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계묘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2월 2일 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안집(安𠍱)을 장령으로, 정원순(鄭元淳)·정한규(鄭漢奎)를 정언으로, 김상철(金尙喆)·서지수(徐志修)를 수찬으로 삼았다.
간원(諫院) 【헌납(獻納) 민광우(閔光遇)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초계 군수(草溪郡守) 한광국(韓光國)은 정원 이외에 군병을 더 뽑아 징포(徵布)를 너무 지나치게 했으니, 삭직(削職)해야 마땅합니다. 대흥 군수(大興郡守) 신진(申晋)은 비루하고 잗단 일을 많이 행하였고, 과거를 시행할 때 극위(棘圍)057) 에서 함부로 거두어 발매(發賣)하였으니, 파직해야 마땅합니다. 병조 좌랑(兵曹佐郞) 박규수(朴奎壽)는 지벌(地閥)이 낮은데다 행검(行檢)이 경망하니, 도태해 버려야 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3일 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4일 병오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으로 환어(還御)하였으니, 정문(正門)이 이미 낙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원(政院)에서 본원(本院)을 아직껏 영건(營建)하지 못한 것으로써 내병조(內兵曹) 전설사(典設司)로 들어가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5일 정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밤에는 달이 금성(金星)과 화성(火星)을 가리고 태미 동원(太微東垣)으로 들어갔다.
이영록(李永祿)을 정언으로, 이광직(李光溭)을 지평으로, 박치문(朴致文)·이봉령(李鳳齡)을 장령으로, 윤광소(尹光紹)를 교리로, 한몽필(韓夢弼)을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2월 6일 무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왕세자(王世子)가 창덕궁으로 환차(還次)하였다.
2월 7일 기유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형조 당상[秋堂]을 인견하여 여러 죄수를 참작하여 소결(疏決)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아! 가혹한 형장(刑杖) 아래에서는 없는 일이라도 자복하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군다나 도둑을 치죄(治罪)하면서 남형(濫刑)을 하는가? 비록 강도(强盜)에 관계되더라도 마땅히 살펴야 하는데 더군다나 이미 강도가 아닌데 치도(治盜)의 형을 가할 수가 있겠는가? 설혹 윤상(倫常)에 관계된 자라도 마땅히 법조(法曹)로 보내어 격식(格式)을 갖추어 추문(推問)해야 하는데 경솔히 난장(亂杖)을 시행해 무복(誣服)하도록 했으니 잘 살피지 못한 것이다. 당해 대장(大將)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옛날 사람은 여름에 물을 마시면서도 갇힌 죄수를 생각하였다고 하는데 더군다나 임금인 자이겠는가? 이제 추관(秋官)이 진달한 바를 듣건대, 온몸에 한 조각의 옷도 걸치지 못한 자가 있다고 하니 그 말을 듣고서 측은한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작년에 이로 인해 감옥에서 죽은 자가 10명에 가깝다고 한다. 감옥에서 차꼬를 찬 가운데 몸에 옷을 걸치지 못하고 여러 날 동안 굶주리면 비록 죽지 않더라도 이는 목석(木石)을 치죄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왕자(王者)가 차마 할 바이겠는가? 이후에는 이런 무리들은 추관이 비국(備局)에 보고하여 구제해 살려 왕자의 흠휼(欽恤)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영남(嶺南) 사람 곽사징(郭師徵)이 매문(賣文)하는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다른 일로 인해 추조(秋曹)에 체포되었다. 석방하기에 이르러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청하기를,
"본죄(本罪)로써 엄히 형문(刑問)하여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이단하(李端夏)에게 이제 바야흐로 시호(諡號)를 내리는데 자손 가운데 벼슬한 자가 없습니다. 청컨대 고 상신 민정중(閔鼎重)과 홍치중(洪致重)의 예에 의해 그 봉사손(奉祀孫)을 조용(調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8일 경술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9일 신해
정언(正言) 정한규(鄭漢奎)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태천 현감(泰川縣監) 윤붕거(尹鵬擧)는 수령으로 부임한 지 2년 동안에 수천 금으로 헌릉(獻陵)화소(火巢)058) 밖에 옥토를 널리 차지하고 능졸(陵卒)에게 음식을 보내고 금목(禁木)을 베었으니, 마땅히 먼저 도태시킨 후 나문(拿問)하여야 합니다. 고부 군수(古阜郡守) 유휘철(柳彙喆)은 송사(訟事)를 들으면서 뇌물을 받아 아전과 이익을 나누었으며, 곡산 부사(谷山府使) 노계정(盧啓禎)은 일찍이 위원(渭原)을 맡아 다스릴 때 거짓으로 성(城)을 쌓는다고 일컬으면서 자갈과 흙으로 쌓아 장마를 겪고 나자 곧 무너졌고, 기타 가혹하게 거두어 모조리 사복(私腹)을 채웠으니, 모두 파직해야 마땅합니다. 형조 정랑(刑曹正郞) 윤광적(尹光迪)은 일찍이 고령(高靈)을 맡아 다스리면서 고을의 여종을 속(贖)해서 데려와 추한 소문이 낭자하였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명하기를,
"윤붕거(尹鵬擧)·유휘철(柳彙喆)은 나문(拿問)하고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지평(持平) 이광직(李光溭)이 상소하기를,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한몽필(韓夢弼)은 일찍이 북읍(北邑)에 있으면서 명마(名馬)·세포(細布)를 거두어 모조리 자기가 차지했으니, 파직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잡아다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장령(掌令) 이봉령(李鳳齡)이 상소하기를,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안종대(安宗大)는 일찍이 서읍(西邑)에 있으면서 정사를 요기(妖妓)와 교활한 아전에게 맡기었고, 본곤(本閫)을 지키기에 이르러서는 술에 취해 남형을 가하였습니다. 단천 부사(端川府使) 정찬(鄭巑)은 일찍이 서읍에 있으면서 기생과 마주하여 춤을 추었고, 통영(統營)의 막좌(幕佐)에 이르러서는 토졸(土卒)을 착취하였습니다. 개천 군수(价川郡守) 이세형(李世馨)은 고을 기생에게 깊이 빠졌고 형장(刑杖)을 함부로 가하여 죽을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모두 파직해야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이세형은 잡아다 처리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좌의정 송인명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수령(守令)이 논박(論駁)을 입은 것이 매양 실상보다 지나침이 많으니, 마땅히 붙잡아다 자세히 사핵(査覈)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이 때부터는 대소(臺疏)에 대한 비답에 잡아다 처리하라는 자가 많게 되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경기 심리사(京畿審理使) 조명리(趙明履), 함경도 심리사(咸鏡道審理使) 윤용(尹容), 경상도 심리사(慶尙道審理使) 김상적(金尙迪)이 사조(辭朝)059) 하니, 모두 인견하고 면유하였다. 윤용이 말하기를,
"북도(北道)의 도과(道科)가 연한이 이미 지났으니, 위로해 기쁘게 하는 거조가 있음이 마땅합니다."
하니,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과거를 실시하는 것은 마땅히 별도로 중신(重臣)을 보내야 하는데 금년은 폐단이 적지 않으니, 마땅히 명년을 기다려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윤용이 또 북로(北路)의 인재를 거두어 쓰기를 청하니, 임금이 정밀하게 가려서 데리고 와서 한 사람을 등용해 백 명을 권면하는 바탕을 삼으라고 면려(勉勵)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아뢰기를,
"지난번 삭록(削錄)하라는 명은 일이 이미 전에 없었던 것이요, 벌(罰)을 내린 지 이미 해를 넘겼습니다. 엄우(嚴瑀)는 처음부터 죄를 줄 만한 일이 없었고, 남유용(南有容)은 일찍이 이미 죄를 입었으니 이는 중첩을 벌한 것이며, 황경원(黃景源)이 상소하여 오광운(吳光運)을 배척한 것은 그 죄가 파직하거나 삭직(削職)하면 족하며, 임상원(林象元) 등 세 사람은 당습(黨習)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어찌 반드시 삭록한 후에야 그 죄를 징벌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복록(復錄)해야 마땅합니다."
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부제학(副提學) 원경하(元景夏)도 모두 복록해야 마땅하다고 말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원경하가 또 아뢰기를,
"이현중(李顯重)·기언관(奇彦觀)은 아직껏 찬배(竄配) 중에 있고, 윤급(尹汲)은 멀리 장향(瘴鄕)060) 에 보직(補職)된 지 이미 오래이니, 진념(軫念)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현중·기언관은 풀어주어서는 안 된다."
하고, 단지 윤급만 가까운 고을로 보직하라고 명하였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휘항(揮項)061) 과 배자(褙子)062) 는 마땅히 상의원(尙衣院)에서 만들어 들여야 하는데 내의원(內醫院)에서 만들어 올리기 때문에 정채(情債)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
하고, 형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은 말하기를,
"정채가 1천여 냥이나 된다고 하는데 한 모물(毛物)을 올리는데 그 비용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신칙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결정하여 끝내지 못하였다. 며칠 후에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내 성품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 비록 난모(煖帽)라 하더라도 본디 머리에 쓰지 않고, 연여(輦輿)에도 역시 모장(毛帳)을 베풀지 않았는데 십백금(十百金)의 설이 연석(筵席)에까지 올라온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이 말하기를,
"인심이 괴이하여 여항(閭巷) 사이에는 사실 아닌 말이 많이 떠돌아다녀 혹 연석에까지 오른 것입니다."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1일 계축
약방(藥房)은 승문원(承文院)으로 옮겨 직숙(直宿)하고 문학(文學) 홍봉한(洪鳳漢)은 차비문(差備門) 근처에서 입직(入直)하라고 명하였으니, 세자빈(世子嬪)에게 종환(腫患)이 있기 때문이었다.
2월 12일 갑인
이천보(李天輔)·조하망(曹夏望)을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로 삼았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우의정 조현명이 교리 송창명(宋昌明)과 함께 청대(請對)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의 종제(從弟) 송창명이 제생동(濟生洞)에 살고 있는데, 사인(士人) 이경중(李敬中) 역시 그 동네에 삽니다. 하루는 와서 송창명에게 말하기를, ‘근래에 요사스런 무당이 독갑방(獨甲房)이라고 일컬으면서 궁금(宮禁)을 출입하는데 동궁(東宮)과 현빈궁(賢嬪宮)을 향하여 차마 듣지 못할 일이 있었다.’라고 하므로 송창명이 듣고서 즉시 와서 신에게 고하였습니다. 신이 놀라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마땅히 포청(捕廳)에 붙여야 한다.’는 뜻을 요상(僚相)에게 언급했더니, 요상 역시 별도로 들은 바가 있었는데, 신에 비하여 아주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고,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나침(羅沈)이라고 하는 자가 있는데 바로 고(故) 장령(掌令) 나양좌(羅良佐)의 첩자(妾子)로서 신과 서로 알고 지냈습니다. 일전에 와서 신을 보고는 말하기를, ‘조징(趙徵)·이희(李熙)가 무고(巫蠱)063) 의 일을 하였는데 조징이 이득중(李得中)과 절친한 사이여서 하지 못할 말이 없었다. 조징이 스스로 말하기를, 「국무(國巫)와 체결하여 대감(大監)의 집을 강월당(姜月塘)064) 의 집처럼 만들려고 한다.」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이희는 고 참판 이홍(李宖)의 손자로서 장옥(場屋)에서 매문(賣文)하는 자이고, 조징은 바로 예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의 종질(從姪)이나 예조 판서와 서로 절교(絶交)하였고 집이 본래 빈한하였는데 근래에는 잘 살고 있으며, 또 항상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병조 판서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묘리(竗理)가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나침에게서 들은 것은 요상(僚相)이 들은 것과는 비록 자세하고 간략한 차이는 있으나 대체는 서로 부합합니다."
하고, 송창명 역시 들은 바를 아뢰었는데, 송인명의 말과 비슷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듣건대, 무녀(巫女) 독갑방(獨甲房)이란 자는 중부동(中部洞)에 사는데 그 남편 유가(柳哥)는 양반(兩班)이라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미전방(米廛房)에서 궁금에 출입한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 와전(訛傳)이었다. 이 일이 허망한 것으로 돌아간다면 어찌 종사(宗社)의 복(福)이 아니겠는가? 비록 남북(南北)의 근심이 있었지만 내가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이 일은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조징이 비록 허탄하고 패악(悖惡)하지만 본디 명가(名家)의 아들이요, 또 문명(文名)이 있어 진신(搢紳) 사이에 출입해 서로 친한 자가 많습니다. 만약 그의 미치고 망령된 말로 인해 만연(蔓延)되게 되면 사화(士禍)로 번질 수도 있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이 점을 성상께서는 마땅히 잘 살피어 통렬히 끊으셔야 합니다. 불령(不逞)한 잡스러운 무리에 이르러서도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주 내 뜻과 맞는다."
하고, 인하여 친국(親鞫)의 명을 내렸다.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고, 이어서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것으로써 진계(陳戒)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2월 13일 을묘
임금이 조징(趙徵) 등을 숙장문(肅章門)에서 친국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바야흐로 정고(呈告) 중이므로 임금이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에게 명하여 가서 불러오게 하니, 김재로가 명을 받들고 입시(入寺)하였다. 죄인 이경중(李敬中)을 문초하니, 공초(供招)하기를,
"지난번 천재(天災)가 혹심하여 상하가 두려워하고 있을 즈음에 신의 팔촌(八寸) 이득중(李得中)이 말하기를, ‘듣건대 요사스런 무당 독갑방(獨甲房)이란 자가 매흉(埋凶)하는 방술에 능하여 대궐 안을 출입하면서 곧바로 동궁(東宮)을 해치고 조빈(趙嬪)에게 미루려는 마음을 두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어디에서 들었는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실로 놀랍고 통분해서 동네 송창명(宋昌明)에게 가서 말하기를, ‘이러한 요사한 사람을 마땅히 그 길을 끊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죄인 이득중(李得中)은 공초하기를,
"신은 집이 없어 임술년065) 에 유점동(鍮店洞)에서 살았습니다. 이웃에 사인(士人) 조징(趙徵)이 있었는데, 지취(志趣)가 같지는 않았으나 자주 만났기 때문에 자연히 친숙해졌습니다. 그 사람이 술에 취하면 광패(狂悖)한 말이 많았는데 조보(朝報)를 읽을 때면 문득 대신(大臣)의 성자(姓字)를 지웠습니다. 하루는 신에게 말하기를, ‘너는 편벽된 논의를 하지 말고 모름지기 나에게로 돌아오라.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된다. 조(趙)를 먼저 제거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송(宋)을 제거해야 하며, 김(金)에 이르러서는 추풍 낙엽(秋風落葉)과 같다. 네가 만약 조·송을 따라 탕평(蕩平)을 하면 반드시 죽는다.’ 하고는 다시 조·송을 제거할 말을 하기를, ‘궁액(宮掖)과 척련(戚連)이기 때문에 제거하기가 쉽다. 그대는 강월당(姜月塘)의 일을 보지 못했는가?’라고 했기 때문에 신이 그의 뜻을 미루어 알았습니다. 나침(羅沈)과 수작하면서 조징이 먼저 조(趙)를 제거하려는 말을 언급하기를, ‘대신이 이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공초하기를,
"신이 처질(妻姪) 유한상(兪漢相)이 와서 말하기를, ‘내가 과거(科擧)를 보기 위해 상경(上京)하였는데 이웃에 사는 유가(柳哥)가 무녀첩(巫女妾)을 동구(洞口) 안에서 얻어 손님을 잘 대접한다는 말을 들었다.’ 했기 때문에 내가 그곳에 먼저 갔었습니다. 조징이 그때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나 역시 첩을 얻고자 한다.’고 하니 유한상이 답하기를, ‘무당 집에 과연 첩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후에 조징이 와서 말하기를, ‘내가 첩을 얻기 위해 무녀의 집에 갔었는데 바로 궁궐에 출입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시 첩을 구하지 못하게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징이 또 말하기를, ‘마땅히 강월당(姜月塘)의 일을 행하겠다.’고 하므로 신이 꾸짖었더니, 답하기를, ‘내가 어찌 스스로 하겠는가? 효교(孝橋) 근처에 무녀가 있는데 사대부 집과 여러 궁가(宮家)를 위해 매흉(埋凶)의 일을 하니, 어찌 검(劒)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스스로 그 방법이 있다.’라고 하였으므로 신이 마음속으로 헤아려 알았습니다. 조징이 또 말하기를,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경술년의 일066) 로써 얽으면 일망 타진(一網打盡)할 수 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강월당의 일 및 경술년의 일과 서로 반대되게 하면 자연 성사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동궁(東宮)과 관계되는 말은 과연 하지 않았는데, 이경중(李敬中)과 수작할 때 강월당의 일 및 경술년 일과 서로 반대되는 말로 한다면 자연히 동궁을 곧바로 범하는 데로 돌아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조징과 면질(面質)하게 해주면 그가 반드시 말이 막히게 될 것입니다. 요무(妖巫)의 일은 혹 독갑방(獨甲房)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국무(國巫)라 하기도 하나 사실은 한 사람을 두 가지로 일컫는 것입니다."
하였다.
죄인 조징(趙徵)은 공초하기를,
"신이 이득중과 이웃에 사는데 그가 비록 찾아온 일은 있었으나 신이 찾아간 일은 없었습니다. 이득중과는 빙탄(氷炭)과 같은 사이인데 어찌 함께 의논하고 마음을 같이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조징이 다시 공초하기를,
"이득중과 더불어 이러한 흉절(凶節)을 언급할 이치가 전혀 없습니다. 경술년 일은 혹 들어서 알지만, 강월당의 일은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알지 못하니 무슨 일인지 모릅니다. 이득중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곡절이 있으니 매양 신축년067) ·임오년068) 일을 논하면서 서로 싸웠습니다. 무녀는 선세(先世)로부터 집안에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득중과 조징을 면질(面質)시키니, 이득중이 말하기를,
"전년 감시(監試) 후에 내가 너희 집에 갔더니, 네가 술이 잔뜩 취해 홀로 누워서 죽여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였고 세 상신(相臣)을 향해 욕을 하지 않았는가?"
하니, 조징이 말하기를,
"세 상신이 과연 나라를 그르쳤다. 이 밖에 무슨 말이 있었는가?"
하였는데, 이득중이 말하기를,
"네가 ‘조 우상을 먼저 제거해야 하고, 궁금(宮禁)과 척련(戚聯)인 자는 더욱 쉬우니, 절제(折制)할 술책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니, 조징이 말하기를,
"근거 없는 말이다."
하였다. 이득중이 말하기를,
"너는 왜 조국보(趙國甫)의 집에 갔었느냐? 네게 판계(板契) 수만 냥이 있는데 그 재화를 장차 어디에 쓰려 하는가?"
하니, 조징이 말하기를,
"내가 조관빈(趙觀彬)과 서로 친하기 때문에 왕래한 것인데, 너는 왜 이것을 죄로 삼는가?"
하므로, 이득중이 말하기를,
"왜 그 준마(駿馬)를 타고 어두운 밤에 왕래하였는가? 네가 효교(孝橋) 근처에 사는 무녀와 사귀면서 무슨 일을 하였는가?"
하니, 조징이 말하기를,
"내가 무녀와 교제한 일이 없었다. 판계(板契)의 일 역시 어떻게 알겠는가?"
하자, 이득중이 말하기를,
"네가 강월당의 일을 말하지 않았는가?"
하니, 조징이 말하기를,
"내가 대략 강빈(姜嬪)의 일은 알고 있으나 강월당(姜月塘)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득중이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어떻게 강월당의 일을 얽어내겠는가?’라고 물었더니, 네가 ‘내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할 만한 사람이 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니, 조징이 말하기를,
"삼공(三公)이 나라를 그르친다는 말은 분명히 했으나 강월당은 끝내 이름을 모른다."
하였다. 이득중이 말하기를,
"네가 ‘경술년 옥사와 상반(相反)되게 한 연후에야 일망 타진(一網打盡)할 수 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자, 조징이 말하기를,
"상반되게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니, 이득중이 말하기를,
"말의 뜻이 흉악하기 때문에 내가 상반되게 한다고만 말한 것이다."
하였다. 조징이 말하기를,
"옆에서 듣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니, 이득중이 말하기를,
"과연 들은 자는 없었다."
하였다. 죄인 나침(羅沈)은 공초하기를,
"강월당(姜月塘)과 무녀의 일 및 조징이 병조 판서가 된다는 등의 말은 이득중이 와서 조징의 말이라면서 신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하였다.
죄인 차섬(次暹)은 공초하기를,
"신의 남편은 성(姓)이 유(柳)인데, 유가(柳哥) 양반이 유가(柳哥)와 한 동네 사람이라면서 신의 집에 왕래하면서 조가(趙哥)·이가(李哥)의 혼사(婚事)를 지시했으며, 신은 처음부터 궁궐에 출입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죄인 유명복(柳明復)은 공초하기를,
"차섬은 바로 신의 첩(妾)인데 처음에는 호구방(虎口房)이라 일컫다가 후에 독갑방(獨甲房)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유언봉(兪彦鳳)의 말을 듣건대, 이득중과는 일가이며 차섬의 딸과 혼사할 것을 부탁했다고 하는데 범연하게 들어서 그 성명은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죄인 이희(李熙)는 공초하기를,
"무오년069) 에 이사복(李思復)이 상소(上疏)한 일을 조징이 신에게 미루었기 때문에 글을 보내 절교를 선언했습니다. 이득중은 일찍이 한 동네에 살아 면식이 있을 뿐이요, 나라에 대한 부도(不道)의 말은 전혀 수락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조징이 또 공초하기를,
"하늘의 해가 위에 있는데 실로 애매합니다. 이른바 차섬이란 무녀와 월당의 일은 본래 모르며 비록 촌참(寸斬)을 당하더라도 알지 못합니다. 신은 경자년070) 이후 한쪽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만약 이득중과 서로 안다는 것을 죄로 삼아 죄준다면 비록 죽더라도 한이 없겠습니다. 유가(兪哥)는 원래 서로 알고 지낸 일이 없으며, 유가에게 무첩을 구해달라고 한 정상을 면질(面質)해서 굴복한다면 곧바로 결안(結案)071) 해도 되겠습니다."
하고, 형신(刑訊)했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이득중이 다시 공초하기를,
"조징은 본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으로서 말을 가리지 않았는데, 판계(板契)의 말을 분명히 신에게 말하기를, ‘동촌(東村) 사람들이 판계를 결성하여 독갑방(獨甲房)에게 전화(錢貨)를 썼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징이 스스로 도깨비방[魍魎房]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그 무녀의 호칭을 알았던 것입니다. 조징이 스스로 병조 판서가 되겠다는 말은 신이 처음에 발설한 것이 아니며, 이희(李熙)와 조징은 본래 관련된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우선 친국을 파하여 이경중과 나침은 아울러 석방하고 그 나머지는 의금부(義禁府)에 하옥하라고 명하였다.
2월 14일 병진
임금이 숙장문(肅章門)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죄인 유한상(兪漢相)에서 이름을 고친 유한좌(兪漢佐)가 공초하기를,
"이득중은 바로 신의 삼촌 고모부이며 조징은 일찍이 얼굴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무녀의 남편 유명복(柳明復)은 과연 서로 알며 인척이 됩니다. 무녀의 딸로 남편을 잃은 자가 있어 이득중이 첩으로 삼을 수 있는지 여부를 물었기 때문에, ‘유가에게 물어 보겠다.’라고 답하였는데 그때 옆에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득중이 단지 말하기를, ‘어떤 무인(武人)이 첩을 얻고자 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성명은 잊어버려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득중과 유한좌를 면질시키니, 이득중이 말하기를,
"나는 네가 말을 나눌 때 조징이 어찌 너를 향해 중매를 부탁하지 않았느냐?"
하니, 유한좌가 말하기를,
"방안에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는데 다만 네가 나에게 권하기를, ‘이는 좋은 일이니, 모름지기 권해 보라.’ 하였다. 네가 이른바 첩을 구하려는 자는 바로 무반(武班)으로서 이미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고 하였기 때문에 내가 이 말을 유가(柳哥)에게 전했던 것이다."
하였다. 다시 이득중을 문초하기를,
"네가 면질할 때 기색(氣色)에 이미 의심스러운 빛이 있었고, 전후의 공사(供辭)도 교묘히 거짓으로 꾸며 어긋난 단서가 남김없이 탄로되었다. 조징이 설사 강월당의 말을 하였더라도 네가 어찌 의심을 일으켜 광무(狂巫)의 일을 날조해 합치되게 하였는가? 마음으로 헤아려 알았다는 말이 더욱 음험하고 참혹하다. 이른바 무녀의 일이 가장 중요한 단서인데 네가 이미 굽히게 되었다. 조징이 비록 무상(無狀)하다 하더라도 이미 그 무당이 없으니, 어떻게 강월당의 일을 시행하겠는가?"
하니, 이득중이 공초하기를,
"조징이 항상 효교(孝橋) 근처에 무녀가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독갑방을 효교(孝橋) 근처의 무녀로 착각했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비단 사람을 모함하는 것만 아니라 당심(黨心)으로서 남의 앙화를 좋아한 데서 나온 것이어서 한 차례 형신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징이 비록 이 일을 하지 않았으나 이득중이 까닭없이 말한 것도 아니니, 모두 당심인 것이다. 원량(元良)072) 에게 선(善)을 심어 주는 도리에서 참작해 처리하고자 한다."
하니, 문랑(問郞)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조징이 그런 말을 했다면, 조징을 마땅히 정법(正法)073) 에 처해야 하고, 이득중이 과연 사람을 무함하였다면, 마땅히 정법에 처해야 하니, 두 죄인을 다시 더 구핵(究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조징은 망측 부도한 말을 함부로 하였고 이득중은 그 기회를 틈타 망측하여 차마 듣지 못할 일을 날조해 부합시켰으니, 모두 목을 매달아야 마땅하나, 한 사람은 술에 취해 망담(妄談)을 하였고 한 사람은 윗부분에 있는 한 절목이 그가 말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닌데 기회를 다행히 여겨 부회(傅會)시켰으니, 예(例)에 따라 작처(酌處)할 수는 없다. 모두 날마다 세 차례 엄형(嚴刑)하여 흑산도(黑山島)로 정배(定配)하고, 이희·유명복·유한좌는 모두 석방(釋放)하며, 차섬은 추조(秋曹)로 하여금 멀리 정배하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현빈궁(賢嬪宮)이 입궁(入宮)하던 날, 신의 형과 신이 두루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들어 서로 면계(勉戒)했었는데 강월당의 일도 또한 그 가운데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오늘날에 이런 흉측한 말을 들을 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오로지 신이 살아 있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빌건대 진념(軫念)을 내리시어 특별히 상직(相職)을 해면(解免)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는 이언세(李彦世)와 비록 경중·대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마음은 마찬가지이다. 영의정이 정단(呈單)을 거두고, 우의정도 다시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만 그런 후에야 비로소 전내(殿內)로 돌아갈 것이다. 만약 승낙을 얻지 못한다면 비록 밤을 지새우더라도 돌아가지 않겠다."
하니, 김재로(金在魯)와 조현명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시니, 신들도 우러러 뜻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2월 15일 정사
달이 태미성(太微星) 서원(西垣)으로 들어갔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이득중과 조징의 형추(刑推)를 직숙(直宿)이 끝난 후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6일 무오
우의정 조현명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스스로 그만두어야 하는 의리는 어제 장전(帳殿)에서 이미 갖추어 진달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비록 술에 취한 후 한 말이라고는 하지만 말이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니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그런 말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 그 마음은 알 수가 있는데, 신의 불충(不忠)으로 인연하여 양궁(兩宮)의 감히 말할 수 없는 존엄한 자리로 하여금 함께 그런 흉인(凶人)들의 억측하고 지적하는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였으니,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려 차마 어찌 말하겠습니까? 빌건대, 상직(相職)을 면하고 봉조청(奉朝請)074) 으로 물러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수어사(守禦使) 조관빈(趙觀彬)이 장부(將符)를 바치고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듣건대, 친국(親鞫) 때 죄인 가운데 신의 이름을 든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돌아보건대, 다시 그런 흉한 말을 제기해 변명하는 것처럼 할 필요는 없으나 다만 생각하니 이 옥사는 오로지 조징을 중요한 관건으로 삼았고, 또 신과 조징이 서로 안다고 말하면서 은연중 얼화(孼禍)를 빚을 뜻이 있었으니, 아! 참혹합니다. 조징은 바로 경족(京族)인데 세상 사람들 가운데 조징을 아는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신이 꼬집어 말한 것은 더욱 헤아리기 어려운 뜻으로 조작해 낸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이득중과 나침 무리들이 단독으로 한 것이겠습니까? 더군다나 이득중은 바로 그들 중의 사사(死士)로서 간독(奸毒)하고 사특(邪慝)하기로 세상에 이름이 난 지 오래입니다. 나침 역시 한쪽 사람의 적얼(賊孼)로서 역론(逆論)을 부추기고 은밀히 체결(締結)한 자가 많아 평소 음휼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증인을 삼아 이 옥사를 이루었으니, 그 치밀한 정적(情跡)과 경영한 기괄(機栝)로써 반드시 선한 무리를 일망 타진하고자 하였고, 더욱 신을 핍박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끝에 가서는 실상을 토실하여 흉한 정상이 모두 탄로되었는데도 깊이 살피지 않고 갑자기 작처(酌處)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조징이 술에 취해 부도한 말을 한결같이 이득중의 무리가 고한 바처럼 했다고 하면 마땅히 살려 둘 이치가 없고 이득중과 나침이 만약 사주를 받아 옥사(獄辭)를 지어내 조정 진신(搢紳)에게 화를 끼치려 하여 조징을 계제(階梯)로 빌었다면 왕법(王法)에 있어 마땅히 그 근인(根因)을 조사해 전형(典刑)을 분명히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죄인이 모두 살아 있고 이와 같이 그치고 마니, 신은 신축년075) 에 날조(捏造)된 앙화가 오늘날 다시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인심은 헤아리기 어려운데 당심(黨心)으로 기회를 틈타 날조해 얽으려 한 것이 경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소견(召見)하여 연중(筵中)에서 밀부(密符)를 차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징의 취중에 한 말이 만약 단지 우상(右相)을 미워하고 다른 뜻이 없는 데에서 나왔다면 이득중이 이를 빙자해 흉계를 꾸밈이 어찌 더욱 흉악하지 않겠는가? 이득중이 처음에는 조징을 협박하고자 하다가 갑자기 일어나 경에게 말이 미쳤는데, 말하기를 ‘조징을 매우 미워하기 때문에 이런 군말을 덧붙였다.’라고 하였으니, 그것이 날조한 유언 비어임을 알 수 있다."
하니, 조관빈이 말하기를,
"이들의 마음은 비단 선류(善類)에게 화를 빚으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정신을 쏟는 것은 반드시 흉한 말을 만들어 내어 성상의 마음을 공동(恐動)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 듣고서는 과연 의심이 없지 않았으나 끝에 가서는 바로 한 화살로 둘을 해치려는 흉모(凶謀)임을 깨달았다. 하나는 경들을 내쫓으려는 것이요, 하나는 일을 조정하는 자들을 내쫓으려는 것이었다."
하니, 조관빈이 말하기를,
"나침은 본래 범연한 종자(種子)가 아니어서 그 초사(招辭)에 화심(禍心)을 품고 있는데, 이제 만약 전석(全釋)하면 마치 김을 매면서 악한 뿌리를 제거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판계(板契)에 이르러서는 조사(朝士) 몇 사람이 어버이를 위해 경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고, 신은 원래 그 계에 든 사람이 아닌데 이 계가 흉인의 초사에 오른 데서도 그 화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고, 승지(承旨) 남태량(南泰良)이 말하기를,
"이득중에게 숨긴 정상이 있는 듯하고, 이렇게 죄상이 탄로된 자를 또 살려 주자는 의논에 붙이니 이후에 비록 자취를 이어 일어나는 자가 있더라도 장차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조징의 망측한 말과 이득중이 날조하여 부합시켜 사람을 무함한 것이 얼마나 음험하고 참혹한 것인데, 직책이 대신(臺臣)에 있는 자가 묵묵히 있으면서 쟁집(爭執)하지 않았으니, 정언(正言) 이영록(李永祿)을 빨리 변방에 귀양 보내는 율을 시행하도록 하라. 아! 대신(臺臣)으로서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옥서(玉暑)076) 의 신하가 반박해 바로잡는 것이 예인데 전혀 한 번의 차자(箚子)도 올려 경계하지 않았으니, 그날 직숙한 유신(儒臣)을 체차(遞差)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8일 경신
이광식(李光湜)을 집의로, 민수언(閔洙彦)을 장령으로, 이진의(李鎭儀)·조명채(曹命采)를 지평으로, 홍정명(洪廷命)을 헌납으로, 조운규(趙雲逵)를 부수찬으로, 신위(申暐)를 부교리로, 이보욱(李普昱)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2월 19일 신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수어사(守禦使) 조관빈(趙觀彬)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한 편(篇)의 지적한 뜻이 신이 사사(死士)를 모집해 그 자신을 얽어 죽여 신의 형(兄)의 묵은 감정을 풀고자 했다고 하였습니다. 또 연중(筵中)에서 나침(羅沈)을 경솔히 석방해서는 안 된다고 논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뜻은 오로지 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신이 먼저 좌상(左相)이 전해 주는, ‘흉물(凶物)을 묻어 화를 일으키려 한다.’는 말을 들었고, 또 나침이 전해주는 강월당(姜月塘)의 말을 듣고서 수상(首相)에게 찾아가 의논하니 수상이 말하기를, ‘이는 대역(大逆)에 관계되니, 급히 발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좌상과 함께 의논해 청대(請對)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말의 진위(眞僞)와 허실(虛實)은 한결같이 이경중(李敬中)·나침(羅沈)·이득중(李得中)과 조징(趙徵) 무리의 승부가 어떻게 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삼공(三公)이 함께 의논하여 조처한 일인데 유독 신을 가리켜 지휘했다고 하면서 배포(排布)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러나 그의 말이 이미 그와 같고 나침과 이득중이 모두 있으니, 신이 지휘했는지 여부를 한번 끝까지 따져서 중신(重臣)의 의심을 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에게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그가 비록 유감을 두었더라도 자신이 어찌 유감을 품겠는가? 나의 생각에는 의심되고 엇갈리는 마음을 뜬 구름에 부치고 오직 나랏일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니, 모름지기 이 뜻을 본받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0일 임술
밤에 달이 심성(心星)을 범했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승지 서명형(徐命珩)을 보내어 어진(御眞)을 강화부(江華府) 만녕전(萬寧殿)에 봉안(奉安)하게 하였는데 예조(禮曹)의 절목(節目)에,
"1. 연(輦) 앞에 소가(小駕)를 두어 가(駕)를 인도해 강을 건넌다. 그 후에는 본도의 감사와 지방관, 본부의 유수(留守) 및 경력(經歷)이 각자 그 경내(境內)에서 교체한다.
1. 가사복시 정(假司僕寺正)이 연(輦)을 명정전(明政殿) 앞 계단으로 인도해 가면서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흑단령(黑團領)을 갖추고 먼저 명정전에 가 길 왼쪽에 차례로 늘어서 있고,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은 흑단령을 갖추고 대궐 문 밖에서 일제히 모여 동서(東西)로 나누어 차례로 늘어서 있는다. 2각(刻) 전에 왕세자(王世子)가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홍화문(弘化門) 밖으로 나아가 막차(幕次)077) 로 들어간다. 출발할 때가 되어 내시(內侍)가 어진궤(御眞櫃)를 받들고 나오면 집사관(執事官) 2명이 받들어 받아 연에 봉안하고 이어서 출발하는데, 대신 이하는 국궁(鞠躬)하여 공손히 맞이하고 차례대로 시위(侍衛)한다. 홍화문(弘化門) 밖에 이르러 왕세자가 막차에서 나와 공손히 맞이한 후 여(輿)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고, 종친과 문무 백관 역시 국궁하며 공손히 맞이한다.
1. 중사(中使)078) ·승지(承旨)·사관(史官), 만녕전 관원 및 대신(大臣)·예관(禮官)은 연 뒤에서 배종(陪從)한다.
1. 도총부(都摠府)의 전후 사대(射隊) 시위 등의 일은 병조로 하여금 마련하여 거행하게 한다.
1. 종묘(宗廟) 앞 길에서는 어진(御眞)을 모신 연이 잠시 멈춘다. 낮추 메는 절차 및 배설(排設)하는 여러 일은 각 해사(該司) 및 사약(司鑰)으로 하여금 맡아 거행하게 한다.
1. 연 앞에 사금(司禁) 20명, 별감(別監) 20명이 흑단령을 갖추 입고 시위하여 강두(江頭)에 이르러 그치며, 별감 4명이 자건(紫巾)과 흑의(黑衣)를 갖추고 그대로 시위하여 만녕전에 이른다.
1. 받들어 모시고 갈 때의 숙소(宿所) 및 주정소(晝停所)는 객사(客舍) 대청(大廳)에 배설(排設)하고, 배 위의 악차(幄次)079) 에 배설하는 여러 일은 공조(工曹)와 각 해사 및 사약(司鑰)이 거행하게 하며, 또한 본도(本道)와 본부(本府)로 하여금 정성들여 준비해 기다리게 한다.
1. 연 앞에 피우는 부용향(芙蓉香)은 내의원(內醫院)으로 하여금 진배(進拜)하게 한다.
1. 경성(京城)에서부터 경계에 도착해 주정소 및 숙소에 봉안한 후에는 본도의 감사 및 본부의 유수, 각 업무의 차사원(差使員)이 흑단령으로 대문 밖에서 숙배(肅拜)한다.
1. 시각을 아뢰는 등의 일은 관상감(觀象監)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한다.
1. 군사를 교체하는 곳에서는 단지 땅의 지의(地衣)080) 만 배설하고, 군사 교체는 혹 20리, 혹은 15리 정도로 편리함에 따라 장소를 정한다.
1. 어진을 봉안한 연이 강화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만녕전 대청에 봉안한다. 22일 오시(午時)에 만녕전 관원 2명이 흑단령을 착용하고 올라가 연 앞에서 꿇어앉아 어진궤를 가져다 좌석에 봉안하면 대신 이하는 사배(四拜)한 후 물러 나온다.
1. 어진궤를 받들어 전할 차비관(差備官) 2명은 이조로 하여금 차출하게 하면 흑단령을 입고 어진궤를 가져다 연의 후면에 봉안한 후 물러 나온다. 가사복시 정(假司僕寺正)을 이조로 하여금 차출하게 하면 흑단령을 입고 시위하여, 강두(江頭)에 이른다. 강을 건넌 후에는 역시 본도의 수령 가운데서 차출하여 시위하여 만녕전까지 이르게 한다.
1. 어진을 봉안한 후에는 본전(本殿) 관원 2명이 번갈아 직숙(直宿)하고 번(番)을 나누어 수직(守直)한다.
1. 전내(殿內)의 의물(儀物)은 청홍개(靑紅盖) 각 한 개, 봉작선(鳳雀扇) 각 1개씩을 좌우로 나누어 진설(陳設)한다. 입직(入直) 별감(別監)은 자건(紫巾) 홍의(紅衣)를 착용하고 수위(守衞)한다.
1. 본부의 유수는 봄·가을로 전의 안팎을 봉심(奉審)하고, 잡물(雜物)에 탈이 있으면 훼손되는 대로 제때에 고친다. 본전의 관원은 평상시에 홍단령을 입고 입직하며, 3일마다 봉심하는데, 비나 눈이 올 때에는 각별히 봉심한다. 만약 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유수에게 보고해 계문(啓聞)하여 시행하게 한다.
1. 본전 관원의 근만(勤慢)은 본부의 유수가 맡아 전최(殿最)081) 한다.
1. 새로 제수된 본부의 유수 이하는 경계에 이르는 즉시 흑단령을 입고 전의 중문(中門) 밖에서 숙배한다.
1. 전의 온돌(溫突)에 땔 화목(火木) 및 금화(禁火)의 여러 도구는 본부에서 준비해 두어야 한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병조에서 아뢰기를,
"어진(御眞)을 받들고 갈 때의 진로(津路)를 양화도(楊花渡)로 결정하였는데, 비록 민력(民力)을 많이 들이더라도 선창(船艙)을 완전히 쌓을 형세가 없습니다. 노량진(露梁津)은 건너기가 편리하고 쉬움이 세 진(津) 가운데서 제일이고, 또 이는 장릉(章陵)의 연로(輦路)이니, 이 길로 받들어 가는 것이 사체에 당연합니다. 비록 20리를 돌아가 멀기는 하나 만약 일찍 출발하면 김포(金浦) 숙소에 밤 늦어 도착할 염려는 없으니, 노량진으로 길을 고쳐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전어(傳語)는 마땅히 절목(節目)에 의해 각 고을의 마대(馬隊)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되, 경기(京畿)의 복마(卜馬)가 부실하니, 경성의 예에 의해 보발(步撥)로 전어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당초 두 죄인을 지레 먼저 작처(酌處)한 것은 이미 국법에 어긋나서 마땅히 형을 시행해야 하는데도 형을 시행하지 않았고, 마땅히 물어야 할 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대저 우리 성상의 뇌정(雷霆) 같은 위엄과 일월(日月) 같은 밝음으로 어찌 큰 악(惡)을 징토(懲討)할 생각을 하지 않으셨겠습니까만, 그러나 고요(皐陶)082) 의 숙문(淑問)083) 이 도리어 요(堯)·순(舜)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굽히었으니, 신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왕부(王府)에는 본래 삼척(三尺)084) 이 있고, 오형(五刑)085) 을 다섯 가지 죄에 쓰는 것은 유사(有司)에게 달려 있으니, 어찌 대원(臺垣)에서 쟁집(爭執)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 【집의(執義) 이광식(李光湜)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득중(李得中)이 기회를 틈타 날조해 무함한 정상이 이미 탄로되고 조징의 망칙한 흉언은 버티면서 승복하지 않았는데도 성급히 작처하였으니, 옥사의 체모가 크게 어긋났습니다. 마땅히 엄히 국문하여 법을 바루어야 하는데, 그날 작처하라는 명이 계셨는데도 이목(耳目)의 관원이 묵묵히 있으면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니, 일이 매우 해괴합니다. 국문(鞫問)에 참여한 대신(臺臣)은 모두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1일 계해
약방(藥房)에 명하여 본원에서 번갈아 직숙하게 하였다.
헌부 【집의 이광식(李光湜)·지평 이진의(李鎭儀)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경중(李敬中)과 이득중이 날조해 얽는 정상이 환히 드러나 덮을 수가 없고, 이득중이 하지 않은 말을 나침(羅沈)이 이에 말하였으니,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이경중과 나침을 잡아다가 국문해 처단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2일 갑자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3일 을축
지평 조명채(曹命采)가 상소하여 이득중과 조징을 엄중히 국문하여 법을 바루기를 청하였고, 판의금(判義禁) 정석오(鄭錫五) 등도 역시 상소하여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부수찬 조운규(趙雲逵)가 차자를 올려 대계(臺啓)를 윤허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마땅히 상신(相臣)에게 유시하겠다는 것으로 답하였다.
2월 26일 무진
악기 조성청(樂器造成廳)에서 아뢰기를,
"작년에 예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의 상소로 인하여 이휘진(李彙晉)·이연덕(李延德)이 음률(音律)에 아주 통한다고 하여 악기 조성을 감독하라고 하명하셨습니다. 모두 낭청(郞廳)에 차하(差下)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2월 27일 기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증보역대총목(增補歷代總目)》을 한 번 수정하고자 하는 뜻을 이미 두어 왔으나 겨를이 없었는데, 누가 이 일을 맡을 만하겠는가?"
하니,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원경하(元景夏)가 좋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중국의 《역대총목》은 영력(永曆)086) 이상은 모두 실려 있으니, 더 수정해야 할 일이 없으나 우리 나라는 선조(先朝)의 일을 마땅히 보충해야 하고, 당저(當宁)의 사적 역시 마땅히 기록해야 하는데, 무신년087) ·경술년088) 의 일 같은 것도 모두 실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대훈(大訓)은 바로 나의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인데 역시 후세에 남기고 싶으니 기록해 넣어야 한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영상(領相)이 이런 일에 해박(該博)하니, 신이 마땅히 묻고 의논한 후 경연(經筵)에 나와 품하여 결정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대신에게 말하기를,
"이득중이 이미 사람을 무함한 것으로 지만(遲晩)089) 하였으니, 더는 엄히 신문하여 궁핵(窮覈)할 것이 없을 듯한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대답하기를,
"대계(臺啓) 및 당차(堂箚)와 금부 당상(禁府堂上)의 상소에서 공의(公議)가 매우 준엄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고, 여러 비국 당상 역시 먼저 이득중을 국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당초 작처(酌處)한 것은 대개 뜻이 있었던 것인데, 공의가 일제히 일어나니 관계된 바가 적지 않다. 수개(修改)를 마친 후 29일에 친국을 거행하겠다."
하였다.
2월 29일 신미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병상(李秉常)이 상소하여 치사(致仕)하겠다는 청을 다시 거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이진의(李鎭儀)가 상소하기를,
"새로 제수한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보욱(李普昱)은 일찍이 나주(羅州)에서 재직할 때 오로지 가혹하게 거두기만 일삼았습니다. 변방의 중임(重任)에 두어 군민(軍民)에게 해를 끼치게 할 수 없으니, 즉시 개체해야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숙장문(肅章門)에 나아가 이득중과 조징을 친국하였다. 이득중이 공초하기를,
"강월당(姜月塘)의 말을 만약 신이 처음으로 지어낸 것이라고 한다면 천만 애매합니다. 강월당의 일은 조징이 이 말을 하였는데 무녀(巫女)의 일이 있기 때문에 이로써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이경중의 공초에 있는, ‘어느 곳에 흉물을 묻었는데,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감히 말을 할 수 없는 곳에 지의(指擬)한 것이다.’라고 한 것에 이르러서는 당초에 이경중에게 말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면질(面質)시켜 주소서."
하였다. 조징의 공초에는 한결같이 변명하였고, 신문(訊問)했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이득중을 신문하니, 다시 전처럼 공초하였다. 이경중과 면질시키니, 이경중이 말하기를,
"네가 ‘근래 독갑방(獨甲房)이란 자가 있어 여항(閭巷)을 왕래하고 궁궐 안을 출입하면서 흉물을 묻고 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네 말이 동궁(東宮)에까지 미쳤으므로 내가 깜짝 놀라 옷을 떨치고 돌아왔었다. 송창명(宋昌明)의 일이 드러난 후에 내가 너에게 찾아가 묻기를, ‘나는 너에게서 들었지만 너는 어디서 들었는가?’ 하니, 네가 ‘길거리에 떠도는 소문인데 장차 어디에다 미루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흉물을 묻었다는 말을 나는 너에게서 들었다고 고했더니, 전번 추문(推問)할 때에 네가 내 말이 옳다고 하였는데 이제 갑자기 말을 바꾸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득중이 말하기를,
"나는 의심쩍어 말한 것인데 너는 실제 일로 고한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는 이득중의 죄상이 더욱 드러났다."
하고, 더 형신하기를 명하고 묻기를,
"너는 마음속 가득히 당심(黨心)을 갖고 요행히 조징을 얻어 마음과 뜻이 서로 부합되어 나라에 대한 불만의 말을 난만(瀾漫)하게 나누고서 이제는 화살 하나로 둘을 맞출 계책을 어찌 감히 차마 듣지 못할 일을 모아 말하는가? 설사 조징이 과연 그런 말을 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취중에 한 미친 말에 불과한데, 너는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이런 마음을 입에다 담았으니, 조징보다 더하지 않는가?"
하니, 이득중이 공초하기를,
"조징의 말에, ‘조(趙)·송(宋)·김(金)이 요행히 풍운(風雲)의 기회를 만나 자기와 다른 자는 배척하고, 자기와 같은 자는 부호(扶護)해 준다.’라고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공정하지 못한 일이 많다.’ 하였고, 대신을 미워한 마음은 참으로 있었으나 어찌 죽이려는 마음까지 두었겠습니까? 작년 가을에 비록 조징의 말을 들었으나 이미 꼬집어 잡지 못했기 때문에 미처 고발하지 못했으나 조징과 같은 마음이라 함은 천만 애매합니다. 이는 모두 신이 조징을 너무 의심한 소치입니다. 조징에게 이미 이쪽 사람들을 죽이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신 역시 과연 그쪽 사람을 죽이려는 마음을 둔 것입니다."
하니, 세 차례 형신하였다. 임금이 명하기를,
"이경중은 특별히 방면하고, 나침은 다시 잡아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 【집의 이광식(李光湜)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국문에 참여한 대신(臺臣)을 파직하는 일은 윤허하였다.
2월 30일 임신
임금이 숙장문(肅章門)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는데, 죄인 조징(趙徵)이 공초하기를,
"강월당(姜月塘)의 일은 실로 모르는데 ‘막수유(莫須有)090) ’라는 말은 악비(岳飛)의 문자(文字)이기 때문에 알았습니다. 이처럼 마음 가득히 당심(黨心)을 품고 있었다면 어찌 다른 당 사람과 일을 같이 하려 했겠습니까? 말의 증거를 댈 수 없으니, 참으로 더욱 원통합니다."
하고, 이득중과 면질시키니, 한결같이 변명하였다. 이득중에게 형을 가하니, 공초하기를,
"이미 사람을 무함한 악역(惡逆)으로 지만(遲晩)하여 마땅히 죽을 사람이 무엇을 돌보느라 속이겠습니까? 강월당의 일은 분명 조징의 말이었습니다. 나침(羅沈)이 과연 독갑방(獨甲房)의 일을 말하였고, 이경중(李敬中)에게 과연 강월당의 일을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막수유(莫須有)’란 세 글자가 이미 조징의 입에서 나왔다면 어찌 강월당의 일을 몰랐겠는가? 이득중 역시 정절(情節)이 음험하고 참독(慘毒)하여 장(杖)을 쳐야만 지만(遲晩)하였다. 이렇게 정법(正法)하자니, 마음이 불쾌하다."
하니, 여러 비국 당상(備局堂上)과 양사(兩司)가 모두 말하기를,
"이득중이 이미 자백하였으니, 마땅히 정법해야 하고, 조징 역시 마음을 두고 말을 냈으니, 요언(夭言) 부도(不道)의 죄로 역시 마땅히 정법해야 합니다."
하였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죄(罪)에는 경중이 있으니, 이득중은 법으로 보아 정형(正刑)해야 마땅하고, 조징은 본부(本府)에 내려 장문(杖問)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득중과 조징은 다 음험하고 참독한데, 이제 친히 물어야 할 중요한 일이 없다."
하고, 인하여 금오(金吾)091) 에서 국문하기를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비록 국수(鞫囚)라고 하더라도 마땅히 흠휼(欽恤)해야 하니, 지금부터는 모든 형신(刑訊)을 하루에 한 차례를 넘지 말아야 하고, 추국(推鞫) 역시 두 차례를 넘지 않게 할 것이니 이로써 《속대전(續大典)》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이득중이 정형(正刑)하기 전에 지레 죽었고, 조징도 죽었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고, 문학(文學) 홍봉한(洪鳳漢)에게 말을 주라고 명하였는데, 빈궁(嬪宮)의 종후(腫候) 때 직숙한 노고 때문이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61권, 영조 21년 1745년 4월 (0) | 2025.09.28 |
|---|---|
| 영조실록61권, 영조 21년 1745년 3월 (0) | 2025.09.28 |
| 영조실록61권, 영조 21년 1745년 1월 (0) | 2025.09.28 |
| 영조실록60권, 영조 20년 1744년 12월 (1) | 2025.09.27 |
| 영조실록60권, 영조 20년 1744년 11월 (0) | 2025.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