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임신
경상도 합천(陜川)에 눈이 내려 한 자나 쌓였다.
이광익(李光瀷)을 정언으로, 윤득재(尹得載)를 교리로, 조재민(趙載敏)을 부교리로 삼았다.
5월 2일 계유
부교리 신위(申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윤광신(尹光莘)이 왕명을 거역하고 끝내 나포(拿捕)에 응하지 않았으니, 실로 나라에서 일찍이 듣지 못한 큰 변괴입니다. 이제 만약 미쳤다고 핑계해 사죄(死罪)를 용서한다면, 혹시 번진(藩鎭)에서 발호(跋扈)하는 신하가 있어 미쳤다고 사칭(詐稱)하면서 뜻이 방명(方命)에 그치지 않더라도 또한 장차 죽이지 않겠습니까? 옛날 마속(馬謖)이 한 번 군율(軍律)을 어기자 제갈양(諸葛亮)이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목을 벤 것은 사람이 아깝지 않아서가 아니라 법을 굽힐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윤광신의 일이 있은 이래 온 나라 사람이 놀라고 분해합니다. 삼척(三尺)이 매우 엄한데 가로막아 비호하는 말이 앞뒤로 번갈아 나오니, 신은 그윽이 통분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선전관(宣傳官)이 그의 누워 있는 곳에서 부신(符信)을 빼앗지 못하고 밖에서 전체(傳替)했으니 크게 법례(法例)를 잃었습니다. 새 수사(水使) 이언상(李彦祥)은 영(營) 안으로 달려 들어가 장월(仗鉞)을 교귀(交龜)122) 하지 못하고 유서(諭書)를 밖에서 묵게 하여 체통을 크게 손상시켰으니, 모두 마땅히 견책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윤광신은 지금 바야흐로 엄중히 국문(鞫問)하고 있으니, 해당되는 율이 있을 것이다. 선전관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고, 이언상은 청한 바가 지나치니 중추(重推)하도록 하라. 대신의 아뢴 바는 나라를 위해 인재를 아낀 것인데, 네 말이 지나치다."
하였다.
5월 3일 갑술
조영국(趙榮國)을 승지로, 윤득재(尹得載)를 헌납으로, 이봉령(李鳳齡)을 장령으로, 김상구(金尙耉)·정한규(鄭漢奎)를 지평으로, 송창명(宋昌明)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금오 당상(金吾堂上)을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수신(帥臣)이 명을 거역한 일은 고금에 없던 바인데 어찌 참으로 미쳤는지의 여부를 묻겠는가? 붙잡아 온 것은 참으로 미쳤는지 미친 것이 아닌지를 구별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처음에 이미 명을 어겨 나포에 응하지 않았고, 이제 또 공사(供辭)하기를 거역했으니, 나라의 기강에 있어서 더는 관용할 수 없다. 여러 신하에게 물었는데, 모든 사람의 의논이 같았으니, 윤광신은 왕부(王府)로 하여금 빨리 국법을 바루게 하라."
하였다.
5월 4일 을해
윤득재(尹得載)를 교리로, 김상복(金相福)을 부교리로 삼았다.
5월 6일 정축
구택규(具宅奎)·남태량(南泰良)·서명형(徐命珩)·신사건(申思建)을 승지로, 홍정명(洪廷命)을 장령으로, 이태중(李台重)을 부응교로, 유언호(兪彦好)를 수찬으로, 송징계(宋徵啓)를 대사간으로, 원경순(元景淳)을 사간으로, 유건(柳謇)을 정언으로, 홍정보(洪正輔)·유현장(柳顯章)을 지평으로, 조돈(趙暾)을 헌납으로 삼았다.
우의정 조현명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윤광신이 미치지 않았으면 반드시 죽여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용서해 죽이지 않음이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해롭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여 다시 윤광신을 죽여야 하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영의정 김재로와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윤광신이 거짓으로 미친 체하는 듯하니, 죽이고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는데, 유독 조현명만은 참으로 미쳤다는 이유로 살려야 한다는 의논을 힘써 주장했다. 임금이 말하기를,
"두 정승의 말이 모두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다."
하고, 인하여 다시 엄중히 신문하여 자복을 받아내라고 명하였는데, 마침내 장(杖)을 맞다 죽었다.
임금이 강계부(江界府)에서 참나무 곤장(棍杖)으로 국경(國境)을 범한 사람을 친다는 말을 들고 하교하기를,
"누가 중곤(重棍)을 만들어 나의 변방 백성을 상하게 하는가? 빨리 없애도록 명하라. 아! 한때 사납게 때리는 것을 시원하게 여겨 옥석(玉石)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죽이니, 이것이 어찌 왕정(王政)의 할 바이겠는가? 마땅히 남장(濫杖)의 율을 시행하도록 해당 도에 분부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을 소견하였다. 경상도 심리사(慶尙道審理使) 김상적(金尙迪)이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영남(嶺南)의 폐단을 물었다. 김상적이 대답하기를,
"영남은 평소 사대부(士大夫)의 고장이라 일컬어져 서민(庶民)들이 양반(兩班)을 본받기 때문에 전에는 유현(儒賢)이 배출되고 풍속이 보고 느낄 만하였습니다. 지금은 인심이 점점 경박해져서 점차 옛날만 못하게 되고 토호(土豪)들의 향전(鄕戰)123) 이 고질적인 폐단을 이루었으며, 글을 읽는 사람이 없습니다. 백성들의 폐단으로 말하자면 사노(寺奴)·해부(海夫)·승역(僧役)이 가장 괴로운 것으로 만약 지금에 이르러 바로잡지 않는다면 민심(民心)이 흩어지기 쉬울 것이니, 참으로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신이 서계(書啓)에서 자세히 사정을 진달하였는데, 전총(田摠)·군총(軍摠)·잡역(雜役) 등을 변통하는 일은 별도로 책자(冊子)를 만들어 묘당으로 보냈습니다. 도내의 전결(田結)을 작량(酌量)하여 약간의 돈을 받아들이면 잡역을 모조리 파할 수 있고 역을 고르게 할 수 있습니다. 궁방(宮房)의 절수(折授)에 이르러서는 모두 위에서 그대로 두거나 감하거나를 특교(特敎)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기 심리사는 호포(戶布)로 하고자 하는데 이제 이 별단(別單)은 결포(結布)를 위주로 하였다."
하니,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결포가 과연 낫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살옥(殺獄)은 얼마나 되며 살린 자는 얼마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살옥은 12인이고 전활(全活)이 2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리사의 효과가 좋다. 만약 한두 이론(異論)을 듣고 심리를 행하지 않았더라면 죄수가 적체되어 억울하게 죽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될지 몰랐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옥장(獄狀)을 대신에게 가져가 상의하고 등대(登對)할 때에 다시 아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얼마 전에 영상·우상은 들어오라는 일을 하교하셨으니, 사관(史官)이 마땅히 와서 성상의 유시(諭示)를 전달해야 하는데도 단지 하리(下吏)에게 소보(小報)만 보냈으니 사체가 마침내 구차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만약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라는 하교가 없으면 정원에서 반드시 계품(啓稟)하여 사관을 보냈는데, 수삼 년 이래로 이 규례가 폐지되었습니다. 신이 감히 스스로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조정의 체모가 이와 같아서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정원에서 살피지 못한 것이니, 해당 승지를 중추(重推)하고, 이후에는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게 하라."
하였다.
5월 10일 신사
달이 좌각성(左角星)을 침범하였다.
5월 11일 임오
전라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영광군(靈光郡)의 불에 타 죽은 사람 8명에게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5월 12일 계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공홍도 심리사(公洪道審理使) 한익모(韓翼謨)가 복명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남 어사는 결포(結布)를 행하고자 하고, 호서 어사는 호포(戶布)를 행하려고 하여 뜻이 각기 다르다."
하니, 한익모가 말하기를,
"대개 양역(良役)의 폐단은 호서가 가장 심하여 호포의 설이 비록 진부(陳腐)한 것 같으나 폐단을 구제하는 도리에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심리 옥안(審理獄案)을 읽으라 명하고 대신의 의논을 물어 경중을 분간하여 작처하였다. 병조 판서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이제 한익모가 진달한 바를 듣건대 결성(結城)의 백성들이 사당(祠堂)을 세워 이두삼(李斗三)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데, 이두삼은 이미 적(賊)의 관문(關文)을 전하여 정법(正法)되었으니 어찌 감히 제사를 지내겠습니까? 지방관(地方官) 역시 금단(禁斷)하지 않았으니 일이 매우 놀랍고 해괴합니다. 제일 먼저 창도(倡導)한 자를 형추(刑推)하여 정배(定配)하고, 해당 지방관은 잡아다 처리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따랐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이러한 일을 방지하는 것은 엄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모든 역옥(逆獄)에 관계된 것으로 상언(上言)하느라 격고(擊鼓)한 자는 비록 해부(該府)에 내리더라도 해부에서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하지 말고, 정원 역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제주 목사(濟州牧使) 윤식(尹植)이 장계하여 논하기를, ‘본도(本島)의 유품(儒品)·가솔(假率) 등의 명색(名色)으로 고강(考講) 시사(試射)에서 떨어진 자가 있어 기병(騎兵)·보병(步兵)으로 내려 충정(充定)하였더니, 이 무리들이 노여워하여 깊은 밤에 객사(客舍)의 전패(殿牌)를 봉안한 곳에 모여 곡(哭)을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거조가 매우 패악하여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여서 곡한 수범(首犯) 세 사람을 두 차례 형추하여 다른 도로 정배(定配)하고, 유품·가솔로 사강(射講)에서 떨어진 자는 모조리 결원(缺員)에 보충하여야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본도에 흉년이 들어 관수(官需)가 부족하니, 연해(沿海) 고을에 저장해 둔 쌀 2백 석(石)을 또한 장청(狀請)에 따라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지난번 관상감(觀象監)에서 연경(燕京)에서 무역(貿易)해 온 책자(冊子) 및 측후기(測候器)·천리경(千里鏡)·지도(地圖) 등을 안으로 들여간 후, 책자는 반질(半帙)만 다시 내려 보내고 반질은 내려 보내지 않았으며, 천리경 및 지도, 측후기는 각기 쓸 곳이 있는데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규일영(窺日影)이란 것이 비록 일식(日食)을 살펴보는 데는 공효가 있으나 곧바로 일광(日光)을 보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채경(蔡京)은 해를 보고도 눈을 깜박거리지 않았으니 그가 소인(小人)임을 알겠는데 이제 이름하기를 ‘규일영’이라 하면 좋지 못한 무리들이 위를 엿보는 기상(氣象)이 되는 것이므로 이미 명하여 깨버렸고, 책과 지도도 역시 세초(洗草)해 버렸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찬탄(贊歎)하였다.
5월 13일 갑신
임금이 대신 및 형조 당상과 영남 심리사 김상적(金尙迪)을 인견하였다. 김상적이 아뢰기를,
"영남은 다른 도와 다름이 있어 사대부(士大夫)의 부고(府庫)여서 여러 현인이 배출되어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지금까지 애연(藹然)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년에는 점차 옛날과 같지 않아져서 인심이 함닉(陷溺)되고 사대부가 게으름에 빠졌으니 실로 한심스럽습니다. 학문하는 선비 역시 따라서 전혀 없게 되어 거의 무무(貿貿)한 고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등과(登科)하여 엄체(淹滯)되고 있는 사람 가운데에서 재능에 따라 발탁해 등용하면 흥기(興起)시키는 한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남 사람은 백의(白衣)를 입고 재를 넘는 자가 없다고 하는데 지금 역시 그러한가?"
하니, 김상적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문신(文臣)이 그러하다면 무신(武臣)도 알 만하다."
하니, 김상적이 말하기를,
"무사들 역시 모두 등용되지 못하기 때문에 영남 사람들의 소원은 일개 진사(進士)가 되기에 그치는 데 불과합니다. 승려(僧侶)의 폐단 역시 갈래인데, 승려 역시 인류(人類)이니, 인정상 어찌 아내를 두고 자녀를 낳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들 하나를 낳으면 백 가지 역이 거듭 이르기 때문에 거개가 깊은 산속으로 도망해 들어가 승도(僧徒)가 되기를 원해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는 탄식이 있으니 팔도가 모두 그렇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옛 예(例)에 의해 양민(良民)으로서 승려가 된 자는 도첩(度牒)을 허락해 주어 출입할 때에 부험(符驗)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는데 그렇게 하면 조금의 폐단을 구제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인하여 심리 옥안을 가져다 보고 경중을 분간하여 작처하였다.
5월 14일 을유
이익정(李益炡)을 대사성으로, 이철보(李喆補)를 대사간으로, 송창명(宋昌明)을 사간으로, 윤동준(尹東浚)을 헌납으로, 김이만(金履萬)을 장령으로, 임경관(任鏡觀)을 정언으로 삼았다.
5월 15일 병술
악기 조성청(樂器造成廳)에서 악기를 올리니 당상과 낭청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임금이 대신과 형조 당상 및 호남 심리사 조영국(趙榮國)을 인견하였다. 조영국이 아뢰기를,
"일신현(一新縣) 진사(進士) 이이기(李頤期)는 일찍이 경술년124) 연간에 함부로 승군(僧軍)을 징발한 일 때문에 병사(兵使)의 장문(狀聞)으로 인해 군율(軍律)을 시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이기가 진전(陳田)을 개간하기 위하여 승도(僧徒)와 연군(烟軍)을 빌린 것은 참으로 죄가 있다고 하겠으나 효시(梟示)까지 한 것은 아주 과중(過中)하였습니다. 이이기는 사인(士人)이니 이제 비록 신리(伸理)하려 해도 실로 시행할 만한 법이 없습니다. 만약 성상께서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려 주시어 단적(丹籍)의 억울함을 씻어 주시면 이 역시 한 도(道)의 인심을 위로하기에 족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그 억울함을 알았으니, 특별히 그의 죄명(罪名)을 씻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인하여 조영국에게 살옥(殺獄)의 일을 진달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 한(漢)나라에서는 동해(東海)의 한 지어미가 억울함을 품으니 3년 동안 가물었고, 옛사람 역시 ‘필부(匹婦)가 억울함을 호소하면 5월에 서리가 내린다.’라고 하였다. 이번에 심리하라는 명은 대개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호남 심리사가 갓 돌아오자 때 아닌 눈·서리가 내렸다는 말을 들었다. 옥사를 비록 이미 심리하였으나 혹 흑백(黑白)이 서로 뒤섞인 것이 없겠는가? 깊은 억울함을 씻지 못해서인가? 밤중에 잠이 오지 않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옛날 선조(先朝)에서는 삼복(三覆)한 후 다시 조사하여 아뢰라고 하교하시어 몇 사람을 살리는 일까지 있었다. 선조의 뜻을 계술(繼述)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범연히 다룰 수가 있겠는가? 심리사는 본도의 현재 죄수의 총안(總案)을 가지고 입시하여 다시 품하도록 하라."
하였다. 인하여 유신(儒臣)을 불러 강목(綱目)을 강하게 하였다.
교리(校理) 홍익삼(洪益三)이 말하기를,
"진(晉)나라 무제(武帝)가 처음으로 간관(諫官)을 두었는데 부현(傅玄)의 상소가 능히 현인을 나오게 하고 간사한 자를 물러가게 했으며, 절실한 말을 많이 진달하였습니다. 부현은 칭찬할 만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가 대각(臺閣)에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역시 그 관(官)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다만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이며, 어찌 그런 사람이 없겠습니까? 실로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대개 말이 재상(宰相)에게 관계되면 경알(傾軋)한다고 지목하고, 말이 전관(銓官)에게 미치면 고감(敲撼)한다고 배척하니, 이렇게 하는데 관사(官師)가 서로 규찰(規察)하는 것을 누가 하겠습니까? 성상께서 만약 언로를 활짝 열어 곧은 기절을 너그러이 용납하시면 사람들이 반드시 스스로 힘쓸 것이니, 이는 오직 어떻게 인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전후에 말로써 죄를 얻는 자에게 특별히 널리 탕척하는 은전을 쓰시면 실로 언로를 여는 한 단서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교리 윤득재(尹得載)가 말하기를,
"호남 도신(道臣)의 장계 가운데 서리와 눈이 내린 재변이 아주 마음에 놀랍습니다. 이번에 팔도에 심리사를 보낸 것은 오로지 재변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돌보려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인데도 천재(天災)가 아직껏 이와 같습니다. 재변을 멈추는 방도는 오직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 있으니 임금의 마음은 큰 근본이요 정령(政令)과 형옥(刑獄)은 말단이니, 더욱 경척(警惕)을 가하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召見)하였는데, 해서 심리사(海西審理使) 남태량(南泰良)이 함께 들어갔다. 임금이 형조 판서 이춘제(李春躋)에게 옥안(獄案)을 읽기를 명해 경중을 분간해 작처하고, 인하여 백성들의 폐단을 물었다. 남태량이 말하기를,
"각 고을에서 상납하는 상정미(詳定米)를 돈으로 바꾸는 폐해가 가장 크니, 지금부터는 풍흉(豐凶)을 물론하고 한결같이 시장(市場)의 값을 따라 돈으로 만들면 거의 해서 백성을 보존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군수고(軍需庫)에서 식리(殖利)하는 폐단과 아병(牙兵)이 번을 드는 폐단 및 삼가(蔘價)를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에 이르러서는 이미 도신과 상의하여 혁파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번에 심리사를 보낸 뜻은 대개 백성을 위한 것이었는데, 절의(節義)를 표장(表章)하는 것 역시 왕정(王政)의 큰 것이다. 봉산(鳳山)의 박봉제(朴奉齊)는 비단 효성(孝誠)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국휼(國恤) 때 행소(行素)하여 그 충성을 볼 수 있으니 비록 《속삼강록(續三綱錄)》에 올리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듣건대 나이가 80세에 가깝다고 하니, 즉시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라. 신천(信川) 김중헌(金重憲)은 무신년125) 에 절의(節義)를 세운 것과 서흥(瑞興) 주상렴(朱尙廉)의 9세의 효행(孝行)과 문화(文化) 곽조이(郭召史)의 남편을 위한 절개는 모두 실적(實績)이 있으니 다 정려(旌閭)하여 풍교(風敎)를 세우고 세상을 격려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부사직(副司直) 원경하(元景夏)가 아뢰기를,
"지난번 흰 무지개의 변고 때 신이 인재(人才)를 거두어 쓰는 것으로써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삼아야 한다고 우러러 진달하였는데, 오늘날 사람을 쓰는 데에 세 가지 폐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당론(黨論)에 국한되는 것이요, 하나는 이력(履歷)에 국한되는 것이며, 하나는 문지(門地)에 국한되는 것이니,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이미 가망이 없고 진발(振拔)하여 용동(聳動)시키는 것 역시 그 길이 없습니다. 옛날 명(明)나라 장거정(張居正)이 직방 병풍(職方屛風)을 신종(神宗)에게 바쳤는데 왼쪽 3면에는 문관(文官)의 성명과 이력을 쓰고, 가운데 3면에는 군국(郡國)의 산천을 그렸으며, 오른쪽 6면에는 무관(武官)의 이력을 썼었습니다. 지금 역시 이에 의해서 관안(官案)을 추려 써서 살피시는 데 대비함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대사헌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비록 양남(兩南)으로 말하더라도 명현(名賢)은 영남(嶺南)에서 많이 나오고, 충절(忠節)은 호남(湖南)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지금은 그 한 도 안에 소년(少年) 때 등과(登科)하여 머리가 셀 때까지 헛되이 늙어 가는 자가 십중 팔구나 됩니다. 문신(文臣)이 이와 같으니 음관(蔭官)과 무신(武臣)이야 어찌 논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 역시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는 한 단서가 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양남은 바로 문헌(文獻)의 고장인데 침체(沈滯)된 자가 이처럼 많으니, 별도로 조용(調用)해야 하겠다. 당(唐)나라 때에는 기둥에 양사(良史)의 이름을 써붙였고, 우리 조정도 옛날에는 역시 대주첩(代柱帖)이 있었다. 요순(堯舜)을 본받으려 하면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 양전(兩銓)으로 하여금 문관·음관·무관의 전함(前啣)을 쓰고 일찍이 지낸 직명과 작산(作散)한 연·월, 경향(京鄕)의 거주(居住)를 주(註)로 달아 수정해서 들이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근래에 시기(時氣)가 상도(常道)에 어긋나고 있으니 어찌 청대(靑臺)126) 의 보고와 여러 도의 계문을 기다리겠는가? 더군다나 금년에는 한여름의 기후가 서늘한 가을과 다름이 없으니 마음이 매우 근심스럽다. 지난번 입시(入侍)에서 이미 유시하였는데 양호(兩湖)·관동(關東)에 서리가 내린 후 영남(嶺南)에서 또 눈이 한 자나 되게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남도(南道)가 이러하니 북관(北關)은 알 만하다. 아! 박덕(薄德)한 내가 임어하여 덕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은혜가 아래에 내리지 못했으니 마음에 근심이 되었다. 이에 제도(諸道)를 심리(審理)하라고 명하였는데 심리란 이름이 하나의 관첨(觀瞻)이 될까 두려운 가운데에 부끄러움을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아! 묘당(廟堂)의 여러 신하들은, ‘위에 있는 자가 바야흐로 정섭(靜攝)하고 있어 분려(奮勵)하지 못한다.’라고 말하지 말고, 나의 두려워하는 뜻을 본받아 부지런히 강구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하라. 제도의 심리(審理)의 계문(啓聞)을 한 구석방에 묶어서 방치하지 말고 강구해 확정을 지어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김상로(金尙魯)를 도승지로, 조운규(趙雲逵)를 부수찬으로, 오수채(吳遂采)를 대사간으로, 이광식(李光湜)을 사간으로, 정석오(鄭錫五)를 호조 판서로, 황경원(黃景源)을 부교리로,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김시형(金始炯)을 판의금부사로, 조재호(趙載浩)를 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로 삼았다.
5월 18일 기축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5월 19일 경인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첫 번째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5월 20일 신묘
주강을 행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병상(李秉常)이 상소하여 거듭 치사(致仕)를 청하니, 특별히 허락하였다.
황해도 감영(監營)·병영(兵營)의 은(銀) 1천 냥과 전(錢) 3천 냥을 수영(水營)에 획급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보다 앞서 박문수(朴文秀)가 수사(水使)가 되어, 해영(該營)에 전혀 재곡(財穀)이 없음을 비국에 논보(論報)하고 감영·병영의 전 1만 냥을 얻어 비축해 두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감영·병영에서는 단지 은·전 수천 냥만 꾸어 주었는데, 조정에 돌아온 후 경연(經筵)에 나와 진달해 청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5월 26일 정유
김성운(金聖運)을 대사간으로, 이윤신(李潤身)을 사간으로, 이병상(李秉尙)을 봉조하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신(重臣)에 대한 비답(批答)에 전혀 ‘경간(卿懇)’이란 글자를 쓰지 않았으나 이병상에 대한 비답에는 있으니, 내가 우례(優禮)하는 뜻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는 만절(晩節)을 성취한 것이다."
하니,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병상은 본래 청고(淸苦)하고 또 집이 가난하니 치사(致仕)한 후 굶주림을 면치 못 할 것입니다. 상록(常祿)은 비록 더 보태 줄 수 없으나 계절에 따른 식물(食物)은 예보다 더 넉넉하게 보내 주면 노인을 우대하고 청렴(淸廉)을 장려하는 덕에 빛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달마다 식물을 보내게 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속대전(續大典)》을 방금 개간(開刊)하였는데 조신(朝臣)의 장복조(章服條)에 양당(裲襠) 【속명(俗名)은 흉배(胸背)이다.】 은 정해진 제도가 없고, 당하관은 옛날에 양당이 없었는데, 지금 제도에는 또한 모두 첨가해 넣었습니다. 신의 뜻으로는 당상은 학(鶴)을, 당하는 백한[鷳]을, 왕자(王子)와 대군(大君)은 기린[麟]을, 무신은 호표(虎豹)·웅비(熊羆)로 한다면 옛 뜻을 잃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만강(李萬江)을 절도(絶島)로 형배(刑配)하였는데, 이만강은 바로 엄택주(嚴宅周)이었다. 처음에 정언 홍중효(洪重孝)의 상소로 인하여 엄택주가 성명을 바꾼 죄를 엄중히 조사하라고 명하였는데, 금오(金吾)에서 자복을 받아내어 계문하였다. 하교하기를,
"엄택주의 일은 윤상(倫常)에 관계된다. 왕자(王者)의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 윤강(倫綱)을 제일로 삼는데, 사람이 사람노릇하는 것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혹 어려서 다른 사람에게 양육되어 늦게야 알게 되더라도 정장(呈狀)하여 그 본래의 성(姓)을 회복하는 예가 허다하니, 이것이 사람의 아들된 도리이다. 아! 그가 만약 깨달아 알았다면 어찌 차마 모칭(冒稱)하고, 그 조부(祖父)를 잊는단 말인가? 임금에게 사실을 고하여 윤상을 회복하는데 비해 그 경중이 어떠한가? 더군다나 그는 교서관(校書館)에 분관(分館)된 자이니, 이러나 저러나 피차 손해가 없는데 달가운 마음으로 모칭하면서 임금을 속였으니 이런 일을 한다면 무슨 일인들 차마 못하겠는가? 과거에 오른 이후 한 번도 그 아비의 무덤에 성묘(省墓)하지 않았고, 그 동생 이주영(李朱英) 역시 묘하(墓下)에 있는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이는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할 만하니, 여러 대신의 헌의(獻議)가 꼭 내 뜻에 맞는다. 형조로 하여금 세 차례 엄형한 후, 흑산도(黑山島)로 정배해 영원히 노예로 삼고 대과(大科)·소과(小科) 방목(榜目)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7일 무술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8일 기해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관서 심리사(關西審理使) 이일제(李日躋)가 복명하니, 임금이 대신과 형조 당상을 함께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관서 백성들의 포채(逋債)를 과연 탕척해 주었는가?"
하니, 이일제가 대답하기를,
"총계(摠計)의 대략 숫자가 전(錢) 10만 냥이나 되었는데, 이미 문권(文券)을 불태워 버리라는 명을 받들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탕감하는 뜻을 각 고을에 선포하였고, 한편으로는 대동문(大同門)에 글을 게시해 왕래하는 사람들이 모두 보도록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옥안(獄案)을 올리라고 명하면서 말하기를,
"살려준 자가 몇이나 되는가?"
하니, 이일제가 말하기를,
"합해서 13명인데 경연의 하교에 의해 즉시 결방(決放)하고, 별도로 책자(冊子) 하나를 만들어 어람(御覽)에 대비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 조영국(趙榮國)에게 명하여 호남의 심리 별단을 가지고 들어오게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이번 이 별단 가운데 있는 각 영읍(營邑)의 어염(魚鹽)을 요판(料辨)하고, 세미(稅米)를 방환(防換)하며, 복호(復戶)를 예매(預買)하는 폐단을 청컨대 정식(定式)을 만들어 엄금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세 가지 일을 엄히 신칙하여 범한 자는 중률(重律)에 따라 감처(勘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내외양(內外洋)의 어전(漁箭)과 어장(漁場)에 각 아문(衙門)과 각 궁방(宮房)에서 번갈아 차인(差人)을 보내서 포민(浦民)을 침해하고 있으니, 마땅히 한계를 분명하게 정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단 호남뿐만 아니라 제도(諸道)의 절수(折受)를 일체 엄금하고, 감사(監司)·병사(兵使)·수사(水使) 및 지방관(地方官)이 사사로이 차지한 자는 드러나는 대로 중히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여러 궁가에서 면세(免稅)한 민결(民結)에서 함부로 받아들임이 한정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매 결(結)마다 쌀로는 24두(斗), 돈으로는 6백 문(文)을 정식으로 삼고, 만약 재해가 있는 해를 만나면 해당 고을에서 한결같이 현재의 경작 면적(面積)에 따라 조관(照管)하여 세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반드시 종전의 정식이 있을 터이니, 비국에서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남한 산성(南漢山城)·북한 산성(北漢山城)의 의승(義僧) 공명첩(空名帖)은 억지로 파는 것과 같으니 엄금해야 마땅합니다."
하고, 지사(知事)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비단 승첩(僧帖)뿐만 아니라 대저 공명첩의 폐단은 조가(朝家)에서 벼슬을 판다는 혐의가 있고, 민간에서는 억지로 떠맡긴다는 원망이 있으며, 어보(御寶)를 위조(僞造)하는 것도 또한 모두 이에서 말미암게 되니, 지금부터 큰 흉년 이외에는 일체 금단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운각(芸閣)127) 에 명하여 《원대전(原大典)》과 《속대전(續大)》을 일체로 간행하라 하였다.
5월 29일 경자
전 판서(判書) 서종옥(徐宗玉)이 졸(卒)하였다. 종옥은 지위가 현달(顯達)하였으나 별다른 훼예(毁譽)가 없었으니, 임금이 매양 근후(謹厚)하다고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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