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3권, 영조 22년 1746년 2월

싸라리리 2025. 9. 29.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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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정유

임금이 경춘전(景春殿)에 나아가니 왕세자가 시좌(侍坐)하였다. 임금이 세자의 수서(手書)를 약원(藥院)의 세 제조(提調)와 춘방(春坊)의 상번(上番)·하번(下番)에게 반사(頒賜)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원량(元良)016)  이 비록 조섭(調攝)하고 있으나, 한묵(翰墨)을 익혀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 [爲善最樂]’는 네 글자를 손수 썼는데, 이 뜻이 매우 좋다. 내가 일찍이 ‘관저(關雎)017)  ·인지(麟趾)018)  의 교화가 있은 후에야 《주관(周官)》의 법도를 행할 수 있다. [有關雎麟趾之化然後可以行周官法度]’는 16자(字)를 써서 동궁(東宮)의 강실(講室)에 붙여 놓게 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후손들이 당연히 본받아야 할 일이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3일 기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정석오(鄭錫五)가 본조(本曹)에 쌀이 고갈되었다는 것으로 혜청(惠廳)의 쌀 1만 석을 청하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호조의 1년 동안 응용(應用)이 9만 석에 불과한데 세입(稅入)은 10만 석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부족한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호조 판서를 중추(重推)해야 합니다."
하자, 임금이 옳게 여겼지만 청한 쌀은 주게 하였다. 이때 용도(用度)가 외람된 것이 많았던 탓으로 경비(經費)가 점점 군색하여졌으므로 식자(識者)들이 걱정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좌참찬 정우량(鄭羽良), 형조 판서 유엄(柳儼), 우참찬 원경하(元景夏) 등이 ‘공사(公私)’ 두 글자를 분별하라는 것을 가지고 각기 진달하여 면계(勉戒)하기를,
"신들이 정미년019)   7월 이 당(堂)에서 전하를 모시고 탕평론(蕩平論)을 주장했었는데, 그때 주장했던 사람은 곧 지금의 대신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신이 한쪽으로 편중된 것 같기 때문에 의심하는 비방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의 마음에 어찌 변한 것이 있겠습니까? 특히 시사(時事)가 전과는 조금 달라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신의 의견은 피차의 인재를 모두 합쳐 기용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지금의 세도(世道)는 끝내 신이 기대하던 것과는 달라졌습니다. 이것이 남의 말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하고, 정우량은 말하기를,
"정미년 이후 신도 또한 하풍(下風)을 받들어 도와서 좌상과 우상이 살아서는 뜻을 함께 하고 죽어서는 함께 그 이름이 전해지게 하겠다는 것으로 연석(宴席)에서 주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끄러움이 야기되고 말았으니, 이는 진실로 대신이 스스로 반성해야 될 점입니다. 대신이 참으로 탕평론의 폐단을 알아서 이를 제거하려 한다면, 다만 마땅히 공평하고 정직하게 일을 해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만약 이 이름을 싫어하여 다른 명목(名目)을 세운다면 더욱 분란만 가중될 것입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기진(李箕鎭)·민응수(閔應洙)·서종급(徐宗伋)·윤용(尹容)·이종성(李宗城) 등이 마음을 함께 하여 일을 해나갔다면 어찌 오늘 입시했던 여러 신하들만 못하겠습니까?"
하고, 원경하는 말하기를,
"대신이 진달한 내용이 참으로 옳습니다만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단지 신축년020)  ·임인년021)  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보더라도 저두서너 중신(重臣)들의 마음을 과연 서로 같게 할 수 있었습니까? 이기진의 경우에는 고향이 같은 서로 친한 사이였으니 평소의 취향이 어찌 그리 서로 멀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지난번 신이 파척(罷斥)당한 뒤 한 번의 정사(政事)에서 28인을 통망(通望)했으니, 이것을 과연 통융(通瀜)시키는 정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마음을 기필코 같게 하려 한다면 어떻게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정우량의 말로 인하여 비로소 경이 탕평이라는 두 글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경이 스스로 탈거시키려고 하는 것이 참으로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물과 불처럼 상반되었습니다만 이제는 점점 보합(保合)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협착(狹窄)한 것이 병통이기 때문에 신은 지금이 바로 널리 기용할 때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예조 참판 정익하(鄭益河)는 말하기를,
"만일 탕평과 조제(調劑)를 표방(標榜)한다면 지금 입시한 여러 신하들 이외에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다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대신은 기필코 널리 기용하려 하는데, 여러 신하들은 도리어 민망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원경하의 말은 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이기진은 원래 위에서 기척(棄斥)한 신하가 아닌데, 이제 이에 한 번의 정사(政事)에서 28인을 통망했다는 것을 연석(宴席)에서 곧바로 진달하였습니다. 참으로 원경하와 같은 마음을 쓴다면 조정에서 이 세 사람 이외에는 서로 모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원경하가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니, 임금이 불러서 자리로 돌아오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도승지 이일제(李日躋)를 보내어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에게 돈유(敦諭)하게 하고, 이어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2월 4일 경자

소대를 행하였다. 왕세자의 진후(疹候)가 평복(平復)되었다는 것으로 내국(內局)의 도제조 유척기(兪拓基)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한성 판윤 조상경(趙尙絅)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애도하는 하교를 내리기를,
"조상경은 충근(忠勤)한 마음과 혼후(渾厚)한 자질을 타고 났으므로 내가 자랑하여 왔다. 따라서 평일 기대하는 것도 팔좌(八座)022)  에 그칠 뿐만이 아니었는데, 어찌 금구(金甌)023)  에 이르지 못하게 될 줄 뜻하였겠는가? 슬프고 애도하는 마음이 너무도 깊어서 참말이 아닌 것 같은 마음이다. 제반 상사(喪事)를 거행함에 있어 특별히 후하게 함으로써 내가 애석해 하는 뜻을 표하게 하라."
하고, 이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지금은 중신(重臣)만한 사람이 없다. 그는 충후하고도 공평했으니, 어찌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겠는가?"
하였다.

 

2월 8일 갑진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이종성(李宗城)을 공조 판서로, 민응수(閔應洙)를 판윤으로, 한사득(韓師得)을 대사간으로, 조명정(趙明鼎)·윤광소(尹光紹)를 수찬으로, 강봉휴(姜鳳休)를 정언으로, 유우기(兪宇基)를 사간으로, 윤경주(尹敬周)를 헌납으로, 조재민(趙載敏)을 부수찬으로, 조동점(趙東漸)을 경기 수사로 삼았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다시 상소하여 물러가 쉬게 해줄 것을 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형의 지사(志事)를 부탁받은 것이 오직 신에게 있는데, 그의 뼈는 이미 썩었지만 그의 마음은 찬연히 빛나고 있습니다. 신이 위로는 군부(君父)를 저버리고 아래로는 요우(僚友)를 저버려 끝내는 구천(九泉)에 있는 망형(亡兄)의 소망을 이룰 수 없게 되었으니, 이제 신이 허락하는 명을 얻지 않고서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 재신(宰臣)이 연석(宴席)에서 진달한 것은 참으로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세도(世道)가 기괴(奇怪)하여 설사 중간에 사설(辭說)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오륜(五倫)의 소중함은 신과 좌규(左揆)024)  가 함께 알고 있는 것인데, 오륜에서 하나만 잘못해도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은 본래 뜬말에서 나온 것이어서 오래되면 저절로 잠잠해질 것입니다. 재신이 경솔히 상달한 것은 이미 의의(意義)가 없는 데 관계되는 것입니다만, 좌규(左揆)의 분소(分疏)와 성유(聖諭)의 제급(提及)은 모두 시끄러움을 진정하고 종식시키는 방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즉시 함께 들어와서 나의 면유(面諭)를 듣고 다시 거취를 결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정옥(鄭玉)이 상소하여 관동(關東)도 영남의 예에 의거하여 진대하여 주되, 경중을 살펴서 급재(給災)025)  해줄 것과 호령(湖嶺)의 진전(陳田) 가운데 미쳐 사탈(査頉)하지 못한 것은 상세히 조사하여 감등(減等)하고 기전(起田)하는 대로 징세할 것과 각 고을의 궁세(宮稅)는 특별히 해조에 신칙하여 정공(正供)의 예에 의거하여 곡수(斛數)를 계산하여 획속(劃屬)시킬 것을 청하였으며, 이어 면계(勉戒)하는 내용을 부진(附陳)하였다. 또 말하기를,
"동궁(東宮)을 교도하는 것이 참으로 급선무입니다. 내관과 설어(暬御)는 사세가 친하기 쉽게 되어 있는데, 진실로 올바른 사람을 얻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개도(開導)하는 것이 외정(外廷)의 신하에 견주어 일은 반만 해도 공을 배로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을 소견하였다. 이주진이 대간이 말한 것 때문에 전임(銓任)을 극력 사양하였는데, 임금이 돈유(敦諭)하여 마지 않으니, 이주진이 곧 명을 받들었다.

 

2월 10일 병오

임금이 조강과 주강을 행하였다. 우참찬 정우량(鄭羽良)이 청하기를,
"서북(西北)의 출신자로서 서울에 유접(留接)하고 있는 자에 대해서는 묘당에서 취재하여 기용함으로써 인심을 수습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먼저 방문(訪問)하여 아뢰게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청하기를,
"어사(御史)를 자주 보내어 수령들의 치적과 부옥(蔀屋)의 고통을 염찰(廉察)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부교리 오언유(吳彦儒)를 경기·충청·황해 세 도의 암행 어사로 삼았다.

 

남태제(南泰齊)·정휘량(鄭翬良)을 승지로 삼았다.

 

간원에게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조(銓曹)에 명하여 언성군(彦城君) 김중만(金重萬)을 좋은 자리에 녹용(錄用)하고 무신년026)   훈신(勳臣)으로서 작고(作故)한 사람의 자손을 녹용하게 하였다. 봉조하 최규서(崔奎瑞)의 봉사손(泰祀孫)도 녹용하고 제수(祭需)를 도와주라고 명하였다.

 

지평 남혜로(南惠老)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심수(沈鏽)의 상소는 은밀히 기아(機牙)를 숨긴 것으로 용의(用意)가 매우 참혹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박치문(朴致文)이 이에 과감히 말한다는 풍조에 의거하여 영구(營救)하고 추허(推許)하는 말을 늘어 놓았으니, 그의 방자하고 기탄없는 죄를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박치문을 파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예천 군수(醴泉郡守) 홍저(洪樗)는 본읍에 부임하고서부터 오로지 이익을 차지하는 짓만 일삼아 재물을 실어나르는 짐바리가 줄을 잇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怨聲)이 떼 지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풍기 군수(豊基郡守) 양정호(梁廷虎)는 병이 들어 고을의 사무를 폐기하고 있어서 아전들이 이를 인연하여 농간을 부리고 있으니, 아울러 파직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박치문·양정호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홍저의 일은 먼 외방의 풍문이어서 다 믿을 수 없으니 나처(拿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1일 정미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고 의식대로 교서(敎書)를 반표하였다. 왕세자의 진후(疹候)가 평복(平復)된 것을 경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2월 12일 무신

전 대사헌 윤용(尹容)이 졸(卒)하였다. 용은 윤지인(尹趾仁)의 아들인데, 청백(淸白)하기로 소문이 났다.

 

2월 13일 기유

강원 감사 김상성(金尙星)이 장계(狀啓)하여 도내(道內)의 익사(溺死)한 사람이 41인이라고 한 것을 인하여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2월 14일 경술

소대를 행하였다.

 

2월 15일 신해

장령 박첨(朴)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통진(通津)의 읍치(邑治)를 문수 산성(文殊山城)으로 옮겨 강도(江都)의 방어가 되게 하소서 "
하고, 또 청하기를,
"장연(長淵)의 민전(民田) 가운데 육상궁(毓祥宮)에 억매(抑買)된 것은 일체 아울러 도로 내어주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첫 번째 일은 이미 강구한 적이 있었다. 두 번째의 일은 도신에게 분부하여 그 폐단을 엄히 징계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주강·석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해마다 제도(諸道)에서 조련(操鍊)을 정지하는 폐단을 걱정하여 신칙하도록 하교하였다. 이어 이 뒤로는 크게 흉년이 든 해가 아니면 조련의 정지를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군정(軍政)이 방홀(放忽)한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라고 명하였다.

 

2월 16일 임자

홍중일(洪重一)을 사간으로, 남태혁(南泰赫)을 장령으로, 임사하(任師夏)를 지평으로, 조동정(趙東鼎)을 남병사(南兵使)로 삼았다.

 

2월 17일 계축

임금이 덕성합(德成閤)에서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동평위(東平尉)의 《견문록(見聞錄)》처럼 글을 저술하여 《자성편(自省編)》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를 내편(內編)과 외편(外編)으로 나누어 만들었는데, 내편은 심신(心身)을 위주로 하였고 외편은 감계(監戒)를 위주로 하였으니, 거의 나의 과실을 알 수 있다."
하였다.

 

2월 18일 갑인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원경순(元景淳)을 대사간으로, 윤지태(尹志泰)를 사간으로, 이윤신(李潤身)를 집의로, 이광직(李光溭)·유현장(柳顯章)을 지평으로, 윤동준(尹東浚)을 헌납으로, 이이장(李彝章)·권기언(權基彦)을 정언으로, 김상로(金尙魯)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2월 19일 을묘

조명리(趙明履)를 승지로, 남유용(南有容)을 보덕으로, 이하종(李夏宗)을 필선으로, 홍중일(洪重一)을 겸 보덕으로, 윤휘정(尹彙貞)을 우윤으로 삼았다.

 

임금이 왕세자에게 《자성편(自省編)》의 서문(序文)을 읽게 했는데, 가뭄을 걱정하여 기우(祈雨)했다는 조항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나의 한마음은 단지 백성들을 위하는 것뿐이기 때문에 일찍이 시민당(時敏堂)에서 기우할 적에 마치 서암승(瑞巖儈)이 경(更)마다 분향(焚香)하는 것처럼 매양 밤에 시각을 알리게 하여 그때마다 향을 피워 묵묵히 기도하였다."
하였다.

 

2월 24일 경신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여러 승지들과 예문관 제학 원경하(元景夏) 등을 소견하였는데, 《자성편》의 교정(校正)을 마쳤기 때문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태양의 변 때문에 진계(陳戒)하니, 임금이 자책하는 하교를 하였다.

 

부교리 황경원(黃景源)이 무지개의 이변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진계(陳戒)하고, 언로(言路)를 열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2월 25일 신유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이천보(李天輔)를 황해도 관찰사로, 김시혁(金始爀)을 판윤으로, 조영국(趙榮國)을 대사성으로, 박필간(朴弼榦)을 헌납으로, 유건기(兪健基)를 대사헌으로, 임순(任珣)을 정언으로, 홍낙성(洪樂性)을 겸 설서로, 이창수(李昌壽)를 황해 수사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과 병조 판서 김약로(金若魯)의 정사였다.

 

2월 26일 임술

임금이 숭정당(崇政堂)에 나아가 문신(文臣)에게 한학(漢學)을 시강(試講)하여 상벌(賞罰)을 차등 있게 주었다.

 

2월 27일 계해

집의 이윤신(李潤身)이 무지개의 변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진계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기묘 명현(己卯名賢) 가운데는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이외에도 도학(道學)이 뛰어난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 아직 숨겨져 있음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의당 이조와 예조로 하여금 널리 초계(抄啓)하게 하여 증직(贈職)이 없는 사람은 증직하게 하고, 이미 증직한 사람은 시호(諡號)를 내리게 하소서. 의빈(儀賓) 가운데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은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이 참으로 뛰어났는데도 아직 절혜(節惠)027)  의 은전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고 종신(宗臣) 화산군(花山君) 연(渷)은 효행(孝行)이 매우 독실하였습니다. 아울러 시호를 내리도록 명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관동(關東)에 기근이 들었다는 것으로 더욱 심한 네 고을의 대동미(大同米)를 감하라고 명하였다.

 

2월 29일 을축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다. 무지개의 변이 있은 뒤에 또 상도(常道)를 어기고 눈바람이 불었기 때문이었다.

 

2월 30일 병인

정순검(鄭純儉)을 지평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예조 판서로, 민응수(閔應洙)를 판의금으로, 임주국(林柱國)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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