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3권, 영조 22년 1746년 5월

싸라리리 2025. 9. 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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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병신

임금이 선정전(宜政殿)에 나아가 상참을 행하고 이어 주강을 행하였다.

 

승지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법전(法典)의 제례(祭禮) 조항에 주부 군현(州府郡縣)의 학교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소주(小註)에 송(宋)나라 때의 사현(四賢)067)  을 열서(列書)하고 신라·고려·본조(本朝)의 십이현(十二賢)068)  은 주부 군현을 막론하고 아울러 모두 제사지내게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법을 만든 뜻은 비록 작은 고을이라 할지라도 모두 십륙현(十六賢)을 제사지내게 한 것입니다만, 일찍이 듣건대 작은 고을에서는 혹은 다 제사지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의당 한결같이 법전에 따르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석강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단군(檀君)에서부터 전조(前朝)069)  에 이르기까지 능침(陵寢)이 있는 곳에는 도신으로 하여금 가을을 기다려 수치(修治)하게 하라. 일을 끝마친 뒤에는 의조(儀曹)070)  에서 향(香)을 내려주고 본도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근래 듣건대, 진전(眞殿)을 사사로이 봉심(奉審)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비록 신자의 애모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지만, 일이 설만한 데 관계되니, 일체 엄금하게 하라. 전주(全州)·함흥·강도에도 일례로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일 정유

하교하기를,
"진전(眞殿)의 작헌례(酌獻禮)는 당초 정한(定限)한 것이 없었는데, 왕년(往年)에 이르러 2년에 한 번씩 행하여 왔었으나, 나의 정성이 얕아서 계속하지 못하였다. 작헌하는 한 절차는 예(禮)를 올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만, 육향(六享) 가운데 일향(一享)은 몸소 행하려고 한다. 본전(本殿)에 직접 제향을 지내는 것이 《오례의(五禮儀)》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원릉(園陵)에 직접 제향을 지내는 것 또한 어찌 예문(禮文)에 기재되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겠는가? 그 의의는 같은 것이다. 예조로 하여금 대신에게 순문(詢問)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의논하기를,
"진전의 육향(六享)을 직접 지내는 것에 관해서는 《오례의》에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성교(聖敎)에서 원릉에 친히 제향을 지내는 것을 원용(援用)하였습니다. 신은 원릉에 대해 5명절(五名節)의 제향과 기신제(忌辰祭)를 과연 친히 지낸 전례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배릉제(拜陵祭)를 전거로 삼는다면 진전에 전알(展謁)할 때 작헌(酌獻)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만, 만일 재작년 명릉(明陵)071)  에 친히 고유(告由)하는 안릉제(安陵祭)를 지낸 것을 전거로 삼는다면, 이것은 또한 육향을 직접 지내는 데 대한 분명한 증거는 아닐 것 같습니다. 성상께서 의리가 분기하여 한 번 몸소 행하려 하신다면 아랫사람의 도리에 있어 의당 감히 우러러 저지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일이 처음하는 것에 관계되기 때문에 의문(儀文)을 품절(品節)하는 사이에 혹은 구애되는 던서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밖에 있는 유신들에게 널리 순문(詢問)한 다음 종용히 강정(講定)하여 조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의 의논도 같았다. 임금이 열람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묘전(廟殿)의 친향(親享)은 오향(五享) 이외에 능(陵)에 대해서와 묘(廟)에 대해서는 기록된 것이 없지만 능에 전알할 경우에는 친제(親祭)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널리 조찰(照察)했다는 것이다. 영상이 헌의(獻議)한 것은 본 뜻을 상세히 살피지 않은 데에서 연유된 것이다. 이번의 이 하교는 한편으로는 정례(情禮)를 펴기 위한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사전(祀典)을 중히 여기기 위한 것이니, 이 뒤로 육향(六享)을 친제(親祭)하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하교를 기다려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정식(定式)으로 삼게 했으며, 모든 의주(儀註)는 한결같이 원릉에 친제하는 예에 의거하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오례의》에는 단지 속절(俗節)에 진전(眞殿)에 제향하는 의주만 기재되어 있고 그 나머지는 논하지 않았으니, 김재로(金在魯)가 전거를 끌어대어 아뢰기 어려웠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신충(宸衷)으로 결단하여 경솔하게 행하게 했으니, 이것은 이른바 널리 순문(詢問)하지 않은 모책으로 상고할 데가 없는 예(禮)이니, 그 실수가 어찌 작은 것이겠는가? 그러나 김재로의 헌의(獻議)도 단지 근거할 데가 없다고만 말했을 뿐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으니, 그 말에도 미진한 점이 있다. 대저 교묘(郊廟)의 제사는 근엄한 것을 위주로 하는 것으로, 능침(陵寢)의 제사는 정리(情理)를 위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종묘(宗廟)에서 단지 전궁(殿宮)에 전알(殿謁)만 할 경우에는 작헌(酌獻)을 겸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례(古禮)로 법을 삼는다면 그래도 합치되지 않는 점이 있는데, 더구나 친히 대향(大享)을 행하는 것을 한결같이 종묘의 제례(祭禮)와 같이 한다는 것인가?"


【태백산사고본】 47책 63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11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註 071] 명릉(明陵) :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및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능.
사신은 말한다. "《오례의》에는 단지 속절(俗節)에 진전(眞殿)에 제향하는 의주만 기재되어 있고 그 나머지는 논하지 않았으니, 김재로(金在魯)가 전거를 끌어대어 아뢰기 어려웠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신충(宸衷)으로 결단하여 경솔하게 행하게 했으니, 이것은 이른바 널리 순문(詢問)하지 않은 모책으로 상고할 데가 없는 예(禮)이니, 그 실수가 어찌 작은 것이겠는가? 그러나 김재로의 헌의(獻議)도 단지 근거할 데가 없다고만 말했을 뿐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으니, 그 말에도 미진한 점이 있다. 대저 교묘(郊廟)의 제사는 근엄한 것을 위주로 하는 것으로, 능침(陵寢)의 제사는 정리(情理)를 위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종묘(宗廟)에서 단지 전궁(殿宮)에 전알(殿謁)만 할 경우에는 작헌(酌獻)을 겸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례(古禮)로 법을 삼는다면 그래도 합치되지 않는 점이 있는데, 더구나 친히 대향(大享)을 행하는 것을 한결같이 종묘의 제례(祭禮)와 같이 한다는 것인가?"

 

이에 앞서 의릉(義陵)072)  에 석물(石物)을 수개(修改)하는 역사가 있었다. 임금이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을 보내어 감독하게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붕당(朋黨)에 대한 일을 논하였다. 영사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구양수(歐陽修)가 논(論)하기를, ‘요순(堯舜)의 세상에도 또한 원개(元愷)073)  와 사흉(四凶)074)  이 있었다.’고 했으니, 이는 또한 사세에 있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고, 지사 원경하(元景夏)는 말하기를,
"신은 일찍이 구양수의 논의도 또한 폐단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소식(蘇軾)이 뒤이어 붕당론(朋黨論)을 지은 것으로 사료한 적이 있습니다. 그뒤 천·삭(川朔)으로 붕당이 나뉜 것은 구양수의 붕당론에 연유되지 않았다고 기필할 수 없습니다. 비록 군자라 할지라도 한 번의 실수는 있는 것이고, 소인이라고 할지라도 조그만 장점은 있는 것이니, 진실로 잘못된 것이면 군자라도 공척(攻斥)해야 하고, 진실로 옳은 것이면 소인의 말일지라도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호오(好惡)의 도리는 진실로 치우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5월 3일 무술

임금이 공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을 소견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천고의 제왕들 가운데 진실로 중흥(中興)시키거나 소강(小康) 상태의 정치를 행한 사람이 있었습니다만, 모두 몸소 행하여 마음으로 체득한 것을 정령(政令)에 미루어 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사첩(史牒)을 살펴보소서. 삼대(三代) 이하로 제왕의 지위에 있던 사람이 어찌 성정(誠正)의 학문에 힘쓴 사람이 있었습니까? 전하께서는 저위(儲位)에 오르신 뒤에 우뚝하게 성학(聖學)으로 스스로 기약하여 마음에 대해 논할 적에는 천덕(天德)을 위주로 삼고 정치에 대해 말할 적에는 왕도(王道)로 기준을 삼으셨습니다. 신은 무신년075)   초기에 경악(經幄)에 들어와 영돈녕 조현명(趙顯命)과 서로 마주하여 송탄(誦歎)하면서 임금을 요순(堯舜)으로 만들 수 있고 이 세상을 당우(唐虞)의 시대로 만들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20년 동안 성학(聖學)이 간단(間斷)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여 치상(治象)이 태평스러움을 볼 수 없으니, 자못 크게 탄식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하문하기를,
"《자성편(自省編)》은 어떠한가?"
하니, 종성이 말하기를,
"이 책의 문자는 전모(典謨)에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만, 또한 전하를 위하여 걱정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곤직(袞職)에 잘못이 있을 경우 여러 신하들이 이것을 가지고 간한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참으로 옳다. 내가 실로 고심하고 있다."
하였다.

 

임금이 경외(京外)에서 여역(癘疫)이 점점 치성하여진다는 것으로 근시(近侍)를 보내어 팔도에 여제(癘祭)를 설행하게 하였다.

 

5월 6일 신축

송징계(宋徵啓)를 대사간으로, 이광식(李光湜)을 사간으로, 이홍직(李弘稷)을 장령으로, 임박(任璞)을 지평으로, 이창유(李昌儒)를 정언으로, 윤지태(尹志泰)를 필선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비답을 내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가뭄을 걱정할 때에는 해갈시켜 줄 단비가 요구되는 것이니, 고고한 덕망으로 만백성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경은 세신(世臣)으로서 어떻게 차마 한갓 고답적(高踏的)인 자세만 지키고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고 함께 올라오게 하였다.

 

5월 10일 을사

지진(地震)이 있었다

 

5월 11일 병오

정언 이익보(李益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의 언로(言路)를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열렸다고 보십니까? 열리지 않았다고 보십니까? 견거(牽裾)076)  의 기풍과 절함(折檻)077)  의 간언(諫言)을 오히려 볼 수 없고, 비록 대단찮은 말과 미세한 일에 대해서도 번번이 받아들이지 않는 기색을 보여 견책을 가하고 꺾어 누르십니다. 얼굴은 알고 있으니 현신(現身)하라고 하는 하교는 너무 박절한 데 가깝고, 당심(黨心)을 품고 있다는 비답이 실정 밖에서 나온 것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뭇 신하들이 말하는 것을 경계로 삼아 날마다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을 일삼고 있습니다. 당당한 청조(淸朝)의 대각(臺閣)이 하나의 규피(規避)하는 곳이 되어 있기 때문에 신중히 가리지 않고 구차스럽게 숫자만 채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비루하고 패려하고 무식한 박창윤(朴昌潤)과 용렬하고 보잘것없는 유현장(柳顯章) 같은 자들도 또한 대선(臺選)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신은 박창윤과 유현장은 아울러 대망(臺望)에서 삭제시켜야 된다고 여깁니다. 아! 전하께서 전후 지나친 거조가 있으셨던 것이 한두 번뿐만이 아니었습니다만, 하나라도 규간(規諫)한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시기를 이용하여 임금의 뜻을 받들어 따라서 이를 인연하여 진출할 계제로 삼고 있습니다. 오직 작년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보건대, 이창수(李昌壽)는 자신이 경악에 있으면서도 바로잡을 것은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간관(諫官)을 공척(攻斥)하였으니, 그의 처사와 심보를 궁구하여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내용에 협잡(挾雜)이 없지 않으니, 참으로 가소롭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14일 기유

전 사간 이연덕(李延德)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철원부(鐵原府)를 강등하여 현(縣)으로 삼았는데, 지아비를 죽인 죄인 석매(石梅)가 태어난 고을이기 때문이다.

 

남태량(南泰良)·박춘보(朴春普)를 승지로, 송익보(宋翼輔)를 대사간으로, 안상휘(安相徽)를 사간으로, 윤경주(尹敬周)를 헌납으로, 안식(安栻)을 정언으로, 박흥준(朴弘儁)을 지평으로, 김상철(金尙喆)을 수찬으로, 조관빈(趙觀彬)을 판돈녕으로, 신만(申晩)을 병조 참판으로, 윤득재(尹得載)를 부교리로, 임석헌(林錫憲)을 사서로 삼았다.

 

5월 15일 경술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을 행하였다. 하교하여 신하들의 당습(黨習)을 나무라고 나서 정언 이익보(李益輔), 사간 안상휘(安相徽)를 삭직(削職)하고 도승지 윤급(尹汲)을 체직하고 응교 남유용(南有容)을 파직하였다. 당초에 이익보가 올린 소장에 대한 비답에 나무라는 하교가 있다는 것으로 피혐(避嫌)하고 물러가 기다렸는데, 안상휘가 출사(出仕)하게 할 것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품은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는 것은 대체(臺體)가 진실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노여워한 것이 아니고 가르치기 위한 하교였으니 펴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영호(營護)한다고 질책하고 이익보를 파직하고 안상휘를 체직하게 하였다. 윤급이 이에 대해 처분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니, 임금이 노하여 윤급을 체직하고 이익보 등은 삭직하였다. 남유용은 이에 앞서 상소하여, 이익보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우악한 내용이 모자란다고 했기 때문에 또한 파직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16일 신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신이 우선 가장 긴절한 세 조항을 가지고 우러러 진달하겠습니다. 첫째는 연체(筵體)를 존엄하게 해야 합니다. 근래에 연석(筵席)이 엄하지 않아서 표절한 남의 말을 교대로 아뢰는 등 전혀 차제(次第)가 없습니다. 향안(香案)의 지척에서 난잡스럽기가 이러하니, 어떻게 사방이 맑게 다스려지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지금부터 반드시 따로 일을 아뢰는 자리를 설치하여 그 자리에 나아가서 일을 아뢰게 하고 교대로 마구 아뢰는 일이 없게 하소서. 또한 감히 사사로이 말하는 자가 없게 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책벌(責罰)을 가하게 하소서. 둘째 아첨하는 풍조를 개혁하는 것입니다. 옛 제왕들은 잘 다스리려는 데 뜻을 두게 되면 반드시 아첨하는 풍조를 금했습니다. 한나라 광무(光武)는 성(聖)이란 말을 하지 말게 하였고, 송경(宋璟)078)  은 유애비(遺愛碑)079)  를 헐어 버리라고 청하였으니, 치체(治體)를 알았다고 할 만합니다. 근래 연석(筵席)에서는 단지 찬미하는 일만 있고, 광정(匡正)하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여항(閭巷)의 한가하고 잡스러운 무리들의 담소를 서로 전설(傳說)하기에 이르러 임금이 듣고 기뻐하게 하기만을 힘쓰고 있어 체통(體統)이 크게 무너졌으니, 의당 엄히 신칙하여 일세(一世)를 면려시켜야 합니다. 셋째 인재(人才)를 분변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한세상에 인재를 내어 한세상의 일을 종료시키는데 어찌 인재가 없겠습니까? 잘 알지 못하는 것이 걱정일 뿐입니다. 진도공(晉悼公)이 17세에 정치에 임하여 육경(六卿)을 변역(變易)시킴으로써 문양(文襄)의 패업(霸業)을 잘 계승하였으니, 육관(六官)의 장관(長官)만 과연 적임자를 얻게 되면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어도 잘 다스려지게 할 수 있습니다. 육관 가운데 양전(兩銓)과 호조·형조는 더욱 극진하게 선발해야 합니다. 이조에는 반드시 공엄(公嚴)하고 간중(簡重)한 것을 귀히 여겨야 하고, 병조는 반드시 주통(周通)하고 호쾌(豪快)한 것을 귀히 여겨야 하며, 호조는 국계(國計)에 관계된 곳이므로 의당 간판(幹辦)을 잘하는 재능이 있는 이를 얻어야 하고, 형조는 백성의 목숨이 관계된 곳이므로 의당 강명(剛明)한 사람을 얻어야 합니다. 정치를 해나가는 요점은 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종성은 마땅히 경연(經筵)에 두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정원일기(政院日記)》가 불에 타서 산일(散逸)된 것이 많으니, 뒤에 조속히 수정(修整)하는 일을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청(廳)을 설치하고 수집(修輯)하게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박필주(朴弼周)가 강교(江郊)에 이르러 진소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비답을 내리고 승지 박춘보(朴春普)를 보내어 돈소(敦召)하였다. 다시 수서로 서계(書啓)에 답하기를,
"3일 안에 세 번 수서를 내려 돈유(敦諭)한 것으로 세 번 빙소(聘召)한 것을 대신하니, 경은 모쪼록 번연(幡然)히 마음을 고쳐 나의 면유(面諭)를 들으라."
하였다.

 

5월 17일 임자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영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청하기를,
"전조(銓曹)로 하여금 북로(北路)의 인재를 수용(收用)하게 하소서."
하고, 또 북로의 민정(民情)이 모두 다시 양전(量田)하기를 원하고 있으니,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상로(金尙魯)를 대사헌으로, 윤택후(尹澤厚)를 장령으로, 윤지태(尹志泰)를 사간으로, 홍서(洪曙)·이진의(李鎭儀)를 지평으로, 이제화(李齊華)·조중직(趙重稷)을 정언으로, 이종성(李宗城)을 형조 판서로, 송창명(宋昌明)을 응교로, 조운규(趙雲逵)를 부수찬으로, 윤동준(尹東浚)을 교리로, 심성진(沈星鎭)을 대사간으로, 서효수(徐孝修)를 설서로 삼았다.

 

5월 19일 갑인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5월 20일 을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대신에게 일기청(日記廳)을 구관(句管)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갑자년080)   일기(日記)가 모두 불탔으므로, 이 때에 이르러 청(廳)을 설치하고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차출하여 찬집(纂輯)하게 했는데, 사국(史局)을 중히 여기는 뜻에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이어 대내(大內)의 일기(日記)를 반포하였는데, 일기청 당상 홍계희(洪啓禧)가 아뢰기를,
"선묘(宣廟)임진년081)  부터 경묘(景廟)신축년082)  까지의 일기가 모두 1천 7백 96권인데, 경인년083)  일기 1권, 기해년084)   일기 2권은 진연(進宴)에 관한 일을 고열(考閱)하느라 미처 옮겨오지 않았기 때문에 불탄 가운데 들어가지 않았습니다만, 이미 불탄 것이 1천 7백 93권입니다. 인묘(仁廟)계해년085)   이전의 일은 오래되어서 증험하기가 어려우니, 계해년 반정(反正)부터 시작하여 찬집하겠습니다. 따라서 사가(私家)에서 저보(邸報)086)  를 등서(謄書)해 둔 것이 있으면 듣는 대로 가져오게 하고 시골에 있고 권질(卷秩)이 많은 경우에는 또한 역참(驛站)을 통하여 실어 오게 하여 참고할 바탕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또 아뢰기를,
"기유년087)   5월 보름 뒤의 일기도 또한 없어졌습니다. 이는 의당 그 때의 당후(堂后)088)  로 하여금 추보(追補)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이어 붕당의 폐단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승지 박춘보(朴春普)가 말하기를,
"붕당을 제거하려면 붕당을 잊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뭇 신하들이 진달한 말 가운데 그 말이 옳으면 비록 그 사람에게 당심(黨心)이 있더라도 반드시 채용하고, 그 말이 옳지 않으면 비록 그 사람이 당심이 없더라도 의당 퇴척(退斥)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제거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제거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좌참찬 김유경(金有慶)이 상소하여 나아가 많다는 것으로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이춘제(李春躋)를 공조 판서로, 조재덕(趙載德)을 부수찬으로, 오언유(吳彦儒)를 수찬으로 삼았다.

 

간원          【사간            윤지태(尹志泰).】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선천 부사(宣川府使)        구선행(具善行)이 정장(呈狀)하여 해직(解職)시켜 주기를 청한 것은 스스로 편함을 취하기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인데, 해조(該曹)에서 체직하도록 허락한 것은 또한 왜곡되게 따른 것에 관계됩니다. 청컨대 해당 당상은 추고하고 구선행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봄에 무소(武所)의 거자(擧子)들이 감시관(監試官)에게 강생(講栍)을 은밀히 내통한 것에 대해 신이 상소하여 조사할 것을 청하였습니다만, 결국 모두 엄히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금오(金吾)와 추조(秋曹)의 당상은 아울러 추고하고, 감시관과 거자는 다시 조사하여 엄히 감죄(勘罪)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다시 조현명(趙顯命)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다시 승지 조영증(趙榮曾)을 보내어 이조 판서 박필주(朴弼周)에게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5월 22일 정사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5월 24일 기미

임금이 다시 수서(手書)로써 이조 판서 박필주(朴弼周)를 돈소(敦召)하니 박필주가 명을 받들었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서 인견하였는데 왕세자가 시좌(侍坐)하였다. 박필주가 나아가 부복하니, 임금이 일어나 앉으라고 명하였다. 박필주가 나아가 말하기를,
"학문하는 방도는 오직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성질(聖質)이 비록 매우 고명하시지만, 이미 성인(聖人)의 지위에 이르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생각하여 보소서. 전하의 기질의 병통이 과연 어떤 곳에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성품이 급하지만, 또한 완만한 점도 있다. 병통이 지나치게 급한 데에만 있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박필주가 말하기를,
"무릇 장점이 있으면 반드시 단점이 있는 것입니다. 총명이 특히 뛰어난 것은 전하의 장점이요, 찬찬하여 두루 살피는 것은 전하의 단점입니다. 이 때문에 비록 지혜가 만 가지 일을 두루 살필 수 있지만, 간혹 작은 것만 살피고 큰 것을 빠뜨리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되어 상세히 하는 것은 너무 상세히 하고 간략히 하는 것은 너무 간략히 하게 되니, 정령(政令)의 시조(施措)에 해가 되는 것이 한둘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장점과 단점이라는 것이 또한 실로 특별한 일이 아니라 단지 장점으로 인하여 단점이 생기는 것뿐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십분 더 공부하시어 장점은 보존시키고 단점은 제거한다면, 의리의 올바름을 순일(純一)하게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바로 세록신(世祿臣)이고 또 어려서 배워 장년(壯年)이 되면 그것을 행하는 것이 유자(儒者)의 도(道)인 것이다. 나는 근력(筋力)으로 분주하게 하기를 경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고, 바라는 것은 바로 앉아서 부박한 풍속을 진정시키는 데에 있다. 경이 전임(銓任)에 있으면 조급하게 다투어 나아가려는 부류들이 반드시 경의 문앞에 가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박필주가 말하기를,
"신은 오늘날의 급선무가 과연 어떤 일에 있는지 모릅니다. 전하께서는 유의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하나의 공(公) 자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하니, 박필주가 말하기를,
"지금 붕우(朋友)가 애매한 무고(誣告)를 당했을 경우에는 반드시 변명하려고 하기 마련인데, 더구나 신하가 임금에 대한 것이겠습니까? 선왕(先王)께서 성질(聖疾)이 위독하여졌을 적에 저 흉언(凶言)을 만든 자들은 병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때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오늘 온 것은 행공(行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일 때문에 온 것입니다. 그러나 언사(言辭)가 어눌하여 말로 주달할 수 없으니 감히 문자(文字)로 진달하겠습니다."
하고, 이어 수차(袖箚)를 올리니, 임금이 즉시 펴서 열람하였다. 그 차자에 이르기를,
"대개 백성이 생긴 시초에 곧 군신(君臣)이 있었는데, 그 ‘의리가 있다[有義]’는 두 글자를 내어걸고서 말을 한 것은 진실로 우(虞)나라 조정에서 설(契)에게 명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만세(萬世)토록 군신의 율령(律令)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문에 명색이 인류(人類)라는 것으로 천지 사이에 생존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떳떳하고 아름다운 본성(本性)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억울하게 무함하고 비방하는 말이 일단 군상(君上)에게 언급될 경우에는 어쩔 줄 모르고 통분하여 반드시 폭백(暴白)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크게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지 않고 작은 경우에도 또한 매가 새를 쫓듯이 하여 왔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신자(臣子)의 대의(大義)를 어기는 것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 자립(自立)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제왕의 존엄함으로 증자(曾子)·민자(閔子)의 효행(孝行)을 몸소 행하여 왔으므로, 숙묘(肅廟)와 경묘(景廟)가 승하(昇下)하실 즈음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극진히 하였으니, 지성스런 효도와 우애는 실로 천지를 감동시켜 신(神)에게 이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일종의 흉역(凶逆)으로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심유현(沈維賢)·이천해(李天海) 같은 자들의 무리가 번성하여 앞서는 신축년089)  ·임인년090)  의 화(禍)를 일으키고 뒤에는 무신년091)  의 난리를 일으킬 수 있단 말입니까? 아! 통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천하 만고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흉역들은 이미 토평(討平)되었고 세월도 또 오래 되었습니다만, 역내(域內)에 살고 있는 사람은 진실로 순역(順逆)의 분변에 대해 환히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삼가 어제(御製)인 《자성편(自省篇)》 가운데, ‘미령할 적에 고통을 나누고 싶다.’고 하였으므로, 슬퍼서 눈물이 나는 것을 금할 수 없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미령하다.[違豫]’는 두 글자를 세상에 숨겼기 때문에 전후에 화란(禍亂)을 빚어내어 하늘에 닿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두 글자를 신축년과 임인년 무렵에 밝혔더라면, 김일경·목호룡 등 여러 역적들이 반드시 틈을 얻지 못했을 것이며, 무신년 전에 밝혔더라면 심유현·이천해 등 여러 역적들이 또 스스로 발동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숨길 일이라고 기필코 숨겼단 말입니까? 대저 군상(君上)에게 병이 있게 되면 온 나라의 신료(臣僚)들이 모두 모르는 사람이 없는 법인데, 저 흉역의 무리들이 어찌 유독 몰랐을 리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일절 숨기려는 마음을 먹었던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하를 무함하고 건저(建儲)를 주도한 신하들을 역적으로 몰아넣을 수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축년·임인년의 역적들의 죄가 위로 하늘에 사무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선왕(先王)의 성환(聖患)은 세월이 오래된 것이어서 한때 우연히 발병된 것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갑진년092)  에 이르러서는 증후(症侯)가 침중하여져 한 달이 넘도록 위독한 지경이었으므로 삼다(蔘茶)를 진어하는 날이 많았습니다만, 조지(朝紙)에 써서 내는 것에는 단지 다(茶)를 마셨다고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점(大漸)093)   때를 당하여서도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지 않음으로써 심유현과 이천해의 무리로 하여금 요역(妖逆)에 대한 역모를 만들어 내게 하였습니다. 또 감히 근거 없는 흉언(凶言)으로 위로 성궁(聖躬)을 무함하면서 군대를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곧 무신년 역적들의 흉역으로 이는 만고에 없던 것입니다. 오직 우리 경종 대왕(景宗大王)께서는 불행하게도 성사(聖嗣)가 없으시고 천륜의 지친(至親)이라고는 단지 전하 한 분이 계셨으니, 저사(儲嗣)를 세우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진실로 저사를 세운다면 전하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더구나 성질(聖疾)이 오래 침중하고 왕실(王室)이 외롭고 위태로운 상황인 경우이겠습니까? 이런 때를 당하여 전하를 저사(儲嗣)로 책립(策立)한 것은 실로 선왕께서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이를 봉행하는 사람은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충성을 다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역적 김일경의 무리는 차마 이를 역적이라고 지목하여 파가 저택(破家瀦宅)094)  하여 노적(孥籍)하는 율을 시행하기에 이르렀으며,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성질(聖疾)에 대해 언급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당여(黨與)라 할지라도 어찌 마음속으로 불평을 품은 사람이 없었겠습니까마는, 대세에 눌려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 채 곧바로 무신년에 이르게 되었으니, 국세의 위급함이 오히려 가슴을 써늘하게 합니다. 대저 역적 김일경의 흉필(凶筆)에 의한 교문(敎文)이 먼저 있었고, 곧이어 국문(國門)에 흉서(凶書)를 내걸어 전후 이어받아 계술(繼述)함으로써 원근에 전파시켰는데, 그 흉악하고 교활한 것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인심이 의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심유현·이천해 등 허다한 역적을 제외한 그 나머지는 모두 속아서 빠진 자들인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여 본다면, 화란을 부른 까닭은 실로 있는 데가 있는 것입니다. 전하의 신하가 된 사람들이 능히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버린다는 의리를 알았다면, 사리상 반드시 마음 아파하고 고뇌하면서 죽기를 한정하고 변백(辨白)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이를 가지고 임금 앞에서 통렬히 진달한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간혹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대부분 간절하게 아뢰어 감동시키지 못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이 누적된 데에서 연유한 소치인 것입니다. 따라서 전하의 조정에 또한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묘 사직(宗廟社稷)의 신령과 전하의 신명(神明)에 힘입어 근년 이래에는 비록 다행히 일이 없었습니다마는, 작년 겨울에 있었던 역옥(逆獄)에 의거하여 살펴본다면 앞으로 다시는 변란이 없으리라는 것은 알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혹 흉적의 여얼(餘孼)들 가운데 나홍언(羅弘彦) 같은 자들이 은밀히 서로 전수(傳授)하여 글로 써서 야사(野史)라고 이르면서 후세 사람들을 의혹되게 한다면 또한 어찌 염려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제 《자성편》에 말한 내용은 매우 성견(聖見)이 높고도 원대함을 우러러볼 수 있었으나, 대훈(大訓) 가운데에는 오히려 설파(說破)가 부족했었습니다. 대저 저 역적들이 말꼬투리를 잡아 화란을 얽어낸 것은 이것이 어떠한 두세(頭勢)입니까? 만약 한갓 군흉(群凶)들의 죄상만 논단(論断)하고 성질(聖疾)에 대한 한 가지 일에 관해서는 생략하고 언급하지 않는다면, 은밀히 걱정거리는 의연히 그대로 남아 있게 되기 때문에,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두어 구절의 말을 대훈(大訓)에 첨가하여 기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선왕이 불행하게도 성질(聖疾)이 있으셨으므로, 내가 아우의 존엄함으로 명을 받들어 저사(儲嗣)가 되었으니, 전의 역사에 질정하여 보고 뒷사람의 말을 기다려 보아도 천 번 만 번 옳고 정당하였다. 그런데 무슨 광명 정대하지 않은 것이 있기에 저 흉적들이 이를 가지고 나를 무함한단 말인가?’라고 한다면 선왕이 전하를 명한 것과 전하가 선왕을 받든 것이 해와 달이 하늘에 걸린 것처럼 환히 빛날 것입니다. 따라서 저 흉적으로서 전하를 무함하는 자들도 다시는 혀를 놀릴 수 없게 될 것이니, 어찌 지극히 명백하고 지극히 순리로운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성질(聖疾)이란 두 글자는 이미 세상에서 기휘(忌諱)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된 것이므로 더욱 말하기 어려운 것에 속한다.’고 합니다만, 이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아! 인신(人臣)의 의리는 죽은 임금을 전송하고 지금의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두 가지 뜻을 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선왕에게 충성한 사람은 곧 전하에게도 충신인 것이며 전하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또한 선왕에게도 충신인 것입니다. 어찌 전하에게 충성하지 않고서 선왕에게 충성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연유하여 말한다면 선왕의 성질(聖疾)을 숨기지 않는 것은 곧 전하의 무함을 변백(辨白)하는 것이 됩니다. 이 두 가지 일은 단지 한 가지 일이 되는 것인데, 진실로 지극한 정성으로 슬퍼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둘로 나누어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사의(事義)에 있어 조금도 미안한 점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임금이 미령하였다는 글을 고명(顧命)에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역대의 제왕들이 붕서(崩逝)할 때 병을 앓은 것을 사책(史冊)에 갖추 드러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예컨대 사마광(司馬光)의 경우 황태후(皇太后)에게 올린 글에서 영종(英宗)의 병에 대한 증상(證狀)을 나열하였으므로 말이 무엄한 것 같았으나, 어찌 일찍이 의도적으로 기휘(忌諱)하는 것을 지금처럼 한 것이 있음을 보겠습니까? 오직 이 때문에 비록 선왕께서 고통을 나누는 사랑과 전하의 본심에 의한 우애가 일절 그에게 가려진 바가 되어서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있으니, 이는 곧 전하만을 무함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또한 선왕까지 아울러 무함하는 것이 됩니다.
아! 두 글자를 밝히지 않은 폐해로 유화(流禍)가 한결같이 이에 이르도록 망극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위예(違豫)라는 두 글자를 《자성편》에 기재하였으니, 대훈(大訓) 가운데에도 서로 발명(發明)하여 천하 만세로 하여금 당시의 사실이 이와 같고 역적들의 무망(誣罔)이 저와 같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변고(變故)가 있은 이래로 천망(天網)이 지나치게 소활해졌습니다. 비록 신축년·임인년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왕법에 의해 복주(伏誅)된 자는 단지 김일경·목호룡 등 몇 명의 역적뿐이었고, 그 나머지는 대부분 너그러운 법을 따라 조처했으므로, 간혹 상공(上公)의 품계를 그대로 차지하고 있는 자도 있으니, 오직 천토(天討)가 행해지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리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깊이 의리를 생각하여 속히 처분(處分)을 내리소서."
하였다. 임금이 열람하고 나서 말하기를,
"경이 아니면 이에 대해 말할 수 없다."
하니, 박필주가 말하기를,
"신의 한 가닥 고심(若心)은 신명(神明)에 질정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정자(程子)나 주자(朱子)가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것을 제일의 의리로 삼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민 봉조하(閔奉朝賀)도 또한 일찍이 수차(袖箚)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지금의 좌상인 송인명(宋寅明)과 정석삼(鄭錫三)이 이를 그르게 여겼었다. 무신년에 이르러 좌상이 비로소 깨닫고, ‘충언(忠言)이요 고심(若心)이라.’고 하면서, ‘정석삼이 생존해 있다면 또한 반드시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하였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나홍언(羅弘彦)의 책자는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고 뼛골이 써늘하다. 무신년의 화란은 이미 평정되었고 나홍언도 이미 죽었지만, 다시 나홍언 같은 자가 나오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하니, 박필주가 말하기를,
"무신년 이후 나홍언의 흉언(兇言)은 모두 유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흉언의 근본에 의거하여 환히 유시(諭示)해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수차(袖箚) 내용에서 논한 대훈(大訓)에 첨가하여 기입하는 일은 마땅히 상신(相臣)들과 다시 의논하겠다. 경이 실로 고심(若心)했지만 나도 또한 고심하고 있었다. 상하가 서로 의논하여 힘써 지당한 데로 귀결시비는 것이 또한 학문하는 방도인 것이다."
하고, 이어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오늘 경을 오게 한 것은 경에게 번거롭게 잗단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경이 정사당(政事堂)에 앉아 있은 뒤에야 세도(世道)가 올바르게 될 수 있다."
하고, 또 촉박하게 하문하기를,
"경이 한 번 개정(開政)하고 싶지 않은가?"
하였으나, 박필주가 재삼 사양하였다. 그래도 임금이 손을 놓으려 하지 않은 채 이에 명에 응하기를 면려한 다음 물러가게 하였다. 임금이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전송하게 하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시탄(柴炭)과 쌀을 실어보내게 하였다.

 

5월 25일 경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박필주(朴弼周)의 수차(袖箚)를 내어보인 다음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각기 소견을 진달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이 일은 이미 을사년095)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신도 그때 또한 참여했었습니다만 그 뒤 의돈이 쾌히 신장(伸張)되지 못하였습니다. 직질(職秩)이 곧 다시 전과 같이 된 것에 대해서는 혹 한 번이라도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엄한 하교가 있었기 때문에, 억누른 채 감히 발론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신이 이에 대해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차자(箚子) 내용의 근본은 윗 조항에 있다."
하였다. 【윗 조항은 성질(聖疾)을 숨기지 않아야 한다는 등의 말을 가리킨 것이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심유현(沈維賢)이 흉언을 만들어 낸 것은 이미 전후 역적들의 공초에서 드러났으니, 성무(聖誣)가 이제는 해명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선왕의 증후(症侯)를 이제와서 글에다 쓰는 것은 ‘어떨까’ 하는 데 관계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비록 해명한다고 하더라도 또 그가 이것을 구실의 자료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대훈(大訓)을 어제(御製)할 때 한 글자도 첨개(添改)해서는 안 된다는 하교가 있었던 것을 신도 또한 참여하여 들었으니, 이는 곤란합니다. 역적을 토죄(討罪)하는 데 이르러서는 신은 이의(異義)가 없습니다."
하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윗 조항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황송한 점이 있어 감히 논할 수 없습니다. 아랫 조항에 대해서는 죄가 실정에 맞지 않은 경우가 또한 간혹 있기도 하였습니다만, 대체로 영상과 뜻이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판(吏判)이 수차를 올릴 때 여러 신하들 가운데 참여하여 들은 사람이 있는가?"
하자, 우참찬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한두 명의 친우(親友)들은 참여하여 알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참여하여 알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하문하기를,
"친우는 누구인가?"
하므로 원경하가 말하기를,
"홍계희(洪啓禧)와 윤급(尹汲)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속으로 한참 동안 생각하고 나서 이르기를,
"이 일은 문득 대신이 미리 알고서 중지하도록 권하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
하고, 또 여러 신하들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마땅히 통렬히 말하겠다. 그때 자성(慈聖)께서 하교하시기를, ‘선왕의 골육(骨肉)으로는 오직 주상(主上)과 연잉(延礽)096)  이 있을 뿐이다.’ 하고, 이어 나의 이름을 써서 내렸으나 중관(中官)이 중간에서 이를 불살라 버리고 황형(皇兄)에게 고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성께서 직접 임어하신 후에야 비로소 황형의 허락을 얻었는데, 황형의 지극한 우애(友愛)가 아니면 자전께서도 또한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조태구(趙泰耉)가 느닷없이 불쑥 들어온 때를 당해서는 대궐 안이 모두 경동(驚動)하였었는데, 그 때 경묘(景廟)께서 만일 구애되거나 핍박하는 하교가 있었다면 내가 마땅히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것이 경묘의 지극한 인애(仁愛)가 아니겠는가?"
하고, 이어 오열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듣건대, 그때 경묘께서 종이와 붓을 찾았는데 중관(中官)이 저지하였으므로, 하교하려 했었으나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교(慈敎)가 매양 이를 통한스럽게 여겨 왔는데, 저들은 이에 대해 불만스러운 마음을 품고서 곧 자전께서는 나에게는 후하게 하고 경묘에게는 박하게 한다고 여겼다. 이천해(李天海)의 일도 또한 불만스럽게 여긴 데에서 나온 짓이었다. 차비관(差備官) 하윤원(河潤源)의 말을 들으면 곧, ‘이는 동조(東朝)께서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니, 그렇게 된 이유는 김일경(金一鏡)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성(慈聖)께서 매양 하교하시기를, ‘신축년·임인년의 일을 가지고 말하건대, 그들도 또한 나를 덕스럽게 여기고 있다.’하였다. 대개 이 부류들의 소위는 교문(敎文)뿐만 아니라 불령(不逞)한 마음이 뱃속에 가득 들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전후 역적들이 공초에서 이른바 이광좌(李光佐)가 경묘(景廟)에게는 불충(不忠)했지만 나에게는 충성을 했다고 한 것은 일관되게 전해 온 것이다. 이제 경들이 진달한 내용이 비록 옳기는 하지만 저들은 반드시 경들을 나에게는 충성을 다하였지만 경묘에게는 불충하였다고 할 것이다. 연전(年前)에 이미 하교했었는데도 경들이 오히려 깊이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내가 부득이 스스로 칭술(稱述)한 것이다. 그 가운데 이른바 갑진년097)  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 것은 내가 깊은 뜻이 있어서 한 말이다. 이제 대훈(大訓)의 내용에는 대체로 하나의 글자도 첨입(添入)할 수가 없으니, 따로 다른 글을 만든다면 혹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총재(冢宰)의 의견은 한쪽으로 치우쳤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사람이 어찌 한 가지 일도 착오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산인(山人)의 글은 세정(世情)에 익숙하지 못한 법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참찬이 좀전에 이름을 거론하여 아뢴 것은 매우 긴요한 것이 아니다. 총재가 어찌 그 두 사람의 말을 듣고서 이런 판별을 했겠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엄시(閹寺)와 홍수(紅袖)들이 무슨 전하를 증오할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효경(梟獍) 같은 무리들이 대내(大內)에 유언 비어를 퍼뜨려 의겁(疑㥘)을 야기시킨 것을 인연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저들이 나를 왕실(王室)에 불리한 사람이라고 했다고 한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무슨 죄가 있어 교동(喬桐)으로 간단 말이냐는 등등의 말이 도하(都下)에 성대하게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궁중도 또한 소요가 일어 들끓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무신년 변란의 장본(張本)이 된 것이다. 무신년의 변란이 처음 일어났을 때 궁중에 떠도는 유언 비어에, ‘국가가 장차 우리를 버리고 가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반드시 어육(角肉)이 될 것이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효장(孝章)이 이를 연유하여 경동(驚動)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이 많았었다."
하고, 이어 슬픔을 억제하면서 말하기를,
"신축년·임인년에 광혹(誑惑)하던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이다."
하였다.
또 여러 신하들에게 소회를 진달하라고 명하니, 형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오늘 전에 듣지 못했던 것을 더욱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무(聖誣)라는 두 글자에 대해서는 신이 항상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는데, 어찌 일찍이 성무에 대해서 말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천고의 사첩(史牒)에 어찌 주공(周公)을 무함한 것이 있었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유봉휘(柳鳳輝)는 진실로 잘못했는데도 전하께서 살려주신 것은 실로 성덕(聖德)의 일입니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이종성의 이 말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대신이 극력 토죄하지 않은 것을 개연(慨然)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이어 유봉휘의 죄를 극력 토죄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유봉휘의 일에 대해 풍릉(豐陵)098)  ·풍원(豐原)099)  의 의견도 모두 그러했는가?"
하였는데, 송인명이 말하기를,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 죄를 용서할 만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를 당하여 심단(沈檀)을 공격하여 제거하지 않았더라면 일대(一隊)의 남인(南人)들이 못하는 짓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국사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동궁(東宮)을 보호했다는 이야기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의 공로가 있습니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는 남인을 제거하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은 것이요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김일경의 상소와 이미 합세하였으니, 이것 때문에 용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유현(儒賢)이 수차(袖箚)를 올린 뒤이니 토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인심이 어찌 진정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신이 억장이 무너지는 것은 유봉휘가 진소하였을 적에 경묘(景廟)께서 만약 한 번이나마 옳게 여기는 전교를 내리셨다면, 전하께서 어느 지경에 처해 있었겠습니까? 지금 생각해도 창자가 썩는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만일 상교(上敎)의 윤허를 얻게 되었다면 김일경의 무리가 무슨 짓인들 못했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것이 신이 이정소(李廷熽)를 종사(宗社)에 공이 있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유봉휘의 일에 대해서는 속히 처분을 내리셔야 합니다. 대훈(大訓)에 첨입(添入)하는 한 절차에 이르러서는 경솔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원경하는 말하기를,
"대신이 개연하게 여긴다고 말하였는데, 유봉휘의 일을 어찌 초야(草野)의 사람과 상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대훈은 해와 달처럼 높이 게시(揭示)하였으니 동요시킬 수 없습니다만, 토죄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엄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춘방일기(春坊日記)》를 들여오게 하여 유봉휘의 상소 내용을 열람하고 나서 여러 신하들에게 죄줄 수 있는 단서를 조목조목 진달하라고 명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을 부르고 부르지 않는 것은 곧 작은 일입니다. 어찌하여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매양 이 상소를 보면 분기(憤氣)가 석 자나 끓어 오릅니다. 이 상소는 실로 여러 역적들이 창도한 것입니다."
하고, 원경하는 말하기를,
"‘인신의 예가 없다[無人臣禮]’는 네 글자는 그 출처가 어떠합니까? 이를 말한 것이 이미 역적입니다."
하였다. 사간 윤지태(尹志泰)의 대답은 애매 모호하였고, 응교 송창명(宋昌明)의 대답은 사실을 상세히 모른다고 하였고, 승지 이연덕(李延德)은 역적의 토죄를 엄히 하지 않을 수 없지만 혹 중도(中道)에 지나치게 될 경우에는 안타까운 노릇이 된다고 답하였는데, 원경하의 면척(面斥)으로 인하여 송창명·이연덕은 아울러 파직하였다.

 

형조의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날씨가 너무 무덥기 때문이었다.

 

승지 조명리(趙明履)가 아뢰기를,
"산림(山林)의 유현이 이판(吏判)으로 온 것은 60년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모든 정패(政牌)에 대해 만일 사진(仕進)하지 않을 경우 준례에 따라 추고(推考)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마땅히 이에 대한 품정(稟定)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유현을 대우하는 도리는 대신과 같이 해야 하니, 준례에 따라 전지(傳旨)를 받드는 것은 예우(禮遇)하는 뜻이 아니다. 비록 패초(牌招)를 어기더라도 추고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또 사관(史官)을 보내어 형조 참판 심육(沈錥)에게 돈유(敦諭)하여 함께 올라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조명리가 말하기를,
"집의 윤봉구(尹鳳九)가 엄한 하교를 받은 것이 이제 3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아무 하교가 없었습니다. 바야흐로 산림(山林)의 유현을 예우하는 때를 당하였으므로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자, 조명리가 말하기를,
"윤봉구가 마침 상소한 것이 이언세(李彦世)의 상소와 선후하여 등철되었으므로, 전하께서 유도(誘導)한 것인가 의심하여, ‘진선(進善)은 참으로 선하지 못하다’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말이 지나쳤다."
하였다.

 

엄우(嚴瑀)를 헌납으로, 박첨(朴)을 장령으로, 이중조(李重祚)·남혜로(南惠老)를 지평으로, 조명정(趙明鼎)을 교리로, 조재민(趙載敏)을 수찬으로 삼았다.

 

5월 26일 신유

지평 이진의(李鎭儀)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도승지 홍상한(洪象漢)은 지금 막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서도 서둘러 무릅쓰고 나아갔으니, 염방(廉防)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마땅히 견척(譴斥)을 가해야 합니다. 위수(衛率) 심인지(沈麟之), 부수(副率) 임사경(任思敬)은 세수(世讐)임을 생각하지 않고 같은 관사(官司)에서 업무를 보고 있으니, 마땅히 간파(刊罷)하는 벌을 시행해야 압니다. 감찰 권국형(權國衡)은 흔루(釁累)가 지극히 중하며 형조 정랑 이우제(李宇濟)는 혼미하고 용렬한데다 무식하며, 제용 봉사(濟用奉事) 유채(柳綵)는 망령되고 용렬하며 비루하니, 마땅히 간태(刊汰)시키도록 명해야 합니다. 죄인 이만강(李萬江)이 멋대로 섬을 떠나 서울을 왕래한 일은 매우 무엄한 짓이니, 의당 기포(譏捕)하여 엄한 형신을 가한 다음 압송(押送)하게 하소서."
하고, 또 태묘(太廟)의 축문(祝文)에 숭정(崇禎)의 연호(年號)를 쓸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우제, 유채는 태거(汰去)하고 이만강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말단의 일은 이미 깊이 헤아려 보았다."
하였다.

 

5월 27일 임술

어떤 별이 방성(房星)의 아래로 흘러갔다.

 

이종백(李宗白)을 대사헌으로, 이도겸(李道謙)을 대사간으로, 조윤제(曹允濟)를 필선으로, 성범석(成範錫)을 보덕(輔德)으로, 박수(朴璲)를 헌납으로, 임박(任璞)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엊그제 진달한 것은 곧 수십 년 동안 가슴속에 두고 깊이 생각하여 온 데에 연유하여 나온 것으로 반드시 이렇게 된 뒤에야 국무(國誣)가 환히 씻겨져서 뒤로 환란이 없기를 보장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우리 임금을 위한 구구한 혈성(血誠)은 저 푸른 하늘에 질정할 수 있습니다. 대개 《자성편(自省篇)》은 포함하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 광범위하지만, 대훈(大訓)은 다른 일은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신축년100)  ·임인년101)  의 한 가지 안건(案件)에 대해서만 말하였으니, 그 사체(事體)에 있어 저것과 견주어 보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제 마땅히 토역(討逆)은 엄히 해야 하는 것이므로 다시 첨사하여 기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외면상으로 살펴보면 그 말이 진실로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위의 두 가지 일은 똑같은 하나의 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을사년102)  ·무신년103)   사이를 당하여 주토(誅討)한 것이 또한 일찍이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전후 계속해서 일어난 역적이 얼마인지 모를 정도였는데, 이는 유언 비어에 광혹(誑惑)한 까닭에 말미암는 것입니다. 진실로 역적이 아니라면 모르겠으나, 이미 역적이라면 어찌하여 수십 년 동안 방치한 채 그 죄를 바루지 않고 있다가 오늘을 기다려 비로소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축년·임인년 사이에 네 정승이 조태구(趙泰耉)의 무리와 함께 상공(上公)의 직질(職秩)에 있었는데, 이러한 사리(事理)는 전에는 듣지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신의 차자에서 진달한 바에 의거하여 간략히 몇 마디 말을 대훈(大訓)에 첨가하여 기재한다면, 국무(國誣)가 통쾌히 씻겨질 뿐만 아니라, 하나는 충신이고 하나는 역적으로 각기 그 명분이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원경하가 연주(筵奏) 때문에 인혐(引嫌)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돈유(敦諭)하고 이어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듣건대, 총재(冢宰)가 진소(陳疏)하여 인피(引避)하였는데, 자못 돌아갈 뜻이 있다고 하니, 신은 놀랍고 개탄스럽고 애석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유현은 세록신(世祿臣)으로서 애당초 세상을 과감히 잊고 독선(獨善)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고, 또 근래 전하께서 천고에 없던 지성을 다하여 돈소(敦召)한 것을 힘입어 가까스로 서울로 초치했는데, 겨우 한 번 주대(奏對)하고 문득 말을 쓰지 않아 마음이 불안해서 갑자기 돌아가려 한다면 사림(士林)들의 차탄과 결망(缺望)은 진실로 말할 것도 없고, 성상께서 유현을 숭상하고 소중히 여기는 도리에 있어 어찌 더욱 불만족스러운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중신(重臣)의 말이 번다하고 추솔한 것은 바로 그의 본색(本色)이므로, 그가 말한 것에 깊은 뜻이 있다고 기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어찌 족히 거취(去就)에 대해 인혐할 단서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수차(袖箚)로 진달한 내용은 관계가 어떠한 것인데, 지금껏 분명한 전지(傳旨)를 받들지 못하는 것입니까? 지금은 의리가 중하고 혐의의 단서는 가벼운데, 더욱 어찌 경솔하게 스스로 인퇴(引退)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불러 입대(入對)하게 하고 반복하여 유석(諭釋)시키고 성의를 다하여 면류(勉留)하소서. 그리고 신 등에게도 함께 입시하여 강확(講確)하도록 명하소서. 그 소청에 쾌히 윤허하신다면 유현도 또한 반드시 감격하여 우러러 받들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고 이판(吏判)으로 하여금 함께 입시하게 하였다. 이날 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소견(召見)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어제문(御製文)을 읽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글을 반행(頒行)하면 충분히 효경(梟獍)과 같은 마음을 타파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유봉휘의 죄는 무신년 역적들의 공초에서 여지없이 다 드러났으며, 《감란록(勘亂錄)》을 또한 이미 반포하였으니, 이제 밝혀지지 않은 단서가 없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다. 박필주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천하의 환란은 소홀히 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일의 근본은 전혀 성질(聖疾)을 숨긴 데 연유된 것이니, 단지 《자성록(自省錄)》에만 언급하고 만다면 끝내 고단(孤單)한 것이 되고 맙니다. 반드시 대훈(大訓)에 첨가하여 기입한 후에야 의리가 밝혀질 수 있기 때문에 신의 차자에서 언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별도로 문자(文字)를 만드는 것도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훈은 결코 동요시킬 수 없다."
하였다. 박필주가 말하기를,
"따로 문자를 만들 경우 어찌 반드시 대훈에 첨가하여 기입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갑진년104)  의 서계(書啓)에는 5인이었고, 그 뒤 무신년105)  에는 3인이었으며 이번의 수차(袖箚)에도 또한 3인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 하나는 유봉휘인데, 나머지 둘은 누구인가?"
하자, 김재로가 말하기를,
"조태구(趙泰耉)·이광좌(李光佐)입니다. 조태구는 멀리 귀양 보내라는 계사가 있었는데도 이를 무릅쓰고 입궐(入闕)하였으니, 어찌 방자하지 않습니까? 이광좌는 그의 복상(卜相)106)  이 조태구의 손에서 나왔는데, 그가 김일경(金一鏡)을 총애하여 발탁해서 장임(將任)에 제수했으니, 그 죄가 더없이 큽니다."
하고, 박필주는 말하기를,
"무신년의 일을 순치시킨 것이 누구입니까? 환란을 초치시킨 죄를 어떻게 토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재로가 또 극력 유봉휘에 대한 처분을 청하였고, 박필주도 누누이 진달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조용히 상의하여 지당한 데로 귀결시키도록 힘쓰겠다."
하였다.

 

5월 28일 계해

관서(關西)의 암행 어사 구윤명(具允明)이 복명(復命)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책문(柵門)을 물리는 일과 등등기(鄧鄧磯)107)  의 일 때문에 구윤명을 보내어 탐문하게 했는데, 구윤명이 사정을 알아 가지고 돌아오지 못하였다.

 

해조(該曹)에 명하여 삭주(朔州)의 전 참봉 최진첨(崔震瞻)과 곽산(郭山) 사람 김익필(金益弼)을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최진첨은 오세(五世)가 한 집에 같이 살고 있고, 김익필은 함께 밥지어 먹는 식구가 많은데도 돈목(敦睦)하게 지내기 때문인데, 관서 암행 어사 구윤명의 포주(褒奏)로 인하여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5월 29일 갑자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새 총재(冢宰)가 대훈(大訓)에 성질(聖疾)에 관한 일을 첨가하여 기재할 것을 청했다고 합니다. 신은 이 일에 대해 참으로 다시 추후에 거론하여 우리 전하의 효우(孝友)의 지극한 정을 손상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대훈은 갑진년108)  ·을사년109)  의 역적을 아울러 논한 것이어서 사체가 《감란록(勘亂錄)》과는 다른데, 기필코 태묘(太廟)에 고한 대훈을 첨개(添改)하려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대개 대훈이 미비하여 불완전한 글이라고 여긴 때문이라면, 그것이 가한 것입니까? 대훈의 엄중함이 이와 같은데도 이제 이미 첨개하기를 청한 사람이 있으니, 반드시 산삭(刪削)시킬 것을 청하는 자가 있게 될 것이고, 산삭을 청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또 장차 물이나 불에 던져버리는 것을 전에 성상께서 우려하신 것과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비록 입시(入侍)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유봉휘와 조태구를 논하는 것에 대해 어찌 좌상(左相)과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축년110)   초기에 조태구가 동궁(東宮)의 보호를 건백(建白)하여 기사년111)   사람들의 의논을 저지시켰으므로 국가가 힘입은 것이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공에 의거하여 속죄(贖罪)시키자는 이야기가 실로 윤당(允當)한 것이니, 또한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상세히 살펴 헤아려 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입시하여 나의 면유(面諭)를 들으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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