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1권, 영조 21년 1745년 6월

싸라리리 2025. 9. 2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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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계묘

태학(太學) 유생(儒生) 황간(黃榦) 등이 상소하여 거듭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3일 갑진

윤광소(尹光紹)를 부수찬으로, 남태온(南泰溫)을 대사간으로, 권적(權𥛚)을 경기 관찰사로, 한현모(韓顯謨)를 강화 유수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인하여 대신 및 광주 부윤(廣州府尹) 홍봉한(洪鳳漢)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남한 산성(南漢山城)은 바로 보장(保障)의 중요한 땅인데 인심이 옛날 같지 않고, 사대부(士大夫)들도 또한 많이 환곡(還穀)을 바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홍봉한이 대답하기를,
"군향(軍餉)이 많아 과연 큰 폐단이 되고 있으며 행궁(行宮)의 수개(修改)도 역시 커다란 역사입니다."
하고, 수어사(守禦使) 조관빈(趙觀彬)이 말하기를,
"역사는 큰데 재물이 적으니 참으로 걱정입니다. 군기(軍器) 역시 모양을 이루지 못해 조총(鳥銃)은 포수(砲手)에 비해 4분의 1이 모자라고, 화약(火藥)은 겨우 6, 7백 방(放)을 지탱하며, 연환(鉛丸)은 화약에 비해 또한 3분의 1이 적습니다. 국가에서 만약 남한 산성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여 버린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므로, 좌의정 송인명이 청하기를,
"풍락송(風落松) 4천 그루를 주어 군기(軍器)를 수리하는 데 보태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강원 감사(江原監司)의 장계로 인하여 수령(守令)의 10고(考) 중 5고 전에는 과만(瓜滿)128)  으로 출대(出代)하지 말도록 하여 구식(舊式)을 따르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 나이 이제 이미 52세가 되어 경자년129)  을 생각하면 전후가 절반씩이 되니 어찌 슬픈 생각을 이길 수 있겠는가? 옛날에 대향(大享)에는 친히 향(香)을 전하는 의례(儀禮)가 있었는데, 이제 이를 행하고자 한다. 복색은 장차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는가?"
하자,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는 성상께서 의기(義起)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천담복(淺淡服)으로 해야 하겠는가?"
하므로, 송인명이 말하기를,
"마땅히 재거복(齋居服)으로 해야 하고, 여러 신하들은 흑단령(黑團領)에 양당(裲襠)을 떼어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 친히 향을 전하는 것은 대개 옛날을 추념하여 몸소 행제(行祭)함을 대신하는 뜻이니 사체가 가볍지 않다. 헌관은 2품으로 가려 차출하고 이후부터 능제(陵祭)에 특교(特敎)로 친히 향을 전할 때에는 또한 이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니, 《속대전(續大典)》에 추록하여 친히 향을 전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관서 심리사(關西審理使) 이일제(李日躋)에게 옥안(獄案)을 가지고 함께 들어오기를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의 의견을 물어 경중을 분간해 재결(裁決)하였는데 전후해 제도(諸道)의 죄수를 작처(酌處)한 것이 모두 90여 명이었다.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근래에 양서(兩西) 지방 각 고을에 도적이 탈옥하여 도망한 것이 매우 많으니 지극히 한심합니다. 안주(安州)에서는 고복(考覆)130)  하던 도적 9명이 옥문을 부수고 한꺼번에 도주했으니 외방의 형옥(刑獄)이 엄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도신(道臣)이 1백 일의 정해진 기한을 기다리지 않고 겸관(兼官)을 파직한 것은 참으로 찰한 일이나 병영(兵營)의 옥수(獄囚)가 대낮에 도망한 것은 병사(兵使)가 평일에 엄히 단속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평안 병사(平安兵使) 조윤성(曺允成)은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각도의 장시 도사(掌試都事)를 본도 사람으로 차출해 보내지 말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기를 명하였다.

 

6월 4일 을사

태학(太學) 유생(儒生) 이규현(李奎賢) 등이 상소하여 거듭 선정신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지사(知事)        김약로(金若魯)가 도성(都城) 여첩(女牒)131)                  을 수리해 쌓는 일을 진달하였는데, 특진관(特進官)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몇 년이 되도록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한 일을 담당하는 자가 없습니다. 성을 수리하는 한 가지 일도 정해진 의논이 없으니, 반드시 삼군문(三軍門)이 각기 몇 리씩을 해마다 더 쌓은 연후에야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고 일을 완성시킬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군문에 나누어 준 후 도형(圖形)을 올리면 적간(摘奸)할 때 그 부지런하고 태만함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6월 5일 병오

윤휘정(尹彙貞)을 도승지로, 김상적(金尙迪)·한익모(韓翼謨)를 승지로 삼았다.

 

대사간 남태온(南泰溫)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에 《속대전(續大典)》을 찬집(纂輯)하는 일은 실로 구장(舊章)을 빼거나 보태어 후세 자손에게 남겨 주기 위한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가운데 큰 절목(節目)은 이미 예재(睿裁)를 거쳤으니,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으나, 잗단 조목(條目)에 이르러서는 소략하고 잘못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이제 비록 다시 낭상과 낭청에게 명하여 축조(逐條)하여 바로잡기를 명하였는데 이미 만들어진 책자를 지우고 첨산(添刪)하기는 어려우나 그대로 놓아두면 그 해됨이 한때의 법령(法令)이 잘못되는 데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옛날 조종조(祖宗朝)에서는 혹 율령(律令)을 산정(刪定)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양사(兩司)에서 서경(署經)한 후에야 바야흐로 반행(頒行)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법전을 소중히 여기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종합하는 아름다운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의 뜻으로는 당상과 낭청도 오로지 조검(照檢)하는 데 마음을 써서 품재(稟裁)해 바로 고친 다음에 인하여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조당(朝堂)에 모여 하나하나 감과(勘過)하게 하여 금과 옥조(金科玉條)로 하여금 찬연히 갖추어져 지적할 만한 의논이 없도록 하소서. 지난번 문관(文官)·남행(南行)·무관(武官)의 관안(官案)을 써서 들이라는 전교는 실로 엄체된 사람을 진발(振拔)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성명이 이미 예람(睿覽)에 올랐는데도 정목(政目)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먼 곳의 한미한 사람에게 신의를 잃게 될 것이니 매우 온당하지 않은 일이며, 곧바로 명부(名簿)에 따라서 거행하는 것 역시 재능에 따라 전형(銓衡)해 서용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니 양전(兩銓)에 분명하게 신칙하여 그 가운데에서 까닭 없이 오랫동안 엄체되고 특별히 가리고 재능이 있어 쓸 만한 자를 자리에 따라 그때마다 등용하여 전주첩(殿柱帖)이 공언(空言)이 되지 않게 하면 공도(公道)를 넓히고 인심을 기쁘게 하는 근본이 클 것입니다. 근래에 무변(武弁)이 교자(轎子)를 타는 습속이 실로 큰 폐단이 되고 있는데, 곤수(閫帥)·수재(守宰)를 막론하고 품질(品秩)이 조금 높은 자는 아무렇지 않게 금법을 범하는 자가 많으며, 심지어 무관 수령의 자제로 갓 무과(武科)에 오른 자 역시 함부로 타고 있습니다. 무신이 궁마(弓馬)를 익히는 것은 그 뜻이 있는 것인데 만일에 변란이 있게 된다면 장차 교자를 타고 적을 무찌르겠습니까? 조정에서 신칙함이 전후로 한두 번이 아닌데도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거리낌이 없이 그 습성을 뉘우치지 않습니다. 빌건대 제도에 신칙하여 혹시라도 금법을 범하면 적발하여 논죄해 편한 대로 하는 교만한 습성을 끊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 및 형조 당상과 제도의 심리사를 인견하여 각기 폐단을 진달하게 하였다. 관동 심리사 구택규(具宅奎)가 삼공(蔘貢)의 폐단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약(有若)132)  이 말하기를, ‘백성이 풍족하다면 임금이 누구와 함께 부족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관동의 삼공(蔘貢)은 바로 한 도의 큰 폐단이어서 선조(先朝)에서 세공(歲貢)을 특별히 감하였고, 내가 즉위한 후에도 그 성대한 뜻을 본받아 또 감해 주었다. 그러나 막중한 약이(藥餌)를 너무 지나치게 감해서는 안 된다. 청한 바 속전세(續田稅) 쌀과 콩을 특별히 획급하여 조금이라도 민역(民役)에 보태도록 하라."
하였다. 해서 심리사 남태량(南泰良)이 다시 상정미(詳定米)의 값이 높은 폐단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쌀을 청하여 얻어서 돈으로 추심(推尋)하는 것은 비단 민폐일 뿐만 아니라 일이 부당하다. 경외(京外)를 물론하고 상정미(詳定米)로 이전한 곡식을 돈으로 대신 징수하는 폐단을 일체 엄금하고, 만일 명을 어기면 중률(重律)로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영남 심리사 김상적(金尙迪)이 시노비(寺奴婢)의 폐단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심리사가 아뢴 바를 듣건대 왕정(王政)에서 차마 하지 못할 바이니, 비총(比摠)을 핵실하자는 것 역시 의견이 있는 것이다. 비국에서 절목(節目)을 정해 들이게 하라."
하였다. 호서 심리사(湖西審理使) 한익모(韓翼謨)가 양역(良役)의 폐단을 아뢰기를,
"노약자를 첨정(簽丁)하는 것은 오로지 군액은 많고 백성은 적은 데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음성(陰城) 등 세 고을이 더욱 심하니,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정원 수를 작정해 도내의 백성이 많은 고을로 이송(移送)하여 조금의 민폐라도 늦추어 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국에서 참작하여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관서 심리사 이일제가 서로(西路)에는 전답에 일정한 부세(賦稅)가 없고, 군(軍)에는 정해진 숫자가 없으며, 재물을 절용(節用)하지 않고, 백성들은 분수(分數)를 지켜 편안할 줄을 알지 못하는 네 가지 폐단으로써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큰 일이어서 바쁘게 간단히 결정할 수 없으니 후일 등대(登對)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6월 7일 무신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에 흉배[揚]가 없는 흑단령(黑團領) 차림으로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명릉(明陵)133)   기신제(忌辰祭) 향(香)을 친히 전하고, 헌관(獻官)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에게 말하기를,
"오늘 친히 향을 전하는 것은 대개 조금이나마 내 감회를 펴고자 함이니, 경은 모름지기 능상(陵上)을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하라. 내가 마땅히 불러서 물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내전(內殿)으로 돌아왔다.

 

6월 10일 신해

태학 유생 이상로(李商輅) 등이 상소하여 거듭 선정신 송시열과 송준길을 문묘에 종향(從享)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탁무(卓茂)를 포덕후(褒德侯)로 삼은 것은 매우 성대한 거조(擧措)였다. 지난날 대간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비록 사람을 가리라는 전교가 있었으나 만약 용동(聳動)하는 일이 없다면 어떻게 풍교(風敎)를 세우고 세상을 격려하겠는가? 그 칙려(飭勵)하는 근본은 염근(廉謹)을 장려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추려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종묘(宗廟)에 천신(薦新)134)  할 때 천신관(薦新官)은 상복(常服) 차림으로 각 전(殿)에 전(奠)을 받든다.’라고 하였습니다. 천신관이란 바로 봉상시(奉常寺)의 관원이며, 이른바 상복이란 《대전(大典)》의 의장(儀章)으로 보건대 국초(國初)에는 당하(堂下) 3품 이하에는 원래 홍포(紅袍)가 없고 단지 청록포(靑綠袍)만 있었으니, 상복이란 바로 지금의 이른바 흑단령(黑團領)인 것입니다. 천신관이 상복을 홍포로 알고는 매양 홍단령(紅團領) 차림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무릇 능묘(陵廟) 가운데에는 원래 홍포를 입고 출입하는 예가 없으니, 청컨대 지금부터는 흑단령으로 고쳐 행하여 예(禮)의 뜻을 잃지 않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지평 유현장(柳顯章)이 상소하기를,
"이만강(李萬江)이 아비를 배반하고 임금을 속인 것은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으니, 쾌히 일률(一律)135)  을 시행해 윤기(倫紀)를 밝히소서. 익산 군수(益山郡守) 김필우(金必佑)와 태천 현감(泰川縣監) 윤붕거(尹鵬擧)는 대간의 탄핵을 모른 체하고 아무렇지 않게 무릅쓰고 있으며, 풍천 부사(豊川府使) 윤종대(尹宗大)는 본래 용렬한 무변(武弁)으로서 어리석어 일을 알지 못하니, 모두 체개(遞改)하고 다시 가려서 보내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만강을 작처한 것은 뜻이 있는 바이며, 김필우·윤붕거에 대해서는 대간의 탄핵이 지나쳤다. 윤종대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1일 임자

태학 유생 유한길(兪漢吉) 등이 상소하여 거듭 선정신 송시열과 송준길을 문묘(文廟)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3일 갑인

밤에 유성(流星)이 항성(亢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학 유생 한진모(韓晉謨)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 송시열과 송준길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부사(領府事) 서명균(徐命均)이 졸(卒)하였다. 명균은 서종태(徐宗泰)의 아들인데 부자(父子)가 서로 이어 상신이 되었으니, 근세(近世)에 드문 일이었다. 젊어서 문명(文名)이 있었고, 또 청검(淸儉)·질직(質直)하다고 세상에서 일컬었다.

 

6월 14일 을묘

헌부 【장령 김이만(金履萬)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함안 군수(咸安郡守) 민진룡(閔鎭龍)은 탐욕스럽고 더러우며, 전 기장 현감(機張縣監) 정수방(鄭壽邦)은 함부로 사람을 죽였으니,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양정합(養正閤)에 나아가 동궁(東宮)의 시좌(侍坐)를 명하고 어제(御製) 상훈(常訓)을 강론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친히 책자(冊子)를 지어 상훈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조목(條目)이 여덟 가지로서 첫째 경천(敬天), 둘째 법조(法祖), 셋째 애민(愛民), 넷째 돈친(敦親), 다섯째 조제(調劑), 여섯째 숭검(崇儉), 일곱째 여정(勵精), 여덟째 근학(勤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재거(齋居)하면서 감회가 있어 이 글을 지었는데, 이는 내가 평생 하고자 했던 것들이다. 이제 이미 교정(校正)을 거쳤으니, 마땅히 원량(元良)으로 하여금 교훈을 받게 하라."
하였다. 동궁이 강독(講讀)을 끝마치자 임금이 글의 뜻을 묻다가 애민(愛民) 조목에 이르러 임금이 사랑하는 도리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침해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다른 조목을 문난(問難)하였는데 대답하여 아룀이 모두 어긋나지 않으니 여러 신하들이 칭하(稱賀)하였고, 임금이 돌아보고 웃으며 매우 기뻐하였다. 입시(入侍)한 춘방(春坊) 세 사람에게 아마(兒馬) 1필씩을 내렸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양역(良役)을 사정(査正)하는 한 가지 일은 4년이나 근고(勤苦)한 끝에 인출(印出)하여 반포(頒布)를 막 마쳤으나 삼가 크게 두려운 바가 있습니다. 무릇 이 경외(京外)에서 도태(陶汰)된 자가 3만여 명이나 되는데 이는 모두 법 이외의 남액(濫額)으로서 백성들의 골수(骨髓)를 벗겨내어 반은 사문(私門)으로 돌아가게 한 자들입니다. 안에서는 아문(衙門)의 교활한 서리(胥吏)들과 밖으로는 번곤(藩閫)의 여러 신하들이 못마땅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옛 정액(定額)을 다시 회복하기를 생각하는 자가 반드시 사방에서 시끄럽게 일어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산성(山城)을 지키는 군관(軍官)을 복구하라는 명을 우선 환수(還收)하고 봄에 내린 성명(成命)에 의해 연말에 바로잡을 때에 참작해서 존감(存減)하고 함부로 증액(增額)을 허락하지 말라는 뜻을 해조 당상에게 신칙함이 마땅할 뜻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마땅히 차대(次對) 때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장령 김이만(金履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안하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무릇 서민(庶民)은 부유해져야 착해진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나라가 공고히 유지되는 것은 오로지 백성들에게 달려 있으며, 백성들이 양심(良心)을 잃지 않는 것은 반드시 항산(恒産)이 있음을 말미암은 것입니다. 시험삼아 오늘날을 보건대 나라의 근본이 시들고 백성들의 산업(産業)은 바닥이 났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아침부터 밤늦도록 근심하심은 오로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으며, 묘당(廟堂)에서 밤낮으로 경영하는 것 역시 일찍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를 급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는데 은택이 아래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아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되었으니,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이렇게 된 데에는 대개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풍속이 사치해서이며, 하나는 수령의 부극(掊克) 때문이며, 하나는 감사(監司)의 징색(徵索) 때문입니다. 무엇을 풍속(風俗)이 사치스럽다고 말하느냐 하면, 요즈음 보건대 사치의 습성이 날로 더하고 달로 만연되어 제택(第宅)이 크고 화려하며, 복식(服飾)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음식이 풍성하고 기름진 것이 서울의 사대부(士大夫)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정(市井)의 이익을 구하는 무리들까지도 모두 그렇습니다. 비단 시정배(市井輩)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골 사람들도 모두 그러하며, 비단 시골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깊은 산골에서 어리석게 사는 자들도 역시 모두 그러하며, 그 중에 사치하지 않은 자는 다만 힘에 여유가 없어서일 뿐입니다. 저 깊은 산골짜기의 띳집에서 살고 갈의(褐衣)를 입으며 거친 밥을 먹는 자들은 부잣집 노예들도 달갑게 여기지 않으니 비록 사치한다고 지목할 수는 없으나 그들의 전일(前日)에 비하면 갑절이 될 뿐만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소비하는 것은 몇 금(金)에 불과하지만 아주 가난한 집에서는 이 역시 그 사치를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나 한 가정의 사치는 본디 있고 없음을 따질 것이 못되나 우리 나라 전체의 억만 금의 사치는 비용이 적지 않으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하지 않겠으며 재물이 어찌 다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으로 수령들이 부극을 한다고 말하는가 하면, 삼가 생각건대 백성들의 휴척(休戚)은 수령에게 달려 있으니, 수령을 가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전후의 상교(上敎)가 정녕(丁寧)하고 간측(懇惻)하니, 누군들 그 지극한 뜻을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만, 한갓 형식으로 돌아가고 실제 효과가 없습니다. 수령된 자들이 가난하게 살면서 스스로 힘쓰는 이가 드물고 대부분 청렴하지 않으며 사소한 일에도 각박하게 하여 갖가지로 침탈(侵奪)하고 있습니다. 혹은 비옥한 땅에 전원(田園)을 널리 차지하기도 하고 혹은 친당(親黨)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가난한 백성의 고혈(膏血)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사(御史)의 장계와 대간(臺諫)의 탄핵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한 번 처치로 대하는 데 불과하여 가벼우면 파면이요, 중해도 유배(流配)에 그치는 데 지나지 않으니 한(漢)나라의 장법(贓法)처럼 엄하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탐관 오리(貪官汚吏)들이 징계되는 바가 없이 마음대로 빼앗아 들이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하지 않겠으며 재물이 어찌 다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으로 감사(監司)가 징색(徵索)을 하느냐고 말하면, 대저 감사란 한 도(道)의 모범이 되어 왕화(王化)를 선포하는 자인데 어찌하여 구례(舊例)라 핑계하면서 열읍(列邑)에서 징색하기를 마치 자기 주머니 속에 있는 물건을 취하듯 합니까? 영문(營門)의 전곡(錢穀)은 열읍보다 백 배가 될 뿐만이 아닌데도 모든 수용(需用)을 오히려 열읍에서 만족을 취하나, 열읍 수령들은 감히 어기지 못하고 공손히 바칠 뿐이니, 아무리 잗단 것이라 하더라도 모두 농삿꾼과 베짜는 부녀들이 고생해서 만든 물건입니다. 비록 열읍에 있는 영곡(營穀)으로 대략 그 값을 지불한다고 하더라도 10분의 1에 불과하고, 이 역시 절반은 교활한 아전의 손에서 소모되어 가난한 백성들은 반드시 내려 준 전액을 받지 못할 것이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하지 않겠으며 재물이 어찌 다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 가지는 모두 백성들을 가난하게 하고 재물을 다하게 하는 빌미가 되는데 이제 한번 쇄신하여 통렬히 고치는 것은 역시 우리 전하께서 한번 전이(轉移)하는 기회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세 가지 조목으로 진달한 바는 모두 절실하다. 처음 건의 일은 옛날 사람의 말에, ‘성중(城中)에서 높은 상투[高髻]를 좋아하니, 사방에서도 1척(尺)이나 높아졌다.’136)  는 비난이 있었으며, 부자(夫子) 역시,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쓰러지게 된다.’137)  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는 아랫사람의 허물이 아니니, 내가 스스로 힘쓰겠다. 두 가지 건의 일은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엄히 신칙하게 해야 하는데 ‘엄칙(嚴飭)’이란 두 글자가 종이에 으레 쓰는 말이 되고 말았으니, 아! 그 요령은 사람을 가리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별도로 전조(銓曹)에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5일 병진

헌부(憲府) 【장령 김이만(金履萬)이다.】 에서 전계를 가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민진룡(閔鎭龍)·정수방(鄭壽邦)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6월 16일 정사

정찬술(鄭纘述)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조명리(趙明履)를 승지로, 조운규(趙雲逵)·정하언(鄭夏彦)을 정언으로, 이종백(李宗白)을 대사헌으로, 유언호(兪彦好)·정한규(鄭漢奎)를 지평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사간으로, 홍봉조(洪鳳祚)를 대사간으로, 이주진(李周鎭)을 지경연사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6월 17일 무오

김상로(金尙魯)를 동지 경연사로, 원경순(元景淳)을 응교로, 윤득재(尹得載)를 교리로, 윤동준(尹東浚)을 수찬으로, 조관빈(趙觀彬)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정준일(鄭俊一)을 부사(副使)로, 민백상(閔百祥)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심육(沈錥)을 제주(祭酒)로, 김양택(金陽澤)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관서 심리사(關西審理使)의 별단(別單) 가운데 전정(田政)·군제(軍制)·재용(財用) 세 가지 조항은 본도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장점을 따라 변통하게 하였으나, 진사(進士)·유학(幼學) 출신(出身)을 당상(堂上)이 뽑아서 천거하라는 청에 대해서는 진사와 유학은 이미 식년(式年)의 세수(歲首)에 천거하고 있으니, 지금 중첩되게 천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상(堂上) 무변(武弁)으로 이력(履歷)이 없는 자는 반드시 상당(相當)한 직(職)에 조용(調用)해 쓸 수 없고 출신은 한 도를 통틀어 그 숫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비록 뽑아서 천거하게 해도 한만(汗漫)하기만 할 듯싶습니다. 오직 이 강변 칠읍(江邊七邑)은 국가에서 우휼(優恤)하는 바요, 변상(邊上)의 건아(健兒)들은 더욱 장려해야 마땅합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매년 강변 칠읍 출신 가운데서 세 사람을 극진히 가려서 상(上)·중(中)·하(下)로 구별해 장계로 보고하여 첫째를 차지한 사람은 병조에서 내삼청(內三廳)의 실직(實職)으로 의차(擬差)하게 하고, 중·하에 든 사람은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으로 하여금 나누어 초관(哨官)으로 제수하라는 일로 정식(定式)을 삼아 시행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광주 군관(廣州軍官)은 모두 난리가 나면 성첩(城牒)을 지키는 군졸인데 이제 만약 속오(束伍)에 뒤섞어 충원하면 억울하다고 호소함이 반드시 심할 것입니다. 막 도태시키지 말라는 명이 있었는데 문득 다시 도태시킨다면 나라의 체모 역시 전도(顚倒)되니, 우상(右相)의 차자는 참으로 너무 지나친 염려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태시키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전 위원 군수(渭原郡守) 박종성(朴宗城)을 잡아다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본군(本郡)에서 이읍(移邑)을 하고 성(城)을 쌓았는데 역사를 감독한 사람에게는 으레 논상(論賞)하게 되어 있었는데도 박종성은 공로를 세운 사람들은 보고하지 않고 공조(功曹)의 무리에게 옮겨 시행하니 떼를 지어 원망이 일어나게 되었다. 심리사(審理使) 이일제(李日躋)가 돌아와 그 일을 아뢰고, 또 주었던 자첩(資帖)을 이미 환수했다고 말하였다. 사직(司直) 원경하(元景夏)가 공척해 말하기를,
"박종성의 논상이 공평하지 못한 것은 마땅히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상을 지나치게 준 것이라고는 하나 임금께서 내리신 바를 임의로 환수하는 것도 마땅치 않으니, 이일제를 중추(重推)해야 마땅하고 박종성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18일 기미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9일 경신

장령 김이만(金履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엊그제 조강(朝講) 때 전하께서 글의 뜻으로 인하여 현 시대의 병원(病源)에 대해 물으시니, 대신(大臣)이 ‘사(私)’ 자(字) 하나를 들어 대답하였고, 전하께서도 그렇게 여기셨습니다. 신 역시 대략 진달한 바가 있었으나 말이 뜻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했으니, 청컨대 그 말을 다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대저 사람에게 병이 있는데도 병이 생긴 것을 알지 못하면 비록 만금(萬金)에 해당하는 좋은 약이라 하더라도 베풀 수가 없으나, 병이 든 곳을 알면 증세에 따라 약을 써서 허약하면 보(補)해 주고, 너무 실(實)하면 쏟아내게 하며, 차면 덥게 하고, 더우면 서늘하게 해주면 됩니다. 나라의 병을 고치는 것도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과 같아 그 병이 난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이 걱정이니, 병을 알고 나면 약을 쓸 수가 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이미 병의 근원이 사(私)에 있음을 아셨는데 어찌하여 약으로 치료를 하지 않습니까? 치료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역시 하나의 ‘공(公)’ 자로 해야 합니다. 대저 공이란 사의 반대인데 무엇을 공이라 하느냐 하면 천리(天理)가 그것이며, 무엇을 사라고 하느냐 하면 인욕(人慾)이 그것입니다. 전하께서 깊숙한 곳에서 한가로이 계시면서 동작(動作)을 베푸시는 즈음에 반드시 ‘이는 과연 천리에 맞는 일인가, 아니면 인욕인가?’라고 물으시어 천리이면 따르고 인욕이면 막아서 날마다 때때로 이 두 가지를 살피시면 지금 세상의 병원(病源)을 치료하는 상지(上池)138)  의 좋은 처방(處方)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도(道)가 없이 살피시면 공(公)을 사(私)로, 사를 공으로 여기는 것이 많게 되니, 반드시 학문이 밝아진 연후에야 공사(公私)와 사정(邪正)이 감별(鑑別)하는 가운데에서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시종 학문에 마음을 쓰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6월 24일 을축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윤광의(尹光毅)를 대사간으로, 김상복(金相福)을 헌납으로, 유현장(柳顯章)·임사하(任師夏)를 정언으로, 박창윤(朴昌潤)을 지평으로, 신위(申暐)를 교리로, 임경관(任鏡觀)을 장령으로, 이태중(李台重)을 사간으로, 홍중효(洪重孝)를 부수찬으로, 조호신(趙虎臣)을 황해 병사로, 유동무(柳東茂)를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6월 25일 병인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7일 무진

임금이 태묘(太廟)의 추향(秋享)을 친행하겠다고 명하였는데,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과 옥당(玉堂)이 구대(求對)하여 친향(親享)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궁검(弓劍)139)  은 뒤따를 수가 없어 구렛나루가 이미 세었는데, 한결같은 마음은 밤낮으로 선조(先祖)에게 있다. 옛날 대신(大臣)을 공경하라는 가르침을 본받아 단지 대제(大祭) 후 추알(秋謁)만 행하겠으니, 의조(儀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설서(說書) 김양택(金陽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한림(翰林)을 권점(圈點)한 후 권점을 주관한 사람인 임상원(林象元)이 밖에서 드러내 놓고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말하기를, ‘아무개는 아무리 당종(堂從)이어서 영선(榮選)에 맞지 않기 때문에 내가 권점을 찍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신의 종형(從兄)의 경신년140)  의 일을 지적한 것입니다. 지난번 이광의(李匡誼)의 처분으로 인하여 성교(聖敎)가 엄절(嚴截)하시어 거의 굽어 살피심이 있으셨는데, 임상원이 다시 이광의의 남은 논의를 주워 모아서 그 말한 바가 이처럼 극에 이른 것입니다. 이 무리들이 신의 집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 참혹합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유신(儒臣)과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두 대장(大將)을 인견하였다. 어영 대장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대장의 직임은 다른 사람과 다름이 있어 전부터 원래 제사(祭祀)에 차출된 예가 없었는데, 중간에 장신(將臣)의 차출을 요청함으로 인해서 마침내 잘못된 예가 되고 말았으니, 한번 품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체통을 얻었으니, 이후로 삼군문(三軍門)의 대장은 제사에 차출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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