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3권, 영조 22년 1746년 3월

싸라리리 2025. 9. 29. 08:35
반응형

3월 1일 정묘

일식(日蝕)이 있었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친림(親臨)한 가운데 여러 향관(享官)과 백관(百官)들이 서계(誓戒)를 의식대로 거행했는데, 황단(皇壇)의 대제(大祭) 때문이었다.

 

3월 2일 무진

저승전(儲承殿)의 월랑(月廊)028)  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홍계희(洪啓禧)를 승지로 삼았다.

 

3월 5일 신미

사간 윤지태(尹志泰), 장령 박첨(朴)이 연명으로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의 무시(武試)는 매양 엄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일고 있습니다. 응강(應講)할 때 내는 생(栍)의 고하(高下)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의 말이 더욱 많습니다. 어제 거자(擧子) 두 사람이 강생(講栍)029)  의 자표(字標)를 몰래 훈례(訓隸)에게 주어 장내(悵內)로 전통(傳通)시키려 할 즈음 현장에서 잡혔는데, 이는 곧 참시관 조경(趙儆)에게 은밀히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거자는 이미 시소에서 적발되어 정거되었으니, 조경도 의당 나처(拿處)하여 징계하고 면려시키는 바탕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서 엄우(嚴瑀)가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옥(鄭玉)의 상소에, ‘내관(內官)과 설어(暬御)가 개도(開導)하는 효험이 외신(外臣)에 견주어 일은 반만 해도 공은 배로 이룰 수 있다.’고 한 것은 의를 해치는 데로 귀결되는 것을 헤아리지 않고 한 말입니다. 과연 정옥의 말대로라면 교유(敎諭)에 의한 성취의 기대가 도리어 중인(中人)에게로 돌아가게 되고 사보(師保)·의승(疑丞)030)  의 지위에는 있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선유(先儒)들의 말에 근습(近習)을 가리라는 말이 있는데, 정옥이 청한 뜻은 이를 본받은 것일 것이다. 무슨 탓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3월 6일 임신

임금이 황단(皇壇)의 희생(犧牲)을 살필 적에 먼저 봉실(奉室)에 배알해야 되는가에 대한 당부(當否)를 여러 대신들에게 문의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의논하기를,
"평상시 신위(神位)가 봉안(奉安)되어 있는 곳에 대해 제사를 지내기 전에 혹 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을 경우 전연 배례(拜禮)가 없을 수 없으니, 먼저 배알하는 것도 옳기는 하겠습니다. 또 평상시 신위를 봉안하지 않고 제사지낼 때에 임하여 지방(紙牓)을 설치하고 지낼 경우에는 지방을 봉안하기 전에는 먼저 절하는 의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가(私家)의 제례(祭禮)에 지방을 쓸 경우 먼저 강신(降神)한 뒤 참신(參神)하는 뜻으로 살펴보면 먼저 절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 어찌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직접 희생을 살펴보는 처소가 원래 단문(壇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니, 설혹 신실(神室)이 있는 사직(社稷)이라도 먼저 배알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더구나 평상시 신위를 봉안한 일이 없는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 전하께서는 단지 공성(孔聖)께서 임금의 좌위(座位)를 지날 적에는 경건한 얼굴빛을 지니고 조심스럽게 걸으셨다는 예(禮)에 의거하여 종종걸음으로 경의를 표할 뿐이니, 아마도 배례(拜禮)는 말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작년에 전하께서 특별히 망위례(望位禮)를 거행하신 것은 한때 의리의 분기에서 나온 것으로 인묘조(仁廟朝)에 후원(後苑)에서 중국의 경사(京師)를 바라보고 예(禮)를 행한 것과 같은 것이니, 또 오늘날 의논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의논을 따랐다.

 

3월 7일 계유

임금이 원유관(遠遊官)에 강사포(降紗袍)를 갖추고 보련(步輦)을 타고 영화당(映花堂)에서 출발하여 대보단(大報壇)의 재전(齋殿)에 이르러 직접 희생(犧牲)을 살폈다. 예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신이 황단 진식도(皇壇陳式圖)를 살펴보니 대체로 명(明)나라의 집례 진설도(集禮陳設圖)에 의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황조(皇朝)에서는 독성(犢腥)을 썼고 우리 나라에서는 대우(大牛)를 썼는데, 예(禮)는 작은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송아지는 빈모(牝牡)의 정이 없기 때문에 그 순수함을 귀하게 여겨 하늘에 지내는 제사와 천자에게 지내는 제사에 모두 독성을 쓰는 것입니다. 이번 황단의 제례(祭禮)에도 모두 하늘에 제사지내는 예(禮)를 썼으니, 의당 독성을 써야 하는데, 도리어 대우(大牛)를 쓴 것은 불가할 것 같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임시하여 구차스럽게 충당시키는 것은 불결할 염려가 있다는 것으로 드디어 우리에 기르는 소는 바꾸지 않았다. 뒤에 대신들에게 순문(詢問)하여 독성을 쓰기로 정하였다.

 

예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아뢰기를,
"역대의 제왕들은 모두 배향(配享)한 신하가 있는데 황단(皇壇)에만 이것이 없습니다. 양경리(楊經理)031)  와 형군문(邢軍門)032)  은 우리 나라에서 이미 사당(祠堂)을 세웠으니, 의당 그 두 신하를 배향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게 하였다.

 

3월 8일 갑술

임금이 황단(皇壇)에 친제(親祭)하였다.

 

3월 10일 병자

임금이 육상묘(毓祥廟)에 전배(展拜)하고 나서 효장묘(孝章廟)에도 역림(歷臨)하였다.

 

3월 11일 정축

정언 권기언(權基彦)이 상소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구률하고, 학문에 힘쓰고, 간언을 받아들이고, 어진이를 구하고, 간사한 자를 제거하고, 군대를 조련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등 여덟 가지 일에 대해 진달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3월 12일 무인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죄인 이경득(李慶得)을 친히 국문했는데, 이경득은 곧 역적 이사성(李思晟)의 서자(庶子)로 제주(濟州)에 노예가 되어 있는 자이다. 일찍이 이색(李穡)과 이유필(李有弼) 등의 공초에 거론되었으므로 이 때에 이르러 잡아다가 국문하게 되었는데, 연일 형신(刑訊)을 가했어도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의금부에 명하여 추국하게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이덕제(李德濟)·윤광주(尹光周)는 편배(編配)된 지 1년이 지났으니, 의당 관대히 용서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을축년033)                   소유(疏儒)의 아비인데, 좌죄된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어서 처분이 정당한 데 어긋났다. 대신이 누차 아뢰었으나, 들어주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석방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신이 엄우(嚴瑀)의 상소를 보고서야 비로소 정옥(鄭玉)이 엄시(閹寺)를 신중히 가려야 한다고 청한 이야기가 온당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추후에 다스릴 필요가 뭐있겠는가?"
하였다.

 

서종급(徐宗伋)을 함경도 도과시관(咸鏡道道科試官)으로, 김시혁(金始㷜)을 좌참찬으로, 이연덕(李延德)을 집의로, 윤득징(尹得徵)을 사간으로, 정광운(鄭廣運)을 장령으로, 이태중(李台重)을 수찬으로, 박춘보(朴春普)를 필선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응교로 삼았다.

 

처음 임금이 각 고을의 군적(軍籍)이 소루한 것을 우려하여 암행 어사 오언유(吳彦儒)를 보내어 기읍(畿邑)을 염탐하게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돌아와서 아뢰기를,
"음죽(陰竹)·죽산(竹山) 등 고을에서는 도망하거나 물고(物故)된 자들을 시기가 지나도록 보충시키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니, 두 곳의 수령을 아울러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3일 기묘

임금이 수서(手書)를 내려 도승지를 보내어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에게 돈유(敦諭)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정언 권기언(權基彦)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금려(禁旅)가 불을 끌 때 외영(外營)에서 입직하는 금군(禁軍)이 표신(標信)이 나오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대궐로 뒤섞여 들어갔으니, 그때 외영에서 입직한 영장(領將)을 왕부(王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해영(該營)으로 하여금 결곤(決棍)하게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찬선 박필주(朴弼周)는 끼니를 자주 거르는 형편입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간혹 유현(儒賢)을 예우하여 특별히 그 아들이나 손자에게 벼슬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듣건대 박필주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고 하니, 자리가 나는 대로 녹용(麓用)하는 것이 유현을 숭상하고 노인을 우대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 겉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14일 경진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추국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5일 신사

진휼청(賑恤廳)에서 아뢰기를,
"삼남(三南)과 해서(海西) 각 고을의 연환(鉛丸)·화약(火藥)은 전에는 해읍(該邑)에서 값을 지급하고 사서 쓰면서 매달 두 번씩 습방(習放)하는 자료를 지탱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사사로이 서로 매매함에 있어 폐단이 없지 않았으므로 일찍이 본청(本廳)에서 공물(貢物)을 받아서 만들어 보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남는 것을 취하여 진자(賑資)에 보태고, 또 한편으로는 뜻밖의 수요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머지 각 진보(鎭堡)에서는 환약(丸藥)을 미처 변통하지 못한 상황에서 수륙(水陸)의 조련(操鍊)을 만나 대대적인 시사(試射)가 있을 경우에는 진장(鎭將)이 간신히 구하여 사와서 임시하여 취판(取辦)하게 되므로 일이 매우 구간(苟簡)합니다. 청컨대, 본청에서 진보의 환약가(丸藥價)로 방군포(防軍布)034)  를 매달 3필(疋)씩 가져다 쓰고 그 대신 경공(京貢)으로 만들어 보내는 것을 한결같이 삼남(三南)과 해서(海西)의 예와 같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추국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6일 임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부 【장령 박첨(朴)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무신년035)   역괴(逆魁)의 아들로서 사형을 용서받았다가 이제 나이가 찬 자들은 속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죄안(罪案)을 조사하여 초출(初出)해서 아울러 이인좌(李麟佐)의 아들을 추후 연좌시킨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부교리 황경원(黃景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번 찬선 신(臣) 박필주(朴弼周)를 소환하게 할 것을 청하니 전하께서 곡진히 개납(開納)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궁정(弓旌)으로 부르는 것이 조석 사이에 곧 내려질 것으로 여겼었습니다만, 그 뒤 전하께서는 오직 《자성편(自省編)》만 사람을 시켜 물어보게 하였을 뿐 아직도 돈소(敦召)하는 명이 없어 신은 삼가 의혹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왕년(往年)에 찬선이 도성으로 들어올 적에 영제(禜祭)036)  를 바야흐로 설행하고 있었으나, 전하께서는 그를 위하여 국문(國門)을 여시고 특별히 소대(召對)를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진달하는 것이 있으면 가납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그 은례(恩禮)가 성대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부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리고 이덕제(李德濟)·윤광주(尹光周)를 방송시키라는 명은 매우 성대한 은덕입니다만, 유독 전리(田理)로 방축(放逐)된 선비는 성택(聖澤)을 고르게 입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실로 개연(慨然)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대저 염우(廉隅)는 인신의 대방(大防)입니다. 대신이 파직하기를 청한 일이 이미 등문(登問)되기에 이르렀고, 부학(副學)이 통청(通淸)된 데 대한 탄핵의 차자(箚子)가 있었으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불미스럽게도 자처(自處)할 줄 모르고 있으니, 신은 좌전(佐銓) 두 당상(堂上)은 끝내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찬선에 대해서는 장차 돈면(敦勉)하겠다. 이덕제의 일은 대개 특은(特恩)에서 나온 것인데, 이로 인하여 또 다시 이와 같이 한다면 과연 사체에 맞는 것이겠는가? 전관(銓官)에 대한 일은 그 또한 지나친 말이다."
하였는데, 곧이어 하교하여 준절히 꾸짖고 황경원을 체직시켰다.

 

3월 17일 계미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3월 18일 갑신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추국을 행하였다. 죄인 이경득(李慶得)을 아홉 차례 형문(刑問)하였는데 물고(物故)되었다.

 

이성중(李成中)을 승지로, 신만(申晩)을 대사헌으로, 이중협(李重協)을 대사간으로, 정기안(鄭基安)·김광국(金光國)을 지평으로, 정하언(鄭夏彦)을 헌납으로, 안식(安栻)·심발(沈墢)을 정언으로, 신사관(申思觀)을 집의로, 이홍직(李弘稷)을 장령으로 삼았다.

 

평안 감사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중신(重臣)이 연석(筵席)에서 신의 죄를 따져 말하기를, ‘신이 잠시 진출한 기회를 이용하여 한 번의 정사(政事)에서 28인을 통망(通望)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울분을 품고 있다.’고 했는데, 진실로 이와 같이 했다면, 이는 신이 멋대로 방자하게 한 것이어서 참으로 주책(誅責)에 대해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그 일에 있어 실제로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하더라도 신이 스스로 해명한 적이 없습니다. 그의 사소(辭疏)에서도 또 말하기를, ‘그는 성질이 변덕스러워서 구차스럽게 함께 할 수 없다.’고 하였고, 이어 또 신의 증조(曾祖) 문정공(文靖公) 신(臣) 이식(李植)이 독립(獨立)하는 도(道)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스스로 견주었으니, 가리키는 뜻의 소재가 모두 매우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단지 포용하기만을 힘쓰면서 오래되면 저절로 없어지게 되기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의 조부(祖父)의 서고문(誓告文) 한 구절을 집어내어, ‘일찍이 이것으로 신을 면려시키려다가 결국 장료(長僚)에게 누를 끼치게 되었다.’고 하니, 그가 신을 조절(操切)하여 조상이 행하여 온 것을 배반하는 데로 밀어넣으려 하였습니다. 그의 용의(用意)가 매우 치밀하니 신의 사의(私義)에 있어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대개 이기진은 일찍이 원경하(元景夏)와 한 마을에서 살았으므로, 서로 교분(交分)이 매우 두터웠는데, 조정에 벼슬하기에 이르러서는 취향이 서로 합치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기진이 원경하가 시론(時論)에 붙좇고 세리(勢利)에 추창하는 것을 미워했는데, 입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또한 점점 소원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원경하가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것을 미워하여 조정에서 고알(告訐)하기도 하고 상소하여 공척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조방(朝房)에서 서로 만났는데, 그때는 서로 욕설을 가하였다. 그리고 원경하가 말하기를,
"독립(獨立)하는 의리에 크게 어긋났다는 것은 선대부(先大夫)가 일찍이 여기에 종사(從事)했었기 때문에 나도 말한 것이다. 그대는 조상이 행한 것에 위배되었다고 할 만하다."
하니, 이기진이 드디어 상소하여 변명한 것이 이와 같았다. 소장을 봉입(捧入)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도로 내주게 하였다. 이어 두 사람을 소견(召見)하고서 이기진에게 이르기를,
"경은 삼조(三朝)를 섬긴 노신(老臣)으로 창백한 얼굴과 하얀 머리로 어찌 남과 분노하여 다툴 수 있겠는가?"
하고, 누누이 위유(慰諭)하였다.

 

3월 19일 을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여러 국수(鞫囚)들을 작처(酌處)하였다. 하교하기를,
"권두령(權斗齡)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짓고 임금을 속인 죄가 있으나, 권두령·조순(趙錞) 등이 왕장(王章)을 도망한 것이 아니다. 또 왕자(王者)는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곧 하나의 신(信) 자에 의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률(一律)을 용서한다는 특교(特敎)를 내린 뒤에 그가 이미 솔직하게 공초(供招)했는데도, 일률을 시행하는 것은 왕자의 신(信)이 아닌 것이니, 특별히 참작하여 전대로 해도(海島)에 노예로 삼게 하라. 이색(李穡)의 음모는 왕첩(往牒)에 없던 것이었다. 이용발(李龍發)이 이색에 대해 친아들과 다름없이 했다는 것이 역적들의 공초 내용에 모두 거론되고 있으니, 국법으로 헤아려 보건대, 어떻게 왕장(王章)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초에 이미 정형(停刑)했는데, 이제 다시 일률(一律)에 의죄(擬罪)하는 것은 왕정에 있어 마땅한 조처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역절(逆節)이 탄로난 것 또한 그에게 연류된 것이니, 참작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다.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도록 하라. 김덕조(金德祚)를 무신년037)  에 작처(酌處)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요행히 면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 이름이 국초(鞫招)에 올랐으니 다시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단 역적의 공초에서 원인(援引)한 것이 별로 긴요하게 관계되는 것이 없으니, 절도(絶島)에 정배시키도록 하라. 이계강(李戒剛)은 당초에 권두령이 고발한 내용에 단지 이순관(李順觀)의 양자(養子)라고만 일컬었을 뿐 달리 지명(指名)한 것이 없었다. 이철강(李鐵剛)은 이미 지만(遲晩)038)  하여 정법(正法)하였으니, 이익관(李翼觀)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장살(杖殺)하는 것은 형벌을 신중히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전대로 극변(極邊)에 보내어 노예로 삼게 하라."

 

헌부 【대사헌 신만(申晩)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 옥사(獄事)의 핵심은 오로지 역적 이색(李穡)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색이 비록 곧바로 죽었다 하나 이용발(李龍發)이 아직도 살아 있는데, 은밀히 그의 사주를 받아 글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온 것을 살펴보면, 이용발이 치밀하게 대비한 정상(情狀)은 곧 하나의 역적 이색인 것입니다. 권두령은 연좌되었는데도 망명(亡命)하였으니, 해당되는 율(律)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더구나 그가 전후에 올린 공초도 역적 이색의 말을 전송(傳誦)한 것에 불과했을 뿐, 당초에 특별히 적정(賊情)을 고한 것이 없었는데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그가 교묘하게 꾸민 데에서 숨긴 실정이 있다는 것이 환히 드러났습니다. 김덕조(金德祚)는 무신년039)  에 법망에서 누락되었으니, 이미 형벌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역적들이 체포될 때를 당하여 유독 스스로 겁을 내었으니, 이미 매우 수상하기 그지없었으며, 대질할 때에 이르러서는 군색한 말이 많았습니다. 이계강(李戒剛)에 이르러서는 당초에 권두령(權斗齡)의 공초에 이미 이름을 지적하지 않고 범연히 이순관(李順觀)의 양자(養子)라고 일컬었으니, 그간의 역절(逆節)을 이제 파양(罷養)된 지 오래인 이철강(李鐵剛)에게만 돌리는 것은 부당한 것인데도 문득 용서할 것을 의논하고 있습니다. 국체(鞫體)를 엄히 하는 방도에 있어서 아울러 형신을 가하여 핵실하지 않을 수 없는데도 작처(酌處)하라는 명이 갑자기 뜻밖에 내려졌습니다. 청컨대 속히 죄인 이용발·권두령·김덕조·이계강을 작처하라는 명을 정지하시고, 이어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한 다음 통쾌하게 왕법(王法)을 바루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 【대사간 이중협(李重協)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번 요망한 역적들의 계모(計謨)가 흉참스러운 것이 무신년보다 더 하였습니다. 역적 이색이 흉서(凶書)를 지어낸 것이 실은 이 옥사(獄事)의 핵심인 것이니, 이용발이 그의 지시를 받아 흉서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온 것에서 역적 이색과 마음을 함께 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권두령은 연좌되자 망명(亡命)했으니, 진실로 해당되는 율(律)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제도(諸道)를 왕래하면서 흉당(凶黨)들과 체결(締結)하였고, 일이 발각되어 체포되는 데 이르러서는 전후에 공초(供招)를 올린 것이 역적 이색이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에 불과할 뿐 본디 특별히 적정(賊情)에 대해 고한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을 꾸며 형벌을 면하려 하니, 실정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 환히 드러났습니다. 김덕조는 처음 역적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몰라했으니 참으로 매우 수상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질할 때의 말도 매우 군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계강에 이르러서는 이는 본래 역종(逆種)인데, 권두령의 초사(招辭)에서 비록 이름을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이순관의 양자라고 하였으니, 어떻게 파양된 이철강만 핑계대어 용서해줄 수 있겠습니까? 국체(鞫體)로 논한다면 엄히 신문하고 철저히 핵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작처하라는 명이 뜻밖에 내려졌습니다. 청컨대 죄인 이용발·권두령·김덕조·이계강을 작처하라는 명을 도로 중지시키고 이어 국청으로 하여금 엄한 형신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한 다음 쾌히 왕법(王法)을 바루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황경원(黃景源)의 처분에 대한 사교(辭敎)가 너무 지나치다는 것으로 반한(反汗)할 것을 극력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1일 정해

어떤 별이 심성(心星)의 아래로 흘러갔다. 달이 남두성(南斗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왕세자가 시좌(侍坐)하였는데, 시강원 관원으로 하여금 《사략(史略)》의 의의(疑義)에 대해 질문하게 하니, 세자의 응답이 매우 상세하였다. 임금이 또 세자로 하여금 전국 시대의 영준(英俊)한 선비들을 두루 열거하게 하니, 대답하기를,
"제(齊)나라의 관중(管仲), 연(燕)나라의 악의(樂毅), 초(楚)나라의 오거(伍擧)가 그 중 뛰어난 인물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趙)나라의 주사(周舍)도 어진 사람입니다."
하였다. 궁관(宮官)이 말하기를,
"감히 묻겠습니다만 훌륭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양(羊) 1천 마리의 가죽이 한 마리 여우의 겨드랑 가죽만 못한 것입니다."
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칭하(稱賀)하였고 임금도 그 총명하고 영리한 것을 기뻐하였다. 빈객(賓客)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 때에도 동궁(東宮)을 시좌하게 하고 궁관을 시켜 문난(問難)하게 하는 법규가 있었으니, 대개 유액(誘掖)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나라의 가법(家法)인 것입니다."
하고, 보덕(輔德) 남유용(南有容)이 말하기를,
"지난번 고시(古詩)를 초출하여 동궁으로 들여보내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이는 예학(睿學)에 있어 마땅히 힘써야 될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 승지 홍계희(洪啓禧)는 말하기를,
"이 말은 잘못입니다. 정자(程子)도 일찍이 가시(歌詩)를 지어 동자(童子)들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풍송(諷誦)하게 하였었습니다. 도연명(陶淵明)의 시와 주자(朱子)의 시는 충담(沖澹)하고 고아(古雅)하여 학문에 유익함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글을 읽는 여가에 이를 유유히 풍영(諷詠)하게 한다면 또한 성정(性情)을 함양하는 데 도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장령 박첨(朴)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무산 부사(茂山府使) 민성수(閔聖洙)는 인물이 용렬하고 겁이 많은 데다가 전혀 지식(知識)이 없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22일 무자

관원을 보내어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묘우(廟宇)에 치제하게 하였다. 묘우를 창건하게 된 것은 특명에 따른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병조 판서 김약로(金若魯)가 평안 감사로 있었을 적에 일찍이 관방(關防)에 대한 장계(狀啓)가 있었는데, 영애(嶺隘)에 대한 방수(防守)와 도로의 통색(通塞) 등에 관한 일을 아울러 장계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 각 진읍(鎭邑)에 나누어 주고서 송습(誦習)하여 준수하게 하소서. 유원진(柔遠鎭)을 적유(狄踰)의 남쪽으로 옮기는 것과 포추(浦楸)·파마(坡馬)·마해(馬海) 세 진 가운데 긴요하지 않은 한 곳을 소초막(小草幕)으로 옮기는 일에 대해서는, 옛날 긴요하던 곳이 지금 긴요하지 않은 곳이 되었으니, 지금 긴요하지 않은 곳이 또 뒤에 긴요한 곳이 될 줄 어찌 알겠습니까? 이는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살펴본 뒤 장문(狀聞)하게 하소서. 천수진(天水鎭)을 극성령(棘城嶺)밑으로 옮기고 위곡진(委曲鎭)을 영내(嶺內)의 조금 가까운 곳으로 옮기고, 임토진(林土鎭)을 영내로 옮기는 일과 시채진(恃寨鎭)을 도로 완항령(緩項嶺)으로 옮기고 이산(理山)의 성루(城壘)을 대수리동(大受利洞)에 설치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울러 시행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3월 25일 신묘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을 공홍 감사(公洪監司)로, 윤급(尹汲)을 부제학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사간으로, 이제화(李齊華)·조명채(曹命采)를 지평으로, 이종적(李宗迪)을 대사간으로, 민응수(閔應洙)를 홍문 제학으로 삼았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황해도 심리사(黃海道審理使) 남태량(南泰良)의 서계(書啓) 가운데 백성들의 고통에 관한 여러 조항을 전에 이미 복주(覆奏)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유하신 것을 살펴보니, 반드시 대단한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긴급할 때 힘입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선령(洞仙嶺)에 관방(關防)을 설치하는 일에 대해서는 비록 길이 이곳뿐이 아니라고 하지만 산을 이용하여 관문(關門)을 설치하는 것은 원래 큰 역사(役事)가 아니고 대로를 차단하는 것 또한 힘을 얻을 수 있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본도의 병영(兵營)으로 하여금 서서히 농한기를 기다려 필요한 물력(物力)을 마련하여 거행하게 하고, 이어 주관하게 하소서. 극성(棘城)은 과연 사잇길의 요충지인데, 영(營)을 옮기고 성(城)을 쌓는 것에 대해서는 비록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렵습니다만, 구지(舊址)를 영선(營繕)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병영으로 하여금 특별히 살펴 헤아려서 간요(簡要)하게 행할 수 있는 방도가 있으면 장문(狀聞)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태백 산성(太白山城)은 서로(西路)의 관방 가운데 가장 긴요한 곳으로, 지세(地勢)가 험준하고 성이 공고한 것은 물론 직로(直路)에 당해 있으니, 방수(防守)를 구획하는 방도를 지금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평산(平山)의 겸염장(兼營將)의 직임을 금천(金川)으로 이송(移送)하고, 부사(府使)를 수성장(守城將)으로 정하여 산성(山城)과 군향(軍餉)을 전적으로 주관하게 하소서. 이미 전에 상정미(詳定米) 2천여 석(石)을 획급(劃給)하였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마련하여 더 획급해서 3천 석의 숫자를 채우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처음 군기(軍器)를 장만하는 일과 성첩(城堞)을 수리하는 데 관한 제반 일에 대해서는 매년의 환모곡(還粍穀) 가운데에서 쓰고, 본사(本司)에 보고하여 회감(會減)하게 하는 것으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3월 26일 임진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사면시켜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를 내려 돈유(敦諭)하였다.

 

3월 27일 계사

주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지경연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인재를 얻는 방도는 오로지 과거에 있는데, 근래에 선비들이 글을 읽지 않고 요행을 바라는 일만 일삼고 있기 때문에 일종(一種)의 글을 파는 무리들이 사람을 그르치는 사례가 매우 많습니다. 그리하여 과방(科榜)이 한번 나가면 그때마다 시끄러움이 야기되고 있으니, 이런 폐단을 통렬히 금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옥(南玉)·박사호(朴師灝)·신억(申嶷)의 부류들은 모두 글을 팔아 이름을 얻은 자들이니, 이들을 먼 곳으로 정배(定配)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석명(趙錫命)을 대사헌으로, 윤동준(尹東浚)을 부응교로, 윤득재(尹得載)를 부교리로, 박춘보(朴春普)를 응교로 삼았다.

 

3월 28일 갑오

어제(御製)한 《자성편(自省編)》이 완성되었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갔다. 왕세자가 시좌(侍坐)하니, 여러 신하들에게 진강(進講)하라고 명하였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조관빈(趙觀彬), 부사(副使) 정준일(鄭俊一), 서장관(書狀官) 민백상(閔百祥)이 복명(復命)하였다. 이때 소요를 일으키는 말이 있었는데, 곧 등등기(鄧鄧磯)가 장차 동쪽으로 우리 나라를 침략하러 온다는 것이었다. 【등등기는 호인(胡人)의 부락(部落)으로 그 땅이 우리 나라 삼수(三水)·갑산(甲山)과 백두산(白頭山)의 왼쪽인 동북에 있는데, 영고탑(寧古塔)과의 거리는 9백 리이다.】  그런데다가 또 피인(彼人)들이 책문(柵門)을 물리자는 의논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으므로, 임금이 걱정하여 대신에게 하문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피인들은 기름진 봉성(鳳城)의 땅을 이롭게 여겨 잠식(蠶食)할 계책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강희(康熙)040)   때에도 일찍이 책문을 물리려 했었는데, 그때 우리 나라에서 치계(馳啓)하여 쟁론(爭論)했기 때문에 일이 중지되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전례를 원용(援用)하여 쟁론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평안 병사 정찬술(鄭纘述)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동지사(冬至使)가 돌아올 적에 정찬술이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사 조관빈(趙觀彬)이 죄주기를 청한 것이다.

 

3월 29일 을미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양주목(楊州牧)에서 거적자리를 깔고 관(冠)을 벗고 대죄(待罪)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승지를 보내어 하유(下諭)를 전하고서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하였다.

 

고부 군수(古阜郡守) 김우철(金宇喆)을 파직하였는데, 제주(濟州)의 진곡(賑穀) 운송을 지체하였기 때문이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