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경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9월 2일 신미
물에 빠져 죽은 영남(嶺南)의 선격(船格)209) 11명과 해주(海州)의 어영보(御營保)210) 13명에 대하여 각각 본도(本道)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9월 3일 임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만동사(萬東祠)에 면세전(免稅田)을 획급(劃給)하라는 명은 성상께서 뜻하신 바가 있을 것입니다. 사체(事體)가 매우 중하니, 매위(每位)마다 10결(結)씩 모두 20결을 참작하여 획급하라는 뜻을 지부(地部)와 본도(本道)에 분부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9월 4일 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밤에 유성(流星)이 위성(胃星) 위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는데, 크기는 주먹만하고 빛깔은 붉었다.
김흥경(金興慶)을 영중추(領中樞)로, 신사철(申思喆)을 판중추(判中樞)로, 정익하(鄭益河)를 도승지로, 이재(李縡)를 대사헌으로, 조경(趙擎)을 사간으로, 남태기(南泰耆)를 장령으로, 남유용(南有容)을 헌납으로, 황합(黃柙)을 지평으로, 조윤제(曹允濟)를 정언으로, 송창명(宋昌明)을 부응교로, 조재민(趙載敏)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결성 현감(結城縣監) 오명수(吳命脩)가 상소하여 본읍(本邑)의 진전(陳田)이나 백지(白地)211) 에 징세(徵稅)하는 폐단을 아뢰니,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비답하였다.
9월 6일 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부교리 신위(申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돈(趙暾)의 상소는 한 사람의 정관(政官)을 논박한 데에 불과했는데, 특체(特遞)하라는 명령을 뜻밖에 내리시니, 신은 한탄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저 유신(儒臣)은 재신(宰臣)과 더불어 인척 관계가 있어 매우 친밀하니, 어찌 사사롭게 호오(好惡)를 빙자하여 극구 논박하겠습니까? 돌아보건대 그 논평할 일이 비단 명기(名器)212) 를 더럽히고 대각(臺閣)을 부끄럽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권세를 빙자하여 공공연히 뇌물을 받아들이고 감히 맑은 조정의 관작으로써 이익을 챙기는 자료로 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재신(宰臣)과 명관(名官)이 혹 눈으로 보고 귀로 듣더라도 마침내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으니, 언로(言路)가 막힌 것은 다시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그 소주(疏奏)를 살펴보지 않았다.
9월 8일 정축
밤에 유성이 북극성(北極星) 아래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들어갔는데, 크기는 주먹만하고 빛깔을 붉은 색이었다.
하교하기를,
"조돈(趙暾)이 기회를 틈타 글을 올린 일과 신위(申暐)가 그의 편을 들어 승부를 겨루려고 한 것은 무엄하다 하겠다. 모두 삭직(削職)하라."
하였다.
특별히 원경하(元景夏)를 발탁하여 대사헌으로 삼고, 홍상한(洪象漢)을 대사간으로 삼았으며, 충청 감사 조재호(趙載浩)를 이조 참판으로 승진시키고, 정언섭(鄭彦燮)·김상적(金尙迪)·유만중(柳萬重)·이보욱(李普昱)·신사건(申思建)을 승지로 삼았다.
특별히 윤용(尹容)을 공조 판서로 발탁하고, 특별히 홍상한(洪象漢)을 도승지로 제수하였으며, 윤심형(尹心衡)은 승지로, 조영국(趙榮國)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9월 9일 무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10일 기묘
밤에 유성이 하늘 가운데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리때[鉢] 같고, 빛깔은 흰 색이었다.
특별히 신사철(申思喆)을 판의금으로 제수하였고, 정언섭(鄭彦燮)·남태량(南泰良)·구택규(具宅奎)·이성중(李成中)·김광세(金光世)·홍봉한(洪鳳漢)을 승지로 삼았으며, 성범석(成範錫)을 장령으로, 김상철(金尙喆)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몸소 숙장문(肅章門)에 나아가 전 판관(判官) 홍우집(洪禹集) 등을 나국(拿鞫)하였는데, 홍우집은 소유(疏儒) 홍계억(洪啓億)의 아버지였다. 당시 임금은 유생들이 원경하(元景夏)를 벌(罰)한 일 때문에 진노(震怒)하였고, 또 연석(筵席)에서 한 말이 누설된 것을 의심하여 먼저 기주관(記注官) 유한소(兪漢蕭) 등을 죄로 다스렸는데, 전후로 무릇 18명이나 되었다. 이어서 합문(閤門)을 닫고 정사를 보지 않으니, 대신(大臣)이 여러 재신(宰臣)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에 모여서 연일 구대(求對)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당초에 해괴한 거조를 한 자는 이미 참작하여 유배시켰는데, 재차 해괴한 거조를 한 것은 임금을 업신여긴 무엄한 짓이라고 이를 만하다. 이목(耳目)213) 의 직분을 띠고 있는 자를 먼저 귀양 보내도록 청한 다음에 구대(求對)를 청했어야 직분에 당연한 것인데, 단지 묵명(墨名)이 두려워서 그 임금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는 모두 삭직시키고, 홍계억 소하(疏下)의 의논을 주장한 유생들을 정원(政院)에서 추문(推問)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들의 아비는 감히 아무런 일이 없는 듯이 집에 있을 수가 있느냐? 홍우집 등을 마땅히 친문(親問)할 터이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시임·원임 대신들이 잇따라 진차(陳箚)하고 대사헌 원경하와 대사간 조영국(趙榮國) 등이 연명(聯名)으로 진소(陳疏)하여 유생 부친들을 친문하겠다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엄책(嚴責)하였다. 원경하 등이 다시 연차(聯箚)를 올려서 청하니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일곱 번 계사(啓辭)를 올리고, 정원(政院)에서 세 번 계사를 올렸으며, 빈청(賓廳)에서 네 번 계사를 올려 청대(請對)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판의금(判義禁)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여 간쟁하니, 엄한 하교를 내려 삭직시켰다. 정언 김상철(金尙喆)과 장령 성범석(成範錫)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모두 멀리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다가 곧 중지하였다. 이날 임금의 노여움이 더욱 심하여 홍우집 등 7명을 국문하였고, 이덕제(李德濟)·윤광주(尹光周)는 말이 자세하지 못하다 하여 모두 형신(刑訊)을 당하였으며, 찬배(竄配)된 자가 6명이나 되었다. 특별히 정하언(鄭夏彦)·유언술(兪彦述)을 장령으로 제수하고, 김상복(金相福)을 사간으로 삼았다. 김상복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이덕제·윤광주는 내가 비록 작처(酌處)하였으나, 법을 집행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어찌 논계(論啓)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응교 이창수(李昌壽)가 김상복을 삭직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태학 유생(太學儒生) 한치대(韓致大)·송영휴(宋永休)를 유배시키라고 명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조신(朝臣)에게 묵명(墨名)·부황(付黃)을 행하는 것은 열조(列朝)의 금령(禁令)인데, 이 금령을 따르지 않고 함부로 방자하게 구는 자는 법을 엄격히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이 뒤로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는 곧바로 정배(定配)하도록 초기(草記)하고, 묵명·부황을 못하게 할 것이며, 비록 묵명·부황을 당한 자가 있더라도 인혐(引嫌)하지 말라는 뜻을 《속대전(續大典)》에 기재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1일 경진
밤에 금성(金星)이 헌원성(軒轅星) 좌측에 있는 각성(角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군민(軍民)에게 하유(下諭)하는 비망기(備忘記)를 써서 내렸는데, 천백 마디 누누이 한 말 중에, ‘황조(皇朝)에 존복(尊服)하려는 마음이 도리어 유생들을 무날(誣捏)한 결과가 되었으니, 대단히 통한스러워서 진실로 남면(南面)한 즐거움이 없다.’라고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연달아 작환(繳還)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구대(求對)하였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김약로(金若魯)가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을 인솔하고 궁궐 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갔으며, 영상(領相)·우상(右相)이 뒤따라 들어가서 일제히 소리를 높혀 간절히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존주(尊周)하던 정성이 이 사람들에 의하여 무너지게 되었으니, 오늘날 조정의 모양이 흐트러진 머리카락 같아서 진실로 수습할 수가 없다. 나는 원량(元良)으로 하여금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경 등이 보좌하는 것을 보려고 한다."
하니,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총명 신무(聰明神武)하기가 전하 같으신 분도 오히려 이와 같이 근심하시는데, 어찌 오늘의 국사를 어린 원량에게 맡기시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의 이 일은 비록 자교(慈敎)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마땅히 울면서 아뢸 것이고, 원량이 간하더라도 듣지 않을 것이며, 군민(軍民)이 옷깃을 잡고 간쟁하더라도 역시 내가 너희들을 잊지 않았다고 하유하겠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만일 끝내 반한(反汗)하지 않으시면 신 등은 마땅히 서로 이끌고 자전(慈殿)께 가서 울면서 청하겠습니다. 자전께서도 반드시 신 등을 그르다고는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러는 즈음에 천지 신명도 놀랄 것이며 사직(社稷)·종묘(宗廟)도 노여워할 것이니 어찌 대단히 통박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갈양(諸葛亮)이 말하기를, ‘성패 이둔(成敗利鈍)을 하늘에 맡긴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국사도 하늘에 맡기는 것이 옳다."
하였다.
9월 12일 신사
한익모(韓翼謨)를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임금이 연달아 ‘정묵(靜默)’ 두 글자를 써서 내리니, 정원(政院)에서 이를 봉환(封還)하였다. 영의정 김재로와 우의정 조현명 등이 백관을 이끌고 정청(庭請)하여 복합(伏閤)하니,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와서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고 이어서 수서(手書)를 내려 유시하기를,
"내가 마음을 굳게 정하였다면 경 등이 아무리 자전(慈殿)께 앙청한들 자전께서 어찌 이 마음을 굽어 이해 못하시겠는가? 명일은 곧 나의 생일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슬프다. 부모님께서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고 구로(劬勞)하셨네.’라고 하였으니, 시인(詩人)은 나의 마음을 먼저 말하였다. 내가 뜻을 비록 정하였으나 어버이를 위하여 억지로 누르고 내일 마땅히 진전(眞殿)에 배알한 뒤에 이어서 육상묘(毓祥廟)214) 에도 배알할 것이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여기까지 이르시니, 이는 실로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의 복입니다."
하였다.
9월 13일 임오
임금이 육상묘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지나는 길에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 옛터를 둘러보고 묻기를,
"이 궁궐은 홍무(洪武)215) 몇 년에 세웠는가?"
하니, 병조 판서 김약로(金若魯)가 대답하기를,
"홍무 27년 갑술년216) 경에 지었으니 지금으로부터 3백 82년 전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궁궐은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규모가 굉장하고 원대하니, 족히 성조(聖祖)께서 경영하신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하였는데, 응교 이창수(李昌壽)가 말하기를,
"이 궁궐을 주(周)의 명당(明堂)이나 한(漢)의 미앙궁(未央宮)과 같이 성조(聖祖)께서 도읍을 설치하고 근정전으로 이름하였으니, 근정(勤政)이라는 두 글자는 곧 우리 전하의 가법(家法)입니다. 가만히 보건대, 근일에 성수(聖壽)가 많아지고 지기(志氣)가 쇠퇴해져 구치(求治)하려는 정성이 점점 처음만 못하고, 비상(非常)한 거조가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는 비단 뭇 신하들이 실망할 뿐만 아니라, 실로 성모(聖謨)가 선대(先代)를 따라 계승하는 데 어긋납니다. 지금부터 명분을 돌보고 의리를 생각하여 조상의 사업을 이어받을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신의 소망입니다."
하니, 임금이 칭찬하였다. 이날 임금이 윤음(綸音)을 지어 내리어 조정의 신하에게 포고하고, 추모하여 면려(勉勵)하는 의도를 보였다. 도승지 정언섭(鄭彦燮)이 말하기를,
"동부승지(同副承旨) 홍봉한(洪鳳漢)은 광주 부윤(廣州府尹)에서 승선(承宣)으로 이배(移拜)되었는데, 교귀(交龜)217) 하기도 전에 병부(兵符)를 차고 금중(禁中)에 들어와서 입직(入直)하는 것은 미편합니다."
하니, 임금이 교귀하기 전에는 다만 사진(仕進)만 하고 교귀한 뒤에 입직(入直)하라고 명하고, 이어서 원중 고사(院中故事)에 기재하라 명하였다.
9월 14일 계미
대신(大臣)과 2품 이상, 여러 승지(承旨)와 입직(入直)한 옥당(玉堂)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오늘날 조정이 겉으로 보기에는 당파가 없는 것 같으나, 그 소굴이 없는지 어찌 알겠는가? 내가 이미 늙고 경들 또한 늙었으니, 후일의 근심을 어찌 누그러뜨릴 수가 있겠는가?"
하니,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지난 일은 말할 나위가 없고 다가올 일은 미리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순(堯舜) 같으신 성상께서 위에 계시니, 근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옛날 선묘조(宣廟朝) 때에 이준경(李浚慶)은 어진 상신(相臣)이었는데, 죽음에 임하여 상소하기를, ‘조신(朝臣)들이 붕당(朋黨)으로 나뉘어질 징조가 있다.’고 말하였으니, 그 때에 이미 동서(東西)로 갈라지는 징후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대개 나라를 위하는 심려(深慮)에서 나온 것이지만, 붕당의 설이 위에 알려져서 임금으로 하여금 의심을 가지게 되면, 사류(士流)가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므로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일찍이 상소하여 배척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소굴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소굴이 있다고 한다면 그 폐단은 이루 헤아릴 수 없게 됩니다."
하였다. 이때 소유(疏儒)를 처분한 뒤에 임금은 그들이 모두 남을 모함하고 협잡하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의심하였기 때문에 김재로가 말꼬리를 잡아 은연중에 풍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은 끝내 석연(釋然)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윤음(綸音)을 지어 내리며 대사성 김상로(金尙魯)로 하여금 태학(太學)에 써서 붙이게 하여 유생들을 면칙(勉飭)하게 하였다.
조재호(趙載浩)를 특별히 승급시키라는 명령을 중지하고, 충청 감사에 잉임(仍任)하였다. 조재호의 숙부 조현명이 그가 너무 빨리 승급됨을 민망스럽게 여겨 눈물을 흘리면서 간곡히 아뢰었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9월 15일 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익하(鄭益河)를 대사헌으로, 조명겸(趙明謙)을 대사간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집의로, 이휘진(李彙晉)을 장령으로, 이수해(李壽海)를 사간으로, 임사하(任師夏)·정언상(鄭彦祥)을 정언으로, 윤득재(尹得載)를 부교리로, 윤동준(尹東浚)을 수찬으로, 신만(申晩)을 부제학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예문관 제학으로, 이기진(李箕鎭)을 공조 판서로, 민택수(閔宅洙)를 헌납으로, 이극록(李克祿)을 지평으로 삼았다.
9월 16일 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17일 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18일 정해
인정전(仁政殿)에서 경과 정시(慶科庭試)를 설행(設行)하고 이관섭(李觀燮) 등 10명을 뽑았다.
9월 19일 무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홍상한(洪象漢)·이종백(李宗白)을 동경연(同經筵)으로, 김상중(金尙重)을 교리로, 조운규(趙雲逵)를 수찬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이익정(李益炡)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9월 20일 기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달이 오거성(五車星)을 범하였다.
9월 21일 경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지사(知事) 원경하(元景夏)가 《존왕변(尊王辨)》이라는 책 한 권을 올리고, 이어 아뢰기를,
"비록 요순(堯舜) 시대에도 변괴는 있었습니다. 성상께서 어찌 유생의 일로써 스스로 폄하(貶下)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때가 어찌 요순의 시대인가?"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위에 계신 분은 비록 요순 같은 성군이지마는, 이 세계는 석양(夕陽) 무렵의 천지입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아니다. 바로 황혼(黃昏)의 시기이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이 양전사(量田使)로 방금 호남(湖南)에 가게 되었습니다. 나주(羅州)는 크고 작은 섬이 무려 4, 50군데 되는데, 섬 안의 백성들이 요역(徭役)이 없어 한 해를 다 보내도록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목사(牧使) 및 감사(監司)와 상의하여 민역(民役)을 만들어서 통솔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송(宋)나라 휘종(徽宗) 때에 조정에 소인(小人)이 많았으므로 양산박(梁山泊)의 난218) 이 일어났다. 조그마한 섬에 비록 편안하게 사는 백성이 있더라도 어찌 소요하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였다.
임금은 이덕제(李德濟) 등의 일을 의논하고 이어서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고(故) 참판(參判) 홍경보(洪景輔)가 일찍이 ‘홍의(弘毅)’ 두 글자로 진면(陳勉)하였으므로 나는 ‘홍의 입지 관간 어중(弘毅立志寬簡御衆)’ 여덟 자를 가지고 원량(元良)에게 훈계하였다. 지금은 아무리 홍의의 정사를 행하려고 하더라도 어찌할 방도가 없는 듯하다."
하였다.
부수찬 조재민(趙載敏)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반드시 세도(世道)를 진정시키고, 음붕(淫朋)을 없애고, 군강(君綱)을 세워서 만세토록 후손에게 좋은 업적을 끼쳐주기 위하여 20년 동안 한결같이 부지런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세도를 진정시키려 하면 세도는 나날이 경박해지고, 음붕을 깨치고자 하면 음붕은 점점 시끄러워지며, 군강을 세우고자 하면 군강은 낮아지기만 합니까? 이것이 바로 이른바 어찌 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출삭 유찬(黜削流竄)시키는 것도 모두 이들을 징계하는 데 충분치 못하다.’고 여겨 마침내 지나치게 스스로 폄손(貶損)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종(祖宗)으로부터 이어받은 보위(寶位)는 희롱삼아 할 수 없는 것이고, 천공(天工)의 만기(萬機)는 혹시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며, 어묵(語默)과 빈소(嚬笑)는 무상(無常)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춘궁 저하(春宮邸下)는 전하의 초년(初年)에 하신 아름다운 정사를 보지 못하였는데 정사년219) 이래로 과중하고 비상한 거조를 보이지 않은 해가 없었습니다. 만일 임금이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가 본디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두려워하여 뒤돌아보시며 자손 만대의 계획을 만드시고, 전후(前後)에 내리신 하교 중에 지나친 거조에서 나온 것은 모두 거두어들이소서."
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부사직(副司直) 홍상한(洪象漢)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무함을 당한 자 중에 어찌 신과 같이 걸려든 사람이 있겠습니까? 저 안식(安栻)의 일은 병들어 본성을 잃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을 가지고 번거롭게 사람을 시켜 부탁하였겠습니까? 한 번의 웃음거리도 못됩니다. 한억증(韓億增)이 거듭 대각(臺閣)에 들어가게 된 것도 모두 신의 손에서 나온 것인데, 과연 수중(袖中)에 글을 가지고 있었다면, 처음에는 비록 공격을 입어 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 들어가던 날에 어찌 의논하지 않았겠습니까? ‘정병(政柄)을 빙자하여 뇌물을 받아들이는 문을 크게 열어 놓았다.’고 한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신에게 있어서 더욱 부끄럽고 원통합니다. 재신(宰臣)이나 명관(名官)에게 이미 지적을 입은 바가 있으니, 바라건대 명령(命令)을 내리시어 곧바로 사핵(査覈)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러한 세도(世道)에 대하여 어찌 족히 시애(撕捱)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곧바로 영의정 김재로가 아뢴 바에 의하면 신위(申暐)에게 함문(緘問)하라고 명하였다.
9월 22일 신묘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소유(疏儒)의 아비들이 뜻밖에 국문(鞫問)을 당하게 된 것은 전하께서 어찌 진실로 행할 수 있는 일입니까? 생각건대, 성심(聖心)은 아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 계속 일어날 일을 막을 수 없어서 더욱 시끄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신 까닭에 아직 닥쳐오지도 않은 미래의 조그마한 재앙을 가지고 무장(無將)의 대죄로 지목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위협을 주기 위하여 시작하였다가 마침내 형신(刑訊)까지 하게 되었으니, 비록 요행히 살아날 수 있다 하더라도 만일 장폐(杖斃)를 면하지 못한다면 이는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어찌 다만 한낱 무고(無辜)한 사람을 죽인 것뿐이겠습니까? 아마도 이로부터 사기(士氣)가 저상하여 비록 나라에 위망(危亡)의 징조가 조석(朝夕)에 닥쳐와도 감히 유소(儒疏)라고 이름 할 자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국옥(鞫獄)이 엄중한 것은 역적이 아니면 강상 죄인(綱常罪人) 때문인데, 지금 이 소유의 아비들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역적에 연관된 것입니까, 아니면 강상의 죄가 있습니까? 만일 조금만 참으셨더라면 전하께서 깨닫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런 무리들이 어찌 유생(儒生)이 되겠는가? 지금 이 거조는 그 버릇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하였다.
9월 23일 임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24일 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하원(李夏源)을 대사헌으로, 조경(趙擎)을 집의로, 원경하(元景夏)를 우참찬으로, 남유용(南有容)·송시함(宋時涵)을 장령으로, 엄우(嚴瑀)를 수찬으로, 박춘보(朴春普)를 부수찬으로, 김시형(金始炯)을 판윤(判尹)으로, 김상적(金尙迪)을 승지로, 홍정명(洪廷命)을 헌납으로, 이성억(李聖檍)을 지평으로, 이언상(李彦祥)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9월 25일 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새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사람들을 불러 보고, ‘거당(祛黨)’ 두 글자를 가지고 면칙(勉飭)하였다.
동래부에서 물에 빠져 죽은 19명에 대한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9월 26일 을미
소대를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포장(捕將)인 병조 판서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한억증(韓億增)의 집에 홀연히 도포(道袍)를 입은 자가 찾아와서 곧바로 보기를 청하고, 잇달아 품속에서 글을 꺼내어 놓고 고평(考評)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거조가 매우 수상하여 쫓아버리려고 하였더니, 마침내 ‘고변(告變)’ 두 글자를 가지고 위협하였다 합니다. 그리하여 한억증이 그를 잡아서 신에게 알려 왔기 때문에 신이 곧 포청(捕廳)에 가두어 한편으로 초사를 받게 하고, 감히 이와 같이 청대(請對)합니다. 그 사람의 성명을 듣건대, 이용발(李龍發)이라는 자로서 자칭 가산(嘉山)의 교생(校生)이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어 비서(秘書)를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글 가운데 이색(李穡)이라는 자가 누구인가?"
하니,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서우(李瑞雨)의 손자이고, 이순관(李順觀)의 적질(嫡姪)입니다."
하고, 김약로가 말하기를,
"가산에 유배되어 있는 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용발을 먼저 국문하고 이색을 한편으로 잡아 오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김약로는 말하기를,
"이른바 대탕책(大蕩策)이라고 한 것이 비록 허소(虛疎)한 듯하지만 저들이 비밀히 왕래한 자취가 여기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용발을 본부(本府)로 하여금 설국(設鞫)하고 엄하게 심문하게 하라."
하였다.
조현명이 황해 수사(黃海水使)의 계본(啓本)에 의하여 사복시(司僕寺)에 소속된 옹진부(瓮津府)의 창린도 목장(昌麟島牧場)을 수영(水營)으로 이속(移屬)시키는 것을 허락하여 달라고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유배 죄인(流配罪人)을 명년 가을까지는 북관(北關)에 배소(配所)를 정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본도(本道)에 흉년이 든 때문이었다.
소대를 행하였다.
신사건(申思建)을 대사간으로, 이위보(李渭輔)를 사간으로, 이하종(李夏宗)을 헌납으로, 김상로(金尙魯)를 동의금으로, 홍정보(洪正輔)·김이만(金履萬)을 정언으로, 서종급(徐宗伋)을 대사헌으로, 이광식(李光湜)을 집의로, 유건(柳謇)·홍득후(洪得厚)를 장령으로, 김한운(金漢運)·남학종(南鶴宗)을 지평으로 삼았다.
9월 27일 병신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금오 당상(金吾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우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신 등이 여러 방법으로 힐문하였으나, 아직 단서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들의 정상(情狀)을 억측할 만한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그 하나는 폐족(廢族)들이 요행을 바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실지(失志)한 무리들이 나라를 원망하는 것인데, 이른바 대탕책(大蕩策)이란 명칭은 무슨 뜻인가?"
하자, 판의금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대탕척(大蕩滌)의 뜻인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무신년220) 도류안(徒流案)을 들이라고 명하여 보기를 마치고 말하기를,
"민(閔)·윤(尹) 양족(兩族)은 어느 지방에 유배하였는가?"
하니, 조현명이 대답하기를,
"을묘년221) 의 국경(國慶)222) 이 있었을 때 석방된 자가 많습니다."
하고, 동의금 이종백(李宗白)은 말하기를,
"미처 다 뽑아 보지는 못하였으나, 3백 명 가까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3백 명이라니 어떻게 그리 많은가? 무신년에 연좌(緣坐)된 무리를 3남(三南)과 서북(西北) 외에 다른 데에는 발배(發配)한 곳이 없었는가?"
하니, 승지 김광세(金光世)가 말하기를,
"영동(嶺東)에도 유배했었지만 양남이 더욱 많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자들의 연좌는 다른 것과 달라서 호랑이를 기르는 것과 같다."
하고, 이어서 추국(推鞫)을 우선 멈추었다가 죄인을 잡아 온 뒤에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신사건(申思建)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집의 이광식(李光湜)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9월 29일 무술
밤에 유성(流星)이 태미원(太微垣)의 단문(端門) 안으로 들어갔다.
밤 4경(四更)에 임금이 인정전(仁政殿) 뜰 위에 친림(親臨)하여 서계(誓戒)223) 하니 장차 태묘(太廟)의 동향(冬享)을 행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묘향 조위(廟享祧位)의 축식(祝式) 가운데 모두 사왕(嗣王)이라고만 칭하였는데, 제10실(室)에는 효증질손(孝曾姪孫)이라고 칭하였고 11실과 12실에는 사왕(嗣王) 위에 오직 ‘효증손(孝曾孫)’ 세 글자로 칭하였으니, 이는 체천(遞遷)하기 전의 축식을 품(稟)하지 않고 그대로 쓴 것이다. 이 세 글자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면 각실(各室)에도 마땅히 한 가지 예로 써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게 혹은 삭제하고 혹은 그대로 두었으니, 일정한 규식에 대단히 어긋난다.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예조(禮曹)로 하여금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에게 문의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지난번 정권(鄭權)의 소(疏)에 대하여 내가 ‘소관(小官)이라고 하여 경솔하게 의논할 것이 아니다.’라고 비답하였는데, 소인배들이 만일 듣게 되면 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틀림없이 일을 야기시킬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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