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2권, 영조 21년 1745년 10월

싸라리리 2025. 9. 28.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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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 경자

경상도 단성현(丹城縣)에 9월 13일 지진이 일어났다.

 

10월 5일 계묘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이창수(李昌壽)를 집의로, 송수형(宋秀衡)을 대사간으로, 권상일(權相一)을 헌납으로, 이규휘(李奎徽)·홍정명(洪廷命)을 장령으로, 최성대(崔成大)·정언상(鄭彦祥)을 지평으로, 김상중(金尙重)을 보덕(輔德)으로, 정동준(鄭東浚)을 부교리로, 김윤(金潤)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유형(柳瀅)을 공홍 수사(公洪水使)로 삼았다.

 

예조 판서 조관빈(趙觀彬)과 전생서 제조(典牲署提調) 유엄(柳儼)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검은 소는 체구가 작아서 법식에 맞지 않고 다른 희생(犧牲)은 대신 쓸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도회관(都會官)은 엄중히 추고(推考)하고, 봉진관(封進官)인 제주 목사(濟州牧使) 및 분양관(分養官)인 거제 부사(巨濟府使)는 나문(拿問)하여 처치하며, 전후(前後)의 제조(提調)는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서경(書經)》에 성우(騂牛)라고 특별히 칭한 것은 대개 제향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희생의 체구가 본래 작은 것을 보낸 것은 해당 읍(邑)의 과실이고, 그것을 살찌우지 못한 것은 본서(本署)의 책임이다. 이 뒤로는 예조 당상이 제조와 함께 간품(看品)하여 받을 것이며, 전생서의 낭청을 즉시 택차(擇差)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6일 갑진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서 예(禮)에 따라 희생과 제기(祭器)들을 살펴보았는데, 찬작(瓚爵)224)   한 벌(具)에 땜질할 곳이 있으므로 새로 만들도록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날씨가 춥다 하여 향례(享禮)를 섭행(攝行)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제관(祭官)의 방자(牓子)225)  를 가져다가 보았는데, 서계(誓戒)에 참가하지 않은 자도 있고, 또 국자감(國子監)의 미관(微官)으로 메워진 자도 있자, 임금이 전조(銓曹)의 낭관을 엄중히 책망하기를,
"공축(工祝)226)  이 낮으면 그 예가 엄숙하지 못하다. 며칠 전에 이미 칙교(飭敎)를 내려 비록 섭행(攝行)하더라도 대축(大祝)은 시종신(侍從臣)을 차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구차스럽게 이와 같이 메웠으니, 전조의 낭관과 외방에 있는 시종신은 나처(拿處)하고 불참한 자는 멀리 유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7일 을사

4경(四更)에 임금이 몸소 대제(大祭)를 행하고 환궁하였다.

 

10월 8일 병오

특별히 김약로(金若魯)를 판의금에 제수하고, 조명리(趙明履)를 승지로, 윤득재(尹得載)를 집의로 삼았다.

 

임금이 숙장문(肅章門)에 나아가서 이색(李穡) 등을 친국(親鞫)하였다. 이색에게 묻기를,
"너는 이순관(李順觀)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책(策)을 지어 풍유(諷諭)하였는데, 지적한 의도가 음흉스럽다. 낱낱이 바른 대로 고하라."
하니, 이색이 고하기를,
"신의 매자(妹子)227)  인 권두령(權斗齡)이 봄에 신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임서린(任瑞麟)에 연좌(緣坐)된 처지인데, 적소(謫所)에서 함부로 떠나 왔기 때문에 그가 온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이 지방에 적당(賊黨)들이 모여 있어서 거기에 들어가려고 한다.’고 하므로 신이 나무라기를, ‘너는 왜 또 이처럼 친족을 다 죽을 일을 하느냐?’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적당이란 곧 무신년228)  의 여얼(餘孼)인 이유익(李有翼)의 아들 이천영(李天英)의 족속입니다. 또 망명자(亡命者) 18명은 월강(越江)하였는데, 그 중에 황진기(黃鎭紀)·정중복(鄭重福)은 처음에 칠보사(七寶寺)의 중이 되었다가 서로 모여 모역(謀逆)하고 승군(僧軍)을 조직하였으니, 이른바 붕화상(鵬和尙)이라 함은 승적(僧賊)의 괴수(魁首)입니다. 18명은 장차 호인(胡人)들을 청하여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 북변(北邊)을 할거(割據)하려고 하는데, 이유익의 아들이 역시 괴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경주(慶州)에 사는 이덕해(李德海)의 아우 이덕하(李德河)는 관상자(觀相者)인데, 장차 이 사람을 북로(北路)에 보내어 적정(賊情)을 살펴본 뒤에 돌아와서 알리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원산(元山)에 사는 남익한(南翼漢)도 역시 그들과 같은 무리인데, 부요하여 배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북쪽과 통래할 수 있는 계제(階梯)를 만들려고 한다고 합니다. 이는 모두 권두령에게 들은 것입니다."
하였다.
형(刑)을 한 차례 가한 뒤에 이용발(李龍發)에게 물으니, 공초하기를,
"신은 이색의 보수 주인(保受主人)으로서 그의 심부름꾼이 되었는데, 이색이 신에게 말하기를, ‘북도(北道)에 도적이 있어 중들과 체결(締結)하고 피중(疲中)에 도망쳐 간 무리들과 서로 내통하고 있으니, 네가 이 책(策)을 가지고 서울에 올라가서 고변(告變)하면 마땅히 공(功)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권두령이 처음 차도림(車道林)의 서당(書堂)에 와서 이색과 상의할 때에 들으니 이색이 권두령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남북으로 장구(長驅)하여 내려온다면 일이 반드시 성공치 못할 것이다. 성중(城中)에 잠복하였다가 몰래 급히 일으키는 것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형장을 한 차례 가한 뒤에 김덕재(金德載)에게 물었으니, 김덕재는 고변할 때에 함께한 정상으로써 이용발의 공초에 나온 자이다. 공초하기를,
"이용발이 말하기를, ‘도적이 북변에 있으니 고변하면 벼슬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하면서 이어 노비(路費)를 내놓으라고 졸랐습니다. 대탕책(大蕩策)에 대하여서는 처음부터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이색에게 묻기를,
"대탕책이란 무슨 뜻이며, 거기에 인용한 황소(黃巢)229)  ·이경업(李敬業)230)  에 대한 일과 손은(孫恩)231)  의 당(黨)이 건강(建康)232)  에 잠복하였다는 말 및 곽광(霍光)233)  의 제서(諸婿), 허·사(許史)234)  의 자제(子弟)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권두령이 일찍이 말하기를, ‘명천(明川)의 이가(李哥)에게서 편지를 받아다가 영성군(靈城君)에게 전하고, 이어서 편지를 심양(瀋陽) 사신(使臣)의 군관(軍官) 우하형(寓夏亨)에게 부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책(策) 중에 인용한 손은의 당이란 우하형의 무리를 지적하는 것으로, 그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건강이라고 하였고, 황소·이경업은 황진기(黃鎭紀)·정중복(鄭重福)을 비유한 것이며, 곽광의 제서란 곧 장병(掌兵)한 자를 지적한 것이고, 허·사의 자제란 곧 국가의 훈척신(勳戚臣)을 지적한 것입니다. 대탕의 ‘탕(蕩)’자는 청탁(淸濁)을 가려서 탕척(蕩滌)한다는 뜻이 아니고, 이름이 역적의 초사(招辭)에서 나오지 않은 자는 모두 크게 탕척하는 범위에 든다는 뜻입니다."
하였는데, 형장을 두 차례 가하자 이어 남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하고 조정을 무망(誣罔)하였다는 것으로써 지만(遲晩)하였다.
경온(慶昷)을 국문하였는데, 경온은 곧 이색의 처남(妻男)으로서 이용발을 접촉하게 한 자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소위 ‘대탕책’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서 내가 깨닫는 바가 있다. 곽광과 허·사(許史)에 대한 말은 밝혀서 말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은연중에 조징(趙徵)의 말과 같은 뜻이었다. 그 부도(不道)한 말을 말의 첫머리에 내놓아 스스로 대역(大逆)을 범하였으나, 날마다 형신(刑訊)을 가하게 되면 경폐(徑斃)할 염려가 없지 않으니, 친국(親鞫)은 다시 하교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집의 윤득재(尹得載)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역적과 연좌된 자들을 검칙(檢飭)하지 못하고 간혹 도망가는 자가 있어도 살피지 못하여 마침내 외국으로 망명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각도의 전후 수령(守令)을 일일이 적발하여 나문(拿問)하여 죄를 바루고 도신(道臣)도 중추(重推)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이어서 해당 가산 군수(嘉山郡守)를 먼저 멀리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다. 사간 이위보(李渭輔)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성탁(金聖鐸)·이헌장(李獻章)을 출륙(出陸)시키라는 명을 도로 정지하라는 청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뒤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김성탁은 다시 유배시킨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계속 천극(栫棘)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제거시키도록 하라. 또 계속 옛날 있던 자리에 그냥둘 수 없으니, 신지도(薪智島)로 고쳐 유배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덕제(李德濟)는 역심(逆心)으로 지만(遲晩)하였고, 윤광주(尹光周)는 망측(罔測)한 말을 하였는데, 임금이 비록 참작하여 조처하였으나, 이목(耳目)의 관원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옳겠는가? 이렇게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장차 임금은 임금 노릇을 못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을 못하게 될 것이다. 전후(前後)에 묵묵히 있었던 대신(臺臣) 김상복(金相福)·신사건(申思建)·이광식(李光湜)·윤득재(尹得載)·이위보에게 모두 빨리 귀양 보내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10월 9일 정미

서명형(徐命珩)을 대사간으로, 민택수(閔宅洙)를 집의로, 권현(權賢)을 사간으로, 전명조(全命肇)를 장령으로, 박치문(朴致文)을 헌납으로, 이장하(李長夏)·김상구(金尙耉)를 지평으로, 정동준(鄭東浚)을 교리로, 조명정(趙明鼎)을 부교리로, 홍중일(洪重一)을 필선으로 삼았다.

 

경조 당상(京兆堂上)을 추고하고, 낭관(郞官) 및 부관(部官)은 모두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신(大臣)이 연석(筵席)에서 진달하여, ‘경외(京外)에서 혼인이나 장사를 치르는 데 시기가 지난 자는 신칙을 가할 것을 청하였는데, 해부(該府)에서 곧바로 거행하지 않아 경성(京城) 근처에 뼈가 드러난 고장(藁葬)을 여름이 다 지나도록 매장하지 않았으므로, 이 명을 내린 것이었다.

 

10월 10일 무신

송징계(宋徵啓)를 대사간으로, 조경(趙擎)을 사간으로, 이섭원(李燮元)·정한규(鄭漢奎)를 정언으로, 유언호(兪彦好)를 부교리로, 송창명(宋昌明)을 응교로, 조관빈(趙觀彬)을 좌참찬으로, 윤지태(尹志泰)를 헌납으로 삼았다.

 

죄인 이색(李穡)이 물고(物故)되었다.

 

임금이 숙장문(肅章門)에 나아가서 김덕재(金德載)·이용발(李龍發)을 친국(親鞫)하였다. 권두령(權斗齡)의 거처(去處)와 이색의 음모(陰謀)를 추문(推問)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형신(刑訊)하였으나, 끝내 직초(直招)하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친국을 잠시 파할 것이니, 대신(大臣)과 금오 당상(金吾堂上)은 입시(入侍)하라."
하였다. 장령 전명조(全命肇)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폐(徑斃)한 죄인 이색을 대역죄(大逆罪)의 규례에 의하여 노적(孥籍)하고 작처(酌處)한 죄인 이덕제(李德濟)·윤광주(尹光周)는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 조경(趙擎)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급제(及第) 이준휘(李儁徽)가 그의 아비 이정필(李廷弼)을 위해 상소하여 신변(申辨)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아비는 무신년235)   2월에 비로소 합천(陜川)에 부임하였는데, 3월 21일 역적 조정좌(曺鼎佐)가 토민(土民)이라고 일컫고 보기를 청하여 청주(淸州)가 패한 소식을 전하면서 안음(安陰)의 적세(賊勢)를 대단히 칭찬하자, 신의 아비는 곧바로 조정좌와 그의 친족인 조성좌(曺聖佐)를 가쇄(加鎖)를 씌워 가두고 순영(巡營)에 치보(馳報)하였습니다. 22일에 안음의 적들이 갑자기 흉한 격문을 보냈는데, 신의 아비는 또 그 격문을 가져온 자를 잡아서 순영으로 보내어 곧바로 효시(梟示)하도록 청하였으며, 24일에는 안음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순영과 병영(兵營)에 치서(馳書)하여 발병 토적(發兵討賊)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25일 거창(居昌)이 함락되자, 신의 아비는 순영에 보고한 뒤에 소속(所屬)인 3읍(邑)의 군사를 징발하였는데, 초계(草溪)는 발병할 의사가 없었고, 삼가(三嘉)는 우영장(右營將)이 막아서 중지하였으며, 의령(宜寧)은 관청이 비어 조발(調發)할 자가 없었습니다. 이 때에 적세는 더욱 급하여지고 군(郡)의 병졸은 단약(單弱)하여 구원을 청하는 길은 병영이 순영보다 좀더 가까웠는데, 동정을 자세히 들으려면 직접 가는 것만 못하므로 이에 천총(千摠) 김게(金垍) 등을 불러서 약속하기를, ‘내가 내일 돌아올 터이니 너희는 성을 굳게 지키며 동요하지 말고, 구원병을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26일에 드디어 진주(晉州) 감영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여 허락을 받고 27일에 돌아오니, 본군(本郡)의 좌수(座首) 정상림(鄭商霖)이 이미 적의 내응(內應)이 되어 적도(賊徒) 수백 명을 이끌고 들어와서 두역적을 탈옥시키고 관군(官軍)을 협박하여 군성(郡城)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신의 아비는 경내(境內)에 숨어 있으면서 먼저 해인사(海印寺)의 승군(僧軍)을 모집하고, 또 삼가(三嘉)의 군사 중에서 적에게 위협당하는 자들을 달래어 적을 공격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인하여 아객(衙客)인 노세엽(盧世燁)으로 하여금 샛길로 좇아 김게에게 밀통(密通)하여 바깥에는 복병(伏兵)시키고 안에서 내응하게 하였습니다. 30일 밤에 김게 등이 방포(放砲)하는 것을 신호로 먼저 적장(賊將)이 앉아 있는 곳의 병풍을 발로 차고, 곧바로 장막(帳幕)의 네 귀퉁이에 세운 대를 뽑으면서 엄습하여 적장 조성좌와 조정좌를 때려 죽이고 허택(許澤)을 뒤좇아 죽였으며 이덕좌(李德佐)는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노세엽이 밖으로부터 좇아가 사로잡은 것이 2명이고, 나머지는 도망쳤습니다.
4월 초하룻날 아침에 김게 등이 신의 아비를 진중(陣中)에 맞아들이었는데, 사로잡은 적의 머리를 베어 장대에 매달고 인하여 김게를 포장하였습니다. 김게가 말하기를, ‘어제 밤에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赫)과 초계 군수(草溪郡守) 정양빈(鄭暘賓)이 금양역(金陽驛)에 와서 진을 쳤는데, 여기서 10리 되는 거리입니다. 이웃 고을을 대접하는 도리로서 적을 사로잡은 기별을 새벽에 알렸더니, 아침에 갑자기 읍내로 진을 옮기고는 군교(軍校)를 보내어 사로잡은 적을 달라고 합니다.’ 하므로, 신의 아비가 묻기를, ‘성주 군교(星州軍校)도 약속하고 함께 공격하였는가?’ 하니, 김게가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하기에 성주 군교를 그냥 돌려 보냈습니다. 이보혁과 정양빈이 처음에는 김게를 협박하여 빼앗아 가려고 하였다가, 신의 아비가 이미 진(陣)에 있음을 알고 서로 돌아보며 놀라더니, 인하여 여러 차례 말하기를, ‘만일 보내 주지 않으면 마땅히 역습(逆襲)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의 아비가 듣고 놀라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성주 목사의 할 말인가? 조정에서 만일 듣게 되면 뭐라고 하겠는가?’ 하자, 마침내 말하기를, ‘비록 수급(首級) 하나라도 꼭 보내달라.’고 하므로, 신의 아비가 보내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합천 군교들이 자신들의 칼 맞은 자국과 피 묻은 옷을 보이며 말하기를, ‘내 머리는 보낼 수 있어도 이것을 보낼 수 없습니다.’라고 하므로, 신의 아비는 억지로 뿌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장차 감영에 보고하고 수급을 보내려 하였더니, 여러 군교들이 또 말하기를, ‘순영에 보내려면 성주 진영(陣營)을 거쳐야 하는데 빼앗길까 두렵습니다.’ 하므로 드디어 수급을 함(函)에 담아서 병영에 보내어 순영에 전보(轉報)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보혁은 김게가 보낸 한 장의 수본(手本)을 빙자하여 순영에 보고하며 자기가 꾸며낸 방략(方略)인양 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온갖 방법으로 신의 아비를 무함하여 말하기를, ‘적진에 투족(投足)하여 임의로 참살(斬殺)하고는 자기의 공을 삼았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네 역적을 잡아다가 미처 조치를 하기 전에 신의 아비가 그 가운데에서 훔쳐 갔다.’고도 하였습니다. 또 사로잡은 적을 경참(徑斬)한 것으로 죄안(罪案)을 삼았고, 또 구원을 청하러 갔던 것을 군(郡)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하였으며, 또 정상림이 석방하였던 두 역적을 신의 아비가 일부러 놓아주었다고도 하였고, 또 병영에 먼저 보낸 것이 순영을 격노(激怒)시켰다고도 하였습니다. 과연 계파(啓罷)하였다는 소식과 신부(信符)를 빼앗는 비장(裨將)이 연달아 내려왔는데, 마침내 영문(營門)에 잡아들이는 거조까지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감영의 비장 김진옥(金振玉)이 왔을 때에 이보혁 등의 지휘(指揮)를 받아 저녁 어두울 무렵에 수십 명을 거느리고 군아(郡衙)에 돌입하여 신의 아비를 잡아 뜰에 꿇리고 형틀에 달아매었는데, 형틀에 달아매는 일은 애당초 영관(營關)236)  에서 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군졸들이 둘러싸고 쫓아가며 재촉하니, 온 고을의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김게를 죽여서 증거를 인멸하려고 하여 김진옥이 김게를 적당(賊黨)이라고 속여 가쇄를 씌워서 순영에 보내었는데, 순영에서 그를 참(斬)하려고 하자, 영속(營屬) 1명이 뜰에서 크게 외치기를, ‘김게는 대공(大功)이 있는데, 어찌 차마 벨 수 있습니까?’ 하니, 도신(道臣)이 비로소 놀라서 김게의 사실 내용을 묻고는 술을 주어 달래고, 위로하여 보내었습니다. 대개 이보혁·정양빈·김진옥 세 사람은 서로 체결하여 순영에 무보(誣報)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의 아비가 그 동안에 순영에 보고한 글들은 대부분 저지당하여 도신(道臣)은 신의 아비가 보고한 것은 보지 못하고, 다만 이 세 사람의 밀서(密書)만 빙거하여 이 죄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명항(吳命恒)이 남루(南樓)에서 적괴(賊魁)의 수급을 바칠 때에 제일 먼저 신의 아비가 유공 무죄(有功無罪)한 상황을 진달하였습니다. 그 뒤에 도신과 어사(御史)가 실상을 고험(考驗)하여 정양빈은 두류 부진(逗遛不進)한 죄를 입었고, 정상림은 적을 놓아준 죄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신의 형(兄)이 두 번째 격고(擊鼓)237)  했을 때에 판부(判付)238)  한 것도 또한 신의 아비의 지극히 원통한 사정을 이미 통촉(洞燭)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중신(重臣)들의 연주(筵奏)로 인하여 금부(禁府)에서 실상을 캐어서 품처(稟處)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문장(文狀)이 금부에 도착한 지 지금 이미 12년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그것을 뜯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신의 아비는 마침내 한을 머금은 채 죽었으니, 이것이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이런 까닭은 공(功)도 없는 무리는 기린각(麒麟閣)에 화상(畫像)을 그려 붙이고,239)   억울하게 죽은 영혼은 끝내 신원(伸冤)할 곳이 없다는 말이 간혹 헌신(憲臣)의 소(疏)에서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가야산 밑의 전공은 의심스러운데[伽倻山下戰功疑], 밝히지 못한 마음 성상(聖上)만은 아시리[未白心惟聖主知], 금대의 기린각에 화상을 그리는 날은[今代麒麟圖畫日], 갈건(葛巾) 쓰고 가림에 돌아가 숨어 살 때일세.[嘉林歸臥角巾時]’라는 만사(輓詞)는 이보혁의 사돈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또 황선(黃璿)의 죽음을 가지고 신의 아비에게 의심을 가지는 자가 있는데, 누가 이런 말을 만들어서 성상에게까지 들리게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신의 아비는 김진옥에게 붙들려서 두옥(斗屋)에 갇혀 있었고, 10명의 수졸(守卒)이 주야로 감시하여 비록 장양(張良)·진평(陳平) 같은 지혜와 장비(張飛)·관우(關羽) 같은 용맹이 있었더라도 어떻게 신기스러운 술법을 부려서 사람을 죽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의금부에 있는 문장을 가져다 보시고 일일이 감별(鑑別)하시어 신의 아비의 밝히지 못한 원통함을 명쾌하게 풀어 주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오자 임금이 말하기를,
"오래 된 일을 조정(朝廷)에까지 올릴 필요가 없다."
하고, 그 글을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이때 이준휘와 동방(同榜)으로 급제한 송형중(宋瑩中)이 알성묘(謁聖廟)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이준휘가 소장을 올려 자세하게 폭로한 것이었다. 뒤에 좌윤(左尹) 이보혁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머리가 희도록 늙은 나이에 어찌 차마 이미 죽은 사람과 하찮은 것을 교계하여 효자(孝子)의 마음을 상하게 하겠습니까마는, 그 상소 중에 한두 조항은 대강이라도 변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은 무신년 3월 24일 우방장(右防將)으로 임명을 받아 각 고을의 병사를 양장평(羊腸坪)에 모이도록 기약하고 그믐날 저녁에 합천(陜川) 읍내로 진군하여 적과 대진(對陣)하게 되었습니다. 적의 장교 하세호(河世浩)가 왔다갔다 하면서 도전(挑戰)하기에 신은 역(逆)과 순(順)의 이치로 깨우쳐 주고 안죽(安竹)의 전공(戰功)을 역설(力說)하였더니, 하세호가 비로소 두려움을 느끼고 그날 밤에 적을 사로잡아 오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또 신이 보낸 간첩승(間諜僧) 해림(海琳)이 와서 말하기를, ‘정상림(鄭商霖)이 도망가자 적진이 자못 동요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하세호가 과연, ‘장교가 적을 사로잡았다.’는 글을 가지고 왔기에, 곧장 ‘결박하여 군전(軍前)에 보내라.’는 뜻으로 제송(題送)하였고, 가쉬(假倅) 김진옥(金振玉)을 시켜서 함거(檻車)를 준비하여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날이 새도록 사로잡은 적을 보내 오지 않으므로 변고가 있는가 의심하여 경기(輕騎)로 적진에 가까이 가서 보니, 합천쉬(陜川倅)가 이미 진중(陣中)에 좌정(坐定)하여 사로잡은 적의 목을 벤 다음이었습니다. 합천의 적이 평정된 뒤 신은 곧 회군(回軍)하여 함양(咸陽)의 노상에 달려가서 도순무사(都巡撫使)를 뵈었습니다. 도신(道臣)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날로 순영(巡營)에 나아가서 비로소 도신이 수정(修整)한 공죄 계초(功罪啓草)를 보고 물러나와서 이정필(李廷弼)이 갇혀 있는 곳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이정필이 군(郡)을 버리고 적을 놓아주었다는 말을 신이 한 것으로 의심하고 화를 내므로 신이 그 계초(啓草)를 내어 보이니, 이정필이 의심을 풀었습니다. 당시의 사실은 이러한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 왕사(王師)가 연이어 승리하자, 그 위세에 멀리서도 두려움을 느끼어 적들이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신은 일찍이 화살 하나 쏘지 않았고 적군과 한 번 교전(交戰)한 일도 없는데, 요행스럽게도 훈적(勲籍)에 올랐으니, 신은 진실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가령 신이 적의 수급을 얻어 공을 구할 생각이 있었다면, 김진옥은 가쉬면서도 오히려 이정필을 영문(營門) 밖에서 형틀에 묶어 꿇렸는데, 신은 바야흐로 장령(將令)을 받아 대군(大軍)을 거느리는 처지에 있었으니, 비록 이정필을 적과 아울러 잡아오더라도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웠습니다. 어찌 구차스럽게 적의 수급 하나를 얻으려고 구걸하겠습니까? 지금 적을 경사(京師)에 함송(檻送)하려는 뜻으로 한 번 왕복한 것을 가지고 적의 수급을 요청하였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정필이 구원군을 청하러 갔다가 얻지 못하고 단신으로 돌아가 숨어 있었다면 관군(官軍)이 입군(入軍)할 때에 마땅히 뛰어나게 서로 알렸어야 할 터인데, 밤새도록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아무 소식이 없었으니, 그가 경내(境內)에 있는지 또는 설시(設施)하는 일이 있는지의 여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 보첩(報捷)하는 장계(狀啓)에 함께 논할 수 없었던 것은 형세가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이정필이 폐고(廢錮)당한 것이 비록 신으로 말미암지는 않았으나, 신은 일찍이 가련하게 생각하였는데, 지금 그의 말이 어찌 이렇게 서로 반대됩니까?"
하였다. 소(疏)가 들어가자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금오 당상(金吾堂上)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장전(帳殿)240)  에서 죄수를 국문(鞫問)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데, 새로 제수한 대관(臺官)이 모두 외방(外方)에 있다고 하니, 모두 삭직(削職)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전명조(全命肇)가 아뢰기를,
"역적을 노륙(孥戮)하는 것은 삼척(三尺)이 지극히 엄중한데, 여러 역적의 처자(妻子)들이 법망(法網)에서 벗어난 것은 매우 통분스러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인좌(李麟佐)나 이유익(李有翼)의 아들은 아직까지 목숨을 붙여 두었으니, 신인(神人)이 모두 분하게 생각합니다. 청컨대, 모두 율에 따라 정법(正法)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 조경(趙擎)이 아뢰기를,
"역적의 자질(子姪)로 서북(西北) 변경에 유배된 자가 많으므로 변괴(變怪)가 겹쳐 생겼는데 이번 이색(李穡)의 일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청컨대 절도(絶島)에 이배(移配)시키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12일 경술

경상 감사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도내(道內)에서 압사(壓死)하고 물에 빠져 죽은 자 2백 3명에게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10월 13일 신해

서종급(徐宗伋)을 예조 판서로, 윤봉구(尹鳳九)를 집의로, 남유용(南有容)을 부교리로, 이윤신(李潤身)을 보덕으로, 오언유(吳彦儒)를 문학으로, 임사하(任師夏)를 지평으로, 송시함(宋時涵)을 정언으로, 이중협(李重協)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좌우 포장(左右捕將)을 인견하고, 권두령(權斗齡)을 염탐하여 체포하라 명하니, 포장(捕將) 구성임(具聖任)이 말하기를,
"포청(捕廳)에서 자백한 자를 추조(秋曹)로 옮기면 번번이 초사(招辭)를 바꾸기 때문에 포교(捕校)들의 마음이 해이해집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 장신(將臣) 이완(李浣)이 일찍이 주린 까마귀가 추녀 앞에 있는 달걀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 짐짓 도둑을 다스리는 형구(刑具)를 설치한 뒤에 그의 계집종을 심문하자 바로 자백하니, 이완이 탄식하기를, ‘혹독한 형벌이 이와 같은데 만일 자백하지 않는다면 이는 도적보다 심한 자이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말이 옳다. 내가 《속전(續典)》에 이 형벌을 없애게 한 것도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하였다.

 

지평 이장하(李長夏)가 상소하기를,
"이택징(李澤徵)이 윤휘정(尹彙貞)을 논박한 것은 특히 사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바로 지신사(知申事)241)  를 반박한 것입니다. 대개 재신(宰臣)의 지망(地望)과 이력(履歷)은 시골에서 온 하찮은 무리들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닌데, 자기와 의논이 다른 사람은 논박하고 공격하여, 앞장서서 공효(功效)를 세울 계획을 삼았습니다. 이택징에게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여 남을 무함하는 버릇을 징계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택징이 비록 협잡(挾雜)하였으나, 한낱 지신사를 위하여 도리어 대신(臺臣)을 배척하였으니, 이 버릇을 어찌 감히 부리려 하느냐? 이장하를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10월 16일 갑인

임금이 숙장문(肅章門)에 나아가 남익한(南翼漢)을 친국(親鞫)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역적 황진기(黃鎭紀)를 잃어버렸고 또 권두령(權斗齡)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초자(招資)와 상금(賞金)을 한결같이 황진기를 구포(購捕)하는 예에 의하여 승속(僧俗)을 물론하고 시행할 것이니 이로써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죄인을 붙잡아 올 동안에는 친국을 잠시 중지할 것이니 이용발(李龍發)·김덕재(金德載)는 그냥 가두어 두었다가 결말(結末)을 기다리게 하라."
하고, 경온(慶昷)은 특별히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평안 감사 이종성(李宗城)의 장계로 인하여 평양의 관시고(管市庫)를 혁파(革罷)하고 고례(古例)에 따라 개시(開市)하고 물력(物力)은 감영과 각읍(各邑)에서 담당하며, 그 나머지 부족한 수량은 칙수(勅需)242)  나 대동고(大同庫)를 막론하고 편리한 데 따라 회감(會減)243)  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장령 전명조(全命肇)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사간 조경(趙擎)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포청(捕廳)에 명하여 신유년244)   이후의 종사관(從事官)은 모두 곤장(棍杖)으로 다스리고 외임(外任)에 있는 자는 영문(營門)으로 하여금 결곤(決棍)하게 명하였으니 무릇 41명이었는데, 이는 기포(譏捕)하는 것이 옛날만 못하기 때문이었다.

 

강화 유수 한현모(韓顯謨)가 상소하여 축성(築城)할 때에 돌을 캐어서 배로 운반하는 데 드는 물력(物力)을 상세히 논주(論奏)하고 쌀 2만 곡(斛)과 돈 3만 냥(兩)을 달라고 청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본부(本府)에 군량이 모자라고 창고에 은자(銀子)와 무명이 빈 문부(文簿)만 있으며, 어린이나 노약자가 섞여서 군대에 충당되고 군기(軍器)가 좋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경(卿)이 힘쓰라는 뜻으로 비답하고,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쌀 8천 석(石)과 면포(綿布) 1백 동(同)과 풍락송(風落松) 2천 주(株)를 획급(劃給)하도록 하였다.

 

10월 19일 정사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 위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처음에 신위(申暐)가 조돈(趙暾)을 상소하여 구한 것 때문에 함문(緘問)245)  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심동상(沈東尙)·김만주(金萬冑)·김범로(金範魯)·조휘(趙徽)·최제항(崔齊恒) 등이 모두 끌어댄 바가 되었다. 임금이 심동상 등을 잡아 가두고 엄하게 조사하여 공사(供辭)를 받으라고 명하였다. 병조 참지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심동상의 이웃에 사는 정언 송시함(宋時涵)으로 인하여, 정관(政官)의 위탁으로 심동상이 매우 근심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은 마음 속으로 가만히 괴이하게 여겼는데, 마침내 심동상이 신에게 역사(歷辭)246)  하러 왔을 때 들은 바로써 묻기를, ‘과연 전하는 말과 같다면 잔읍(殘邑)에서 어찌 그 요구에 책응하겠는가?’ 하니, 그가, ‘감당할 수 없어서 매우 민망스럽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공사(供辭)는 까닭 없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하였다. 정언 송시함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심동상에 대한 사설(辭說)은 온 동네 사람이 말을 전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이천보가 신으로써 증거를 삼는 것은 그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동상의 초사(招辭)는 너무 모호하다. 만일 곧바로 공초하지 않으면 차례로 함문함은 자연히 그 시기가 있는 것인데,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서로 글을 올리니 사체(事體)에 있어서 모두 너무 한심하다. 이천보와 송시함의 원소(原疏)는 되돌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송시함의 의도는 대개 홍상한(洪象漢)을 무함하려고 뜬소문으로 선동하여 이천보의 귀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이천보는 이목(耳目)의 관원으로서 탄핵(彈劾)하였으면 오히려 옳았을 것인데, 오늘의 세도(世道)에서 이 말을 전파(傳播)하였으니, 잘못되었다. 뒤에 심동상은 처음에 직초(直招)하지 않았다 하여 귀양가는 벌을 받았고, 송시함은 위로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 대각(臺閣)을 욕되게 하였다 하여 종성부(鍾城府)에 유배시켰으며, 조휘는 말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에 엄히 형신(刑訊)하여 섬으로 유배시켰고, 최제항은 유감을 품고 남을 무함하였기 때문에 역시 형신하여 유배시켰으며, 신위와 조돈은 모두 삭출(削黜)시켰고, 김만주와 김범로는 심문할 것이 없어서 모두 석방하였다.

 

10월 20일 무오

서북변(西北邊)에서 연좌된 모든 죄인을 호남(湖南)의 해도(海島)에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다.

 

10월 23일 신유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지사(知事) 이주진(李周鎭)에게 말하기를,
"얼마 전에 경(卿)이 허추(許錘)를 승륙(陞六)시키는 일에 대해 진달한 것은 경이 덕(德)으로써 원망에 보답하고자 하는 뜻임을 알았다. 그러나 대저 인(仁)의 해로움은 유약(柔弱)한 지경에 이르는 데 있고 의(義)의 폐단은 강학(强虐)한 지경에 이르는 데 있다. 경은 진실로 사(私)로써 공(公)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나, 공(公) 자를 잘못 쓰게 되면 이는 공평한 것이 못된다."
하니, 이주진이 황공하여 말하기를,
"허추가 이시희(李時熙)와는 간격이 있기 때문에 성조(聖朝)에서 버릴 물건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한 것이고 소통(疏通)시켜 서용(敍用)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이장오(李章吾)를 승지로, 남태제(南泰齊)를 대사간으로, 유언술(兪彦述)을 헌납으로, 안상휘(安相徽)를 사간으로, 윤상임(尹尙任)을 정언으로, 김한운(金翰運)을 장령으로, 황경원(黃景源)을 수찬으로, 유우기(兪宇基)를 부응교로, 조영국(趙榮國)을 대사성으로, 김이만(金履萬)을 정언으로, 한광조(韓光肇)를 지평으로 삼았다.

 

10월 27일 을축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8일 병인

임금이 숙장문(肅章門)에 나아가서 이덕하(李德夏)와 남익한(南翼漢)을 친국(親鞫)하였는데, 형신(刑訊)해도 자복(自服)하지 않았다. 이용발(李龍發)은 절도(絶島)에 정배하고, 김덕재(金德載)·이덕하·남익한은 모두 멀리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이색(李穡)의 초사로 인하여 이덕하를 잡아왔는데, 바로 거창(居昌)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색이 끌어들인 바가 아니어서 풀어 보내었다. 다시 이덕하를 잡아들였으나, 권두령(權斗齡)을 잡기 전이었으므로 빙핵(憑覈)할 길이 없어서 우선 정배하였다가 얼마 후에 모두 나국(拿鞫)하게 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용발은 이색의 사환(使喚)이 되었으며, 김덕재도 역시 음모에 참여하여 알고 있으니, 이색이 경폐(徑斃)된 뒤에 음흉한 사정과 권두령의 거처(去處)를 빙핵할 수 있는 자는 단지 이 두 사람뿐입니다. 전후(前後)의 초사(招辭)에서 실토하지 않고 숨기는 정상이 뚜렷이 있으니, 청컨대 작처(酌處)하라는 명을 정침하고 다시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유언술(兪彦述)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이용발과 김덕재에 대하여 작처하라는 명을 정지하고 이어서 다시 국문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서전(書傳)》에 이르기를, ‘하루 이틀에 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라고 하였다. 또 왕자(王者)는 강학(講學)으로 우선을 삼아야 하니, 성현들의 훈모(訓謨)와 지난 역사의 치란(治亂)을 경사(經史)가 아니면 어떻게 알겠는가? 하물며 공자(孔子) 같은 성인으로도 스스로 말하기를, ‘나처럼 호학(好學)하는 자는 없다.’ 하였으니, 어찌 기한(祁寒)이나 성서(盛暑)라고 하여 정지할 수가 있겠는가? 지난번 시강(侍講) 때 《주례(周禮)》의 주(注)에 옥조편(玉藻篇)247)  을 끌어대어 감동을 일으킨 것이 있다. 우리 조정에는 비국(備局)의 일차(日次)가 있으니, 이것도 역시 사무를 보는 것이긴 하나, 아주 추울 때나 더울 때에 탈품(頉稟)하는 것은 특별히 법강(法講)248)  뿐만 아니라, 아울러 사무를 보던 것까지도 탈품하였으니, 달로 헤아려 보면 반년 동안은 늘 탈품 중에 있었다. 그러니 하루 이틀 사이에도 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물며 어린 나이의 임금은 강학(講學)이 더욱 긴요한 것이다.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하루만 독서하지 않으면 입 속에 가시가 난다.’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반년이겠는가? 비국의 일차가 고례(古例)에는 한 달에 세 번이었는데, 몇 해 전에 특명으로 한 달에 여섯 번씩 하게 되었으니, 참 훌륭한 일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구제(舊制)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법강(法講)과 차대(次對)는 모두 편전(便殿)에서 행하되, 추위와 더위에도 똑같이 하라. 이 뒤로는 아무리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라도 탈품하지 말 것이며, 이것으로써 《속대전(續大典)》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어린 나이에 하는 주연(冑筵)249)  은 하루만 강학(講學)을 중지하여도 안타까운 일인데 탈품의 명목이 너무 많다. 내가 양암(諒闇) 중에 있을 때에 비록 인산(因山) 전이라도 역시 강학(講學)을 하였었는데, 하물며 하찮은 잡탈(雜頉)을 핑계대어서야 되겠는가? 이 뒤로는 국기일(國忌日)이나 사기일(私忌日)에도 주연과 소대(召對)의 일을 예에 따라 행할 것이며, 대향(大享) 및 수개일(修改日)이라도 동가(動駕)와 상치(相値)하는 날 외에는 모든 탈품을 일체 없애고, 《속대전》에도 또한 싣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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