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3권, 영조 22년 1746년 1월

싸라리리 2025. 9. 2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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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무진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인정전(仁政殿)의 뜰에 나아가 왕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 진하(陳賀)하였다. 전상(殿上)에서 하례(賀禮)를 받고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조신(朝臣) 가운데 70세 이상, 서인(庶人) 80세 이상 된 자와 왕증손부(王曾孫婦)·왕외손부(王外孫婦)로서 연로하여 세상에 생존해 있는 자에게는 아울러 식물(食物)·의자(衣資)를 차등 있게 내렸다.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특별히 넉넉한 상을 내리게 했는데, 영릉 도위(寧陵都尉)로서 나이가 95세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수서(手書)로 팔도와 양도(兩都)에 권농(勸農)의 교서(敎書)를 내리고 혜청(惠廳)·탁지(度支)에 신칙하여 도하(都下)의 공민(貢民)을 돌보아 구휼하게 하였다.

 

1월 3일 경오

우의정 조현명(起顯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고 상신(相臣) 민진원(閔鎭遠)·이광좌(李光佐)의 예에 의거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사직(司直) 박필기(朴弼琦)가 상소하여 치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윤허하였다. 박필기는 과거에 급제한 지 20년 동안 문을 닫고 나간 적이 드물었으므로 세상에서 염근(恬謹)하다고 일컬었다. 이때에 이르러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치사(致仕)하였다.

 

1월 4일 신미

우의정 조현명(起顯命)이 상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고 이어 함께 올라오게 하였다.

 

1월 5일 임신

영부사(領府事) 김흥경(金興慶)이 상소하여 치사(致仕)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6일 계유

이창수(李昌壽)를 승지로, 남태제(南泰齊)를 대사간으로, 윤용(尹容)을 대사헌으로, 정하언(鄭夏彦)을 헌납으로, 김상구(金尙耉)를 장령으로, 홍서(洪曙)를 지평으로, 윤동준(尹東浚)을 부교리로, 엄우(嚴瑀)를 정언으로, 남유용(南有容)을 겸 필선으로, 홍중일(洪重一)을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고, 김광세(金光世)를 발탁하여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비국 당상(備局堂上)·추조(秋曹)의 장관(長官)을 불러서 접견했는데, 소결(疏決)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신위(申暐)·조돈(趙暾)·이춘제(李春躋)·남덕로(南德老)·기언관(奇彦觀)·이현중(李顯重)·박성원(朴聖源)·박치륭(朴致隆) 등은 방송(放送)하고, 윤광주(尹光周)·이덕제(李德濟)는 육지(陸地)로 나오게 하였으며, 이언세(李彦世)는 위리(圍籬)를 철거하게 하였다.

 

종신(宗臣)과 조신(朝臣)의 아내로서 나이 70세 이상, 사서인(士庶人)의 부녀(婦女)로서 나이 80세 이상 된 사람들에게 식물(食物)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는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청한 것으로 인하여 병술년001)  의 전례를 따른 것이었다.

 

중시(重試)의 대거 별시(對擧別試)는 흉년이 든 것 때문에 정시(庭試)로 정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1월 9일 병자

어떤 별이 저성(氐星)의 아래로 흘러갔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알현(謁見)하였다.

 

1월 10일 정축

어떤 별이 익성(翼星)의 아래로 흘러갔다.

 

1월 11일 무인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죄인 이조행(李祖行)을 친히 국문(鞫問)하여 형신(刑訊)을 가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조영국(起榮國)을 승지로 삼았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 민수언(閔洙彦)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세도(世道)가 날로 무너져 요행을 바라는 문이 크게 열렸기 때문에, 명리(名利)를 추구하는 길에는 머리통이 깨질 정도이고, 분경(奔競)002)  하는 마당에는 장막을 걷어 터놓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청관(淸官)과 미질(美秩)을 공공연히 간구(干求)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고 풍요롭고 큰 고을은 많은 뇌물을 주면 얻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얻을 경우에는 스스로 능하다고 여기고 얻지 못할 경우에는 도리어 수치스럽게 여기니, 양전(兩銓)003)  에 신칙하여 반드시 조급하게 경진(竸進)하는 작태를 억제해야 합니다."
하고, 사간 유언술(兪彦述)도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근래 정원(政院)에서 주의(注意)하는 사이에 사의(私意)가 난무하여 청도(淸途)의 극선(極璇)에 있어 우서(友壻)004)  의 혐의를 피하지 않고 멋대로 통의(通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관동(關東)의 좋은 고을을 당숙(堂叔)인 친척을 위하여 손을 빌어 차임하였으므로, 공의(公議)가 놀라고 비웃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대신이 그의 방자함을 지척(指斥)했는데도 보지도 듣지도 않은 것처럼 하면서 지금까지 자처(自處)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견벌(譴罰)을 가하여 스스로 경계할 줄 알게 하소서. 재령(載寧)의 백성들이 천 명씩 백 명씩 무리를 지어 영문(營門)에서 울부짖으며 통곡했는데, 듣건대 사치(査治)할 즈음에 염성(廉姓)을 가진 양반(兩班)의 부녀(婦女)가 이졸(吏卒)에게 참혹한 구타를 당하였으므로, 그 분함을 견딜 수 없어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합니다. 모진 아전을 징계시키고 완악한 백성을 면려시키는 방도에 있어 한번 엄히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린 역촌(麒麟驛村)에서 남편을 시해(弑害)한 변에 대한 정절(情節)이 낭자한데도, 철저한 핵실(覈實)을 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두 고을의 수령과 전후 핵검관(覈檢官)은 엄히 조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별도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안핵(按覈)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대개 정휘량(鄭翬良)과 이조 참의 심성진(沈星鎭)은 우서 관계인데 부제학에 통의(通擬)하였으며, 이담(李墰)은 곧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의 당숙(堂叔)인데 삼척 부사(三陟付使)에 제수했기 때문이다. 상소를 봉입(捧入)하자, 임금이 엄한 비답을 내렸다. 이어 하문하기를,
"대신은 누구인가?"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우상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재령(載寧)은 누구인가"
하니, 동부승지 이창수(李壽昌)가 말하기를,
"정석백(鄭錫百)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부교리 오언유(吳彦儒)가 말하기를,
"민수언의 상소는 머리를 감춘 채 불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윗 조항에서 논한 것은 그 죄과가 어떠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말초(末梢)로 감률(勘律)하여 신칙해야 한다는 것에 불과했으니, 그의 의도는 오로지 협잡(狹雜)에서 나온 것으로 벌이 없을 수 없습니다. 파직(罷職)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에 민수언을 파직시키고 유언술을 체차시켰다.

 

1월 12일 기묘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죄인 이조행(李祖行)을 직접 국문하여 결안 정법(結案正法)하였다. 이조행은 곧 무신년005)  의 역괴(逆魁) 이유익(李有翼)의 아들이고 박양한(李亮漢)의 외손(外孫)인데, 연좌되어 제주(濟州)에 귀양갔던 자이다. 그가 그의 숙부와 왕복했던 서찰 내용에 역적을 모의한 흉언(凶言)이 있었는데, 형신(刑訊)해도 자복하지 않았다. 단지 말하기를,
"숙부의 글을 보고 그가 역적을 모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기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고 하문하자, 이조행이 부도(不道)한 말을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극력 정법에 처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임금이 드디어 따랐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신이 반생(半生) 동안 도움을 받아 임금을 섬겨 왔던 것은 곧 탕평(蕩平)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위(誠僞)가 혼동되기 쉽고 득실(得失)이 뒤섞여 끝내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같이 하게 하지 못한 것은 물론, 부억(扶抑)이 서로 혹 지나치고 취사(取捨)가 혹 치우침에 따라 필경에는 각기 자신만을 위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그 폐단을 바로잡으려 한다면 인재를 널리 모아 치우친 정사(政事)를 하지 않아야 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계해일기(癸亥日記)》를 본적이 있다. 인묘(仁廟)께서 하교하기를, ‘대북(大北)의 자손이라도 죄가 없으면 기용하고, 공신의 아들이라도 죄가 있으면 베어야 한다.’ 했는데, 이 하교를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요(堯)·순(舜)을 본받으려면 의당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하는 법이니, 경의 이 말은 경의 마음만 그럴 뿐만이 아니라 나의 마음도 본래 이러하였다. 경은 비록 널리 기용해야 한다는 것으로 말을 했으나 오직 재능이 있는 사람만을 뽑아야 할 뿐이다. 어떻게 저울로 다는 것처럼 반드시 고르게 할 수 있겠는가?"
하자, 송인명이 말하기를,
"성심(聖心)의 소재를 신도 또한 우러러 본받고 있습니다만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성상께서도 또한 어떻게 그 정위(情僞)를 다 살필 수 있겠습니까? 지금 탕평을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만 모두 자신만을 위할 뿐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국가와 운명을 함께 한 세신(世臣)과 시례(詩禮)의 정훈(庭訓)이 있는 구가(舊家)의 자손으로서 나아가는 것은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는 것은 쉽게 여기는 사람들이야 어찌 기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축년006)  ·임인년007)  ·무신년008)  에 자신에 하자가 있었던 사람은 진실로 말할 것이 없겠습니다만, 애당초 하자가 없는 사람이나 신진(新進)인 명관(名官)의 부류들이야 무슨 분별할 만한 완준(緩峻)이 있기에 억지로 명목(名目)을 만들어 그 사이가 자못 수화(水火)와 빙탄(氷炭)보다도 더 심하게 되었으니, 말류(末流)의 폐단이 장차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다만 마땅히 지공(至公)한 마음을 지녀야 하고 소소한 일은 관대하게 조처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성상께서 지극히 공평한 마음으로 다스린다면 어찌 함께 대도(大道)로 나아갈 수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모두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송인명이 소유(疏儒) 이덕제(李德濟) 등의 일을 신구(伸救)하다가 견파(譴罷)당하여 도성을 나갔었다. 다시 정승이 됨에 이르러서는 세상에서 탕평론(蕩平論)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저절로 하나의 당을 이루고 있는데, 그 폐단이 매우 극심한 것을 보고 규모(規模)를 조금씩 변동시켜 노(老)·소(少) 가운데 이름을 아끼는 사람을 취하여 수습하여 보합(保合)시킬 계책을 세우려 하였다. 그리하여 차자(箚子)를 올리려다 올리지 못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등대(登對)한 것으로 인하여 이런 주달(奏達)이 있게 된 것이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3일 경진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제주(濟州)에 크게 기근(饑饉)이 들었다는 것으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감진(監賑)하려 하였으나, 그 합당한 사람이 없어서 난처하게 여겼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엄우(嚴㙖)와 한억증(韓億增)을 천거하니, 한억증을 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일 목사(牧使)가 청한 곡물(穀物) 가운데 숫자를 채워 주지 못한 것은 아울러 주라고 명하고 어사로 하여금 직접 가서 운송(運送)을 감독하게 하였으며, 전 목사 유진귀(柳鎭龜)는 진구(賑救)가 끝날 때까지 잉임(仍任)시키게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갑자년009) 한림소시(翰林召試)010)   때 1점 이상은 모두 시험에 응시하게 했었는데, 그뒤 다시 항식(恒式)을 정하여 차점(次點) 이상은 응시를 허락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이미 《속전(續典)》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외인(外人)은 혹 알지 못할 수도 있으니, 청컨대 이번 갑자년의 권록(圈錄)부터 유고(有故)하여 응시하지 못한 사람의 경우에는 비록 1점이라 하더라도 처음의 하교에 따라 응시를 허락하고, 기타의 경우는 정식(定式)에 의거하여 응시를 허락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우윤(右尹) 김상로(金尙魯)가 세도(世道)와 시상(時象)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성대하게 말하니, 지사(知事) 원경하(元景夏)가 그 이유를 힐문하였으나 김상로는 끝내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좌상과 우상이 성(姓)이 같지 않은 형제로 여겨 왔었는데, 근래의 규모(規模)는 전과 조금 달라진 것 같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신이 말하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화협(和協)할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게 하소서. 좌상과 우상이 화협한다면, 세도는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재로(金在魯)에게 하문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김상로의 말이 참으로 매우 경솔한 것입니다. 대개 지난 봄 조징(趙徵)·이득중(李得中)의 옥사(獄事)는 두 정승의 청대(請對)에서 연유된 것인데, 중신(重臣) 조관빈(趙觀彬)의 노여움이 치우치게 우상에게만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유언(流言)이 없지 않았습니다만, 오래되면 당연히 저절로 해소될 것입니다. 그런데 재신(宰臣)이 경솔하게 이 말을 한 것이 어찌 뜻밖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화협시킬 책임은 오로지 경만 믿고 있겠다."
하였다. 뒤에 임금이 우의정 조현명(起顯命)에게 하문하니, 조현명이 대답하기를,
"그때 이득중이 한편으로는 이경중(李敬中)에게 말하여 좌상에게 전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나침(羅沈)에게 말하여 신에게 전하게 했는데, 중간에서 말을 전한 것은 나침과 이경중이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조관빈의 상소에서 좌상은 의심하지 않고 신만 의심했으며, 이경중은 의심하지 않고 나침만 의심했던 것은 나침은 곧 신의 친척(親戚)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조관빈이, 신이 유감을 품고 그러는 것으로 의심했기 때문에 신의 상소에서 이경중에 대해 언급했습니다만, 이는 스스로 해명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고, 좌상에게 의심을 전가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뜬말이 시끄럽게 된 것은 이를 연유하여 시작된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을 들으니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하였다.

 

1월 15일 임오

상천(常賤)으로서 종형제(從兄第)의 아내를 간범(奸犯)한 자에게는 장(杖) 1백에다 유(流) 3천 리에 처하고 어머니는 같으나 아버지가 다른 자매(姉妹)를 간범한 자는 교율(絞律)에 처하도록 정했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1월 16일 계미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조현명(起顯命)이 상소하여 물러가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8일 을유

어떤 별이 삼성(參星)의 아래로 흘러갔다.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 참판 이익정(李益炡), 참의 심성진(沈星鎭)이 각기 소장을 진달하여 민수언(閔洙彦)·유언술(兪彦述)의 상소 내용에 대해 대변(對辯)했는데, 임금이 모두 예사 비답을 내렸다.

 

보령 현감(保寧縣監) 이민곤(李敏坤)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모든 형정(刑政)에 관계된 일을 하는 사이에 멋대로 저앙(低仰)하면서 거의 꺼리는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걸핏하면 황극(皇極)을 인용하여 남의 아름을 가칭하여 두찬(杜撰)하기 일쑤이기 때문에 조정(朝政)이 날로 문란하여지고 난적(亂賊)이 더욱 방자해지고 있습니다. 신이 삼가 훈고(訓詁)에서 터득한 것을 중설(衆說)과 참회(參會)시켜 하나의 책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은 《황극연의(皇極衍義)》입니다. 이는 전하께서 깊이 궁구해야 될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문자(文子)·문손(文孫)에게 전수하여 황극의 정치를 행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제 전달한 내용을 열람했는데, 내가 학문이 주편(周徧)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그대가 그 사이에 무슨 협잡(挾雜)이 있는 것인가? 이런 때에 경장할 것이 뭐 있는가?"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김상로(金尙魯)의 화협(和協)에 관한 말에 의거하여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을 면려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재신(宰臣)이 뜬말을 지나치게 믿은 것도 또한 그 이유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근래 완준(緩峻)에 대한 논의는 거의 빙탄(氷炭)과 같은 상황이어서 신도 또한 크게 걱정하고 있습니다만, 신이 우상과 어찌 털끝만큼인들 의저(疑阻)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두 정승이 조정에서 함께 벼슬하고 있으면 뜬말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경은 모쪼록 우상을 데리고 오라."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왕세자(王世子)의 춘추(春秋)가 점점 자라고 있으니, 판서 이재(李縡), 참판 심육(沈錥), 찬선 박필주(朴弼周)에게 특별히 하유하여 돈소(敦召)해서 보도(輔導)를 돕게 하는 것이 참으로 급선무입니다."
하니, 임금이 정원으로 하여금 우선 특별히 하유하게 하였다.

 

경상좌도에 흉년(凶年)이 들었으므로 저치미(儲置米) 7천 석(石), 군작미(軍作米) 3천 석을 대여해 주도록 허락했는데, 좌의정 송인명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9일 병술

제주 어사(濟州御史) 한억증(韓億增)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진곡(賑穀)이 부족할 우려가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흉얼(凶孽)들로서 본도(本島)에 귀양가 있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혹 시기를 이용하여 나쁜 짓을 할 수도 있으니, 다른 곳으로 나누어 정배(定配)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한억증이 또 시재(試才)하여 위열(慰悅)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드디어 별유(別諭)를 내리기를,
"조그만 해도(海島)에서 믿고 있는 것은 오직 조정뿐이기 때문에 과거부터 애휼(愛恤)하는 덕이 심상한 데에 견줄 정도가 아니었다. 경자년011) 본주(本州)의 백성들이 유혜(遺惠)를 추념(追念)하여 바다를 건너와서 산릉(山陵)의 역사에 노고를 바쳤었으므로, 오직 우리 자성(慈聖)께서 특별히 식물(食物)을 내렸는데, 이는 내가 직접 눈으로 본 일이다. 아! 본주에 해마다 흉년이 들었는데 지난해의 종사가 더 없이 참혹하게 되었다고 하니, 몸은 비록 넓은 집의 비단 방석 위에 앉아있으나, 음식이 어찌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는가? 아! 어사는 특별히 내가 선발한 뜻을 본받아 주야로 부지런히 힘써서 나의 도민(島民)을 구제하도록 하라. 진구에 대한 계책은 멀리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점이 있다. 만일 넉넉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즉시 치문(馳聞)하도록 하라. 진구를 끝마친 뒤에는 시사(試射)하여 위열(慰悅)케 하고, 문사(文士) 가운데 재주와 학문이 훌륭한 사람과 나이가 제일 높은 사람도 또한 등문(登聞)하도록 하라. 또 감옥에 억울하게 갇혀 있는 사람과 효행(孝行)·절의(節義)가 있는 사람도 똑같이 심방(審訪)함으로써 내가 부탁한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2일 기축

임금이 강경(講經)·제술(製述)을 나누어 시험보였다. 도기(致記) 유생(儒生)으로 제술에서 으뜸을 차지한 이만육(李萬育)과 강경에서 으뜸을 차지한 박성순(朴性淳)을 아울러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송수형(宋秀衡)·윤급(尹汲)·김상적(金尙迪)을 승지로 삼았다.

 

1월 23일 경인

어떤 별이 필성(畢星)의 아래로 흘러갔다.

 

1월 25일 임진

어떤 별이 진성(軫星)의 아래로 흘러갔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제주(濟州)의 공마(貢馬)와 진상하는 삭선(朔膳)을 아울러 가을까지 반감하도록 명했는데, 본주(本州)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도신(道臣)이 멋대로 전결(田結)에 대해 분재(分災)012)  하는 경우에는 잡아다가 조처하는 것을 드러내어 정식으로 삼게 하였다. 공홍 감사(公洪監司) 조재호(起載浩)가 멋대로 분재했기 때문이다.

 

헌부 【지평 홍서(洪曙)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교자(轎子)를 타는 금법(禁法)이 지극히 엄한데, 경상 좌병사 유동무(柳東茂)는 작년에 사폐(辭陛)하고 강교(江郊)를 지나자마자 멋대로 교자를 탔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잡아다가 조처하라고 명하였다. 간원 【정언 정옥(鄭玉)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단천(端川)의 전 부사(府使) 신광악(申光岳)은 연좌되어 종이 된 그 고을 사람을 데리고 왔다가 마침내 도망하여 달아나게 만들었으니, 고신(告身)을 빼앗는 것으로 가볍게 감죄(勘罪)하고 그쳐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엄히 조사하여 정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대개 무신년013)  역적 이규서(李奎瑞)의 아들 이경열(李景說)이 단천부의 노예가 되어 있었는데, 신광악이 체직되어 돌아올 적에 하례(下隷)로 데리고 왔다가 잃어버렸다. 도신이 이런 사실을 장문(狀聞)하고 나문(拿問)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단지 고신만 빼앗도록 명하였으므로 대간의 말이 이러하였다.

 

각도(各道)에 연좌되어 노비(奴婢)가 된 자는 그 자신이 죽을 때까지 경계(境界)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드러내어 정식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는데, 우윤(右尹) 김상로(金尙魯)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1월 27일 갑오

강상 죄인(綱常罪人) 김진관(金震寬)과 여인 아지(阿只)·연이(連伊), 김시형(金時亨)과 여인 오정(五丁)이 복주(伏誅)되었다. 김진관은 연천(連川) 백성이고 김시형은 철원(鐵原) 백성인데, 모두 손윗 사람과 간음(奸淫)을 범하였다. 김진관 등에 대해 추조(秋曹)014)  에서 고핵(考覈)하여 의금부로 이송(移送)하였다. 김시형 등은 어사 조운규(起雲逵)가 안핵(按覈)하여 사실을 알아내었는데, 아울러 삼성 추국(三省推鞫)015)  을 설행하고 같은 날 사형을 집행하였다.

 

왕세자에게 마진(痲疹)의 증후가 있었으므로, 약방에서 승정원에 옮겨 숙직하였다.

 

1월 29일 병신

어떤 별이 각성(角星)의 아래로 흘러갔다.

 

권적(權𥛚)을 대사헌으로, 정이검(鄭履儉)을 대사간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집의로, 안상휘(安相徽)를 사간으로, 박치문(朴致文)을 헌납으로, 윤지태(尹志泰)를 필선으로, 박첨(朴)·이봉령(李鳳齡)을 장령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정언으로, 임석헌(林錫憲)을 수서로, 조운규(起雲逵)를 교리로, 황경원(黃景源)을 부교리로, 엄우(嚴瑀)를 부수찬으로, 조상경(起尙絅)을 판윤으로, 이기진(李箕鎭)을 평안도 관찰사로, 이철보(李喆輔)를 승지로, 이경철(李景喆)을 전라도 병사로, 조덕중(起德中)을 남병사로, 전운상(田雲祥)을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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