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계묘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 아래에서 나와 북쪽 하늘 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진하(任震夏)를 집의로, 홍익삼(洪益三)을 헌납으로, 유현장(柳顯章)을 지평으로, 정순검(鄭純儉)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2일 갑진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불러 보고 희생(犧牲)을 살피는 의주(儀註)를 읽으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지난해 대사례(大射禮) 후 사단(射壇)을 헐지 않은 것은 대개 뜻이 있어서였다. 이번 희생을 살핀 곳에도 작은 벽돌을 깔아 표시해 후일에 친히 임해 희생을 살피던 자리임을 알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황단 재전 소지(皇壇齋殿小識)를 내리면서 전(殿) 북쪽에 걸라고 명하고, 또 옛날의 어제(御製)인 사자교기(獅子橋記)도 마찬가지로 새겨 걸라고 명하였다.
4월 5일 정미
이수해(李壽海)·전명조(全命肇)를 장령으로, 한광조(韓光肇)를 지평으로, 윤득재(尹得載)를 헌납으로, 이훈(李塤)을 정언으로, 황경원(黃景源)을 부교리로, 유언호(兪彦好)를 부수찬으로, 김광세(金光世)를 승지로, 이종성(李宗城)을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병으로 해면을 빌었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경기 심리사(京畿審理使) 조명리(趙明履)의 별단(別單)을 바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명리가 지난번 양역(良役)의 일을 진달한 바가 있었는데, 내 생각에는 결역(結役)의 일 역시 청묘법(靑苗法)의 해(害)로 돌아갈까 염려된다. 호포(戶布)는 대동(大同)의 역(役)인데, 추판(秋判)116) 은 심지어 고려(高麗) 말기 쇠퇴할 때의 일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심하게 배척한 논의인 것이다. 고려는 공민왕(恭愍王) 때에 이르러 쇠퇴하였는데 어찌 호포를 말미암아서였겠는가? 지금 첫째의 의(義)는 수령(守令)을 가리는 것만한 것이 없으니 3백 60주에 만약 모두 제 사람을 얻는다면 민력(民力)이 저절로 펴지게 될 것이다."
하니, 형조 판서 이종성이 말하기를,
"비록 좋은 법과 정책이라 하더라도 먼저 위에서 기강이 선 연후에야 행할 수가 있습니다."
하고,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장횡거(張橫渠)117) 의 정전(井田) 제도가 매우 좋습니다. 만약 산골 고을 몇 곳에 인재(人才)를 가려 보내 먼저 시험하면 이웃 고을들이 다투어 그 법(法)을 취해 갈 것이니, 그렇게 되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양역(良役)·결역(結役)중 어느 것이 나은가?"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결포법(結布法)이 가장 근고(近古)에 시행한 것인데 다만 호부(豪富)한 집에서는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심리사(審理使)가 진달한 각 폐단 가운데에서 이천(利川) 등 열 고을의 진전(陳田)에서 세금을 거두는 것이 가장 심하니, 청컨대 가을을 기다려 양전(量田)을 행한다는 뜻을 미리 엄히 신칙해야 합니다. 조선(漕船)이 강으로 내려갈 때 양근(楊根)·여주(驪州)의 연안(沿岸) 백성들이 여울을 파는 역(役) 때문에 농사를 폐하기에 이르니, 참선(站船)에 참가해 싣는 일을 마땅히 신금(申禁)해야 합니다. 양성(陽城)과 파주(坡州) 등 네 고을은 노비(奴婢)가 매우 적어 사객(使客)을 접대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다른 고을의 사노비(寺奴婢)를 적당히 헤아려 획급해 주어야 합니다. 양정(良丁)이 헐한 역(役)에 투속(投屬)하는 폐단이 가장 심하니, 지평(砥平)의 수어둔아병보(守禦屯牙兵保) 및 충순위(忠順衛)에 멋대로 소속된 자는 당초 사천 환정(私賤換定)의 영(令)에 의해 모두 조사해 바로잡아야 합니다. 순천(順天)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실은 배가 남양(南陽)에 이르러 파선하여 감색(監色)과 사격(沙格) 등 13명이 8개월 동안 엄히 갇혀 있는데 옥바라지를 할 사람이 없습니다. 비록 연한이 차지 않았으나 별도로 심리사를 보낸 것이 이미 흠휼(欽恤)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원적지(原籍地)인 교하(交河)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증미(拯米)의 구포흠(舊逋欠) 가운데 가장 오래된 1년 조(條)를 역시 마땅히 탕감해야 합니다."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호남 심리사(湖南審理使) 조영국(趙榮國)이 복명(復命)하여 이종성이 호남의 옥안(獄案)을 올리니, 임금이 대신에게 물어 경중을 분간하여 재결하였다. 조영국이 말하기를,
"무장(茂長)의 죄인 임창호(林昌浩) 등 세 사람은 역적(逆賊) 박필몽(朴弼夢)과 교통한 정적(情迹)이 의심스러운데 한 달에 으레 세 번 추문(推問)해 일이 매우 마땅함을 잃었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엄히 조사해 다시 계문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조영국이 말하기를,
"각 고을의 속오군(束伍軍)이 전혀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급할 때 믿을 만한 것으로 산행 포수(山行砲手)만한 것이 없습니다. 비록 병자년118) 의 일로 말하더라도 유임(柳琳)의 김화(金化) 싸움은 오로지 청주(淸州)의 3백 명 산행 포수의 힘을 입은 것이니, 이로써도 그들이 정병(精兵)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도를 통틀어 계산하면 그 숫자 또한 적지 않으니, 사정청(査正廳)의 성책(成冊) 가운데에서 여러 고을의 산척(山尺)119) 을 한결같이 모두 기록해 역(役)을 침해하지 말게 해 단속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각사(各司)의 노비(奴婢)는 비록 참으로 도망하거나 죽었는데도 해당 관사에서 즉시 사고로 처리하지 않아 나이 1백 세가 된 자도 오히려 공물(貢物)을 받는 안(案)에 실려 있어 해마다 침징(侵徵)하는 해가 인족(隣族)에게 미치니, 이것이 어찌 왕정(王政)에서 차마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문안(文案)의 나이가 60이거나 명백히 죽은 자로 공문서에 근거할 수 있는 자는 한결같이 그 공안(貢案)에서 감제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운봉현(雲峰縣)의 이해는 잘 살폈으며, 파령(巴嶺)은 또한 어떠한가를 물으니, 조영국이 답하기를,
"사면이 높고 험준한데 고개에 세 길이 있어 함양(咸陽) 30리를 굽어보면 마치 우물물에 임해 보는 것 같으니 험준함이 비할 바 없습니다. 일신(一新)은 지리산(智異山)의 옆에 있는데 파령이 그 위를 차지하고 있어 전조(前朝)에서 일찍이 판관(判官)을 설치 했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영장(營將)을 일신에 두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일신은 예로부터 땅이 넓고 풍속이 사나워 거짓됨이 아주 심하고 무신년120) 이후 흉역(凶逆)이 자주 일어났으니, 별도로 진(鎭) 하나를 설치해야 나쁜 풍속을 누르고 뜻밖의 변란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의논하는 자들이, ‘운봉(雲峯)에 마땅히 영장(營將)을 설치하고, 남원(南原)에는 병사(兵使)를 두어야 하는데 아직껏 변통하지 않고 단지 운봉에 영장만 설치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남에 다른 폐단은 없는가?"
하니, 조영국이 말하기를,
"각 고을에서 무역(貿易)하는 물건을 이서(吏胥)들에게 징수하기 때문에 아전들의 곤궁함이 백성들의 곤궁함보다 심합니다."
하였다. 부제학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호남의 큰 폐단으로는 전정(田政)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전정이 문란하게 된 것은 오로지 은결(隱結)이 토호(土豪)에게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니, 이러므로 백성들이 백징(白徵)121) 의 폐단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교리 신위(申暐)가 경상도 감영[嶺營]으로 하여금 고 상신(相臣) 조익(趙翼)이 지은 《주서요류(朱書要類)》를 간행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송인명이 그의 할아버지 송광연(宋光淵)을 포증(褒贈)한 것을 사례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신의 할아비가 일찍이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의 소(疏)에 의해 형조 판서에 의망(擬望)되었으니, 신의 탕평(蕩平)은 실로 가학(家學)에서 말미암은 바요, 조문명(趙文命) 형제와 김약로(金若魯) 형제 역시 모두 선정(先正)의 연원(淵源)입니다."
하고, 원경하가 말하기를,
"선정은 바로 신의 고조(高祖) 원두추(元斗樞)의 사위인데, ‘붕당을 깬다[破朋黨]’는 세 글자는 본래 신의 가정의 견해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조징(趙徵)의 옥사 때 죄인의 초사(招辭)에 걸핏하면 탕평을 미워하는 말을 했었다. 탕평이란 본래 오 황극(五皇極)의 말이었는데, 지금은 동요(童謠)가 되어 버렸다. 경들 역시 가학(家學)이라 하는가?"
하니, 두 사람이 묵묵히 응답하지 못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탕평’이란 두 글자는 본디 기자(箕子)의 홍범(洪範)에서 나온 말이니 바로 성인(聖人)이 천하를 다스리는 대경(大經)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소인(小人)이 이것을 도둑질하여 겉으로는 양전(兩全)을 보이면서 안으로는 자기들의 사(私)를 이루었다. 또 임금의 뜻이 깊이 시비를 구별하지 않으려 함을 헤아려 때를 틈타 투합(投合)해 그 은총을 굳혔으니 나라 사람들이 분통해한 지 오래였다. 조징(趙徵) 같은 무리가 술에 취해 한 미친 말은 본디 죽어야 할 도리이지만 역시 여론이 일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 송인명은 대신(大臣)으로서 간사하게 속이고, 윤경하는 재신(宰臣)으로서 아부하느라 가학이란 말을 연석(筵席)에서까지 발설했는데 주상(主上)께서 영명(英明)하여 한 마디로 타파시켰지만 아깝게도 끝내 물리치지는 못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6책 61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179면
【분류】행정(行政) / 재정(財政) / 역사(歷史)
[註 116] 추판(秋判) : 형조 판서.[註 117] 장횡거(張橫渠) : 송(宋)나라의 학자 장재(張載).[註 118] 병자년 : 1636 인조 14년.[註 119] 산척(山尺) : 사냥이나 약초를 캐는 천인.[註 120]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121] 백징(白徵) : 납세 의무가 없는 사람에게 세금을 거두는 일.
사신은 말한다. ‘탕평’이란 두 글자는 본디 기자(箕子)의 홍범(洪範)에서 나온 말이니 바로 성인(聖人)이 천하를 다스리는 대경(大經)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소인(小人)이 이것을 도둑질하여 겉으로는 양전(兩全)을 보이면서 안으로는 자기들의 사(私)를 이루었다. 또 임금의 뜻이 깊이 시비를 구별하지 않으려 함을 헤아려 때를 틈타 투합(投合)해 그 은총을 굳혔으니 나라 사람들이 분통해한 지 오래였다. 조징(趙徵) 같은 무리가 술에 취해 한 미친 말은 본디 죽어야 할 도리이지만 역시 여론이 일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 송인명은 대신(大臣)으로서 간사하게 속이고, 윤경하는 재신(宰臣)으로서 아부하느라 가학이란 말을 연석(筵席)에서까지 발설했는데 주상(主上)께서 영명(英明)하여 한 마디로 타파시켰지만 아깝게도 끝내 물리치지는 못하였다.
헌부 【집의(執義) 임진하(任震夏)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주안(周安)을 감사(減死)하여 도배(島配)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는데, 주안은 바로 호남의 살옥(殺獄) 죄인으로 작처한 자였다.
4월 6일 무신
문학(文學) 홍봉한(洪鳳漢)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4월 7일 기유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희생(犧牲)을 살폈는데, 친히 임하여 희생을 살피는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의 관직을 특별히 파하였다. 임금이 친압(親押)을 마치고 향축(香祝)을 받들어 친히 헌관(獻官)에게 전하고, 인하여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태묘에 나아가 면복(冕服)으로 갈아입고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봉심(奉審)과 그릇 살피는 것을 의례(儀禮)대로 행하고, 그 다음에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서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갈아입고 희생을 살피는 자리에 나아가 남향(南向)하고 서니, 장생령(掌牲令)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희생을 이끌고 동쪽으로 조금 나와 손을 들어 살졌다고 고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여러 대축(大祝)이 각기 순행하여 살펴보면서 서쪽을 향해 한 바퀴 돌면서 손을 들어 충실하다고 고하고 모두 자리로 돌아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소가 살지지 못하였다."
하니, 예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말하기를,
"살지지 않았으면 물리게 하리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의 직책은 희생을 살피는 데 있지 희생을 받는 데 있지 않다."
하였다. 헌관 송인명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검은 소는 원래 몸집이 큰 것이 없으니, 몸집은 비록 살지지 않았으나 깨끗하면 쓸 수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번의 이 예(禮)는 관첨(觀瞻)하기 위한 것이 아닌데 친히 살피는 것이 이러하니, 섭행(攝行)은 알 수 있는 것이다. 대관(大官)이라 하여 용서해서는 안 되니, 해당 헌관을 파직하고, 해당 예조의 당상과, 해당 관서의 제조(提調)는 삭직(削職)하고, 소를 이끌고 와 살졌다고 고하여 면전에서 임금을 속인 장생령(掌牲令)은 빨리 도배(島配)의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처분이 너무 지나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으면서 대체(大體)를 모른다고 꾸짖고 예차(預差) 헌관(獻官)을 독촉해 입재(入齋)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듣건대, 예차 헌관이 재숙(齋宿)하지 않는다고 하니, 내가 친행(親行)하겠다."
하니, 여러 유신(儒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예의가 많이 군박(窘迫)하며, 또 예차 헌관이 비록 재숙하지는 않았으나 집에 사제(私祭)가 있어 이미 치재(致齋)하였습니다."
하며, 우러러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재숙함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고, 드디어 친행을 정지하고 인하여 지금 이후부터 제관(祭官)은 예차·실차(實差)를 물론하고 모두 재숙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 섭행할 때의 대축(大祝)은 대향(大享)이나 삭망(朔望)을 물론하고,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낸 사람이 아니면 차임해 채우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유사(有司)가 경비가 부족하니, 전생서(典牲署)의 희생에 대한 미두(米豆)를 줄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하교하기를,
"제향에 쓸 희생의 사료를 줄였다는 말을 이웃 나라에 들리게 할 수는 없으니 복구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난도(鑾刀)가 《오례의(五禮儀)》에 보이는데 폐지하고 쓰지 않으니 지금부터는 예(禮)대로 만들어 쓰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장차 환궁하면서 친히 시(詩) 한 수(首)를 지어 망묘루(望廟樓)에 걸었는데 시 가운데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애타는 심정(心情)을 말하였으니, 효사(孝思)의 돈독함이 이와 같았다.
4월 8일 경술
봉조하(奉朝賀) 이의현(李宜顯)이 졸하였다. 의현은 이세백(李世白)의 아들로서 문학(文學)을 좋아하고 청검(淸儉)을 스스로 지녀 삼조(三朝)를 두루 섬겨 지위가 영의정[上相]에 이르렀는데 비록 경세 제민(經世濟民)의 재능은 없었으나 어려운 때에 홀로 청의(淸議)를 지켜 선비들의 깊은 존경을 받았으니, 임금이 이 때문에 중시하였다. 졸하기에 이르러 임금이 애도하고 아깝게 여겼다.
4월 14일 병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관동 심리사(關東審理使) 구택규(具宅奎)가 복명(復命)하고, 이어 관동의 지도(地圖)를 올리고서 고미탄(古味灘)과 영풍(永豊), 방장(防墻) 등의 형승(形勝)을 갖추 진달하고, 철원(鐵原)에 방어사(防禦使)를, 방장에 첨사(僉使)를 설치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관동(關東)의 민폐(民弊)는 양전(量田)이 급합니다."
하였다. 이조 참판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만약 삼남(三南)의 전답 기준으로 관동을 척량(尺量)한다면 경작하는 백성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상중(上中)·상상(上上)의 전답이 없는가?"
하니, 구택규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부제학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관동의 화전(火田) 경작은 실로 깊은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산 중턱까지 개간하였는데 지금은 꼭대기에까지 미쳐 산이 무너지고 산사태가 나며 강이 점점 얕아져 근래에는 조운(漕運)하면서 여울을 파내야 배가 갈 수 있으니, 마땅히 화전(火田)의 금법을 신칙해 나무를 길러야 합니다."
하였다. 구택규가 또 말하기를,
"황장목(黃腸木)을 몰래 베는 폐단을 엄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인하여 형조 참의 조영로(趙榮魯)에게 관동(關東)의 옥안(獄案)을 읽도록 명하고 임금이 대신의 의논을 물어 차등을 두어 재결(裁決)하였다.
김재로(金在魯)를 영의정으로, 송인명(宋寅明)을 좌의정으로 중복(重卜)하고, 안집(安𠍱)을 집의로, 이규휘(李奎徽)를 장령으로, 이광직(李光溭)을 지평으로, 홍정명(洪廷命)을 헌납으로, 홍중효(洪重孝)를 정언으로, 조재덕(趙載德)을 부수찬으로, 이춘제(李春躋)를 형조 판서로, 서종옥(徐宗玉)을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삼았다.
집의 신사관(申思觀)이 상소하기를,
"광주 부윤(廣州府尹) 홍봉한(洪鳳漢)은 이력(履歷)이 없는데도 갑자기 탁용(擢用)했으니 덕(德)으로써 사람을 사랑함이 아닌데, 묘당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홍봉한은 초방(椒房)의 어버이로서 문학(文學)에서 이 관직에 탁배되었으니, 여론의 좋아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4월 19일 신유
송능상(宋能相)을 장령으로, 김희로(金希魯)를 지의금부사로, 민응수(閔應洙)를 판윤으로 삼았다.
4월 21일 계해
윤봉구(尹鳳九)를 집의로, 오언유(吳彦儒)를 지평으로, 김상복(金相福)을 헌납으로, 남혜로(南惠老)를 정언으로, 홍익삼(洪益三)을 교리로, 홍중효(洪重孝)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금부 도사(禁府都事) 박명양(朴鳴陽)이 공홍 수사(公洪水使) 윤광신(尹光莘)이 나포(拿捕)에 응하지 않았음을 급히 아뢰니 임금이 진노하여 장차 군율(軍律)을 쓰려고 대신(大臣)과 옥당(玉堂)에게 물었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기를,
"윤광신이 미친 것이 아니고 일부러 했으면 이는 반신(叛臣)이니,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그 목을 베어 오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미친 자는 비록 사죄(死罪)를 범하더라도 율(律)에 죽음을 용서하는 조문이 있으니 별도로 처리함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상소하기를,
"처음에 만약 선전관을 보내어 목을 베어 왔으면 그만이겠지만 그러지 않았으니 반드시 잡아 오기를 기다려 왕명(王命)이 행해지도록 한 후에 천천히 의논해서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부제학 원경하(元景夏)는 상소하기를,
"옛날 〈송나라 사람〉 장영(張詠)이 성도(成都)를 진무(鎭撫)할 때 어린 아이가 그의 아비를 때리는 것을 보고서 장영이 군중을 모아 놓고 죽이면서 말하기를, ‘어려서 이와 같으니, 더군다나 장성해서는 어찌 윤리를 어지럽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윤광신은 시례(詩禮)의 가문에서 생장하여 어려서부터 익혔으니 성도의 어린 아이와는 다릅니다."
하니, 임금이 잡아 올려 엄중히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4월 22일 갑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원량(元良)이 일찍이 서연(書筵)에서 강관(講官)과 더불어 〈수(隋)나라 사람〉 우홍(牛弘)의 일을 논했는데 그 말이 너그러웠으니, 참으로 대중을 거느리는 도리를 얻었다. 내가 참소(譖訴)를 미워하는 시(詩)를 지어 원량에게 보이려 했으나 하지 못하였다. 대개 혼군(昏君)은 참소를 듣고 미혹되기가 쉽고 중주(中主)는 참소를 듣고 편벽되기가 쉬운데, 저들이 근사한 말로써 내 호오(好惡)의 마음을 떠보기 때문에 한번 참소가 들어온 후에는 더욱 깨닫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찬탄하였다.
4월 25일 정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어영 대장(御營大將) 박문수(朴文秀)를 보내어 강도(江都)를 간심(看審)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복명하여 형편을 두루 진달하기를,
"전에 비록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 치욕을 당했지만 만약 한때의 적을 피하려면 남한 산성이 더 좋으며, 만약 지구책(持久策)을 쓰려면 강도가 조금 낫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이미 살펴 보았으니 방략(方略)을 지획(指畫)함이 옳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천시(天時)는 지리(地理)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백성을 보호하는 도리를 생각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너진 성첩(城堞)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50여 리의 성 가운데 단지 4리 남짓만 무너졌습니다."
하고,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김시혁(金始㷜)이 70세가 된 늙은 신하로서 이 중대한 역사를 완료했으니, 비록 조금 무너졌다 하더라도 그 정성이 가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은 어떠한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바로 금성 탕지(金城湯池)입니다. 비록 북한 산성과 남한 산성을 지킨다 하더라도 도성(都城)은 버릴 수 없습니다. 만승(萬乘)의 나라로서 어찌 한 성을 지켜 보장(保障)의 장소를 두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문수 산성(文殊山城)을 만약 수호한다면 강도의 외원(外援)이 되겠는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통진(通津)을 독진(獨鎭)으로 삼아 문수 산성을 수호하게 하여 혹 위급한 일이 있게 되더라도 그대로 성 안으로 들어간다면 강도를 바라볼 때 보이지 않는 곳이 없으니 실로 안팎이 서로 호응하는 형세가 있겠습니다."
하였다.
4월 29일 신미
우박(雨雹)이 내렸는데, 모양이 콩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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