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2권, 영조 21년 1745년 12월

싸라리리 2025. 9. 28.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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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무술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서종급(徐宗伋)에게 명하여 반궁(泮宮)에 가서 황감(黃柑)을 나누어 주고 시사(試士)하게 한 다음 대궐에 나아가 과차(科次)를 정하여 수석을 차지한 진사(進士) 윤봉오(尹鳳五)에게 급제를 내리고, 그 나머지는 각각 급분(給分)261)  하였다.

 

하교하기를,
"자전(慈殿)의 육순(六旬)이 가까이 다가왔으므로 원일(元日)262)  에는 당연히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進賀)한 다음 표리(表裏)를 올릴 것이니, 이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라. 해가 오래되어 사모하는 심정이 깊어지니 대전(大殿) 이하의 진하(陳賀)는 모두 권정(權停)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일 기해

박치문(朴致文)을 헌납으로, 이제화(李齊華)를 지평으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사형수(死刑囚) 10명에게 삼복(三覆)을 시행하였는데, 참작(參酌)하여 사형에서 감면한 자가 3명이었다. 김상구(金尙耉)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한흥(李漢興)·정지언(鄭之彦)·변경방(邊慶邦) 3명의 사형에서 감면한 자를 청컨대 모두 율에 따라 처단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계 중에 김취보(金就寶)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정언 엄우(嚴瑀)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한흥·권필재(權必才)·변경방을 모두 율에 의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권필재는 애초부터 작처(酌處)한 사람이 아니라고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엄우가 죄인의 이름을 오인(誤認)하였다 하여 인피(引避)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12월 3일 경자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김수채(金秀采)를 친국하였는데, 김수채는 곧 김덕재(金德載)의 친척이었다. 권두령과 김덕재와 이용발(李龍發)을 대질시키고 형장을 한 차례 가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장령 김상구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정언 엄우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거창 부사(居昌府使) 이재문(李載文)의 일은 정계하였다.

 

12월 4일 신축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김수채와 김덕재를 친국하여 형장을 가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12월 5일 임인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박내흠(朴來欽)을 친국하였다. 그는 곧 박종인(朴宗仁)의 아들이었는데, 형신(刑訊)하였으나 불복(不服)하였다. 나원득(羅元得)을 국문하였는데, 그는 곧 무신년 역적 나숭열(羅崇悅)의 아들이었다. 공초하기를,
"신은 이다치(李多致)와 이철강(李鐵剛)을 과연 만나 보았습니다. 이다치가 이색의 편지를 전하여 왔는데, 거기에는 장래에 하는 바가 있으니 유배에서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색이 또 신을 찾아와서 보고는 말하기를, ‘내가 감사(監司)나 병사(兵使)가 되면 군병(軍兵)을 거느릴 터이니 하는 일이 쉬워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곧 국가를 모해하려는 불궤(不軌)한 일이었습니다. 신도 역시 말하기를, ‘일이 만약 성공한다면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색이 또 말하기를, ‘적객(謫客)들이 서로 모여서 산중에 들어가 1년만 머무르고 용력(勇力) 있는 자를 얻게 되면 일을 도모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모역(謀逆)에 동참한 것으로 결안(結案)하여 능지 처참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금부 당상(禁府堂上)에게 묻기를,
"어제 나원득의 문서(文書)를 보니, 언서(諺書)로 쓰여 있기를, ‘정동(貞洞) 이태인(李泰仁)의 아들로 판서(判書)가 된 자가 사행(使行)으로 지나다가 먹을 것을 주었다.’라고 하였는데 밤새도록 생각하여 보았으나 그 사람이 누구인 줄을 모르겠다."
하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신에게 친혐(親嫌)이 있습니다마는 이진망(李眞望)인 듯 생각되니 이진망의 외족(外族)이 곧 나씨(羅氏) 성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이세필(李世弼)이 허적(許積)의 시체를 거두었다고 하니, 옛날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그냥 모르고 지나갈 수가 있겠는가? 이제는 석연(釋然)하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무신년에 내가 좌상(左相)과 함께 옥사(獄事)를 다스렸는데, 김일경(金一鏡)이 교문(敎文)을 만든 뒤에 또 이홍원(李弘遠)이 있었고, 또 이홍언의 뒤에 양취도(揚就道)가 있었다. 그 당시 마침 대향(大享)이 있어서 내가 예문관(藝文館)에서 유숙하면서 옥사를 다스렸으니, 나의 고심(苦心)한 근본이 여기에 있었다. 지난날 이용발(李龍發)이 서울로 올라온 뒤에 혹시 두세 명으로 그치려니 하였었는데, 지금은 가지 위에 가지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지금으로 볼 것 같으면 또 어떠한 갈래가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국기(國忌)를 당하여 내가 소식(素食)을 하면서 친국하는 것은 만일 이 옥사를 명쾌하게 끝내지 못한다면 돌아가 뵈올 낯이 없기 때문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나원득의 공초를 볼 것 같으면 역적 이색이 늘 관아(官衙)에 왕래하는 가운데, 그의 글을 보고 그를 칭찬한 것은 모두 해괴한 일이다. 박천(博川)의 전 군수(郡守) 홍상조(洪相朝)를 원찬(遠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7일 갑진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제흥(際興)·이자득(李自得)·조관(趙錧)을 친국하여 모두 형신(刑訊)하였으나,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이염(李濂)은 이색이 글을 잘하고 사람됨이 개제(愷悌)한데, 역적을 비호하였다고 지만(遲晩)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친국은 잠시 파하고 본부(本府)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8일 을사

박내흠(朴來欽)·김덕재(金德載)·김수채(金秀采)를 추국(推鞫)하였는데, 박내흠은 형신(刑訊)에 승복(承服)하지 않았고, 이염은 물고(物故)되었다.

 

12월 10일 정미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심해용(沈海容)을 친국하였다. 심해용은 곧 이색(李穡)의 생질(甥姪)로서 형신에 승복하지 않았고, 남태흥(南泰興)·김덕재(金德載)·이용발(李龍發)도 모두 형장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장령 김상구(金尙耉)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엄우(嚴瑀)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염이 역적 이색·김덕재와 함께 역모를 꾀한 정절이 낭자하여 숨기기 어려운데 납초(納招)한 뒤에 곧바로 물고되었으니, 청컨대 노적(拏籍)의 율을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1일 무신

김덕재·조기(趙錡)·남태흥·이자득(李自得)을 추국하여 형장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12월 12일 기유

남태흥·이자득·제흥(際興)을 추국(推鞫)하고 도로 정배(定配)하였다.

 

경기 감사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포천(抱川) 등의 고을에서 맹수에게 물려 죽은 사람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 등 18명에게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12월 13일 경술

이종백(李宗白)을 대사헌으로, 이창의(李昌誼)를 대사간으로, 민계(閔堦)를 집의로, 한억증(韓億增)을 사간으로, 이이장(李彝章)을 정언으로, 구윤명(具允明)을 문학으로, 조재민(趙載敏)·유언호(兪彦好)를 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이광흡(李光翕)을 친국하였는데, 곧 무신년 역적 이배(李培)의 조카로서 형신에 승복하였다. 이유필(李有弼)은 형신을 하자 직초(直招)하였는데, 곧 무신년 역적의 괴수 이유익(李有翼)의 아우이었다. 이광흡은 결안(結案)하기를,
"신은 붓 만드는 것으로 업(業)을 삼았는데, 연전에 이색을 주막(酒幕)에서 만났습니다. 이색이 말하기를, ‘너는 나의 뜻을 따르라. 무리들을 모아 무신년과 같은 일을 하려고 한다.’고 하므로, 신이 이색에게 말하기를, ‘만일 기병(起兵)하게 되면, 나는 죄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니 마땅히 따라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색이 말하기를, ‘무리를 모아 곡산(谷山)에서 신계(新溪)로 나가면 사람이 없는 곳이 있으니 모이기를 약속할 만한 곳이다. 군기(軍器)는 얻을 수 있는 대로 가져 오고 혹 삼지창(三枝鎗)을 만들어 성중(城中)으로 유입(流入)해서 일을 일으킨다면 비록 성사를 못하고 죽더라도 역시 장쾌한 일이다.’라고 하였으며, 그 장수(將帥)는 이색이 스스로 하려 하였고, 영변(寧邊)의 이염(李濂)도 또한 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역모에 동참한 것으로 능지 처참(凌遲處斬)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엄우(嚴瑀)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차(上箚)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영상·좌상에게 하유(下諭)하겠다."
하고, 이어서 원차(原箚)를 궁중에 머물러 두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조현명은 이색이 공초한 심양(瀋陽)의 사신(使臣) 문제로 인하여 여러 번 인책(引責)하고 사면(辭免)하였다.

 

12월 14일 신해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이유필(李有弼)을 친국하였는데, 승복(承服)하였다. 결안하기를,
"신은 이색을 곽산(郭山)에서 만났는데, 이색이 말하기를, ‘이사성(李思晟)의 아들과 황진기(黃鎭紀)가 전라도의 낙도(樂島)에서 바야흐로 거사(擧事)를 꾀하고 있으니, 권두령을 보내어 탐지하여 오게 한 뒤에 우리도 이곳의 적객(謫客)들을 모아 서로 호응(呼應)하는 바탕을 만들자.’고 하였는데 이것이 8월경의 일입니다. 나원득(羅元得)에게 수작한 일이 있어 10월 20일경 이배(移配)될 때에 곽산을 지나다가 들렀는데, 나원득이 말하기를, ‘일이 실패하면 우리는 죽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조카 이조행(李祖行)은 섬에 있는 유배지로부터 언서(諺書)를 보내 왔는데, 이르기를, ‘석방될 희망이 없어서 역모(逆謀)하려고 하나, 섬사람들은 억세고 또한 유배객도 적으니 오랜 세월을 두고 마련하여야만 움직일 수 있겠다.’고 하면서 신으로 하여금 서로(西路)에 있는 적객들과 계획하여 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조행은 이색의 일은 모르고 다른 갈래로 모사(謀事)한 것입니다. 신이 그 글을 본 뒤에 이색을 보고 이조행의 뜻을 알렸더니, 이색이 말하기를, ‘권두령이 탐지하여 온 뒤에 다시 상의하자.’ 하였습니다. 신의 처조모(妻祖母) 정녀(鄭女)는 곧 나원득의 조모(祖母)인데, 초역점(焦易占)을 잘 보았습니다. 신이 이배(移配)되는 일을 점치고 이르기를, ‘이랑(李郞)은 후복(後福)이 있으니, 어찌 천일(天日)을 볼 때가 없겠는가?’ 하였고, 또 정녀는 자수(刺繡)에 능하여 당(唐)나라 비단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방 기치(五方旗幟)를 만들어서 신으로 하여금 싣고 가게 하여 역모에 도움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하니, 역모에 동참한 것으로 능지 처참하였다. 하교하기를,
"죄인의 결안은 본래 《대명률(大明律)》에 부서(付書)된 일이 없다. 지금 이유필의 결안은 춘추(春秋)의 의(義)로써 《대명률》의 모반대역조(謀叛大逆條)에 부서(付書)하여 중외(中外)에서 모두 알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여인(女人)이 모역(謀逆)하는 일은 지금 비로소 보았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다음에는 자신이 대역(大逆)을 범하고 자신이 음모(陰謀)를 직접 한 자 외에는 혹 역적의 공초에 관련되었더라도 부녀(婦女)들을 문초하지 말라는 뜻을 법으로 만들어 《속대전(續大典)》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오위 장(五衛將) 이양중(李陽重)은 가장 추운 때 명령을 받고 어려운 길을 발섭(跋涉)하여 역적 황진기의 일을 탐문한 뒤에 돌아와 보고하였으니 특별히 우림 장(羽林將)으로 임명한다."
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엄우(嚴瑀)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5일 임자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나이동(羅二同)·조조석(趙祖石)·장운태(張運泰)를 친국하였다. 나이동은 나숭대(羅崇大)의 조카이고, 조조석은 조명규(趙命奎)의 아들이며, 장운태는 장우규(張友奎)의 아들로서 모두 무신년 역적에 연좌된 무리들인데, 모두 형신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장령 김상구(金尙耉)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엄우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계희(洪啓禧)를 승지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금부(禁府)에서 장운태·조조석을 추국(推鞫)하여 형장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12월 17일 갑인

임금이 승지를 시켜서 형조(刑曹)의 수도안(囚徒案)을 가져 오게 하여 고찰한 뒤에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석방했으니, 날씨가 춥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조흥규(趙興奎)를 친국하였으니 곧 무신년 역적 조동규(趙東奎)의 아우인데, 형신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오만웅(吳萬雄)·이성필(李成弼)·이광엽(李光燁)·서응숙(徐應肅)을 국문하였는데, 모두 여러 죄수(罪囚)들의 공초에 나온 자들이었다. 오만웅은 북방(北方)의 건장한 사람이었으니 특별히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장령 김상구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정언 엄우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최성대(崔成大)·홍정명(洪廷命)·정언상(鄭彦祥)·유건(柳謇) 등을 유배지에서 석방하라고 명하고, 이어서 삭직(削職)하는 율만 시행하였으니, 이 네 사람은 일찍이 묘향(廟享)의 대축(大祝)에 불참한 것으로서 유배된 자들이었다.

 

하교하기를,
"멀리 있는 해도(海島)에는 왕화(王化)가 미치기 어려운데, 하물며 나와 같이 모자라는 덕으로 교화(敎化)가 여러 섬에 미치지 못함이겠는가? 옛날 내가 시탕(侍湯)할 때에 본주(本州)를 돌보시던 성대한 뜻을 나는 우러러보았는데, 근래 이과(異果)를 봉진(封進)함에 있어서 목사(牧使)를 추고(推考)하고 그 과일을 물리친 것은 대개 해도(海島)에 폐가 될까 두려워함이었다. 아! 이는 수령(守令)들이 억지로 거두어 온 데서 연유된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보건대 아는 자가 비록 적지마는 모르는 자를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그 근본은 곧 섬 백성들의 고혈(膏血)이고, 그 전하여 온 것은 섬 백성들의 노고(勞苦)이다. 진상(進上)하는 것이 혹 시기가 지날 경우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는가 민망히 여겨 오면 반드시 물어보았는데, 하물며 명목도 없는 봉진(封進)이겠는가? 그 근본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는 수령을 잘 가려 뽑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본주(本州)의 목사는 청근(淸勤)하고 강직(剛直)한 사람으로 문관과 무관을 교대하여 차임하게 하라. 대정현(大靜縣)이나 정의현(旌義縣)에 대하여는 바다를 건너는 것을 싫어하여 늘 먼 지방의 한미(寒微)한 사람을 차송(差送)하였다. 아! 우로(雨露)는 땅을 가려 내리는 것이 아닌데 백성을 위한 관리의 선택은 어찌 지벌(地閥)을 가려 보낼 수가 있겠는가? 전조로 하여금 잘 선택하여 차임하게 하라. 이 하교가 내린 뒤에도 만일 전과 같이 한다면 비국(備局)에서 잘 살펴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탐라(耽羅)의 진이(珍異)한 물품을 권문(權門)에 실어들이는 일이 있었는데,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이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12월 19일 병진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조흥규(趙興奎)·목광원(睦光遠)·양민태(楊敏泰)를 친국하였는데, 목광원·양민태는 모두 무신년 역적에 연좌된 무리였다. 조흥규와 양민태는 모두 형신을 실시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12월 20일 정사

이보혁(李普赫)을 병조 참판으로, 유언술(兪彦述)을 사간으로, 심수(沈鏽)를 지평으로, 심발(沈墢)을 설서로, 이창수(李昌壽)를 부교리로, 윤심형(尹心衡)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한망득(韓望得)·안복수(安福壽)를 친국하였는데, 한망득은 한세능(韓世能)의 아들이고, 안복수는 안근(安根)의 아들이었다. 모두 무신년의 잔당(殘黨)이었는데, 형신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장령        김상구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나원득의 조모 정녀(鄭女)의 음흉스런 정절(情節)은 문득 하나의 주모자(主謀者)로서 여자라고 이를 수 없는데도 목숨을 부지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청컨대 엄히 국문하여 승복을 받아 왕법(王法)을 쾌히 바루소서."
하니, 형장을 쳐서 절도(絶島)에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왕자(王者)는 거조(擧措)가 하나라도 어긋나게 되면 그 당시의 지나친 거조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끼쳐지는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설국(設鞫)이나 나국(拿鞫)은 비록 한 가지이기는 하지마는, 경중(輕重)이 매우 다르다. 아! 무신년 역적은 어디에 연유하였든 그 근본을 바로잡고자 하면 당(黨)을 제거하는 것만한 방법이 없다. 합문(閤門)을 닫고 음식도 물리친 채 몇 번이나 간절히 개유(開諭)했건만 감동할 줄 모르고 그 버릇이 전날과 같으니 졸졸 흐르는 물을 막지 않으면 마침내 대하(大河)를 이루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지식(止息)되었으나 그 버릇이 더욱 심하여지지 않게 될 것을 어찌 알겠는가? 전후(前後)로 분열만 일으키니, 이러한 즈음에 깊은 한탄이 없지 않아 혹 과격한 거조가 있게 되었다. 아! 아무리 덕이 모자라지마는,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천하를 통일한다.’는 말이 추서(鄒書)에 보인다. 처음에 아무리 지나친 거조를 하였더라도 결국에는 한 사람도 함부로 형신(刑訊)을 가하여 억지로 일률(一律)263)                  에 처단한 일이 없었다.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세법(稅法)은 가볍게[涼] 만들어도 그 폐단은 오히려 탐오(貪汚)에 이르게 된다.’라고 하였다. 아! 비록 괴로운 마음에서 나왔더라도 그 다스림은 또한 심각한 데에 이르지는 않았다. 뒷날 사왕(嗣王)들이 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로써 본보기를 삼아 혹 한때의 오지(忤旨)로 인하거나, 혹은 간신(奸臣)들의 참소로 인하여 거리낌없이 국문(鞫問)하고 진신(搢紳)들을 찬배(竄配)한다면 이는 나로 말미암아 열리게 될 것이다. 옛날 주아부(周亞夫)는 이르기를, ‘옥리(獄吏)가 귀한 줄을 이제 알았다.’라고 하였었다. 평범하게 치대(置對)하는 것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역적을 다스리는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겠는가? 내가 무능하여 비록 덕을 후손에게 내려 주진 못할망정 어찌 형법(刑法)을 사군(嗣君)에게 내려 주어서 우리 3백 년의 교목 세신(喬木世臣)을 상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뒤로는 악역(惡逆)에 관계되었거나 무상 부도(誣上不道)한 것 외에는 비록 엄한 국문을 하려 하더라도 왕부(王府)가 여기 있으니, 역적을 다스리는 법으로 국문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역적의 공초에 관련된 자라도 악역을 범한 것이 아니고, 혹 한때의 거조가 잘못되었다든지 혹 문자(文字)를 잘못 살핀 자이거든 해부(該府)에서 추문(推問)하되, 언어(言語)나 문자를 가지고 역옥(逆獄)에 억지로 빠뜨리는 것은 좋은 일이 못 된다. 문자의 숨은 뜻을 끄집어 내어 고문(古文)에 합치시켜 무함으로 얽어 넣는 것을 일체 금지할 것이며, 또한 범상 부도(犯上不道)로 다스리지 말라는 일을 문자를 작량(酌量)하여 법전(法典)에 분명히 싣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지금 이 《속대전》 중에 환곡(還穀)을 허위 기재하고 속여서 보고한 자에게 대하여 원초(原草)에는 도(徒) 3년에 또 금고(禁錮) 5년으로 조율(照律)하게 하였는데, 성상께서 ‘또[又]’ 자를 빼라고 명하셨으니, 만약 도형에 금고를 합하여 계산한다면 너무 가볍습니다. 석방한 뒤에 다시 5년으로 계산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장오죄(贓汚罪)와 다른데 어찌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호조 판서        정석오(鄭錫五)가 청하기를,
"경신년264)                   이후 6년 조(條)의 관서(關西) 지방에 비축한 쌀과 좁쌀을 합하여 30만 곡(斛)을 지부(地部)265)                  에 획급(劃給)하여 경용(經用)에 보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2월 21일 무오

지평 심수(沈鏽)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친국(親鞫)할 때에 봉명 사신(奉命使臣)이 역적 집안의 노속(拏屬)을 찾아가 음식물을 제공한 일이 있었는데, 대신(大臣)이 이미 이진망(李眞望)이라고 지명(指名)하여 아뢰었는데도 참국 제신(參鞫諸臣)이 한 사람도 청죄(請罪)하는 이가 없었으니, 신은 참으로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정희규(鄭熙揆)·홍상조(洪相朝) 등은 이미 처분이 있었으니, 그 자신의 일 때문에 그냥둘 수는 없습니다. 이진망은 추삭(追削)하는 벌을 내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하형(禹夏亨)은 책방(冊房)266)  으로 호인(湖人)을 두었다는 말이 이미 수의(繡衣)267)  의 장계(狀啓)에 올라 있었고, 심양(瀋陽)으로 서신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또 한 국수(鞫囚)의 공초에서 나왔으니, 사실을 여부를 따지기 전에 행실이 음흉함을 볼 수 있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수가 진술한 내용은 모두 홍상조를 의심한 데서 나온 것이다. 추삭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데, 하물며 이진망 같은 중신(重臣)이겠는가? 추삭하는 것은 역률(逆律)과 같으니 어찌 경솔히 시행하겠는가? 이색의 공초에서 나온 우하형의 일은 이미 무죄로 판명이 되었다. 지금 심수의 의도는 전적으로 우하형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은 극률(極律)로 다스리기를 청하고 한 사람은 평범한 유배로 청하였는데, 이는 의심하는 마음 때문에 남을 상하게 하려 하는 것이다. 만일 엄중히 징계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 말세(末世)를 다스릴 것인가? 삭출(削黜)하는 벌을 빨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소견(召見)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박명양(朴鳴陽)은 금부 도사(禁府都事)로 있었을 때의 일 때문에 아직까지 정배(定配)되어 있는데, 또 집에는 80세 된 노친(老親)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칙려(飭勵)를 하고자 하였을 뿐이니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지난번에 죄벌(罪罰)이 중도에 지나친 자로 기언관(奇彦觀)과 이현중(李顯重)이 있는데, 여러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박치륭(朴致隆)·박성원(朴聖原)이 범한 죄는 무거운 것이 아니니, 모두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언관·이현중의 일은 듣기도 지리(支離)하다. 박치륭·박성원의 처분은 비록 지나쳤더라도 그대로 견수(堅守)하려고 한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고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는 진주(陳奏)하여 변무(辨誣)하였으니 종묘 사직(宗廟社稷)을 편안하게 한 공훈268)  이 있었고, 고 명신(名臣) 이자(李耔)도 역시 종계 변무(宗系辨誣)를 한 공훈269)  으로 부조묘(不祧廟)270)  를 특별히 명하였습니다. 지금 이정귀의 일은 이자의 일과 매우 유사할 뿐 아니라, 그 공적을 따진다면 실로 더 훌륭합니다. 이정귀는 세상에 드문 인물로서 덕행(德行)과 업적이 모두 탁월하고 문장(文章)이 나라를 빛냈으니 근고(近古)에 드문 일입니다. 이자의 예에 따라 부조묘(不祧廟)로 정하여 제사를 교체하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차왜(差倭)가 관소(館所)에 머물면서 망령되이 규격 밖의 은혜를 바라고 돌아갈 뜻이 없으니, 그 책임이 변신(邊臣)에게 있습니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심악(沈)을 잡아다가 처치하시고 훈도(訓導)·별차(別差) 및 임역(任譯)은 도년 정배(徒年定配)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서 차왜의 소청(所請)은 교린(交隣)의 의(義)에 따라 허락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는 가세(家勢)가 심히 빈한(貧寒)하니 해조(該曹)에 명하여 넉넉히 주급(周急)하여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3학사(三學士)의 일을 의논하다가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에게 말하기를,
"3학사와 청음(淸陰)271)   외에 강도 3충신의 자손도 녹용(錄用)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주진이 말하기를,
"오광운(吳光運)이 어제(御製)를 편집(編輯)한 일이 있었는데, 이미 정서(正書)하였으나 아직 상달(上達)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사관(史官)을 보내어 가져오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위탁(委託)한 바가 있었다. 지금 들으니 편집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그 편집한 것은 있으나 그 사람이 없으니 매우 슬픈 일이다. 그의 자질(子姪)로 하여금 바로 정원(政院)에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2일 기미

장령 김상구(金尙耉)가 피혐(避嫌)하여 아뢰기를,
"동료 대관(臺官)이 상소 가운데 이진망(李眞望)의 일로 참국(參鞫)했던 여러 신하들을 배척하였습니다마는, 이는 성명(姓名)이 역적의 공초 중에 나온 것도 아닌데, 이미 작고한 사람에게 극률(極律)을 가하는 것은 성상의 공평하고 진실한 다스림에 손상이 될까 염려되어 대각(臺閣)에서 발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양(瀋陽)에 서신을 보냈다는 것은 역적의 공초가 허위로 판명되어 본 사건은 백지로 돌아갔는데도 그 사건은 지적하는 바가 있다 하여 고집하여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도 오히려 이러한데 다른 것이야 다시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 이미 배척을 당하였으니, 청컨대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물러가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과 정언 엄우(嚴瑀)도 역시 심수(沈鏽)의 상소 때문에 인피(引避)하니, 헌납 박치문(朴致文)이 처치(處置)하여 아뢰기를,
"의논하여야 될 것을 의논하지 않아서 동료의 배척을 받기에 이르렀으니, 대각(臺閣)의 체면을 헤아려볼 때 그대로 눌러 있을 수 없습니다. 대소(臺疏)에서 말한 바는 스스로 귀착될 곳이 있으니, 이로써 경솔히 언관(言官)을 개체(改遞)시킬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김상구는 체차(遞差)시키고 김한운은 출사(出仕)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비답하였다.

 

12월 23일 경신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김덕조(金德祚)와 나숭경(羅崇敬)을 친국하였는데, 김덕조가 공초하기를,
"신은 무신년272)   이후에 원배(遠配)된 지 7, 8년 동안 문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색(李穡)은 처음부터 알지 못하였으며 신의 아들도 이염(李濂)의 사위가 아닙니다. ‘나 역시 오래지 않아 붙잡힐 것이라.’는 말은 애초에 나이동(羅二同)과 수작한 일이 없습니다."
하자, 나이동과 면질(面質)시킨 뒤에 형장을 한 차례 가하였다. 나숭경이 공초하기를,
"신의 아들 나이동이 붙잡혔을 때에 신은 무슨 일 때문인지를 몰랐었고, 나원득(羅元得)은 무신년 이후에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나이동은 이색과 함께 형조(刑曹)로 이송(移送)하여 결말(結末)을 기다리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박종인(朴宗仁)의 공사(供辭)는 거짓이 없고 그의 아들 박내흠(朴來欽)은 이미 장폐(杖斃)되었으니, 참작하여 원배하도록 하라. 조흥규(趙興奎)는 이미 죽었고 심해용(沈海容)도 역시 직초(直招)하였으니, 참작하여 멀리 유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소회(所懷)를 진달하면서 박종인과 심해용을 작처(酌處)하라는 명을 거두고 더욱 엄중하게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박치문(朴致文)이 심수(沈鏽)를 삭출(削黜)시킨 것은 과중(過重)하다고 진술하니, 임금이 엄한 하교를 내려 꾸짖었다가 박치문이 인피하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문학 오언유(吳彦儒)를 부교리(副校理)로 특제(特除)하였는데, 임금이 그의 할아버지 오달제(吳達濟)가 정축년273)  에 청(淸)에 항거하다 죽은 때의 벼슬이 부교리이었음을 추념(追念)하여 이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12월 25일 임술

민수언(閔洙彦)을 장령으로, 홍득후(洪得厚)를 헌납으로, 정휘량(鄭翬良)을 부제학으로, 엄우(嚴瑀)를 수찬으로, 이창수(李昌壽)를 부응교로, 남혜로(南惠老)를 지평으로, 이하종(李夏宗)을 집의로, 김시혁(金始㷜)을 대사헌으로, 정옥(鄭玉)을 정언으로, 홍봉한(洪鳳漢)을 승지로, 조동점(趙東漸)을 경기 수사로 삼았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차(上箚)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며칠 전에 대신(臺臣)이, 봉명 중신(奉命重臣)이 역적의 처자에게 음식을 보내어 위문한 일로써 추삭(追削)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다고 하는데, 신도 이 일에 대하여 역시 일찍이 범한 일이 있기에 황공함을 금하지 못하여 감히 이에 자수(自首)합니다. 신이 호남(湖南)의 안찰사로 있을 때에 순문(巡問)하던 차에 진도(珍島)에 도착하였는데, 역모로 죽은 자의 형의 처(妻)가 남편을 따라 거기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으니, 그는 곧 신의 어미의 이종제(姨從弟)이었습니다. 신이 듣건대, 명(明)나라의 왕수인(王守仁)이 역적 호(濠)를 치러 갔는데, 호의 모사(謀士) 유양정(劉養正)은 바로 그의 친구이었답니다. 왕수인은 유양정을 사로잡아 죽인 뒤에 유사(攸司)를 시켜서 그 어미의 장사를 치르게 하고 제사를 지내 주면서 말하기를, ‘군신(君臣)의 의리에 있어서는 비록 감히 그 본인에게 사(私)를 둘 수 없으나 붕우(朋友)의 정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의 어미에게 다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선묘조(宣廟朝)의 기축 역옥(己丑逆獄)274)   때 이발(李潑)은 형장을 맞아 죽고 그 어미는 붙잡혀 왔는데,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이 길에서 기다리다가 모의(毛衣)를 주었으니, 이 어찌 멸친(滅親)하는 의리에 소홀해서 그러하였겠습니까? 대개 당사자가 악역(惡逆)을 범한 것이 아니면 공의(公義)와 사은(私恩)을 아울러 행하여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미의 친척은 붕우(朋友)의 어머니에 비교하여 역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신은 간략히 주급(周給)하고 돌아왔었습니다. 이번에 정희규(鄭熙揆)의 일이 있은 뒤에 신이 반복하여 생각해보니, 비록 그 사건과 같지는 않지만 마음이 매우 불안합니다. 그런데다가 대각(臺閣)의 의논이 준엄하기가 또 이와 같으니 신이 만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덮어두고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홀로 마음 속에 부끄러움이 없겠으며, 또한 어찌 저 대신(臺臣)을 보기에 얼굴이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에 점장이가 모역(謀逆)한 일이 발생하였는데, 진신 사부(搢紳士夫)들 가운데 문복(問卜)하러 왕래했던 자들 가운데 연루된 자가 많았습니다. 당시의 대신(大臣) 왕조(王朝)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도 급제하기 전에 문복한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옛날 대신(大臣)들은 임금을 속이지 않음이 이와 같았습니다. 신이 비록 무상(無狀)하기는 하지만 사사로이 이 의리를 사모하니, 삼가 바라건대, 엄한 벌을 내리시어 남의 신하 된 자가 대의(大義)를 엄숙히 지키지 못한 경계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성상(聖上)의 중도에 지나친 거조가 비록 지금은 큰 해가 없는 것 같지만, 말류(末流)의 폐단은 반드시 망국(亡國)에까지 이를 것입니다. 한번 지나친 거조가 있으면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되어 사대부(士大夫)의 풍절(風節)과 명의(名義)는 날마다 점점 소멸되고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은 허물어져 다시 여지가 없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자주 뉘우치고 자주 실수하는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뒷날 비록 나라가 망하는 거조가 있더라도 누가 전하를 위하여 입을 열겠습니까? 비록 선조(先朝)의 고사(故事)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한 번 일에 언급하여 죄를 입게 되면 정원(政院)에서는 복역(覆逆)275)  하여 아뢰고 대간(臺諫)은 환수(還收)하라고 청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 근래에 과연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선조의 50년 동안의 성덕(盛德)과 지치(至治)가 어떠하였습니까마는, 신임(辛壬) 사건276)  으로 거의 망국(亡國)에 이르렀으니, 대저 임금이 위노(威怒)가 지나치면 처분이 합당함을 잃어 인심이 복종하지 않고, 부억(扶抑)이 너무 지나치면 아래 있는 자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답답하고 답답함이 오래 쌓이면 격동(激動)하게 마련이니, 1년 2년은 근근히 아무 일 없이 지내겠지마는 한번 무너지게 되면 수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공평하게 들으시고 널리 관찰하시어 위망(危亡)의 징조를 구제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는 옳다. 나는 고심(苦心)에서 나왔지만, 뒤에 오는 사왕(嗣王)들이 만일 이것을 가지고 신하를 억압하는 권병(權柄)을 삼는다면 곤란하다."
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 유언술(兪彦述)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추국(推鞫)을 행하였다.

 

목광원(睦光遠)·양민태(楊敏泰)·김덕재(金德載)·이자득(李自得)·이다치(李多致)·남태흥(南泰興)·김수채(金秀采)·장운태(張運泰)·한망득(韓望得)·안복수(安福壽)가 모두 물고(物故)되었다.

 

임금이 금오 당상(金吾堂上)을 소견(召見)하고 나숭경(羅崇敬)·나이동(羅二同)·조관(趙錧)·이협(李㽠)은 환배(還配)시키고, 김덕하(金德夏)는 석방(釋放)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추국(推鞫)을 우선 정지하고 나머지 죄인들은 모두 가두어 두었다가 이조행(李祖行)을 잡아 오기를 기다려 다음에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6일 계해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는 명년이 꼭 육순이 차는 해입니다. 이미 진하(陳賀)를 행할 것이면 칭경(稱慶)하고 칭상(稱觴)하는 거조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조(元朝)의 하례가 끝난 뒤에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8일 을축

임금이 대신(大臣)과 예조 판서 및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몸소 원일 동조 치사(元日東朝致詞)를 지었는데, 그 사(詞)에 이르기를,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도와서 대왕 대비의 보령(寶齡)이 장구(長久)하시니, 이 새해 아침을 맞이하여 애일(愛日)277)  의 정성이 간절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40여 년 동안 모위(母位)에 계시어 육순을 강녕(康寧)하셨습니다. 지난날을 생각하여 보니 자애로운 교화가 흡족하게 퍼졌습니다. 장락궁(長樂宮)278)  에 받들어 모시매 마침 경사스러운 모임을 맞이하였습니다. 온 조정이 함께 즐기고 온 나라가 골고루 기뻐합니다. 이 지극한 경사와 즐거움으로 만수무강의 축하를 드립니다."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남의 자식 된 자는 마땅히 어버이의 마음으로써 내 마음을 삼아야 되는 것이다. 이번 헌수(獻壽)의 절차는 자성께서 반드시 경자년279)  에 미처 행하지 못하였다 하여 차마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부모의 뜻을 앞서 승순(承順)하는 방법에 있어서 마땅히 정리를 누르고 기다려야 하겠지만 경축하는 문제는 전례가 있다. 몸소 진하(陳賀)하고 반교(頒敎)함을 전의 하교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강원도 어사 조운규(趙雲逵)가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철원(鐵原)의 옥사(獄事)를 물으니, 조운규가 언성(彦成)과 김시형(金時亨)에 대한 옥사의 정상을 캐어 물은 일로써 대답하자, 임금이 해조(該曹)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조운규가 또 말하기를,
"관동 지방 백성의 고통은 삼공(蔘貢)보다 지나친 것이 없고, 양전(量田)보다 급한 것이 없습니다. 금년에 든 흉작은 다른 여러 도(道)에 비하여 가장 심하니, 곧 진구(賑救)하여 안집(安集)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12월 29일 병인

임금이 관각(館閣)280)  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니,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원경하(元景夏)와 교리 유언호(兪彦好)가 아뢰기를,
"신 등이 하교에 의하여 역대 제왕(帝王)이 황태후(皇太后)에게 올리는 하표(賀表)의 규식을 널리 상고하여 보았는데, 원래 태후에게 하례한 표문(表文)의 고례(古例)는 없고, 송(宋)나라 고종(高宗)이 태상황(太上皇)이 되었을 때에 효종(孝宗)이 올린 청표(請表)가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옥책문(玉冊文)이 바로 표문(表文)이다."
하였다. 유언호가 말하기를,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모든 경사에 다 치사(致詞)한다고 되어 있는데 하표(賀表)와 다름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치사만 올리면 너무 간략한 듯하니 관각의 신하들로 하여금 진하(陳賀)하는 전문(箋文)을 지어서 올리게 하라. 그날 치사를 올린 뒤에 마땅히 전문을 올리고 다음에 표리(表裏)를 올리는 뜻으로 분부하라."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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