를 받고 전하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 되었지만, 이미 실형(失刑)하던 시기에 심혈을 기울여 자기 의논을 고집하지도 못하였고, 이에 도리어 성묘(省墓)하던 길에서 사사로이 이광덕(李匡德)을 만나 보았는데, 사전에 빈틈없이 준비하여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였고, 돌아와 연석(筵席)에 나아가서 곧바로 그를 육지로 내보내자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아! 그의 목을 베어 만 조각으로 만들더라도 오히려 신인(神人)의 울분을 풀기에는 부족한데, 죄를 감하여 유배시키고 해가 지나자마자 도로 곧 섬에서 내보내어, 그로 하여금 근기(近畿) 지방에서 한가로이 지내게 하는 것은 세간에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더구나 그는 죄인의 집안과 몰래 내통하고 죄인의 형에게 은밀히 정성을 다하였는데, 이것은 진실로 그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바라고 하더라도 필경에는 임금의 전석(前席)에서 이를 건백(建白)하였고, 사실(私室)에서의 허락을 저버리지 아니하였으니, 정의를 맺음이 두터웠고 사랑하는 호의가 돈독하였음은 진실로 이미 밝게 나타나서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러한데도 그의 한없는 농락을 당하였으니, 신이 애통한 마음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신이 가만히 듣건대, 지난번에 흉악한 역적들의 여얼(餘孼)들이 서로 함께 술을 마시면서 축하하여 말하기를, ‘우리 영상(領相)이 이와 같이 공평한 마음과 어진 은덕이 있으니, 우리들에게 기대할 희망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대부분 흥기(興起)할 뜻이 있다고들 합니다. 그가 흉악한 역적의 처지를 위한 것이 가위 지극하다고 하겠으니, 어찌 전하를 저버림이 한결같이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른다는 말입니까? 타고난 올바른 천성(天性)은 사람이 똑같이 얻은 바이니, 비록 저 김재로인들 또한 어찌 우매하기만 하겠습니까? 그런데 오직 그 회호(回互)한 성격은 호환(好還)에 대한 경계를 깊이 가졌으며, 이해(利害)에 관한 견해는 오로지 남에게 은혜를 베풀어 자기 이익을 얻으려는 계책에서 나왔으니, 그는 유독 《춘추(春秋)》에서 죄악을 엄격하게 징토(懲討)하는 뜻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역적을 비호하여 또한 역적이 되는 죄과에 스스로 빠지기를 달갑게 여긴단 말입니까?
국가에서 관직을 설치하고 직분을 나누는 것은 천위(天位)를 함께 받들려는 것이지, 대신 사사로운 물건으로 쓰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당파에 치우치는 것이 습성을 이루어 수단이 점차 교활하여져, 공공연히 왕조(王朝)의 명기(名器)를 사가(私家)의 산업(産業)으로 함부로 만들어서, 무릇 인척(姻戚)의 호적에 있는 자라면 현명한지 현명하지 않은지를 불문하고 한결같이 추켜 세워서 추천하며, 조금이라도 풍요(豐饒)로운 처지에 관련되는 자라면 그 시비(是非)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대개 모두 직임에 차견(差遣)합니다. 김성운(金聖運)은 본래 재능이 없는데도 단지 4촌 동서라는 이유로써 10년 동안에 연달아 이름 있는 번진(藩鎭)을 다스렸고 이어서 커다란 고을의 자리를 차지하였다가 영남(嶺南)의 도백(道伯)에 첫번째로 의망(擬望)되었으며, 김후(金𣖔)는 겨우 사람의 모습을 갖춘 위인인데도 특히 그의 5촌 족장(族丈)이라는 이유로 잠깐 동안에 아침에는 수군 절도사가 되어 안치(按治)하고 저녁에는 병마 절도사가 되어 제치하여, 강화부(江華府)에 발탁하여 의망하였으니, 높은 관직에 대한 비난과 공기(公器)의 범람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함양(咸陽)은 영남 지방의 이름 있는 고을인데 연달아 김가(金家)들이 수령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사물(私物)로 만들었고, 강서(江西)는 관서 지방의 커다란 고을인데 마침내 그 아들들이 수령의 자리를 독점하려고 기도하였으니, 김씨의 성을 가진 세 사람이 하나의 관부에서 교체되었던 것은 또한 가위 창·고씨(倉庫氏)231)  라고 이를 만하겠으며, 대신의 자제들이 반드시 풍요로운 고을을 차지하였던 것은 어찌 이것이 농단(龍斷)232)  의 술책이 아니겠습니까? 김익로(金益魯)는 하나의 무부(武夫)일 뿐인데, 세력을 믿고 이익을 마구 추구하다가 세 번이나 간악하다고 일컬어지게 되었는데도 외람되게 사적(仕籍)에 허통(許通)하여 자목(字牧)의 직임에 이르게 되었던 것은 그가 당종제(堂從弟)에게 사정을 두었던 것이며, 심기(沈琦)는 하나의 무부일 뿐인데, 한번 잔폐한 고을을 다스릴 적에 그가 조정[朝家]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하여 고을의 정리(政吏)를 가두고 그를 요지의 관부(官府)에 옮겨서 임명한 것은 그가 아내 쪽의 일가붙이에 사정을 두었던 것입니다. 관리의 임용 방법이 뒤섞여서 어지럽고 국가의 체모가 손상되어 회복될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선전관(宣傳官)의 가부를 논하는 것은 스스로 관청의 관례인데, 이광천(李光天)의 벼슬길이 막힌 것이 어찌 당파의 습성과 관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종질(從姪)에게 반드시 보답해 주려는 자리로 삼아서 성상께 마치 어전에 아무도 없는 것과 같은 행동으로 아뢰었으며, 그가 경연(經筵)에서 외람되게 자질구레한 일들을 상소한 것은 비록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칠 것을 유독 생각하지 아니하였으니, 더욱 이상하고 통분한 일입니다. 지난해에 남방의 두 도백(道伯)을 어전의 자리에서 의논하여 추천하였는데, 김재로는 송인명의 친척 조영국(趙榮國)을 추천하였으며, 송인명은 김재로의 친족 김치후(金致垕)를 천거하였습니다. 과연 두 신하로 하여금, 위망(威望)과 재기(才器)가 그들의 위에 나올 사람이 없었다면, 기혜(祁奚)233)  가 내거(內擧)한 것과 사안(謝安)234)  이 여러 사람의 의견을 어기고 조카를 천거한 것은 지혜로운 자를 천거하는 의리에 해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돌아보건대 그들은 곧 기괄(機栝)을 몰래 감추고 권모 술수를 몰래 부리면서 말을 바꾸어 칭찬하거나 찬양하며, 수단을 바꾸어 인도하거나 천거하여 목목(穆穆)한 조당(朝堂)의 위에서와 혁혁(赫赫)한 향안(香案)의 앞에서 감히 억양하고 환롱(幻弄)하는 수단을 쓰려 하였으니, 그들이 임금을 속이고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무엄하고 불경스러운 죄는 이것이 어찌 다만 이처럼 사정에만 치우치는 데에 그치겠습니까? 이조 판서를 새로이 의망(擬望)하던 때에 이르러 좌상·우상의 천거한 자를 현주(懸注)하게 하였던 것은 이것이 실로 전대(前代)에 있지 아니하였던 일입니다. 총재(冢宰)의 직임은 조정의 권한이 돌아가는 바이고 비국(備局)의 천거는 수상이 이를 주장하는데, 그것이 형으로서 아우를 추천하여 의리상 편안하지 못한 점이 있을 줄 알 것 같으면 법에 의거하여 그 의망을 막는 것이 옳을 것이며, 만약에 그것이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고르는 데에 이 사람이 아니고 좋은 인물이 없다면 관례를 깨뜨리고서라도 의망을 허통(許通)시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재상이 반드시 한 나라의 중요한 권한을 망라하고자 한다면 납리(納履)의 혐의235)  를 돌아보지 아니할 것이요, 또한 가히 당세(當世)의 공의(公議)를 두려워 한다면 투령(偸鈴)236)  의 습관을 본받는 데 이르는 것인데, 그 권세를 좋아하고 권력을 탐하며, 이익을 추구하여 사정을 부리는 마음은 진실로 족히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마음씀이 올바르지 못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편벽된 것은 신이 붓을 더럽히면서까지 논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저 김씨 일문(金氏一門)에서는 그 멀고 가까운 친척을 막론하고 나이가 차고도 벼슬에 오르지 못한 자가 있지 아니하며, 또한 출신(出身)하고서도 녹봉을 받지 못한 자도 있지 아니합니다. 심지어 이성(異姓)의 천척까지 추천하여 외척의 당파가 이와 같고 인척의 당파도 이와 같아서, 조정의 안팎에 모두 자리를 차지하고 전후에 서로 바라보면서 의기 양양하여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온 세상을 부산하게 돌아다니고 있으니, 비록 그 평생의 기량(伎倆)을 원래 족히 볼 만한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한 부분의 검칙(檢飭)함은 그래도 말할 만한 것이 있었는데, 10여 년 이래로 문득 별인(別人)이 되었습니다. 지나간 해에 영번(嶺藩)에서 교체되어 돌아올 때 신이 마침 광릉(廣陵)의 길 위에서 그 행차를 만났었는데, 그의 돌아오는 짐바리가 풍부하여 이미 매우 옳지 못하였습니다. 듣건대 그의 나이와 지위가 더욱 높아질수록 정욕이 더욱 방자하여 청탁(請託)하는 길을 넓게 열어 놓고, 뇌물을 받는 길을 크게 열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 언섭(李彦燮)은 서전(徐湔)의 외손으로 자기들 중에서 벼슬길이 막혀 있었는데, 영장(營將)이 한 달 동안에 여섯 차례 음식을 대접하자, 그 후의(厚意)를 잊기 어려워 과거를 싹 쓸어 버리고 초탁(超擢)하였으므로, 주(州)·군(郡)의 수령을 두루 거치고 절도사(節度使)의 반열(班列)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우(李玗)는 어린아이처럼 어리석고 무식하여 또 주정을 부리는 병통이 있는데, 그의 가신(家臣)이 되자 책방(冊房)에 두었다가 일찍이 관성(管城)의 수령 직임을 주었습니다. 그는 30곡(斛)의 쌀을 사수(寫手)의 생활하는 밑천으로 도와주었으며, 한 시대의 명기(名妓)를 어리석은 아이들의 방탕한 놀음에 맞아들였습니다. 아장(亞將)을 임명할 적에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배척하고 그를 승진 발탁하였으며, 통제사(統制使)의 자리에 교묘하게 의망(擬望)하여 차송(差送)하였던 것은 입이 있으면 모두 이를 말하였었는데, 대간(臺諫)의 계청(啓請)이 준엄하게 일어나서 의리상 비난을 무릅쓰고 부임하기가 어렵게 되자, 보고하기를 그만두고 연석(筵席)에 나아가서 그를 하송(下送)하도록 재촉한 것은 또한 무슨 의도였겠습니까? 과연 3백 냥의 은자(銀子)로 맏아들의 기첩(妓妾)에게 집을 사서 주었고, 7백 냥의 엽전[孔方]으로 막내아들의 재산을 만드는 밑천을 도와주었던 것은 진신(搢紳)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전파되어 이 사실을 말하는데, 심지어 이를 대변(對卞)하는 일까지 있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이에 대하여 실로 귀를 틀어막고 도망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강계(江界) 지방의 초피(貂皮)와 삼(蔘)이 영상(領相)의 집에 모두 들어갔다.’고 나라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였는데, 아녀자에게 위협을 당한 이의풍(李義豊)과 도처에서 탐오하고 음란한 짓을 한 어유기(魚有琦)를 서로 잇달아 벼슬길에서 쫓아냈다가 서남 지방의 두 곤수(閫帥) 자리에 앞뒤로 천망(薦望)하고, 금영(禁營)의 중군(中軍)에 차례를 뛰어넘어 발탁하여 제수한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대신(臺臣)들이 곤수의 의망에서 그들을 삭제하자고 청하여도 오히려 또 구원하였고, 주장(主將)이 독려하여 그 자리를 교체하도록 하였는데도 그는 부끄러워함이 없었으니, 뇌물의 많고 적은 다름에 따라 관직의 자품(資品)이 높고 낮음이 판별되었습니다. 뇌물로 주는 예물이 너무나 많으며, 요로에 있는 사람에게 뇌물을 주는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동반(東班)의 전주(銓注)에는 방백(方伯)으로부터 수령(守令)에 이르기까지 모두 분부(分付)가 있고, 서반(西班)의 전주에는 곤수(閫帥)로부터 변장(邊將)에 이르기까지 또한 분부가 있지만, 정사를 보는 관리들이 왕복하는 데 피로하고 전주관(銓注官)들이 봉행(奉行)하기에만 눈이 어두우므로, 아무런 묘리(妙理)도 없이 관직을 얻은 자는 대개 적습니다. 그런 이것도 오히려 부족하여 서리(書吏)가 출대(出代)하여 분부하고, 사령(使令)이 출대하여 분부하며, 심지어 문서(文書)를 바로 고용인에게 사환(使喚)할 적에도 역시 또한 분부합니다. 이서(吏胥)들이 몰래 이것을 욕하고 여항(閭巷)에서도 이에 침을 뱉고 비루하게 여기니, 우리부터 우리를 업신여기는데, 비록 말하기를, ‘창랑(滄浪)에서 취할 것이다.’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체통(體統)을 무너뜨리고 손상시켜 끝내 조정(朝廷)의 수치를 가져올 것입니다. 심지어 서쉬(西倅)의 지장(支裝)237)  을 받아 들일 때에는 대단치 않은 것도 빼주지 않아서 그 궁색한 가족들로 하여금 눈물을 머금고 한강을 건너게 하였으며, 통영(統營)에서 보내주는 우산(雨傘)을 독촉하여 바치게 할 때에는 저리(邸吏)를 잡아다 가두어 그 가족들로 하여금 울부짖고 하늘을 원망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말하자니 입이 더러워져 오히려 참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오히려 작은 연고일 뿐입니다. 그가 함부로 외람되게 법을 무시하고 탐오하여 수치스러움이 없는 것과 같은 행동은 작년에 그가 천장(遷葬)하였을 때에 이르러 가장 심하였습니다. 광주(廣州)의 몽촌(夢村)은 옛날부터 명승(名勝)의 땅이었는데, 산 아래에 1백여 호의 인가(人家)가 있었습니다. 전부터 세가(勢家)와 권문(權門) 가운데 선산을 친히 구하는 자들은 누가 이곳에 군침을 흘리지 아니하였겠습니까? 그러나 큰 마을의 뒤에는 들어가서 장사지낼 수가 없다는 것이 조정의 법령에 밝게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생각을 내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김재로가 국정을 맡아보는 수상으로서 근신(謹愼)할 방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감히 함부로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내어 귀중한 권세와 부유한 재물을 믿고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공갈하여 이익을 가지고 유혹하였는데, 그 중에서 양반으로서 조금 마을의 권세를 잡은 자에게는 훌륭한 관직을 뇌물로 주었고, 상놈[常漢]으로서 자못 마을의 의논을 주장하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뇌물로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대로 들어가서 장사지내고 조금도 남을 돌아보거나 꺼려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미 집을 허물어서 내보낸 자가 거의 40호를 넘었으며, 그 나머지는 지금 차례를 당하면 철거시킬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나라를 체념하는 상신(相臣)이 할 바이겠습니까? 충주(忠州)에서부터 구산(舊山)의 묘를 천장할 때에 선척(船隻)을 많이 붙잡아서 강을 뒤덮어 아래로 내려왔는데, 강의 연안 여러 고을에서 군정(軍丁)들을 많이 징발하여 포구(浦口)를 파내어 뱃길을 만들고 배들을 끌어서 호위했던 것입니다. 그때가 바야흐로 농사철을 당하여 백성들이 밭이랑을 일구지 못하여 근심하는 기색이 길에 가득찼으며,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에까지 뻗쳤습니다. 비록 자신은 ‘위세가 미치는 곳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없겠습니까?’라고 하겠지만, 또한 그는 어찌 우리 전하께서 백성들을 걱정하시는 정상과 농사를 권장하는 뜻을 조금이라도 깊이 유념하여 절약하고 줄이려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상장(喪葬)에서 부구(賻救)는 본래 포복(匍匐)238)  하는 의리이지만 또한 규례가 있어서 저절로 한정된 절목이 있는데, 종전부터 대신들의 집안에서 상장을 치를 적에 무슨 제한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말이 시끄럽고 떠들썩한데, 아직까지 이와 같이 말썽이 심한 적은 있지 않았습니다. 위로는 방백(方伯)으로부터 아래로는 수령과 변장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음식물을 김재로에게 보내는데, 한 곳에서 보내는 물건이 그 숫자가 많아서 다만 10가(家)의 재산 정도가 아닙니다. 혹은 말하기를, ‘어떤 곤수는 몇 백냥을 보냈고, 어떤 방백은 몇 백 냥을 보냈다.’라고 합니다. 신은 이미 이것을 목격하지 못하였으므로 정말로 사실인지를 물어보지는 못하였지만, 그러나 가만히 들으니, 그 한 집안의 수령이 돈 1백 냥을 보냈다가, 본가(本家)에서 지극히 적다고 여겼으므로, 자못 미안(未安)한 뜻을 보였다고 합니다. 비록 한 집안의 친척이라 말할지라도 수령이 1백 냥을 보내는 것은 진실로 작다고 이를 수가 없는데도 오히려 마음에 차지 않았다면,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의 일이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듣건대, 산을 사고 대지(垈地)를 사서 완전히 장례를 끝마치기까지 돈 6천 냥을 썼다고 사람들이 모두 공공연히 말하는데, 과연 자기 집안에서 이를 취하여 쓴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며,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이를 쓴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나, 이것도 또한 추측하여 알 만합니다. 더군다나 부의(賻儀)는 단지 종가(宗家)에만 보내는 것이 본래 통행(通行)되는 관례이지만, 지금은 그 많고 적은 것을 논하지 않고 거의 모두 양가(兩家)에 보내는데, 그 물건의 수요도 또한 차이가 없다고 하니, 이러한 부의는 전대(前代)에서는 듣지 못한 것입니다. 더욱 분개하고 한탄할 만한 것은 조정[朝家]에서 8좌(八座)의 반열(班列)은 실로 대신들이 석물(石物)을 사는 밑천이 되는 자리가 아닌데, 김시혁(金始㷜)은 비굴하게도 쉽게 이익으로 유혹되었으므로, 성(城)을 쌓는다고 핑계하고 과만(瓜滿)한 뒤에도 그대로 그 자리에 유임시켜 마니산(摩尼山)의 돌을 쪼개어 와서 강화부(江華府)의 재물을 탕진하였으며, 연거(輦車)로써 운수하여 가지고 올라와서 무덤 앞에 상설(象設)을 성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구축하는 막중한 역사를 올바르지 못한 사람에게 맡기었으므로, 역사를 통솔하던 장교(將校)들이 스스로 결단하여 죽음에 이른 자가 7인에 이르기까지 많으며, 한 지방의 생령(生靈)들 가운데 목숨을 잃거나 집안을 망친 사람들은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원망하고 슬퍼하는 소리가 장강(長江)과 더불어 다함이 없는데, 묘도(墓道)의 갖춤과 반자(班資)의 올림이 아울러 그 계산에 딱 들어 맞았다 하겠습니다만, 오직 저들의 슬픔에 사무친 원성이 장차 누구에게로 돌아가겠습니까?
아! 나라의 권력을 잡은 지가 이미 오래되어 그가 경영하는 일도 또한 많은 터인데, 지혜가 나라를 도모하는 데에 뛰어나지 못하고 자기 한 몸을 도모하는 데에 뛰어나며, 생각은 종묘 사직을 위한 장구한 계획에는 주밀하지 못하고 자기 자손을 위한 무궁한 계책에만 주밀합니다. 혹은 임금의 총애와 사랑이 없어지고 녹봉과 지위가 보전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이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순종하려는 한 가지 생각만을 가지고 온갖 계책으로 임금에게 아첨하니, 상전(上殿)에는 간절하고 곧은 말이 없고 봉장(封章)하는 일에는 아첨하고 기쁘게 하는 말만으로 가득차 있으며, 오로지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라든가 ‘성상의 뜻이 진실로 옳습니다.’라는 따위의 말로써 극구 입이 닳도록 찬미(讚美)할 따름이요, 아직 한 가지 일이라도 임금의 뜻을 어기었거나 조그만 말이라도 임금의 뜻을 거스렸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한번 시험삼아 생각해 보시면, 10년 이내에 그가 과연 상국(相國)으로서 귀에 거슬리는 논의와 비판하는 간언(諫言)이 있었습니까? 신은 어리석게도 죽을 죄를 짓습니다. 전하의 거룩한 덕이 오히려 옛날 성왕(聖王)보다 모자람이 있다면, 어찌 일마다 착하고 아름다울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김재로로 하여금 사건을 의논하거나 일을 처리할 적에 한 가지 예로써 그저 찬양(讚揚)만 하다가 그치는 짓을 못하도록 하소서. 만약 혹시라도 처리하기가 곤란한 일이 자기 앞에 떨어지면 그는 교묘하게 피하기에만 힘써서 혹은 질병을 핑계대어 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휴가를 청하여 도성을 나가기도 하는데, 급할 때에 나는 병이 어찌 그 진짜 아픈 것이겠으며, 기미(機微)를 엿보아 휴가를 가는 것이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혹시라도 사건이 생각하지도 않는 데에서 생겨 그가 도피하거나 숨을 여지가 없으면, 또 성상의 재결(裁決)을 청하고 자기는 빠지기를 원하는데, 궁궐을 나가서는 매우 기쁜 모습으로 남들에게 자랑하기를, ‘금일의 일은 성상께서 처분하신 것이고, 나의 죄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아! 나라를 깊이 생각하는 의리와 임금을 섬기는 정성은 진실로 책망할 수가 없다고 하겠으나, 그 심사(心事)가 바르지 못하고 그 정태(情態)가 아름답지 못한 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대저 탕평(蕩平)이라는 두 글자는 기범(箕範)239)  의 이제(二帝)·삼왕(三王)이 천하를 다스리던 대법(大法)에서 나왔으니, 본래 아름답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러한 방도를 숭상하고 채용하신 것은 당파에 치우치는 폐해를 깊이 염려하시고 이것을 교정하여 혁파할 방도를 진념하신 것으로서, 대개 저쪽편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고 얼굴을 고쳐서 인의(仁義)로써 점차 갈고 닦아 모두 대도(大道)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한 이쪽편 사람들로 하여금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서로 융화하고 보합(保合)하여 함께 왕실을 번영시키고자 하신 것이니, 비록 왕덕(王德)이 극강(克剛)하는 법에 모자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오히려 인군(人君)의 사람을 포용(包容)하는 도리가 되는 데에는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김재로가 시비(是非)를 가리지도 아니하고 그 현부(賢否)를 물어보지도 않은 채 오직 호대(互對)하여 아울러 천거하는 것으로써 탕평(蕩平)하는 규모(規模)로 삼는 것과 같음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미 황극(皇極)의 본지(本旨)를 잃어버렸으며, 또한 전하의 아름다운 뜻도 아닙니다. 또 더구나 사정을 둠으로 인연하여 부회(傅會)하는 등 농간을 부리며,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비록 어질고 올바른 자라고 할지라도 그를 배척하여 탕평책을 저버리면서까지 그를 경함(傾陷)하지만, 자기에게 붙좇으면 비록 사악하고 그릇된 자라 할지라도 그를 허여하고 탕평책을 주장하면서까지 그를 권장하여 임용하였으니, 그는 겉으로는 그 명분을 가탁(假託)하면서 속으로는 자기의 사사로운 뜻을 이루었습니다. 나아가고 물러가거나 억압하고 부추기는 것을 자기의 이해 관계로 보고, 위복(威福)과 영록(榮祿)을 그 수중에 장악하여 대단한 기세가 있는 바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복종하며, 권세와 이익이 모이는 바 세상에서 함께 붙좇았습니다. 때문에 비록 이종성(李宗城)이 당을 위한 마음과 교만한 기세로써 일찍이 충원(忠原)의 이장(移葬)하던 모임에 나아가서 방백(方伯)의 체모가 중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친히 역사를 감독하면서 뻔뻔스럽게 수치스러움을 알지 못하였는데도, 김재로는 경연(經筵)에서 그의 자품을 승진시키도록 아뢰었으니, 대개 그 보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전주(銓注)의 책임을 맡게 되자, 왜곡되게 풍지(風旨)를 받들어 처음의 정사에서 그의 맏아들을 부사(府使)의 직질에 발탁하였으며, 도목 정사(都目政事)에서 그의 사랑하는 사위를 재랑(齋郞)의 관직에 제수하였습니다. 그는 아첨하여 충성을 다함이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으니, 오직 저 이(利)를 즐기는 무리들은 진실로 족히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걱정하는 것은 인심이 함락되고 세도(世道)가 퇴패하여 명의(名義)는 가벼워지고 작록(爵祿)이 중하게 되어, 조정의 윗자리에서 풍절(風節)이 쓸어 버린 듯이 없어지고 사대부(士大夫)들 사이에는 염치가 무너지니, 국사의 쉴 곳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하겠는데, 김재로의 삼굴(三窟)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신은 김재로가 나라의 권력을 잡은 것이 지금 몇 년이나 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만, 그의 소매 속의 탄문(彈文)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바가 없고 심상하게 공궐(攻闕)하였다는 데 대해서도 또한 들은 바가 없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대성인(大聖人)이 더할 수 없이 잘하였을망정 들추어 낼 만한 허물이 없지 않을 것 같으면 이는 반드시 대권간(大權奸)이 위복(威福)을 베풀었어도 감히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한 것입니다. 원씨(袁氏)240)  ·양씨(楊氏)241)  처럼 대대로 권세를 잡아서 집안 문생(門生)과 연고 있는 관리들이 널리 중앙과 외방에 가득하게 퍼져 있고, 소굴(昭屈)의 종족이 강성하여 여러 집안 종제(從弟)들이 권력의 요직에 크게 자리잡고 있으니, 이것은 이미 대세가 동요시키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의 먹다 남은 술과 안주는 춥고 배고픈 걸인들의 구지(舊知)를 수습하여 그 정호(情好)가 변하지 않는 것이며, 간곡한 정성과 비밀스러운 약속은 권세와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새로 교제를 맺은 자들과 결탁하여 그 성세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진중함을 지키고 세력에 붙좇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몰래 이익을 긁어 모으는 짓을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며, 용서할 수 없는 대악인(大惡人)의 무리에 대해서는 은밀히 두터운 은혜를 베풀어서 그들로 하여금 감동함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청탁(淸濁)과 음양(陰陽)의 사이에서 운신하여 일을 알선하는 것이 매우 익숙하고, 생사 여탈(生死與奪)의 사이에 손을 써서 은혜와 위험을 함께 세우니, 돌아보건대 지금 온 조정에 있는 신하들 가운데 그 누가 권투(圈套) 속에서 벗어나겠으며, 얼마나 대담한 사람이 감히 예봉(銳鋒)의 칼날 아래에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와 같은 일이 여기에 그치지 아니하고, 전후 좌우에 상국(相國)의 사람이 아닌 자가 없어서 그 우익(羽翼)이 더욱 기세을 떨치고, 상하 안팎에 비색(否塞)의 환(患)을 더욱 조성하여 임금의 총명함을 가릴까 두렵습니다. 조정의 정치가 날로 문란하고 나라의 정사가 날로 잘못되니, 신은 그 우려되는 마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아! 송인명의 간휼함은 김재로가 채찍을 잡고서 그를 앞에서 인도하는 꼴이며, 조현명의 외람되고 교할함은 김재로가 풍교(風敎)를 받들면서 그를 마음대로 조종한 셈입니다. 역적은 비호(庇護)할 수가 없는데도 왕장(王章)을 굽힌다는 탄식이 있으며, 관직은 사사로이 임용할 수가 없는데도 그 구족(九族)이 호화로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관작(官爵)을 뇌물로써 살 수가 없는데도 재화를 가진 사람들이 높은 현관(顯官)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적게는 사리를 꾀하고 공의를 멸하는 폐해와 크게는 아랫사람을 가로막고 윗사람을 가리는 폐단이 생민(生民)의 끝없는 화(禍)가 될 것이고, 국가에 말하기 어려운 환(患)을 끼칠 것이라는 점은, 바로 발돋움을 하고서 기다려 볼 만한 것입니다. 비록 그의 재주와 기량을 가지고 논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특히 공자께서 일컫은 바 두소(斗筲)242)  의 재주이고, 한나라 가의(賈誼)가 말한 바 도필(刀筆)·광협(筐莢)의 관리일 뿐입니다. 그 스스로가 이른바 마련하고 설시했다는 것은 문부(文簿) 사이에 자획(字劃)을 교정하는 데에 지나지 아니하고 나라의 커다란 정책은 전혀 세우지 못하였던 것이며, 그 스스로가 이른바 정통하다는 것은 사례(事例)상 자질구레한 일을 살펴 식별하는 데에 지나지 아니하고 큰 체모는 전혀 세우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일찍이 한 가지 사건도 제대로 조치하지 못하였고, 한 가지 정책도 제대로 구획하지 못하였으니, 국가를 위하여 장구하게 다스리는 계책을 만들고 생민(生民)을 위하여 오래도록 안정된 계책을 세운다면, 장차 어찌 저러한 재상을 등용하여 일을 하시겠습니까?
잇달아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전하께서 신린(臣隣)을 대접하는 도리에 있어서 대관(大官)과 소관(小官)을 현격하게 구별하시는데, 위엄과 노여움은 언제나 소관들에게 미치고, 총애와 사랑은 대관들에 치우치게 두터우십니다. 소관들에게 있어서는 옳다고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다만 그르다고 하는 것만을 보았으며, 대관들에게 있어서는 그르다고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다만 옳다고 하는 것만을 보았을 뿐입니다. 《중용(中庸)》에서는 비록 구경(九經)의 뜻을 중하게 여기지만, 왕자(王者)는 신하들을 차별없이 똑같이 사랑하는 도리를 마땅히 베풀어야 합니다. 금세(今世)의 사람들은 똑같이 전하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으니, 그들의 높고 낮은 신분이 비록 차이가 있더라도 그들의 현명하고 어리석은 것이 무슨 현격한 차이가 있겠으며, 친하고 소원한 관계가 비록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어찌 다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형벌을 내리는 것은 오로지 편파적이고 죄를 용서하는 것이 너무 심한데, 심지어 대각(臺閣)의 신하에 이르러서는 그 잘못에 대해 말할 수 없도록 하고는 절해나 궁벽한 변방에 귀양보내는 행렬이 서로 잇달고 재상들은 아무런 탈 없이 총애를 받는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대각(臺閣)의 사이에서도 그 기풍과 태도가 갑자기 변하였고, 묘당(廟堂)의 위에 서 있는 교만한 기운이 겹겹이 생겨서, 이에 감히 크게 입을 열고 큰 소리치기를, ‘우리는 대신인데, 그 누가 감히 우리들의 머리털 하나라도 다치게 할 것인가?’라고 하며, 대소(對疏)하기에 이르러서는 문득 ‘조정을 수치스럽게 하고 묘당에 욕을 끼친다.’는 따위의 말을 대단한 기세로 분주하게 말하였습니다. 아! 대각(臺閣)에서 대신을 논핵하는 것은 본래 이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들은 커다란 변괴(變怪)를 만드는 일로 보아 마치 사대부가 상놈[常漢]에게 욕을 당하는 것과 같이 여기는 듯함이 있으니, 진실로 이미 가소로운 일입니다. 간혹 은연중에 국문(鞫問)을 청할 뜻을 보이어 마음대로 국문에 참여하는 반열에 끼어서는 심상하게 이것을 보고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려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또 혹은 천위(天威)의 아주 가까운 곳에서 땅을 치고 기세를 부려 가면서 아들을 자랑하고 선전하여 묘당의 위계에 구분을 크게 업신여겼고, 인신(人臣)의 예의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교만하고 외람된 습속이며, 조정에 마치 아무 사람도 없는 것처럼 보는 것인데, 또한 반드시 전하께서 이것을 인도하신 데에 연유되어 그렇게 된 것 아님이 없습니다."
하였다.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이언세를 어전에 나오게 하여, 그 소장을 읽도록 하고 조목 조목 힐문하였는데, 이언세가 일일이 대답하기를 매우 자세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일에 비로소 진짜 소인배를 보았다. 대간(臺諫)이 아니면서 백의(白衣)로서 이따위 말을 늘어놓은 것은 바로 당파의 소굴이다."
하였다. 처음에는 그 관직을 삭탈하도록 명하였으나, 이어서 또 경성(鏡城)에 귀양보내게 하였는데, 날짜를 갑절이나 앞당겨서 압송하여 보내게 하였다. 이에 영의정 김재로는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대죄(待罪)하다가 이어서 도성 바깥으로 나갔으며, 좌의정 송인명은 정고(呈告)하였고, 우의정 조현명도 또한 상소를 올리고 도성을 나갔다. 임금이 승지를 보내여 영상을 돈독하게 유시하고, 그로 하여금 함께 오게 하였다. 또 좌상·우상에게 유시하여 스스로 돈독하게 힘쓰고 쓸데없이 나날을 보내지 말도록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장차 창덕궁(昌德宮)으로 환어(還御)하려 하였으나, 이에 이르러 그 명령을 중지하였으니, 궁전의 문이 불타 버렸기 때문이었다.

 

장령 윤광천(尹光天)이 화재 때문에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제택(第宅)이 사치스럽고 커서 참람한 것도 또한 족히 천재(天災)를 부를 수가 있는데, 그 중에서 더욱 심한 것은 박찬신(朴纘新)의 집입니다. 유사로 하여금 제도에 지나친 집을 헐어서 철거하게 하되, 반드시 박찬신의 집부터 시작하게 한다면, 삽보(箑莆)243)  ·가화(嘉禾)가 반드시 화재가 일어난 땅에서 생길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훈신(勲臣)들이 너의 소장을 본다면, 반드시 장차 스스로 힘쓸 것이다."
하였다.

 

영중추부사 서명균(徐命均)이 상소하기를,
"금일의 시사(時事)는 진실로 우려할 만한 일이 많은데, 그 ‘사(私)’ 자 하나의 글자가 가장 큰 병폐의 근본 원인이 됩니다. 위와 아래에서 모두 이를 파탈(擺脫)할 수가 없으므로 세상의 도리가 날로 떨어지고 기강이 점차 문란하며, 당파의 습성을 떨어버리지 않아서 언의(言議)가 사리에 어긋나고, 수령(守令)을 잘 고르지 않아서 소민(小民)이 곤란을 받으며, 인재를 등용하고 버리는 데 공평하지 못하여 관방(官方)이 혼란하여 집니다. 대저 여러 가지 병폐의 근원은 모두 ‘사(私)’자 가운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0월 15일 무오

밤에 객성(客星)이 각수(角宿)의 도내(度內)에서 나타났는데, 꼬리가 있었다. 문신 측후관(文臣測候官)을 차출하여 윤번으로 관상감(觀象監)에 입직케 하라 명하니, 관례였다.

 

10월 16일 기미

사간 민계(閔堦)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둥 번개의 변고에서도 또한 이미 평안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또 화재[回祿]가 재앙을 고하니, 성덕(聖德)에 잘못이 있는 것입니까, 시정(時政)에 잘못이 있는 것입니까? 멀고 아득한 하늘을 신은 감히 알지를 못합니다만, 대저 불이란 것은 성질이 급하고 화염이 빠른 것이므로, 정전(正殿)의 출입하는 문에까지 옮겨서 불탔으니, 사람의 일로써 이를 추측하건대, 그 뜻하는 것은 전하께서 마음을 다스리고 성정(性情)를 보양하시는 것이 혹시 성정을 연축(淵滀)하고 마음을 함정(涵靜)하는 공부에 잘못이 있기 때문에, 그 결과가 나타나서 정치를 하는 것이 능히 화기를 펴서 너그럽게 하지 못하고 대개 신속하게 처리하는 폐단이 많은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정사를 과격하고 고달프게 처리함이 있으면, 그 위엄과 노여움의 준렬함이 바람이 급하게 일어나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보다 지나침이 있을 것입니다. 인주(人主)의 일동 일정(一動一靜)은 문득 하늘의 재앙과 상서의 부응(孚應)으로 나타나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지평 민광우(閔光遇)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하늘이 천둥하고 화재가 일어나는 것은 오히려 항상 있는 변고이겠습니다만, 전 정언(正言) 이언세(李彦世)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세상의 도리가 요사스럽게 변하였다고 이를 만합니다. 아! 전하께서는 유독 이미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지 아니하십니까? 일찍이 신해년244)  에 있어서 이사상(李師尙)의 문객 이대원(李大源)이 의심스럽고 올바르지 않은 말로써 고 영상(領相) 홍치중(洪致中)을 논핵하였으며, 정사년245)  에 있어서 권익관(權益寬)의 종손자 권집(權䌖)이 무함하고 패륜한 말로써 지금의 좌상 송인명(宋寅明)을 논핵하였었는데, 지금에는 이언세가 망칙한 말로써 영의정 신 김재로(金在魯)를 무고하였고, 좌상·우상도 또한 그의 일망 타진하려는 대상 가운데에 들어갔습니다. 나라의 큰 정책의 시비가 소멸되는가, 확대되는가를 보아 가면서 사람들은 온갖 괴이한 지론으로 이리저리 얽어 맞추어 말하므로, 오랫동안 이미 세상을 시끄럽고 떠들썩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이언세 한 사람이 홀로 판별할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당파를 조정하는 폐단이 일진 일퇴(一進一退)하는 화(禍)보다 심한 점이 있다.’라고 생각하신다면 진실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만약에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이와 같이 간사하고 흉악한 사람은 그 죄를 엄하게 바로잡아서 한 사람을 징계함으로써 1백 사람을 경계하는 본보기로 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이를 처리하였다."
하였다.

 

인정문(仁政門)을 중건하도록 명하고, 호조와 병조에 당상과 낭청 각각 1인씩으로 하여금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10월 17일 경신

장령 윤광천(尹光天)을 친국하고, 이어서 흑산도(黑山島)에 천극(栫棘)하라고 명하였다. 이언세의 사건을 처리한 뒤에 윤광천이 아침에 대각에 나아가서 청대(請對)하였는데, 밤 3경에 임금이 비로소 그를 불러서 보았다. 윤광천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관동 지방을 양전하는 일에 대하여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신하여 처리하게 하였고, 이중조(李重祚)를 파직시키는 일은 윤허하였다. 그가 또 아뢰기를,
"사령(辭令)이라는 것은 덕치의 부험(符驗)이므로 옛날의 명왕(明王)은 반드시 이것을 신중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언관(言官)을 책망하시어 대부분 고가(藁街)246)  에 설문(設問)한다는 죄목에 비기시는데, 당나라 때에 인주(人主)들은 모두 간관(諫官)에 대해 몹시 노하였어도 다만 관직을 깎아 변방에 귀양보냈을 뿐이었고 형륙(刑戮)과 주살이 있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정말로 그들을 설문하여 주륙하고자 하십니까? 만약 다만 그들을 위협하려고 이미 여러 차례 그리하셨다면 두려울 것이 없겠습니다만, 과연 진짜로 이것을 행한다면 후세에 전하를 어떠한 임금이라고 하겠습니까? 청컨대, 이러한 등의 하교를 마음에서 싹틔워 사륜(絲綸)에 나타내지 마소서. 이언세의 중도에 지나친 말은 반드시 여론의 오랫동안 쌓인 불평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니, 불평을 쌓게 한 것은 바로 대신들의 잘못인 것입니다. 이 언세가 소년처럼 비분 강개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말을 제대로 골라서 하지 못하였으나, 이것은 족히 깊이 죄를 줄 만한 것이 못되는데, 어찌 전하께서는 경솔하게 그를 꺾어 버리시기를 더하시고, 또 엄한 하교를 내리시는 것입니까? 심지어 고가에 설문한다는 등의 말씀을 하시면서 위엄과 노여움으로 크게 진노하시니, 이것이 어찌 성인(聖人)의 사령과 교지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재이(災異)를 만나 수성(修省)하는 때에 한편으로는 소석(疏釋)할 바를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귀양보내어 쫓아내는 형벌을 시행하시는데, 재앙을 없애거나 완화시켜 화기(和氣)를 인도하여 맞이들이는 방도가 아닙니다. 청컨대 이언세를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이언세가 영상을 침해하고 배척한 것을 옳다고 하는 것인가? 좌상이 간사하고 음흉하며 우상이 외람되고 교활하다는 것도 또한 마땅하다고 여기는가?"
하자, 윤광천이 말하기를,
"이언세의 상소 또한 중도에 지나침이 없지 아니하나, 영상이 잘못한 바도 없지 아니하며, 좌상과 우상도 또한 개제(愷悌)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가에 설문한다는 말은 바로 임금의 대훈(大訓)에 불만스러운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너도 또한 대훈에 불만인가?"
하니, 윤광천이 말하기를,
"신이 만약 대훈에 불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어탑 앞에 출입하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굳이 이를 캐물었다. 윤광천이 말하기를,
"대체로 노론(老論)은 스스로 군자(君子)라고 생각하면서 소론(少論)을 가리켜 소인(小人)이라고 하며, 자기들은 충신이라고 말하면서 소론을 가리켜 역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대훈으로써 숙특(淑慝)을 식별할 수가 없는데, 경솔하게 먼저 이를 행한다면, 혹은 불만스러운 자도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스스로 군자(君子)의 당이라고 일컫는다면, 이용기(李龍紀)도 또한 그 가운데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 때문에 불만인가?"
하자, 윤광천이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불만으로 여긴다면, 이것은 반역할 마음입니다. 어찌 감히 이용기를 빼버리지 않는다고 하여 불만스러운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특별히 그 작은 절목들을 말씀하시는데, 대훈은 실로 잘못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불만스럽다.’라고 말하고, 또 ‘잘못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였다. 윤광천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의 말이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사소하게 이런 따위의 의논이 있었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훈이 깨끗하기가 해와 별과 같은데, 네가 감히 말하기를, ‘사소하게 불만스럽다.’라고 하는가?"
하므로, 윤광천이 말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그러하겠습니까? 만약 불만스러운 마음이 있다면 비록 죽음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음 속에서 싹틔우지 말라는 말은 비록 적(敵)이라고 하더라도 가볍게 더할 수가 없을 터인데, 어찌 감히 이러한 말을 군부(君父)의 앞에서 아뢸 수가 있겠는가? 네가 윤광의(尹光毅)의 족형이 되어서 속임을 당한 것이다."
하고, 이어서 먼저 그 관직을 교체시키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불만이라는 두 글자가 이미 그의 입에서 나왔으니, 이것을 묻지 않는다면 장차 대훈을 어디에 두겠는가?"
하였다. 승지 박필재(朴弼載)가 말하기를,
"윤광천은 이미 ‘대훈이 불만스럽다.’라고 말하였으니, 진실로 엄하게 처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다만 전후에 대관(臺官)들을 국문(鞫問)한 사건을 모두 몇 번이나 겪었으므로, 나라의 체모가 점차로 더욱 손상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윤광천 같은 허망된 사람이 반드시 평일에 들은 바를 가지고 지적해 알리는 것이 만연(蔓延)될 우려가 많으니, 어찌 크게 민망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만연될 걱정은 내가 마땅히 헤아려서 처리하겠다."
하고, 드디어 친국하겠다고 명하였다. 이때 윤광천은 궁문을 닫아서 나올 수가 없었으므로 아직도 대궐 안에 있었는데, 이에 개양문(開陽門) 밖에서 조복(朝服)을 벗기고 가계(枷械)를 갖추어서 국청(鞫廳)에 하옥하였다. 임금이 친히 금상문(金商門) 밖에 친림하여 ‘당인(黨人)을 붙좇고 대훈에 불만스럽다.’라는 등의 정절(情節)을 신문하였는데,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증인으로 끌어들여 고발하지 말게 하였으니, 대개 그 사건이 만연될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윤광천은 다만 ‘당인을 붙좇는다.’라는 것만을 자복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자복하지 아니하면서 심지어 ‘이언세가 문득 불만스러운 마음을 가졌었다.’고까지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 밤에는 그를 구원하려고 꾀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이언세를 밀치어 배척하니, 이것도 또한 무상(無狀)하다."
하므로, 윤광천이 말하기를,
"이언세의 상소에서 은연중에 ‘음양이 뒤섞이고 숙특(淑慝)을 구분하지 못한다.’라는 저의가 있었으므로, 이것이 불만스럽다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은 것을 알고 있었다면 무슨 까닭으로 이언세를 구원하려고 하였는가?"
하자, 윤광천이 말하기를,
"대각(臺閣)에 나아간 뒤에야 비로소 그 전체 소장을 보고서 그것을 알았으며, 이미 청대(請對)하기를 구하였기 때문에 대각의 체모에 구애되어 태도를 바꾸어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부도(不道)하게 위를 범하고 국시(國是)를 현란시켰다는 것으로 지만하여 납공(納供)하도록 명하였으나, 윤광천이 불복하였다. 이때 임금이 몹시 노하였는데, 윤광천이 형벌을 받을 즈음에 눈물을 흘리면서 ‘아비의 살을 잠시 어루만져 보고 죽겠다.’고 청하였으니, 윤광천의 집에 여든 살 먹은 늙은 아비가 있었기 대문이었다. 임금이 참담한 모양으로 한참 동안 있다가 형을 정지시키라 명하고, 말하기를,
"사람이 장차 죽으려 할 즈음에는 그 말하는 것이 선하다고 하였는데, 그도 또한 한 가닥 타고난 천성(天性)을 지키는 마음이 없어지지 아니한 점이 있다."
하자, 판의금부사 정석오(鄭錫五)가 나아가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그 죄는 족히 징계할 만하지만, 마땅히 효자의 도리를 참작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만약 죽는다면, 우리 전하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판의금부사가 나의 마음을 알고 있다."
하고, 이어서 섬에 유배하되, 그로 하여금 아비를 보고 떠나게 하라 명하였다. 또 이언세에게는 즉시 그가 귀양간 곳에 가극(加棘)하라 명하니, 윤광천의 공초로 인한 것이었다.

 

판중추부사 김흥경(金興慶)이 상소하여 윤광천(尹光天)을 친국(親鞫)한다는 명령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10월 19일 임술

임금이 정시(庭試)의 문과 전시(文科殿試)에 친히 나아갔는데, 바로 임금의 병후가 회복된 것을 경축하는 과거였다. 이때 홍봉한(洪鳳漢)이 왕실과 혼인을 맺었으므로 조정에서 반드시 그를 물색(物色)하고자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과연 과거에 급제하였다. 임금이 고관(考官) 등에게 말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정성을 다하면 쇠와 돌도 뚫을 수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세도를 보고 그렇지 않은 것을 내가 부끄럽게 여겼으니, 이번에 ‘호석(虎石)을 쏘았다. [射虎石]’라는 제목을 명한 것도 그 뜻이 여기에 있었다."
하였다. 승지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무릇 사알(司謁)이 하교(下敎)를 구전(口傳)하는 것은 곧바로 봉행(奉行)하기 위한 것인데, 잘못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것을 알겠습니까? 마땅히 주서(注書)로 하여금 조례(條例)에 의거하여 글로 써서 바치게 하고 다시 성상의 예람(睿覽)을 거친 다음에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옳게 여겼다.
또 말하기를,
"여러 도에서 올리는 장계(狀啓)는 인신(印信)을 찍지 아니하므로 허술함을 면하지 못합니다. 연·월·일이 있는 곳에 마땅히 인신을 찍도록 정식(定式)하여 대신들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들이 일이 불경한 데 관계된다고 하여 이를 중지하도록 아뢰었다.

 

임금이 밤에 입직한 승지를 불러서 하교하기를,
"내가 비록 덕이 적지만 실지로 간관(諫官)을 죽인 일은 없었는데, 한 사람의 괴상한 자 때문에 거의 내가 간관을 죽였다는 누명을 들을 뻔하였다. 내가 비록 한 사람의 무상(無狀)한 자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것이 대각(臺閣)에 욕을 끼치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이것은 너그러움을 후세에 남기는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깊은 밤중에 소견(召見)하고 유시하는 것은 후세의 임금으로 하여금 나의 마음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박필재(朴弼載)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온화하고 간언(諫言)을 나오게 하여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훌륭한 뜻이 있으니, 족히 사책(史冊)에 빛남이 있을 것입니다. 근래에 대각에서 모두 행공(行公)하지 않는 것으로 묘책을 삼으니, 진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이후로는 대각에서 말하는 것이 당론에 관계되지 아니하고, 시정(時政)의 득실과 재상(宰相)의 시비에 관련된 것은 원컨대 뜻을 더하여 살피시고 받아들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다.

 

사간 민계(閔堦)와 지평 민광우(閔光遇)의 관직을 특별히 교체시켰는데, 윤광천(尹光天)의 죄를 참작하여 처리할 때에 이를 간쟁하고 의견을 고집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하교하기를,
"대훈(大訓)은 바로 나의 금석(金石) 같은 전장인데, 위로 어디에 고하겠으며 아래로 어디에 내려 주겠는가? 만약 털끝 하나만큼이라도 불만스러운 사람이 있다면, 비록 대관(大官)이라고 하더라도 왕가의 전장이 지엄한데, 하물며 보잘것 없는 이런 무리이겠는가? 비록 타고난 천성을 지키는 마음이 없어지지 않은 데에 감격한 마음이 일어난 것으로 인하여 특별히 참작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처음 청대(請對)에서 대훈의 절목이 미비(未備)하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신문한 것이다. 이 뒤로 만약 이런 따위의 말을 소장에 등서하거나 연석(筵席)에서 아뢰는 자가 있다면 결코 다시 신문하지 아니하고 나라의 형벌을 쾌히 바루어서 그 사실을 팔도에 널리 반포해 보일 것이니, 중외로 하여금 모두 이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민응수(閔應洙)를 좌천시켜 청주 목사로 삼고, 이조 참의 윤급(尹汲)을 일신 현감(一新縣監)으로 삼았는데, 이언세(李彦世)와 윤광천(尹光天)을 대각의 자리에 의망(擬望)하여 통과시켰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처음에 윤급을 제수하여 여산 현감(礪山縣監)으로 삼으면서 말하기를,
"청주(淸州)는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고, 여산(礪山)은 그 마음을 신칙하여 갈고 닦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는데, 곧바로 부사(府使)는 관질이 높다고 하여 일신 현감으로 바꾸도록 하고 말하기를,
"일신(一新)이란 고을 이름도 또한 그 마음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전 대사헌 이주진(李周鎭)을 발탁하여 이조 판서로 삼고, 참의 홍상한(洪象漢)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으며, 전 승지 조재호(趙載浩)를 이조 참의로, 전라 감사 원경하(元景夏)를 부제학으로, 전 대사성 정형복(鄭亨復)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는데, 모두 중비(中批)247)  였다. 이때에 임금이 이언세(李彦世) 등이 탕평책을 저지하고 조롱하였다고 하여 이러한 명령이 있었는데, 정형복은 본래 청렴하고 간결하다는 명망이 있었다.

 

동지사(冬至使) 신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와 어유룡(魚有龍) 등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이번 7월에 황태후(皇太后)와 황후(皇后) 앞에 바치는 표문(表文)·전문(箋文)의 격식을 모두 합하여 하나의 격식으로 만들라는 자문(咨文)이 우리 나라로 나왔는데, 그 회답하는 자문을 장차 신들의 행차에 순부(順付)248)  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대저 이러한 일들은 모두 전례가 있으니, 강희제(康熙帝)의 상(喪)·옹정제(雍正帝)의 상 때와 건륭제(乾隆帝) 때에 황태후에게 존호를 더하여 올린 뒤에 모두 표문의 격식에 대한 자문을 우리 나라에 보내어 온 일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모두 기일보다 앞서 먼저 통보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례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신들의 행차에 순부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아니합니다. 저들이 만약 말하기를, ‘이미 기일 전에 먼저 통보하던 전례가 있는데, 어찌 하여 절사(節使)의 행차에 방보(防報)249)  를 하는 것인가?’라고 한다면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고, 혹시 불순(不順)한 말이 있다면 경색(梗塞)되는 한 문제가 생길까 염려스럽습니다. 이미 삼공(三公)들과 더불어 상의하여 먼저 자문을 보내는 것을 정식으로 삼았지만 대신들이 지금 모두 유고(有故)하기 때문에 바로 청대(請對)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어 먼저 재자관(䝴咨官)을 보내라 명하고, 또 마상(馬尙)의 문제를 회답하는 자문도 또한 재자관에게 부치라 명하였다.

 

전 대제학 이광덕(李匡德)에게 직첩을 주어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덕의 거조가 비록 해괴하지만, 그 본심은 단연코 다른 뜻이 없음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 그 아비를 추모하여 생각하더라도 어찌 그를 물리쳐 버려 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20일 계해

예조에서 조성 도감(造成都監)의 당상과 낭청을 차출하여 악기(樂器)를 개조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이를 좋다고 하였는데, 인정문(仁政門)의 화재 때에 악기와 헌가(軒架)가 모두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안상휘(安相徽)를 사간으로, 이규휘(李奎徽)와 정광운(鄭廣運)을 장령으로, 윤지태(尹志泰)를 헌납으로, 여선응(呂善應)과 이수해(李壽海)를 지평으로, 이규채(李奎采)와 최성대(崔成大)를 정언으로, 조명정(趙明鼎)과 윤동준(尹東浚)을 교리로 삼았다.

 

10월 21일 갑자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거둥하여 선원전(璿源殿)에 전알(展謁)하였는데, 예조의 계청으로 인하여 전정(殿庭)의 헌가(軒架)를 전부·후부의 고취(鼓吹)로써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사학(四學)의 유생 곽진순(郭鎭純)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종사(從祀)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이미 유시하였다고 비답하였다.

 

10월 22일 을축

밤에 유성(流星)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그 모양이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10월 23일 병인

전라도 생원 한치명(韓致明) 등과 경기도 유학 조완(趙) 등과 경상도 진사 정중희(鄭重熙)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 송시열과 문정공 송준길을 문묘에 종사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전과 같이 비답하였다.

 

임금이 찬집(纂輯)하는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속대전(續大典)》을 강론하였다가 파하였다.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아뢰기를,
"황해도 수사 신덕하(申德夏)가 백령 첨사(白翎僉使) 변주국(邊柱國)의 병상이 위중하다고 장문(狀聞)하여 그를 파출시켰는데, 이러한 일은 전대에도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마땅히 신덕하를 추고하여야 하며, 변주국도 마땅히 그대로 유임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를 추고(推考)하는 것은 너무 경솔하다."
하였다. 서종옥이 자주 관리를 교체하는 것이 민망스럽다고 하자, 임금이 비로소 이를 윤허하였다.

 

10월 24일 정묘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아래로 들어갔다.

 

10월 25일 무진

화성(火星)이 태미 서원 안으로 들어갔다.

 

10월 25일 무진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여 이언세(李彦世)의 소장에 대해 변명하기를,
"소하(疏下)의 6적(六賊)에 대한 일은, 을사년250)                   봄에 신이 사유를 받고 파주(坡州)에 돌아와서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친병(親病) 때문에 조정에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6적을 잡아다가 국문하자는 계청(啓請)이 겨우 정지되었고 멀리 귀양보내는 행차가 바야흐로 출발하려 할 즈음이라, 진실로 대간에서 계청을 정지한 것을 알고는 반드시 다시 발의할 의논이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멀리 귀양보내는 것은 너무나 가볍고 헐한 데 관계되므로, 먼저 절고(絶島)에 귀양보내어 가극(加棘)하기를 청하고, 뒤에 형률을 가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상소하는 글의 말미에다 앙청(仰請)하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소하는 몸은 다르나 마음보는 같아서 대단히 흉악한 것을 나라 사람들이 지적한 바입니다.’라고 하였고, 두 번째 상소에는 ‘소하의 6적은 죄악이 가득하게 찼는데, 우선 먼저 절도에 귀양보내어 가극하는 것을 무슨 아낄 바가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선 먼저[姑先]’라는 두 글자에서 보더라도 신의 뜻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광의(李匡誼)가 범한 죄는 비록 무겁다고 하지만, 성상께서 이미 정상을 참작하여 처리하신 것은 그를 죽이지 않기로 관대히 보아 준 것인데, 그의 풍토병이 위중하여 반드시 죽을 형상이 있다는 말을 듣고 연석에서 아뢰어 육지로 나오게 한 것은 다만 부생(傅生)251)                  하신 덕의(德義)를 우러러 본받고자 하였던 것뿐이니, 만약 이것을 일컬어 ‘자비로움이 지나치다.’라고 한다면 옳을 것입니다. 이광의는 까닭 없이 신의 종제(從弟)를 무고하였던 자인데, 어찌 신이 조금이라도 그를 아끼고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그리하였겠습니까? 신은 정상으로 보아 반드시 죽음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이언세는 그의 목을 베어 만 조각으로 만들어도 부족하다고 여겼습니다. 의견의 근원이 이미 서로 현격하게 멀었으니, 그것이 서로 합치되지 못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이광덕(李匡德)은 역려(逆旅)252)                  에서 서로 만났으나 일찍이 그 집안을 한번도 알지 못하였으며, 그 다음해에 우러러 말씀을 드린 것은 사사로움을 위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 이것을 몰래 내통하고 은밀히 단합하였다고 하니, 또한 무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성운(金聖運)은 이름난 조상의 자손으로 위엄이 있고 명석하며 청렴하고 근신하여 이르는 곳마다 크게 정치를 잘하였는데, 단지 법에는 4촌 동서 사이에 상피(相避)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또한 연루를 당하였던 것이며, 김후(金𣖔)는 곧 신의 당숙인데, 성명께서도 또한 일찍이 그를 여러 번 보셨습니다. 그가 유독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겨우 사람의 모습을 갖추었다.’라는 따위의 말을 함부로 내뱉어 그를 능욕하는 것입니까? 신의 아들이 강서(江西)의 수령에 제수된 것은 신이 해직되어 집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정격(政格)에 문제가 있어서 서북 고을에 비준되지 못한 것도 또한 원하던 바가 아니었는데, 처음에는 정체(呈遞)하게 하였다가 마침내 마지 못하여 부임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온 세상에서는 모두 ‘전장(銓長) 윤혜교(尹惠敎)가 중론을 배격하고 공도를 넓히어 하기 어려운 일을 했다.’고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벼슬을 차지하려고 도모하였다.’라고 억지로 일컬으면서 전관(銓官)의 아름다움을 덮어서 없애버리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함양(咸陽)의 수령은 진실로 신의 10촌 밖의 두 족인(族人)이 서로 교체되었던 적이 있는데, 모두 그 서열에 따라 관례대로 천직된 것이니, 혹시 하망(下望)으로 인하여 제배를 받은 것에 대하여는 신이 아는 바가 아닙니다. ‘세 사람이 서로 교체되었다.’고 한 것은 신이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끝내 기억해 낼 수가 없습니다. 뒤따라 듣건대, 그는 신이 연석에서 일일이 천거했던 세 사람 중에 김몽로(金夢魯)도 또한 그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는데, 김몽로는 함양부의 수령에 일찍이 제수된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등의 쉽게 알 수 있는 일도 그는 오히려 또한 무고하여 계달하였으니, 다른 일이야 오히려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김익로(金益魯)는 바로 신의 종제(從弟)인데, 우연히 음사(蔭仕)의 기회를 얻어서 겨우 잔열한 고을의 수령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도 못하고 병들어 죽었기 때문에 신은 평상시에 남몰래 애통하게 여겼습니다. 이언세도 또한 사람의 마음을 갖추었다면, 어찌 차마 이미 백골이 된 사람에게 무함하는 욕을 함부로 더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 것입니까?
심기(沈錡)·이광천(李光天)에 대한 일은 모두 성상께서 환하게 아시는 바이므로 반드시 번거롭게 진달한 것도 없으나, 선전청(宣傳廳)이란 하나의 관청이 장시간 시끄러워서 사람들이 모두 이곳을 병든 관청으로 보았는데, 무장(武裝)들의 의논을 들으면 모두가 말하기를, ‘한번 엄격하게 개혁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성상께서 전후에 훈계하고 신칙한 것을 게판(揭板)하라고 하기에까지 이르렀으나, 오히려 뉘우치고 고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번에 한번의 도목 정사(都目政事)에서 세 사람을 차임한 것은 전체의 숫자를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인데, 공의(公義)에서 이를 해괴하게 여기고 분개하지 아니한 바가 없으므로, 신이 연석에서 우러러 진달한 것은 단지 그 관청의 행수(行首)를 논죄하고 그 법규를 고치자고 하였을 뿐인데, 성상께서는 반드시 그 경계하는 명령을 믿음성이 있게 하고자 하시어 갑자기 비상한 조치가 계셨으니, 이것은 신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바였습니다. 그러니 대신이 어찌 이성(異姓) 5촌의 조그마한 혐의에 구애되어서 성상께 아뢰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서남 지방의 도백들을 손을 바꾸어 서로 천거하였다는 말도 또한 심히 허망한 것입니다. 조영국(趙榮國)을 호백(湖伯)에, 김치후(金致垕)를 영백(嶺伯)에 추천한 것이 수상의 자리에 재임하면서 모두 스스로 주장하였으며, 그리고 김치후는 신이 또 연석에서 주달하여 의망(擬望)하였는데, 좌상이 손을 바꾸어서 천거하였다는 말은 어디에 근거하여 발설한 것입니까? 이조 판서를 의망한 것에 대한 일은 묘당(廟堂)에서 천망(薦望)함에 있어, 진실로 혹시 친혐(親嫌)의 관계를 상피(相避)하지 않았으며, 전후에 성상의 하교에서도 여러 번 혐의하지 말라고 유시하였으나, 옹졸한 법규를 끝내 바꾸거나 고치기가 어려웠고, 말세에는 더욱 마땅히 두려워하고 조심하여야 하는데, 전조의 우두머리가 되는 중요한 권한에 어찌 감히 지친(至親)을 추천 의망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끝내 천기(薦記)에 비슷한 자를 천거하지 못했던 까닭이었습니다. 그런데 양규(兩揆)253)                  에게 회시(回示)하는 즈음에 양규가 종제를 첨가하여 쓰고는 스스로 좌상·우상이 천거하였다고 주를 달았던 것입니다. 신은 비록 마음에 부끄러울 바가 없으나, 이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조롱하고 배척하는 것도 또한 무엇이 괴이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가 지껄인 말들이 대단히 참혹하여 사건에 따라서 일을 논하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아울러 신의 아우를 중상하려는 뜻을 분명히 가지고 있으니, 그것도 또한 불미함이 심합니다. 영남의 번신(藩臣)으로 있다가 돌아올 때의 짐바리가 풍부하였다는 것은 그가 이미 연중에서 스스로 그 잘못을 인식한 사실을 자복하였으니, 신이 어찌 반드시 다시 그 잘못된 것을 뚜렷이 제시하겠습니까? 이언섭(李彦燮)은 곧 신의 막비(幕裨)인데, 성감(聖鑑)의 가상하게 여기어 포장하시는 은혜를 지나치게 입었습니다. 신이 병조의 전형(銓衡)를 맡았을 때에 말단으로 영장(營將)의 자리에 의망하여 낙점(落點)을 받았었고, 그 뒤에 주(州)·군(郡)의 수령을 두루 역임하였지만, 모두 그 스스로 그 자리에 이르렀으며, 절도사에 임명된 것은 신이 벼슬자리에 물러나 야인으로 있을 때였으니, 더욱이 신에게 무엇이 관계되었습니까? 영장으로 재임할 때 한 달에 여섯 차례나 음식물을 대접하였다는 것은 연중에서 그에게 들으니, ‘간첩(簡帖)에서 신의 회답을 얻어 본 것으로써 증거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반드시 그러할 리가 없습니다. 나주(羅州) 지방은 9일이나 걸리는 노정이고 영장은 객관(客官)이므로 한 달에 여섯 차례 문안하는 것은 결코 그 형세상 그리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언섭이 마침 먼 외방에 있어서 그 간첩을 취하여 보고 그 무망(誣罔)한 것을 깨뜨려 버릴 방도가 없음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이우(李玗)는 특별히 그를 천거하던 초기부터 이미 그가 노성(老成)하다는 명망이 있었는데, 같은 시기에 특별히 천거된 자들과 비교하면 가장 침굴(沈屈)하였으나, 무장(武將)이 여러 번 공적으로 천거하였기 때문에 마침 중군(中軍)의 부족한 사람을 채우던 때를 당하여 연석에서 그를 승진시켜 제수하도록 아뢰었던 것이니, 전례에서도 그리하였던 것입니다. 장요(長腰)254)                  ·명기(名妓)’ 등의 말들은 전적으로 무고하게 꾸며낸 것인데, 통제사의 빈 자리가 생겼을 때 구차스레 임명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첫째로 의망하는 것을 꺼려하였겠습니까? 다만 덕(德)으로써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문득 말단의 의망에 두었다가 우연히 성상의 낙점을 받았으며, 그 의망기(擬望記)가 아직도 있는데, 이를 ‘교묘하게 의망하였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대간의 계달(啓達)에서 단지 ‘나이가 적지만 별로 하자는 없다.’라고 말하였을 뿐인데, 그 계달이 도로 정지되었고, 부마(夫馬)가 오랫동안 지체되어 또한 폐단을 많이 끼치기 때문에 독촉하여 보내기를 계달한 것도 또한 관례입니다. 신이 마침 정고(呈告) 중에 있다가 은수(恩數)에 못 이겨서 임금의 명령을 받들기에 이르렀으나, 어찌 한 사람의 무신(武臣)을 위하여 출사하였겠습니까? 참으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은자 3백 냥과 동전 7백 냥의 말에 대하여서는, 재상의 집에 반찬이나 지물(紙物)을 보내는 것도 오히려 포저(苞苴)255)                  라는 부끄러움이 있는데, 세상에 어찌 은자와 동전을 직접 받는 일이 있겠습니까? 그 이른바 ‘대변(對卞)한다.’라고 말한 것은 대개 그러한 까닭이 있겠습니다만, 그가 연석에서 대답할 때에 또 남의 성명(姓名)을 그대로 드러내니, 신이 어찌 한번이라도 이를 진술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관계된 바가 지친(至親)에 해당되니, 신은 실로 마음이 부끄럽고 몸이 위축됩니다. 신의 아들과 이우가 같이 연막(燕幕)에 나아갔기 때문에 이우가 더러 제 아들을 방문하였는데, 하루는 제 아들이 신에게 말하기를, ‘이우가 와서 말하기를, 「지난번에 훈련 대장을 찾아가 배알하니, 훈련 대장이 말하기를, 윤 참판의 말을 들으니, 그대가 수백 냥의 전화(錢貨)를 보내어 영상의 막내아들 이 후취(後娶)하는 혼수(婚需)에 부조하였다고 하였는데, 과연 얼마 정도를 보냈는지를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라고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저 곳에 있을 때는 전혀 그가 후취하는지의 여부를 듣지 못하였었고, 돌아와서야 비로서 이를 들었다. 그런데 설령 듣고서 그것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그 사행길에서 그것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서로 수작(酬酌)하고 물러갔는데, 근래에 행동과 말이 정말로 무상(無狀)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윤 참판이란 바로 신의 종제 윤득화(尹得和)로서 훈련 대장과도 또한 5촌 친척이 되기 때문에 신이 이 말을 듣고서 해괴하고 통탄스러워서 바로 윤득화를 만나 그것이 허망된 거짓말이라고 말하면서 세상의 도의를 개탄하였습니다. 신이 이어서 그것을 어떤 사람에게서 얻어 들었는지를 물었더니, 윤득화가 말하기를, ‘처음부터 이것을 듣지 못하였고, 또한 말한 바도 없다.’라고 하므로, 신이 이를 의아하게 여겨 말하기를, ‘그렇다면 혹시 훈련 대장이 잘못 기억한 것인가? 아니면 이우가 잘못 들은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뒤에 들으니, 윤득화도 또 그 종질(從姪)을 보내어 훈련 대장에게 서로 질문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언세의 상소에서는 혼수가 변하여 재산을 모으려 꾀한다고 하였고, 또 3백 냥의 은자란 말을 더 보태었습니다. 말을 하여 헐뜯고 욕하는데, 다시 어찌 구구하게 변명하겠습니까마는, 3백 냥이니, 7백 냥이니 하는 것은 가득차서 넘치는 장물(贓物)에 관계되므로 이를 준 자와 받은 자는 모두 극형에 해당되는데, 조정의 도리에 있어서 결단코 대신을 암담한 가운데에 그대로 두는 것은 용납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또 이것은 남몰래 전달한 물건이 아니고, 그것을 반드시 여러 짐바리에 실어 잇따라 날랐다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니, 만약 이것을 엄중히 핵실(覈實)하여 밝게 처리하지 않는다면, 신이 어찌 하늘과 땅 사이에 얼굴을 들고 다니겠습니까? 이 일은 결코 다만 여기에서 그칠 수가 없습니다. 이의풍(李義豊)이 아녀자에게 위협을 당한 것은 뜻밖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재주와 명망이 있어서 관직에 있을 적에는 청렴하고 검약하였으니, 곤수(閫帥)의 직임에만 그치지 않게 함이 마땅하다며 묘당(廟堂)에서 추천함에 있어 이런 사람을 두고 그 누구를 천거하겠습니까? 어유기(角有琦)는 처지와 담략이 보통 사람들과 달라서 진실로 북곤(北閫)의 직임을 역임하였고 또 통수(統帥)에 의망되었으니, 금영(禁營)의 중군(中軍) 자리는 곧 이것을 전례로 하여 제수하는 것입니다. 그는 수행(隨行)한 지 여러 달만에 병으로 인하여 저절로 교체되었으나, 주장(主將)이 독촉하여 정체(呈遞)하도록 한 것은 원래 이러한 일이 없었으니, 얼마나 그것이 맹랑(孟浪)하기가 심합니까? 지금 강계(江界) 지방은 본래 초피(貂皮)와 인삼으로 유명한데, 두 사람이 모두 강계의 수령을 지낸 연고를 가지고 억지로 더러운 누명을 신에게 더하니, 이를 말하는 자는 비록 쉽게 여길 것이나, 당하는 자야말로 어찌 원통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지금부터 비록 쓸 만한 명변(名弁)이 있다고 하더러도 한번 강계의 수령을 거치면 반드시 모두 물리쳐 버리고 쓰지 않는 다음이라야 옳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도리이겠습니까?
동반과 서반의 전주(銓注)를 신이 분부(分付)하였다는 말에 대해서는 대신이 사람을 쓰는 것을 검칙(檢飭)하는 것은 곧 그 직분입니다. 만약 누가 곁에서 비루하게 굴고 오랫동안 훼방하여서 전관(銓官)이 능히 사람을 쓰지 못한다면, 대신이 어찌 반드시 말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런데 근일의 소장에서 문득 대신이 전주의 정사에 간섭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신은 일부러 이를 보고 경계하여 아주 드물게 입을 열었던 것이며, 이조 참의        윤급(尹汲)과 같이 세상에서 좋아하고 서로 친한데도 또한 일찍이 부탁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밖의 일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허다한 변방의 곤수와 고을의 수령을 두루 헤아려 보건대, 신의 말로 인하여 그 관직을 얻은 자는 과연 몇 사람이겠습니까? 이서(吏胥) 이하는 더욱 족히 세세하게 이를 분변할 것도 없습니다. 서쉬(西倅)의 지장(支裝)에 관한 일은 비록 지극히 비루한 대신이라 하더라도 어찌 무쉬(武倅)의 지장에 간섭하는 일이 있겠으며, 비록 지극히 친절한 무쉬라 하더라도 어찌 감히 그의 지장을 보내어 대신에게 보이겠습니까? 이런 따위의 허황되고 자질구레한 말들을 차마 능히 글로 서서 제출하였는데, 가령 그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지라도 이러한 말을 믿고서 쓰는 것은 그것도 또한 가난한 사람이 아이를 구걸시키는 꼴입니다.
통영(統營)의 우산에 관한 일은 지금 비로서 이것을 얻어 들었습니다. 이우가 장중(場中)의 우산을 만들어 신의 아들에게 보냈는데, 이우의 형이 장난삼아 억지로 빼앗아 가기로 신의 아들이 통영에서 온 사람을 시켜 가서 다시 찾아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듣자니 그가 연중에서 위의 두 가지 일을 가지고 신의 아들에게 죄를 돌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미 상소한 말과 서로 어긋나며, 저리(邸吏)를 잡아 가두었다는 것은 신의 아들이 제 마음대로 할 까닭이 없고 신도 또한 이것을 알지 못하니, 그 말이 사실과 틀리는 것을 미루어서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설령 정말로 가두었다 하더라도 그 집에 독촉하여 징수하고 그 몸에 직접 장형을 받을 것 같지 않는다면, 저인(邸人)의 가족들이 어찌 하늘을 원망하고 땅을 치면서 울부짖는 데까지 이르렀겠습니까?
그 상소에서 가장 장황하였던 것은 바로 신의 죽은 부모를 천장(遷葬)하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혹 근리(近理)할 듯하여 성총을 현혹되게 할 수 있으므로, 그는 이것에 대하여 더욱 힘을 기울였는데, 신이 통절하게 할 수 있으므로, 그는 이것에 대하여 더욱 힘을 기울였는데, 신이 통절하게 원망하고 번민하는 것도 더욱 이것에 있습니다. 신의 부모를 각기 경기와 호서 지방에 장사지냈었으나, 묘지(墓地)가 좋지 못하므로, 신은 수십 년 이래 길지(吉地)를 구하여 얻어서 반드시 합장(合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의 명성과 지위가 점차 높아지자, 잘못될까 더욱 삼가고 조심하여 남과 더불어 서로 소송하는 땅에는 감히 쓰지 못하고, 법에 있어서 혹 금지하는 땅에도 감히 쓰지를 못하여 지금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신이 거주하는 곳에서 십리쯤 되는 곳에 있는 한 사인(士人)의 집 울타리 뒤가 평소 쓸 만하다고 일컬으므로, 신은 단지 그 곳이 가깝고 편리하며 산천이 둘레를 둘러싼 것만을 취하여 결단을 내리어 사기로 작정하였는데, 한결같이 집주인이 말한 바에 따라서 값을 주었고, 이어서 그 집과 서로 연달아 있는 곳의 초가집 세 채와 용호(龍虎) 국내의 다른 전지 몇 구역도 샀는데, 모두 값을 갑절이나 주고 샀으며, 또 그 능력에 따라 옮겨서 사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작년 여름철에 비로소 이장(移葬)을 행하였는데, 이장을 마친 뒤에 2, 3채의 초가집은 또 높은 값을 바라면서 팔기를 원하는 자가 있어 갑절의 값을 쳐주었고, 그대로 오래도록 거주하게 맡겨두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얼마 안되는 거리의 땅에다 옮겨서 새로운 집을 지어 편안하게 옛날과 같이 거주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서로 만나 보는데, ‘40호가 살 곳을 잃어 버리고 유리(流離)하여 원망하고 괴로와하면서 저주한다.’는 말은 어찌 천만 뜻밖의 무망(誣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이 산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들어 있다.’라고 말하는데, 팔도의 산이 모두 《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되어 있으니, 그 《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되어 있는 산 아래에다 장사를 지낼 수가 없다는 법이 있습니까? 또 1백여 호의 인가를 가지고 말하였는데, 신의 집에서 산을 이용한 곳은 하나의 작은 골짜기에 지나지 아니하고, 골짜기 안이 지극히 좁아서 6, 7가를 철거하여 옮긴 것 이외에 현재 있는 것은 겨우 10여 호 정도입니다. 그가 무고한 바 ‘이미 40호를 헐었다.’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아들을 수용할 만한 땅이 없었는데, 하물며 1백여 호이겠습니까? 다른 촌락의 백성들도 또한 모두 말하기를, ‘몽촌(夢村) 1촌(村)에서는 하나의 제목을 가지고 어떤 집안의 이장으로 인하여 모두 큰 이익을 얻었다.’라고 하고, 사람들마다 서로 전하여 드디어 한 세상의 화젯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언세가 자기 마음대로 없는 사실을 날조하였으나, 오히려 감히 ‘값을 적게 주고 억지로 사들였다.’라고는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몰래 염문(廉問)을 행하여서, 밭과 집을 팔았던 자들 가운데 혹시 신이 억지로 사들인 것을 가지고 원망을 하는 자가 있다면, 신은 마땅히 무거운 대벽(大辟)에 복주(伏誅)되더라도 변명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군정(軍丁)들을 많이 징발하여 배를 당겨서 호위하여 보냈는데, 그 위엄스러운 의장이 현란하고 빛났다.’는 따위의 말은, 대신이 천장(遷葬)할 때에 대신이 상여를 따랐으니, 이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의당 괴이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신은 본래 번거롭고 소란한 것을 싫어하여 절대로 지나치고 성대하게 하는 것을 경계해서 수로(水路)로 운구(運柩)한 것은 관을 메는 장정들의 폐단을 없애려고 하였던 것이었는데, 조정에서 이미 연도(沿道)의 고을로 하여금 이를 호송하게 하였으니, 배를 끄는 군졸들을 가도록 정하는 것은 이것이 상례(常例)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십여 명에 지나지 아니하였고, 3일 사이에 여섯 고을에서 교체하여 상여를 잡았으나, 하루 종일도 걸리지 아니하고 물러가 버렸는데, 어찌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여 근심하는 기운이 길에 가득찼을 리가 있겠습니까? 대개 그 의도는, 은연중에 위엄스러운 의장 따위의 말을 하여서, 신의 몸을 가리켜 마치 상례의 슬픔을 잊어 버리고 사치스럽게 행하는 자인 듯하게 여김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은 무덤을 열었던 처음부터 지공(支供)하는 음식을 물리쳐 버리고 평반(平盤)에 소식(素食)을 모두 스스로 사사로이 준비하였으며, 한 사람의 관리나 병졸도 원래 배에 오르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의장이 현란하고 빛나서 사람들이 구경하고 쳐다보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부의(賻儀) 한 가지 조문에 이르러서도, 옛날부터 경상(卿相)과 사대부의 집안에서 무릇 상장(喪葬)이 있었을 때 부의가 성대하였다 하여 말로 전하는 것을 어찌 한정할 수 있겠습니까만, 일찍이 이를 헐뜯고 비방함을 당자에게 미치거나 이를 탄핵하는 발의가 있지 아니하였는데, 지금을 돌아보건대, 세상의 도의가 날로 더욱 위험해지고 인심이 날로 더욱 야박하고 포악해집니다. 신이 차지한 지위를 가지고 부모의 면례(緬禮)256)                  를 지나치게 하기로 경영한다면, 스스로 부의를 가져오는 자가 없지 아니하여 그것이 반드시 적은 것을 많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할 것이므로, 뜬 소문이 일어날 두려움이 그 필연적인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또 성상의 은혜를 입어 장례의 비용을 넉넉하게 내려 주셨고 신이 내외의 관직을 거치고 임무를 띠었던 바로 보아 상례적인 부의도 또한 매우 적지 아니하여 대강 모양세를 이룰 것이었으나, 실로 사람들의 은혜를 가로막고자 아니하였기 때문에 정한 기일 이후부터는 형제들에게 서로 경계하기를, ‘절대로 장차 면례를 행하더라도 그 말이 남에게 미치지 않게 하자.’ 하였습니다. 비록 혹시라도 스스로 이를 듣고 알아서 부의를 보내오는 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단지 두 곳이었고 보낸 바가 1백 냥을 넘지 않은 것이므로 문득 줄여서 받고 나머지를 돌려보냈었는데, ‘한 곳에서 보낸 물건이 열집의 재산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찌 절대로 그러한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화도(江華島)의 돌은 원래 금령을 설치한 땅도 아니며, 신이 작년에 신도비(神道碑)의 돌을 마련하려고 석수(石手)를 내려보내고 공가(貢價)와 철물(鐵物)을 준비하여 지급하지 아니한 바가 없었는데, 수신(守臣)이 비록 신에게 원수를 진 자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금지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또 그곳의 돌을 취하였던 일은 김시혁(金始㷜)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있었는데, 그는 임기가 끝난 뒤에도 관례에 따라 출대(出代)하였으며, 새 유수(留守)        이익정(李益炡)이 대간(臺諫)의 말을 들은 뒤에는 주상께서 특별히 성을 쌓는 역사가 끝날 때까지 기한하여 그대로 유임시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신은 그가 연로한 것을 불쌍히 여기고 그를 그대로 두는 것을 어려워하였고 성을 쌓는 역사가 끝난 뒤에도 또 특별히 직질을 올려 주려는 성상의 뜻을 보이셨는데, 신은 또 그 사체(事體)가 어떻게 될지 염려하여 서서히 하도록 청하였던 것이었는데, 지금에 말하기를, ‘돌을 구하기 위하여 그를 그대로 유임시키고, 은혜를 갚기 위하여 자급(資級)을 승진시켰다.’라고 하는 것은 또한 너무나 서로 상반되지 아니합니까? 이종성(李宗城)이 호서 지방의 도백(道伯)이 되었을 때에 신이 천장 때문에 말미를 받으니, 이종성은 전례에 의하여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도신(道臣)의 출영하기를 기다린다고 신에게 보고하였는데, 신은 그것이 번거로운 폐단이 있을까 걱정하여서 절대로 나와서 기다리다가 환송하지 말게 하였던 것입니다. 신이 충원(忠原)의 묘소 아래로 내려갔을 때에 미쳐서 이종성이 순행(巡行)하다가 마침 도착하였으므로, 잠시 와서 만나 보고서 곧바로 하직하고 갔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옛 무덤을 파헤치기 아직 이틀 전이었으므로 이미 역사를 시작하지도 아니하였는데, 그가 어디에서 감독하였다는 것입니까? 이종성을 당초 발탁하자고 청한 것은 동료 재상에게서 나왔으며, 그 뒤에 의망(擬望)에 추가한 것은 성상의 특교(特敎)에서 나왔으니, 이종성 같은 지위와 명망으로 어찌 신의 천거하는 힘을 빌렸겠으며, 이종성도 또한 어찌 신에게 아부하였겠습니까? 사위는 곧 외인(外人)인데, 그의 처지와 명망으로 재랑(齋郞)의 한 자리를 얻은 것을 어찌 신의 집에 관련시키는 것입니까? 남의 허물을 억지로 들추어 내는 것이 심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위로하여 유시하였다.

 

10월 26일 기사

임금이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을 인견하였다. 이때 송인명이 연달아 세 번 정고(呈告)하였다.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돈독하게 유시하고, 이어서 같이 올 것을 명하였는데, 말의 뜻이 간절하고 지극하였으므로, 이에 송인명이 명을 받들어 입시하여 ‘능히 세상의 도의를 진압하고 복속시키지 못해서 성궁(聖躬)에 걱정을 끼쳤다.’고 누누이 허물을 인책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경 등을 보기가 부끄럽다. 대훈(大訓)을 지어낸 뒤에 스스로 말하기를,
‘나의 일은 이미 끝났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대훈을 흐리게 하니, 그 밖에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지금 불행하게 대훈을 범하는 자가 있으니, 성상께서 혁노(赫怒)하시어 친히 신문하시는 것이 괴이할 것 없습니다만, 아침에는 부르짖고 주장하다가 저녁에는 입을 다물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여 언관(言官)들로 형신(刑訊)을 받게 하는 것은 청조(淸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그가 비록 무상(無狀)하지만 국가의 불행도 또한 클 것이니, 이런 따위의 일은 오로지 진정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왕자(王者)의 위엄은 반드시 형벌하여 죽여서는 안되며, 비록 파직하고 삭직(削職)시켜 가볍게 벌을 주더라도 그 죄에 합당하면 위엄이 행하여져서 사람들이 죄를 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른바 시상(時象)이란 말로써 의논하면 피차에 각기 잘잘못이 있으며, 인물로써 평한다면 피차에 각기 현명하고 불초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고 상신(相臣) 이집(李㙫)과 풍릉군(豊陵君) 조문명(趙文命)이 지성으로 나라를 위하여 반드시 보합(保合)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 옳고 또 현명한 자를 서로 화동(和同)하게 하고, 그 그르고 불초한 자는 잇달아 감화시킬 것 같으면, 또한 점차 수용(收用)하는 길을 넓힐 수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곧 탕평책(蕩平策)의 중요한 방도입니다. 처음에는 비록 여러 사람이 나뉘어져 무리별로 모이겠지만, 필경에는 함께 대도(大道)를 같이할 수가 있을 것이니, 이를 비유하면 복심(腹心)이 견고한 다음이라야 지체(支體)가 명령을 따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상신이 가버린 다음부터 복심이 견고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뒤흔들어서 문득 한 당파를 만든다는 말로 어지럽고 현혹되게 하니, 대저 성실하지 못하면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탕평책에 성실하지 못한 자들을 억지로 합친다면, 그것이 어찌 성사가 되겠습니까? 이조 판서는 고 상신의 아들이고, 이조 참의는 풍릉군의 아들인데, 반드시 지성으로 공의를 회복하고 그 아비의 뜻을 따라서 이룰 것이니, 신은 가만히 국가를 위해서 기뻐하였습니다. "
하고, 또 말하기를,
"대간의 의망(擬望)에 통청(通淸)시킨 것은 그 허물이 윤급(尹汲)에게 있으니, 민응수(閔應洙)의 죄는 아닙니다. 또 관품이 높은 중신(重臣)을 감영 아래의 수령에 보임하는 것은 전례가 없으니, 청컨대 내직(內職)으로 옮기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듣건대 병사(兵使)는 곧 민응수의 편비(偏裨)였다고 합니다. 일의 체모상 편안하지 못한 점이 있으니, 그를 내직으로 옮기도록 허락하는 것을 아끼신다면, 마땅히 옮겨서 경기의 고을에 보임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하관(下官)을 삼는다고 하더라도 편비에게는 족히 서운할 것이 없다."
하였는데, 송인명이 굳이 청하니, 드디어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바꾸어 임명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8일 신미

정시(庭試)의 문과·무과의 방목(榜目)을 방방(放榜)하였다.

 

10월 29일 임신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을 면직시켰는데, 서종옥이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이 그의 매부(妹夫)가 된다고 하여 소장을 올려서 사직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두 전조(銓曹)에서 상피하는 것은 법전(法典)이 아니었으나, 근래에 와서 문득 규례를 이루게 되었다.

 

김약로(金若魯)를 병조 판서로, 이장하(李長夏)를 지평으로, 서종급(徐宗伋)을 홍문관 제학으로, 조운규(趙雲逵)를 수찬으로, 서종옥(徐宗玉)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수서(手書)로써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유시를 내렸는데, 말의 뜻이 은근하고 간절하게 모두 수백여 마디였다. 임금이 드디어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에게 명하여 가서 이를 전달하고, 이어서 함께 오게 하였다. 왕세자가 또 ‘대조의 명령을 받들고 들어 와서 덕을 보필하시오.[奉大朝命入來輔德]’라는 여덟 글자를 직접 써서 궁관(宮官)을 보내어 영상에게 내려 주었는데, 대개 특별한 은전이었다. 김재로가 더욱 황공하게 여겼으나, 명령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10월 30일 계유

금고(禁錮)된 전 군수 조봉주(趙鳳周)는 5년 동안 고신(告身)257)  을 빼앗고 세 등급을 강등시키라 명하였는데, 조봉주는 천안 군수(天安郡守)가 되어서 민간의 전지 80여 결(結)을 마음대로 사용하였다가 암행 어사에게 발각되었으므로 하리(下吏)를 가두도록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형률에 의하여 처벌하였으니, 탐오한 자를 징계하는 법전이 엄하지 않은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헌부 【지평 여선응(呂善應)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예조 참판 윤득화(尹得和)는 수상의 종제(從弟)로서, 평생을 의뢰하여 가계(家計)를 만들면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차지 아니하면 문득 성내는 감정을 시행하려고 음양으로 반복하였다는 정상이 이언세(李彦世)의 연대(筵對)에서 죄다 폭로되었는데, 일이 윤리에 관계되어 한 세상의 변고이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버리소서."
하였으나, 또한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대개 이언세가 이우(李玗)의 은자와 동전에 관한 일을 가지고 연석에서 대답하기를, ‘한 무장이 윤득화에게 듣고서 이우에게 말하였는데, 김재로가 윤득화를 보고서 이를 책망하였다고 진신(搢紳)들 사이에 말이 자자하게 퍼졌습니다.’ 하였다. 무장은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을 가리키는 것인데, 바로 윤득화의 사촌 누이의 아들이었고, 이우의 이모부였으며, 김재로도 또 윤득화와 내외종(內外從) 형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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