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2권, 영조 21년 1745년 11월

싸라리리 2025. 9. 28.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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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무진

조경(趙擎)을 보덕(輔德)으로, 남유용(南有容)을 부교리로, 김시찬(金時粲)을 교리로 삼았다.

 

간원 【정언 김이만(金履萬)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거창 부사(居昌府使) 이재문(李載文)은 일찍이 파총(把摠)으로 있었을 때 부곡(部曲)을 침어(侵漁)하였고, 또한 행동에 허물이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침을 뱉었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임금이 나문(拿問)하여 처치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익산 군수(益山郡守) 김필호(金必祜)는 재결(災結)250)   5백 결(結)과 모맥(牟麥)의 환곡(還穀)을 팔아서 이익을 취하였고, 속공 노비(屬公奴婢)를 놓아 준 대가로 돈을 받았으며, 개인 감정으로 곤장을 쳐서 사인(士人) 박일성(朴日省)을 죽였습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엄중히 핵실해서 법에 따라 처단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일 기사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포교(捕校)가 권두령(權斗齡)을 잡았다. 임금이 맨 앞장서서 잡은 사람 양천표(梁天杓)에게 두 품계(品階)를 올리고 천금(千金)을 상주었으며, 그 나머지는 혹은 상금을 주고 혹은 변장(邊將)으로 제수하였으며, 포졸(捕卒)들에게는 쌀이나 포목(布木)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숙장문(肅章門)에 나아가 권두령과 김준흥(金俊興)을 친국(親鞫)하였는데, 김준흥은 권두령을 숨겨준 자였다. 권두령을 국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감히 망명(亡命)한 것이 아니라, 본관(本官)의 창고지기로서 태장(笞杖)이 괴로워서 도주하였는데, 비록 이색(李穡)을 찾아가 보았지만 모의(謀議)한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이용발(李龍發)과 면질(面質)시키자, 이용발이 말하기를,
"너의 척숙(戚叔) 이색이 네가 칠보산(七寶山)의 중 및 황진기(黃鎭紀)와 함께 모의하고 왕래하였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하니, 권두령이 말하기를,
"모역(謀逆)하는 줄 알았으면 어찌 고발하지 않았겠느냐?"
하였다. 권두령과 김덕재(金德載)를 면질(面質)시키자, 김덕재가 말하기를,
"이색이 일찍이, ‘천변(天變)이 자주 생기고 먼 지방에 도적이 있으니, 이용발을 시켜 고변(告變)하려고 한다.’고 말하니 네가, ‘허실(虛實)도 모르면서 고변한다면 반드시 크게 실패할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하니, 권두령이 말하기를,
"네가, ‘장래에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 ‘이색이 지금 비록 귀양살이를 하지마는 이는 큰 간국(幹局)이니 마땅히 쓸 곳이 있을 것이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였다. 권두령과 김덕재에게 형장을 두 차례 가하였다.

 

11월 3일 경오

유성이 북락사문성(北落師門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 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한억증(韓億增)을 부교리로, 윤지태(尹志泰)를 사간으로, 이제암(二齊嵒)을 정언으로, 황합(黃柙)을 지평으로 삼았다.

 

임금이 숙장문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권두령(權斗齡)을 국문하니, 공초하기를,
"이색(李穡)이 일찍이 말하기를, ‘흥양(興陽)에 적거(謫居)하였을 때 무신년251)  의 여얼(餘孼)인 나가(羅哥) 20여 명이 승도(僧徒)를 모았는데, 그 군대가 적었기 때문에 나에게 군인(軍人)을 더 모집하라고 하고, 또 수상스런 말을 많이 하기를, 「네가 만일 고변(告變)하면 비록 망명(亡命)하더라도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색이 또 말하기를, ‘이유익(李有翼)의 아들이 경성(鏡城)의 김추경(金樞慶)의 집에 드나드는 것으로 보아 청천강(淸天江) 북쪽의 죄인들이 수상한 점이 많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색은 또 말하기를, ‘황진기(黃鎭紀)가 정중복(鄭重福)과 함께 칠보사(七寶寺)에 살면서 중이 되었었는데, 지금은 환속(還俗)하여 무산(茂山)에 산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진기는 승명(僧名)이 바로 순상(順尙)이니 이로써 미루어 찾는다면 가히 붙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권두령·이용발(李龍發)의 지엽(枝葉)에 불과하고, 이색이 바로 핵심이 되는 근본이었다."
하였다. 수찬 조운규(趙雲逵)가 말하기를,
"권두령이 납초(納招)한 뒤로 이색의 흉심 역장(凶心逆膓)이 모두 드러났으니, 대역률(大逆律)을 추시(追施)함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법을 맡은 신하가 논박해야 하는데도 논박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헌납 유언술(兪彦述)을 파직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죄인의 초사 중에 오른 자들은 도류안(徒流案)을 상고하여 곧바로 발포(發捕)하되 황진기의 간 곳은 죄인이 이미 알려 주었으니, 영리한 포교(捕校)를 특별히 파견하게 하고, 오위 장(五衛將) 이양중(李陽重)은 북관(北關)에 살고 있어 반드시 육진(六鎭)의 도리(道里)를 익숙히 알 것이니 함께 가서 붙잡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 윤지태(尹志泰)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경폐(徑斃)된 죄인 이색은 대역률에 의하여 노적(孥籍)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망명 죄인을 용납하여 숨겨준 사람을 만일 나문(拿問)하지 않으면 후폐(後弊)가 무궁할 터이니, 청컨대 이황필(李黃必)을 잡아오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조운규가 또 이색에게 역률(逆律)을 추시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추율(追律)은 상법(常法)이 아니니, 이런 길은 경솔히 열 수가 없다. 결코 윤허하여 따르기가 어렵다."
하였다.

 

임금이 숙장문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권두령을 국문하니, 공초하기를,
"영성군(靈城君)은 누구인지 모르나 심부름꾼을 시켜 편지를 전하였다는 이야기를 단지 이색에게서 들었습니다. 이색이 말하기를, ‘무신년의 여얼(餘孼)들이 특별히 나라를 원망한 단서가 없는데, 박문수(朴文秀)·조현명(趙顯命)·심수현(沈壽賢) 등 여러 소론(少論)들이 반드시 그 여얼들을 죽이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권두령과 이용발을 면질시키자, 권두령이 말하기를,
"네가, ‘이덕하(李德夏)가 이색이 있는 곳에 와서 관상(觀相)을 보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이색도, ‘이덕하가 나의 관상을 보고 정승이 될 만하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니, 이용발이 말하기를,
"이색이 너와 함께 의논하여 변서(變書)를 주었으므로 나는 가지고 올라 왔을 뿐이다. 다른 것을 어찌 알겠는가?"
하므로, 이용발에게 형장(刑杖)을 두 차례 가하였다. 신후담(愼後聃)에게 묻기를,
"너는 어찌하여 감히 이색의 시체를 거두고 권두령을 유숙하도록 허락하였느냐?"
하니, 신후담이 공초하기를,
"이색은 신의 외숙입니다. 이색이 죽은 뒤에 신의 어미가 울면서 옷을 만들어 놓고 사람을 시켜서 뼈를 거두어 오라고 하므로, 마지못하여 이색의 종 방량(放良)을 시켜서 과연 시체를 거두어 왔습니다. 그리고 계해년252)  에 권두령이 신의 집을 찾아 다녀간 일이 있었으나, 신은 고향에 있었으므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는데, 권두령과 면질시키니 과연 서로 얼굴을 알지 못하였다. 신후함(愼後咸)을 심문하니, 공초하기를,
"계해년에 권두령이 휴가를 얻어서 왔다고 스스로 말하므로, 그가 망명(亡命)한 사실을 몰랐고, 신의 어미가 과연 나가서 보았습니다. 그때에 신의 두 형(兄)은 모두 시골에 있었고, 신만 혼자 집에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후담의 어미는 여자로서 능히 이색의 시체를 거두었으니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신후담은 별로 범한 바가 없으니 특별히 석방하고, 신후함은 적노(賊奴)로서 도피한 자를 감히 머무르게 하였으니, 그냥 풀어줄 수 없다. 정배(定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 윤지태(尹志泰)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신후함은 극변(極邊)으로 원배(遠配)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지(遠地)에 정배함이 가하다."
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연일 현감(延日縣監) 김취보(金就寶)는 역적 김태기(金泰起)의 친조카로서 물의(物議)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마부(馬夫)와 말도 갖추기 전에 급급히 조정을 떠났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먼저 나문(拿問)하고 핵처(覈處)하라."
하였다.

 

11월 5일 임신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11월 7일 갑술

남태량(南泰良)을 대사간으로, 조윤제(曹允濟)를 형조 참판으로, 윤동준(尹東浚)을 헌납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남 개량사(湖南改量使) 원경하(元景夏)가 복명(復命)하고, 이어서 청하기를,
"호남 잔읍(殘邑)은 기해년253)  의 양전(量田)한 예에 따라 비국(備局)의 구관곡(句管穀)을 획급(劃給)하소서."
하니, 대신에게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원경하가 또 아뢰기를,
"흥덕 현감(興德縣監) 김행일(金行一)은 정사를 하는 데 조리가 있고 전정(田政)에 밝으니, 격려하는 방도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서(陞敍)254)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산 부사(礪山府使) 이한범(李漢範)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정치(政治)가 어지러우니, 파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원경하가 또 자신이 왕명을 띤 사람으로서 번신(藩臣)에게 욕을 당하였다 하면서 인조(引罪)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명을 띤 자는 아무리 하찮더라도 서열이 제후(諸侯)의 위에 있는데, 하물며 중신(重臣)이겠는가? 번신의 부당(不當)함이 이와 같으니 파직시키고, 중신(重臣)도 애초에 장계(狀啓)하여 청죄(請罪)하지 않은 것 역시 체면을 손상시킨 것이니, 중추(重推)하도록 하라."
하였다. 당초에 원경하가 감영 중군(監營中軍) 권의(權䭲)를 자벽(自辟)255)  하여 군관(軍官)을 삼으려고 하자, 감사 정형복(鄭亨福)이 보내 주지 않았는데, 권의가 검전(檢田)할 때에 원경하를 찾아가 보니, 원경하가 그를 질책하였다. 이것 때문에 정형복이 상소하여 원경하의 잘못을 말하니, 원경하도 역시 상소하여 서로 쟁변(爭辨)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원경하가 그 정상을 스스로 진달하니, 이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11월 8일 을해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서 차도림(車道林)과 이황필(李黃必)을 친국하였다. 차도림은 곧 서당(書堂)을 만들어 학도(學徒)를 모은 뒤에 이색(李穡)을 초청하여 사장(師長)을 삼은 자이고, 이황필은 바로 이색의 조카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신년256)  의 역적에 연좌된 자로서 이제까지 머리가 붙어 있는 것만도 너무 관용(寬容)한 실수인데, 인심(人心)이 쉽사리 익숙해져서 심상하게 생각하여 함부로 행동하여도 문책하지 않고 도피하여도 체포하지 않으니, 이미 너무 해괴한 일이다. 그런데 학도라 일컫고 왕래하기를 조금도 꺼릴 것이 없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서당을 철거하게 하고, 당시 금지하지 않은 관장(官長)은 모두 삭출(削黜)하는 율을 시행하라. 김필저(金弼著)는 가산 좌수(嘉山座首)의 아들로서 학고 도감(學庫都監)이 되어 이색에게 돈을 주었다고 한다. 김필저의 아비는 좌수의 몸이 되어 그 아들로 하여금 수학(受學)하게 하였으니 무식(無識)한 촌민(村民)에 비유할 바가 아니다. 한 차례 엄한 형장을 가한 뒤에 섬으로 유배하게 하고, 학도 중에 대야(大也) 등 이름이 국초(鞫招)에서 나온 자는 모두 한 차례씩 형추(刑推)하라는 일을 본도(本道)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이황필은 참작하여 원배(遠配)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남태량(南泰良)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권두령이 고한 대야 등은 이름이 이미 국초(鞫招)에 나왔으니, 모두 나국(拿鞫)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9일 병자

이춘제(李春躋)를 대사헌으로, 조경(趙擎)을 집의로, 한덕량(韓德良)·유건(柳謇)을 장령으로, 한광협(韓光恊)·남덕로(南德老)를 지평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지경연(知經筵)으로, 윤봉구(尹鳳九)를 진선(進善)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11월 10일 정축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기(趙錡)·조관(趙錧)을 친국하였다. 조기·조관은 곧 무신년의 역적 조관규(趙觀奎)의 아들과 조카인데, 그들은 서로 왕래하면서 음모(陰謀)하다가 권두령의 공초에 의하여 끌려 들어온 자이다. 권두령과 면질시켰으나 모두 서로 얼굴을 알지 못하였는데, 아울러 엄한 형장을 내렸다. 또 중 채봉(彩鵬)을 국문하여 형장을 한 차례 가하고 권두령과 면질시켰으나, 서로 얼굴을 알지 못하였다.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의 중 붕화상(鵬和尙)을 다시 체포하여 오라고 명하고, 위패(違牌)한 헌신(憲臣)은 모두 삭직하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이춘제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남태량(南泰良)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2일 기묘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남익한(南翼漢)·차도림(車道林)·이술(李述)·이부(李富)·이자득(李自得)·이다치(李多致)를 친국(親鞫)하여 형신(刑訊)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이술·이부·이자득 3형제는 바로 이색의 종제(從弟)들이었고, 이다치는 곧 무신년 역적 이하(李河)의 아들이었다. 이다치가 공초하기를,
"신은 여러 역적들과 내통한 일이 없었고 신의 외숙(外叔) 박태용(朴泰容)이 신에게 편지로 알리기를, ‘듣건대 이색이 서북(西北) 지방 여러 죄인들의 역모(逆謀)를 고변(告變)하였다고 하는데, 너는 나이 어리니 어찌 알겠는가? 만일 혹시라도 이배(移配)하게 될지 모르니 미리 행장을 꾸려 놓아라.’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태용은 누구인가?"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의 종질(從姪)로서 지금 음사(蔭仕)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국옥(鞫獄)에 관한 일을 누설시킨 것으로써 해부(該府)에 명령하여 박태용을 나문(拿問)하라고 하였다. 대사헌 이춘제(李春躋)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 윤지태(尹志泰)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역적에 연좌되어 종이 된 자는 관장(官長)이 엄하게 단속하는 것이 마땅한데, 지금 이다치의 공초를 보니, 이색이 사장(師長)이라고 자칭하고 촌리(村里)를 돌아다니었고, 수일(數日) 걸리는 길에 말미를 주어 잔적(殘賊)들의 소굴(巢窟)에 죄수를 놓아 주었습니다. 청컨대 무신년 이후의 철산 부사(鐵山府使)는 모두 나문(拿問)해서 엄중히 처분하고, 말미를 준 수령(守令)은 모두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운산(雲山)에 정배된 죄인 조관(趙錧)은 읍(邑) 밑에 있지 않고 멀리 떨어진 마을에 있었으니, 해당 군수는 삭출(前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13일 경진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조기(趙錡)와 조순(趙錞)을 친국하였다. 조순은 조기의 형인데, 형장 두 차례를 가하자 직초(直招)하였다. 또 이다치(李多致)를 국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이색을 찾아가 보았을 때에 이색이 말하기를, ‘무신년의 잔당(殘黨)은 나라를 원망하는 것이 마땅하다. 강변 7읍(七邑)에 있는 적객(謫客)들이 바야흐로 동모(同謀)하였는데 영변(寧邊)의 적객 남태징(南泰徵)의 아우와 박천(博川)의 적객 고몽필(高夢弼)과 운산(雲山)의 조가(趙哥) 등이 황진기(黃鎭紀)와 서로 통하여 북경(北京)에 들어가서 청병(請兵)하려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이색에게 들은 것입니다. 신이 남태징의 아우를 중매하여 고몽필의 형(兄)과 결혼시킨 것은 만사 무석(萬死無惜)입니다."
하니, 형장을 두 차례 실시하였다. 이술(李述)을 신문(訊問)하니 공초하기를,
"권두령이 과연 찾아와서 이색의 편지를 전하기에 신이 보았고, 이색이 남익한(南翼漢)에게 보낸 편지도 역시 전하였습니다."
하니, 형장을 두 차례 실시하였다. 대사헌 이춘제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김이만(金履萬)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색의 극도로 흉악한 정절이 여러 역적들의 초사에서 낱낱이 드러났으니 대역(大逆)으로 논죄(論罪)하는 것이 왕법(王法)에 당연합니다. 또 조순은 단지 권두령의 흉언(凶言)만 들었으니, 지정 불고죄(知情不告罪)로 처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그렇게 한다면 좋겠다.’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이미 나왔으니, 대역 부도(大逆不道)의 죄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4일 신사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남익한·조기 등을 친국하여 엄한 형장을 가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이다치(李多致)를 신문(訊問)하니, 공초하기를,
"이색이 신에게 말하기를, ‘무신년의 역적 중에는 비명(非命)에 죽은 이가 많다. 너희 아버지도 역시 애매하게 죽었다.’고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모두 나라의 은혜인데, 어찌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술을 신문하니, 이술은 말이 앞뒤가 상좌(相左)되는 점이 많았다. 이어서 권두령과 면질시키니, 권두령이 말하기를,
"내가 너와 수작할 때에 이사성(李思晟)을 역적 사성이라고 호칭하였더니, 네가 말하기를, ‘다른 사람은 역적 사성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마는 무신년의 여당(餘黨)은 이와 같이 말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당시 너의 형 이부(李富)도 역시 말하기를, ‘잡담(雜談)은 집어치우고 무신년 역적은 모두 참륙(斬戮)하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너는 또 말하기를, ‘죽는다면 마땅히 박필몽(朴弼夢)의 무리와 같이 죽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 말하기를, ‘가산(嘉山)의 숙부(叔父)가 만일 좋은 시절을 만나 서울에 올라 간다면 나도 또한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니, 이술이 낱낱이 발명(發明)하였는데, 형장 네 차례를 가하였다. 또 조순(趙錞)을 신문하고 형장 세 차례를 가하자, 모역(謀逆)에 동참하였다고 자복하니, 결안(結案)하기를,
"지난해 10월에 권두령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나의 숙부 이색이 나로 하여금 서북 지방과 남중(南中)에 가서 무신년의 잔당으로 적소(謫所)에 있는 자를 찾아보고 모역할 일과 남북(南北)으로 나누어 웅거할 계획을 통의(通議)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여러 해 동안 정배(定配)되어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이 늘 가슴에 가득했기 때문에 대답하기를, ‘밤낮으로 원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으니 그렇게 한다면 지극히 좋습니다.’ 하였는데, 이른바 지극히 좋다는 것은 역적의 일이 성사된다면 석방될 뿐만 아니라 또한 벼슬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권두령과 함께 이 모의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본도(本道)의 잔당 중에 쓸 만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한 말은 또한 과연 말한 적이 있었으니, 역모에 동참한 것이 적실함을 지만(遲晩)합니다."
하니, 능지 처참(能遲處斬)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이사성(李思晟)의 자손은 엄중히 가두어 명령을 기다리도록 해도(該道)에 분부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이와 같은 조정의 명령을 들으면 다 죽일까 두려워서 더욱 흉모(凶謀)를 자행(恣行)할 것이니, 이 역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바야흐로 역모를 일으키려고 은밀히 선동(煽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술한 바가 의견이 없지 않으니, 우선 명령을 중지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내가 무신년의 사건을 징계하기 위하여 여러 날 동안 친국하였는데, 지금 비로소 조순(趙錞)에 대해 결안 취초(結案取招)하였지마는, 오히려 다시 십분 상세하고 신중하게 할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이 된 자가 어찌 경솔해서야 되겠는가? 계복(啓覆)257)  은 죄인을 반드시 삼복(三覆)한 뒤에 처결하라. 살인(殺人)한 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비록 삼장(三章)의 법이지만, 그래도 신중히 살핌이 당연하니, 다른 날에 도신(道臣)이나 수재(守宰)가 될 자는 마땅히 나의 형벌에 신중하는 뜻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5일 임오

유성(流星)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 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빛깔은 흰 색이었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이협(李㽠)을 친국하였는데, 이협은 이색(李穡)의 형이었다. 이협이 공초하기를,
"권두령(權斗齡)이 그의 조모상(祖母喪)을 당해 말미를 얻어 상경(上京)하였다고 하면서 신을 찾아왔으므로, 신이 과연 그를 나무랐습니다. 이색(李穡)은 본래 망령되고 무식하여 비록 음모와 비계(秘計)를 꾸몄지만, 신은 술을 좋아하고 오활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 끼워 주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또 권두령을 국문하니, 공초하기를,
"이색이 일찍이 이순관(李順觀)의 부도(不道)한 말을 칭송하면서 말하기를, ‘비록 죽었지마는 역시 어려운 일이라.’고 하니 이용발(李龍發)이 옆에 있다가 또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이협은 술꾼으로 알려져 있고 말을 삼가하지 않으므로 신이 올 때에 이색은 이술에게만 편지를 보내고 이협에게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에 이협은 실제로 참섭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채붕(彩鵬)에게도 역시 이색의 편지가 전하여졌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협은 이색과 다르니 별달리 엄하게 심문할 단서가 없다. 우선 가두어 두었다가 결말(結末)을 기다리라."
하고 이세집(李世楫)을 국문하여 권두령과 면질(面質)시킨 뒤에 도로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7일 갑신

대사헌 이춘제(李春躋)가 상소하여 이색을 노적(拏籍)하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이인좌(李麟佐)의 자식 중에 나이가 찬 아들 1명은 추좌(追坐)되었지만, 그 나머지 두 아들과 다른 역적들의 자식은 아직 도류안(徒流案)에 그대로 실려 있는 자가 많습니다. 빨리 상고해 내어 종전에 실시한 추좌의 예에 따라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왕자(王者)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법(法)과 믿음뿐이다. 어찌 새로운 법을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흉악한 마음을 비록 고치지 못하였더라도 어찌 사람마다 모두 그러하겠는가? 내가 법을 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할 것이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11월 18일 을유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석왕사(釋王寺)의 중 채붕(彩鵬)을 친국하고 권두령과 대질시키니, 권두령이 말하기를,
"새로운 채붕이나 앞서 온 채붕은 모두 신이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석왕사에 있는 두 채붕을 모두 잡아 왔으나 다 붕화상(鵬和尙)이 아니라고 하니 매우 수상(殊常)한 일이다. 황진기(黃鎭紀)는 아직 소식이 없으니, 권두령이 고(告)한 바가 혹 허망한 것인가?"
하니,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색(李穡)이 권두령을 시켜서 붕화상을 찾아보라고 하였다면 반드시 진짜 채붕이 있을 터인데,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앞서 온 채붕은 무엇인가 숨긴 사실이 있는 것 같으니 그냥 가두어 두고 새로 온 채붕은 놓아 보내라."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박태용(朴泰容)은 국사(鞫事)를 누설한 것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먼 곳으로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대사헌 이춘제(李春躋)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무신년 거괴(巨魁)의 자식 중에 나이가 차지 않아 종이 된 자들은 모두 정법(正法)258)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덕제(李德濟)·윤광주(尹光周)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사간 윤지태(尹志泰)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무신년 거괴의 자식으로 나이가 차지 않아 감사(感死)했던 자들은 빨리 정법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 감사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옥구현(沃溝縣)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 12명에게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9일 병술

승지를 보내어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을 돈유하고 이어서 함께 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신왈증(申曰曾)을 친국하였으니, 곧 무신년의 극적(劇賊) 신천영(申天永)의 종제(從弟)이었다. 그가 원국시(怨國詩)를 지어서 권두령에게 알리고 서로 주무(綢繆)한 정상을 국문하니, 공초하기를,
"신은 경성(鏡城)에서 종[奴]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권두령을 알았는데, 권두령에게 누이가 있어서 구혼(求婚)하였으나 신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판관(判官) 정희규(鄭熙揆)는 권두령의 어미와 이성 사촌(異姓四寸)입니다. 아객(衙客) 최씨(崔氏) 성을 가진 이가 혼인을 권하였으나 신이 또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원국시에 대해서는 신이 본래 무식한데, 어떻게 시를 지어 권두령에게 말하였겠습니까?"
하였다. 김추경(金樞慶)을 국문하였으니, 김추경은 곧 권두령의 보수 주인(保受主人)이었는데, 공초하기를,
"권두령은 그의 누이를 고을 안의 사자(士子)에게 시집보냈는데, 당시의 판관 정희규가 사모(紗帽)와 장막을 빌려주었습니다."
하였다. 이때 정희규는 이미 죽었는데, 임금이 그의 벼슬을 추탈(追奪)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언관(言官)이 논박하지 않은 것을 책(責)하자, 대사헌 이춘제(李春躋)와 대사간 윤지태(尹志泰)가 인피(引避)하여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1일 무자

봉상시(奉常寺)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삼남(三南)의 읍(邑)에 율목(栗木)259)  을 분정(分定)하던 예를 혁파하고 구례현(求禮縣) 연곡사(燕谷寺)로 주재 봉산(主材封山)260)  을 만들어 율목을 장양(長養)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2일 기축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여 권두령이 앞뒤에 고(告)한 바가 진실한 듯하기도 하고 거짓된 듯하기도 하여 절절히 교활한 정상을 추문하니, 공초하기를,
"이색(李穡)이 호인(胡人)들이 나온다는 말과 이유익(李有翼)의 아들이 칠보사(七寶寺)에서 사람을 모아 역모를 꾀한다는 내용을 신으로 하여금 서북 지방의 적객(謫客)들에게 전파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이 과연 이술(李述)과 조순(趙錞)에게 전하였습니다. 신왈증(申曰曾)은 과연 시(詩)를 지었는데, ‘옥이 비록 진흙 속에 묻혔으나 어찌 변하여 진흙이 되겠는가?[玉雖埋於泥中 豈變爲泥乎]’라고 하였습니다. 채붕(彩鵬)에 대해서는 먼저 온 자가 진짜 채붕인데, 원래 이색의 편지를 전하여 준 일이 없었기 때문에 당초 면질할 때에 혹 굽힘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얼굴을 알지 못한다고 공술하였던 것입니다. 이산(理山)에 사는 오덕흥(吳德興)은 채삼 모주(採蔘謀主)가 되어 월경(越境)하였는데, 그 장수(將帥)에는 어연(語燕)·물포(勿布)·소장(少將)으로 일컫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색은 아들이 전하여 준 말을 듣고 황진기(黃鎭紀)가 영고탑(寧古塔)에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염(李濂)·남태흥(南泰興)·남태명(南泰明)·박종인(朴宗仁)을 국문하였는데, 이염은 무신년에 복법(伏法)된 이만구(李萬衢)의 숙부(叔父)이고, 남태흥·남태명은 역괴(逆魁) 남태징(南泰徵)의 아우이며, 박종인 역시 무신년 역적 박종원(朴宗元)의 아우이었다. 이염과 남태흥 등은 이색을 모른다고 공초하였고, 박종인은 조순에게 흉언(凶言)을 듣지 못하였다고 공초하였다. 임금이 채붕을 올리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너는 처음에 속여서 숨기려고 한 것이 있기 때문에 형장(刑杖)을 받았는데, 지금 역모에 간섭한 일이 없으므로 특별히 석방한다."
하였다. 장령 한덕량(韓德良)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이제암(李齊嵒)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권두령이 강계(江界)에 도피하여 있을 때에 지방관(地方官)이 잡아서 보고하지 못하였으니, 전후(前後)의 부사(府使)를 모두 삭직시키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정희규(鄭熙揆)의 문제를 논박하지 않은 대간(臺官) 이춘제(李春躋)·윤지태(尹志泰)는 파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금부 도사 이보흥(李普興)은 죄수를 검칙(檢飭)하지 못하여서 함부로 착모(着帽)하게 하였고, 박사약(朴師約)은 어리석어 살피지 못하여 죄인을 바꾸어 들였으며, 오명삼(吳命三)은 중도(中途)에서 지체하면서 곧바로 잡아오지 않았으니,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이덕제(李德濟)의 일이 정계(停啓)되었는가의 여부를 물으니, 승지 김광세(金光世)가 말하기를,
"대사헌 이춘제가 이미 정계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방비[防隄]를 엄격히 하지 못한 것으로 하교(下敎)하여 엄중히 질책하였으며, 이춘제는 삭출(前黜)하고, 한덕량·이제암은 마땅히 논박해야 하는 데도 논박하지 않았다 하여 아울러 삭직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3일 경인

임금이 수서(手書)로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돈유(敦諭)하고,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에게 함께 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여 신왈증(申曰曾)에게는 형장(刑杖) 네 차례를, 남태흥(南泰興)에게는 형장 한 차례를, 이다치(李多致)에게는 형장 네 차례를 가하였으나, 모두 자복하지 않았다. 남태명(南泰明)에게 형장 두 차례를 가하니 공초하기를,
"이다치가 찾아와서 이색의 말을 전달하기를 ‘청천강(淸川江) 북쪽의 적객(謫客)들에게 괴이한 일이 있다.’고 하면서 대강을 숨기고 말하였는데, 신이 이미 이 말을 듣고도 처음 직초(直招)하지 않았으니, 실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것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다. 고몽필(高夢弼)은 형장 한 차례를 가하자, 남태명의 공초한 바와 한결같았으니, 고몽필은 바로 무신년 역적 고몽량(高夢亮)의 아우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추경(金樞慶)에게는 물을 만한 것이 없으니 놓아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남덕로(南德老)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김이만(金履萬)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이덕제(李德濟)에 대하여 논하지 않은 것으로써 인피(引避)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덕로는 하문(下問)할 때에 대답이 모호하였으니 삭출(削黜)의 율을 시행하고, 김이만은 억지로 인피하였으니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윤광주(尹光周)는 그냥 두도록 하라. 이덕제는 역적인 듯하기도 하고 아닌 듯하기도 한 사이에 그냥 버려둘 수 없다. 한 번 구문(究問)한다면 타결(妥結)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니 전계(前啓)를 추윤(追允)한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앞날에 대각(臺閣)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함이다."
하였다.

 

장령 유건(柳謇)을 원찬(遠竄)하라고 명하였으니, 두 번이나 소패(召牌)를 어겼기 때문이었다.

 

김상구(金尙耉)를 장령으로, 엄우(嚴瑀)를 정언으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11월 24일 신묘

유최기(兪最基)를 대사간으로, 김한운(金翰運)을 장령으로, 임순(任珣)·이창유(李昌儒)를 지평으로, 김양택(金陽澤)을 정언으로, 윤동도(尹東度)를 사서로, 남유용(南有容)을 사간으로, 권적(權𥛚)을 대사성으로, 윤용(尹容)을 대사헌으로, 유우기(兪宇基)를 집의로, 이윤신(李潤身)을 보덕(輔德)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우빈객(右賓客)으로, 이달(李鐽)을 전라 좌수사로 삼았다.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여 죄인 권두령·남태명·이염을 형신(刑訊)하였는데, 자복하지 않았다. 김용서(金龍瑞)는 무산(戊山)으로부터 국경을 넘어 가서 역적 황진기(黃鎭紀)를 보았다고 공초하였다. 장령 김상구(金尙耉)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온(慶昷)이 역적 이색(李穡)을 찾아가 보고 이용발(李龍發)을 허접(許接)하였으니, 모두 의심스러운 자취가 있습니다. 전석(全釋)하는 것은 불가하니 원지(遠地)에 정배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권두령이 강계(江界)와 이산(理山)에 출몰하였을 때에 지방관(地方官)이 곧바로 잡지 않았으며, 간원(諫院)에서 논계(論啓)할 때에 단지 강계만 논계하고 이산은 논계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앞뒤의 이산 부사(理山府使)를 일체 삭직(削職)시키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정언 엄우(嚴瑀)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조순(趙錞)은 여주(驪州)에서 태어났으나, 능침(陵寢)이 있는 읍(邑)이므로 예(例)에 따라 읍호(邑號)를 강등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5일 임진

김준흥(金俊興)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추국(推鞫)을 행하여 고몽필(高夢弼)은 실정을 알면서도 보고하지 않은 것으로써 결안(結案)하기를,
"신이 이다치(李多致)를 매부(妹夫)로 삼았는데, 6, 7년 전에 이다치가 와서 말하기를, ‘이색이 청천강 이북의 적객(謫客)들이 국가를 모해(謀害)하기 위하여 역적 황진기(黃鎭紀)와 피국(彼國)에 교통(交通)한다 하더라.’고 하므로, 신이 허망한 것이라고 나무랐으나 이다치와의 관계 때문에 차마 고변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마침내 처참(處斬)하였다.

 

11월 26일 계사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초복(初覆)을 행하였다. 옥안(獄案)을 순문(詢問)하다가 철원(鐵原)에 간음으로 인한 옥사가 있음을 보고 수찬 조운규(趙雲逵)를 안핵 어사(按覈御史)로 삼았다. 조운규에게 하교하기를,
"왕자(王者)는 풍화(風化)로써 다스려야 하는데, 오정(五丁)의 일은 이를 말하기도 추잡스럽다. 문안(文案)은 유신(儒臣)이 이미 아는 것이니 도신(道臣)과 상의하여 엄격히 조사할 것이며, 본도(本道)에 들어간 뒤에는 암행(暗行)하여 관동(關東) 지방의 민정을 염찰(廉察)하는 것이 옳겠다."
하고, 또 특별히 하유(下諭)하기를,
"아! 윤강(倫綱)을 북돋우는 것이 왕정(王政)에서 먼저 할 바이고, 흉년 든 해에 백성을 돌보아 주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당면한 임무이다. 금년에는 관동에 농사가 큰 흉년이 들어 도신(道臣)이 이미 알려 왔으니 잠자리에 들거나 밥상을 대하여도 어찌 걱정이 풀리겠는가? 아! 어사는 나의 이 뜻을 체득하여 그 안핵(按覈)하는 것만 명하였다고 말하며 여기에 소홀히 하지 말아서 그 지방에 들어가거든 수령(守令)들을 권유하여 부지런히 무휼(撫恤)하게 하고, 백성들의 걱정을 탐문(探問)하여 장문(狀聞)하여 내가 구중 궁궐(九重宮闕)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금부(禁府)에서 신왈증(申曰曾)을 추국하여 형장(刑杖)을 가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11월 27일 갑오

죄인 신왈증이 물고(物故)되었다.

 

11월 28일 을미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여 권두령을 추문하니, 공초하기를,
"이색의 말에, ‘양남(兩南)에 있는 나가(羅哥) 등 여러 사람과 할거(割據)할 일을 상의하고 해적(海賊)들처럼 배를 몰아 서울을 공격하고 싶지마는 일이 쉽게 성공할 것 같지 않으니, 각각 흩어져서 육로(陸路)로 서울에 올라와서 각문(各門)에 매복하여 있다가 밤을 이용해 불을 놓아 성중(城中)을 요란하게 한다면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성사가 되지 않거든 너는 고변(告變)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철강(李鐵剛)을 국문하니, 이철강은 곧 이익관(李翼觀)의 아들로써 처음에 이순관(李順觀)의 양자(養子)가 된 자이다. 공초하기를,
"신이 이색과 함께 청천강 이북에 있는 연좌 죄인(緣坐罪人)들을 모아 함께 일을 모의하였고, 장지(壯紙)에 크게 써서 이용발(李龍發)과 김덕재(金德載)를 시켜서 각도에 유배된 자들에게 왕래하면서 보여주게 하였습니다. 이색의 말에 ‘역모가 성공된다면 너는 마땅히 유배에서 풀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역모에 동참한 것으로써 결안(結案)하여 처참하였다. 이계강(李戒剛)을 국문하니, 이계강은 곧 이철강의 아우이다. 형장을 두 차례 가하였으나, 불복(不服)하였으며, 김덕재를 국문하고 이용발과 면질시킨 뒤에 형장을 세 차례 가하였으나, 불복하였다. 장령 김상구(金尙耉)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엄우(嚴瑀)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9일 병신

예조에서 아뢰기를,
"일본(日本)의 관백(關白)이 퇴휴(退休)하고 그 아들을 세웠는데, 퇴휴를 알리는 대차왜(大差倭)가 멀지 않아 나온다고 합니다. 차왜(差倭)가 가져오는 서계(書契)에 대한 회례단(回禮單)이나 서울의 접위관(接慰官)이 가져 가야 될 예단(禮單) 및 차왜를 접대하는 등의 절차는 근거할 만한 문헌이 없습니다. 청컨대 관백의 고부(告訃)나 고경(告慶) 및 도주(島主)의 퇴휴를 고할 때의 예에 따라 약간 가감(加減)하여 마련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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