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정묘
임금이 태묘(太廟)에서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직접 행하였다.
4월 3일 무진
주강을 행하였다.
4월 4일 기사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석강에 나아갔다. 시독관 윤득재(尹得載)가 말하기를,
"지난번 상신(相臣)이 아뢴 것으로 인하여 기묘년053) 의 제현(諸賢)들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게 하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 대사헌 김식(金湜)에게 추증한 관직은 이에 종2품이었기 때문에 감히 시호를 청하지 못했다고 하니, 참으로 흠전(欠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특별히 정2품의 관직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게 하라."
하였다. 지경연(知經筵)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고 교리 이연경(李延慶)도 또한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와 도의(道義)로 교제를 맺은 사람입니다. 그 때 연신(筵臣)이 중묘(中廟)에게 고하기를, ‘태평성대를 이루려면 반드시 당세의 제일인(第一人)을 발탁 기용해야 합니다.’ 하니, 이연경이 나아가 말하기를, ‘이는 조광조를 이른 것입니다. 조광조는 참으로 어진 사람입니다만 인망(人望)이 흡족하게 된 후에야 대임(大任)을 제수할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조광조가 그 말을 듣고는 달려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해 하였습니다. 당화(黨禍)가 일어남에 이르러서는 충주(忠州)로 돌아가 은거(隱居)했는데, 만년(晩年)의 지조가 더욱 고상했습니다 그리고 효행(孝行)이 탁월하여 실로 기묘년 팔현(八賢)과 그 명망이 똑같았습니다만, 추증한 것은 종2품에 그쳤기 때문에 시호를 내리는 은전(恩典)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제 김식과 함께 똑같이 관직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경하가 또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의 봉사손(奉祀孫)을 여양(驪陽)의 봉사손의 예에 의거하여 녹용(錄用)하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4월 7일 임신
또 만부(灣府)054) 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먼저 재자관(齎咨官)을 보낼 것을 의논하였으나, 묘의(廟議)가 정해지지 않은 탓으로 보내려 하다가 도로 중지한 것이 6, 7차에 이르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걱정하고 탄식하였다.
4월 8일 계유
평안도의 도과(道科)를 설행하여 이인채(李仁采) 등 5인을 뽑았다.
4월 9일 갑술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조명리(趙明履)·조영로(趙榮魯)를 승지로, 정하언(鄭夏彦)을 헌납으로, 김시형(金始炯)을 판의금으로, 조관빈(趙觀彬)을 지경연으로, 이주진(李周鎭)을 동경연으로 삼았다.
4월 10일 을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으로 하여금 각기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게 하니, 김재로가 미쳐 헤아려 보지 못했다는 것으로 사양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고 영상(領相) 이광좌(李光佐)가 일찍이 한덕필(韓德弼)을 쓸 만 하다고 천거한 적이 있는데, 내가 곽외(郭隗)055) 의 예로 먼저 이 사람을 기용하려 한다."
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왕자(王者)가 정치를 잘하는 것은 인재를 얻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한결같이 공의(公議)를 따르면 되는 것이니, 인재를 어찌 다른 세대(世代)에서 빌려 올 수 있는 것이겠는가? 교계(較計)하여 상대적으로 기용하는 것은 사의(私意)이고, 남을 위하여 천진(薦進)시키는 것도 사의이며, 다만 문벌(門閥)에 의해 뽑는 것도 사의인 것이다. 이러한 요점을 어떻게 타파할 수 있겠는가? 또한 오직 공의에 따라서 할 뿐이다. 속히 사당(私黨)을 제거하는 것도 공의에 따라 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고 관직을 위하여 인재를 뽑는 것도 공의에 따라하는 데에 벗어나지 않고,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보전하는 것도 공의에 따라서 하는 데에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아! 대소 신공(臣工)들은 능히 이런 방도로 나를 보도할 수 있겠는가? 《주례(周禮)》에는 현능(賢能)한 사람에 대한 글을 왕에게 바치면 왕이 재배(再拜)하고 받는다는 글이 있는데, 한나라에서 현량과(賢良科)를 거행한 것은 이 예를 준행한 것이다. 비국으로 하여금 자급에 구애받지 말고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은 각기 방백의 임무를 감당할 만한 사람 2인씩을 천거하고, 여러 재신들은 각기 수령을 감당할 만한 사람 1인씩을 천거하도록 하라. 전 목사 한덕필(韓德弼)은 염리(廉吏)의 아들로서 고 상신(相臣)이 추천하였으니, 전조로 하여금 특별히 좌이(佐貳)에 의망(擬望)하여 한 사람을 기용하여 백 사람을 면려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권적(權𥛚)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4월 11일 병자
이연덕(李延德)을 사간으로, 김상구(金尙耉)·김계백(金啓白)을 장령으로, 정기안(鄭基安)·남혜로(南惠老)를 지평으로, 권기언(權基彦)·임경관(任鏡觀)을 정언으로, 김상복(金相福)을 수찬으로, 윤광소(尹光紹)를 부수찬으로, 민응수(閔應洙)를 형조 판서로, 유엄(柳儼)을 판윤으로, 조영국(趙榮國)을 예조 참판으로, 유한소(兪漢蕭)를 설서로 삼았다.
《속대전(續大典)》의 인본(印本)이 완성되었다. 교정 당상(校正堂上) 구택규(具宅奎)에게 가자하고 낭청 정하언(鄭夏彦)에게는 준직(準職)056) 을 제수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검토관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사직(社稷)은 국가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이므로, 각 고을에 사단(社壇)과 여단(厲壇)을 설치한 뜻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이 겉치레가 되어 단(壇)의 터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신 술과 볼품없는 제물로 지내고 있으니, 자못 정성을 다하여 신을 강림하게 한다는 본의가 아닙니다. 마땅히 각별하게 신칙해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선정신 이이(李珥)의 문집(文集) 가운데에서 향약(鄕約)의 조항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지금 갑자기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충효(忠孝)와 예의(禮義)의 법에 이르러서는 가르침을 설행하여 계도함으로써 임금을 친애하고 어른을 섬겨야 하는 의리를 알게 해야 합니다. 향천(鄕薦)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본디 구례(舊例)에 있는 것입니다만, 또한 문구(文具)에 관계되니, 청컨대 제도(諸道)의 도신과 수령들에게 신칙하여 훌륭한 재능과 뛰어난 행실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내어 아뢰게 하여 실효가 있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고 특별히 표리(表裏)057) 1습(襲)을 하사하여 권장하였다.
하교하기를,
"사치스런 풍조가 근일보다 더한 적이 없다. 아! 위에서 좋하하게 되면 아래에서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니, 어찌 몸소 행하지 않고 먼저 백성을 신칙할 수 있겠는가? 금년부터 사행(使行)할 때 위로 곤복(袞服)과 아래로 조의(朝衣)·군용(軍用) 이외에 능라(綾羅)를 사오는 것을 일체 엄금하도록 하라."
하고, 이날 밤 또 하교하기를,
"궁중에서 사치에 대한 폐단을 논할 적마다 자성(慈聖)께서 듣고 매우 기뻐하여 말하기를, ‘검소함을 밝히는 것을 열조(烈朝)에서 행하여 온 아름다운 일이다. 만약 뜻을 두고 행한다면 무슨 어려울 것이 있겠는가? 나는 본래 여기에 대해서는 담연(淡然)한 마음이니, 의당 속히 행하도록 하라.’ 하였으니, 지극하신 자교(慈敎)이다. 이제부터 원량(元良)과 함께 먼저 대포(大布)·태백(太帛)058) 의 제도를 행하도록 하겠으니, 곤전(坤殿) 이하는 몸소 옷이 땅에 끌리지 않는 실상이 있도록 힘쓰라. 앞으로는 능단(綾緞)의 무역을 영구히 금단하겠으니, 아! 중외(中外)의 신서(臣庶)들은 모두 이런 뜻을 본받아서 분수에 따라 검소함을 힘쓰도록 하라."
하고, 이어 유신에게 이르기를,
"내일 서연(書筵)에서 이 하교를 가지고 동궁(東宮)에게 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2일 정축
전라 감사가 아뢰기를,
"본도에 여기(癘氣)가 크게 치성하여 금산(錦山) 등 21개 고을에서 사망한 사람이 9백 49인 입니다."
하였다.
공홍 감사(公洪監司)의 장계(狀啓)하여, 도내(道內)에 익사(溺死)한 사람이 30인이라고 한 것으로 인하여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봉조하 이병상(李秉常)을 소견하였다. 이병상이 말하기를,
"신은 이미 물러가 쉬고 있으니 어찌 감히 조정의 일에 간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때로 임금께서 지나친 거조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지붕을 바라보고 탄식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너무도 노쇠했구나."
하였다. 이병상이 말하기를,
"신이 강화(江華)로 부임할 때 앙달한 바가 있었는데, 성상께서는 기억하고 계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뭇 신하들을 믿지 말고 마땅히 스스로 힘써야 된다는 말을 했었는데, 내가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하였다.
이병상이 말하기를,
"지난번 유생에게 처분을 내렸을 적에 여러 신하들 가운데 간한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지금의 신하들도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스스로 점검(點檢)하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진노(震怒)하실 때에는 비록 말하는 사람이 있어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있습니다만, 일이 지난 뒤에는 전하께서 반드시 그 말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따라서 신이 말을 더듬고 있지만 전하께서는 언자(言者)를 반드시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설혹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인신(人臣)의 도리에 있어서는 오직 생사(生死)를 걸고 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신(重臣)이 나의 마음을 깊이 알고 있다."
하였다. 이병상이 말하기를,
"유자후(柳子厚)059) 의 부(賦)에, ‘물러가 스스로 생각하고 묵묵히 있음이여 나의 말이 행해지지 않는다.’고 한 말이 있는데, 주자(朱子)가 그 말을 인용하여 당시 사대부들의 풍습이 이와 같은 것을 통분스럽게 여겼습니다.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대언(大言)을 하려고 하면 전하께서 지나치게 비상한 거조를 할까 염려하고 소언(小言)인 경우에는 아뢰기에 부족한 것이라 여겨 끝내 잠잠히 침묵만 지키기 때문에, 국사를 진(秦)나라 사람이 월(越)나라 사람의 일을 보듯이 하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실로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신이 삼가 어제의 하교를 살피건대, 치도(治道)의 큰 강령이 이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연경(燕京)의 물건을 사오는 것을 금지케 하는 하교에서 더욱 검소를 숭상하는 덕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라건대, 더욱 면려하시어 그 말을 실천함으로써 종이 위의 빈 말이 되게 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선유(先儒)들의 말에 지식이 증진되면 도량이 증진되고 도량이 증진되면 재능이 증진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뭇 신하들 가운데 식견이 있는 사람이 아주 적기 때문에 인재를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 성급하게 나아가기를 다투는 풍조가 극심하다."
하였다. 이 병상이 아뢰기를,
"이 폐단을 제거하는 것은 단지 전관(銓官)을 가려서 기용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전관이 적격자가 되어서 조급하게 나아가기를 다투는 사람을 일체 억제하여 기용하지 않는다면, 이런 풍조를 종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지경연 원경하(元景夏)는 말하기를,
"봉조하의 가도(家道)가 매우 청한(淸寒)한 탓으로 잘 조섭(調攝)하지 못했기 때문에 노쇠함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의당 조가(朝家)에서 진념(軫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에 내국(內局)으로 하여금 약물(藥物)을 도와 지급하여 주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병상이 아뢴 것은 대체(大體)를 깊이 알고 있는 것으로서 충애(忠愛)가 간절하고 독실하였다. 이러한 신하가 있는데도 끝내 다 기용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태백산사고본】 47책 63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09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인사-관리(管理) / 왕실-사급(賜給) / 역사-사학(史學)
[註 059] 유자후(柳子厚) : 당대(唐代)의 문장가로 이름은 종원(宗元).
사신은 말한다. "이병상이 아뢴 것은 대체(大體)를 깊이 알고 있는 것으로서 충애(忠愛)가 간절하고 독실하였다. 이러한 신하가 있는데도 끝내 다 기용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형조 참판 심육(沈錥)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심육은 초선(抄選)으로 새로 아경(亞卿)에 발탁된 것이다.
팔도 유생 안세광(安世光)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3일 무인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석강에 나아갔다. 사치(奢侈)의 폐단에 대해 논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복어(服御)하는 물품이 혹 검소에 지나친 것이 있었습니다만, 궁중의 용도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미 제도(制度)를 엄히 세웠으니 거의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후 혼례(婚禮) 때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보면 대체로 분의에 지나친 일이 많은 데다가 음식(飮食)에 이르러서도 한 번 허비하는 데 드는 비용이 걸핏하면 수만 냥에 이른다고 하니, 이 또한 절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홍중효(洪重孝)를 접위관(接慰官)으로 삼았다.
4월 15일 경진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4월 16일 신사
사(紗)·단(緞)·주(紬)에 기이하고 교묘한 무늬를 놓는 것을 금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바야흐로 사치스런 풍조를 통렬히 개혁하기 위해 비단에 무늬를 놓는 것을 모두 금하게 했는데, 여러 신하들 가운데 대부분 곤의(袞衣)·적의(翟衣)·장복(章服)·군용(軍容) 등에는 모두 비단에 무늬를 놓아서 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임금이 다만 무늬를 놓은 단릉(緞綾), 기이한 무늬와 특이한 빛깔의 사단(紗緞), 꽃무늬가 있는 주단(紬緞)의 유(類)를 금하라고 명하였다.
헌부 【장령 김계백(金啓白)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주택(住宅)의 대소(大小)에 대해서는 선왕 때부터 정해 놓은 법제가 있는데 법의 기강이 점점 해이해져 사치스러운 것이 법제를 넘고 있으니, 청컨대 경조(京兆)060) 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금단시키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한결같이 정해진 법을 따르게 되면 분란이 이는 폐단이 없을 수 없으니, 이 뒤로 신척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 고을의 조적곡(糶糴穀)은 평시에는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고, 전란에 임하여서는 군향(軍餉)을 만들기 위한 것인데, 수령들이 상사(上司)에 거짓으로 보고하고 창고를 모두 털어서 나누어 준 경우가 많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번고(反庫)061) 하여 논죄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간혹 추생(抽栍)해서 점검하여 본 다음 법을 어긴 경우에는 장문(狀聞)하게 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관동(關東)의 기근이 팔도에서 가장 심하여 굶주린 백성들이 도성(都城)으로 흘러 들어와서 먹여주기만을 바라고 있으니, 진청(賑聽)으로 하여금 초출(抄出)하여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난번 이미 신칙하여 들어오는 대로 양식을 주어 고향으로 양식을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하였다.
4월 17일 임오
강원 감사가 장계(狀啓)하여 도내(道內)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과 물에 빠져 죽고 불에 타 죽은 사람이 모두 84인이라고 한 것으로 인하여,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4월 19일 갑신
진주사(陳奏使) 여선군(驪善君) 이학(李壆) 등을 연경(燕京)으로 보냈는데, 주문(奏文)에 이르기를,
"신이 삼가 절사(節使)인 배신(陪臣) 조관빈(趙觀彬) 등이 되돌아올 적에 관동(關東)의 연로(沿路)에서 들은 것과 의주(義州)의 역학(譯學)이 공사(公事) 때문에 봉성(鳳城)을 왕래 할 적에 들은 바에 의거하면, ‘책문(柵門) 밖을 개간하는 일 때문에 망우초(莽牛哨)에 갑군(甲軍)을 둔치(屯置)시킨다는 이야기가 도로에 떠들썩하다.’고 하였습니다. 전해 들은 말이라서 준신(準信)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감히 경솔하게 주문(奏聞)할 수도 없어서 변리(邊吏)에게 단단히 부탁하여 재차 봉성에 가서 탐문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봉성에서의 답보(答報)가 끝내 자세하고 명백하지 않아서 바야흐로 이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의주 부윤(義州府尹) 권일형(權一衡)의 치보(馳報)를 받았는데, 그에 의하면, ‘성경(盛京)의 부도통(副都統)이 중강(中江)의 건너편에 와서 기지(基址)를 순심(巡審)하는 거조가 있었으므로, 강가로 달려가 강물을 가운데 두고 맞이하여 위로했다.’고 했습니다. 무릇 토지를 개간하고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사이에 비록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치보에 의거하여 보면 지난번 전해 들은 말들이 헛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전후 사행(使行)과 변리(邊吏)의 보고에 대해 근거할 만한 것이 이미 이와 같으니, 이는 실로 소국(小國)의 앞날에 끝없는 우려가 걸려 있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제때에 진문(陳聞)하여 간절한 실정을 우러러 폭백(暴白)하는 것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황조(皇朝)에서 천하를 다스려 온 이래 내외(內外)에 대한 구계(區界)의 한계를 엄히 한 것은 간세(奸細)한 무리들이 마구 넘나드는 걱정을 진념(軫念)한 데서 나온 조처로서, 봉성에 책문(柵門)을 세워 출입하는 사람들을 기찰(譏察)하여 왔습니다. 따라서 책문 밖에서 압록강 가까지 1백여 리(里)에 이르는 땅은 모두 비워둔 채 사람들이 살면서 농사짓는 것을 금함으로써 연화(烟火)가 서로 바라보이지 않게 하고 성문(聲聞)이 서로 접촉되지 않게 만들어 놓았으니, 이는 깊고도 원대한 계책으로 사방(四方)에 대해 신중을 기하고 만세(萬世)를 우려한 더없이 비상한 조처인 것입니다. 한계를 정한 것이 이토록 엄하고도 원대한 계책에서 나온 것인데도 오직 소방(小邦)의 어리석고 미련하고 못난 백성들이 간간이 달려들어가 스스로 천헌(天憲)을 간범했었습니다만, 그 때마다 성조(聖朝)의 지극한 인덕(仁德)을 입어 번번이 관대하게 용서하여 주심으로써 시종 곡진히 비호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날마다 두려운 마음에서 죄책과 흔단을 야기시킬까 조심하고 걱정하여 왔습니다. 이제 토지를 개간하고 둔전을 설치하는 것이 전해 들은 것과 같다면 허리띠 같은 강물이 한계가 되기에 부족한 것은 물론 왕래하는 길이 쉽게 서로 통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법의 시행이 미치지 않는 곳이 있게 되고 금지령이 행해지지 않는 데가 있게 되어 참람한 짓이 더욱 만연되고 간사한 폐단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정말 한 지방의 임금과 신하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장차 어찌 다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건대, 황조(皇朝)의 성대한 덕이 사해(四海)를 뒤덮고 있으며, 소방(小邦)에 이르러서는 마치 한 나라처럼 여기고 있으니, 비록 대조(大朝)의 강내(疆內)의 일이기는 하지만 진실로 소방에 관계되는 이해가 절실하다면, 무릇 자문(咨文)이나 주문(奏文)에 대해 모두 때를 넘기지 않고 번번이 전부 윤가(允可)하여 주셨습니다. 강희(康熙)062) 54년 상국(上國)의 백성들 가운데 토문(土門) 건너편 강가의 근처에 집을 짓고 전지(田地)를 개간한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소방에서 자문을 올려 진달하자 성조 인황제(聖祖仁皇帝)께서 속히 철거시키는 명을 내렸었으며, 옹정(饔正)063) 9년 초애(草靉)의 양하(兩河)와 회수(匯水)에 방수(防守)를 설치하려 했는데 이는 변경(邊境)을 엄히 하여 간사한 무리를 금즙시키기 위한 지극한 모책(謨策)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종 헌황제(世宗憲皇帝)께서 해부(該府)로 하여금 소방에다 편부를 문의하게 한 다음 이어 정파(停罷)할 것을 허락하였으며, 건륭(乾隆)064) 2년 내지(內地)의 상인(商人)들에게 중강(中江)에서 교시(交市)하도록 하는 명이 있었으나 우리 황상(皇上)께서 특별히 소방의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시어 즉시 중지시키게 하였으니, 국경에 관계된 일을 신중히 하고 소방을 은혜롭게 돌보아 주신 것이 전후 한결같았던 것은 물론 은덕이 지극히 후하였습니다. 소방의 군신이 국경을 정성스럽게 잘 지켜 다행히 죄를 범한 것이 없게 된 것은 오로지 여기에 힙입었던 것입니다. 지금 망우초(莽牛哨)의 부도통(副都統)이 와서 순심(巡審)한 것은 곧 옹정 9년에 방수를 설치하려다 정파(停罷)한 곳입니다. 그리고 지금 둔전을 설치하고 토지를 개간하려는 거조는 토문(土門)·중강(中江)·양하(兩河) 등의 일에 견주어 그 경중이 현격합니다. 전에 이미 여러번 곡진한 성은(聖恩)을 입었었으니, 오늘 신이 있는 힘을 모두 기울여 고하면서 자애로운 황제께서 굽어 살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소방은 황조(皇朝)에 대해 비록 외번(外藩)이라 하지만, 내복(內服)065) 과 다름없이 여기고 있기 때문에 호소할 것이 있으면 반드시 청하였고 간청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베풀어 주었으니, 천지 같은 인덕을 소방에게만 치우치게 후히 베푸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소방의 군신이 주야로 손모아 송축(頌祝)하면서 무릇 괴롭고 긴급한 일이 있으면 달려가서 호소하기를 꺼리지 않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오직 이번에 둔전을 설치하여 갑군(甲軍)을 주둔시키고 변책(邊柵)을 물리고 토지를 개간하는 것은 일이 국경에 관계된 것이어서 모두 긴중한 일이기 때문에, 감히 왕년에 자문(咨文)을 올려 청하였던 전례를 택하지 않고 무릅쓰고 천위(天威)를 간범하면서 우러러 번거롭게 아뢰게 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하찮은 간청을 곡진히 살펴 특별히 은지(恩旨)를 내리심으로써 성조(聖朝)에서 소방을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는 것을 끝까지 하여 주고 소방이 죄를 얻게 될까 걱정하는 마음을 풀어 주시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습니다."
4월 20일 을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철보(李喆輔)를 승지로, 신사관(申思觀)을 사간으로, 윤광찬(尹光纉)을 지평으로, 송창명(宋昌明)을 응교로, 이익보(李益輔)를 교리로, 이위보(李渭輔)를 보덕으로, 유복명(柳復明)을 동의금으로, 김유경(金有慶)을 좌참찬으로, 이형만(李衡萬)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21일 병술
주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적의(翟衣)와 명복(明服) 이외의 모든 직조(織造)는 일체 금단하도록 하라. 대소 연례(宴禮)에도 단지 지화(紙花)만 허락하고 납화(蠟花)는 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3일 무자
주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4월 24일 기축
주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박필재(朴弼載)를 승지로, 김상익(金尙翼)을 대사간으로, 유언술(兪彦述)을 사간으로, 정순검(鄭純儉)을 정언으로, 김상로(金尙魯)를 예조 참판으로, 임응수(閔應洙)를 지경연으로, 윤경주(尹敬周)를 필선으로, 이주진(李周鎭)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우참찬 원경하(元景夏)가 이유신(李裕身)의 폐사군(廢四郡)의 지도(地圖)를 올리고서 다시 사군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5일 경인
한성부에서 아뢰기를,
"방민(坊民)을 조발(調發)하여 사산(四山)의 송충(松蟲)을 잡아서 땅에 묻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정실(鄭宲)·심수(沈繍)만이 중수(重囚)를 특별히 석방하는 날에 누락되었습니다. 그 일이 신의 일신(一身)에 관계가 되기 때문에 감히 진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실은 마땅히 제방(隄防)을 엄히 해야 하니 우선 버려두도록 하라. 심수는 매우 그르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6일 신묘
주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4월 28일 계사
경상 감사가 장계(狀啓)하기를,
"도내에 여역(癘疫)으로 사망한 사람이 모두 6백 87인입니다."
4월 29일 갑오
소대를 행하였다.
4월 30일 을미
장령 최익수(崔益秀)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날의 성왕(聖王)들은 언로(言路)를 여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성조(聖朝)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힘쓰는 때는 당해서는 더욱 언자(言者)들을 너그럽게 용납하여 대간의 기풍을 진작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번 말한 것으로 죄를 얻은 사람이 있습니다. 엊그제 대신이 정실·심수가 아직도 서용되지 못했다는 것으로 탕척(蕩滌)시키는 은전(恩典)을 베풀 것을 청하였으나, 전하께서는 윤허하여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신은 천지처럼 큰 도량에 대해 유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각(臺閣)의 진장(陳章)에 대해 그 내용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비답으로 엄히 지척(指斥)하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겠습니다. 그런데 일전에 간원에서 올린 소장에 대해 비답도 없이 돌려 주었으니, 어찌 대각을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 혐오스러움이 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연경(燕京)에서 무역해 오는 것을 금단한 일에 이르러서는 주벽(珠壁)을 내던져버리는 교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인데, 계속하여 내린 비망기(備忘記)에는 단지 무늬가 있는 것만 금하고 무늬가 없는 것은 금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무늬가 없는 비단도 무늬가 있는 것보다 값이 더 많은 것이 있는데, 이제 이 한 가지 길을 열어 놓으면 사치를 추구하는 집에서는 이에 의거하여 서로 숭상하게 될 것이니, 그 말류(末流)의 폐단은 구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상역(象譯)066) 들이 팔기 쉬운 것을 이롭게 여겨 금하지 않는 다는 것을 핑계로 삼아 전에 없는 갖가지 물품을 더 내어와서 그 이익을 노리게 되면, 조정에서 또 어떻게 금방(禁防)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사간 유언술(兪彦述)이 전일 죄를 받았었다는 것으로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비답이 없이 되돌려 주었기 때문에 최익수의 상소에서 언급한 것이다.
이주진(李周鎭)을 대사헌으로, 유우기(兪宇基)를 사간으로, 김상철(金尙喆)을 헌납으로, 임순(任珣)·유현장(柳顯章)을 지평으로, 이익보(李益輔)·남학종(南鶴宗)을 정언으로, 임박(任璞)을 수찬으로, 조재덕(趙載德)을 문학으로 삼고, 이중협(李重協)을 발탁하여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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