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1권, 영조 21년 1745년 1월

싸라리리 2025. 9. 28.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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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계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 진하(陳賀)하고, 이어서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숭정전 계단 위 판위(板位)에 나아가니, 인의(引儀)가 치사(致詞)를 읽었다. 임금이 표리(表裏)001)  를 올리고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답교(答敎)를 받든 후 또 사배례를 행하였다. 이어서 정전(正殿)에 나아가 하례를 받았는데, 끝마치고는 백관이 중궁전(中宮殿)에 진하하였다. 이날 하교하기를,
"나라의 근본은 백성들에게 있고, 백성들의 근본은 농사에 있다. 아! 도신(道臣)과 수령(守令)들은 내가 백성들을 위하는 것을 본받아 착실한 뜻으로 농사를 권장해 나의 백성들[元元]로 하여금 모두 성세(盛世)를 누리도록 하라."
하였다.

 

제주 목사(濟州牧使) 윤식(尹植)의 장청(狀請)을 인하여 연해(沿海)의 곡식 2천 5백 석(石)을 획급(劃給)하라고 명하고 또 각사(各司)의 노비(奴婢) 및 선혜청(宣惠廳)의 응납미(應納米)를 감해 주라고 명하였는데, 본주(本州)에 거듭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1월 2일 갑술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1월 3일 을해

부제학(副提學) 원경하(元景夏), 교리(校理) 송창명(宋昌明)·조명정(趙明鼎), 부교리(副校理) 홍중효(洪重孝) 등이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변(變)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진계(陳戒)하기를,
"삼가 상고하건대, 지천(地天)002)   한 괘(卦)는 정월(正月)의 상(象)에 해당되고, 구이(九二)003)   한 효(爻)는 강중(剛中)004)  의 군덕(君德)에 서로 응합니다. 거기에 ‘포항(包荒)’이라 말한 것은 널리 포용(包容)하는 도량을 힘쓰고 분질(忿疾)의 마음을 경계하기에 힘쓰라는 것이요, 거기에 ‘용빙하(用馮河)’라고 말한 것은 강과(剛果)의 뜻을 가다듬고 위미(委靡)의 폐단을 바로잡으라는 것이요, 거기에 ‘불하유(不遐遺)’라고 말한 것은 안일(安逸)한 데에 빠진 것을 경계하고 먼 곳을 잊기가 쉬움을 염려한 것이요, 거기에 ‘붕망(朋亡)’이라 한 것은 음비(淫比)를 경계하고 당사(黨私)를 버리기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태괘(泰卦)의 구이(九二)는 실로 때에 따른 정사의 요체에서 나온 것인데 오늘날의 정사는 한결같이 희효(羲爻)005)  와 반대되니,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변이 이에서 나온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승지(承旨) 남태경(南泰慶) 등이 아뢰기를,
"오늘의 흰 무지개 변고가 이처럼 극에 이르렀으니, 신은 청컨대 어리석은 소견을 우러러 진달하겠습니다. 성학(聖學)으로 말하자면 규모가 굉원(宏遠)하지 못하고, 조치해 시행함이 강건(剛健)하지 못하며, 뭇 신하들을 경시해 군덕(君德)은 날로 거만해지며, 강대(講對)는 드물고 소활(疏闊)해져 시종 법도에 모자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쓰는 것으로 말하자면 등용하는 자는 문벌이 좋은 세족(世族)과 세력이 있는 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버리는 자는 소원하고 한미하여 지조를 지키려는 사람이니, 이는 바로 사람을 위해 벼슬을 가리는 것이요 이른바 벼슬을 위해 사람을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청납(聽納)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전하께서 쓴 사람이 모두 당색(黨色)에 든 사람이기 때문에 진언하는 자들이 그 당색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오로지 이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말이 비위를 거스르면 작게는 꺾임을 당하고, 크게는 찬축(竄逐)을 당하여 대각(臺閣)의 신하가 장차 감히 전하를 위해 충성을 바치지 못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흰 무지개의 변고로 인해 하교하여 칙유(勅諭)하기를,
"대소 신하들은 정백(精白)하게 마음을 가다듬어 백성을 구제하는 데 힘쓰라."
하였다.

 

1월 4일 병자

태백성(泰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1월 5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6일 무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7일 기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8일 경진

시강원(侍講院)의 아룀으로 인하여 명하기를,
"금년부터 왕세자(王世子)의 회강(會講)006) 취품(取稟)007)  을 예(例)에 의해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대개 왕세자의 회강은 으레 11세부터 비로소 행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연분(年分)008)  의 비총법(比摠法)009)  은 대체(大體)가 너무 지나치게 넘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 사소하게 넘나드는 것은 면하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호서(湖西)는 비총 이외에 가분(加分)한 것이 7천여 결(結)에 이르니 참으로 너무 지나친데, 그 중 3천여 결은 바로 기묘년010)   후의 공탈(公頉)011)  이요, 가분한 실제 숫자는 3천여 결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제 만약 실제 숫자로 돌린다면 민폐(民弊)가 반드시 처음 급재(給災)012)  하지 않을 때보다 심할 것입니다. 도신(道臣)이 마음대로 가분한 것을 마땅히 중추(重推)해야 하고, 호조(戶曹)에서 내린 실제 숫자로 돌린다는 영(令)도 마땅히 중지해야 하며, 여러 도 역시 마땅히 한 가지로 예로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는데, 이때에 공홍 감사(公洪監司) 이덕중(李德重)이 상소하여 실제 숫자로 돌리는 것을 중지하기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1월 9일 신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경기(京畿) 풍덕(豐德)의 유학(幼學) 박유(朴維) 등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의 봉사손(奉祀孫)을 입후(立後)하소서."
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하라 명하였는데, 대개 선정(先正)의 봉사손 조문보(趙文普)가 무신년013)   역옥(逆獄)에 죽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병상(李秉常)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조상경(趙尙絅)을 인견하여 어용(御容)을 봉안(奉安)하는 일을 물었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나의 어용을 구장녕전(舊長寧殿)에 봉안하고자 하는데, 이제 듣건대, ‘선조(先朝)의 어용을 봉안한 신전(新殿)을 만약 수리하는 일이 있게 되면 임시로 구전(舊殿)에 봉안해야 하는데 이제 어용을 봉안한 후에는 마땅히 임시로 행궁(行宮)에 봉안해야 한다.’고 하니, 내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이제 내 어용은 구전 동쪽 전각에도 봉안하기에 족하니, 이 전각에 거행하고 또 이 전각에 만약 임시로 봉안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협실(夾室)을 씀이 마땅한데, 전각의 호칭을 어찌 구장녕전(舊長寧殿)이라 일컫겠는가?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예(例)를 상고하여 호칭을 정하게 하라."
하였다. 이튿날 정원에서 아뢰기를,
"장녕전의 편액(扁額)은 성상께서 써서 내리셨는데, 소덕문(昭德門)의 호칭을 고칠 때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하여금 삼망(三望)을 갖추어 들인 예가 있습니다. 전각의 호칭은 사체가 더욱 중하니, 마땅히 제학으로 하여금 의망(擬望)014)  해 들이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래서 전각의 호칭을 만녕전(萬寧殿)으로 의망해 들여 낙점(落點)하였다. 이어 장녕전(長寧殿) 절제 헌관(節祭獻官)은 강화 유수(江華留守)와 통진 부사(通津府使)로서 실차(實差)015)  ·예차(豫差)016)  로 삼고, 만녕전의 수직관(守直官)은 장녕전의 예에 따라 참봉(參奉)으로서 별검(別檢)을 삼고 이어서 대축(大祝)의 실차·예차로 삼도록 명하였는데, 이병상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임금이 강도(江都) 보장(保障)의 편의(便宜)를 물으니, 이병상이 아뢰기를,
"숙묘(肅廟)께서 후릉(厚陵)017)  에 행행(行幸)하실 때에 문수 산성(文殊山城)의 형세를 바라보고, 형세를 그려 들이라 명하고 정교하시기를, ‘통진(甬津)을 산성으로 읍(邑)을 옮긴 연후에야 보장을 이룰 수 있다.’라고 하셨으니 성모(聖謨)가 아주 예사롭지 않은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읍을 옮기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아직껏 실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해야 하겠다."
하였다. 이병상이 물러남에 임하여 나이가 70을 넘은 것으로써 치사(致仕)하기를 비니, 임금이 말하기를,
"구신(舊臣)은 다만 경 등 몇 사람이 남아 있다."
하고, 드디어 허락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도성(都城) 백성들의 휴척(休戚)은 경조(京兆)의 부관(部官)에게 달려 있고, 외방 백성들은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에게 달려 있다. 안으로는 부관, 밖으로는 수령들이 백성들의 폐해를 자세히 살펴 크고 작은 것을 물론하고 경조와 도신(道臣)에게 보고하되 그 중 작은 일은 경조 및 방백이 칙려(飭勵)해 폐해를 제거하고, 그 중 큰 것은 혹 초기(草記)로, 혹은 장계(狀啓)로 보고하도록 하라. 아! 벌레들도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때인데, 아! 옥중(獄中)에 갇힌 사람들은 흑백(黑白)이 뒤섞여 그 억울함을 펴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만물을 소생시키는 천지의 덕을 맞이하는 뜻이겠는가? 중외에 신칙하여 즉시 자세히 결단해 지체됨이 없게 하고, 감옥을 깨끗이 청소하여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비록 그 안에 있더라도 삼양(三陽)의 시절임을 알게 하라."
하였다.

 

1월 10일 임오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상로(金尙魯)가 장계하기를,
"도내(道內)에 7월 이후 물에 빠져 죽거나 사태(沙汰)에 깔려 죽은 자가 1백 80명에 이릅니다."
하니, 휼전(恤典)을 시행하라 명하였다.

 

장령 심익성(沈益聖)이 흰 무지개의 변고로 인해 상소하여 진계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인심이 함닉(陷溺)되고, 세도(世道)가 험악함이 오늘날보다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시론(時論)이 궤열(潰裂)되어 조정의 기상이 화합함을 볼 수 없고, 언로(言路)가 두절되어 찬축(竄逐)이 서로 잇따르는 것만을 볼 수 있으며, 진신(搢紳) 사이에는 염치가 전혀 없고 조정에는 머뭇거리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 기강이 무너졌는데도 진작시킬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며, 백성들이 거꾸로 매달인 듯한데도 구제하는 방책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말 한 마디나 행동 하나를 반드시 성정(誠正)을 위주로 하시어 한 사람을 내치고 한 사람을 올리는 데 사사로운 뜻이 끼지 않고 모두 공정한 데서 나와 그 극치(極致)를 이루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1월 11일 계미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시강원(侍講院)에서 아뢰기를,
"이번 정조(正朝)에 왕세자께서 하례를 받을 때 잡직(雜職)으로 품계가 높은 자들이 모두 당(堂)에 올라 예(禮)를 행하였으니, 사체(事體)가 외람됩니다. 문관(文官)은 2품으로 이미 시종(侍從)을 지낸 자 및 일찍이 당상(堂上) 실직(實職)을 거친 사람과 무관(武官)은 2품으로 이미 곤수(閫帥)를 지냈거나 일찍이 총관(摠管)을 지낸 사람, 음관(蔭官)은 2품으로 이미 동반(東班) 실직을 지낸 사람이외에는 당에 올라 참례(參禮)하지 못하게 한 것은 이미 갑오년018)  의 정식(定式)이 있습니다. 마땅히 다시 해조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자세히 정하여 혼잡되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월 12일 갑신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태학생(太學生) 홍정유(洪鼎猷) 등이 상소하기를,
"경상도 영덕현(盈德縣)에 신안사(新安祠)가 있어 주부자(朱夫子)019)  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진상(眞像)을 배종(陪從)으로 봉안하여 많은 선비들의 장수(藏修)020)  하는 곳이 되고 있는데, 지난해 10월 26일, 현에 사는 신세적(申世績) 등 9인이 밤중에 담을 넘어 원우(院宇)의 자물쇠를 끊고 주부자 및 문정공의 진상(眞像)을 훔쳐 내어 숲 속에서 불태웠으니, 청컨대 극률(極律)에 처해 왕법(王法)을 바루소서."
하니, 본도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해 장문(狀聞)하게 하였다.

 

10일 동안 감선(減膳)을 명하였는데, 연달아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재변(災變) 때문이었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등이 흰 무지개의 재변으로 인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하늘과 사람의 사이는 부자(父子)와 같아서 아버지가 비록 자애롭지 못하더라도 아들은 불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자신을 반성하고 책(責)하기를, 순(舜)임금이 죄과(罪過)를 이끈 것처럼 하고, 학문에 부지런하고 정신을 가다듬는 것을 순임금이 있는 힘을 다해 받을 간 것021)  처럼 하신다면, 완악함도 오히려 변화시킬 수가 있는데 하물며 인애(仁愛)스런 하늘이겠습니까?"
하였다. 여러 승지(承旨)와 여러 옥당관(玉堂官)이 청대(請對)하고 입시(入侍)하여 면계(勉戒)할 것을 대략 진달하고, 인하여 대신(大臣)을 칙려(飭勵)하여 재변을 늦추는 방책을 강구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인재를 거두어 쓰는 방도를 진달하여 말하기를,
"비록 인재가 있다 하더라도 문지(門地)·이력(履歷)·편당(偏黨)에 구애되어 쓰지 못하니, 이 세 가지를 타파한 연후에야 인재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임금이 흰 무지개의 변으로 인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별유(別諭)를 내렸으니, 이때에 김재로가 바야흐로 정고(呈告) 중에 있었던 때문이었다.

 

1월 13일 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김상적(金尙迪)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신사관(申思觀)을 사간(司諫)으로, 권신(權賮)을 헌납(獻納)으로, 황합(黃柙)을 정언(正言)으로, 이응협(李應恊)을 지평(持平)으로, 이춘제(李春躋)를 판윤(判尹)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응교(應敎)로, 조운규(趙雲逵)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성산현(星山縣)를 다시 목(牧)으로 승격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본 현은 아비를 죽인 죄인이 사는 고을이라 하여 강호(降號)하였는데, 이미 10년의 기한이 찼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흰 무지개의 변고는 전쟁의 상(象)이니, 백성들이 어찌 동요하지 않겠는가? 변방이 근래에 매우 허술하니, 더욱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하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일심(一心)으로 자강(自强)하여 극진히 하늘의 도(道)에 응해야 한다고 청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분려(奮勵) 진작(振作)하여 천심(天心)을 즐겁게 해야 한다고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강도(江都)에 성(城)을 쌓는 일을 묻고자 하는데, 비록 성지(城池)가 있더라도 제 사람을 얻은 연후에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이윤(伊尹)022)  이나 부열(傅說)023)   같은 자가 있더라도 어떻게 얻겠는가?"
하니, 부사직(副司直)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선묘(宣廟)갑진년024)  에 신의 선조(先祖) 이항복(李恒福)이 대신으로서 재변을 만나 연방(延訪)하는 날을 당해 진계하기를, ‘정성을 펴는 것은 마땅히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고,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마땅히 공론(公論)을 넓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바로 오늘날에 합당하니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고, 개성 유수(開城留守) 오광운(吳光運)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윤이나 부열을 얻지 못함을 개탄하시나 이윤과 부열이 이윤이요, 부열인 것은 그들이 공정(公正)하고 사(私)가 없었기 때문이니 오늘날의 상신(相臣)이 참으로 공정하고 사가 없이 한다면 이 역시 이윤이요, 부열인 것입니다. 대신인 자가 이미 우리 임금이 요(堯)·순(舜)처럼 되기를 바란다면 유독 이윤과 부열이 되기를 스스로 기약하지 않겠습니까? 경알(傾軋)을 미워하여 그의 근간(勤幹)한 것까지 아울러 폐(廢)하고, 당론(黨論)을 미워하여 그의 명절(名節)까지 아울러 폐한다면 국가의 위망(危亡)을 서서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심경(水經)》을 진강(進講)하여 마치지 못하고 또 《주례(周禮)》를 강하시는데, 《심경》 이란 요(堯)·순(舜) 이래의 심결(心訣)이니, 혹 전하께서 추환(芻豢)025)  처럼 좋아하신다면 어찌 다른 책으로 대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칭찬하며 말하기를,
"참으로 약석(藥石) 같은 말이다."
하였다.
오광운이 이에 금천(金川) 이현(耳峴)에 수목(樹木)이 없어 민둥산이 된 폐단을 진달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송도(松都)에서 신칙하여 벌채를 금하여 수목을 기르게 하라."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박문수(朴文秀)가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있을 때 남관(南關) 각 고을의 가솔(假率)을 혁파하여 정군(正軍)으로 정하고, 인하여 부대(部隊)를 편성하고 조련(操鍊)을 행하는 일로서 영원한 정식(定式)을 삼았습니다. 그 후에 이미 조련을 행하지 않고 또 장문(狀聞)하지도 않았으니, 도신은 마땅히 추고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팔도에 심리사(審理使)를 나누어 보내어 원옥(冤獄)을 소결(疏決)하게 하였으니, 우의정 조현명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부제학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호남의 살옥(殺獄)이 많이 적체되고 있으니, 청컨대 스스로 가서 심리(審理)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인하여 명하기를,
"전관(銓官)이 묘당(廟堂)에 나아가 의논하여, 심리사(審理使)는 당상·당하를 물론하고 가려 뽑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수령(守令)을 문관(文官)·남행(南行)026)  ·무관(武官)으로 교대해 차출하는 것은 일찍부터 정식(定式)이 있었는데 근래에는 대부분 음관(蔭官)에 속하였으니, 인재(人才)를 등용하고 물정(物情)을 고르게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마땅히 묘당과 전관(銓官)으로 하여금 관안(官案)을 가져다 참고해 참작해서 분배(分排)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교대해 차출하는 길을 넓히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우의정 조현명이 청하기를,
"중외(中外)에 신칙하여 혼상(婚喪)을 돌보아 주어 때를 넘기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심익성(沈益聖)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관서(關西)에 도둑의 무리가 생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신계(新溪)에서 살인(殺人)했다는 말과 연경(燕京)에 들어가는 사행의 복물(卜物)을 약탈(掠奪)하려고 했다는 공초(供招)는 모두 놀랍고 해괴하니, 포청(捕廳)에 신칙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14일 병술

임금이 대신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승지가 각 방(房)의 일을 분장(分掌)했었는데 근래에는 해이해졌으니, 마땅히 정원(政院)부터 먼저 신칙해야 하겠다. 이방(吏房)의 관직 과궐(窠闕)027)  과 수령(守令)의 서경(署經) 및 형방(刑房)의 전옥(典獄)·수도(囚徒) 등의 일을 낱낱이 주관해 살펴서 혹 홀기(笏記)로, 혹은 구두(口頭)로써 묻는 대로 자세히 대답하여 절대 범연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
하였다.

 

이종성(李宗城)을 형조 판서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이때 임금이 바야흐로 심리사(審理使) 파견을 의논하면서 하교하기를,
"방기(邦畿)는 백성들이 머물러 사는 곳인데 심리하고자 하면서 법조(法曹)를 먼저 하지 않고 외방(外方)을 먼저 한다면 어찌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에 이른다는 뜻이겠는가? 당종(唐宗)이 만승(萬乘)의 임금으로서 오히려 재계(齋戒)하면서 죄수를 소결(疏決)하였는데,028)   더군다나 자신이 법관(法官)인 자이겠는가? 추조(秋曹)029)  로 하여금 각방(各房)의 낭청(郞廳)을 거느리고 본조에서 재계하면서 문안(文案)을 자세히 열람하여 의심되는 자를 추려내고 등대(登對)하여 품결(稟決)하게 하며, 대신도 또한 함께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종성(李宗城)은 흠휼(欽恤)하는 직임에 합당하다."
하고, 인하여 이런 명이 있었다.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근래에 화재(火災)의 이변이 있었는데 목화전(木花廛)에 고대 불이 나서 여염집도 또한 연소(延燒)된 곳이 많았으니 마땅히 백목전(白木廛)과 뚝섬의 예에 의해 특별히 돌보아 주는 휼전(恤典)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15일 정해

간원(諫院) 【 헌납 권신(權賮)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훈련 대장(訓鍊大將) 김성응(金聖應)은 전후 상소의 함답(緘答)030)  을 자주 변경한 것도 이미 놀라운 일인데, 더군다나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는 전교가 있었는데도 스스로 무고(無故)한 것처럼 여겨 연석(筵席)에 입참하였으니, 일이 매우 무엄합니다. 마땅히 파직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윤득화(尹得和)의 아들 윤현동(尹顯東)이 또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그 아비의 원통함을 호소하니 김성응에게 함문(緘問)하라고 명하였는데, 대답이 명백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계(臺啓)가 이와 같았다.

 

1월 16일 무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부교리 홍중효(洪重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생각건대 지금 성수(聖壽)가 비록 높으시나 막 중년(中年)을 넘었으니 바로 문왕(文王)이 명(命)을 받은 날에 해당됩니다. 오늘날 본받을 바는 문왕이 아니겠습니까? 문왕은 해가 기울도록 식사할 겨를이 없었고, 환과(鰥寡)에게 은혜를 베풀어 나라를 누린 것이 50년에 이르렀는데 그 요점은 무일(無逸)031)  에 있었을 뿐입니다. 신은 감히 ‘문왕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師文王]’는 세 자를 올립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답하였다.

 

형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형관(刑官)은 세자궁(世子宮)의 빈객(賓客)에 방해됨이 있다는 것으로써 상소하여 빈객(賓客)의 직임을 체직해 달라고 비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장령 심익성(沈益聖)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강릉 부사(江陵府使) 한덕후(韓德厚)는 평소 나쁜 병이 있고 추악한 소문이 낭자하며, 고양 군수(高陽郡守) 이도현(李道顯)은 병악하고 게을러서 직무를 폐지해 오로지 향소(鄕所)032)  에 맡기고 있으며, 금산 군수(錦山郡守) 이정점(李廷漸)은 나이가 많고 또 혼미하여 아전들이 인연해 간사한 일을 일삼고 있으니, 청컨대 아울러 파직하소서. 온릉 참봉(溫陵參奉) 신진구(申鎭九)는 몸가짐이 깨끗하지 못하고 일처리가 비루하며 잗달으니 역시 도태해 버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신진구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세 수령의 일은 뜬소문을 어찌 믿겠는가?"
하였다.

 

사간(司諫) 신사관(申思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해서에 도적이 몰래 일어나는 걱정은 소문이 파다한데 며칠 전에 헌신(憲臣)의 발계(發啓)는 그 지엽(枝葉)만 다스리고 그 근본은 남겨둠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대개 해서는 부역(賦役)이 번거롭고 중함이 다른 도보다 심해 양정(良丁)이 모조리 각영(各營)의 여러 가지 명목(名目)으로 돌아갔고 군액(軍額)을 뽑아서 충당하는 것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백성들의 산업(産業)은 순영(巡營)에서 복호(復戶)를 예매(預買)하는 데에 탕진되었고 신구(新舊)의 관원이 서로 잇달아 주구(誅求)가 더욱 급박했으며, 심지어 궁둔(宮屯) 차인(差人)의 침학(侵虐)이 갖가지로 많으며 군문(軍門)의 방납(防納) 징독(徵督)이 배나 무거우니, 저 가난한 농민이 이에 집을 팔고 산물(産物)을 팔아 고향을 등지고 떠나서 도둑이 되는 것은 그 형세가 본디 그러한 것입니다. 지금 도둑이 되기 전에 중지시키지 못하고 단지 도둑이 된 후에 금하고자 한다면 설사 오늘날 그 무리들을 모조리 죽인다 하더라도 내일 또 도둑의 무리가 생길 것이니 장차 이루 다 죽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해서에서 돈을 징수하는 폐단을 아주 혁파하지 못한다면 해서 백성들이 도둑이 되는 걱정이 그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묘당(廟堂)에 명하시어 도신(道臣)과 함께 왕복(往復)하며 헤아려 확정하여 그 쌓인 폐단을 제거해 가난한 백성으로 하여금 거꾸로 매달린 데서 벗어나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팔도에 심리사(審理使)를 차출해 보내라는 명은 억울함을 공평히 하고 재변을 그치게 하는 실정(實政)이 되겠지만 다만 민간의 간사하고 거짓됨이 무궁하여 변괴가 여러 가지로 많이 나오니 심리사를 매양 차출해 보낼 수는 없습니다. 만약 엄히 도신을 신칙해 특별히 수령을 가리게 하고, 모든 형옥이 지체되지 않게 하며 반드시 더욱 신중하게 한다면 심리하는 방도가 실로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품처(稟處)해야 할 것은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라. 심리하라는 명은 이 역시 고례(古例)이다."
하였다.

 

1월 17일 기축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의례(儀禮)대로 봉심(奉審)하였다. 그 다음에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또 그렇게 하고, 창덕궁(昌德宮)을 거쳐 선원전(璿源殿)에 전알하고 저녁에 환궁하였다.

 

임금이 재이(災異)로 인해 거둥 때 전후의 고취(鼓吹)를 설치하기만 하고 연주하지는 못하게 명하였는데, 이 날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궁할 때에는 고취 및 부련(副輦)을 없애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갔을 때 인정문(仁政門) 월랑(月廊)의 기와가 얇고 좋지 못한 것을 보고 하교하기를,
"옛날에는 토계(土階)와 모자(茅茨)033)  가 있었는데 어찌 반드시 이미 덮었던 기와를 철거하고, 큰 기와로 바꾸겠는가? 고쳐 덮지 말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 달에 월랑이 막 중건(重建)되어 바야흐로 겨울철을 맞아 구운 기와를 얻지 못해 품질이 좋지 못한 기와로 덮었다가 봄을 기다려 다시 덮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1월 18일 경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상선(常膳)을 감하고 부련(副輦)을 없앤 것은 비록 성상의 마음이 경척(警愓)한 데서 나온 것이나 실정(實政)을 보이는 것만 못하니, 마땅히 자주 경연(經筵)을 열고, 상참(常參)을 연달아 행해 자방(諮訪)하는 도리를 다하고, 궁액(宮掖)사이를 별도로 경칙(警飭)하여 안의 말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고, 밖의 말이 안으로 들어 가지 못하게 하여 엄밀히 숙청(肅淸)하여 간사한 자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흰 무지개의 변고는 징조로 말하자면 전쟁(戰爭)과 형옥(刑獄) 이 두 가지이니 마음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부제학(副提學)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재변을 만나 구언(求言)하는 것은 응당 행해야 할 일이니, 마땅히 초야(草野)의 인재를 맞이하여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하였으며, 수찬(修撰) 김상복(金相福)은 말하기를,
"양역(良役)의 고질적인 폐단은 변통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오래도록 조치하지 않아 백성들이 모두 아들을 낳으면 서로 위로하고 딸을 낳으면 서로 기뻐하니, 이러고도 어찌 원기(冤氣)가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족히 화기(和氣)를 손상시킬 만하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양역(良役)과 정채(情債)034)  는 모두 큰 폐단이니, 청컨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이것으로써 수령(守令)을 출척(黜陟)하는 법을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드디어 하교하기를,
"우리 백성들의 곤궁 가운데 양역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인족(隣族)을 침해하고, 백골(白骨)에게 징수함이 날로 더욱 심해지고 있다. 밤중에 일어나 생각하니 먹는 것과 휴식함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아! 여러 도신(道臣)들은 삼가 이런 뜻을 본받아 모든 수령을 고적(考績)할 때에 인족(隣族)을 침해하고 백골(白骨)·황구(黃口)035)  를 충정(充定)함이 있는지 없는지를 근만(勤慢)으로 삼아 만약 이런 폐단이 있으면 세말(歲末)마다 전최(殿最) 이외에 초계(抄啓)해 엄중히 치죄하여야 할 것이며, 도신 중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알리지 않는 자는 내가 마땅히 엄하게 징벌하겠다."
하고, 또 중외의 정채(情債) 폐단을 금하라고 신칙하였다. 인하여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공시인(貢市人)036)  의 옛날 적체되어 있는 물건을 헤아려 감하라고 하였다. 송인명이 염근리(廉謹吏)를 초계(抄啓)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만약 염근리를 가리려면 이의현(李宜顯) 한 사람 이외에는 모두 마땅히 선조(先祖)의 옛 신하 가운데서 구해야 합니다. 고(故) 판서(判書) 황흠(黃欽)·엄즙(嚴緝)은 모두 염근하다고 일컫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지인(尹趾仁)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니 나는 그가 총관(摠管)으로 있을 때에 알았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병태(李秉泰)는 청백함이 남보다 지나쳐 굶주려 죽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깨끗하였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익수(李益壽) 역시 마땅히 함께 논해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정에 염근한 사람이 적은 것은 바로 신이 잘 인도하지 못한 소치이니 청컨대 폄출(貶黜)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증광과(增廣科)를 정시(庭試)로 고치고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경과(慶科)를 증광과로 정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천재(天災)가 겹쳐 일어나 좌의정 송인명이 절생(節省)하자는 뜻으로 정시로 고치기를 청해 임금이 따른 것이었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어제 인정문(仁政門)을 보건대 사람이 새 옷을 입은 것과 같았으니 내 마음 역시 좋았지만, 후일 혹시 이로 인해 토목(土木)의 공역(工役)이 트일까 염려된다."
하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이번 거둥할 때 새로 세워진 전문(殿門)을 보고서 마음이 서글퍼지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하였으며, 늠연(凛然)스럽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이 문은 바로 열성조(列聖祖)께서 즉위하시던 정문(正門)인데 지금은 옛 제도가 없어졌으니 이것이 서글픈 것이요, 한겨울에 백성의 힘을 들였으니 이 어찌 성급히 하지 말라는 뜻이겠는가? 이것이 겸연쩍은 것이며, 이번의 공역이 비록 그만둘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이로 인해 만약 토목(土木)의 역사를 일으킬까 싶어 늠연한 것이다. 좋지 않은 무지개와 화재(火災)가 재변이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니, 지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만약 스스로 신칙하는 거조가 없다면 어떻게 나의 뜻을 후사왕(後嗣王)에게 보이겠는가? 주원(廚院)037)  으로 하여금 또 3일 동안 감선(減膳)하게 하라. 날씨가 이처럼 추우니, 도감(都監)에 신칙하여 공장(工匠)과 역군(役軍)에게 독촉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거둥했을 때 액례(掖隷)들이 꽂아 놓은 횃불을 다투어 빼앗은 폐단이 있었으므로 연신(筵臣)이 조사해 다스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시끄러움을 엄히 금하지 않은 소치이다."
하고, 병조의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라 명하였다. 인하여 대신에게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이준경(李浚慶)은 비록 내관(內官)이라 하더라도 불러다가 엄히 꾸짖었는데 경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하였다.

 

관상감(觀象監) 관원을 유사(攸司)로 하여금 치죄(治罪)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역서(曆書)의 말복(末伏)이 청(淸)나라 달력과 서로 틀렸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되었다.

 

1월 19일 신묘

밤에 유성(流星)이 남하성(南河星) 아래에서 나와 삼성(參星)으로 들어 갔는데, 크기는 주먹만하였고 빛깔은 흰 색이었다.

 

승지(承旨)를 보내 영유현(永柔縣) 와룡사(臥龍祠)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講)하다가 책을 덮고 탄식하기를,
"무후(武侯)038)  의 한(漢)나라를 위한 단충(丹忠)이 역사에 밝게 나타나 있다."
하고, 인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남양부(南陽府) 용백사(龍柏祠)에 치제하게 하였다. 그후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용백사는 바로 향유(鄕儒)들이 세운 것이요, 와룡사는 바로 선조(宣祖)의 특명으로 세운 사당이어서 경중(輕重)이 아주 다릅니다."
하였기 때문에 고쳐서 이런 명이 있게 되었다.

 

1월 20일 임진

남태온(南泰溫)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1월 21일 계사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고 밤에는 달이 저성(氐星)을 범하였다.

 

공조 판서 유엄(柳儼)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하의 모든 일은 임금의 한 마음에 근본하지 않음이 없는데, 정심(正心)의 근본은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신이 자주 경연(經筵)을 여는 것이 하늘의 견고(譴告)에 답하는 첫째가는 부험(符驗)이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받아들이겠다는 성교(聖敎)를 일찍이 아끼지 않으셨는데, 이제 5, 6일이 지나도록 아직껏 경연을 열지 않으시니, 이는 전하께서 신에게 신의를 잃은 것입니다. 비단 신에게 신의를 잃은 것만이 아니라, 또 하늘에 신의를 잃은 것입니다. 신(信)이란 성(誠)인데 전하의 성이 없음이 이와 같으시니, 흰 무지개의 재변이 또 나타남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납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 황재(黃梓)가 상소하여 전후에 간언(諫言)하다가 죄를 입은 자를 석방하고, 또 구언(求言)하는 하교를 내려 와서 간하는 길을 열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오직 하늘을 공경해야만 하늘의 마음을 얻어 천노(天怒)를 돌릴 수가 있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이에 보존하라.’고 하였으니, 옛날 성왕(聖王)이 긍긍 업업(兢兢業業)039)  했음을 이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지난날 대신(大臣)의 차자(箚子)에, ‘아비가 비록 자애롭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아들은 불효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비록 전하를 책면(責勉)하려는 뜻이기는 하나 옛날 사람들이 말한 바, ‘하늘이 인애(仁愛)하여 경고(警告)한다.’는 말과 달랐으니 신이 실로 개탄하는 바입니다."
하니, 이에 좌의정 송인명, 우의정 조현명이 차자를 올려 허물을 이끌어 면직(免職)을 빌었는데,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1월 22일 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밤에는 달이 방성(房星)을 범하였다.

 

죄인 심덕항(沈德恒)의 삼성 추국(三省推鞫)040)  을 베풀었다가 갑자기 추조(秋曹)로 옮기라고 명하였다. 심덕항은 장성(長城) 사람인데, 그의 숙모(叔母)가 저주로써 그의 할머니를 시해(弑害)했다 하여 마침내 손수 죽이고는 스스로 관(官)에 고하자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였다. 이에 경차관(敬差官)을 차출해 보내고 인하여 금오랑(金吾郞)을 보내 잡아왔는데, 이때에 이르러 국청을 연 것이었다. 위관(委官)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삼성 추국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하여 반드시 본도에서 윤상(倫常)을 범한 것으로써 자복을 받은 연후에야 국청을 열 수 있는데, 지금 심덕항은 도신이 처음부터 자복을 받지 않았고, 그 사람 역시, ‘숙모를 죽인 것이 아니요 바로 원수를 죽인 것이다.’라고 공초(供招)를 바쳤으니, 법례(法例)로 헤아려 보아 갑자기 삼성 추국의 옥사(獄事)로 다루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런데 최녀(崔女)의 저주가 이미 명백하게 성안(成案)되지 않았으니, 숙질(叔姪)의 의(義)가 아직 있는데도 지레 먼저 찔러 죽였으니, 윤상을 범한 것을 면치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윤상을 범한 것이라고 자복하지 않았는데 본도에서 지레 먼저 장문(狀聞)하였고, 해조에서는 경차관 보내기를 청하였습니다. 경차관 역시 윤상을 범한 것으로 자복을 받지 않아서 모두 소루(疏漏)한 잘못이 있으니, 아울러 엄중히 추고하고, 죄인 심덕항은 청컨대 추조(秋曹)로 옮기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주강(晝講)을 행하여 《주례(周禮)》를 강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수입과 지출을 요회(要會)041)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중요한 말이니, 바로 묘당(廟堂)의 책임입니다. 궁중(宮中)의 수용(需用)에 요회 문서(要會文書)가 없고, 사복시(司僕寺)의 마패(馬牌) 역시 지패(紙牌)로 쓰는 것이 정해진 숫자가 없으며, 듣건대 내시(內寺)에도 두고 쓴다고 하는데 역시 조검(照檢)하는 자가 있었습니까? 중관(中官) 가운데서 염근(廉謹)하고 일을 아는 자를 가려 주관하게 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근래에 풍속이 크게 무너져 윤상(倫常)의 옥사(獄事)가 매우 많으니 이는 교도(敎導)하는 술책이 없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김안국(金安國)의 경민편(警民篇)이나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의 향약(鄕約)은 백성을 교화하는 데 효과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여러 신하 가운데서 문식(文識)이 있는 자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여 계하(啓下)해 반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여염에 이몽리(李夢鯉)라고 하는 자가 있는데 한미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효제(孝悌)하고 몸을 단속하여 지조(志操)가 굳다고 합니다. 효자 순손(孝子順孫)에게 해마다 쇠고기와 술을 내리는 것이 바로 한(漢)나라 때의 아름다운 제도이니, 마땅히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쌀과 고기를 내려 미풍 양속(美風良俗)을 권장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정석오(鄭錫五)가 홍치기(洪致期)·유세복(柳世復)의 사상(査狀)을 앙품(仰稟)하였는데, 임금이 굴이(堀移)042)  의 합당 여부를 물으니,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말하기를,
"수령(守令)으로 경내(境內)의 산을 차지하는 자는 파직하는 율은 있으나 굴이에 대한 글은 없습니다. 이 일은 이 영(令)이 있기 전이요, 더군다나 이미 원배(遠配)의 율을 시행했으니 또 굴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부터 법을 정하여 수령으로서 경내의 산을 차지한 자는 드러나는 대로 굴이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하교하기를,
"맹자(孟子)가, ‘인성(人性)은 선(善)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불의로 빠지는 것은 항산(恒産)043)  이 없기 때문이다. 아! 덕이 부족한 내가 임어(臨御)하여 정사는 제도(諸道)에 사람을 가려 보내지 못하였고, 은혜는 띳집의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지 못하였는데 더군다나 흉년이 든 나머지인데도 수령인 자가 백성을 위무(慰撫)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항심(恒心)이 없는 백성들이 비록 불의의 일을 하더라도 이는 도신과 수령의 잘못이요, 그 근본을 따지자면 나의 허물인 것이다. 옛날 한(漢)나라 우후(虞詡)는 일개 관리로서 능히 도적을 양민(良民)으로 만들었고,044) 공수(龔遂)는 백성들로 하여금 칼을 팔아 송아지를 사도록 했으니,045)   이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아! 지금 비록 도적이라 하더라도 본래는 나의 적자(赤子)인데 여기에 이른 것은 그들의 탓이 아니요 바로 내 탓인 것이다. 지난번 헌신(憲臣)의 청에서, ‘과연 진달한 바와 같이 한다면 이는 자신이 떠밀어 구렁으로 밀어 넣은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밤늦도록 생각해도 겸연쩍고 측은하다. 비국에 분부해 진달한 바를 시행하지 말고, 이런 뜻을 해당 도에 신칙하여 더욱 무마하고 보살피는 정사에 힘써 항심(恒心)이 없는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실제 혜택을 누리도록 하라."
하였는데, 대개 일전에 장령(掌令) 심익성(沈益聖)이 관서(關西)에 모여 있는 도적의 무리를 잡아들여 치죄하라는 일을 진달해 윤허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1월 23일 을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1월 24일 병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여 상신의 직을 해면하기를 빌고, 또 말하기를,
"초봄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변고가 보름 사이에 네 번이나 있었는데, 이는 지난 역사에서 듣지 못한 바입니다. 대소 신료(臣僚)들이 조석(朝夕)으로 놀라서 두려워하며 걱정하고 있는데 신의 생각에는 세도(世道)와 인심이 극도로 무너지고 어지러워졌으니 재앙을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여깁니다. 동자(蕫子)046)  는 말하기를, ‘임금이 마음을 바로하여 조정을 바로 잡고, 조정을 바로잡아 백관(百官)을 바로잡으며, 백관을 바로잡아 만민(萬民)을 바로잡고, 만민을 바로잡아 사방을 바로잡는다. 그리하여 멀고 가까운 곳이 모두 한결같이 바로잡히면 그 사이에 사기(邪氣)가 없어지게 된다.’라고 하였는데, 동자의 이 말이 비록 오활(迂闊)한 듯하나 실로 지금의 요무(要務)가 됩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갖가지 어려움을 겪으시고 곤란과 어지러움에 시달려 심체(心體)가 평화롭지 못한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사물(事物)을 응접(應接)하니 이따금 병통(病痛)이 있는 것을 면치 못합니다. 지금부터는 때에 따라 반성하고, 곳에 따라 극복하여 항상 아직 발현되지 않은 체(體)가 그 중(中)을 잃지 말게 하고, 이미 발현된 용(用)이 모두 화(和)를 얻게 하면 거조(擧措)가 마땅하여 인심이 복종하고, 정령(政令)이 선해져 하늘의 뜻을 받아들일 것이고, 위육(位育)하는 공(功)을 이로 말미암아 이르게 할 것이니 어찌 재변을 걱정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금등(金縢)의 고사047)  를 이끌어 비유하기를,
"이번의 재변이 어찌 이로써 말미암지 않은 것임을 알겠는가?"
하니, 승지(承旨) 남태량(南泰良)이 말하기를,
"사람의 비의(比擬)함은 반드시 도리에 맞게 해야 하는데, 원성(元聖)048)  을 이끌어 비유함은 너무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소(讒訴)를 입은 것은 한 가지이니, 동해(東海)의 부인이 억울함을 품어 또한 재이를 불렀다.049)  "
하고, 인하여 명하기를,
"원소(原疏)를 안에 머물러 두어 보고서 살피는 데 대비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밤에 형조 판서 이종성(李宗城), 부제학 원경하(元景夏)를 불러 심덕항(沈德恒)의 옥사(獄事)를 물으니, 모두 답하기를,
"이는 삼성 추국(三省推鞫)할 옥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명하기를,
"날짜에 구애받지 말고 엄히 형신(刑訊)을 가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옥당관(玉堂官)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론하고, 심리사(審理使)의 편리 여부와 양역(良役)의 폐단을 여러 사관(史官)에게 물었다.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소견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일 조정 신하들이 매양 구언(求言)할 것을 권하였는데 오늘밤에 참으로 구언하는 것이다."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구천(句踐)은 백성을 길러 쓸 날을 기다렸고,050) 소왕(昭王)은 병(病)을 구휼(救恤)하여 원수를 갚았으니,051)   패주(霸主)의 강병(强兵)하는 계책은 이와 같다. 장무(張茂)052)  의 상소 가운데 이른바, ‘폐하(陛下)는 하늘의 아들이요, 백성과 이민(吏民)은 역시 폐하의 아들입니다.’라고 한 이 말이 매우 좋다. 백성을 이미 아들이라고 한다면 임금은 바로 백성의 아버지인데 애휼(愛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황구(黃口)를 첨정(簽丁)하고 백골(白骨)에게 징포(徵布)하니, 내가 매우 미워한다. 이로써 거행할 조목(條目)을 내어 나의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1월 25일 정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고 밤에는 유성(流星)이 문창성(文昌星) 아래에서 나왔다.

 

이광세(李匡世)·권영(權瑩)을 승지로, 정원순(鄭元淳)을 겸설서(兼說書)로, 윤득재(尹得載)를 부교리로, 조운규(趙雲逵)를 검상(檢詳)으로, 서지수(徐志修)를 겸 교서 교리(兼校書校理)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임금이 8도에 심리사(審理使)를 파견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실로 그 의논을 주장하였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은 편리하지 못하다고 하여 조정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었다. 헌납(獻納) 민광우(閔光遇)가 아뢰기를,
"심리사는 도신(道臣)의 권한을 가볍게 할 염려가 있고, 주전(廚傳)053)  의 폐단이 있으며 한때 소란할 걱정이 있으니 나누어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관서 심리사(關西審理使) 이일제(李日躋)에게 말하기를,
"경은 능히 풍환(馮驩)의 일054)  을 행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일제가 말하기를,
"팔도 백성의 폐단으로는 절수(折受)보다 더 심한 것이 없는데 조정에서 궁장(宮庄)의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꺼려한 지 오래입니다. 들으니 영변(寧邊)의 백령(百嶺)과 검산(劎山) 두 면(面)은 전년부터 새로 육상궁(毓祥宮)의 절수에 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개 영변의 백성이 이 두 면에 의뢰함이 많아서 일찍이 선조(先朝) 때 역시 절수에 들었는데 고(故) 상신(相臣) 조상우(趙相愚)의 진달로 인하여 숙묘(肅廟)께서 특별히 내어 주기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영변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송덕(頌德)하였습니다. 고 참판(參判) 조명익(趙明翼)이 본부의 부사(府使)로 있을 때 두 면의 세(稅)를 거두어 두 창고에 넣고 하나는 창덕고(彰德庫)라 하고, 하나는 광혜고(廣惠庫)라고 하였는데, 창덕이란 선왕의 덕을 현창(顯彰)한다는 말이요, 광혜란 선왕(先王)의 은혜를 넓힌다는 뜻입니다. 신이 조명익에 이어서 부사로 나가 비로소 대동(大同)·고마(雇馬) 두 창고에 합쳐 소속시키고 옛 호칭은 그대로 두어 민역(民役)을 구제하였으니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선왕의 은택을 입어 왔습니다. 그런데 한번 절수로 들어간 후에는 내외의 여러 신하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영변 백성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울부짖으며 달리면서 호소할 바를 모른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창덕(彰德)’이란 두 글자를 들으니 내가 어찌 감동하는 바가 없겠는가?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이동(異同)이 없어야 마땅하고 임금의 일은 역시 한 가지를 들면 백 가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선조(先朝)의 백성을 돌보는 정성을 추모하고 평일에 소심(小心)055)  하시던 덕을 본받아 특별히 청한 바를 들어 준다. 오늘부터 영변의 절수는 도로 중지해야 하겠다."
하니, 이에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일어나 절하면서 찬송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아뢰기를,
"염근(廉謹)한 이를 초계(抄啓)하는 일은 이미 성명(成命)이 계셨는데, 선묘조(宣廟祖)에 초계할 때에는 이조(吏曹)에서 초계해 정부(政府)에 보내고, 정부에서 여러 재상을 패초(牌招)하여 거행하였으며, 숙묘조(肅廟朝) 때에는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의 계달로 인하여 2품 이상으로 하여금 각기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묘당(廟堂)에 써 보내면 묘당에서 회의하여 초계하였습니다. 이제 어느 예를 따라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선조(先朝)의 예에 의하라고 명하였다.

 

1월 28일 경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도목 정사(都目政事)056)  를 행하였다. 권적(權𥛚)을 호조 참판으로, 심성희(沈聖希)를 도승지로, 조돈(趙暾)을 교리로, 구윤명(具允明)을 지평으로, 홍중일(洪重一)을 보덕으로, 이석표(李錫杓)를 대사성으로, 원경순(元景淳)을 부응교로, 이위보(李渭輔)를 집의로, 신경(申暻)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로, 이양원(李養源)을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로 삼았는데, 신경과 이양원은 초선(抄選)한 사람이었다. 조동하(趙東夏)를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이언상(李彦祥)을 공홍 수사(公洪水使)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과 병조 판서 김약로(金若魯)의 정사(政事)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병상(李秉常)이 상소하여 치사(致仕)하기를 비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봄추위가 심하여 한겨울과 다름이 없다. 일찍이 고시(古詩)의, ‘성 위에는 바람이 거세고, 강 중에는 물결이 차다.[城上風威冷 江中水氣寒]’는 구절로써 하교하였는데 깊은 전상(殿上)에서 변방 파수꾼을 생각하니 마음이 추워진다. 도신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돌보게 하라."
하였다.

 

1월 29일 신축

간원(諫院) 【헌납(獻納) 민광우(閔光遇)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 조혁(趙㷜)은 지난번 평시서(平市署)에 있으면서 값을 깎아 억지로 사들이고 몰래 금첩(禁帖)을 만들어 은밀히 겸종(傔從)에게 주어 저자에서 함부로 거두어들였으니, 도태해 버림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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