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갑술
유성(流星)이 남하성(南河星)의 아래에서 나와서 서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이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악기 조성청(樂器造成廳)에서 아뢰기를,
"헌가(軒架)에 쓰이는 석반(石磐)은, 청컨대 신유년258) 의 구례에 의하여 남양(南陽)의 옥돌을 캐서 쓰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뒤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의 주청에 따라 날씨가 추워서 백성들을 사역시키기가 어렵다고 하여 정지시키고, 내년 봄까지 기다리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일 을해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도성 밖에 있으면서 명소패(命召牌)를 연달아 되돌려 바치고, 여러 차례 상소하여 재상의 직임에 해면될 것을 바랐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형의 뜻과 일을 계승하라는 부탁은 실로 오직 신에게 책임이 있고 전하께서 신을 책임지우시는 것도 또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신의 형은 소금 노릇을 하였고 누룩 노릇을 하였으며, 고 상신 홍치중(洪致中)도 실로 매실(梅實) 노릇을 하였고 엿기름 노릇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의 형이 혼자서 어찌 능히 국물과 술을 만들 수가259) 있었겠습니까? 신과 같은 자는 수상(首相)이 조정에 나아가기를 기다리면서 천천히 거취(去就)를 의논하여도 늦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또 우악한 비답을 내리어 돈독하게 면려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여, 또 은자와 동전의 사건을 조사하여 밝혀내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만약 이것을 고집한다면, 먼저 원량(元良)에게 명하여 몸소 경을 도성문에서 기다리게 하고, 그 요속(僚屬)들로 하여금 경을 맞아들이게 하겠다."
하고, 이어서 이조 판서에게 명하여 그에게 유시하고 함께 들어오도록 하였다. 이에 김재로가 나아가서 도성 밖에 이르니, 임금이 또 유시하기를,
"경이 이른바 한 조목에 있어서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생각할 때에 이것을 핵실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그의 모함에 빠지는 것이고, 그러한 일이 없었다고 생각할 때에 비방하는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또한 난처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겠으나, 한 번 물어 보고 처리하는 것이 당연하겠기에 대신을 공경하는 뜻과 사부(師傅)를 높히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원량에게 명하여 경에게 가서 물어 보고 맞이하여 오게 하겠다. "
하자, 김재로가 더욱더 황공하여 금오(金吾)에 나아가서 명령을 기다리니,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나라의 운세를 결정하는 일과 당파를 조정하는 결판은 이번의 한 가지 거조에 달려 있다. 임금과 재상의 사이에 친림(親臨)하는 것은 옛날 전장(典章)이 있다. 내가 비록 눈이 어지럽고 몸이 쇠약하더라도 어찌 나라의 일을 게을리 보겠는가? 내가 마땅히 친림하여 중앙과 외방으로 하여금 지우(知遇)가 성대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에 승지가 이것을 도로 중지하기를 계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재촉하여 이를 거행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한 것이 모두 여섯 차례였는데, 김재로가 부득이하여 명을 받들어 대궐에 나아오고, 우의정 조현명도 또한 특별한 유시로 인하여 대궐로 들어오니, 임금이 그들을 아울러 인견(引見)하고 김재로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손을 잡고 위로하여 유시하자, 김재로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는데, 울음 소리와 눈물이 함께 뒤섞였으며, 이어서 재상의 관직을 해면할 것을 바라니,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김재로의 명소패(命召牌)를 그 앞에서 차게 하였는데, 그 은수(恩數)가 아주 드문 것으로서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수상이 반드시 이것을 조사하여 밝히고자 하니, 한번 이우(李玗)를 국문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우를 이미 국문한다면, 훈련 대장도 또한 함문(緘問)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데, 내가 지난(持難)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였다.
11월 3일 병자
밤에 옥당(玉堂)의 관원을 불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였다. 하교하기를,
"금일 주연(胄筵)에서 배강(背講)할 때에 빠뜨린 곳이 있었는데, 강관(講官)이 찌[栍]를 통하였다고 주달하자, 세자기 말하기를, ‘내가 빠뜨린 것이 있다.’라고 하니, 강관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관례입니다’라고 했다 한다. 원량(元良)이 자기의 단점을 가리워 덮지 못하는데, 강관의 도리로서는 이처럼 양지(良知)가 한창 자라나는 때를 당하여 어찌 구차스레 그 마음을 기쁘게만 할 수가 있겠는가? 금일 시강(侍講)한 춘방관(春坊官)을 아울러 중추(重推)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춘방관 신사관(申思觀)과 성천주(成天柱)를 불러서 유시하기를,
"학문을 권장하는 도리로서는 찌[栍]를 뽑는 것을 반드시 준엄하게 한 다음이라야 거의 원량에게 기탄(忌憚)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지금 이번에 춘방관을 신칙하고 권려하는 것은 원량과 요속(僚屬)들을 제대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이것 때문에 지나치게 기운이 꺾이고 마음이 움추려들 필요는 없다. 옛날 순(舜)임금이 기(夔)에게 명하기를, ‘관대하게 하고 무섭게 하라.’고 하였으니, 모름지기 이러한 방도로써 그를 권면한 것이다."
하였다.
찬선(贊善) 어유봉(魚有鳳)이 졸하였다. 어유봉은 경종(景宗)의 국구(國舅) 어유귀(魚有龜)의 형이었다. 일찍이 기묘년260) 의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과적(科賊) 송성(宋晟)이 그 은밀히 봉한 시권(試券)을 훔쳐내어 바꾸었으므로, 이때부터 과거의 학업을 폐지하고 학문에만 종사하여 자못 당시의 명망을 얻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는데, 임금이 그가 서거한 단자(單子)를 늦게 주달하였다고 하여 중관(中官)을 유배시키고 부의와 휼전(恤典)을 더하게 하였다.
11월 4일 정축
유성(流星)이 태미원(太微垣)에서 나와서 남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종신(宗臣)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 등을 보내어 중국의 연경(燕京)에 나아가서 사은(謝恩)하고 겸하여 정조(正朝)를 하례하게 하였다.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천둥의 재이(災異)와 궁전 문의 화재 때문에 소장을 올려서 경계하는 말을 아뢰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임금이 중서헌(重書軒)에 나아가니, 세자가 임금을 모시고 앉았다. 춘방관(春坊官)을 불러서 입시하게 하고, 세자가 《어제권학문(御製勸學文)》을 강하였는데, 춘방관이 그 글의 뜻을 진술하였다. 임금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
하니, 세자가 한참 동안 있다가 대답하기를,
"싫을 때가 많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의 이 말은 진실한 말이니, 내 마음이 기쁘다."
하였다. 이어서 임금이 명하여 조변(趙抃)의 흑두(黑豆)와 백두(白豆)를 그릇에 두었던 고사에 의하여, 하루 사이에서 글을 읽는 것이 좋을 때에는 백두를 놓고 싫을 때에는 흑두를 놓아서, 그 많고 적은 것을 가지고 강관에게 내보이게 하였다. 또한 궁관(宮官)들에게 신칙하여 뜻을 더해 인도하여 도와서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였다.
제릉(齊陵)의 신도비(神道碑)를 고쳐서 세웠다. 비가 임진년261) 왜놈의 변란에 파괴되었는데, 열성조(列聖朝) 때에 고쳐서 세울 겨를이 없었다. 임금이 종신(宗臣)의 소청(疏請)으로 인하여 영건 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해서 고쳐서 세우되 《열성지장(列聖誌狀)》에 기록된 권근(權近)이 찬한 비문을 다시 쓰라 명하고, 또 봉조하(奉朝賀) 이의현(李宜顯)에게 명하여 비의 음기(陰記)를 짓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일을 끝마쳤다고 보고하자, 영건한 노고에 대하여 영건 도감의 여러 신하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리고, 참판 유엄(柳儼)과 참의 정익하(鄭益河)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이우(李玗)를 의금부에 하옥하라 명하였다. 이때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또 상소하여 조사할 것을 매우 간절하게 청하였으므로,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조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으나, 오직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은 말하기를,
"진신(搢紳)들 사이에서 한 말들을 밝히려는 옥사는 매우 아름답지 못한 일입니다. 수상이 이것을 가지고 마음에 걸려서 반드시 억울함을 밝히고자 하는 것도 또한 좁은 마음을 면하기가 어렵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우를 심문하자, 이우가 공초하기를,
"통제사(統制使)에서 교체되어 돌아온 뒤에 가서 이모를 만났더니, 말하기를, ‘네가 통영(統營)에 있을 때에 영상의 막내아들이 후취(後聚)하는 데 혼수(婚需)를 도와 주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라고 하기에, 신이 묻기를 ‘어디에서 들었습니까?’라고 하였더니, 윤득화(尹得和)라고 대답하였기 때문에 과연 영상의 아들 김치인(金致仁)에게 가서 이것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인을 남의 구설 수에 오르게 하는 것이 민망하여서 ‘훈련 대장에게서 들었다.’고 범칭(泛稱)하였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은 이우가 부인을 핑계대고 미루면서 일부러 그 계제를 끊어 버리려 한다고 하여, 처음에 그를 형문(刑問)하고자 하였다가, 여러 신하들의 간언으로 인하여 중지하고, 또 명하여 다시 추국하게 하니, 이우가 다시 공초하기를,
"신이 통영에 갔을 적에 이모가 신에게 말하기를, ‘바야흐로 부모의 비석을 세우려 하는데, 너도 또한 외손이 되니, 그에게 재력(財力)을 보내어 도우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이 50민(緡)의 돈을 보내었고, 돌아오게 되자, 홍달해(洪達海)라는 이름을 가진 이모의 서조카가 되는 자가 신에게 말하기를, ‘윤득화가 어떤 사람과 앉은 자리에서 말하기를, 「이우가 그 외조부의 비석을 세우는 비용으로 50민의 돈을 보냈고, 영상의 아들이 후취하는 밑천으로 수백 민의 돈을 보냈는데, 이것은 결코 인정(人情)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때 신이 이모에게서 들었던 것은 이와 같았는데, 홍달해는 지금 이미 죽어서 사실을 물어 볼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윤득화의 아들 윤재동(尹在東)이 신문고를 치고 그 아비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는데,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도 또한 상소하기를,
"재신(宰臣)이 일찍이 털끝만큼도 비슷하다는 말을 신에게 한 적이 없었으며, 신이 일찍이 털끝만큼도 비슷하다는 말을 재신에게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우의 공초는 진실로 가죽이 없는 털입니다."
하자, 윤재동이 또 신문고를 치면서 원통함을 호소하기를,
"이우가 당초에 훈련 대장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한 것을, 한번 말을 바꾸어서 그 이모에게서 들었다고 하고, 다시 말을 바꾸어서 이미 죽은 홍달해에게서 들었다고 합니다. 명부(命婦)를 비록 심문할 수가 없다고 하지만, 그 지아비도 있고 그 아들도 있으니, 한번 물어 보면 확실할 수가 있습니다. 이우의 공초가 나온 뒤에 김성응의 아들 김시묵(金時默)에게 서신으로 물었었는데, 대답하기를, ‘윤 참판(尹參判)이라는 세 글자를 원래 입에서 낸 적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우의 공초는 더욱 허황된 거짓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윤재동과 이우의 공초를 읽어 보고, 의금부에 명하여 다시 이우를 심문하게 하였다. 또 명하여 김시묵을 잡아 가두고 윤재동과 대질하게 하였으나, 의금부에서 유생(儒生)을 서간(西間)에 가두는 것은 그러한 예가 없다고 하여 동간(東間)과 남간(南間)에 나누어 가두도록 청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이우의 공초는 전과 같았으나, 김시묵은 공초하기를,
"윤재동의 서신을 보고서 그 곡절을 알지 못하겠으므로 이것을 신의 어미에게 물었더니, 신의 어미가 말하기를, ‘홍달해가 와서 외간(外間)에 떠도는 말을 전했을 뿐이며, 윤 참판이라는 세 글자는 처음부터 상세히 묻지 않았다.’라고 하므로 윤재동의 서신에 과연 이와 같이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재동과 김시묵에게 설령 물어 볼 만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들이 부모를 증언하는 것은 윤리와 기강에 관련된다고 하여, 두 사람 모두 석방하게 하였고, 이우의 공초는 군색하고 사실을 숨기는 것이 무엄하다고 하여, 형신(刑訊)을 시행하라 명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라기를,
"김시묵의 대질한 공초가 나왔다면, 이우의 입장에 있어서는 마땅히 다시 숨길 만한 사정이 없을 것 같은데, 지금 성상께서 그를 신문하고자 하는 것은 무슨 단서입니까? 그가 감히 숨기고 피하였다고 말한다면, 이우의 입장에 있어서 친하고 또 중요한 사람은 의당 그 이모와 주장(主將)보다 더한 자가 없을 것 같은데, 이들을 오히려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타인을 위하여 덮어 주고 숨기며 저뢰(抵賴)하는 것도 또한 그러할 리가 없습니다. 하물며 김시묵이 공초에서 이미 말하기를, ‘그 어미가 홍달해의 전하는 말을 듣고서 이것을 이우에게 말하였다.’’라고 하니, 이우의 뒤에 나온 공초도 또한 사실대로 숨기는 바가 없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렇다면 이우가 비록 무부(武夫)지만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는데, 그의 죄가 아닌 것을 가지고 형신을 받는 것은 또한 형정(刑政)의 누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
하고, 연신(筵臣)들도 또한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임금이 드디어 그를 신문하라는 명령을 중지시켰다. 하교하기를,
"윤득화가 떠도는 비방(誹謗)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서 지레 먼저 이것을 말하다가, 야료(惹鬧)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죄가 없을 수가 없다. 윤득화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3등을 강등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에 사실을 자세하게 진술하지 아니하고 그 말을 애매 모호하게 하였다고 하여 김성응의 관직을 파직시켰다. 이우는 처음에는 ‘훈련 대장’이라고 하다가, 끝에는 또 ‘부인’이라고 하여, 말의 앞뒤가 모순되어 말하는 것이 군색하고 숨기는 것이 있었다. 처음에 그 관직을 삭탈하라고 명하였는데, 또 이언세(李彦世) 이외의 사람에게는 물어 볼 만한 계제가 없다고 하여, 이언세를 잡아다가 국문하라 명하였고, 또 우선 이우를 가두었다가 이언세가 잡혀 오기를 기다리라 명하였다. 이언세가 이르게 되자, 의금부에게 개좌(開坐)하여 7백 냥의 동전과 3백 냥의 은자에 대한 말을 어떤 사람에게 들었는지, 혹은 자기 스스로 이것을 만들어 낸 것인지를 물었는데, 이언세는 끝내 그 말의 근원을 가리켜서 고하지 아니하였다. 의금부 당상관들이 3일 동안 본부에 앉아서 연달아 구초(口招)를 받들어서 6,7차례의 공초를 받기에 이르렀다. 또 이우와 함께 대질시켰으나, 이언세와 이우의 공초한 것이 모두 그 전과 같았다. 임금이 형문(刑問)을 실시하여 자복을 받아내고자 하였으나, 연신들이 모두 그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하니, 임금이 또 이언세가 옥중에서 병이 나서 죽을까 염려하여 매우 어렵게 여겼다. 부제학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기를,
"당초에 이언세를 잡아와서 국문한 것은 진실로 그 말의 근원을 찾아내어 핵실하여, 그의 허망한 것을 밝혀 내자는 데에서 나왔었는데, 3일 동안 안핵하여 조사하였지만 끝내 아무런 단서도 없었습니다. 지금 보건대, 이언세로 하여금 처음에는 마운령(摩雲嶺) 고개를 넘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 도리어 좋다고 하였는데, 어제 연석에서 그를 엄하게 형문하라는 명령을 다행히 즉시 반한(反汗)하였으니, 죄인을 흠휼(欽恤)히 여기시는 훌륭한 덕을 누구인들 감격하여 찬송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변변치 못한 작은 이 정성은 혹시 성상께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너무 지나칠까 걱정됩니다. 무릇 일이란 마땅한 데로 좇으면 폐해가 없지만, 정도보다 지나치면 폐단이 있을 것이니, 이언세가 비록 대단히 해괴하고 명령되다 하더라도 아주 먼 변경에 천극(栫棘)한다면 족히 그 죄를 징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정언 임순(任珣)도 또한 상소하기를,
"이언세가 당초에 논한 바는 오로지 대신들을 모함하여 몰락시키고자 하는 데에만 있지 아니하였고, 반드시 조정을 파괴하고 어지럽혀서 몰래 자기 당파 사람들을 구제하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 어찌 그를 죄주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를 잡아와서 말의 근원을 국문하여 한 번 심문하고 두 번 심문하기에 이른다 하더라도 허망한 말을 다시 밝혀 낼 수가 없을 것이고, 한갓 나라의 체면만 손상이 있게 될 것이며, 또 후일의 끝없는 폐단에만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들에게 묻자, 송인명, 조현명이 모두 말하기를,
"이언세가 결코 말의 근원을 바로 고할 리가 없습니다. 말이 다하고 사리가 막혀서 스스스 남을 무함(誣陷)하는 지경으로 돌아갈 것이니, 일찌감치 죄를 참작하여 처리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종전 그대로 천극하라 명하고, 또한 이우를 석방하게 하였다.
홍문관에서 아뢰기를,
"경연에서 강할 때 《주례(周禮)》를 진강(進講)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영경연사(領經筵事)에게 물어 보았더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주례》라는 하나의 책은 성인(聖人)이 제도를 만든 묘리를 엿볼 수가 있는데, 이것이 선유(先儒)들이 육경(六經)에 열거하였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성덕(聖德)과 나라 다스리는 체계에 관련이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아마도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만큼 긴요하지는 못할 것이니, 간혹 강관(講官)으로 하여금 진강하게 하여 성상께서 청람(聽覽)을 하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 주소(註疏)에 대해서는 성인의 손을 거치지 아니한 것이므로 성상께서 반드시 읽어 보실 필요가 없지만, 주소를 보지 않는다면 본문에서 더러 해득하기 어려운 곳이 있을 것이니, 강관으로 하여금 한 번 읽어 보게 하는 것을 아마도 그만둘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심경(心經)》은 비록 야대(夜對) 때에 진강하더라도 또한 아마 무방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주례》에 명물(名物)·도수(度數)·제작(制作)의 설명이 많으니, 비록 성학(聖學)의 이치를 궁리하는데 하나의 도움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반드시 수용(受用)하는 실제 효과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심경》은 이미 강경을 시작하였으니, 만약 그 행수(行數)를 줄이고 그 스스로 그칠 곳을 정한다면, 마음을 정양하고 조섭하는 데에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스리고 본성을 기르는 데에는 거의 이 책을 진실하게 수용하여야 합니다. 《주례》는 혹시 소대(召對)할 적에 때때로 강설(講說)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좌상의 의논에 의하여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주강(晝講)하도록 명하였는데, 여러 옥당관(玉堂官)들이 차자를 올려서 말하기를,
"《주례》라는 하나의 책은 성인에게서 나왔으므로 육경(六經)에 참여하는데, 다만 선유(先儒)들이 그 구두(句讀)를 바로잡는 과정을 겪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 신 등의 적은 학식과 천박한 식견으로 갑자기 자기 의견을 가지고 그 구두를 억지로 정하고 용렬하게 법강(法講)을 준비한다면, 사체(事體)의 소홀하고 간략함을 진실로 어떻게 하겠습니까? 마땅히 본관(本館)의 영사와 외방에 있는 유신들에게 두루 물어 보아, 그 구절의 해석을 바로잡는 일을 아마 그만둘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미 이를 강하라고 명하였으니, 우선 그대로 《심경》을 강하게 하고, 《주례》는 보류하여 의논이 정해지기를 기다린 뒤에 계속해서 강하는 것이 진실로 사의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현토(懸吐)를 반드시 이와 같이 할 것이 없다고 하고, 아울러 추고(推考)하게 하였다.
11월 7일 경진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서 《주례》의 천관편(天官篇)을 강하였는데, 지경연사 이주진(李周鎭)이 말하기를,
"천관(天官)의 총재(冢宰)는 그 나라의 정치를 맡아서 골고루 올바르게 해야 하는데, ‘백성의 극(極)이 된다.’는 뜻으로 보건대, ‘극’이란 것은 ‘중(中)’이라는 뜻이며, ‘중’이란 것은 ‘공(公)’이라는 뜻입니다. 청컨대 ‘극’이라는 한 글자에 유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례》를 처음으로 강하는 날 총재를 ‘공’자로 말하였는데, 상하에서 서로 권면하는 것이 좋겠다. 시상(時象)이 오로지 전관(銓官)의 공평하고 불공평한 데에 달려 있으니, 나도 또한 ‘공’자로써 경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주진이 말하기를,
"신이 이미 군부(君父)의 앞에서 딱 잘라 말하였으니, 결코 감히 사사 당파에 견제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민첩한 데는 부족하지만, 질실(質實)한 데는 여유가 있다. 무릇 사람이 투철하지 못하면 쉽게 남에게 속임을 당하는 법이니, 경은 그것을 권면하도록 하라."
하였다.
종부시 제조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을 불러서 하교하기를,
"왕자는 7세에 봉작(封爵)하는 것이 예로부터 나라의 전례이다. 일의 체모가 매우 중요하니, 비록 나라의 기중(忌中)이라고 하더라도 특별히 명하여 정사를 열겠다. 내가 경진년262) 에 처음으로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는데, 실지로는 그때 7세였다. 잠깐 《선원보략(璿源譜略)》을 보니, 기묘년263) 이라고 이를 썼는데, 후세에서 이를 본다면 반드시 6세에 봉작하였다고 할 것이니 그것을 고치도록 하라."
하자, 직이 말하기를,
"육상묘(毓祥廟)라는 세 글자를 소주(小註)에다 써 넣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육상묘라는 세 글자를 숙빈(淑嬪) 두 글자 위에 더 써 놓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1월 8일 신사
이조에서 아뢰기를,
"일찍이 만호(萬戶)를 역임한 자로 나이가 70세 이상이 된 이는 비록 4품이라고 하더라도 동반(東班)의 정직(正職) 4품과는 차이가 있는데, 이번에 기사(耆社)에서 은혜를 베풀 때에 혼동하여 가자(加資)한 자가 14인이나 되니, 모두 마땅히 도로 거두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영경연사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주례(周禮)》는 지금의 《대전(大典)》과 같으니, 대개 희씨(姬氏)의 주(周)나라가 천하를 다스린 대경 대법(大經大法)으로서 주공(周公)의 제작한 아름다운 뜻을 볼 수가 있는데, 후세의 제왕들이 이것을 행하는 자가 없었으니, 어찌 깊이 애석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금일에 성상께서 특별히 진강(進講)하도록 명하시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만합니다. 이처럼 크게 나라를 진작(振作)시키는 때를 당하여 더욱 면려를 더하셔서, 주공의 마음을 가지고 이것을 본받아 행하신다면, 장차 이것을 수용(受用)한 공로가 많을 것이며, 정치를 마련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크게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내가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경과 더불어 서로 알고 지냈는데, 군신(君臣)이 함께 늙어서 백수(白首)가 되었다. 어렸을 때의 일이 전생(前生)과 같이 거리가 있는 것 같은데, 크게 방종(放綜)하는 데에 이르지 아니할 수가 있었던 것은 오히려 학문의 힘에 의지한 탓이다. 곧 지금의 원량(元良)이 바로 분초(分秒)의 시간을 아껴야 할 때를 당해 몸소 그를 가르치고자 하여 억지로라도 법강(法講)을 행하였던 것이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아니면 능히 이러한 책을 만들지 못합니다. 후세의 법제가 모두 《주례》속에서 흘러 나온 것입니다. 옛날 선묘조(宣廟朝)에서는 선정신(宣正臣) 이이(李珥)에게 명하여 그 강목(綱目)을 뽑아 내어서 옥당[玉署]의 신하들로 하여금 이를 숙독하게 하였으니, 지금도 또한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주례》를 숙독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명물(名物)과 도수(度數)에 지나지 아니할 뿐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반복하여 익숙하게 읽다가 보니, 지극한 이치가 있다. 주공(周公)의 뜻이 넓고도 깊도다. 나아가 어렸을 때에 옛사람들이 말한 바 ‘손으로 춤추고 발로 뛴다.[手舞足蹈]’라는 말을 혼자 남몰래 비웃었는데, 지금 비로소 늦게서야 깨닫는다. 조용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서(古書)를 뽑아서 읽어 보는데, 마음을 가라앉혀 글의 깊은 뜻을 생각하여 찾으면 스스로 춤을 추고 뜀뛰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다."
하였다.
중건 당상관(重建堂上官) 김약로(金若魯)가 아뢰기를,
"인정문(仁政門)을 중건한 뒤에 상량문(上樑文)을 혹자는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혹자는 마땅히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전(正殿)과는 다르니, 상량문을 반드시 만들 필요가 없다."
하였다.
11월 9일 임오
유성(流星)이 필성(畢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5척이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임금이 찬수 당상관(纂修堂上官)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호전(戶典)을 열람하고 말하기를,
"옛날에 봉조하(奉朝賀) 남구만(南九萬)이 절수(折受)의 폐단을 염려하여 쌀·콩과 은자(銀子)를 획급(劃給)하자고 의논하였었는데, 대개 쌀과 콩은 돌보아서 도와주려는 것이요, 은자는 땅을 사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절수와 획급을 아울러 행한다면 그 폐단을 구제하려는 것이 도리어 하나의 폐단을 낳는 것이 된다. 이제부터 연한을 정하여 절수하는 것 이외에는 모두 삭제하여 버리도록 하라."
하였다.
임경관(任鏡觀)을 장령으로, 임사하(任師夏)와 유언민(兪彦民)을 정언으로, 서지수(徐志修)와 조돈(趙暾)을 교리로, 원경하(元景夏)를 동성균관사로, 조영국(趙榮國)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12일 을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정시 문과(庭試文科)의 새 급제자 이환룡(李煥龍)의 과방을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이환룡은 송도(松都) 사람으로서, ‘호석(虎石)을 쏜다.’라는 시부에서 임징하(任徴夏)가 사사로이 지어 세상에 이름이 난 글이 있었는데, 이환룡이 그 글을 도용한 것이 8,9구절이나 되었다. 시험을 주관하는 자가 이를 알지 못하고 뽑았는데, 과방이 나가게 되자, 고시관 조관빈(趙觀彬)이 상소하여 스스로 허물을 진술하고, 또 이환룡의 과방을 취소하여 선비의 기풍을 바로잡기를 청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품하여 임금의 재결을 청하니, 임금이 대신들에게 두루 물어 보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당연히 삭제하여야 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강화도의 군량미가 성을 쌓는 역사에 많이 쓰였다고 하여 선혜청(宣惠廳)의 미곡 3만 석을 강화도에 지급하여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국가에서 목둔(牧屯)의 정사를 중요하게 여기므로, 여러 도에 목둔을 설치하고 조세를 거두어 나라의 용도(用度)에 보태었는데, 근래에 목둔이 많이 절수(折受)하는 데로 돌아가게 되어 수원(水原)의 목둔이 또 내수사(內需司)의 절수하는 데로 들어갔습니다. 목마(牧馬)하는 곳이 없고 단지 조세만 거두는 곳은 비록 절수하는 예가 있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목마하는 것에 대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다가 방목하도록 하고 절수하는 전지로 만드니, 이것은 전대에는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부터 앞으로 목둔의 정사가 이로 인하여 폐지되거나 허물어질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전(大典)》을 수정하여 바로잡는 때에 어찌 이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중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군량미의 둔전으로 진도(珍島)에 있는 것을 옹주방(翁主房)에서 계하(啓下)하여 절수(折受)하였는데, 군량미의 둔전은 본래부터 군사들을 접제(接濟)하는 비용으로 삼는 것으로, 전대부터 절수하는 법규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체 이것을 중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선혜청의 세목(稅木)은 그 경비(經費)로 정해진 원래 숫자 이외에 해당되는데, 근래에 저축된 것이 1천여 동(同)이 되지만, 점차 썩어서 손상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 농사 작황이 조금 풍년이 드는 때를 당하여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일을 맡아서 삼남(三南) 지방의 곡식의 값이 싼 곳에서 미곡을 장만하게 하여, 나라의 위급한 수요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제릉(齊陵)과 영릉(英陵)의 비석은 하나의 도감(都監)에서 거행하라고 일찍이 정탈(定奪)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상전(賞典)을 이미 내려서 도감의 당상관 자품을 올린 뒤에 공조·예조의 아당(亞堂)에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대저 각릉(各陵)에도 모두 장차 차례로 표석(表石)을 세우려고 각기 도감을 설치할 터인데, 번번이 모두 자품을 올린다면 또한 너무 지나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앞서의 상전은 내가 마땅히 헤아려서 처리하였다. 도감은 그대로 임명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호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아뢰기를,
"공물(貢物)을 더 쓰자는 것을 도로 보고하지 않으니, 청컨대 선혜청(宣惠廳)의 쌀 2만 곡(斛)과 병조의 무명 3백 동(同)을 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여 1만석을 취하여 쓰도록 허락하였다.
서종옥이 호조 판서로서 전례대로 선혜청을 겸직하였는데, 중첩해서 관직을 가질 수가 없다고 하면서 상소하여 교체되기를 청한다고 하여 선혜청 당상관 송인명이 임금께 아뢰니, 이를 허락하였다. 정석오(鄭錫五)와 조관빈(趙觀彬)을 선혜청 당상관으로 삼았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도성 아래에 사는 공인(貢人)들의 요역이 너무 번잡하므로, 일찍이 기유년264) 에 고 영상 이광좌(李光佐)가 본부에서 그 절목을 고쳐서 바로 잡고 계하(啓下)하여 신칙하였던 적이 있는데, 지금 이미 세월이 오래 되어서 각사(各司)에서는 반드시 전의 명령을 하나같이 따르지 아니합니다. 다시 본사(本司)로 하여금 공인들을 조사하여 만약 명령을 어기고 함부로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해당 관원들을 중하게 감죄(勘罪)하여 징계한 뒤에 비국 당상 홍상한(洪象漢)과 김상성(金尙星)으로 하여금 주관하여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어영 대장 박찬신(朴纘新)을 파직하고 박문수(朴文秀)를 특별히 임명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11월 13일 병술
유성(流星)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병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가 4,5척이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지경연사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정언(正言)을 듣고 정도(正道)를 행하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두려워하며, 직간(直諫)하는 말을 나오게 하고 창언(昌言)하는 자에게 절하는 방도는 어린 나이에 반드시 모름지기 익숙하게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라에 큰 경사(慶事)가 있어서 해마다 연달아 진연(進宴)하였으며, 대신(臺臣)들이 여러 차례 국문(鞫問)을 설치하기에 이르러서 바깥으로는 대신들이 죄를 받는 것을 보고 안으로는 예대(豫大)하는 일을 보니, 그 사물을 만나서 문득 가르치는 도리에 있어 이러한 따위의 일들을 동궁으로 하여금 보고 듣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대신(臺臣)을 국문하는 것은 끝내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며, 또한 나라를 망치는 전조가 됩니다. 신 등이 감히 동궁께 바로 아뢰지 못하겠으니, 성상께서 마땅히 조용하게 경계하고 신칙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다. 영경연사 송인명이 말하기를,
"찬선 박필주(朴弼周)는 집이 몹시 가난하여, 70세의 나이에 자주 쌀독이 텅비는 한탄을 면하지 못하니, 이러한 추운 계절을 당하여 마땅히 그를 진념하시는 바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본도(本道)로 하여금 음식물과 시탄(薪炭)을 실어 보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검토관 조운규(趙雲逵)가 좨주(祭酒) 심육(沈錥)도 일체로 두루 진휼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하교하기를,
"지금 바야흐로 《대전(大典)》을 개수(改修)하여 바로잡는데, 《주례》를 강하는 것은 원량(元良)으로 하여금 내가 늙어도 오히려 학문을 강설하는 뜻을 알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함경 감사 이수항(李壽沆)이 아뢴 말에, ‘경성 판관(鏡城判官) 윤심형(尹心衡)은 혐의가 있다고 핑계하여 고을의 일을 거행하지 아니하며, 농사의 연분(年分)을 매기는 문서도 또한 겸관(兼官)으로 하여금 대신 행하게 하니, 마땅히 그를 파출(罷黜)시켜야 합니다.’ 한 것으로 인하여 송인명이 말하기를,
"특별히 보임한 사람을 도신(道臣)의 장계(狀啓)에 따라 파직시키는 것은 후일의 폐단과 관계되며, 사건이 원수의 혐의와 관련되니, 또한 논죄할 수 없습니다. 도신을 추고(推考)하고, 그 장계한 계본(啓本)은 돌려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14일 정해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였다.
11월 17일 경인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정고(呈告)하여 면직되기를 요구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어 허락하지 아니하고, 승지를 보내어 그를 타일렀다.
11월 18일 신묘
하교하기를,
"일양(一陽)265) 이 처음으로 회복되었으니, 이에 임금이 된 자가 근원을 본받아 인정(仁政)을 행하여야 할 때인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일양이 비록 회복되었으나 기운은 더욱 피곤하여지니, 아! 소민(小民)들이 어느 때에 모두 구제되어 힘을 회복하겠는가? 그 오로지 믿고 있는 바는 안으로 고굉(股肱)의 대신과 밖으로 지방의 방백(方伯)들이니, 삼가 이 뜻을 공경히 본받아서 백성을 아끼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정사를 더욱 마땅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세상의 도의를 회복할 만한 것이 세 가지인데, 근원을 본받아서 날로 새로워지고 동료끼리 서로 공경하고 합심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그 습속(習俗)을 씻어 버리어 돈독하고 후한 것에 힘쓰는 것이 두 번째이고, 반드시 순수한 마음으로 나의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 세 번째이다. 아! 대소 신료들은 이러한 뜻을 공손히 본받아서 나의 이러한 하교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0일 계사
이종적(李宗迪)을 대사간으로, 이윤신(李潤身)을 사간으로, 안식(安栻)을 장령으로, 박창원(朴昌源)을 정언으로, 김상철(金尙喆)을 헌납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지평으로, 한익모(韓翼謨)를 승지로, 홍봉한(洪鳳漢)을 문학으로, 조관빈(趙觀彬)을 남한 산성 수어사로, 오광운(吳光運)을 개성부 유수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격쟁(擊錚)266) 하는 사람이 있으면, 수문장(守門將)이 이를 추고(推考)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병조에서 이를 조종(操縱)하지 말라고 하는 정식(定式)이 있었기 때문에, 근일에는 수문장이 이를 추고하지 아니하니, 아마 성상의 하교하신 본의(本意)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례에 의하여 추고하도록 하라. 병조에서는 감히 이를 미리 알고서 조종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중건(重建)에 쓰는 재목(材木)들을 오로지 호서 지방과 해서 지방에 의지하는데, 지금은 강의 물이 이미 얼어서 실어 나르기가 곤란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인명(人命)은 지극히 중한데, 혹시라도 상할까 두렵다. 우선 얼음이 풀릴 때까지 기 다리고, 반드시 엄하게 감독할 것이 없다."
하였다.
11월 21일 갑오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이 아뢰기를,
"각도의 도사(都事)를 시종(侍從)으로 임명하여 보내는 것이 근래에 정해진 법식로 되었는데, 대개 사람들이 이를 꺼리고 싫어하는 뜻을 나타내어서 어지럽게 교체되기를 꾀하여 마부와 말에게 폐단을 끼치게 됩니다. 병조와 예조의 낭서(郞署)를 옮겨서 임명하는 법이 이로 인하여 막히게 되니, 낭서가 정체될 우려가 있습니다. 과시(科試)를 당하지 아니하거든 낭서를 뽑아서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사간원 【사간 이윤신(李潤身)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파춘수(坡春守) 목(穆)이 부녀자를 능욕한 것은 도무지 사람의 도리가 없었던 짓입니다. 내지(內地)로 귀양보내는 벌을 행하였으나, 그를 징계하기에는 부족하였는데, 그 중간에서 도망쳐 버려 더욱 거리끼는 바가 없으니, 마땅히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이때 목을 잡아다가 처리하여 도로 유배시켰기 때문이었다.
형방 승지(刑房承旨)에게 명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게 하였는데, 날씨가 추워지기 때문이었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바닷가에 있는 고을은 실농(失農)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김포(金浦)와 통진(通津)의 두 고을에서 북한산에 이전(移轉)하는 쌀은 마땅히 봄철까지 기다렸다가 갖추어서 바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2일 을미
달이 태미원(太微垣)에 들어갔다.
11월 23일 병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상주 목사 이종적(李宗迪)은 부임한 지 4, 5개월 만에 도로 대간(臺諫)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양구 현감 한광회(韓光會)도 또한 그러합니다. 수령이 자주 교체되면 맞이하고 보내는 것이 번거로우니, 모두 마땅히 그대로 유임시키고, 정해진 법식에 의해서 15개월 이전에는 다른 자리로 옮겨가는 일이 없도록 전조(銓曹)에 신칙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을사년267) 에 원통하게 죽은 사람 정희등(鄭希登)에게 정문(旌門)하고 증직(贈職)하라고 명하였다. 검토관 조운규(趙雲逵)가 말하기를,
"신이 명묘(明廟) 때의 을사년 기록을 보니, 고 장령 정희등이 절개를 지킨 행동이 뛰어났습니다. 비록 그가 진복창(陳復昌)의 좌석을 불태워 버린 일을 가지고 보더라도 더욱 그 지조와 절개가 탁월하였다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여러 소인배들의 뜻에 거슬려서 끝내 원통하게 죽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조정에서 풍속과 교화를 길이 수립하는 방도로서 마땅히 그에게 정문하고 증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영사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을사 사화(乙巳士禍)268) 를 당하여 그는 백인걸(白仁傑)·박광좌(朴光佐)와 함께 선량한 무리들을 잡아 죽이자는 의론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다가 윤원형(尹元衡)의 무리들에게 모함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정희등은 형틀 아래에서 죽었고, 박광좌도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나, 백인걸은 홀로 적소(謫所)에 귀양가서 목숨을 가장 오랫동안 부지하였으므로 선묘조(宣廟朝)에 크게 발탁 임용되었으며, 박광좌도 정문하고 증직하여 후손을 녹용(錄用)하였으나, 정희등은 홀로 휼전(恤典)이 없었으니 그 자손들이 영세하였기 때문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 사람이 일은 같은데, 이 사람만 홀로 빠졌다니, 박광좌와 일체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5일 무술
이중경(李重庚)을 대사간으로, 민광우(閔光遇)를 장령으로, 심익성(沈益聖)을 헌납으로, 유건(柳謇)을 정언으로, 정옥(鄭玉)을 지평으로 삼았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어영 대장 박문수(朴文秀)가 그 몸은 도성 밖에 있으면서 인의(引義)하고 도성에 들어오지 아니합니다. 장신(將臣)의 체모를 어김이 있으니, 청컨대 잡아다가 처리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26일 기해
임금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강이 끝나자, 검토관 조운규(趙雲逵)가 말하기를,
"호남 지방의 민속(民俗)은 초상·장사에서 대상(大祥)·소상(小祥)에 이르기까지 음식물을 마련하고 풍악을 울려서 빈객(賓客)에게 오락을 제공하여 다투어가며 서로 이기기를 힘쓰니, 마땅히 특별히 금단(禁斷)을 더해야 합니다."
하자, 시독관 윤동준(尹東浚)이 말하기를,
"초상·장사에 풍악을 마련하는 것은 신은 진실로 듣지 못하였습니다. 음식물을 마련하고 빈객을 접대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풍속이 있는데, 비단 호남 지방 뿐만 아니라 영남 지방에서도 또한 그러하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예의(禮義)가 땅을 쓸어 버리듯이 없어졌도다. 형정(刑政)은 정치를 돕는 기구인데, 도신이 이것을 교화로써 계도(啓導)하고, 그것을 따르지 아니하는 자는 마땅히 형벌로써 이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11월 27일 경자
임금이 찬집청(纂輯廳)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내노비(內奴婢)를 뽑아서 들이는 일을 논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혹시 뽑아서 고르는 경우라면, 다만 내노비(內奴婢)만으로도 족하다. 시노비(寺奴婢)에 대해서는 특교(特敎)가 아니면 마땅히 뽑지 않아야 하는데도 또한 혹은 천거하여 바치기도 하고 혹은 투탁(投託)하여 들어오는 자도 있으니, 이후로는 일체로 모두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말하기를,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에 왕덕용(王德用)이 계집 두 명을 바쳤는데, 왕소(王素)가 이를 간하자, 인종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지으면서 그 계집들을 내보내게 하였으므로 후세에서 그 훌륭한 덕을 칭송합니다. 지금 전하께서 미연(未然)에 이를 방지하시니, 성덕이 지극하십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후로는 반드시 위에서 양인을 뽑을 리는 없을 것이나, 천거하여 바치고 투탁하여 들어오는 폐단이 어찌 반드시 없으리라는 것을 알겠는가?"
하였다. 서종옥이 말하기를,
"인정문(仁政門)을 지을 재목(材木)이 부족하니, 경중(京中)의 사가(私家)에 있는 원목(園木)을 값을 주고 사서 쓰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가에서 나무를 베다가 쓰는 것은 구차스러운 일이다. 지금은 비록 단문(端門)을 짓기 위하여 벤다 하더라도, 이 다음에 토목의 역사가 있을 때마다 번번이 사가의 나무를 베어 올 것이니, 그 폐단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그것을 중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유건(柳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창수(李昌壽)는 성질이 사납고 고약하며 탐오하고 음란하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그를 삭제하여 버리소서. 양양 부사(襄陽府使) 강일규(姜一珪)는 논박을 당하자 구차스레 버티었으며, 동부 봉사(東部奉事) 이성흥(李聖興)은 우매하여 일에 밝지 못하며, 제용감 봉사 이관성(李觀聖)은 재물을 탐하고 청상 과부를 겁탈하였으며, 한성 참군(漢城叅軍) 이복령(李復齡)은 송사를 듣고 결단할 때에 공평하지 못하였으며, 희릉 직장(禧陵直長) 정형주(鄭衡周)는 능침의 역졸들을 침해하여 학대하였으니, 청컨대 모두 도태시켜 버리소서. 내승(內乘) 한상눌(韓尙訥)은 광패(狂悖)하여 윤리가 없으니, 청컨대 명하여 도태하여 버리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되, 이성흥 이하는 풍문(風聞)이 혹시 지나치지 않겠는가? 상세하게 규찰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지금 이번의 증광시(增廣試)는 근례(近例)에 의하여 원점 유생(圓點儒生)269) 의 강경(講經)을 없애서 관시(館試)를 설치하지 아니하고, 다만 양소(兩所)를 설치 하였을 뿐인데, 관시에서 시취(試取)하는 숫자를 양소에 나누어 붙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1월 28일 신축
사간원 【사간 이윤신(李潤身)이다.】 에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주어 문자(奏御文字)는 반드시 전중(典重)하고 온화한 것을 중하게 여기는데, 지난번에 오광운(吳光運)이 황경원(黃景源)에게 대변(對卞)하는 상소에서 이에 ‘황설(黃舌)’이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말하였으나, 그 ‘황(黃)’자가 ‘황(簧)’자와 음이 서로 같음을 취하여 좋게 남을 희롱하는 묘한 자료로 삼았으니, 일이 설만(褻慢)한 데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중추(重推)를 시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공흥도(公洪道) 면천(沔川) 등의 고을에서 어떤 소리가 동방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대포소리 같기도 하고, 또 북소리 같기도 하였는데, 세 번 울리다가 그치었다. 소리가 일어나는 곳에 불빛이 있었고 그 아래에 큰 종과 같은 물건이 있었는데, 모양과 빛깔이 붉어서 불과 같았다. 또 요란한 천둥과 같은 소리가 있었는데, 인방(寅方)과 간방(艮方) 쪽으로 달리다가 한참 동안 지나서야 그치었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영사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속대전(續大典)》을 지금 이미 완성하였다고 고하는데, 반드시 한 번 교정(校正)한 다음이라야 들여다가 간행할 수가 있습니다. 청컨대 교정 당상과 낭청을 임명하여 윤번으로 입직하면서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9일 임인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11월 30일 계묘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정고(呈考)한 것이 일곱 차례에 이르니, 비답하기를,
"안심하고 몸을 조리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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