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1권, 영조 21년 1745년 3월

싸라리리 2025. 9. 28. 17:49
반응형

3월 1일 계유

일식(日蝕)이 있고, 밤에는 유성(流星)이 소미성(小微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하교하기를,
"이번 수서계(受誓戒)092)  를 인정전(仁政殿)에서 섭행(攝行)하는데, 승지(承旨)·중사(中使)는 참석하고 총재(冡宰)의 독문(讀文)과 복색(服色)의 절차는 모두 친행(親行)하는 예에 의하되 의조(儀曹)093)  로 하여금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으니, 이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황단(皇壇)에 친히 제사를 지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상로(金尙魯)를 발탁하여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삼았는데, 좌의정 송인명이 천거하였기 때문이었다.

 

김상성(金尙星)을 대사헌으로, 조진세(趙鎭世)를 헌납으로, 임진하(任震夏)를 사간으로, 임경관(任鏡觀)을 장령으로, 홍중효(洪重孝)를 정언으로, 권일형(權一衡)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약방(藥房) 및 대신, 여러 재상(宰相), 여러 승지(承旨), 옥당(玉堂)이 황단 대제(皇壇大祭)의 섭행(攝行)을 명하기를 힘써 청하니, 임금이 강청한 후에야 억지로 따랐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아! 지난날 〈숙종께서〉 갑신년094)   이후부터 17년 사이에 수십 차례 친히 황단에 제사를 지냈었다. 내가 반드시 친히 행하려고 하는 것은 옛날의 성의(聖意)을 본받고자 해서인데,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고심하면서 강청하므로 비록 애써 따르지 않을 수 없으나, 저 높은 단(壇)을 바라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미 대신과 여러 신하에게 유시한 대로 하루 전에 마땅히 망단례(望壇禮)를 먼저 행하겠으니 의조(儀曹)에 분부하도록 하라. 이는 밤중에 동가(動駕)하는 것이 아니요, 길이 대궐 가운데를 경유하므로 행제(行祭)와는 차이가 있으니, 군사를 모으지 말고 단지 훈련 대장이 북영(北營)095)  의 입직(入直)한 군사를 거느리고 전알(展謁)할 때 와서 담장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라. 배립(排立) 역시 입직한 군사 가운데서 추려 내어 쓰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황단이 비록 금중(禁中)에 있으나 매양 제사를 지낼 때 여러 관원들이 반드시 만류하고자 하는 것은 깊은 밤중에 동가하기 때문이니, 사세는 그러하지만 이는 세절(細節)이다. 치재(致齋) 3일에 하루는 제향소(祭享所)에서 유숙하는 것이 금석(金石) 같은 법이다. 이미 신실(神室)이 있으니, 마땅히 재실(齋室)도 있어야 한다. 해조로 하여금 대략 3간(間)의 제도를 본떠 위의 1칸은 어재실(御齋室)로 삼고, 제3칸은 세자(世子)의 재실로 삼게 하라. 이미 재실을 지은 후에는 하루 전에 제향소에 가서 재숙(齋宿)하고, 행사(行祀)는 묘사(廟社)096)  의 예에 의해 하며, 지금 이후에는 이로써 정식을 삼으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번 망단례(望壇禮)는 비풍(匪風)·하천(下泉)097)  의 뜻에서 비록 기의(起義)098)  하여 행하는 것이나 나이가 이미 쇠하였으니 조용히 조섭(調攝)할 때를 당함이 반드시 잦을 것이다. 행하고자 하나 행하지 못하면 어찌 유독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 같다는 탄식만 있겠으며, 그 마음을 어떻게 억제하겠는가? 만약 연고가 있어 몸소 행하지 못한다면 그 달 안에 때에 따라 망단례를 행하는 일을 의조로 하여금 여러 대신 및 밖에 있는 예(禮)를 아는 유신(儒臣)에게 물어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3월 4일 병자

밤에 목성(木星)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가고, 유성(流星)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 하늘 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하교하기를,
"향례(享禮) 때 왕래하면서는 강사포(絳紗袍)를 착용하고, 행례(行禮) 때에는 면복(冕服)을 착용하며, 망위례(望位禮) 때 왕래하면서는 그대로 면복 차림으로 하며, 배위(拜位)는 홍문(紅門)099)   밖에다 하되, 미리 배위대(拜位臺)를 길 왼쪽에 북향으로 설치하도록 의조(儀曹)로 하여금 자세히 알게 하라."
하였다.

 

3월 5일 정축

조명택(趙明澤)을 대사헌으로, 이윤신(李潤身)을 보덕(輔德)으로, 안집(安𠍱)을 필선(弼善)으로, 이태중(李台重)을 교리로, 홍익삼(洪益三)을 부교리로, 조돈(趙暾)을 부수찬으로, 윤동준(尹東浚)을 헌납으로, 이사조(李師祚)를 지평으로, 안식(安栻)·최규태(崔逵泰)를 장령으로, 이보욱(李普昱)을 승지로 삼았다.

 

90세 된 부인(婦人)을 해조에서 초계(抄啓)하여 봉작(封爵)하라 명하였는데, 대신이 아뢴 때문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나침(羅沈)이 이 때에 붙잡혀 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 잡아오라 명한 것은 이경중(李敬中)과 이득중(李得中)의 면질(面質)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이경중은 백탈(白脫)100)  하였으니 나침에게 물을 만한 단서가 없다. 그러나 이득중이 이미 사람을 무함한 것으로써 자복하였으니, 나침을 전석(全釋)해서는 불가하다."
하고, 인하여 대정현(大靜縣)으로 도배(島配)하라고 명하였다. 장령 임경관(任鏡觀)이 국문하기를 계청하고, 헌납 조진세(趙鎭世)는 도배하기를 계청하였다. 부제학 원경하가 말하기를,
"두 대신(臺臣)의 소청이 모호하여 분명하지 않으니, 체차(遞差)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이 이미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을 보충하라는 명을 받들었는데 물러가 상고해 보니, 홍만종(洪萬宗)이 지은 것이 사략(史略)과 같아 사법(史法)을 많이 썼습니다. 이제 만약 선조(先朝)의 일을 보충하면서 사법을 쓴다면 구애되는 곳이 있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사법이 있다면 어찌 보충할 필요가 있겠는가? 중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송익보(宋翼輔)가 본도의 환곡(還穀)의 부족한 것으로써 장계를 올려 오래된 상정미(詳定米) 가운데에서 1만 석을 한정하여 개색(改色)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임금께 아뢰니 윤허하였는데, 전례(前例)에 의한 것이었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장경 왕후(章敬王后)101)  의 국구(國舅) 파원 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의 시호(諡號)를 지금 비로소 계하하였는데, 국구는 으레 의정(議政)을 증직(贈職)하여야 하나 가화(家禍)로 인해 아직껏 행하지 못했습니다. 국구에게 시호를 내릴 때 연회(宴會)의 수요(需要)는 나라에서 으레 돌보아 주는 것이니, 마땅히 예에 따라 거행하고, 봉사손(奉祀孫)은 마땅히 시호를 내릴 때에 맞추어 녹용(錄用)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말하기를,
"고 상신(相臣) 홍중보(洪重普)는 고 익평군(益平君) 홍득기(洪得箕)의 부친(父親)인데 이제 바야흐로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그 봉사손(奉祀孫)도 또한 녹용(錄用)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부수찬 서지수(徐志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우리 성상께서 재변을 만나 경구(警懼)하시고 혁연(赫然)히 분발하신 지 이제 이미 3개월이 되었습니다. 3개월이면 천도(天道)가 한 번 조금 변하는 것인데 국가의 쇠란(衰亂)하고 위미(委靡)한 기상(氣象)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어찌 전하께서 경구하고 분발하는 뜻이 혹 조금이라도 태민함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모든 일은 진보(進步)하지 않으면 퇴보(退步)하게 마련이니, 신은 나라의 형세가 날로 떨어질까 염려됩니다. 지난번 영변부(寧邊府)의 절수(折受)를 특별히 혁파한 한 가지 일은 매우 큰 성덕(盛德)이어서 연신(筵臣)들이 물러 나와 기뻐하며 서로 축하하였으니, 이런 마음을 미루어 나간다면 무슨 일이든 되지 않겠습니까? 이는 오직 뜻을 세우는 데 달려 있으니,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 나라를 도치(圖治)하려는 마음을 더욱 부지런히 하여 게으름이 없게 하소서. 모든 다스림에 해가 되는 것을 일체 제거해 버리면 기강(紀綱)이 스스로 서서 조정이 바르게 되고, 신하들이 감히 사(私)를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재상(宰相)들이 사를 행하고 소신(小臣)들이 간사하게 속이는데도 사람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언자(言者)도 그 실정을 다 말하지 못합니다. 상하가 이와 같이 막혔으니 이것이 어찌 작은 걱정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구중 궁궐(九重宮闕)에 깊이 계시어 가난한 초가집 사람들의 근심과 고통을 보지 못하시고, 단지 성덕(聖德)을 칭송하는 말만 들으시고, 강직하게 곧바로 논의하는 것을 듣지 못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성인인 체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서 문득 태평이 이르렀다고 생각하시 지만 언로(言路)의 막힘이 이 때보다 더 심한 적은 없었으니, 치평(治平)의 도리가 역시 멀다고 하겠습니다. 신은 듣건대 현명(賢明)한 자가 재위(在位)하고 능력 있는 자가 관직(官職)에 있으며, 덕(德)이 높은 자는 지위가 높고, 공(功)이 많은 자가 녹(祿)이 후하면 백성들이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진 자와 용렬한 자가 뒤섞여 백성들의 뜻이 정해지지 않아 사람들이 각자 조급하고 망녕되이 요행을 얻으려는 마음을 두기 때문에 세도(世道)의 변괴가 달마다 생깁니다. 이는 대개 조정이 다스리는 근본 술책을 얻지 못해서인데 그 요점은 요행심을 억제하고 조경(躁競)102)  을 금지하는 데 있으니, 신처럼 못나고 찌꺼기 같은 사람을 먼저 출삭(黜削)해 그 나머지 사람을 격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할 바를 알아서 감히 조급히 다투어 나오려는 마음을 두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소(疏)가 들어가자 임금이 말하기를,
"소 가운데 있는, ‘재상이 사(私)를 행하고, 소신(小臣)은 간사하게 속인다.’는 등의 어구(語句)는 범연하게 한 말인 듯하나 마음에 혹 어떤 사람을 가리킨 것인지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패초(牌招)해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서지수가 소회(所懷)를 써서 올리기를,
"‘재상이 사를 행하고, 소신이 간사하게 속인다.’는 등의 말은 본디 신의 상소 가운데 중요한 대목이 아니요, 본래의 뜻은 오로지, ‘말을 감히 그 실정대로 다하지 못한다.’는 말에 있으니, 이 말은 신이 이제 세 번이나 진달한 것입니다. 신하가 감히 그 실정을 다하지 못하는데도 다스려진 나라는 있지 않습니다. ‘재상이 사를 행하고, 소신이 간사하게 속인다.’는 등의 말은 본래 세상에 경각심(警覺心)을 주기 위한 것이나 그 일도 진달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근래에 사의(私意)가 아주 성해서 모든 일이 공(公)에서 나온 것은 적고, 사(私)에서 나온 것은 많습니다. 정목(政目)이 나오면 문득 이론이 있게 되는데 이는 전후의 장주(章奏) 사이에 이미 으레 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대저 전관(銓官)을 추고(推考)하는 함사(緘辭)가 주머니에 가득한 것이 미담(美談)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근래에는 관사(官師)가 서로 규찰(規察)하는 것 역시 조용하여 들리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전관이 털끝만큼도 사(私)를 따르지 않아서 그렇겠습니까? 이로써 미루어 보면 어찌 사를 행하는데도 사람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우의정 조현명(趙顯命)과 시사(時事)를 언급하였는데, 신이 말하기를, ‘피차(彼此)의 색목(色目)을 연충(淵衷)에 두지 않은 연후에야 탕평(蕩平)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더니, 우상(右相)이 말하기를, ‘만약 모두 연충에 두지 않는다면 윤급(尹汲)처럼 편파적인 사람을 성상께서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윤급이 바야흐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있었습니다. 신이 혼자 탄식하기를, ‘대신이 전관(銓官)의 편사(偏私)를 알고서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하면, 누가 다시 말하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사를 행하는데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윤급을 외방에 보직(補職)할 때 판서(判書) 신(臣) 민응수(閔應洙)는 무죄인 것 같기 때문에 대신이 진달하여 민응수를 기읍(畿邑)으로 이배(移拜)하여 경중(輕重)의 뜻을 보이기를 청하였습니다. 사를 따른 허물이 오로지 윤급에게 있었던 것인데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말을 그 실정대로 다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하(目下)의 일로 말하더라도 송수옹(宋秀雍)을 찰방(察訪)으로 차임하고자 시임(時任) 찰방을 수령(守令)의 자리로 옮겼으니, 이 역시 사(私)라고 할 수 있는데 잗달아서 감히 번거롭게 진달하지 못했습니다. 신은 평소 교유(交遊)함이 드물어서 일체의 세상 일에 대해 거의 귀머거리나 소경과 같아 단지 보고 들은 한두 가지 일로써 앙진(仰陳)하였으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옥당(玉堂)은 사람을 논핵(論劾)하는 직책이 아니기 때문에 상소 가운데 감히 일을 지적하지 못했는데 이제 물어서 아뢰라는 명을 받들고 비로소 감히 지적해 진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급은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미치지 못하고 또 소신(小臣)도 아니니, 다시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니, 서지수가 대답하기를,
"재상과 소신은 마치 대소 신료(大小臣僚)란 말과 같습니다. 대개 나누어서 말하자면 재상은 바로 전석(銓席)의 폐단을 말한 것이요, 소신은 근래 각사(各司)와 외방(外方)이 모두 간사한 폐단이 있기 때문에 통틀어 논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또 물었다. 서지수가 대답하기를,
"윤급 역시 전관이기 때문에 재상 가운데 아울러 논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근래 장주(章奏)에 머리를 감추어 두고 황홀(怳惚)하게 하는 자가 많은데 이번 서지수가 상소 한 글귀 역시 범연하지 않기 때문에 정원으로 하여금 물어 아뢰게 했더니, 과연 적절함이 없었다. 곧바로 진달하는 것이 옳은데 재상도 아니요, 소신보다는 높은 윤급을 모호하게 대답했으니, 특별히 그 관직을 체차(遞差)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황단(皇壇)의 어재실(御齋室)을 영건(營建)하는 일로써 분부를 내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신이 운대관(雲臺官)103)  을 데리고 간심(看審)했더니, 삼문(三門) 안은 좁고 또 동서 양쪽 가장자리는 모두 연운(年運)에 불리합니다. 조종문(朝宗門) 밖에 조용하고 넓은 곳이 있는데 황단과는 멀지 않으니 터전으로 정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으로는 중단(中壇) 위 어막(御幕)을 친 곳에다 세 칸 집을 지어 세마평(洗馬坪)의 들어가 거처하는 방과 같게 하고자 하였다. 제향(祭享) 때 과연 많은 사람들이 모여 깨끗하지 못할 염려가 있으니 조종문 밖으로 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서종옥이 말하기를,
"세 칸은 제도의 모양이 이루어지지 않고 반드시 사직단(社稷壇) 재실처럼 좌우의 방(房) 각 두 칸씩으로 하고, 청사(廳事)를 네 칸으로 한 연후에야 규모가 이루어지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 칸 길이에 두 칸 넓이로 하여 가운데 두 칸을 청사로 하면 된다."
하였다. 서종옥이 또 말하기를,
"망위례(望位禮)에 친림(親臨)하실 때 판위(版位)는 마땅히 말대(末臺) 위에 설치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대(末臺)의 아래 어로(御路)의 길이 굽은 곳에 하나의 넓은 돌을 한정해서 하면 된다."
하니, 서종옥이 말하기를,
"재실의 좌향(坐向)은 마땅히 축좌 미향(丑坐未向)으로 해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땅을 쓸고 제사지낸다.’는 뜻으로 하면 재실의 계단이 어찌 높아야 하겠는가? 단지 2층으로 하고 장석(長石)을 쓰지 말아야 한다."
하니, 서종옥이 말하기를,
"모자 부전(茅茨不剪)104)  하는 성상의 뜻을 신이 마땅히 우러러 깊이 유념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종묘 재실에는 문(門)이 둘인데, 여기에는 세 문을 내어 동궁(東宮)이 동쪽문으로 출입하게 해야 한다."
하니, 서종옥이 말하기를,
"동궁께서 출입하는데 앞길로 다니는 것은 불편할 듯하니, 동쪽가에 좁은 문 하나를 내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말하였다. 서종옥이 말하기를,
"담장은 조심하는 도리로 보아 높이 쌓아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거둥할 때 협연(挾輦)이 편리한데 담장을 어찌 높이 쌓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3월 7일 기묘

승문원(承文院)에서 아뢰기를,
"일식(日食)에 대한 회자(回咨)를 금군(禁軍)을 정해 의주(義州)로 내려 보내 봉황성장(鳳凰城將)에게 전해 북경(北京)으로 보내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는데, 전례(前例)에 의한 것이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여 약원 제거(藥院提擧)를 해면하고 돌아가 노모(老母)를 봉양하기를 빌었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정언 홍중효(洪重孝)가 상소하여 나침(羅沈)을 도배(島配)하라는 명을 환수하고 다시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얻어내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대각(臺閣)의 논계(論啓)는 체모가 자별(自別)한데, 죄인을 엄히 조사하라는 청이 이미 헌신(憲臣)에게서 나왔는데도 간신(諫臣)이 또 차율(次律)로 하기를 청한 것은 대체(臺體)를 크게 손상시킨 것이니, 체차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전(前) 헌납(獻納) 조진세(趙鎭世)는 마땅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 현감(縣監) 엄택주(嚴宅周)는 마땅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 현감(縣監) 엄택주(嚴宅周)는 본래 전의현(全義縣) 이성(李姓)을 가진 관리의 아들로 그 역시 지인(知印)으로 수행했는데 나이 13, 4세에 죄 없이 도망하여 성명(姓名)을 바꾸어 과거를 보아 발신(發身)하였으니 세상에서 의심한 지 오래입니다. 신이 근래에 본 아문(衙門)에 왕래함으로 인하여 그 자세한 것을 들었는데, 그와 아비가 같은 동생 하나가 현재 본 현에 살면서 이성(李姓)을 쓰고 있으나 엄택주가 왕래를 끊었으며, 그의 부모의 무덤 역시 그 고장에 있는데도 한 번도 왕래하지 않았다 하니, 그의 마음씀이 아주 절통(絶痛)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은양(恩養)을 받아 그 성을 사용한 자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가 비록 미천하나 일이 윤상(倫常)의 변괴에 관계되니 그가 아비를 배반하고 임금을 속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엄택주를 잡아다가 엄히 따져 율(律)에 의해 법을 바루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나침의 일은 이미 상신(相臣)에게 유시하였다. 조진세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고, 엄택주의 일은 해부로 하여금 엄히 조사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예조 판서 조상경(趙尙絅), 병조 판서 김약로(金若魯), 호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을 인견하고 황단(皇壇) 망위례(望位禮) 때의 의주(儀註) 및 절목(節目)을 가져다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망위(望位)’의 ‘위(位)’자는 뜻이 있어 위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위’자로 일컬은 것이다."
하였다. 서종옥이 말하기를,
"재실(齋室)의 영건은 마땅히 10일에 터를 닦아 16일에 주춧돌을 세우고, 20일에 상량(上樑)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황단 남문(南門)에 호칭이 없으니, 제학(提學)으로 하여금 호칭을 정해 들이라. 제학을 비록 차임하지 않았더라도 원경하(元景夏)가 일찍이 제학을 지냈으니, 그로 하여금 의망(擬望)해 올리도록 하라."
하였는데, 드디어 공북문(拱北門)이라 하였다.

 

3월 9일 신사

눈이 흩날렸다.

 

임금이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가 망위례(望位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영화당(映花堂)에서 승여(乘輿)를 타고 나왔는데 산선(繖扇)과 시위(侍衛)를 평상시의 의례대로 하였다. 조종문(朝宗門) 밖에 이르러 승여에서 내려 막차(幕次)로 들어 갔다가 얼마 후 다시 나와 승여에서 내려 조종문으로 들어가면서 명하기를,
"오위 장(五衛將) 이하 당하(堂下) 시위는 모두 삼문(三門) 밖에서 뒤떨어지도록 하라."
하였다. 중문(中門) 밖에 이르러 임금이 규(圭)를 잡고 동문(東門)을 거쳐 판위(版位)로 들어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동유문(東壝門)으로 들어가 동폐(東陛)를 거쳐 봉심(奉審)하고 다시 판위에 돌아와 희생(犧牲)을 친히 살폈다. 임금이 말하기를,
"황단(皇壇)에 성우(騂牛)105)  를 쓰는 것이 무슨 뜻을 취한 것인가?"
하니, 승지 오수채(吳遂采)가 말하기를,
"황조(皇朝)에서 화덕(火德)을 숭상했기 때문에 성우를 쓴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향악차(香幄次)에 나아가 대축(大祝)에게 명하여 향축궤(香祝櫃)를 내오게 하고 친히 살폈다. 임금이 말하기를,
"향악차가 만약 눈과 비를 맞으면 습기에 젖기가 쉬우니, 지금 이후에는 향축을 신실(神室) 안으로 봉안해야 한다."
하고, 인하여 정식(定式)으로 삼기를 명하였다.

 

3월 10일 임오

예조에서 황단 망위례를 수의(收議)하여 품계(稟啓)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서명균(徐命均)이 헌의(獻議)하기를,
"성사의 뜻이 친히 제사를 지내지 못함을 혐의하여 특별히 망위례를 행하는 것이니, 마땅히 이달 안에 날짜를 가려 예를 행해야 하며 제사를 지내는 전후에 구애될 필요는 없습니다. 지방(紙榜)은 비록 써서는 안 되지만 설위(設位)하는 한 절차는 의장(儀仗)과 함께 폐지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다른 대신의 의논 역시 같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망위례 한 절차를 이미 물어서 의논해 왔다. 아! 황단의 친제(親祭)는 바로 옛날 존주(尊周)하는 뜻으로 한 일인데 나이가 많아지고 기운이 쇠해 해마다 제사 지내는 것을 어찌 기필할 수 있겠는가? 이후에 혹 섭행하는 일이 있으면 망위례를 그 달 안에 의조(儀曹)로 하여금 품지(稟旨)해 거행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고, 의주(儀註)는 한결같이 지금의 의주를 따르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1일 계미

눈과 비가 내렸다.

 

대사헌 조명택(趙明澤)이 상소하여 나침(羅沈)을 국문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서지수(徐志修)의 상소에서 배척을 받았으니, 대략이나마 폭백(暴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른바 송수옹(宋秀雍)은 바로 고(故) 판서(判書) 송창(宋昌)의 소생으로 적사(積仕)하여 출륙(出六)하였으니, 한 번 우관(郵官)106)  을 지내야 하는 것은 바로 정사(政事)의 예가 그렇습니다. 그가 이른바 시임(時任) 찰방(察訪)이라 말한 자는 바로 이서표(李瑞彪)인데, 이서표는 문필(文筆)로 일컬어져 비단 그 재능이 아까울 뿐만 아니라 현임에 있은 지도 2년이 되었습니다. 이 무리들을 수백 년 동안 금고(禁錮)해 폐하는 것을 신이 일찍이 불쌍하게 생각하여 참으로 분수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혹 승서(陞敍)하여 의망(擬望)하거나 혹은 벼슬에 전차(塡差)해 비미(卑微)한 자를 빠뜨리지 않는 뜻을 보이려고 했을 뿐입니다. 유신(儒臣)의 말은 마치 신이 송수옹을 위해 한 것처럼 하였으니, 참으로 한 번 웃기에도 부족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적절함이 없이 모호하기에 불러서 물었더니, 억지 대답을 하였다. 연소한 자의 소활한 습성에 어찌 족히 승강이하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신이 강도(江都)에 가는 길에서 문수 산성(文殊山城)의 지형을 보았는데 밖은 좁고 안은 평평하며, 동쪽과 서쪽은 강이요, 북쪽은 철벽(鐵壁) 같은 높은 봉우리이며 남쪽은 치첩(雉堞)이 빙 둘렀기 때문에 신의 생각에는 통진(通津)을 독진(獨鎭)으로 하여 산성으로 읍(邑)을 옮기고 부평(富平)과 양천(陽川)은 합쳐서 한 고을로 삼는 것이 가할 줄로 여깁니다. 또 부평은 서쪽으로 해변(海邊)에 가깝고 돌곶[石串]은 진소(津所)로 삼아 첨사(僉使)를 둠이 마땅하니, 덕포 첨사(德浦僉使)를 돌곶으로 옮긴다면 부평은 비록 이읍(移邑)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으니 이는 모두 영상(領相)·우상(右相)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덕진(德津)은 인천(仁川) 땅에 있는데 당초에 설치한 뜻이 있으니 무기(武器)와 환곡(還穀)을 조치하여 수어(守禦)와 군량에 충분히 대비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은 각기 소견을 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강도(江都)는 효묘조(孝廟朝) 때부터 이미 보장(保障)의 중요한 땅이 되었습니다. 문수 산성은 고(故) 상신(相臣) 김석주(金錫胄)의 계사(啓辭)에, ‘만약 의자(椅子)에 앉아서 바둑판을 보는 듯하여 그 곳을 적이 점거하면 강도 사람들은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산성을 쌓았던 것인데, 신에게는 별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문수 산성으로 이읍(移邑)하여 나무를 기른 후에 적이 점거해 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든다면 장차 어떻게 방어하겠습니까? 수목이 자라고 백성들이 조밀하게 살면 반드시 서로 다투는 땅이 되기 쉽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대로 두고 때에 임하여 굳게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고,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의 생각도 역시 적을 길러주는 밑천이 될까 염려됩니다. 통진은 그 형세가 반드시 다투게 되었는데, 통진을 만약 잃으면 이는 강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였으며, 이종성이 말하기를,
"덕포(德浦)를 옮기는 일은, 갑곶(甲串)이 얼어붙어 뱃길이 막히면 광성(廣成)이 손돌목[孫石項] 아래에 있어 창졸간에 변란이 일어날 때 뱃길이 광성을 거치게 되니 당초 덕포(德浦)를 설치한 뜻이 있습니다. 덕진을 조치한 데에 대해서는 신의 의견 역시 이와 같으며, 양천(陽川)·부평(富平) 고을을 합치는 것은 신이 하고자 하던 바입니다."
하고, 훈련 대장(訓鍊大將) 김성응(金聖應)이 말하기를,
"강화(江華)를 견고하게 하고자 하면 문수 산성을 버려서는 안 되는데, 한 별장(別將)으로서 지키게 한다면 매우 허술하니 군정(軍丁)을 만약 변통할 수만 있다면 통진을 독진(獨鎭)으로 하여 고을을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산성(山城) 안에는 끝내 배치하기 어렵고 성 밖 장항(獐項)이 넓어 고을을 수용할 수 있고, 만약 위급한 일을 당하면 산성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호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말하기를,
"삼군문(三軍門)에서 성을 쌓을 때 도형(圖刑)을 가지고 왔는데 사람들 모두가 ‘문수 산성은 반드시 다툴 땅이 되는데 외따로 떨어진 성에 후원(後援)이 없으면 곤란하다.’라고 하였으니, 통진을 독진으로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읍기(邑基)는 장항(獐項)이 좋지 않아서 1년을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통진 부사(通津府使)에 중군(中軍)이 있으니 만약 군졸을 조련하여 성을 지킬 방도를 하게 하면 좋을 듯싶습니다. 이제 만약 양천과 부평을 합친다면 군정(軍丁)을 변통할 길이 있으니, 통진을 독진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강화에는 대선(大船)이 4척에 불과한데 삼남(三南)에 있는 배가 1백 척에 가까우니, 만약 조운(漕運)한 후에 올려 보내고 바람이 높을 때에는 강화에 머물러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공조 판서 유엄(柳儼)은 말하기를,
"문수 산성은 수목을 기르기가 어렵고 수유현(水踰峴)은 바로 천험(天險)의 요새이니 만약 5리의 성을 쌓으면 관부(官府)를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양천을 공암(孔巖) 진두(津頭)에 둔 것은 오로지 강도 땅을 위해서인데, 불행하게도 병자년107)   같은 변이 있게 되면 나루에 배가 없으니 어떻게 급히 건너겠습니까? 나룻배 10여 척을 양화도(楊花渡)에서 더 준비해 내야 합니다."
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수성(守城)하는 데에는 다섯 가지 방도가 있으니 장수(將帥)·군사(軍士)·지형(地形)·기계(器械)·양식(粮食)이 그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않으면 수성을 하기가 어려운데 주위 2백 리나 되는 성 안을 채우지 않고서 다만 빈 성만 쌓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수성하는 방도는 마땅히 윤탁(尹鐸)이 그 호수(戶數)를 줄인 도리108)  를 다해야 하는데, 근래에는 유수(留守)를 문득 명관(名官)이 승자(陞資)하는 계제(階梯)를 삼거나 아니면 나이 든 재상(宰相)이 병을 요양하는 장소를 삼아 이렇게 자주 교체되니, 어떻게 성을 지키겠습니까? 만약 수성을 하고자 한다면 성을 지키고 성을 쌓을 만한 자를 가려서 오래 재임시켜 혹 10여 년, 혹은 5, 6년을 한정해 효과를 이루기를 책임지워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관방(關防)에 관계되니, 통진 부사(通津府使)를 불러서 절목(節目)을 만들어 후일 등대(登對)할 때에 강정(講定)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서종옥이 말하기를,
"본조(本曹)의 저축이 고갈되어 공가(貢價)을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데 듣건대 관서(關西)의 도신(道臣) 김시형(金始炯)이 비용을 절약하여 별도로 돈 2만 냥과 무명 3백 동(同)을 준비해 본조의 불시의 수용에 대비하고 있다 합니다. 또 지난해 북관(北關)에 진구(賑救)를 실시할 때 기영(箕營)에서 호조에 돈 2만 냥을 보내어 우선 북관에 빌려 주기를 허락하였었는데, 이제 듣건대 그 때의 도신(道臣)이 돈을 주조(鑄造)하여 요리해 수만 냥을 만들어 두었다고 합니다. 이 두 곳의 별비전(別備錢) 4만 냥과 무명 3백 동을 우선 가져다가 목전의 급함을 구제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어영청의 별초군(別抄軍)은 거둥 때와 습진(習陣) 때 이미 편곤(鞭棍)을 쓰는데 상시사(賞試射) 때에 이르러서는 편곤을 시험하지 않으니, 지니고서도 시험하지 않음은 매우 뜻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금군(禁軍)의 예(例)에 의해 시험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본영(本營)의 군기(軍器)가 많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청컨대 군작미(軍作米) 2천 곡(斛)을 얻어 바로 수리해 음우(陰雨)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병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가을 보리가 이미 흉년이 들고 농사도 풍년이 들기를 보장하기 어려우니, 저축하는 방책을 미리 강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서관(西關)의 돈과 무명을 이미 이급(移給)하기를 허락하였고, 군작미를 또 획급해 주었는데 이는 비단 외방이 지탱하지 못할 폐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반드시 감당하지 못할 단서가 있게 될 것이니, 마땅히 절약하는 도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어서 이종성(李宗城)에게 명하여 관북 심리사(關北審理使) 윤용(尹容)이 올린 옥안(獄案)에 대하여 경중을 분간해 차등을 두어 작처하라고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런 의옥(疑獄)을 여러 해 동안 판결하지 못하고 이제 심리사가 간 후에야 비로소 조진(條陳)하였으니 전후의 도신(道臣)을 아울러 중추(重推)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2일 갑신

달이 태미성(太微星) 서원(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이섭원(李燮元)을 지평으로, 윤광소(尹光紹)를 부수찬으로, 신사건(申思建)을 대사성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예문관 제학으로, 강원 감사(江原監司) 권혁(權爀)을 경상도 관찰사로 이배(移拜)하고, 김성운(金聖運)을 대사간으로, 조돈(趙暾)을 헌납으로, 남학종(南鶴宗)을 정언으로 삼았다.

 

3월 13일 을유

부제학 원경하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성변(星變)과 흰 무지개가 경고(警告)하는 날에 엄숙하고 두려워하여 간측(懇惻)한 하교와 수성(修省)하는 정성이 천심(天心)을 기쁘게 하고 나라의 운명을 공고히 하기에 족하였습니다. 그런데 날짜가 조금 오래되면 인정(人情)이란 느슨해지기가 쉬우니, 비록 전하의 하늘을 공경하고 재변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라 하더라도 혹 처음을 잇지 못하고 한가하고 깊숙한 곳에 홀로 있을 때에 조심하는 마음이 잠깐이라도 늦추어져 연안(宴安)하는 마음이 거기에 따라 생기면, 사람은 몰라도 하늘은 이미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호오(好惡)를 공평히 하고 시비(是非)를 구분하여 선한 자는 올리고 간악한 자는 벌을 주어 털끝만큼이라도 편벽된 사(私)가 없도록 하시어 중외(中外)의 신하(臣下)들로 하여금 행진(行陣)에 있는 것처럼 공경하게 하면 기강이 정숙(整肅)되고 게으른 마음이 감히 싹트지 못할 것이며, 조정이 화합하여 감히 사사로이 당습(黨習)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규모가 크게 넓어지고 제방(隄防)은 엄해지며 취사(取捨)가 고르게 되어 의리가 밝아지게 됩니다. 경연(經筵)을 자주 열어 성학(聖學)의 공부에 도움이 되게 하고, 곧은 말을 용납해 받아들여 곤직(袞職)의 잘못을 바로잡으며, 밤낮으로 부지런하시어 반드시 백성들을 구해 내시는 것을 첫째 중요한 임무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3월 14일 병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면직하였다. 김재로가 여러 차례 정고(呈告)하였다가 조징(趙徵)의 국옥(鞫獄) 때 잠시 나왔는데, 그후에 다시 병을 핑계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조징의 옥사 이후 여러 차례 상소하여 상직(相職)의 해면을 빌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도승지 심성희(沈聖希)를 보내어 유시해 함께 들어오게 하였다. 조현명은 명을 받들었으나 김재로는 끝내 명에 응하지 않으니, 좌의정 송인명이 아뢰기를,
"수상(首相)이 매양 말하기를, ‘비록 하루라도 중한 짐을 쾌히 벗어 염우(廉隅)를 한번 편다면 사사로운 마음이 편안하겠고, 성상의 뜻이 만일 영원히 버리지 않으신다면 마땅히 마음을 다해 나랏일을 할 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영상의 관직 해면을 명하였다. 조현명도 역시 매우 간절하게 사직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과 수상은 다름이 있으니 말할 만한 염우(廉隅)가 없다."
하고는 인하여 하교하기를,
"내가 세자(世子)를 세운 후 고시(古詩) 한 구(句)와 내가 지은 한 구를 항상 읊조리고 있었는데, ‘동문에 관을 걸고서 시끄러운 세상 사절하니, 오류109)   청풍의 태고인일세.[東門掛冠謝囂塵 五柳淸風太古人]’ 하는 구절은 바로 내가 지은 것인데, 도잠(陶潛)의 청절(淸節)을 사모한 것이다. ‘두 무릎이 턱을 지나고 귀는 어깨에 늘어졌으니, 사방 이웃에서 성은 알아도 나이를 모른다네.[雙膝過頤耳在肩四隣知姓不知年]’라는 구절은 바로 고시(古詩)인데 이는 일찍이 늙도록 악착같이 일하여 자손을 위하는 계책을 한 자를 비웃은 것이다. 내 마음이 본디 이러한데도 오히려 억지로 나랏일을 하려 하는데 경은 어찌 차마 돌아보지 않는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셨는데 신이 어찌 감히 처음의 마음을 고수하겠습니까?"
하였다.

 

김상성(金尙星)을 강원도 관찰사로, 남유용(南有容)을 수찬으로, 이응협(李應恊)을 정언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삼았다.

 

3월 15일 정해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콩알 같았다. 달이 항성(亢星)을 범하였다.

 

3월 16일 무자

임금이 육상묘(毓祥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효장묘(孝章廟)를 거쳐서 환궁하였다.

 

임금이 병조 판서 김약로(金若魯)에게 말하기를,
"별군직(別軍職)은 바로 어전(御前)에서 시위하는 직책이니 군문(軍門)에 차출하는 것은 부당하다. 천총(千摠)은 혹 가하더라도 파총(把摠)은 차하(差下)하지 말도록 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별군직을 설치한 것은 효묘조(孝廟朝)부터 시작되었다. 대개 당시에 개연히 중원(中原)을 회복할 뜻을 두었기 때문에 심양(瀋陽)에서 곤액(困阨)을 당할 때 팔장사(八壯士)110)  의 자손을 뽑아 친기위(親騎衛)로 대비해 마치 송(宋)나라 효종(孝宗)의 철장 목마(鐵杖木馬)111)  의 고사처럼 했던 것이요, 원래 조종조의 구법(舊法)은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차질이 생겨 이제 1백 년이 지났으니 이 직책을 비록 혁파해도 되는데 그 후 정원이 점점 늘어서 여항(閭巷)의 무뢰배들을 뒤섞어 이 직임에 제수하였다. 위에서는 은총을 빌려주고 아래에서는 기탄하는 바가 없어 심하게는 남의 음사(陰私)를 적발하여 천청(天聽)에 참소하기도 하였으니 이는 황명(皇明)의 서창(西廠)과 고려(高麗) 때 별초군(別抄軍)과 다름이 없었다. 아! 후세에 임금이 된 자는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3월 17일 기축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인정문(仁政門)이 중건(重建)되었다고 도감(都監)에서 낙성을 고하니, 당상과 낭청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겨울철에 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수고로움이 심히 많았으므로 희름(餼廩) 이외에 유사로 하여금 쌀을 더 주게 하였다.

 

경상 감사 권혁(權爀)이 상소하여 관동(關東)의 공삼(貢蔘)에 대한 폐단을 진달하고 청하기를,
"도내의 속전 여결(續田餘結) 2천 2백 결(結) 영(零)을 공삼의 첨가(添價)로 주어 관동 백성을 위로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를 비국(備局)에 내려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안식(安栻)이 상소하여 양역(良役)의 폐단에 대해 말하니, 비답하기를,
"비국에 내려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9일 신묘

헌부 【장령 안식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송금(松禁)이 엄하지 않아 각각 계방(契房)이 있으니, 마땅히 경조(京兆)112)  로 하여금 조사해 엄금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부(五部)에서 10일마다 본부에 첩정(牒呈)하는 것이 근래에는 허식이 되어 대부분 엄폐(掩蔽)하고 있으니, 마땅히 오부의 관원을 신칙하여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0일 임진

집의 이광식(李光湜)이 상소하여 논핵하기를,
"익산 군수(益山郡守) 김필우(金必祐)는 어리석어 일을 알지 못해 정사를 하리(下吏)에게 맡기고 있으며, 강령 현감(康翎縣監) 조봉인(趙鳳仁)은 간사한 기생(妓生)이 정사에 간여하여 백성들이 그 해를 입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전라 감사(全羅監司) 정형복(鄭亨復)은 전최(殿最)를 재촉했으나 끝내 봉계(封啓)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엄히 책벌을 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되, 김필우·조봉인의 일은 더 자세히 살펴 처리하라."
하였다.

 

3월 23일 을미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병상(李秉常)이 상소하여 다시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재호(趙載浩)를 비국 부제조(備局副提調)로 삼았는데 좌의정 송인명이 천거한 것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이주진(李周鎭)이 말하기를,
"지난번 서연(書筵) 때에 동궁(東宮)께서 급암(汲黯)의 고지식함에 대해 물으시므로 신이 우직(愚直)하다고 대답하고, 또 고윤(高允)이 곧은 말로 대답한 일을 들어 앙문(仰問)하였더니, 동궁께서 답하기를, ‘고윤은 선(善)하고 태자(太子)가 잘못이다. 어찌 직고(直告)하여 사(赦)하기를 청하지 않았던 말인가?’라고 하셨으니, 예학(睿學)의 투철함이 이미 이와 같습니다."
하였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동궁의 강학(講學)은 오늘날 제일 급선무가 됩니다. 제왕(帝王)의 학문은 서민과 달라서 장구(章句)를 외우거나 읽는 데에 있지 않으니 보도(輔導)하는 책임은 오로지 빈료(賓僚)에게 있습니다. 일찍이 현묘조(顯廟朝)에 숙묘(肅廟)께서 동궁으로 계셨는데 이때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조복양(趙復陽)을 빈객(賓客)으로 천거해 5, 6년 동안 보도해 그 공이 매우 많습니다. 지금의 빈객 이재(李榟)는 이미 병이 있어 올라오기 어려운 형세이니, 그 대신 문학(文學)에 뛰어난 자를 가려 뽑아 오래 유임시켜 성심으로 개도(開導)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형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경기 심리사(京畿審理使) 조명리(趙明履)가 올린 옥안(獄案)을 읽으니, 임금이 대신에게 물어 경중을 분간해 작처(酌處)하였는데, 사수(死囚) 5인 가운데 감사(減死)하여 도배(島配)한 자가 4명이었다.

 

3월 25일 정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6일 무술

김상로(金尙魯)를 대사헌으로, 유우기(兪宇基)를 사간으로, 이하종(李夏宗)을 헌납으로, 이극록(李克祿)·강봉휴(姜鳳休)를 정언으로, 이종적(李宗迪)을 대사간으로, 김상철(金尙喆)을 수찬으로, 이창수(李昌壽)를 교리로, 권적(權𥛚)을 동지 경연사로, 원경하(元景夏)를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승지로 삼았다.

 

3월 27일 기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태묘(太廟)의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친행하고자 하였는데, 대신이 옥후(玉候)가 회복되지 않은 것으로써 그만두기를 매우 간절히 청하니, 억지로 따랐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밤늦게 몸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비록 억지로 중지하기로 했으나 하루 전에 마땅히 향(香)을 전하고, 인하여 그 뒤를 따라가 태묘에 나아가 몸소 참알(參謁)하여 예(禮)를 표하며, 제기(祭器)를 봉심(奉審)하고, 몸소 희생(犧牲)을 살피겠으며, 재실(齋室)에 머물다가 조금 늦게 회가(回駕)할 것이니, 의조(儀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만약 면복(冕服) 차림으로 희생을 살핀다면 전알(展謁)한 후 마땅히 바로 해야 하고, 만약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희생을 살핀다면 마땅히 소차(小次)로 들어가 옷을 바꿔 입은 후에 해야 하니, 고례(古禮)를 널리 상고하여 들여 춘조(春曹)113)  의 의주(儀註)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고례(古例)에 종묘(宗廟)에는 검은 희생(犧牲)을 썼었는데, 좌의정 송인명이 우리 나라는 희생으로 양(羊)을 계속 대기가 가장 어렵다고 우러러 아뢰니, 지금부터는 비록 순흑(純黑)이 아니더라도 예(例)에 의해 참작해 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3월 28일 경자

임금이 부제학 원경하(元景夏), 예조 참판 정익하(鄭益夏)를 양정합(養正閤)에서 불러 보았다. 원경하가 《대명집례(大明集禮)》 및 《주례(周禮)》를 상고하여 아뢰기를,
"희생을 살필 때에 《주례》에는 ‘태재(太宰)가 씻는 것을 살피고, 소종백(小宗伯)은 희생을 살피고 대종백(大宗伯)은 가마솥을 살핀다.’라고 하였고, 《당전(唐典)》에는, ‘늠희령(廩犧令)이 희생을 이끌어 오고 광록경(光祿卿)이 가마솥을 살핀다.’라고 하였으며, 《대명집례》에는 ‘태상 박사(太常博士)와 태상경(太常卿)이 이끌고 희생을 살피는 자리에 이르면 집사관(執事官)이 희생을 이끌고 주방(廚房)으로 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묻기를,
"소종백과 태상경은 지금의 어떤 직책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소종백은 지금의 예조 참판에 해당되고, 태상경은 지금의 봉상시 제조(奉常寺提調)에 해당됩니다."
하고, 원경하가 또 말하기를,
"희생을 살피는 복색(服色)을 황조(皇朝)에서는 혹 피변(皮弁)으로 혹은 통천관(通天冠)에 강사포(絳紗袍)로 하였고, 《주례》에는 선왕(先王)을 향사(享祀)하는 데에 곤복(袞服)과 면류관(冕旒冠) 차림이었는데 신들은 어느 예를 따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나라의 의문(儀文)은 황조의 예를 많이 썼으니, 제 소견으로는 《대명집례》를 따라야 마땅할 듯싶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늠희령은 오늘날 어떤 벼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아마 전생서(典牲署)의 관원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해당 관서의 제조(提調)가 희생을 이끌어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미 영(令)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낮은 관원인 듯싶습니다. 경(卿)과 영(令) 두 글자로 보건대 고하가 아주 다르니, 해당 관서의 장관(長官)으로 하여금 희생을 끌게 해야 좋을 듯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하교하기를,
"이번 전알(展謁)한 후에 희생을 살피는 것은 마땅히 그대로 면복 차림으로 행하겠다. 희생을 살피는 것은 고례(古禮)에 의하여 마땅히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행할 것이니, 의조(儀曹)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경하가 또 말하기를,
"이번 희생을 살피는 것은 매우 성대한 예절이니, 모든 의장(儀章)이 자연스레 예에 합치되었습니다. 또 지난날 황단(皇壇) 망위례(望位禮)는 신 역시 흠앙(欽仰)하였습니다."
하고, 인하여 진달하기를,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강구한 춘추 대의(春秋大義)가 날이 멀어 질수록 날로 잊혀지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송시열이 일찍이 숭정(崇禎)114)  의 어필(御筆)을 만동묘(萬東廟)에 걸었는데 지금 듣건대 사원(祠院)이 퇴락해 풍우를 가리지 못한다고 하니, 조정에서 마땅히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서원을 중수(重修)하고 면세전(免稅田)을 떼어 주도록 하였다. 원경하가 또 진달하기를,
"고 부제학 이단상(李端相)과 고 참판 송광연(宋光淵)의 자손을 녹용(錄用)하여 제사를 받들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따랐는데, 이단상은 문정공과 함께 대의(大義)를 강명(講明)하였고, 송광연은 갑술년115)   경화(更化)의 초기에 희빈(禧嬪)의 별궁(別宮) 의논을 배척했기 때문에 원경하가 언급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바로 송인명의 할아버지와 외조(外祖)였다. 교리 홍익삼(洪益三)이 이어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인쇄한 서적을 주어 서원 유생(儒生)들의 강습에 도움이 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양남(兩南)으로 하여금 인쇄해 주도록 명하였다.

 

3월 29일 신축

유성(流星)이 익성(翼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장령 최규태(崔逵泰)가 상소하기를,
"수령(守令)들이 탐묵(貪墨)한 자는 진급할 매개(媒介)가 되고, 청개(淸介)한 자는 버림을 당하며, 가혹한 관리가 음형(淫刑)을 하여 함부로 사람을 죽이니, 마땅히 양리(良吏)를 뽑아 쓰고 탐학한 관리를 내쳐야 합니다. 관동(關東)의 공삼(貢蔘)은 고르지 못한 폐단이 있으니, 마땅히 도신에게 분부하여 양전(量田)을 독촉하고 삼공(蔘貢)의 분정(分定)을 한결같이 결수(結數)에 따르게 해야 합니다. 황장목(黃膓木)의 금산(禁山)에 귀후서(歸厚署) 및 각영(各營)의 차인(差人)이 공문(公文)을 가지고 열읍(列邑)에 줄달아 많이 왕래하면서 함부로 베고 있으니, 마땅히 유사(攸司)에 신칙해 후일의 폐단을 막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3월 30일 임인

필단(匹緞) 50필(疋)을 경기 도신에게 주어 백성을 진구(賑救)하는 밑천에 보태게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