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경자
헌부(憲府) 【지평 이제암(李齊嵒)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공조 참의 이기헌(李箕獻)은 사람됨이 흐리멍덩하고 나이가 너무 많아서 능원(陵園)을 봉심(奉審)할 때 무릎을 꿇어 절할 수 없으니,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강진 현감(康津縣監) 박성룡(朴聖龍)은 자취가 바르지 못하고 행실이 음험(陰險)하여 일찍이 호읍(湖邑)에 부임하였을 때에 전결(田結)을 떼어내어 착복하였으니, 파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안 현감(扶安縣監) 신유한(申維翰)은 사람됨이 간사하여 남의 지적을 받은 지 이미 오래이며 가는 곳마다 해독을 끼쳐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니, 체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일 신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3일 임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송창명(宋昌明)을 사간으로, 윤동준(尹東浚)을 헌납으로, 박창윤(朴昌潤)을 정언으로, 조관빈(趙觀彬)을 예조 판서로, 김상철(金尙喆)을 수찬으로, 엄우(嚴瑀)를 부수찬으로, 이성중(李成中)·원경순(元景淳)을 승지로 삼았다.
이때에 장마가 오래 계속되어 두 번째 영제(禜祭)를 지냈으나, 끝내 날씨가 개지 않으므로 대신(大臣)을 보내어 종묘(宗廟)·사직(社稷)에 제사지냈다.
임금이 몸소 제문(祭文)을 지어 승지(承旨)를 보내어 효장묘(孝章廟)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8월 4일 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5일 갑진
사학 유생(四學儒生) 홍계억(洪啓億)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성명(聖明)께서는 ‘존주(尊周)177) ’ 두 글자로써 특히 조종(祖宗)을 본받은 선무(先務)로 삼았는데, 간책(簡冊)을 인쇄하는 데 있어서 의리(義理)를 중도에 변경하여 갑자기 ‘주(周)’자를 ‘왕(王)’자로 바꾸었으니, 신 등은 여기에 ‘왕’이라고 한 것은 어느 왕을 가리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천하(天下)를 지배하는 왕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천하를 지배하는 왕은 누구입니까? 이것을 《춘추(春秋)》에서 왕정월(王正月)이라고 일컫는 그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부자(夫子)178) 가 《춘추》를 지을 때에 주실(周室)이 비록 미약하기는 하나 왕통(王統)을 그래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왕정월이라고 특서(特書)하였습니다. 만일 주실로 하여금 당시에 이미 바꾸었더라면 이른바 왕정월은 장차 오(吳)·초(楚)의 참왕(僭王)에게로 돌아가고 주왕(周王)에게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니, 신 등은 생각건대, 자신도 모르게 머리털이 솟구치고 마음이 떨립니다. 대부(大夫)와 사우(士友)들에게 물어보니, 말하기를, ‘성명의 뜻이 아니고 승지 조명리(趙明履)의 죄이다. 자신이 만부(灣府)179) 에 있을 때에 우리 나라의 사정(事情)이 저들 나라에 흘러 들어감을 직접 보고 천심(天心)180) 을 공동(恐動)한다고 하여 마침내 고치고야 말았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라면 황단(皇壇)181) 도 철거하여야 하고 《춘추》도 읽을 수 없을 것이며, 만동묘(萬東廟)182) 나 환장암(煥章庵)183) 도 헐어야 합니다. 아! 저 사람의 말이 한번 입밖에 나와 성명께서 전수(傳授)하신 가법(家法)으로 하여금 파묻히고 어두워서 나타나지 않게 하였으니, 비록 《춘추》의 난적(亂賊)이라 하고 열성(列聖)의 죄인(罪人)이라 해도 가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어제상훈(御製常訓)》 가운데 ‘존주(尊周)’ 두 글자를 그대로 두어 선열(先烈)들의 뜻을 밝히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한 글자를 고치는 데도 역시 깊은 헤아림이 있었다. 나이 어린 너희들이 어찌 감히 경솔하게 의논하느냐?"
하였다.
좌승지 조명리(趙明履)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후(前後)로 대답한 바에는 이미 한 글자도 고치기를 청한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만부(灣府)에 있었던 일을 거론하였는데, 신이 진술한 바는 대략, ‘일찍이 만상(灣上)에 있으면서 그들의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일에 이르러서는 성려(聖慮)가 지나치십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로 그 하단(下段)을 떼어 버리고 단지 상단(上段)의 만사(灣事)만 가지고 곧바로 망령되고 치우치다는 죄과로 몰아 붙여 《춘추》의 난적(亂賊)과 열성(列聖)의 죄인으로 지목하였으니, 바라건대, 파직하고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시골에 물러가게 하여 주소서."
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이 《상훈》의 인본(印本)은 당초와 다르게 ‘주(周)’ 자를 ‘왕(王)’ 자로 바꾸었습니다. 대저 존주(尊周)나 존왕(尊王)은 그 의의(意義)가 같은지 다른지에 대해 굳이 논쟁할 것은 없습니다마는, ‘주’자의 좋은 것을 가지고 고친 것은 가히 애석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은 육합(六合)184) 이 혼몽(昏蒙)하니 모든 사령(辭令)을 마땅히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한 개의 글자라도 또한 박절하게 빼어 버리게 되면 우리 임금님께서 사모하시는 비풍(匪風)·하천(下泉)185) 의 생각이 그것에 가려져서 나타나지 못합니다. 오직 성명(聖明)께서는 초본(初本)을 준용(遵用)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한 자의 뜻은 진실로 옳다. 판본(板本)이 사고(史庫)에 있으니 어찌 뒷날에 민멸(泯滅)될 수 있겠느냐?"
하였다.
8월 6일 을사
임금이 육상묘(毓祥廟)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다.
8월 7일 병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가을 장마로 길이 질어서 민폐(民弊)가 많다는 이유로 능행(陵行)을 물려서 정하자고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소(儒疏)의 말단(末端)에 황지(黃紙)를 붙이고 숭정 연호(崇禎年號)를 썼으니, 이 또한 해괴한 일이다. 비록 유중(留中)하게 하였으나, 이 사람들은 틀림없이 명소(名疏)라고 생각하여 전송(傳誦)할 것이니, 이 소문이 삽시간에 압록강(鴨綠江) 북쪽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다. 나는 이름나기를 좋아하는 임금이 아니고, 특별히 선인(先人)들의 훌륭한 점을 계술하고 후손들을 깨우쳐 주려는 의도로 우연히 《상훈》의 문자를 만들었는데, 혹시라도 시휘(時諱)에 관계된다면 고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저 유생(儒生)들의 거사는 어찌 괴이하지 않는가? 찬선(贊善)의 상소는 매우 종용(從容)하였으니, 임금에게 고하는 말은 이같이 하여야 마땅하지 않은가? 강도(江都)에 축성(築城)하려고 하니 이훈(李塤)의 상소가 있었고, 경성(京城)을 수축하려고 하니 홍중효(洪重孝)의 상소가 있었으며, 《상훈》을 기술하려고 하니 유생들의 상소가 있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나에게서 나온 것인데, 도리어 사단(事端)을 야기하였으니, 앞으로 닥칠 일을 알 만하다. 나는 앞으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하였다. 이때 해가 저물었는데도 아직까지 수라를 들지 않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힘껏 청하니, 한참 있다가 허락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청하기를,
"강도에 축성한 뒤에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성기 별장(城機別將)이나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관성장(管城將) 예에 의거하여 중군(中軍)으로써 수성장(修城將)을 겸임시켜 성(城)에 대한 일을 전념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어서 유수(留守)가 상경(上京)할 때에는 수성장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비록 체역(遞易)할 때라도 서로 면대하여 교대하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도록 명하였다.
헌부(憲府) 【장령 이택징(李澤徵)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병사(兵使) 우하형(禹夏亨)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승선(承宣)을 욕하고 의금부 당상관을 나무랐습니다. 청컨대 잡아다가 문초하여 엄하게 처단하소서. 도승지 윤휘정(尹彙貞)은 남한 산성을 감제(監劑)할 때에 공(公)을 빙자하여 사욕을 채웠으니 파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형조 정랑 최길조(崔吉祚)는 외람되게 본직(本職)을 제수하니 물정(物情)이 해괴하게 생각합니다.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 이인석(李仁錫)은 남몰래 승륙(陞六)186) 을 도모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생각합니다. 모두 태거(太去)시키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전계(前啓)의 이기헌(李箕獻)·박성룡(朴聖龍)·신유한(申維翰)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8월 8일 정미
전라 감사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물에 빠져 죽은 나주(羅州) 사람 12명에게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8월 9일 무신
김상로(金尙魯)·정필녕(鄭弼寧)을 승지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응교로, 홍익삼(洪益三)을 부교리로, 황경원(黃景源)을 수찬으로, 조돈(趙暾)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조명리(趙明履)가 지난번에 유생(儒生)들로부터 벌을 당하여 묵명(墨名)187) 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비록 하교(下敎)로써 묵명은 해제하였으나 벌명(罰名)은 아직까지 학당(學堂)의 벽에 붙어 있다고 한다. ‘춘추 난적(春秋亂賊)…’ 등의 글귀를 어찌 잠시라도 붙여 둘 수가 있겠는가?"
하고, 빨리 떼어 버리라고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유생들의 소장(疏章) 가운데 황지(黃紙)에 숭정(崇禎)이라고 쓴 것은 매우 해괴한 일이다. 소본(疏本)은 전정(殿庭)에서 불사르고 소두(疏頭)와 소장을 지은 장의(掌議) 및 색장(色掌)은 모두 파면시켜 서인(庶人)으로 삼도록 하라."
하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선비도 역시 서인이니 이 구절은 고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파면시켜 서인으로 만들라고 한 것은 관학(館學)에 끼지 못하게 하는 의도이니, 그렇다면 ‘인(人)’을 ‘민(民)’ 자로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기왕 죄로 다스리지 않고 너그럽게 보아 줄 바에는 이들도 역시 사자(士子)이니 이와 같이 대접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들은 이미 청토(請討)하지 않고 도리어 비호하고 있다. 이 한 구절이 무슨 애석하게 여길 만한 것이 있어서 꼭 빼어 버리려고 하는가? 이 뒤로는 공사(公事)는 승정원(承政院)에 머물러 두고, 좌상(左相)을 파직하도록 하라."
하니, 송인명이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승정원에 머물러 두라는 하교는 이것이 무슨 하교이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지은 《상훈(常訓)》은 실제로 선덕(先德)을 유양(揄揚)하고자 함이었는데, 도리어 선조(先祖)를 욕되게 하였으니, 나는 오늘 밤에 방황하여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간절히 간하였으나, 마침내 명령을 취소하지 않았다. 예조 참판 원경하(元景夏)가 빠른 걸음으로 전(殿)에서 내려가 뜰 아래 부복하고, 관(冠)을 벗은 뒤에 머리를 조아리니, 그 소리가 전상(殿上)까지 들렸다. 임금이 일어나서 올라오라고 명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만일 그 하교를 빨리 중지하지 않으시면 신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하로서 이와 같은 이가 있으니 훗날 원량(元良)188) 은 믿을 바가 있겠다. 원경하는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으니, 옛날 사직신(社稷臣)이라고 할 만하다. 특별히 지중추(知中樞)로 임명하여 가장(嘉奬)하는 뜻을 보이겠다."
하고, 이어서 공사를 승정원에 머물러 두게 한 것과 좌상을 파직하라는 하교를 거두어 들이라고 명하였다. 원경하가 빠른 걸음으로 나아와서 말하기를,
"오늘 지나친 거조는 오로지 유소(儒疏)로 말미암았으니, 소두를 멀리 귀양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원경하를 쇄수 판서(碎首判書)라고 지목하였는데, 그것은 머리를 조아려서 승탁(陞擢)하였기 때문이었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늘 지나치게 화를 내어 과격한 거조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지금 비록 반한(反汗)189) 한다는 분부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처음부터 참작하시어 이와 같은 과격한 일이 없었던 것만 하겠습니까? 신은 소유(疏儒)의 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다만 범상하지 않은 일이 있음을 듣고 급히 들어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조현명의 손을 잡고 힘써 행공(行公)하기를 부탁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신이 비록 하찮은 사람이지마는 명색이 대신(大臣)입니다. 대신의 체면으로서 이와 같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성교(聖敎)가 이같이 극진하시니, 마땅히 물러가서 차자(箚子)를 올리겠습니다."
하였다.
8월 10일 기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8월 12일 신해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속대전(續大典)》 형전(刑典)에, ‘비부(婢夫)가 처의 상전(上典)을 통간(通奸)하였으면 부대시 처참(不待時處斬)한다.’고 하였고, 그 주(註)에는, ‘겁간(劫奸)을 이루지 못한 자는 장(杖) 1백에 유(流) 3천 리에 처한다.’ 하였는데, 원율(元律)은 선조(先朝) 신유년190) 에 대신(大臣)들에게 수의(收議)하여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상진(李尙眞)·김수항(金壽恒)·정지화(鄭知和) 등의 의논을 따라 정한 것이고, 그 주(註)는 범인(凡人)의 겁간 미성률(劫奸未成律)에 의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 사족(士族)의 부녀자를 겁간한 자는 비록 미수에 그쳤더라도 때를 가리지 않고 처참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이른바 처의 상전이 설혹 시골의 서인(庶人)이라도 그 비부가 겁간한 경우 마땅히 범인이 사족의 부녀를 겁간한 율에 따라야 할 것인데, 어찌 범연하게 범인의 겁간한 예로써 시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통간·겁간을 막론하고 비부에 있어서는 그 죄가 동일한 것이니, 때를 가리지 않고 처참하는 율을 시행함이 옳겠습니다. 만일 겁간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여 굳이 구별한다면 교형(絞刑)에 처하든지 부대시 처참하는 것이 옳을 것이니, 결코 장형(杖刑)과 유형(流刑)의 형벌만 시행할 수 없습니다. 또 처의 상전이 비부와 통간한 경우 율문(律文)에 거론(擧論)한 것이 없기 때문에, 형조(刑曹)에서 다만 음녀(淫女)로 규정지어 속공(屬公)할 뿐이고, 아무 탈 없이 그냥 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의 풍속에 비부는 자기의 종과 같이 생각하는데, 더군다나 근래 여염(閭閻) 사이에서 비주(婢主)의 명분(名分)이 크게 무너져서 비부로서 처의 상전을 능욕하는 자가 흔히 있으니, 처의 상전을 통간하는 변고는 역시 명분이 크게 무너져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 남녀(男女)를 같은 율로 처치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니, 이는 비단 엄법(嚴法)으로 통징(痛懲)할 뿐만 아니라 교훈도 역시 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새로운 율에 관계되는 일이니, 형조로 하여금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8월 13일 임자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상소한 주된 뜻이 본디 유소(儒疏)와 모두 같지 않은 것이 있으나, 그 의논한 일은 한 가지이니, 죄벌(罪罰)을 내림에 있어 유독 달리할 이치가 없는데, 십분(十分)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또 사사로이 생각건대, 경상(卿相)이라고 하는 사람도 전일에는 사자(士子)였고, 사자는 뒷날 경상이 될 사람입니다. 그들은 나이가 젊기 때문에 기세가 날카롭고, 그 지위가 낮기 때문에 일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여 대체로 적중하지 못하고 지나친 행위가 많습니다. 이는 바로 부자(夫子)께서 이른바, ‘광간(狂簡)한 소자(小子)이니, 반드시 모두 황헌(黃憲)191) 이나 곽태(郭泰)192) 와 같은 명류(名流)일 수는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열성(列聖) 이래로 그들이 이와 같음을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마는, 대체로 용서하고 아끼어 바야흐로 자라는 것을 꺾지 않은 것은 오직 그들에게 손상을 입힐까 두려워한 것이었으니,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어찌 국가의 원기(元氣)가 사림(士林)에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의 유소에 설혹 과당(過當)한 말이 있더라도 전하께서 바로 사실의 곡절(曲折)을 깨우쳐서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면 그만일 것인데, 어찌하여 갑작스레 죄벌을 더하십니까? 파면시켜 서인(庶人)으로 삼은 데 이르러서는 더욱 이상함이 있습니다. 전고(前古)는 물론하고 아조(我朝) 3백 년 이래로 역적 집안의 후예 외에는 이런 일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연소한 사자들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앞길이 만 리 같은데 하루아침에 강등하여 서례(庶隷)로 삼으니, 국체(國體)가 사기(士氣)에 있어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선비는 죽일 수 있을지언정 욕을 보일 수는 없다.’라고 하였는데, 저들이 사자가 아니라면 그만이겠지마는 진실로 사자일진댄 그들에게 욕을 보이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무릇 전례에 없던 일을 만들어 내어 후손을 위한 계획에 방해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사자를 하천(下賤)으로 강등시키는 일이겠습니까? 저 황지(黃紙)를 붙인 거조는 진실로 지나친 행위로서 성명(聖明)께서 마땅히 놀랄 만한 일이었으나, 그 시초를 따져 보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로부터 시작하여 근세의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박세채(朴世采) 등 여러 선정(先正)들이 이와 같이 하여 관학 유소(館學儒疏)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근래에 와서는 어떠하였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효묘(孝廟) 이후로 원래 연호(年號)를 쓰지 않았는데, 사자의 무리가 단지 선현들이 남겨준 뜻만 계승할 줄 알고 본래의 관규(館規)가 있음을 알지 못하여 이번에 황지를 붙인 일이 있었으니, 그 쓸데없는 짓을 함이 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가지고 성심(聖心)에 지나치게 화를 내어 부존군(不尊君)의 율(律)을 시행하는 데에 이르십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직접 보고 하유(下諭)하려고 하니 곧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8월 14일 계축
함경도 심리사 윤용(尹容)이 복명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형옥(刑獄)에 대한 처결은 이미 서계(書啓)로 보았다. 북로(北路)의 형승(形勝)이 어떠한가?"
하니, 윤용이 대답하기를,
"신이 이번에 다닌 곳은 삼수(三水)·갑산(甲山)에서 서수라(西水羅)까지이며, 또 백두산(白頭山)에 올라서 형편을 두루 살펴 보았습니다. 관방(關防) 가운데 경성(鏡城)의 성이 제1의 성으로서 지금까지 완고(完固)하였는데, 이는 김종서(金宗瑞)와 이수일(李守一) 두 사람이 쌓은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두산 정계(定界)에 대해서는 혹 부족한 곳이 없던가?"
하니, 윤용이 말하기를,
"토문강(土門江)에 목극등(穆克登)의 비(碑)가 있는데 여기서 바라보니, 모두 공활(空闊)하여 쓸모없는 땅이었습니다. 잃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북병사(北兵使)는 나라의 중임(重任)인데 먹을 양식이 없으니, 신의 생각에 경성 판관(鏡城判官)을 혁파(革罷)하고, 황해 수사(黃海水使)나 교동 수사(喬桐水使)의 예에 따라 북병사로 하여금 겸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부령(富寧)은 경성의 인읍(隣邑)으로서 지극히 작고, 지극히 쇠잔하여 모양을 갖출 수 없으니, 경성의 땅을 떼어서 준다면 지탱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탱할 수 있은 뒤에야 지킬 수가 있는데, 이 일은 연혁(沿革)에 관계되는 것이니, 신이 감히 꼭 그렇게 시행하라고 청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8월 16일 을묘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니 왕세자가 시좌(侍坐)하였는데, 찬선 박필주(朴弼周)를 불러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역시 경(卿)의 얼굴을 보았는데, 경도 나의 얼굴을 보고 싶을 터이니 일어나 앉아서 바라보아라."
하자, 박필주가 아뢰기를,
"천안(天顔)을 우러러 뵈오니, 쇠백(衰白)한 것이 왕년(往年)과 달라서 매우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본디 쇠백하지만 경의 쇠약함도 왕년과 다르다."
하였다. 박필주가 말하기를,
"근래에 소유(疏儒)의 일로 성심(聖心)이 격동하고 번뇌하셔서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많이 내리셨습니다. 신은 그 일을 수발(首發)한 사람으로서 어찌 죄는 같은데 벌을 달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선왕의 업적을 계술하고 후손에게 모범을 보이려는 의도로 이 문자(文字)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하였다. 박필주가 말하기를,
"《상훈(常訓)》에 남기신 뜻은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워서 전수(傳授)하려는 심법(心法)을 매우 자세하게 발휘하였습니다. 성학(聖學)의 조예(造詣)가 이와 같이 고명(高明)하신데 어찌하여 가끔 비상한 지나친 거조가 있으십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나는 그것은 지나친 거조가 아니고 고심(苦心)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하였다. 박필주가 말하기를,
"아조(我朝)의 유법(遺法)은 오로지 사기(士氣)를 배양하는 데 있고, 《상훈》에서도 이미 조종(祖宗)을 본받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으니, 지금 이러한 일에도 선조(先朝)를 본받는다면 어찌 성덕(聖德)이 더욱 빛나지 않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얼마 전에 학유(學儒)에 대한 처분은 너그러운 은전(恩典) 중에도 너그러운 은전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 저들이 아무리 무상(無狀)할망정 내가 찬선에게 내린 비지(批旨) 가운데에 면유(面諭)하겠다고 이미 말해 놓고 등대(登對)한 뒤에 개허(開許)하지 않으면 이 어찌 성의라고 하겠는가? 이러한 세도(世道)에 있어서 역시 전에 없던 율명(律名)을 청금(靑衿)193) 에게 개시할 수는 없다. ‘면위서인(免爲庶人)’이라는 네 글자를 지워 버리고 그들을 찬배에서 석방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해조(該曹)에 명하여 찬선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 쌀과 반찬·땔감을 보내주라고 하였다.
8월 17일 병진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이태중(李台重)을 교리로, 한억증(韓億增)을 장령으로, 이휘항(李彙恒)을 헌납으로, 이윤신(李潤身)을 사간으로, 이수덕(李壽德)을 정언으로, 박규수(朴奎壽)를 지평으로, 원경하(元景夏)를 공조 판서로, 남덕로(南德老)를 정언으로, 황정(黃晸)을 대사간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승지로 삼았다.
지평 정권(鄭權)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종묘(宗廟)의 축식(祝式)을 보건대, ‘효증손 사왕신(孝曾孫嗣王臣)’이라고 일컬었는데, 정종(定宗)·문종(文宗)·단종(端宗)·예종(睿宗) 4실(四室)에 대해서는 다만 ‘사왕신(嗣王臣)’이라고만 일컬었고, 인종실(仁宗室)에 대해서는 ‘국왕(國王)’이라고만 일컬었으며, 모두 ‘효증손’이라는 세 글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명종실(明宗室)에는 ‘효증질손 사왕신(孝曾姪孫嗣王臣)’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태묘(太廟)의 축사(祝辭)는 비록 방존(旁尊)에게도 모두 ‘효증손’이라고 일컫는 것이니, 인종실의 ‘국(國)’ 자는 더욱 빨리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열성 실록(列聖實錄)을 상고하게 하고, 홍문관(弘文館)은 예서(禮書)를 널리 참고하게 하고, 대신(大臣)과 외방에 있는 유신(儒臣)들에게 두루 물어서 예의(禮意)에 합치되도록 힘쓰소서."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연석(筵席)에 등대(登對)하는 것은 시골 연리(掾吏)194) 들의 편리한 방법을 다투어 배웠고, 주사(籌司)195) 에서 좌기(坐起)하는 것은 심지어 나무꾼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현질(顯秩)과 청반(淸班)은 마치 한(漢)나라 때 창(倉)·고(庫)로 성씨(姓氏)를 삼은 것과 같고, 내외(內外)의 장수(將帥)는 당(唐)나라에서 번진(藩鎭)을 세습(世襲)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남 지방의 가난한 선비들은 전적(典籍)으로 늙은 사람이 많았고, 서북 지방의 무변(武弁)들은 태반이 출신(出身)으로 죽었습니다. 탕평(湯平)의 절목은 홍범(洪範)196) 의 다섯 번째인 황극(皇極)197) 을 모방하였고, 대대(對待)198) 의 정사는 희획(羲劃)199) 의 음(陰)과 양(陽) 두 가지를 배열한 것과 거의 비슷하나, 이러한 도철(塗轍)을 따르고 고치지 않는다면 신은 《주역(周易)》 태괘(泰卦) 상륙(上六)의 ‘성(城)이 허물어진다.’는 앙화가 있을까 대단히 두렵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권면한 것은 힘쓰겠지만, 이런 지극히 중대한 일은 어찌 한낱 소관(小官)이 경솔히 청할 것이겠느냐?"
하였다.
8월 18일 정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유성(流星)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정준일(鄭俊一)을 승지로 삼았다.
8월 19일 무오
임금이 장차 장릉(長陵)200) 에 나아가서 배알하고, 공릉(恭陵)201) ·순릉(順陵)202) 을 두루 배알하여 능을 봉심(奉審)하고, 효장묘(孝章廟)에도 들러 가려 하였는데, 임금이 심천(深川)에 이르니 냇물이 넘치고 교량(橋梁)이 무너져 있었다. 드디어 도신(道臣) 권적(權𥛚)을 파직하고, 차사원(差使員)은 잡아다가 처치하게 하였으며, 서명구(徐命九)를 경기 감사로 삼았다.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후손을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저녁에 어가(御駕)가 장릉에 도착하여 전배례(展拜禮)를 행한 뒤에 능을 봉심하였다. 이날 밤에 임금이 재실(齋室)에서 유숙(留宿)하였다.
8월 20일 기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과 참포(黲袍) 및 오대(烏帶)를 갖추고 예(禮)에 따라 제사를 행하였다. 이어서 소녕묘(昭寧墓)203) 에 나아가 전배례를 행하고 재실에서 유숙하였다.
8월 21일 경신
밤에 목성(木星)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환궁(還宮)하는 도중에 어가가 신원(新院) 주정소(晝停所)에 도착하여 경기 감사 서명구(徐明九)와 광주(廣州)·양주(楊州)·파주(坡州)·고양(高陽)·교하(交河) 등의 고을 수령(守令)을 불러 보고 농사의 형편과 폐막(弊瘼)을 물어보았다.
어가를 따라갔던 군병(軍兵)들에게 해영(該營)에서 시사(試射)·시방(試放)하게 하고, 전례에 따라 호궤(犒饋)204) 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연달아 동가(動駕)하느라고 찬선(贊善)을 아직까지 다시 접견하지 못하였다. 내일 보고 싶다는 뜻을 주서(注書)는 찬선 박필주(朴弼周)에게 가서 유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2일 신유
윤용(尹容)을 대사헌으로, 이종적(李宗迪)을 대사간으로, 이연덕(李延德)을 집의로, 정광운(鄭廣運)을 장령으로, 정희신(丁喜愼)을 정언으로, 신위(申暐)·윤득재(尹得載)를 부교리로, 김상복(金相福)·한광조(韓光肇)를 지평으로, 이덕중(李德重)을 대사성으로, 윤봉구(尹鳳九)를 진선(進善)으로 삼았다.
찬선 박필주가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상소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만류하였다.
8월 23일 임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여러 날을 동가(動駕)하는 데 마침 장마가 져서 길을 닦느라고 민력(民力)을 많이 허비하였다. 양주·파주·고양·교하 네 고을에는 특별히 대동미(大同米)를 2두(斗)씩 감해 주고, 대동미가 없는 고을에는 전세(田稅)를 감해 줄 것이며, 타읍(他邑)에서 부역하러 온 백성에게는 을해의 군향모(軍餉耗)205) 를 감하여 주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신이 그 동안 멀리 떨어져 있다가 지금 연석(筵席)에 올라와서 감히 소회(所懷)를 아뢰겠습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쓰며 저녁에도 조심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오후가 되면 마음과 기운이 피로해져서 진작(振作)시킬 수가 없으므로 군자는 반드시 여기에서 더욱 조심을 더하였으니, 하루 중에 저녁에도 조심함이 더욱 귀한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의 일생으로 따져 본다면 중년 이후에 해당되는 것이니, 비록 진신 대부(搢紳大夫)로써 말하더라도 모두 만절(晩節)을 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아무리 볼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 시초를 잘 이어 나가지 못하면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제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왕은 더욱 별다름이 있어야 한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초절(初節)은 보전하기 쉽지만, 만절은 보전하기 어렵습니다. 제왕이 비록 시초에는 청명(淸明)한 정사를 하였다 하더라도 만일 이미 다스려진 것으로 편안하게 생각한다면 이는 훌륭한 임금이 못 됩니다. 인정(人情)과 세태(世態)에 이미 익숙하게 되었으니, 어려운 일은 없겠지만 해(害)가 됨은 큽니다. 기구(耆舊)들은 점점 사라져서 조정에 기탄(忌憚)한 신하가 없으면 역시 점점 처음과 같지 못하게 될 것이니, 명군 철벽(名君哲辟)들도 만절을 보전하지 못하는 이가 많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금 성상(聖上)께서는 바로 조심을 더하실 때입니다. 옛날 주자(朱子)는 〈금(金)나라를〉 복수(復讎)하여 설치(雪恥)할 것과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학문을 가지고 송(宋)나라 효종(孝宗)에게 자세히 진계(陳戒)하였는데, 대저 ‘천안(天顔)이 옛날 같지 않다.’고 한 차자(箚子)에 이르러 역시 깊이 있는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대개 더 이상 가망이 없어 아무리 힘쓰기를 권하더라도 살펴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근력이 왕성하시어 능행(陵幸)할 때에 보건대, 소장(少壯) 때와 다를 바가 없었으나, 오직 심기(心氣)가 쇠약하여 근력과 서로 맞먹지 않았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성심(聖心)이 모두 풀려서 그런 것입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지기(志氣)를 분발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아뢴 바는 간곡하고 자상하였다.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후궁(後宮)이 천 명이나 되지마는 그것을 줄일 수 있겠는가? 마굿간에 말이 만 필(萬匹)이지만 그것을 줄일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는 모두 제왕들이 호화스러움을 좋아하는 일들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마음이 없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지난 신축년206) 서연(書筵)에서, 전하께서 《심경(心經)》 일부를 신에게 내려 주면서 말씀하시기를, ‘겸설서(兼說書)는 늘 심학(心學)을 가지고 나에게 힘쓰게 하였으므로 특별히 이것을 준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감격하여 그것을 경건한 마음으로 외었던 것을 지금까지 명심하고 있습니다. 근래 전하의 지나친 거조는 모두 심기(心氣)를 따른 것이니, 신은 늘 《심경》을 어루만지면서 탄식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숙묘(肅廟)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때에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 같은 이는 여러 해 동안 시강(侍講)하였고, 빈객(賓客) 중에 조복양(趙復陽)·이단하(李端夏) 같은 이는 모두 청명 문학(淸名文學)의 선비였습니다. 오늘날 비록 이같이 여러 사람을 얻기는 어렵더라도 이병상(李秉常) 같은 이는 개제(愷悌)한 사람입니다. 마땅히 동궁을 교양(敎養)시킬 만한데 쉽사리 치사(致仕)하도록 윤허하셨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그 사람의 아름다운 덕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병상에게 있어서는 고상한 만절(晩節)을 이루게 하였지마는, 국가로 볼 때는 사람을 부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8월 24일 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26일 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서 곤방(坤方)의 하늘 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을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용성 대군(龍城大君)의 묘와 고 상신(相臣) 이건명(李健命)의 묘와 증(贈) 영상(領相) 김한우(金漢佑) 부인의 묘와 영성군(靈城君)의 묘와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의 묘와 가림 부부인(嘉林府夫人)의 묘에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행행(行幸)할 때에 길에서 그 묘들을 보았기 때문에 추모하는 느낌이 일어나서 이 명을 내린 것이었다.
8월 27일 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28일 정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29일 무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30일 기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김상로(金尙魯)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공조 판서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직위는 동지성균(同知成均)인데, 상유(庠儒) 한치대(韓致大)와 송영휴(宋永休) 등은 신이 소유(疏儒)를 귀향보내기를 청한 데에 성내어 부황(付黃)과 묵삭(墨削)을 행하여 학당의 벽에 어지럽게 붙여 놓았습니다. 바라건대, 신의 직책을 체개(遞改)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는 위에서 듣지 못한 것인데 이미 듣고서야 그냥둘 수는 없는 일이다.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과치(科治)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菊堂上)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지난번 유생(儒生)의 처분에 대하여 하교한 것이 이미 상세하였고 뒤에 글자를 고쳤으니 침착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지금 공조 판서의 상소를 보니 또 이 해괴한 일이 있었으니, 군신(君臣)의 분의가 비로 쓴 듯 사려져 버렸다. ‘뉘우치지 않고 끝내 죄를 저지르는 자는 형벌로 다스려야 된다.’는 것은 《상서(尙書)》에 실려 있다. 그 유생을 칭하면서 해괴한 행동을 한 자는 빨리 삭명 출향(削名黜鄕)의 율을 시행하라. 부황과 묵삭에 대해서는 사유(師儒)의 장(長)에게 분부하여 황지(黃紙)를 떼고 묵명(墨名)을 씻도록 하라."
하였다. 우참찬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무신년207) 에 토적(討賊)한 뒤 안성(安城)에는 당연히 비(碑)를 세워 공적을 기록해 두어야 하겠으므로, 우상(右相)이 비문(碑文)을 짓고 신이 글씨를 썼습니다만, 물력(物力)이 벌써 다하여 없습니다. 본군(本郡)의 도움을 얻는다면 거의 공사를 끝낼 수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전 응교 윤심형(尹心衡)을 석방시켜서 공조 참의로 특별히 발탁하라고 명하였으니, 영의정 김재로가 주문(奏聞)한 때문이었다.
부수찬 조돈(趙暾)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조 참판 홍상한(洪象漢)은 전조(銓曹)에 들어간 뒤로 대관(臺官)을 주의(注擬)208) 하는 데 오직 자신의 호오(好惡)에 따라 취사(取捨)하였고, 심익성(沈益聖)·박규수(朴奎壽) 등을 두둔하며 길러서 심복(心腹)을 만들었으며, 안식(安栻)이 대각(臺閣)에 있을 때에는 무변(武弁) 한 사람을 위해 서신으로 부탁하여 부유한 고을에 자리를 만들어 주기를 요구하였고, 한억증(韓億增)이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을 때에는 그를 논핵(論劾)한 말이 온 세상에 자자하였는데, 그는 몰래 앞잡이를 사주(使嗾)하여 공격하고 배척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맑은 조정에 대각의 직임이 도리어 한낱 전관(銓官)의 조종하는 물건이 되었으니, 만일 지금이라도 조금 억제하지 않는다면 어찌 국가의 복이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엄한 비답을 내려 조돈을 문책하고, 특별히 그 직을 체차(遞差)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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