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0권, 영조 20년 1744년 12월

싸라리리 2025. 9. 27. 17:12
반응형

12월 1일 갑진

밤에 어떤 별이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과 같았고, 길이가 3, 4척이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찬선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음식물과 시탄(柴炭)을 내려주는 것을 사양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써 비답하기를,
"바야흐로 《주례(周禮)》를 강하는데, 물어 보고자 하는 것이 많다. 나의 원량(元良)을 위하여서 보도(輔導)하는 이때에 오직 현덕(賢德)을 기다리니, 어서 빨리 올라와서 소자(小子)가 아침·저녁으로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입직한 승지와 유신들을 경현당(景賢堂)에 불러서 어용(御容) 두 폭을 내어 보이고 말하기를,
"지금이 화상(畫像)을 여러 신하들에게 내어 보이는 것은 이것을 구경시켜려는 것이 아니라, 후일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화상을 보고 길이 《대훈(大訓)》의 뜻을 따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속대전(續大典)》·《속오례의(續五禮儀)》와 《대훈》이 모두 완성되었으니, 내 나이가 비록 늙었다고 하더라도 나의 일은 끝난 것이다."
하였다. 수찬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어용을 우러러보니, 아랫수염과 머리털이 전과 다릅니다. 옛날에 주부자(朱夫子)가 말하기를, ‘천안(天顔)도 또한 옛날과는 다른 것을 깨달았는데,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아니하니, 원컨대 성덕(聖德)을 날로 새롭게 하여 신으로 하여금 옛날의 묵은 걱정을 잊어 버리도록 하소서.’라고 하였으니, 신도 또한 이 말을 진언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주자(朱子)의 말씀을 가지고 우러 아뢰니, 체모를 얻었다고 하겠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영정의 그림이 완성되어 《선원보략(璿源譜略)》에 이미 실었는데, 연중에서 일찍이 이 한 본(本)을 마땅히 강화[沁都]의 옛날 장녕전(長寧殿)에 봉안하라고 유시하였으니, 의조(儀曹)로 하여금 봄철까지 기다렸다가 봉안하게 하되 모든 절차는 왕년에 비하여 조금 줄이어 나의 감히 옛날과 비교하지 않으려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일 을사

감제(柑製)270)  를 설행하고 홍문관 제학 서종급(徐宗伋)에게 명하여 선비를 태학(太學)에서 시취하게 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심수(沈鏽)를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그 다음은 차등 있게 급분(給分)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고, 이어서 대신과 찬집청(纂輯廳)의 여러 당상관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미 한주(翰注)에 하교하였는데, ‘《대훈(大訓)》과 《오례의(五禮儀)》와 《속대전(續大典)》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나의 일은 끝났다.’라고 하였다. 조금 전에 연신(筵臣)의 ‘어용(御容)이 실제 모습과 매우 닮았다.’는 말 때문에 내 스스로 위안을 삼았으니, 후일에 비록 나를 잊어버리는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 신하들이 때때로 영정을 보면 오히려 그 사람을 상상할 수가 있을 것이다. 《대훈》은 후일에 이의가 없을 것 같으나, 그래도 착하고 간특한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말이 있을 것이니, 이것은 바로 이언세(李彦世)에게서 배운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오히려 능히 활로 돌을 쏠 수가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능히 신자들을 감복시키지 못하니, 나는 실로 스스로 부끄러울 뿐이다. 나는 늙었고 경들도 또한 늙었지만, 입시(入侍)한 한주들은 모두 나이가 젊었으니, 이후로 모름지기 이러한 하교를 잊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쉬용(晬容)을 우러러보니, 더욱 만세(萬歲)의 축수를 드리기에 간절합니다. 그런데 《속대전》도 또한 공역을 마쳤으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더욱 굳세고 대담해지도록 스스로 면려하소서."
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세상의 도의는 지금이 전보다 나은데, 윤광천(尹光天)이 비록 대관(臺官)으로서 형벌을 받았지만, 《대훈》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작은 일들은 마치 바람과 비가 하늘을 지나가는 것과 같은 데에 지나지 않으니, 원컨대, 성상께서 마음이 흔들리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승정원일기》가 모두 불타 없어져 문적이 탕진되었으므로, 옛날 일들을 징험하기가 어렵습니다. 사가(私家)에 혹은 일기초(日記草)가 있고, 혹은 조보 정사(朝報政事)도 있으며, 삼사(三司)에도 또한 내려오는 난보(爛報)들이 있습니다. 관청을 설치하는 것은 비록 서서히 의논한다 하더라도, 시임 승지와 주서(注書) 가운데서 이를 주관하게 하여 신칙해서 수합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선묘(宣廟)임진년271)   이후부터 하도록 하라고 명하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미 당상과 낭관을 정하였으니, 응당 행하여야 할 사건을 마땅히 절목(節目)으로써 품지하여 재결을 받아야 합니다."
하니, 옭게 여겼다.

 

홍정명(洪廷命)을 헌납으로, 홍정보(洪正輔)를 정언으로, 민수언(閔洙彦)·전명조(全命肇)를 장령으로, 남혜로(南惠老)를 지평으로, 윤득재(尹得載)를 교리로, 박문수(朴文秀)를 좌참찬으로, 서종급(徐宗伋)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12월 3일 병오

김성응(金聖應)을 다시 제수하여 훈련 대장으로 삼고, 정석오(鄭錫五)를 다시 임명하여 선혜청 당상으로 삼았다.

 

12월 5일 무신

임금이 친히 《속대전(續大典)》의 소지(小識)을 짓고, 명하여 어제 서문(御製序文)의 아래에다 잇달아서 쓰게 하였다.

 

12월 9일 임자

대사헌 김유경(金有慶)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전 정언 이언세(李彦世)가 상소한 원본을 얻어서 보니, 그가 논란하여 열거한 것은 대략 알맞거나 타당하지 못하였으므로, 그에게 당한 자들이 한결같이 대질하여 변명하기를 청하는 것은 진실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만, 다만 생각건대 풍문(風聞)으로 들은 말은 사실을 조사하기가 어려움이 있으며, 비방을 중지시키는 방도도 또한 변명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옛날 송(宋)나라 신하 당개(唐介)가 ‘등롱금(燈籠錦)272)  을 〈장 귀비(張貴妃)에게〉 바쳐 재상의 자리에 이르렀다’라는 말로써 인종(仁宗)의 어전에서 문언박(文彦博)을 직접 탄핵하여 말하기를, ‘문언박은 마땅히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이러한 일이 있다면 숨길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문언박이 절을 하고 사례하기를, 마지 아니하여 끝내 한 마디 말로 스스로 변명하지 않았으며, 인종도 또한 당개에게 힐문하지 않았었는데, 그가 좌천되기에 이르자, 중사(中使)를 보내어 그를 호송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으니, 오늘에 이르러서도 이것을 읽어 보는 자들은 책을 열고 감탄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금일에 수상이 스스로 처리하여야 할 의리는 문언박을 본받아서 사람들이 하는 말의 시비와 허실을 일체 당세의 공의(公議)에다 붙이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아니하며, 자기를 돌이켜보아 스스로 반성하여 잘못된 점이 있으면 이를 고칠 것이고 잘못된 점이 없으면 더욱 권면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 횡역(橫逆)한 말이 오더라도 이것이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지 않을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런데 시끄럽고 떠들썩하게 스스로 변명하고, 소장을 자주 올려서 핵실하기를 청하였는데, 그것이 온당하고 도리에 맞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이 가만히 듣건대, 대신의 글에서 청함으로 인하여 또 이언세를 잡아다가 국문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고 하니, 아!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신은 생각하기를, 지금 이후부터는 전하께서 비록 나라를 망치는 거조를 하신다고 하고, 대신들이 비록 분수를 범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어느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말하는 자는가 없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어찌 마음이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이언세의 상소 중에 좌상과 우상에 대한 말을 불쑥 놓은 것도 또한 매우 박절하였지만, 자기를 논란한 혐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군상(君上)을 억지로 강권하다가 끝내 반드시 국문을 가하고야 마니, 만약 이언세로 하여금 능히 살아서 옥문을 나올 수가 없게 한다면, 천하 후세에서 장차 오늘날을 가지고 어떠한 시대라고 하겠습니까? 윤광천(尹光天)의 사건과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언급하여야 소용이 없겠습니다만, 자신이 대간(臺諫)의 자리에 있으면서 눈으로 지나친 거조를 보고 청대(請對)하여 동료를 구원하려고 하였으니, 진실로 간신(諫臣)의 풍채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한번 기휘(忌諱)하는 죄에 거촉된다고 갑자기 형틀을 베풀어 거의 눈앞에서 박살당하는 지경에 이르니, 애석합니다. 그날 근신(近臣)의 반열에서는 한정(漢廷)의 한 늙은 신하가 유독 없어서 능히 성상의 뜻을 구원하여 풀어드리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노하여 그 관직을 삭탈하고 그 소장을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과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연명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수상이 망칙한 일을 당하여서 그가 한 마디라도 변명하고자 하는 것은 상정(常情)이 같은 바인데, 성상께서 이를 순문(詢問)하시는 아래에서 신 등은 대략 이러한 뜻을 가지고 우러러 복명하였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굳이 청한 일이 없었는데, 하물며 명분상 비록 잡아와서 국문한다고 하더라도, 실상은 조사를 행하는 것이니, 그가 살아서 옥문을 나올지의 여부는 논할 바가 못됩니다. 헌장(憲長)이 이를 염려하는 것은 또한 지나치지 아니하겠습니까? 성상께서 어찌 족히 이것에 개의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바답하였다. 이때에 이언세를 이미 귀양보냈다가 도로 잡아 와서 장차 그 말의 근원을 캐묻고자 하였는데, 대개 논란을 당한 대신들이 그를 조사하도록 청하기를 매우 힘썼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도 그 불가(不可)한 것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김유경은 기로(耆老)의 신하로서, 본래 우아한 명망을 지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소하다가 견책을 당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함경 감사 이수항(李壽沆)이 말하기를, ‘덕원(德源)과 원산(元山)은 본부의 민고(民庫)에 속하였는데, 기로소(耆老所)에게 새로 절수(折受)하는 것이 있어서 백성들의 폐단에 크게 관계됩니다.’ 하였습니다. 대저 서북 지방은 여기에서부터 변지(邊地)이기 때문에 조종조 때에도 절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던 것은 그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곧 지금 기사(耆司)는 사건의 체모가 비록 스스로 다르다고 하더라도 일찍이 전대(前代)에 없었던 절수를 북로(北路)에다 만들어 개설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원산(元山)에서 절수하라는 명령을 도로 중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찬집(纂輯)하는 노고를 위로하여, 여러 당상과 낭관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려주었다.

 

김시혁(金始㷜)을 대사헌으로, 정수기(鄭壽期)를 예조 판서로, 이광식(李光湜)을 집의로, 안상휘(安相徽)를 사간으로, 이봉령(李鳳齡)·정광운(鄭廣運)을 장령으로, 임순(任珣)을 정언으로, 윤득재(尹得載)·유언호(兪彦好)를 지평으로 삼았다.

 

12월 10일 계축

임금이 초복273)  을 행하였다.

 

12월 11일 갑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기를,
"지난해에는 각도의 실농(失農)으로 인하여 여러 도에서 각종 용도(用度)를 재량하여 감한 바가 있습니다만, 금년에는 삼남 지방과 경기 지방에 농사가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한결같이 재량하여 감할 수가 없습니다. 감영(監營)의 수요와 각종의 가미(價米)를 마땅히 감하던 것을 해제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전라 감사 정형복(鄭亨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길에서 들으니, 전 감사 원경하(元景夏)가 하나의 조그마한 일로 인하여 신에게 노여워하는 것이 대단히 지나쳐 심지어 노중(路中)에서 인부(印符)를 던졌다는 말까지 있었다고 하므로 신이 직접 교대할 때에 들은 소문을 따져 말하였더니, 원경하가 큰 소리로 노기를 띄우고는 그런 말을 전한 사람을 조사하여 내도록 독촉하면서 전로(前路)에 신이 데리고 온 영리(營吏)를 잡아와서, 서울에 있을 때의 조그만한 죄를 가지고 심지어 옮겨다 가두고자 하다가 그만두었으며, 고래고래 고함치고 떠들석하여 신을 마치 없는 것처럼 보아 서로 공경하는 뜻이 없었으니, 어찌 신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원경하가 대변(對卞)하여 상소하기를,
"새 도백이 문서(文書)를 왕복한 것은 없었고 노문(路文)만이 먼저 도착하였으므로 창황하게 인부를 가지고 가서 기다렸다가, 황화정(黃華亭)에 이르러서 교귀(交龜)274)  를 하였는데, 노중에서 인부를 던져 주었다는 말은 저절로 허망한 데에 귀착될 것입니다. 신이 그 말의 근원을 핵실하고자 하니 새 도백의 말하는 기색이 매우 발끈하였기 때문에 비록 이를 그만두었지만, 새 도백이 앉는 자리는 안으로 병풍을 둘러치고 바깥으로 포장으로 막았는데, 옛 도백이 앉는 자리는 단지 하나의 방석만 있을 뿐이므로 일의 체모가 한심하였으니, 해당 영리를 옮겨다가 가두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습니까? 파출(罷黜)할 때에도 그 편비(褊裨)의 무리들이 전혀 체모에 어두워 좌당(坐堂)에서 내려가지 아니하였는데, 이것도 또한 서로 공경하는 뜻이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새 도백과 옛 도백이 조그마한 일을 서로 겨루다가 소장을 올리기에 이르렀다고 하여, 모두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2월 12일 을묘

조명교(曺命敎)를 대사헌으로, 김계백(金啓白)을 장령으로, 홍중일(洪重一)을 집의로 삼았다.

 

12월 13일 병진

화성(火星)이 태미성(太微星)을 범하였다.

 

권적(權𥛚)을 대사헌으로, 이위보(李渭輔)를 장령으로 삼았다.

 

임금이 삼복(三覆)을 행하였는데, 명하여 참작해서 처리한 것이 다섯 사람이었다. 또 공주(公州)의 이씨(李氏) 여자의 집에 정문을 세우게 하였는데, 이씨 여자는 사람에게 강제로 겁탈을 당하게 되자 따르지 아니하고 죽은 자였다. 교리 조명정(趙明鼎)이 나아와서 말하기를,
"지금 정치와 교화가 아름답고 밝아서, 신린(臣隣)들이 기약하고 바라는 것은 형벌을 집행하지 않는 교화에 있는데, 사형수(死刑囚)로 처단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이 비록 세상의 도의와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전하의 책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의 주문(奏聞)은 진실로 체모를 얻었다."
하고, 이어서 윤음(綸音)을 여러 도에서 내려서 유시하기를,
"아! 옛날에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보통 군주에 지나지 않았으나 영어(囹圄)가 텅 비어 까치[鵲]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하는데, 덕(德)이 없는 이 사람이 임어한 이후로 세말(歲末)에 계복(啓覆)275)  이 언제나 10건이 넘었는데, 금번에는 24건이나 많은 데에 이르니, 마음이 남몰래 부끄럽다. 아! 저 국법을 범한 자가 비록 무상(無狀)하다고 하더라도, 왕이 된 자가 덕이 있고 도신(道臣)들이 교화를 폈다면, 어찌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겠는가? 이것이 내가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어 마음으로 부끄럽게 여기는 까닭이다. 금번에 옥사를 결단한 것이 비록 여기에 그쳤지만, 외방에서 동추(同推)276)  하다가 결말을 내지 못한 것이 그 숫자가 얼마인지를 알지 못하니, 아! 여러 도의 도신들은 모두 이러한 뜻을 본받아 흠휼(欽恤)하도록 하라. 구중 궁궐은 이미 깊으므로 멀리 외방의 일을 상세하게 알기가 어려워서, 하나라도 혹시 무고한 일이 있을 수도 있고, 하나라도 혹시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을 상세히 심문하지도 아니하고 선입관에 얽매여 관례에 따라 끝까지 범죄를 추궁하니, 어떻게 사실을 깨닫거나 살피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두려운 마음을 깨닫지 못하겠다. 삼복에서 흠휼하는 것은 그 초복(初覆)에서 자세히 살피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것은 그 허물이 비록 윗자리에 있는 자에게 오로지 있다고 하더라도 도신과 수령에게도 또한 어찌 신칙하고 면려함을 저버리고 형법을 소홀히 다룬 과오가 없겠는가? 외방의 근본은 곧 왕부(王府)이니, 이로써 또한 해조에 신칙한다."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삼학사(三學士)277)  와 안문성(安文成)278)  과 강화도에서 사절(死節)한 사람 송시영(宋時榮)과 신익륭(申翊隆)의 자손을 녹용하도록 청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문순공 박세채(朴世采)의 제사를 받드는 자손을 녹용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신경(申暻)·나삼(羅蔘)·이양원(李養源)은 바로 학문하는 선비이니, 모두 6품으로 승진시키어 혹은 계방(桂坊)에 두기도 하고, 혹은 자목(字牧)을 시험하기도 한다면 마땅히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근래에 위패(違牌)한 사람들이 친히 명소(命召)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대사헌 권적(權𥛚)을 특별히 파직하고, 장령 김계백(金啓白)을 삭직(削職)하며, 또 대사간 이중경(李重庚)이 이미 초복(初覆)에 참여하였는데도, 재패(再牌)에 비로소 응하였다고 하여 그 관직을 교체시켰다.

 

12월 14일 정사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5일 무오

태백성(太白星)이 또 나타났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참찬관 원경하(元景夏)에게 말하기를,
"하루라도 여러 신하들을 보지 아니하면 나의 마음이 스스로 부끄럽다. 또 경을 보고자 하여 야대로써 부른 것이다. 내가 원량(元良)에게 학문을 권장하려는 마음이 있으나, 기운과 마음이 따르지 못하니 어찌하겠는가?"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이 호남 지방에서 들으니, 성상께서 기사(耆社)에 들어가셨으나 오히려 강경(講經)과 윤대(輪對)를 그만두지 아니하신다고 하는데, 이것은 곧 위(衛)나라 무공(武公)이 억계(抑戒)279)  를 지은 뜻입니다. 군신(君臣)은 부자와 같은데, 혹은 와내(臥內)로 인입(引入)하기도 하고, 그 예모를 간략히 하더라도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유신들을 끌어들여 접촉하고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토론한 것은 바로 세종(世宗)과 문종(文宗)의 성대한 때의 일이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마땅히 이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호남 지방의 백성들의 일에 대하여 물으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영남 지방의 70주는 절반이 왜인(倭人)들에게 미곡을 공급하므로, 국용(國用)은 오로지 호남 지방에 달렸는데, 조운(漕運)하는 여러 거자 일들은 모두 아무 대책도 없어 엉성하고, 선박의 재목도 또한 장차 산에 나무가 없어져 고갈될 것이니, 지금은 호남 지방에서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을 비록 그들에게 책임지우기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60여 건의 옥사(獄事) 가운데, 아들이 아비의 집에 불을 지른 것도 있고, 전정(田政)은 백지(白地)에 조세를 징수하는 경우가 있으며, 뒤에 진전(陳田)으로 거듭 묵히는 것도 한 가지 고질스러운 병폐가 되지만, 세목이 비어 있는 가운데 도로 기경(起耕)하는 폐단도 있습니다. 각 고을의 하리(下吏)들도 또한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손을 쓸 만한 곳이 없으르로, 일족(一族)에게 징수하거나 독촉하는 자도 있고, 심지어 속전(續田)에 대해서는 5년을 기한하므로 백성들이 모두 급하여 허둥대는데, 신은 기경(起耕)하는 대로 그 즉시 징세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인심은 어떠하던가?"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대저 속이고 거짓말을 하지만, 강개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면, 나라가 위급할 때에 또한 쓸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귤 한 쟁반을 나누어 주자, 여러 신하들이 옷소매에 넣어서 나갔다.

 

임금이 이언세(李彦世)의 말이 이미 무고하고 허망하다는 결말이 났음으로, 영상이 지금 인혐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승지를 보내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가서 타이르게 하고, 그와 함께 같이 오게 하였으나 김재로가 왕명에 응하지 아니하고 연달아 사직하는 단자(單子)를 올렸다.

 

12월 16일 기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7일 경신

태백성(太白星)이 또 나타났다. 달이 헌원(軒轅)의 대남성(大南星)을 범하였다.

 

12월 18일 신유

태백성(太白星)이 또 나타났다.

 

12월 19일 임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강원 감사 권혁(權爀)이 공명첩(空名帖) 1천 장을 얻어서 도내와 영문(營門)에 있는 군기(軍器)를 보수하기를 청하니,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절반으로 줄여서 이를 허락하자고 청하였다. 함경 감사 이수항(李壽沆)이 아뢰기를,
"도내의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재해(災害)를 입은 것이 더욱 심합니다. 갑자년280)   조(條)의 전세 미태(田稅米太)와 삼색 노비(三色奴婢)의 신공미(身貢米)를 청컨대 내년 가을까지 물려서 기다렸다가 거두어 들이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조현명도 또한 이를 허락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2월 20일 계해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조영로(趙榮魯)를 대사간으로, 이진의(李鎭儀)·조운규(趙雲逵)를 지평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서 인천 부사 박필부(朴弼傅)를 인견하 였다. 박필부는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손자로서 관리로 선임되어 여러 번 남대(南臺)281)  를 거쳤으나, 소명(召命)에 나오지 아니하다가 이 관직을 제수하게 되자, 비로소 어명을 받들고 이때에 이르러 사폐(辭陛)하였다. 임금이 그를 소견하고 학문의 요체를 물으니, 박필부가 대답하기를,
"신의 조부께서 숙종조 계해년282)  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렸었는데, 학문하는 큰 뜻과 나라를 다스리는 규모가 모두 이 상소에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의 일생 동안 닦은 학문은 붕당(朋黨)을 조정하는 데에 있었는데, 능히 선정신의 교훈을 따라서 지킬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아까 계해년의 상소를 가지고 우러러 말씀드렸던 것도, 대개 이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이것을 열람하여야 하겠다."
하고, 세자에게 명하여 어제 권학문(御製勸學文)을 읽게 하고는 박필부로 하여금 글의 뜻에 어려운 부분을 물어 보게 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선유(宣諭)하게 하고, 이어서 납제(臘劑)283)  를 내려 주어 그를 위로하고 권면해서 보내었다.

 

12월 22일 을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23일 병인

태백성(太白星)이 또 나타났다.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러 쌌다.

 

12월 24일 정묘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상산 부원군(商山府院君) 강순룡(康舜龍)의 후손 강치경(康致卿)이 태조의 어필로 쓰여진 교지(敎旨)를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교지 가운데 인전(印篆)을 보고 그 연월을 상고하니, 바로 성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초기였다. 병자 호란 이후에 청(淸)나라의 보인(寶印)을 사용하는데, 지난번에 상신 이이명(李頣命)의 주달로 인하여 비로소 괴원(槐院)에 해창위(海昌尉)가 모방하여 주조한 황조(皇朝)의 보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조선왕 보전(朝鮮王寶篆)을 보니 또 기이하다. 지금은 조신(朝臣)의 교지에 모두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사용하는데,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다. 이것은 비록 고칠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이미 보전을 보았으니, 더욱 어찌 이를 없애 버리겠는가? 국가의 교명(敎命)과 왕후·세자의 책례(冊禮) 때에는 마땅히 이것을 사용하여야 하겠다."
하고, 이어서 상방(尙方)에 명하여 이를 모방하여 주조해서 바치게 하였다.

 

임금이 《자치통감(資治通鑑)》 가운데 제갈양(諸葛亮) 입구(入寇)라는 서법(書法)의 잘못을 여러 차례 여러 신하들과 논란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친히 서문(序文)을 짓고, 《자치통감》 권수(卷首)에 간인하도록 명하였다. 또 임금이 어제시(御製詩) 한 수를 내려 주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제왕의 상세(上世)에는 향년이 높고,
천리(天理)가 순연(純然)하여 한 마음을 맑게 하도다.
역사를 보고 마땅히 성현(聖賢)의 법을 먼저 하니,
우왕·탕왕·요 임금·순 임금이 옆자리에 와서 계시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사략(史略)》의 권수(卷首)에다 제목으로 쓰게 하였는데, 그때 동궁(東宮)이 바야흐로 《사략》을 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2월 25일 무진

태백성(太白星)이 또 나타났다.

 

정언 임순(任珣)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치하는 풍습이 날로 더하고 달로 성하여 복식(服食)과 기용(器用)이 사치스럽고 호화스럽기가 극에 달하는데, 그중에서 제택(第宅)이 제도를 넘는 것을 더욱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깁니다. 귀한 가문과 호족(豪族)들이 다투어 집을 광대하고 사치스럽게 짓기를 숭상하는데, 여항(閭巷)의 소민(小民)들도 또한 모두 이것을 흠모하고 본받아서, 재물을 허비하고 힘을 손상시키는 것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옛날 조종조(祖宗朝)에 어떤 귀척(貴戚)이 집을 짓는데 조금 지나치게 하였다가, 그때의 한성 판윤 전림(田霖)이 길을 지나다가 이것을 보고서, 그 집 사람을 불러서 말하기를, ‘만약 헐어서철거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계달하여 이것을 다스리겠다.’라고 하였더니, 그 집에서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여 바로 그 날 이를 허물었던 것입니다. 선왕(先王)들께서 법을 세우신 것이 엄하기가 대개 이와 같았으니, 지금 비록 일일이 헐어서 철거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번에 옛날 법전(法典)을 개수(改修)하는 때를 당하여, 만약 조금이라도 금지하고 방비하여 이를 제한하고 절제하지 아니한다면, 그 어찌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당론(黨論)이 국가의 화근이 되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힘써 이것을 타파(打破)하여 소탕하고 융해시키려 하시니,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근원이 이미 깊어서 뿌리를 뽑기가 어려운데, 비유하건대 응어리진 병을 고치는 자가 병을 치료하는 의술을 너무 급하게 할 수가 없으니, 진실로 뱃속의 응어리가 아직 없어지지 아니하였는데도 진짜 원기가 먼저 해를 받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자주 강연(講筵)을 열고 자주 빈대(賓對)를 행하시어 성상께서 부지런한 마음을 기울이시어 혹시 한가하게 쉼이 없게 하여 우리 저궁(儲宮)으로 하여금 친히 보고서 본받는 바가 있게 하소서. "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대답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향군(鄕軍)에게 폐단을 줄이는 방법을 물어 보게 하였는데, 호남 지방의 상번군(上番軍)이 진상(進上)하는 산돼지를 능히 잡아서 바칠 수가 없으면, 돈으로써 대신 바치게 하는 폐단을 우러러 대답하니, 비국에 품신하여 처리하라 명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막중한 토공(土貢)을 민간에게서 거두어 들이는 것은 일이 지극히 잘못되었다고 하여, 임금이 돈으로서 대신 받는 습관을 엄하게 금지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호남 지방에서 강속전(降續田)의 5년 동안 기한을 정하는 법을 중지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보다 앞서 경자년284)  에 양전(量田)한 뒤에 진전(陳田)에서 백징(白徴)하는 폐단이 있어서 도신이 장계하여 청하였으므로, 속전(續田)의 예에 의하여 기경(起耕)하면 세금을 받고, 묵히면 세금을 받지 않게 하였었다. 그 뒤에 백성들 가운데 혹은 기경하거나 개간하여도 조세를 바치지 아니하는 자가 있으니, 도신이 또 장계하여 강속전으로 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간사한 폐단을 염려하여, 연한을 정하여서 감독하고 문책하려는 뜻을 엄하게 보였었다. 그 연한이 장차 차게 되면, 세목이 텅 빈 가운데 다시 기경하는 폐단이 있기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원경하(元景夏)가 호남 지방의 도백(道伯)이 되었을 때에 장계하여 이것을 혁파하도록 청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품지하여 기경하는 대로 그 즉시 조세를 거두고 연한을 정하지 말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송인명이 이어서 원경하로 하여금 그 바로잡는 일을 관장하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신 등이 비국의 자리를 외람되게 차지한 지 거의 20년이 되었습니다. 근력은 비록 쇠약하더라도 지력는 점점 커지니, 나이 어린 때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금일에 보산(寶算)이 비록 높으시지만, 예지(睿智)가 더욱 높아지고 성학(聖學)이 더욱 높아지니, 이것은 바로 군신 상하가 급급하게 일을 할 수가 있는 때입니다. 바로 지금 《속대전(續大典)》과 《속오례의(續五禮儀)》를 찬집하여 완성한 것도 또한 전하께서 대도(大道)를 후세에 남겨 주고 먼 후일을 경영하시려는 뜻입니다. ‘능히 일을 이미 마쳤다.’고 하교하시지 마시고 더욱더 권면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재자관(䝴咨官)의 말을 들으니, 황제가 심양(瀋陽)에 행차한 뒤에 사냥을 나가서 혹은 3백 리나 혹은 4백 리를 순행(巡行)하는데, 그 반유(盤遊)하는 것이 법도가 없으며, 금산사(金山寺)를 짖는데 그 제도가 보통과 다르며, 또 남부 여대(南負女戴)하여 길을 가는 자가 도로에 서로 잇따랐으므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성중의 무뢰한들로 하여금 나가서 백두산(白頭山) 근처를 지키게 한다.’라고 하였다 하는데,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정확히 어떤 곳을 지키는 지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모두 중국[中州]과 혼돈되어 있으니, 내가 혹시 보지 못하더라도 천하의 일은 저절로 알 수가 있다. 바로 지금 관방(關防)에는 믿을 만한 것이 없는데, 장차 어찌하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김약로(金若魯)가 기백(箕伯)285)  이 되었을 때에 장문(狀聞)하기를, ‘관서 지방의 강변 일대에 있는 일곱 고을은 그 앞이 두만강에 맞닿고 배후에 한두 고개가 있어서 모두 적로(賊路)에 해당하는데, 만약 나라의 위급한 때를 만난다면, 강변의 일곱 고을은 마땅히 이 고개를 수비하여 적들로 하여금 고개를 넘지 말게 해야 할 것이며, 그리고 삭주(朔州)로 말하더라도 그 곳에서 창성(昌城)을 관할 하기 때문에 난시(亂時)에는 마땅히 뒤에 있는 고개를 내버리고 도리어 다른 고을로 갈 것이니, 방어의 허술하기가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유의(留意)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12월 26일 기사

태백성(太白星)이 또 나타났다.

 

12월 27일 경오

임금이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여,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소열제 권(昭烈帝卷)을 강하였는데, 검토관 윤광소(尹光紹)가 말하기를,
"소열제가 나라를 세운 초기는 바로 나이 60세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신은 이것을 가지고 성상께서 늦은 나이에도 권면하시는 바탕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열제는 고기와 물이 서로 만난 즐거움을 얻어서, 백제성(白帝城)에 의탁함이 있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재주는 다른 시대에서 빌리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지금이라고 어찌 사람이 없겠는가? 내가 알지 못하는 것뿐이다."
하고, 이어서 어제시(御製詩) 1수를 내려 주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옛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일월(日月)은 같은데,
대의(大義)를 펴고자 하던 한나라 재상 충신이로다.
오척의 아동들도 그대의 사적을 읊조리는데,
사마씨(司馬氏)는 어찌하여 공(公)을 알지 못하였는가?"
하고, 경연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이에 화답하는 글을 바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처음에 권수(卷首)에다 간인하여 게재하고자 하였으나, 혹시라도 마침내 문폐(文弊)를 이루게 될까 두렵기 때문에 이것을 그만두겠다. 다만 어제(御製) 가운데 옥당(玉堂)의 고사를 거두어 들이도록 할 뿐이니, 《승정원일기》에도 이것을 싣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8일 신미

사간 안상휘(安相徽)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도헌(都憲) 김유경(金有慶)이 본래 강직한 성격으로 나라를 근심하고 강개(慷慨)하는 정성을 이기지 못하여, 대략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아뢰었는데, 그 나이를 돌아보면 기사(耆社)의 신하이며, 그 관직을 묻는다면 백부(柏府)286)  의 우두머리입니다. 언론(言論)이 비록 떨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더욱 우대하고 수용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한 글자의 비답도 내려 주시지 아니하고, 갑자기 그 관직을 삭탈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니, 성명(聖明)께서 기사와 언관을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 아마 너무나 야박한 것 같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관직을 삭탈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시고 노신을 우대하고 간언을 용납하는 도리를 보이시는 것이 실로 성덕(聖德)의 영광이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교하 군수 박필기(朴弼琦)가 상소하여 증미(拯米)의 폐단을 아뢰고, 이어서 지난해 세 곳의 증미는 빨리 전 수량을 정지시키거나 물리도록 명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비국에 명하여 품지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처음에 병조에서 순장(巡將)이 보고한 것을 가지고 아뢰기를,
"일전에 훈련 대장 집의 청지기가 순청(巡廳)에 붙잡히게 되었는데, 훈국(訓局)의 패장(牌將)들이 감정을 풀려는 계책으로 삼아 관패 군졸(管牌軍卒)을 결박하여 와서 붙잡아 갔다고 합니다. 해당 훈국의 패장(牌將)과 나졸(邏卒)들을 마땅히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 죄를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밤중에 통행(通行)을 금지하는 법은 오로지 군호(軍號)를 중하게 여기는 것인데, 어제 나졸들이 군호를 통하지 아니하였다고 순졸을 붙잡아 왔기 때문에 신은 과연 법에 의하여 죄를 다스렸습니다."
하니, 임금이 순장(巡將)이 그 군사들을 신칙하지 아니하고 다만 간사한 하소연에만 의지하여 초기(草記)하였다고 하여 파직시키기를 명하고, 패장(牌將)의 죄를 다스리는 일은 중지하게 하였다.

 

12월 29일 임신

공홍도(公洪道) 유학(幼學) 유언집(兪彦輯)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미 유시하였다."
하였다.

 

지평 권기언(權基彦)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년 이래로 혜성(彗星)과 겨울철 천둥의 이변이 청대(靑臺)287)  에서 겹쳐 나오고, 지난번 궁궐 정문의 재변에 이르러서는 더욱 마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언로(言路)에 대해서 말을 한다면 위에서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것은 형틀에 묶거나 유배시키는 것뿐이며, 아래에서 대각을 처우하는 것은 함정에 빠뜨리거나 쇠고랑을 채우는 것뿐입니다. 시상(時象)에 대해서 말을 한다면, 염치가 없어지고 간알(干謁)이 풍속을 이루어 전주(銓注)를 맡은 집안에서는 사람들을 수응(酬應)하기에 피로하고 한밤중에 붉은 대문에는 나귀와 말들이 서로 메워지며, 장법(贓法)이 이완되어 탐오한 관리들이 꺼리는 바가 없이 관물을 짐바리로 실어 나르며 전장(田庄)을 널리 점거하는데도, 사람들은 그르다고 여기지 아니합니다. 심지어 각 감영(監營)과 각 아문(衙門)에서도 사리를 꾀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그 단서가 하나만이 아니어서 간악한 비장(裨將)과 탐오한 관리들이 도로에 깔렸는데, 이 때문에 이웃과 친족에게 서로 징수하니, 생민들이 생업을 잃고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를 차마 귀로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비록 공명 정직한 언론과 풍채로서 한 세상의 추복(推服)하는 바가 되는 자로 하여금 다스리고 규찰하는 책임을 지도록 하더라도, 위로 임금의 부족한 점을 보필하고 아래로 관리들의 사악한 것을 바로잡도록 바라기는 오히려 어려울 것입니다. 신과 같이 용렬하고 비루한 자가, 돌아보건대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호남 지방에서 조운미(漕運米)를 방환(防換)하는 폐단을 말하면서 도신(道臣)을 추고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