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3권, 영조 22년 1746년 윤3월

싸라리리 2025. 9. 29.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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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3월 2일 무술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문과 정시(文科庭試)의 전시(殿試)를 설행하여 남운로(南雲老) 등 6인을 뽑았다. 방(榜) 중에 오언빈(吳彦賓)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일찍이 무신년041)   역적의 공초에 나와서 그 이름이 《감란록(勘亂錄)》에 기재되어 있었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홍문관 제학 원경하(元景夏) 등이 발방(拔榜)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의 아비 오명시(吳命始)의 처음 이름이 명윤(命尹)이었는데, 경묘(景廟)께서 매양 윤(尹) 자 때문에 낙점(落點)하지 않았던 탓으로 윤자를 시(始) 자로 고쳤으니, 또한 그의 심술을 알 수 있다."
하고, 드디어 발방하라고 명하였다.

 

호남의 별비전(別備錢) 1만 냥과 통영(統營)의 신주전(新鑄錢) 1만 냥을 재해로 감면한 훈국(訓局)의 보포(保布) 대신 획급(劃給)하고, 해도(該道)의 해영(該營)에는 각각 군작미(軍作米)를 이급(移給)하였는데, 묘당의 의논을 따른 것이었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극력 사퇴하였는데, 말하기를,
"이제부터 신은 우선 다시 물러가게 해 주기를 청하지 않겠습니다만, 상직(相職)에 이르러서는 요구하여 반드시 체차되고야 말겠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아침에 체직을 허락하신다면 신은 의당 저녁에 도성으로 들어가 원임(原任)으로서 여러 신하들의 뒤를 따르면서 때로 일득(一得)042)  의 생각을 바쳐 우러러 모유(謨猷)를 돕겠습니다. 그리고 혹 긴급한 일이 있어 쓰신다면 이험(夷險)과 조습(燥濕)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겠습니다. 이런 마음인데도 허락을 얻지 못한다면, 신은 장차 산골짝에서 고사(枯死)할지언정 전하를 위하여 하루의 노고도 바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국가에 있은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돈유(敦諭)하였다.

 

부수찬 이태중(李台重)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늘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 대해 일찍이 한 마디도 변해하여 말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드디어 스스로 성명(聖明)한 세상에 저지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영해(嶺海)에서 살아돌아와 다시 대직(臺職)에 끼게 됨에 이르러서는 망령되이 생각이 있으면 숨기지 않는다는 것을 본받으려 하다가, 그만 천노(天怒)에 거듭 저촉되어 다시 한 번 귀양길이 있게 되었습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남의 손을 비틀어 국을 쏟게 하고 혀를 놀려 촉휘(觸諱)했다는 것이 아마도 신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대저 자신의 말이 행해지지 않으면 떠나고 맡은 일을 잘 할 수 없으면 중지하는 것이 바로 임금을 섬기는 공통된 의리인 것입니다. 신이 전후 논열(論列)한 것이 세도(世道)에 도움은 주지 못하고 단지 낭패만 취한 결과가 되고 말았으니, 말이 행해지고 일을 잘 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떠나야 하고 중지해야 하는 의리가 환하여 분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귀양가 있는 이언세(李彦世)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도회 유생(都會儒生)과 도시 무사(都試武士)에 대해 도사와 감사로 하여금 각각 그들의 본관(本貫)·거주(居住)·부명(父名)을 써서 책자로 만들어 해조에 보고하고 이 뒤로는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정언 안식(安栻)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국옥(鞫獄)에 계류되어 있는 역적들을 다시 엄히 신문하게 하소서. 북한 산성은 총융사(摠戎使)에게 전담하여 관리하게 하고, 흥인문(興仁門) 밖의 이사(尼舍)는 모두 철거시켜 뜻밖의 간사한 일을 방지하고, 대동 찰방(大同察訪) 유만추(柳萬樞)는 제 이익만 차지하여 원망을 야기시키고 있으니, 파직하여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앞에 진달한 일은 이미 하교하였다. 이사를 철거하는 일에 대해 지난해 윤허하지 않은 것은 깊고도 원대한 뜻이 있어서인 것이다. 유만추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3월 3일 기해

정언섭(鄭彦燮)을 대사간으로, 원경하(元景夏)를 홍문관 제학으로, 이행민(李行敏)을 장령으로, 윤경주(尹敬周)를 헌납으로, 이익보(李益輔)를 부교리로, 오언유(吳彦儒)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평안 감사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병사 정찬술(鄭纘沭)의 정령(政令)과 식려(識慮)는 진실로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는데, 서쪽 변방에서 하나의 훌륭한 장수를 잃었으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어찌 작은 허물을 기록하여 중한 책임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살피지 않았다.

 

윤3월 4일 경자

임금이 "PK">문묘(文廟)를 배알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다시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시사(試士)하여 이득종(李得宗) 등 5인을 뽑았다.

 

윤3월 5일 신축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책문(柵門)을 물린다는 번보(邊報)가 날마다 이르고 있었으므로, 임금이 대신과 여러 재신들에게 대책을 하문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마땅히 먼저 재자관(齎咨官)을 보내야 합니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의당 급히 진주사(陳奏使)를 보내야 합니다."
하였으나, 의논을 결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임금은 자문(咨文)을 가지고 왕복할 즈음에 때에 뒤지는 일이 생기기 쉽다는 것으로 진주사를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책문을 물리는 역사(役事)는 3월부터 시작하게 되어 있었다.

 

장령 이홍직(李弘稷)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전라 감사 이경철(李景喆)은 윗사람을 잘 섬겨 발신(拔身)하였는데, 오직 가렴 주구(苟斂誅求)만을 일삼고 있으며, 보은 현감(報恩縣監) 신후성(愼後成)은 일에 접하여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하용익(河龍翼)은 불법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이경철은 파직하고, 신후성은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고, 하용익은 영원히 사적(仕籍)에서 간삭(刊削)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경철의 일은 지나치다. 다른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우량(鄭羽良)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이조의 격례는 매우 엄한 것이어서 전최(殿最)043)  를 개탁(開拆)할 적에 인원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양도(兩道)의 전최를 참의 혼자서 개탁하여 논파(論罷)하면서 전례가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가 이른바 전례라고 하는 것은 십수년 전 참판이 혼자서 정사할 때 포폄(褒貶)의 조어(措語)와 아권(衙眷)044)  이 외람되다는 것을 이유로 해당 수령의 파출을 청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원래 하고(下考)에 둔 일은 없었고 또한 도신의 추고를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소견에 따라 별도로 아뢴 것이요, 전례에 따라 개탁해서 아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참의는 혼자서 행하였으니, 크게 체례(體例)에 어긋난 일입니다. 청컨대 이조 참의 조명리(趙明履)를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파직하는 것은 지나치다. 체차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 【사간 김상중(金尙重)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하뢰기를,
"회령 부사(會寧府使) 구식(具侙)은 병이 들어 일을 듣고 결단하는 데 방해되고, 경흥 부사(慶興府使) 조재언(趙載彦)은 일을 어긋나게 조처하며, 온성 부사(穩城府使) 유휘지(柳徽之)는 술을 즐겨 사무를 못볼 정도이니, 아울러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신만(申晩)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윤3월 6일 임인

박필주(朴弼周)를 이조 판서로, 윤봉구(尹鳳九)를 집의로, 조재덕(趙載德)을 헌납으로, 이형만(李衡萬)·정순검(鄭純儉)을 정언으로, 김상복(金相福)을 부수찬으로, 이일제(李日躋)를 평안 병사로 삼았다. 이에 앞서 이일제를 특별히 비국 당상에 차임했다가 이어 이 직에 제배했는데, 대신이 특별히 천거한 것이다.

 

윤급(尹汲)을 발탁하여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윤3월 7일 계묘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문신 중시(文臣重試)를 설행하여 이윤신(李潤身) 등 7인을 뽑았다.

 

윤3월 8일 갑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조영로(趙榮魯)를 대사간으로, 성범석(成範錫)을 사간으로, 김상구(金尙耉)를 장령으로, 김굉(金硡)을 지평으로, 엄우(嚴瑀)를 헌납으로, 정기안(鄭基安)을 정언으로, 조명정(趙明鼎)을 겸 문학으로, 이익보(李益輔)를 겸 사서로, 이주진(李周鎭)을 형조 판서로, 이춘제(李春躋)를 동의금으로 삼았다.

 

이윤신(李潤身)·이하종(李夏宗)·박춘보(朴春普)를 아울러 통정 대부로 승계하였는데, 중시(重試)에서 으뜸을 차지하고 자궁(資窮)045)  하였기 때문이었다.

 

여선군(驪善君) 학을 진주사(陳奏使)로, 조영국(趙榮國)을 부사로, 이태중(李台重)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이때 피중(彼中)에서 책문(柵門)을 물린다는 의논이 있었기 때문에 사신을 보내게 된 것이다.

 

장령 이행민(李行敏)이 상소하여 진계(陳戒)했는데, 첫째는 학문에 힘쓰는 것, 둘째는 하늘을 공경하는 것, 셋째는 용도를 절약하는 것, 넷째는 백성을 보호하는 것, 다섯째는 상벌(賞罰)을 분명히 하는 것, 여섯째는 기강을 확립시키는 것으로, 대개 《숙묘보감(肅廟寶監)》에 들어 있는 내용이었다. 임금이 가납하였다.

 

윤3월 9일 을사

팔도 유생(八道儒生) 오동주(吳東周)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3월 10일 병오

임금이 수서(手書)를 내려 이조 판서 박필주(朴弼周)를 돈소(敦召)하였다.

 

윤3월 11일 정미

이장오(李章吾)·이창수(李昌壽)를 승지로, 이재(李縡)를 대사헌으로, 윤득재(尹得載)·엄우(嚴瑀)를 필선으로, 조운규(趙雲逵)를 부교리로 삼았다.

 

험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봉상시 첨정 윤동하(尹東夏)가 아뢰기를,
"제기(祭器)가 파괴되거나 손상된 것이 많은데 피통(皮筒)은 단지 38태(駄)뿐이기 때문에 제향(祭享)이 자주 겹칠 적에는 혹 유롱(杻籠)을 빌려 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에 신칙하여 보수(補修)하여 지급해 주게 하였다.

 

윤3월 12일 무신

경상 감사 권혁(權爀)이 장계(狀啓)하여 도내(道內)에 불에 타서 죽은 사람이 23인이라고 한 것으로 인하여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윤3월 13일 기유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문과 중시(文科重試)와 문과 정시(文科庭試)에 합격한 사람들을 불러서 소견하고, 하나의 공(公) 자를 가지고 면려하여 신칙하였다. 윤봉오(尹鳳五)에 이르자, 윤봉오가 말하기를,
"잠시 전에 성상께서 중시의 신은(新恩)046)  에게 명하여 정시의 신은들을 불러들이게 하였는데, 이것이 비록 고풍(古風)을 보존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진퇴(進退)하는 즈음에 잡희(雜戲)를 하게 한 것은, 조복(朝服)을 입고 홀(笏)을 들고 어떻게 이런 잡희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은 삼가 개연(慨然)하게 여깁니다."
하니, 승지가 아뢴 내용이 외람되다는 것으로 추고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윤봉오는 글을 읽은 선비이니 그의 말이 괴이할 것은 없다. 그러나 선진(先進)을 무시하는 습관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되니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윤봉오는 새로 급제한 사람으로서 지위가 없었으므로 말할 때가 아니었으며, 말도 너무 교직(絞直)하였다. 그런데도 임금이 너그럽게 용납하였으니 성덕(盛德)을 알 수 있다."


【태백산사고본】 47책 63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08면
【분류】인사-선발(選拔) / 역사-사학(史學) / 사법-탄핵(彈劾)


[註 046] 신은(新恩) :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
사신은 말한다. "윤봉오는 새로 급제한 사람으로서 지위가 없었으므로 말할 때가 아니었으며, 말도 너무 교직(絞直)하였다. 그런데도 임금이 너그럽게 용납하였으니 성덕(盛德)을 알 수 있다."

 

양남(兩南)의 군작미(軍作米) 각 2천 석(石)을 재상(災傷)으로 감면시킨 금위(禁衛)·어영(御營)의 군포(軍布) 대신 획급(劃給)하게 했는데, 묘당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윤3월 14일 경술

어필(御筆)로 ‘수은 해동(垂恩海東)’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여러 신하들에게 내어보이고 이어 각판(刻板)하여 선무사(宣武祠)에 걸게 하였다.

 

지평 김굉(金硡)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번 한 옥당(玉堂)이 글을 못한다고 지척(持斥)한 것은 실로 공공(共公)의 의논을 채택한 것이었는데, 그가 스스로 반성하지는 않고 노하여 신을 원수처럼 여기면서 암암리에 밀의(密議)하고 근거 없는 말을 꾸며 은밀히 밀어내려 하고 있으니, 그의 권세와 위력이 신을 무시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자, 형조 판서 이주진(李周鎭)도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집안은 신축년047)  년·임인년048)   이래로 당인(當人)에게 미움받은 것이 누적되었으므로, 보존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성상께서 곡진히 비호하여 주신 덕분입니다. 그러나 당인들이 기필코 신의 집안에 대해 앙갚음 하고자 하여 하루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臺臣)이 이에 죽음을 각오한 과감한 기세로 오랫동안 침체된 데 대한 유감을 품고 기필코 가루를 만들고야 말려고 하고 있으니, 아!너무도 심합니다. 이것이 어찌 유독 대신(臺臣) 한 사람의 마음이겠습니까?"
하니, 김굉이 또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중신을 논한 것은 단지 글을 못하면서 외람되게 관록(館錄)에 끼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뿐이었는데, 그가 이에 절중(切中)한 말에 대해 노여움을 발하여 신이 고(故) 상신(相臣)에 대해 유감을 품고서 이에 원수를 갚으려 하고 있는 듯이 하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설령 신의 말이 서로 해치려는 데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저 사람의 도리에 있어서는 의당 염우(廉隅)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국자감(國子監)과 세자(世子)를 가르치는 지위를 힘을 내어 점유하였고 전후 고관(考官)의 직임을 번번이 모두 무릅쓰고 차지하였으며, 3년 동안 전지(銓地)에 있으면서 사의(私意)를 자행하였으므로, 거간꾼과 무리배들이 문정(門庭)에 들끓게 되어 글을 할 줄 아는 중서인(中庶人)들이 모이는 소굴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인(中人)을 통청(通淸)시키자는 청이 그의 입에서 나오기에 이르렀으며, 따라서 전임(銓任)을 더럽힌 모습을 탄핵을 버텨내는 데서 숨길 수 없게 되었음은 물론, 밖으로는 탕평(蕩平)을 가탁하면서 안으로는 사를 멋대로 부렸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처음에는 예사 비답을 내렸다가 이주진이 대거(對擧)한 소장과 김굉이 두 번째 올린 소장을 열람하고서 시끄러움을 종식시킬 수 없게 될까 우려하여 김굉을 준절히 꾸짖고 이어 그의 소장을 되돌려 주었다.

 

윤3월 15일 신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봉성(鳳城)의 회통(回通)을 보니, 책문(柵門)을 물린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봉성의 소식은 이미 의거할 만한 것이 없고 단지 도로에서 전해 들은 것뿐인데 곧바로 사신을 보내는 것은 매우 중대한 데 관계되는 것입니다. 또 심양장(瀋陽將)이 아직도 공문(公文)을 보내오지 않고 있는 것은 저들이 추후에 이의(異議)가 있어 아직도 결정이 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먼저 재자관(齎咨官)을 보내어 만일 처음의 자문(咨文)에서 허락을 얻게 된다면 매우 좋은 것이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사신을 보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 등의 의논도 같았다. 임금이 무신 윤태연(尹泰淵)을 재자관으로 삼아 역관 이추(李樞)와 함께 가게 하였다.

 

이종성(李宗城)을 평안도 도과시관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이주진(李周鎭)을 이 직임에 차정했었는데, 이주진이 새로 대관(臺官)의 탄핵을 받았기 때문에 이종성으로 대신하였다.

 

윤3월 17일 계축

이조 판서 박필주(木弼周)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를 내려 돈유(敦諭)하였다.

 

윤3월 18일 갑인

김상복(金相福)을 사간으로, 정하언(鄭夏彦)·김광국(金光國)을 장령으로, 박필간(木弼榦)을 헌납으로, 이응협(李應協)·박흥준(木弘儁)을 정언으로, 조관빈(趙觀彬)을 좌참찬으로, 조영국(趙榮國)을 행 부제학(行副提學)으로, 이종성(李宗城)을 예문관 제학으로, 이연덕(李延德)을 보덕으로, 정익하(鄭益河)를 예조 참판으로, 남유용(南有容)을 응교로, 유언호(兪彦好)를 부수찬으로, 윤득재(尹得載)을 겸 보덕으로, 조운규(趙雲逵)를 겸 사서로, 김양택(金陽澤)을 문학으로, 이이장(李彛章)을 사서로, 황경원(荒景源)을 접위관으로 삼았다.

 

고 봉사(奉事) 김복택(金福澤)의 관직을 회복시켜 주라고 명하였다. 김복택은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손자이다. 신축년049)   저사(儲嗣)를 세우자는 의논이 정해졌을 때 대신 김창집(金昌集) 등이, 송(宋)나라 승상(丞相) 한기(韓琦)가 영종(英宗)을 책립(策立)하기로 정할 때 주맹양(朱孟陽)을 보내어 종정(宗正)에게 알현했던 고사를 인용하여 사람을 시켜 사저(私邸)에 통고하려 하였으나, 시킬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김복택이 외척(外戚)이라는 것을 이유로 가서 알현하게 했었다. 그의 말이 경묘(景廟)가 병이 있어 사손(嗣孫)을 기대할 수 없다는 데에 언급되자, ‘지금 국세가 외롭고 위태로워 복침(復寢)050)  을 기다리기는 어렵습니다.’ 했었다. 김복택의 형제가 임인년051)  의 무옥(誣獄)에 많이 죽었는데, 김복택은 포의(布衣)라는 것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경신년052) 김원재(金遠材)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임금이 갑자기 ‘복침(復寢)’이란 두 글자를 가지고 김복택을 체포하여 고문(拷問)하자, 조현명(趙顯命) 등이 시기를 이용하여 밀어내기 위해 복침이란 말을 흉언(凶言)이라고 하였는데, 중외(中外)에서는 이런 사실을 몰랐었다. 김복택이 장차 죽게 되자,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복침이란 말은 《예기(禮記)》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고, 이어 그 본문(本文)의 뜻을 진달하니, 이에 임금이 비로소 깨닫고 석방하려 하였으나, 이미 어찌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 뒤 연중(筵中)에서 누차 딱하게 여기는 하교를 발표하였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그의 아들 김교재(金敎材)가 격고(擊鼓)하여 송원(訟寃)하였다. 임금이 대신에게 하문하니, 영의정 김재로 등이 비로소 그의 원통한 정상에 대해 아뢰었으므로 드디어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평안 감사 이기진(李箕鎭)의 연주(筵奏)로 인하여 지금부터는 강변의 무사(武士)에 대해 도신의 장문(狀聞)이 있으면 병조로 하여금 변장(邊將)의 직(職)에 조용(調用)하게 하였다.

 

심육(沈錥)을 발탁하여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윤3월 20일 병진

헌납 박필간(朴弼榦)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태묘(太廟)의 비축(秘祝)에 저들의 연호(年號)를 쓰지 말고 단지 갑자(甲子)만 쓰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솔히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팔도 유생 이의록(李宜祿)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게 하여 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성운(金聖運)을 대사간으로, 조윤제(曹允濟)·조중직(趙重稷)을 장령으로, 임사하(任師夏)를 지평으로, 조재호(趙載浩)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윤3월 21일 정사

어떤 별이 진성(軫星)의 아래로 흘러갔다.

 

임금이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이윤신(李潤身)을 승지로, 조석명(趙錫命)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특별히 한억증(韓億增)을 발탁하여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삼고 진구(賑救)가 끝날 때까지 어사(御史)의 직임을 맡게 하였다.

 

병조 판서 김약로(金若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어제 연석(筵席)에서 재자(齎咨)의 사행(使行)을 우선 늦추라는 명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책문(柵門)을 물리기 위한 것은 이미 결정된 것이어서 백에 하나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재자의 사행은 즉시 달려가게 하여 일의 기미를 놓치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어제의 정사(政事)에서 이양중(李陽重)을 갑산 부사(甲山府使)에 제수했는데, 이양중은 삼수(三水) 사람입니다. 삼수·갑산은 곧 한 고을과 같아서 불편한 단서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육진(六鎭)의 수령 가운데에서 특별히 바꾸어 차임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하게 될 것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울러 윤허하였다.

 

교리 엄우(嚴瑀)를 보내어 함경도를 염찰(廉察)하게 하였다.

 

윤3월 23일 기미

김상적(金尙迪)을 승지로 삼았다.

 

윤3월 24일 경신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친림(親臨)하여 여러 향관(享官)과 백관(百官)의 서계(誓戒)를 의식대로 받았는데, 태묘(太廟)에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윤3월 26일 임술

임금이 관풍각(觀豊閣)에 나아가니 왕세자가 시좌(侍坐)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바로 후원(後苑)에 벼를 심는 날이므로 내가 원량(元良)으로 하여금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하려 한다."
하고, 유신 조명정(趙明鼎)에게 《시경(詩經)》의 빈풍(豳風) 칠월장(七月章)을 읽게 하고 직접 하나의 소시(小詩)를 써서 세자와 여러 신하들에게 보이니, 모두 뒤이어 시를 지어 올렸다. 임금이 세자의 시를 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한편으로는 가뭄을 걱정하여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뜻이 있고, 한편으로는 나에게 덕을 닦도록 면려하는 뜻이 있다. 내가 나이 50이 넘어서 어린 아들에게 더 면려하라는 말을 듣게 되니 부끄럽기도 하고 또한 가상하기도 하다."
하고, 이어 제도(諸道)에 농사를 권면하는 칙교(飭敎)를 내리고 추조(秋曹)의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고 분부하였다.

 

윤3월 27일 계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이때 봉성(鳳城)에서 자문(咨文)이 왔는데, 책문(柵門)을 물리는 것이 과연 들은 소문과 같았다. 임금이 사신을 보내는 것의 지속(遲速)에 대해 여러 신하들에게 순문하니, 의논이 전처럼 결정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병조 판서 김약로(金若魯)의 말에 의거하여 4월에 사신을 보내기로 하고, 재자관(齎咨官)은 의주(義州)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면직(免職)되었다. 조현명이 상소한 것이 모두 8, 9번이나 되었는데 내용이 더욱 간절하였으므로 임금이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그의 뜻을 들어주었다. 영돈녕(領敦寧)에 제배하니, 조현명이 즉시 명에 응하였다.

 

호남(湖南) 바닷가 고을의 저치미(儲置米) 2백 석(石)을 제주(濟州)에 획급하였는데, 전 목사(牧使) 유징귀(柳徵龜)의 장청(狀請)을 따른 것이었다.

 

이종적(李宗迪)을 대사간으로, 황경원(黃景源)을 헌납으로, 임석헌(林錫憲)·이게(李垍)를 지평으로, 이덕중(李德重)을 부제학으로, 조재민(趙載敏)을 부교리로 삼았다.

 

원경순(元景淳)을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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