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2권, 영조 21년 1745년 7월

싸라리리 2025. 9.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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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신미

헌부(憲府) 【지평 박창윤(朴昌潤)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나침(羅沈)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간원(諫院) 【정언 유현장(柳顯章)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금오랑(金吾郞)이 윤광신(尹光辛)을 잡으러 갔을 때에 머뭇거리고 겁을 내어 번거롭게 치계(馳啓)까지 하였으니, 국강(國綱)을 무너뜨리고 사명(使命)을 욕되게 한 죄가 큽니다. 멀리 귀양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해미 현감(海美縣監) 최경로(崔慶老)는 용렬하고 노쇠한데다가 늘 술에 취하여 있으면서 목민 치도(牧民治盜)하는 정사가 무엇인지도 통 모릅니다. 강진 현감(康津縣監) 박기담(朴嗜覃)은 본래부터 우매한데다가 체통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청렴하지도 못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행하여지니, 청컨대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일 임신

이광식(李光湜)을 사간으로, 이형만(李衡萬)을 정언으로, 이창수(李昌壽)를 응교로, 한억증(韓億增)을 부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제향(祭享)할 때에 등갱(㽅羹)은 곧 대갱(大羹)인데, 오미(五味)141)  를 섞지 않은 것이고, 형갱(鉶羹)은 화갱(和羹)이라고도 하는데, 오미를 타고 모골(芼骨)142)  을 첨가한 것입니다. 이 양갱(兩羹)은 각각 세 그릇씩인데, 소와 양(羊)·돼지 세 가지를 사용한다는 것은 《의례(儀禮)》와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의 책에 분명히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듣건대 태묘(太廟)에서는 신위(神位)마다 등갱 세 그릇과 형갱 세 그릇은 모두 쇠고기로만 사용한다고 하니, 예의 뜻에 크게 어긋납니다. 이는 대개 쇠고기는 넉넉하지마는 양고기가 부족한 소치에서 나온 것이겠으나, 막중한 제사 의식을 이와 같이 어긋나게 하니, 지금이라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경비가 조금 더 나는 데 대하여 의논할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양(羊)은 우리 나라에서는 매우 귀하여 계속 공급하기가 어려우므로 넉넉하게 가정(加定)하지는 못하더라도 우선 매번 제사를 올릴 때에 앞뒤의 전(殿)에 각기 양과 돼지를 한 마리씩 가정한다면 혹시 변통하여 분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예(禮)에 크게 어긋나니, 지금부터 바로잡아서 양생(羊牲) 한 마리와 시생(豕牲) 한 마리를 추가하여 봉진(封進)하게 하라."
하였다. 판돈녕(判敦寧) 이기진(李箕鎭)이 말하기를,
"신이 기보(畿輔)143)  에 부임하여 각릉(各陵)을 봉심(奉審)할 때에 보니 익릉(翼陵)144)  과 순회묘(順懷墓)145)   사이에 고총(古塚)의 표석(表石)이 하나 있는데 ‘용성대군지묘(龍城大君之墓)’라고 쓰여 있었으니, 이는 곧 예종조(睿宗朝)의 친왕자(親王子)로서 조요(早夭)한 분입니다. 묘가 솔숲이 우거진 속에 있는데 사초(沙草)가 모두 벗어지고 총토(塚土)만 남아서 보기에 매우 참연(慘然)하였습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수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헌부 【지평 박창윤(朴昌潤)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주안(周安)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간원 【대사간 윤광의(尹光毅)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금오랑(金吾郞)의 일과 최경로(崔慶老)·박기담(朴嗜覃)의 일은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7월 4일 갑술

임금이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에게 수서(手書)를 내려 조정에 나오도록 당부하였다.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성상께서 신료(臣僚)들이 엄체(淹滯)되는 폐단을 특별히 진념하시어 문·음·무(文蔭武)의 관안(官案)을 써서 들이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신의 이조(吏曹)에서는 지금 막 써서 올렸습니다만, 삼가 생각하건대 문관(文官)으로서 출신(出身)한 이나, 무·음(武蔭)으로서 통사(通仕)한 자가 무려 천여 명이 넘습니다. 그러나 경외(京外)에 공석(空席)이 된 자리는 매우 적으니, 비록 명지(明智)한 자로 하여금 그 전형(銓衡)을 맡겨 전보(塡補)하게 하더라도 특별한 곳을 더 얻을 방법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신과 같이 우매한 사람이 주야로 생각하여 보나 끝내 좋은 계획을 얻을 수 없습니다. 대개 문·무 출신으로 적체된 사람이 근일처럼 많은 때는 없었습니다. 그 중에 영남의 한 도(道)를 가지고 말하여 보더라도 혹은 3, 40년씩이나 조용(調用)되지 못한 자도 있으니, 이는 화기(和氣)에 손상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설과 취인(設科取人)하는 뜻이 과연 어디 있는 것입니까?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과 적체를 해소하는 계획에 대하여서는 신은 진실로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또한 인재(人才)를 찾아내는 데 있어서는 논천(論薦)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실제로 삼대(三代)의 아름다운 제도였습니다.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는 전폐(全廢)하였다고 이를 수 없으나, 도신(道臣)이 식년(式年)146)  에 추천되는 일은 이미 공평한 섬독(剡牘)이라고 할 수 없으며 혹은 경연(經筵)에서 내린 전교에 의하여 경재(卿宰)들이 특별히 천거하여 올린 자도 한결같이 공심(公心)에 따랐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골 구석에서 경학(經學)을 한 선비나 한미한 집안에서 특별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똑같이 등용되지 못하고 초야(草野)에서 늙어 죽는 자가 많습니다. 이것이 어찌 공평하게 사람을 천거하고 재주에 따라 들어 쓰는 도리이겠습니까? 생각건대 오늘날은 세대(世代)가 성인(聖人)의 시대로부터 멀어졌고 인심(人心)은 더욱 각박해졌으니, 이런 때를 당하여 조금이라도 만회(挽回)하는 방법은 오직 사람을 얻어 바른 길을 함께 행하는 데에 있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인재를 끌어들이고 찾아내는 거조를 조금도 늦출 수 없다고 여기나, 미리 추천하는 절목을 세울 필요는 없으며, 주천자(主薦者)로 하여금 그 인재의 학문(學問)·경술(經術)·행의(行誼)·문장(文章)·재식(才識)·지용(智勇)에 따라 각각 그 실행(實行)으로 인연하여 품제(品題)를 세워서, 안으로는 재신(宰臣)과 밖으로는 방백(方伯)이 각각 세 사람씩을 추천하여 묘당(廟堂)에 보내면, 대신(大臣)이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과 충분히 잘 가려 뽑고 양전(兩銓)에 계하(啓下)하여 특별히 조용(調用)하게 하소서. 그러나 혹은 6년이나 혹은 8년에 한 번씩 추천하게 하되, 절대 난잡하게 하지 못하도록 엄숙히 정식(定式)을 만들어 영구히 시행하게 하고, 여러 도에서 식년마다 추천하는 것을 혁파(革罷)하게 하시면 가히 신간 박채(愼簡博採)의 방법이 되어 인재를 유실(遺失)하는 한탄이 거의 없어질 듯합니다.
서얼(庶孽)을 방색(防塞)하는 데 대해서는 전규(前規)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조의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이 처음으로 주창하여 성법(成法)이 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입현 무방(立賢無方)의 뜻이 되겠습니까?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허통(許通)하자는 의논을 처음으로 내놓았고,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이 이판(吏判)으로 있을 때에 인묘(仁廟)에게 의논드리기를, ‘서얼에게 벼슬길을 막는 것은 고금 천하에 없는 폐법(弊法)입니다. 우리 나라는 인재가 적은데, 하늘이 내어 준 사람도 다 쓰지 못하니, 성왕(聖王)의 공명 정대한 정사가 아닙니다.’ 하였고, 고(故)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도 차자(箚子)로써 허요(許要)하기를 청하였으니, 허요라는 것은 곧 삼조(三曹)147)  와 각사(各司)의 관원을 지적하여 말한 것입니다. 선정신 박세채(朴世采)는 인재를 찾아내는 사목(事目)을 기록하여 올렸는데, 역시 서얼에까지 아울러 미치게 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전후의 명신 석보(名臣碩輔)들이 대개 이에 대하여 말한 자가 많았으나, 고질적인 폐단이 풍속으로 굳어져 변통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투철하게 빼어난 자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 막아서 제한하니, 시험하여 볼 수 있는 곳이라고는 보잘것없는 우역(郵驛)이나 작은 고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재주를 품고 침체된 자를 손가락으로 일일이 다 꼽아 말할 수 없습니다마는, 송익필(宋翼弼)의 경학, 박지화(朴枝華)의 절의, 신희계(辛禧季)의 문장, 최명룡(崔命龍)의 지략, 우경석(禹景錫)의 재서, 양사언(楊士彦)의 사화(詞華) 등은 일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마쳤거나 혹은 말단 관원에 그치고 말아 마침내 그 품은 뜻을 펴지 못하였으니, 신은 실로 민망하게 여깁니다. 옛날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일찍이 하교하기를,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가는 데 잔가지도 가리지 않는다. 신하가 충성을 하려고 하는데 어찌 정적(正嫡)148)  에만 국한하겠느냐?’ 하였으니 이는 대성인(大聖人)께서 누구나 차별 없이 사랑하는 훌륭한 뜻이었습니다. 지금은 돌아보건대, 습속(習俗)이 고질로 굳어져서 시제(時制)에 구애가 많습니다. 비록 하루아침에 경장(更張)을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진용(進用)하는 길을 조금이라도 넓혀서 심하게 구속하지 않는다면, 소해(疏解)하는 방법이 될 뿐만 아니라 인재를 성취시키는 도리에 있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못할 것입니다.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확정을 지어 정식으로 삼도록 하소서. 또한 선유(先儒)들도 서상(胥象)149)  에서 취재(取才)하라는 말이 있었으니, 이는 진실로 구인(求人)하는 데 있어서 훌륭한 의논입니다. 신도 역시 생각건대 서류(庶類)를 소통(疏通)시키는 것이 합당할 뿐만 아니라 여항(閭巷) 중의 미천한 자라도 그 재능에 따라 각각 알맞은 직책을 주어서 효과를 이루도록 한다면 사방의 재능이 있고 준수한 선비들이 반드시 고무되고 분발하여 왕국(王國)의 수요(需要)가 될 터이니 어찌 작은 보탬이 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것에 대해서는 입시(入侍)할 때 하교하겠다."
하였다.

 

지평 정한규(鄭漢奎)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상께서 8조의 상훈(常訓)으로써 글로 써서 우리 동궁 저하(東宮邸下)에게 내려 주셨는데, 신은 여기에서 우리 성상의 후사(後嗣)에게 끼쳐 준 규모(規模)가 알뜰하고 절실하여 백왕(百王)에서 빼어나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만 성현의 밝고 환한 공부는 오로지 문자의 교훈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체득하는 효과는 역시 실제로 보고 느끼는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그 8조의 공부에 대하여 날마다 생활하는 사이에 더욱더 스스로 힘쓰시어 몸소 솔선 수범하시면 우리 동궁 저하께서 보고 듣는 사이에 습숙(習熟)이 되어 그 덕성을 훈도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숙천 부사(肅川府使) 박재해(朴載海)는 일찍이 봉산(鳳山)에 부임하여 있었을 때 탐장(貪贓)으로 감죄(勘罪)받았었는데, 지금 서읍(西邑)을 맡기시니 물정(物情)이 더욱 해괴하게 여깁니다. 사판(仕版)에서 깎아 장법(贓法)을 엄격히 하소서.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신만(申漫)은 앞뒤로 여러 관직에 있을 때에 백성을 학대하고 사욕만 채웠는데, 지금 본 수사의 직위에 임명받고서도 구습(舊習)을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문의 현령(文義縣令) 김일기(金一基)는 정사를 하는데 유약한 점이 많아서 아전들은 그것을 빌미로 간특한 일을 행하니, 비방은 청탁하는 일에서 나왔고 원망은 죄수들로부터 일어납니다.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힘쓰라고 한 말은 마땅히 힘쓰겠다. 진달한 가운데 김일기에 대해서는 그가 누군지 모르지마는 두 건(件)의 일을 가지고 추문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하였다.

 

추조(秋曹)150)  에 있는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도록 명하였으니, 날씨가 덥기 때문이었다.

 

교리 신위(申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침(羅沈)의 죄범이 얼마나 관계가 긴중한데,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고 거듭 발단된 의논을 임의로 정계(停啓)시킨단 말입니까? 신은 생각건대, 지평 박창윤(朴昌潤)은 엄중히 감죄(勘罪)함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애초에 너무 지나쳤는데, 지금 어찌하여 생각을 바꾸지 않는 것인가? 비록 사체의 경중을 헤아리더라도 피차간에 넘고 처짐이 없을 것인데, 어찌 감히 그 버릇을 자행하려 하느냐?"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양 대장(大將)과 전직 영남 도신(嶺南道臣)을 소견(召見)하고 영남의 시노비 절목초(寺奴婢節目草)를 가지고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총(比總)151)  은 일찍이 이름이 부정하다는 의논이 있었다."
하자, 어영 대장(御營大將)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이름이 비록 부정하더라도 지금 그것을 변통하는 것은 진실로 폐단을 제거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저 법이란 좋지 않은 것이 없지마는 그것을 봉행하는 데는 오로지 인재를 선택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마땅한 수령(守令)을 얻는다면 거의 조금이라도 폐단을 제거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시(古詩)에 이르기를, ‘갈고 닦기를 금(金)을 백 번 단련시키듯 하라.[磨礪當如百鍊金]’ 하였는데, 절목이 이미 이루어진 뒤에 다시 여러 신하에게 묻는 것은 그 의도가 대개 여기에 있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좌상(左相)의 뜻은 10년마다 추쇄 어사(推刷御史)를 보내자고 하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도신으로 하여금 특별히 도내의 수령을 뽑아 차원(差員)으로 정하고 연도를 한정하여 추쇄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하매, 승지 김상적(金尙迪)이 말하기를,
"비록 어사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폐단이 없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오로지 도신에게 책임을 지워 오직 마땅한 사람을 얻는 것으로 주장을 삼아 형편에 따라 추쇄하게 한다면 거의 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각읍에 영을 내려 해마다 추쇄하게 하였으니, 다시 무엇 때문에 연도를 한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이 옳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제주(濟州)에 보리 농사가 큰 흉년이 들어 보리의 환상(還上)을 수량에 준하여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백성들이 먹을 식량과 가을에 경작할 종자를 지금 변통해 주어야만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니 연해읍(沿海邑)에 있는 모맥(牟麥) 2천 석(石)을 획송(劃送)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도민(島民)을 위하던 성의(聖意)를 조용히 생각하여 보니, 더욱 절실히 느껴진다. 수량에 준하여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7월 5일 을해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태묘(太廟)의 추향 대제(秋享大祭)에 쓸 향(香)을 몸소 전하였다.

 

이덕중(李德重)을 승지로 삼았다.

 

7월 6일 병자

이도겸(李道謙)을 대사간으로, 한억증(韓億增)을 헌납으로, 이응협(李應協)·이광직(李光溭)을 정언으로, 이창유(李昌儒)·이사조(李師祚)를 지평으로, 이규휘(李奎徽)를 장령으로, 서명구(徐命九)를 대사헌으로, 송창명(宋昌明)을 사간으로 삼았다.

 

삼군문(三軍門)152)  에 분수(分授)한 도성(都城)의 척량 보수(尺量步數)를 별단(別單)에 써서 들였는데, 숙정문(肅靖門) 동변(東邊) 무사석(舞砂石)에서 돈의문(敦義門) 북변까지 4천 8백 50보(步)를 훈국(訓局)에 분수하고, 돈의문에서 광희문(光熙門) 남촌(南村) 집들의 뒤까지 5천 42보 반(半)을 금위영에 분수하고, 광희문에서 숙정문까지 5천 42보 반을 어영청에 분수하였다. 군기시(軍器寺)에 있는 주척(周尺)의 보수(步數)와 공장인(工匠人)이 쓰는 목척(木尺) 보수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척량 보수를 써 넣었다.

 

7월 7일 정축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였으니, 추향(秋享)을 섭행(攝行)한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릇 궐내(闕內)에서 적간(摘奸)할 때에는 병조(兵曹)와 도총부(都摠府)의 위장(衛將)·부장(部將)과 수문장(守門將)·입직 인원(入直人員)도 모두 검(劍)을 차는데, 오직 지영(祗迎)·지송(祗送)할 때만 검을 차지 않는 것은 사체에 미안하다. 이 뒤로는 모두 검을 차도록 하라."
하였다.

 

7월 9일 기묘

밤에 유성(流星)이 하늘 가운데서 나와서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크기가 주먹만하고 빛깔은 흰 색이었다. 달이 심성(心星)을 범하였다.

 

7월 11일 신사

유엄(柳儼)을 형조 판서로, 조운규(趙雲逵)를 부교리로, 김상중(金尙重)을 사간으로, 이기진(李箕鎭)을 판의금으로, 조원명(趙遠命)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정언 이응협(李應協)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판결사(判決事) 신겸제(申兼濟)는 쇠약하고 혼모하여 비방이 파다하게 일고 있으며, 이산 부사(理山府使) 김몽규(金夢煃)는 탐욕스러운데다가 불법을 자행하여, 원망이 무더기로 일어나고 있으며, 보성 군수(寶城郡守) 이중좌(李重佐)는 우매하고 패려하여 추악한 비방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모두 파직하소서. 광릉 참봉(光陵參奉) 박경진(朴敬鎭)은 용렬하고 비추(鄙麤)하여 처신에 흠이 많으며, 감찰(監察) 이윤언(李胤彦)은 흐리멍덩하고 어리석은데다가 또 해괴한 거동이 많으니, 모두 간태(刊汰)시키어 사로(仕路)를 맑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중좌 외에는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정언 이광직(李光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당후 실관(堂后實官)153)  은 청선(淸選)에 속하는데, 안치택(安致宅)과 현광우(玄光宇) 같은 우매하고 용렬한 사람을 외람되이 추천하여 물의(物議)가 시끄럽습니다. 이 두 사람을 모두 그 추천에서 지워버리고 추천한 사람도 책임을 물어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영릉 참봉(英陵參奉) 이담년(李聃年)은 위인이 누열(陋劣)하여 초사(初仕)에 합당하지 않으니, 빨리 파직시키도록 명하소서."
하니, 지나치다고 비답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호남 심리사(湖南審理使)의 별단(別單)으로 인하여 진전(陳田)을 개량(改量)하는 일은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으니 지금 거행하는 것이 합당하겠으나, 도신(道臣)은 공무(公務)가 많아서 일일이 꼭 직접 살피지 못할 것이요, 설혹 묘당(廟堂)에 품보(稟報)하더라도 신 등은 모두 두서를 모르니 어떻게 지휘하겠습니까? 원경하(元景夏)는 호남의 일을 익히 알고 또 양전(量田)하는 방법에 대해 밤낮으로 강구(講究)하여 지성으로 획책(劃策)하고 있으니, 지금 만일 임무를 맡겨 내려 보내면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인하여 원경하에게 호남 진전 개량사(湖南陳田改量使)를 겸하게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이 며칠 전에 상소한 글의 말미에 서류(庶流)를 소통(疏通)시키자고 말하였는데, 고려조(高麗朝)로부터 서얼(庶孽)을 소통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전현(前賢)들이 말한 바는 다만 미관 말직만을 허락하자는 것뿐이요, 청선(淸選)의 직에 소통시키자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요즈음같이 명분이 점차 해이해지는 날을 당하여 어찌 이런 길을 열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주진이 말하기를,
"신이 한 말도 역시 인재(人才)가 옹체(壅滯)되는 것을 애석하게 여긴 데 불과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동래(東萊)의 차왜(差倭)가 관소(館所)에 머뭇거리며 본국(本國)에 돌아갈 의향이 없습니다. 변신(邊臣)이 비록 음식 제공을 거두기를 청하려고 하나, 역시 책망을 들을까 두려워합니다. 다시 통역[舌人]을 보내어 이해(利害)로써 설득시키는 것만 못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보다 앞서 관왜 지공 감관(館倭支供監官)의 무리들이 중간에서 이익을 도모하여 쌀에 모래를 섞는다든지 나무를 숯과 바꾸는 등 간교한 일이 날로 심해졌는데, 쌀을 운반하는 감관(監官)은 일이 발각되자 효시(梟示)하였으므로 임금이 또 교린(交隣)을 하는 데는 마땅히 신의로 해야 한다는 뜻으로 하교하여 엄중히 신칙하였다.

 

7월 12일 임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이조·병조의 당상(堂上)과 각사(各司)의 관원(官員)을 소견(召見)하고 하교하기를,
"오늘 대관(大官)으로부터 겸춘추(兼春秋)에 이르기까지 모두 입시(入侍)하였는데, 겸춘추의 아들이 영의정의 아들보다 나은 자도 있겠으나, 단지 문벌(門閥)의 고하(高下)로 인하여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쓰이지 못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수용되지 못하여 띳집[窮廬]에서 억울함을 품은 자가 많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중인(中人)과 서얼(庶孽) 중에도 역시 양반(兩班)보다 우수한 자가 매우 많은데, 혹은 과제(科第)에 뽑혔어도 저지하고 억제하여 등용하지 않고 있다. 중국(中國)에서는 비록 노예(奴隷)라도 급제하면 한림(翰林)이 되는데, 이는 모두 우리 나라의 규모가 매우 좁아서 그렇게 된 결과이다. 그러나 국조(國朝)의 성헌(成憲)을 가지고 말한다면 중인·서얼과 사부(士夫)를 어찌 혼용(混用)할 수야 있겠는가? 이판(吏判)의 뜻이 공평하고 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런 길이 한번 열리게 되면 장래에 반드시 관방(官方)154)  이 문란해지는 폐단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이와 같이 인견(引見)한 것은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또 옥(玉)이 도리어 돌[石]이 된다고 한 것은 여러 신하들이 직분을 다하지 못함을 비유한 것이고, 돌이 옥이 된다고 한 것은 여러 신하들이 직분을 다하였음을 비유한 것이다. 돌이 옥이 된다고 함은 곧 국가에서 반드시 돌이라 하여 버리지 않는 것이고, 옥이 돌이 된다고 하는 것은 곧 국가에서 옥이라고 하여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賞)을 주는 데 있어서 천하다고 빠뜨리지 않을 것이며, 벌(罰)을 가하는 데 있어서 귀한 사람이라고 피하지 않을 것이니, 여러 신하들은 각별히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하고 편당(偏黨)을 버리는 데 힘써서 함께 치세(治世)의 충신이 되어야 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는 바로 해동(海東)에 있어서 도덕(道德)의 종주(宗主)인데, 얼마 전에 선죽교(善竹橋)에서 포충(褒忠)을 한 뒤로 아직까지 치제(致祭)의 거조(擧措)가 없었다. 옛날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비간(比干)의 묘(墓)를 봉분(封墳)하였고, 상용(商容)의 여문(閭門)에 경의를 표하였다고 하니, 매우 훌륭한 뜻이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묘에 치제하도록 하라. 또한 옛날에 어제(御製)로 인하여 사현사(四賢祠)를 태학(太學)의 곁에 건립하였는데, 하물며 전조(前朝)의 충신이겠는가? 일찍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보다가 이존오(李存吾)와 정추(鄭樞)의 충성에 깊이 감탄하였다. 지금 이로 인하여 깨달은 것이 있으니, 그의 자손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녹용(錄用)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국가에서 쓰는 것은 향온(香醞)과 법온(法醞)뿐이고, 백화주(百花酒)나 비방문주(比方文酒)는 더욱 쓸 수 없다. 하우(夏禹)가 단지 의적(儀狄)155)  은 멀리했지만 술을 버리지 못한 것에 대해 나는 마음에 일찍이 개탄하였다. 국가의 흥망(興亡)이 오로지 여기에 관계되는데, 지금 만일 이러한 명목(名目)들을 버리지 않는다면 후세에 이 명목을 상고하여 이 술을 찾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내자시(內資寺)의 문서(文書) 중에 이 두 가지 술을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이덕중(李德重)이 청하기를,
"무신년의 변란(變亂)156)   때에 청주(淸州)의 효로 장사(效勞將士) 2등 공신(二等功臣) 가운데 제직(除職)할 만한 사람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명단을 적어 장문(狀聞)하게 하여 바로 녹용(錄用)하소서."
하니, 옳게 여겼다.

 

7월 13일 계미

역관(譯官) 안명열(安命說)과 황력 재자관(皇曆䝴咨官) 김태서(金兌瑞) 등이 《신법역상고성후편(新法曆象考成後編)》을 구납(購納)하였고, 일관(日官) 안국빈(安國賓)이 신수 제법(新修諸法)을 배워 왔으며, 역관 현덕연(玄德淵)이 《세원록(洗寃錄)》을 구납하였는데, 모두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4일 갑신

부수찬        홍중효(洪重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가만히 생각건대, 도성(都城)을 수축(修築)하는 역사(役事)는 결코 시행할 수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경도(京都)를 지킬 수 없는 것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성(城)이 견고하지 않은 것은 거기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둘레가 넓고 군령(軍令)이 상응하지 않은 것이 첫째입니다. 사람과 가축은 많은데 저장된 식량이 적어서 양식을 대어주지 못하고, 땔감이나 꼴을 주지 못하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사람이 태반은 성외(城外)에 사는데 성내(城內)에 적(賊)이 들어와서 근거지로 삼을 때 적이 도리어 주인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 세 번째입니다. 안현(鞍峴)·팔각현(八角峴)·만리현(萬里峴)·우수현(雨水峴)이 성중(城中)을 부압(俯壓)하여 적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네 번째입니다. 두모포(豆毛浦) 위쪽으로는 강세(江勢)가 급하고 높은데, 동교(東郊)는 평탄하여 막혀 있는 장애물이 없는 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이는 신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바로 예로부터 전해 오는 말이니, 비록 손무(孫武)·오기(吳起) 같은 이가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 말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성조(聖租)께서 여기에 국도(國都)를 정한 지 거의 4백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로 정한 것은 도리(道理)의 균일함을 취하였고, 형세의 편리함을 근거하였을 뿐이요, 이 한 성(城)으로써 지킬 만하다고 여긴 것은 아닙니다. 그리하여 축성(築城)하던 초기에 8로(八路)의 백성을 역사시켜 수년 뒤에 이루었지만, 오히려 높낮이가 같지 않고 소밀(疎密)한 것이 서로 섞여서 사치스럽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왕공(王公)이 설험(設險)하는 것이 성황(城隍)에 있지 않다는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영릉(英陵)157)                  과 선릉(宣陵)158)                  께서는 성군(聖君)을 이어 오면서 나라의 법도와 기강을 세움에 있어서 규모가 넓고 원대하여 무릇 집을 짓고 담을 쌓고 지붕을 잇는 방법에 있어서 빠뜨림이 없이 모두 갖추었지만 도성을 개축(改築)하였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어찌 성지(聖智)가 못미쳐서 그러하였겠으며, 재력이 모자라 그러하였겠습니까? 우리 숙고(肅考)에 이르러서는 상성(上聖)의 자질로 거듭 빛나는 운회(運會)를 이어받아 지혜가 만물에 골고루 미치고 덕화(德化)가 모든 백성에게 널리 펴져서 임어(臨御)하신 지 50년 동안에 장원한 규모와 큰 계획으로 흔들리지 않는 터전을 세우고, 무궁한 왕업을 전하여 주는 일들을 순차적으로 닦고 실천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마는, 성을 수축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힘을 쓰지 않았습니다. 당시 장상(將相)과 기구(耆耉)들의 깊은 뜻과 장원한 계획이 오늘날에 비교할 수 없는데도 여기에 대하여 진청(陳請)한 자가 없었습니다. 유독 고 상신(相臣) 이유(李濡)가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축조하여 급할 때에 대비하자고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의논한 자들은 옳지 못한 계획이라고 말하였으니, 이 어찌 당시의 조정 의논도 역시 도성은 기필코 지킬 수 없음을 안 것이 아니겠습니까? 큰 역사(役事)의 뒤에 정유년159)                  ·무술년160)                  의 기근과 여역(癘疫)을 거듭 당하여 사망자들이 서로 연달아 거의 떨쳐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으니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도 족히 징계할 만하고, 또 옛사람과 지금 사람들이 기술이 서로 미치지 못합니다. 신이 고성(古城)의 축조한 흔적을 보니, 석체(石體)가 튼튼하고 제도가 절박하여 갑자기 움직일 수 없는데, 지금의 축성(築城)한 돌은 대부분 머리는 크고 끝은 뾰족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비록 아름다우나 그 중간이 흔들리기 쉬위니, 장단점이 이렇게 서로 다릅니다. 더군다나 다시 성지(城池)로써 나라를 견고하게 하려는 것은 계획 중에 하책(下策)입니다. 다듬지 않은 서까래와 흙으로 쌓은 계단이 좋습니다. 우공(禹貢)161)                  에서 오복(五服)162)                  에 문교(文敎)를 펴고 무위(武威)를 떨친 것이 내외(內外)에 따라 제도를 달리하였다고는 하였으나, 외어(外御)를 폐지하고 내비(內備)에 힘썼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 아른 봄에 무지개가 해를 꿴 이변과 한여름에 상설(霜雪)이 내린 재앙은 모두 옛날에도 드물었던 변괴입니다. 옛날의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정(靜)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고 동(動)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전하께서 비록 조석으로 부지런하고 삼가하여 일심으로 천지 신명(天地神明)을 대하시고, 수성(修省)으로써 재앙을 그치게 하고, 안정(安靜)으로써 진정(鎭定)시키려 하나, 오히려 천심(天心)을 즐겁게 하지 못하고, 민정(民情)을 동요시킬까 두려운데, 지금 도리어 천명(天命)을 어기어 재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백성을 부려 원망을 쌓으려고 하십니다. 가령 혹시 높은 성을 완성하지 않았는데 국고(國庫)는 탕진되고 백성은 피곤하며, 외구(外寇)가 이르기 전에 내환(內患)이 먼저 싹튼다면, 그때에 비록 뉘우치더라도 또한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들도 이 거사가 잘못된 계획이라는 것을 어찌 진실로 모르겠습니까마는, 여러 날 동안 귀를 기울였으나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말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성을 쌓자는 의논을 드리는 자들이 적극성을 띠고 있고, 성명(聖明)께서는 그 말을 경청(傾聽) 때문에 중노(重怒)를 범하여 성지(聖旨)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니, 신은 그윽이 안타깝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삼군문(三軍門)에 내린 절목(節目)은 도성을 축조하려는 것이 아니고 수즙(修葺)하려는 것이다. 나의 뜻은 백성을 위하는 데 있어 비록 백 사람이 흔들더라도 결코 동요되지 않을 것이다. 진달한 바는 매우 오활하다."
하였다.

 

7월 15일 을유

밤에 유성(流星)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이재(李縡)를 대사헌으로, 조명교(曺命敎)를 대사간으로, 이수해(李壽海)를 사간으로, 윤지태(尹志泰)를 헌납으로, 김상복(金相福)을 교리로, 이장오(李章吾)를 승지로 삼았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에게 수서(手書)를 내리어 해래 승지(偕來承旨)를 시켜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7월 16일 병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8일 무자

임금이 육상묘(毓祥廟)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다.

 

7월 21일 신묘

문학(文學) 김상철(金相喆)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유신(儒臣) 윤광소(尹光紹)의 일에 대하여 이미 조그마한 견해가 있으니, 어찌 그냥 말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듣건대, 금오(金吾)에서 장(杖) 1백에 유(流) 3천 리로 조율(照律)하였다고 합니다. 윤광소가 말미의 행차에 역마(驛馬)를 탄 것은 비록 서툴고 잘못된 버릇의 소치이겠지만, 찰방(察訪)의 장계가 이미 올라와 스스로 법(法)에 저촉되었으니 형률에 의하여 편배(編配)시키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다만 수장(受杖)하는 한 조항에 대해서는 의논할 만한 여지가 있습니다. 조정에서 유신을 대우하는 데 있어서 보통 신료들과 달리하는 것은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 직책이 경연(經筵)에서 지존(至尊)을 가까이 모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윤광소가 관함(館銜)을 지녔는데 사패(司敗)163)  에 내려 큰 길거리에서 몸통을 드러내고 1백 도(度)의 형장(刑杖)을 받는다면, 윤광소는 비록 불쌍하게 여길 것이 없지마는, 신은 사사로이 조정을 위하여 사면(事面)을 애석히 여깁니다. 옛날 당(唐)나라 현종조(玄宗朝)에 광주 도독(廣州都督) 배주선(裵伷先)을 장형(杖刑)에 처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장열(張說)이 현종에게 말하기를, ‘형벌을 상대부(上大夫)에게 가하지 않는 것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강교(姜皎)가 조당(朝堂)에서 장형(杖刑)을 받았는데, 당시 강교는 벼슬이 3품(三品)에 올라 있었습니다. 어찌 조례(皁隷)처럼 대접할 수 있습니까? 지난 일이야 돌이킬 수 없지마는 어찌 다시 전번의 실수를 되풀이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하자, 현종이 깊이 옳게 여겼습니다. 우리 선조(先朝) 때에도 고 판서(判書) 이세화(李世華)가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있을 때에 검전(檢田)을 잘못한 것으로 해서 결장(決杖)의 형률을 받게 되었는데, 고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이 장열의 말을 인용하여 차자를 올렸었습니다. 이세화는 한낱 수신(守臣)인데도 김수항이 차청(箚請)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는데, 지금 윤광소는 관직이 비록 낮지마는 곧 또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이니, 수신에 비교하여 사체(事體)가 역시 차이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걸린 죄가 간범(干犯)의 중죄(重罪)가 아니니, 유찬(流竄)으로 감처(勘處)하면 공법(公法)을 펼 수가 있는 것이고, 형장을 속죄(贖罪)로 허락하여 줌은 왕부(王府)164)  에 있었던 일이니, 성조(聖朝)에 있어서도 또한 예의로써 부리는 아름다운 덕에 해롭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술한 바는 이미 하교하였다."
하였다.

 

근시(近侍)를 특별히 보내어 일신(一新)의 충렬사(忠烈祠)와 나주(羅州)의 정렬사(旌烈祠)와 임진 왜란 때 순절(殉節)한 여러 신하들에게 사제(賜祭)하고, 이어서 고경명(高敬命)의 후손 고한원(高漢元)을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호남 구관 당상(湖南句管堂上) 원경하(元景夏)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오광운(吳光運)이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임금이 한참 동안 탄식한 뒤에 말하기를,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남의 공(功)은 잊기 쉽다.’라고 하였는데, 진 문공(晉文公)도 역시 개지추(介之推)의 공을 잊었었다. 오광운·홍경보(洪景輔)는 모두 국가에 공이 있었는데, 내가 믿었던 사람들이 서로 잇따라 작고(作故)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하였다. 비국 당상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오광운은 재학(才學)이 아까울 뿐만 아니라 평일에 나라를 위하는 정성도 지극하였습니다. 지난번 무신년165)  에 만약 오광운이 진달하여 설국(設鞫)하지 않았더라면 국가가 지금까지 보존되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이 사직(社稷)에 있어 상훈(賞勳)을 내렸어야 마땅하였는데, 상훈을 내리지 못하였다. 오광운과 홍경보에게 모두 정경(正卿)을 특별히 증직(贈職)하고 상수(喪需)와 장수(葬需)를 예부(例賻)하는 외에 특별히 돌보아 주어 나의 뜻을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오광운은 춘방(春坊)166)  에 있을 때부터 임금과 서로 알게 되었다. 무신년 변란의 초기에는 임금이 안연(晏然)히 염려하지 않았었는데, 오광운이 청대(請對)하여 화기(禍機)가 매우 급박함을 지적해 알리자, 그날 밤에 비로소 설국(設鞫)하고 적정(賊情)을 알아내어 궁성(宮城)을 호위(扈衛)하기를 명하였으니, 이는 대개 오광운의 힘이었다. 난리가 평정된 뒤에 임금이 봉훈(封勳)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여 그만두고 말았다. 그의 벼슬은 아경(亞卿)과 양관 제학(兩館提學)167)  에 이르렀으며, 알고 있는 것은 아뢰지 않는 것이 없어서 전후(前後)에 장주(章奏)한 것이 무릇 수만 마디였다. 문장(文章)은 일세(一世)에서 추앙받아 국외인(局外人)으로서 문형권(文衡圈)168)  에까지 들어 있었으니 그를 소중하게 여김이 이와 같았다.

 

7월 22일 임진

조영국(趙榮國)을 부제학으로, 이택징(李澤徵)을 장령으로, 이제암(李齊嵒)·정권(鄭權)을 지평으로, 이훈(李塤)·이장하(李長夏)를 정언으로 삼았다.

 

7월 23일 계사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4일 갑오

도목 정사(都目政事)169)  를 행하여 김시혁(金始爀)을 공조 판서로, 윤득재(尹得載)를 헌납으로, 조명건(趙明健)을 부수찬으로, 윤득화(尹得和)를 개성 유수로, 심봉징(沈鳳徵)을 공홍 병사(公洪兵使)로, 구성필(具聖弼)을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과 병조 판서 김약로(金若魯)가 담당한 정사였다.

 

7월 25일 을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7월 26일 병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7일 정유

정언 이훈(李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강도(江都)에 축성(築城)하는 일은 진실로 보장(保障)을 위한 뜻이었는데, 일을 맡은 자가 적합하지 못하여 그 많은 재물과 힘을 허비한 채 한 번 장마를 겪은 뒤에 모두 허물어지고 말았으며, 또 민심(民心)을 크게 잃어서 원망하는 소리가 무더기로 일어났습니다. 비록 성(城)이 높아서 백 척(尺)이 되고 견고하기가 철벽(鐵壁) 같다고 하더라도 신은 아마도 산이나 개울의 험고(險固)함이 여러 사람의 마음으로 이룬 성(城)만 못할 것이라 여깁니다. 전후(前後)로 왕심(往審)한 신하들은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척(咫尺)의 거리밖에 안 되는 강도에서 천총(天聰)을 속이는 것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다른 것이야 또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전 유수(留守) 김시혁(金始爀)은 일을 그르친 벌을 받아야 마땅하고, 내려가 살펴본 신하들도 책벌(責罰)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박창윤(朴昌潤)은 대관(臺官)이 되어 오늘에 한 가지를 정계(停啓)시키고, 내일 또 하나를 정계시켰으며, 그 다음날은 정사(呈辭)170)  하고 들어가 버렸으니, 거조(擧措)가 망측스러워 청문(聽聞)이 해괴하게 여겼습니다. 마땅히 개정(改正)하도록 명하소서. 이협(李埉)은 남읍(南邑)을 맡아 다스릴 때에 조정에서 들으면 능(能)하다고 하는데, 시골에서 들으면 탐묵(貪墨)하다고 하니, 바로 옛날 제(齊)나라 아 대부(阿大夫)171)  란 자의 유(類)가 아니겠습니까? 또 나주 목사(羅州牧使)의 거취(去就)로 볼 것 같으면 이름이 백간(白間)172)  에 올라 있는데도 바쁘게 부임(赴任)하였으니, 이 역시 몰염치한 일단(一端)입니다.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교활한 관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알게 하소서. 지난번 노인에게 가자(加資)한 것은 실로 국가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성전(盛典)이니, 교지(敎旨)를 만들어낸 뒤에는 마땅히 각도(各道)에 송부하여 나누어 주게 하여야 하는데, 이조(吏曹)의 서리배(書吏輩)들이 사사로이 사람을 보내어 강제로 값을 바치게 하여 마치 공명첩(空名帖)173)  을 발매(發賣)하는 듯하였으니, 성조(聖朝)에서 은혜로 베푸는 특전이 도리어 간특한 관리들의 이욕을 채워 주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엄중히 조사하여 무겁게 다스림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심도(沈都)174)  의 축성 문제는 바야흐로 처분이 있을 것이다. 그밖에 진술한 내용은 어찌 이토록 협잡(挾雜)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리(下吏)에 있어서는 해조(該曹)에서 치죄(治罪)할 일이니, 어찌 비답을 내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헌부 【장령 이택징(李澤徵)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좌윤(左尹) 이세진(李世璡)은 연기(年紀)가 쇠모(衰耄)하고 청송(聽訟)하는 데 비방이 많으니, 그 직책을 체개(遞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공조 정랑 박인원(朴麟源)과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 한덕룡(韓德龍)은 하향(夏享) 때 집사(執事)로 차출되었는데, 적간(摘奸)하는 데에 탈을 잡혀 정위(廷尉)에 내려지게 되어서는 거짓을 꾸며 납공(納供)하였습니다. 지평 이창유(李昌儒)는 한권(翰圈)175)  의 빠르고 느린 것에 대하여 간섭할 바가 아닌데, 신칙(申飭)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니, 대간(臺諫)의 체통을 크게 잃었습니다. 모두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보다 앞서 이창유가 한권이 빨리 행하여졌다고 아뢴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정언 이장하(李長夏)가 상소하기를,
"사문(四門)의 영제(禜祭)176)  는 진실로 마땅히 한 가지 규례로 행제(行祭)하여야 할 터인데, 지난번 행제에서 혹은 문상(門上)에, 혹은 문하(門下)에 거행하여 거조가 뒤섞였습니다. 문상에서 행제한 헌관(獻官)은 파직시키는 벌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대소(臺疏)에서 강도(江都)의 축성(築城)을 간심(看審)한 여러 신하들을 청죄(請罪)한 일로써 인구(引咎)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나오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고 하교하기를,
"이훈(李塤)은 대간(臺諫)에 처음 올라서 종이에 가득히 협잡(挾雜)하는 말을 써서 한 번의 운필(運筆)로 장상(將相)을 구날(構捏)하였으니, 그 버릇을 차마 바로 볼 수가 없다. 특별히 삭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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