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4권, 영조 22년 1746년 6월

싸라리리 2025. 9. 2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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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을축

이조 판서 박필주(朴弼周)가 우상의 상소로 인하여 금오(金吾)에 나아가 명을 기다리자, 임금이 대명(待命)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나, 박필주가 이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부제학 이덕중(李德重)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수년 이래로 성지(聖志)를 분발하여 개연(慨然)히 지치(至治)에 뜻을 두고 보좌해줄 수 있는 신하를 얻을 것을 생각하여 이에 총재(冢宰)의 직책을 산림(山林)에서 덕을 배양한 선비에게 제수하고, 경례(敬禮)를 극진히 하여 지성으로 돈소(敦召)한 끝에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번연(幡然)히 고쳐 조정으로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의리를 밝히고 명분을 바루려는 의논을 진달하였으니, 이는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된 것이고, 또한 난적(亂賊)들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알게 만든 것입니다. 현자(賢者)의 공효(功效)가 이미 스스로 하찮은 것이 아닌데도 불행히 대신의 소장이 한 번 나오자 유현(儒賢)이 창황이 대명(待命)함으로써 전하께서 간신히 애써 불러온 뜻이 장차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대저 유현이 대훈(大訓)에 첨보(添補)하기를 청한 것은 단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깊고도 원대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신의 말에도 또한 대훈과 《자성편》은 서로 발명(發明)한 것이라고 했고, 또 ‘《감란록》에 첨가하여 기재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분명한 의리를 대훈에 첨입시키기를 청한 것이 무슨 불가할 것이 있기에 도리어 지나치게 의심하여 극력, 공격하는 것이 일에 의거하여 일을 논한다는 뜻에서 벗어날 뿐만이 아니었으니, 신은 실로 의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조태구의 일에 이르러서는 대신들의 의견이 어쩌면 그리도 한결같이 잘못될 수 있단 말입니까? 대저, ‘혐의를 무릅쓰다[冒嫌]’라는 두 글자는 실로 성궁(聖躬)을 위태롭게 하기 위해 모의한 효시(嚆矢)이고, 북문(北門)으로 몰래 들어간 것은 또 흉측한 환관(宦官)들과 체결한 분명한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무옥(誣獄)을 꾸며내고 성궁에게 위핍(危逼)을 가하여 하지 않는 짓이 없었으니, 그의 죄상을 논하면 더없이 흉참(凶慘)스럽습니다. 국가에서 역적을 토죄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역적을 토죄하면서 조태구를 토죄하지 않는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대신이 공에 의거하여 속죄시켜야 한다고 말을 했습니다만, 죄가 악역(惡逆)을 범한 자에게 어찌 공에 의거하여 속죄시키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른바 동궁을 보호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일이 동궁에게 관계된 것을 묻지 말라고 한 것과 같은 의사(意思)인데, 이를 공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역적 목호룡이 무고(誣告)할 때를 당하여 먼저 위로 동궁을 무함한 죄를 가지고 즉시 정법(正法)하였다면 장차 ‘묻지 말라’고 한 말은 할 것도 없게 되는 것이고, 또 장차 동궁을 보호하라는 말도 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지 않고서 이에 묻지 말라고 했다느니 보호하라고 했다느니 하는 등등의 말을 가지고 밖으로 꾸며 그가 화응한 자취를 숨겼는가 하면, 이제 또 이것을 공이 있다고 하면서 그가 은밀히 모해(謀害)한 역절(逆節)을 숨기려 하니, 신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대신이 그의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었다는 것으로 가증스럽게 여기지 않고, 이에 도리어 교외(郊外)에서 죽은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으니, 어쩌면 그렇게 경중의 소재를 잃는 것입니까? 아! 대신이 전하께 지(知)를 받은 것이 과연 어떠했습니까? 이제 죄악을 저지른 것이 조태구와 같은 사람에 대해 목욕하고 토죄할 것을 청하는 의리112)  는 생각하지 않고서 이렇게 신구(伸救)하는 의논을 주장하니, 신은 삼가 통분스럽게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상도에 이반되는 논의에 동요되지 마시고 악을 징토하는 법전을 더욱 엄하게 하여 유현(儒賢)이 지키고 있는 의리를 쾌히 신장(伸長)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어 다시 지성으로 돈유(敦諭)하여 기어이 떠나는 것을 만류시킴으로써 위로는 대우가 처음만 못하다는 탄식이 없게 하시고, 아래로는 사림(士林)들이 긍식(矜式)이 있게 하셨으면 하는 바람을 위로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소주(疏奏)한 것을 살피지 않았다.

 

범월(犯越)한 죄인 조시연(趙時延) 등 7인을 효시(梟示)하라고 명하였는데, 평안 감사의 장계(狀啓)에 의한 것이다.

 

신만(申晩)을 대사성으로, 조상명(趙尙命)을 대사간으로, 이형만(李衡萬)을 문학으로, 김상철(金尙喆)을 교리로, 윤동준(尹東浚)을 응교로, 이연덕(李延德)을 승지로, 이유신(李裕身)은 동래 부사로, 정기안(鄭基安)을 지평으로 삼았다.

 

6월 2일 병인

임금이 수서(手書)를 내리고 승지를 보내어 이조 판서 박필주(朴弼周)에게 돈유(敦諭)하고 함께 들어오게 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갔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했는데, 임금에게 안질(眼疾)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임금이 직접 시의 위충지(示意慰忠志) 두 편을 지었는데 이는 이조 판서 박필주(朴弼周)의 수차(袖箚)로 인하여 대훈(大訓)의 미진한 내용을 추명(推明)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었다. 제조 원경하(元景夏)에게 이르기를,
"이 글 두 편은 대훈(大訓)·《자성편(自省篇)》과 더불어 서로 표리(表裏)가 될 수 있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에게 불충(不忠)한 죄가 있었는데, 이제 우러러 진달하겠습니다. 신이 젊었을 적에 신축년113)  ·임인년114)  의 변괴를 보고 항상 통분스러워하는 마음을 품고 시골에 거처하고 있던 3, 4년 동안 차분한 마음으로 의리를 궁구하여 보았습니다. 을사년115)   이후 국가에서 내린 처분(處分) 가운데 잘못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아랫사람들은 흉역의 토죄에만 한갓 급급한 나머지 매양 의리를 밝히는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였습니다. 민 봉조하(閔奉朝賀)가 올린 수차도 또한 다 선한 뜻은 아니었으므로, 신이 일찍이 우러러 진달하려 했었습니다. 삼가 당(唐)나라 때 서천 절도사(西川節度使) 위고(韋皐)가 태자(太子)에게 국정을 살피게 하라고 청하면서 올린 소장에서 느낀 바가 있어서 신이 전하를 위하여 읽어 드리겠습니다."
하고, 이어 소매 속에서 위고의 상소를 꺼내어 독주(讀奏)하였다. 이어 말하기를,
"경묘(景廟)께서 미령하신 때를 당하여 저사(儲嗣)를 세워 대신 다스리게 하기를 청한 것은 의리가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경묘의 미령하신 환후(患候)가 평안하게 회복되었다면 전하께서 동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당연히 위고의 상소처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축년·임인년의 무리가 조정을 탁란시킨 죄에 대해서는 진실로 이루다 벨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을사년의 여러 신하들 또한 의리를 먼저 밝히지 못하고 단지 토역(討逆)만을 급선무로 삼은 것에 대해 실로 식자(識者)들이 개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민 봉조하의 수차와 함은 국구(咸恩國舅)의 상소는 모두 의리의 핵심을 알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국구가 어떻게 조정의 일에 간여할 수 있겠으며 대신 또한 어떻게 국구와 함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의 이 어제(御製)는 단지 엄정(嚴正)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삼아야 하는 것이며, 위충지(慰忠志)라는 세 글자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누구를 지적한 것입니까? 신이 일찍이 듣건대,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이 건저(建儲)할 때를 당하여 사기(事機)에 있어 지극히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만, 이건명이 정의에 의거하여 굽히지 않고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아들이고 금왕(今王)의 아우이니, 만약 책립(冊立)하지 못한다면 내가 마땅히 머리를 풀어헤치고 산 속으로 들어가 선왕을 만날 것이다.’ 하고, 심지어 선유봉(仙遊峯) 아래로 가서 들어누우려고 하기에 이르렀었습니다. 만일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라가 장차 무엇을 의지하겠습니까? 신축년·임인년의 역적들은 주문(奏文) 일 절을 가지고 허구의 사실을 날조하여 살해할 죄안(罪案)을 만들었는데, 그가 가장 참혹한 화(禍)를 당한 것은 실로 주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정미년116)  에 건저(建儲)를 주장한 대신과 함께 추탈(追奪)하는 율(律)을 받았으니, 전하께서 어떻게 차마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민공의 지성이 이와 같은 것을 내가 또한 미처 몰랐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이 대훈(大訓)을 강정(講定)할 적에 말의(末議)에도 참석하지 못했었는데, 신은 항상 스스로 생각하기를, ‘지위가 높은 사람은 어찌하여 유독 신설(伸雪)되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거론하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낮은 사람은 누구인가?"
하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백망(白望)과 장세상(長世相)입니다. 명(明)나라 때 동림당(東林黨)117)  의 군자(君子)들이 어찌 신축년·임인년의 여러 신하들보다 못하겠습니까? 그뒤 동림의 군자들을 신원(伸冤)시킬 때 왕안(王安)118)  을 제일 먼저 하였으니, 여기에서 의리를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6월 3일 정묘

임금이 시의 위충지(示意慰忠志)를 고쳐 시의 수후세(示意垂後世)로 만들고, 이어 하교하기를,
"나의 이 글은 또한 황형(皇兄)의 덕을 빛나게 만들 것이다"
하니, 참찬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시의 수후세로 제목을 삼았으니, 경묘(景廟)께서 무함받은 한 가지 일과 조여우(趙如愚)의 일, 남태량(南泰良)이 진달한 주자(朱子)의 이야기를 모두 원증(援證)하여 토역(討逆)을 엄히 하는 것으로 주안점을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자교(慈敎)의 본의는 경묘(景廟)를 위하고 종사(宗社)를 위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무신년119)  의 흉도(凶徒)에 대해서는 자교가 나를 위한 것이요, 황형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변무(辨誣)하려 한다면 이는 당연히 자성(慈聖)을 위하고 경묘를 위하여야 하는 것이다. 어찌 나만을 위하여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총재(冢宰)의 수차(袖箚)를 살펴보건대, 감히 선왕의 성질(聖疾)을 대훈(大訓)에 첨입할 것을 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대저 대훈이란 전후의 역적에 대해 감정(勘定)한 만고의 철안(鐵案)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질을 이러한 대훈에 첨입하자고 하니,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대훈이 완성되었을 적에 이미 태묘(太廟)에 고하였으니, 만약 첨입한다면 또 다시 태묘에 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태묘에 고할 즈음에 어찌 감히 할 수 없어서 크게 불안한 지경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대신의 상소에서 이른바, ‘차마 추후 거론하여 전하의 효우(孝友)하는 지극한 정을 손상시킬 수 없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오직 우리 성상께서는 효제(孝悌)를 하늘에서 타고나셨으므로 굳게 지켜 동요하지 않고 의리의 제방(隄防)을 다시 더욱 엄정하게 하였기 때문에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흠탄하면서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부제학의 상소가 또 나와서 성질을 첨입하기를 청한 의논을 극구 숭장(嵩奬)하고 이에 도리어 나라를 위하여 혈성(血誠)을 기울인 대신을 비난하면서 공박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전하의 정신(廷臣)들은 어찌하여 한결같이 의리에 어두운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엄한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다.

 

지중추(知中樞) 윤양래(尹陽來)가 진신(搢紳) 60여 인을 거느리고 연명(聯名)으로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신축년120)  ·임인년121)  의 화(禍)와 무신년122)  의 변(變)은 진실로 천고의 사적(史籍)에 없던 것이었는데, 주토(誅討)한 사람은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과 이인좌(李麟佐)·박필몽(朴弼夢) 등 지엽적인 자들에 그쳤을 뿐입니다. 무함하여 핍박하고 위태롭게 하고 선동한 근본이 되는 자들에 대해서는 왕법(王法)이 행해지지 않았으므로, 관직과 품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하찮은 추얼(醜孼)들에게만 대략 방향(邦刑)을 행했을 뿐 국무(國誣)와 군수(君讐)는 의연(依然)히 전대로 있으니, 아! 신 등의 죄를 이루 주책(誅責)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근래에 유현(儒賢)이 조정에 나왔는데, 그가 지켜온 의리는 오직 성무(聖誣)를 분변하는 데 있고, 분변한 것을 궁구하여 보면 또 징토(懲討)를 엄히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무릇 우리 전하의 신하 된 사람이면 누군들 구연(瞿然)히 송구스러워하면서 소리를 함께 하여 토죄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이 한 마디 소중한 말을 힘입어 성심(聖心)에 돌이켜 따르실 기미가 있고 대론(大論)이 신리(伸理)될 기대가 있게 되었으니, 동토(東土) 수천 리가 오랑캐와 금수의 지경에 돌아감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아! 상신(相臣)이 유독 무슨 마음에서인지 느닷없이 한 장의 소장을 올렸는데, 지칭하고 있는 의도가 지극히 심각하여 흉역은 용호(容護)할 수 있고 의리는 각승(角勝)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유현으로 하여금 창황히 서울을 떠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수십 년 동안 신리되지 못했던 의리가 밝아질 뻔했다가 도로 회색(晦塞)되게 했으니, 신 등은 이에 대해 경악과 통분을 느껴 곧바로 죽고만 싶습니다.
아! 김일경·목호룡, 이인좌·박필몽이 어떠한 흉역입니까? 그런데도 신 등이 오히려 지엽적인 자들이라고 한 것은 참으로 서로 창도하고 호응하여 서로 수응(酬應)함에 있어서 이것과 저것이 서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 근본이 되는 것은 저절로 귀착되는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저 혐의를 무릅썼다는 말을 만들고 북문(北門)의 계교를 부린 자가 누구이며, 건저(建儲)하자는 의논에 유감을 품고 호칭(號稱)을 정할 때 이를 동요시키려 한 자가 누구입니까? 대리(代理)하게 하는 것을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라 하고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추장(推奬)하면서 성질(聖疾)을 숨김으로써 심유현(沈維賢)·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이 역적을 모의할 여지를 열어주고 남태징(南泰徵)·이사성(李思晟) 등의 흉역을 발탁한 자가 누구입니까? 문생 국로(門生國老)123)  란 말에 이르러서는 은연중 김일경의 뒤를 맡아 주는 것이 되었으며, 3년 동안 참혹하게 옥사(獄事)를 다스린 것이 결국 목호룡(睦虎龍)의 와주(窩主)가 되고 말았는데 이런 짓을 한 자가 근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이 무신년에 복주(伏誅)된 역적들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말로 감히 역적이라고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만, 유독 이 근본이 되는 역적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혈당(血黨)들만 방자하게 영호(營護)하는 말을 할 뿐만 아니라 비록 스스로 한적(漢賊)124)  의 분의를 조금 알고 있는 사람도 또한 스스로 역적을 비호하는 데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므로, 국가에서 이들에 대해 대체로 한결같이 법으로 다스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무신년의 역적들에 대해서도 본말(本末)을 어긋나게 하는 결과를 순치하였기 때문에 의리가 회색(晦塞)되었는데, 저 상신(相臣)이 상소하여 감히 조태구(趙泰耉)를 신구(伸救)한 것도 이 때문인 것입니다. 아! 양옥(梁獄)125)  의 일을 끌어댄 말은 실로 음참(陰慘)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한쪽을 저지시켜 밀어내고 권력(權力)을 쟁취하려는 데 그 의도가 있었는데도 그를 가리켜 공이 있다고 하니, 진실로 또한 이상합니다. 역적은 천하의 대악(大惡)이므로, 설령 참으로 큰 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그것으로 가릴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이른바 공이라고 한 것은 공으로 삼을 바가 아닙니다. 양옥에 관한 한 가지 일은 참으로 역적이 되는 것인데, 저 상신(相臣)은 도리어 이를 보호한 공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아! 그 마음을 알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유현이 한 번 나와서 무함을 토죄하는 것을 제일의 의리로 삼았기 때문에, 무릇 흉당(凶黨)의 입장이 된 자들이 미워하며 원한을 품고서 기필코 공격하여 제거하려고 한 것입니다. 상신(相臣)에게 조금이라도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있었다면 당연히 유현을 부호(扶護)하여 오직 힘써 하지 못할까 염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서로 관계가 되지 않는 말을 인용하여 상하를 위협하면서 대론(大論)을 저지시킬 계교를 획책하고 있으니, 그 누가 망극한 은혜를 받은 상신(相臣)이 차마 흉적을 위하여 전하를 저버린 것이 여기에 이를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 등은 실로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러 역적들의 죄악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전후 합사(合辭)로 아뢴 것이 있으므로 문안(文案)에서 상고할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를 가져다가 상세히 열람하신 다음 쾌히 전형(典刑)을 바룸으로써 여정(輿情)의 분노를 풀어주소서. 신 등이 소장을 만들어 장차 올리려 할 즈음에 삼가 들리는 바에 의하면 박문수(朴文秀)가 하나의 소장을 올려 대론을 저지시켰는데, 상신의 상소에 견주어보면 더한 점이 있다고 합니다. 아! 저 상신의 상소가 무엄한 것도 이미 극도로 놀라운 것이었는데, 박문수가 또 이를 이어 일어났으니, 참으로 길을 가는 행인(行人)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흉역을 위하여 편들고 토복(討復)하자는 의논을 원수처럼 여기는 것이 그의 기량(伎倆)이지만,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엄한 처분을 내려 난적들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알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소를 봉입(捧入)하자, 임금이 잇따라 엄한 하교를 내렸다.

 

이조 판서 박필주(朴弼周)가 박문수(朴文秀)의 상소 때문에 숭례문(崇禮門) 밖에서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돈유(敦諭)하였다.

 

6월 4일 무진

하교하기를,
"영성(靈城)과 진신소(搢紳疏)에 관계된 사람들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조처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른바 진신소라는 것은 이에 신축년126)   칠적(七賊)에 대해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 그 이외에는 들은 적이 없다. 내가 견문이 넓지 못하여 그런 것인가? 정원에서는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청대하니,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인견하였다. 이조 판서 박필주(朴弼周)도 입시했는데, 대개 잇따라 돈유(敦諭)를 내려 대가(大駕)가 임어하겠다는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총재(冢宰)가 대론(大論)을 세웠는데, 신의 상소가 마치 공격하는 것 같은 점이 있었기 때문에 시의(時議)가 불울(拂鬱)해 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상께서 어찌 지나치게 성색(聲色)에 드러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도(世道)가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때에 이 싸움을 중지시키지 않는다면 한쪽은 유현의 편이 되고 한쪽은 대신의 편이 될 것이다. 따라서 노론(老論)은 조현명이 이 사단을 빚어냈다고 하고 소론(少論)은 총재가 이 사단을 빚어냈다고 하고, 인하여 피차의 편장(偏將)이 된다면 어찌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박필주가 말하기를,
"신이 변변치 못한 탓으로 우연히 은수(恩數)를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미 명을 받들고 나서 손을 쓴 것은 오직 성상을 위하여 변무(辨誣)하는 데 있었습니다. 우상(右相)이 비록 스스로 이에 대해 말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차마 저지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조현명이 말하기를,
"무엇을 가지고 저지시켰다고 하는가?"
하자, 박필주가 말하기를,
"선왕(先王)에게 질병이 있었다는 것이 성덕(聖德)에 무슨 해가 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기필코 숨기려 하니, 그 마음의 소재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신이 성질(聖疾)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성질을 숨긴 자들의 죄를 드러내어 흉언(凶言)의 근본을 제거함으로써 성덕(聖德)을 환히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은 이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한 마디도 언급한 것이 없이, ‘첨가하여 기재하려 한다.[添載]’는 두 글자를 신의 죄안(罪案)으로 삼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니, 조현명이 변쟁(辨爭)하려 하였다.
박필주가 말하기를,
"성상 앞에서 이렇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니, 조현명이 드디어 중지하였다. 박필주가 말하기를,
"대훈(大訓)은 사체가 진실로 중차대한 것입니다만, 신이 말하려 하는 것은 곧 성무(聖誣)에 대한 변명인데, 어떻게 이것을 신의 죄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송(宋)나라의 신하인 사마광(司馬光)의 문집(文集)에 보면 그가 영종(英宗)의 증상(症狀)에 대해 말한 것 가운데 가리지 않고서 한 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이것 때문에 조금이나마 벌을 가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경전(經傳)의 사체는 진실로 중합니다만, 뒷사람이 그래도 그에 대해 의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이 대훈(大訓)또한 털끝만큼도 미진한 점이 없으리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성상께서 이미 따로 문자(文字)를 찬술하셨으니 또 반드시 대훈에 첨입시켜야만 된다는 이유가 뭐 있습니까? 일이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는데도 계속 이의를 제기하고 있으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신이 우상(右相)과 이미 상의하여 박문수(朴文秀)에게 죄를 주라고 청하려 했었습니다만, 아직 차자(箚孑)를 진달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박필주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이 일에 대해 단지 의리에 대한 시비(是非)만 논하면 됩니다. 그리고 사람을 견주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대등한 무리에다 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진신(搢紳)들의 연장(聯章)을 어떻게 칠적(七賦)의 거조에 견줄 수 있습니까?"
하니, 임금의 마음이 조금 풀려서 전일의 전교를 가져오게 한 다음 어필(御筆)로 아랫 부분의 18자를 지웠다. 그리고 진신의 소두(疏頭)와 박문수는 단지 삭직(削職)시키라고만 명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게 하였다. 이어 박필주에게 머물러 있으라고 면유(勉諭)하니, 박필주가 정적(情迹)이 편안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끝내 명에 응하지 않았다.

 

6월 5일 기사

고(故)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고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이명(李頤命), 고 우의정 조태채(趙泰采)에게 사제(賜祭)하라고 명하였는데, 지경연 원경하(元景夏)의 말을 따른 것이다.

 

진신(搢紳)들의 연장(聯章)과 태학(太學)의 유소(儒疏)를 금하도록 명하였는데, 대개 시끄러운 단서를 종식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6월 6일 경오

형조 참판 심육(沈錥)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6월 8일 임신

이조 판서 박필주(朴弼周)가 진소하여 돌아가겠다고 고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라의 대사(大事)는 의당 한결같이 의리를 따라야 하는 것인데, 지금 중신(重臣)의 상소는 사나운 기운으로 패려한 말을 하면서 죄를 찾아내는 데 뜻을 두어 위협하고 겁박하는 것이 막심합니다. 그리고 신은 대신의 말에 대해 또한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대신이 자신에 대해서는 혹 무지하여 망령된 짓을 했다고 하기도 하고 혹 잘하지 못했다고 하기도 하는데, 박문수에 대해서는, ‘박문수의 일은 나로서는 알 바가 아니다.’ 하기도 하고, 또, ‘박문수는 참으로 괴이하다.’고 하기도 합니다. 신은 진실로 믿어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어떤 이는 말하기를, ‘대신의 상소와 박문수의 상소는 단지 심천(深淺)의 차이만 있을 뿐 실상은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고 하므로, 신은 억측이라고 공척(攻斥)하였습니다만 혹 조금이나마 근사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지위가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지척인 임금 앞에서 이런 작은 일을 가지고 저렇게 억지로 꾸며서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속임을 면하지 못하는 것인데, 대신이 어찌 이런 짓을 하는 것입니까? 신은 이에 대해 또 한 가지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대신의 형인 고(故)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졸서(卒逝)하기 하루 전에 불충(不忠)하고 불성(不誠)했다고 자책(自責)하는 소장을 올렸는데, 신은 진실로 그것이 무슨 일 때문인지를 몰랐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가 정승이 된 지 수년 동안 매양 임금의 무함을 변백(辨白)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임종(臨終) 때의 말이 이에 이른 것이다.’ 했는데, 이는 진실로 반드시 그러리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과연 그러하였다면, 나머지 아들들보다는 매우 훌륭한 것입니다. 지금 대신의 주의(主意)가 그와 같지 않은 것이 애석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돈유(敦諭)하였다.

 

장령 윤택후(尹澤厚)가 상소하여 세 가지 계책을 진달했는데, 첫째는 도성(都城)을 수축(修築)하는 일이고, 둘째는 강변(江邊)의 창고를 성내(城內)로 옮기는 일이며, 셋째는 돈을 주조하여 곡식을 사들이는 일에 관한 것이었다.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이미 하교한 것도 있고, 나의 의견 또한 그렇게 여기는 것이 있기도 하다."
하였다.

 

6월 9일 계유

홍중일(洪重一)을 동래 부사로 삼았다.

 

임금이 진연(診筵)에서 하교하기를,
"10년 동안 정승을 지내면서 아름다운 덕망으로 포용력을 지녔고 신축년127)  ·임인년128)  에 이르러서도 영명(令名)을 잘 보전한 사람은 오로지 김 판부사(金判府事)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한 일심(一心)으로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어짐이 없었고 말년에 이르러서도 혈성(血誠)이 깊고 독실한 것은 오직 이 봉조하(李奉朝賀)뿐이었다. 이러한 세상에 마땅히 포장(褒奬)하고 돌보는 뜻을 보여야 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는데, 곧 고 상신 김우항(金宇杭)과 이태좌(李台佐)이다.

 

6월 11일 을해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6월 12일 병자

임금이 체후(體候)가 미령하여 내국(內局)에서 들어가 진찰하였다. 2품 이상이 문안하고, 도위(都尉)가 숙직하였다. 이날 임금이 침(鍼)을 맞았다.

 

6월 12일 병자

비변사에서 강원도 심리사(江原道審理使) 구택규(具宅奎)의 별단(別單)에 따라 아뢰기를,
"1. 회양(淮陽)의 철령(鐵嶺)·추지령(楸池嶺), 평강(平康)의 삼방(三防), 이천(伊川)의 방장(防墻)은 모두 북로(北路)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이 세 고을의 방수사(防守使)에 대한 의논은 그 유래가 대개 오래 되었습니다. 이곳에는 특별히 대단한 시설을 할 필요는 없고, 신지(信地)로 만들어서 난(亂)을 당할 경우 일지병(一枝兵)으로 차단하게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회양·평강·이천 이 세 고을에는 마땅히 아울러 방수사라는 명칭을 주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만들게 해야 합니다. 철령은 길이 좁고 곁에 험저(險阻)한 곳이 많으니, 영상(嶺上)에다 깃발을 벌여 세워 놓으면 적이 감히 진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회양과의 거리도 멀지 않아서 만약 경호(警呼)하는 일이 있게 되면 즉시 도착할 수가 있습니다. 고미탄(古味灘)은 영내(嶺內)에 위치하고 있어서 영풍(永豐)의 방장(防墻)과 서로 구련(鉤連)되어 있는데, 영풍에 바야흐로 시설한 것이 있으니, 여기에는 따로 방수(防守)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삼방(三防)의 일로(一路)가 높은 산 험한 고개로 막혔는데 안변(安邊)에서부터 평강(平康)에 이르기까지 서울로 들어가는 요로(要路)입니다. 근래에는 남북(南北)의 장사꾼들이 모두 이 길을 경유하기 때문에 곧 탄탄 대로(大路)가 되었으니 전혀 방수가 없을 수 없습니다. 혹 누보(壘堡)를 설치하여 수시로 여닫기도 하고 혹 장령(將領)을 두어 수상한 자를 기찰(譏察)하게도 해야 하니, 마땅히 도신으로 하여금 사의(事宜)를 상세히 헤아려 획일적으로 장문(狀問)하게 하소서.
2. 춘천(春川)에 방영(放營)을 설치한 것이 비록 서울이 가깝기 때문이라 하지만 남북의 요로(要路)처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회양과 이천은 여러 영애(嶺隘)가 4, 5백 리나 멀리 늘어서 있으므로, 급한 일을 당하여 절제(節制)함에 있어 제때에 뒤지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철원(鐵原)과 서울의 거리는 춘천에 견주어 더욱 가깝고, 또 북관(北關) 여러 길의 요회지(要會地)이며 원래 험한 지역이 아닙니다. 거기다가 지역이 넓고 백성이 많아서 큰 진(鎭)을 설치하기에 합당하므로 철원이 춘천만 못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심리사(審理使)를 서로 바꾸자는 의논에 대해 이미 의견들이 있어 왔습니다. 춘천에는 방영(防營)을 없애어 진영(鎭營)으로 만들고, 철원에는 진영을 없애고 방영으로 만드는 것이 진실로 기의(機宜)에 합치되니, 도신으로 하여금 장문(狀聞)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3. 영풍(永豐)은 안변(安邊) 땅인데, 관부(官府)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명령이 통하지 않는 것은 물론 산령(山嶺)이 겹겹으로 둘러싸여 곧 하나의 별개의 구역(區域)을 이루고 있습니다. 북로(北路)에서 방장(防墻)의 여러 영애(嶺隘)을 넘게 하려면 반드시 영풍에서 길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땅이 또 관서(關西)의 양덕(陽德)·맹산(孟山), 해서(海西)의 수안(遂安)·곡산(谷山), 관북(關北)의 고원(高原)·문천(文川), 관동(關東)의 이천(伊川)·평강(平康) 사이에 산이 개의 이빨처럼 되어 있어 도둑들의 소굴이 될까 우려됩니다. 만일 전혀 관속(管束)하는 일이 없다면 이는 만연되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특별히 첨사(僉使) 한 자리를 설치하여 지망(志望)과 이력(履歷)이 있는 사람을 보임(補任)시킨 후에야 유사시에 믿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빈 땅과 노는 백성이 많이 있으니, 군사와 군량에 대해서는 모두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마땅히 병조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만들게 해야 합니다.
4. 이천(伊川)의 읍(邑)을 가리주(佳利住)로 옮기는 일에 대해서는 경솔히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이천은 본래 도적의 소굴로 일컫고 있고 진영(鎭營)과의 거리도 상당히 머니, 마땅히 특별히 겸 토포(兼討捕)의 임무를 주어 부근의 안협(安峽)·평강(平康) 등 몇 고을을 관속(管束)하게 함으로써 도적을 다스리는 정사를 오로지 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6월 14일 무인

형조에 있는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는데, 무더위 때문이었다.

 

6월 16일 경진

임금이 진연(診筵)에서 연신(筵臣)들에게 이르기를,
"옛날 명묘(明廟)께서 하교하시기를, ‘시호(諡號)에 명(明) 자를 얻게 되면 내 마음이 편하겠다.’ 하였다. 내가 대통(大統)을 승계(承繼)한 것이 송나라 영종(英宗)의 경우와 대략 비슷하니, 뒷날의 생각은 명묘께서 명(明) 자를 바란 것과 같다."
하였다.

 

평안 병사 이일제(李日躋)가 소장을 올려 유민(流民)을 도로 집결시키는 방법에 대해 논하면서 이미 개간된 전지(田地)를 이미 모인 백성들에게 사람의 숫자를 헤아려 나누어 주고 나서 대략 통호(統戶)를 편성함으로써 은위(恩威)도 보이고 군량의 저축도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비변사에서 회계(回啓)하기를,
"3년 동안 세금과 부역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구규(舊規)를 버리고 갑자기 척적(尺籍)129)  ·오부(伍符)130)  로써 약간이나마 법률로 속박하게 되면, 동요되어 흩어질 폐단이 있으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려 극력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형조 참판 심육(沈錥)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전유(傳諭)하였다.

 

여기(癘氣)가 크게 치성하여 공홍도(公洪道)에서 사망한 사람이 1천 6백 57인이고, 경상도는 1천 6백 14인이었다. 이 때 제도(諸道)의 여역(癘疫)이 매우 치성하여 사망자가 계속 잇달았다.

 

6월 19일 계미

구성임(具聖任)을 어영 대장으로, 이익정(李益炡)을 이조 참판으로, 유건기(兪健基)를 대사헌으로, 남태제(南泰齊)를 대사간으로, 권적(權𥛚)을 호조 참판으로, 이광식(李光湜)을 사간으로, 박필간(朴弼榦)을 장령으로, 이성억(李聖檍)을 지평으로, 윤급(尹汲)을 좌윤으로, 심성진(沈星鎭)을 대사성으로, 송창명(宋昌明)을 응교로, 윤득재(尹得載)를 수찬으로, 오언유(吳彦儒)를 부교리로 삼았다.

 

6월 20일 갑신

박찬신(朴纉新)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6월 21일 을유

예조에서 임금의 병후(病候)가 평복(平復)되었다는 것으로 고묘(告廟)·반교(頒敎)·진하(陳賀)하는 예(禮)를 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재신(宰臣)들을 데리고 빈청(賓廳)에 모여 다시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2일 병술

어떤 별이 우성(牛星) 아래로 흘러갔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3일 정해

시임(時任), 원임(原任) 대신들이 또 칭경(稱慶)하기를 청하니, 비로소 윤허하였다. 한결같이 금년 봄 반교했던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제주(濟州)에 보리 씨 2천 석(石)을 지급하고 노비 신공(奴婢身貢)의 반을 감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감진 어사(監賑御史) 한억증(韓億增)의 청을 따른 것이다.

 

승지와 유신을 불러 《시경(詩經)》의 이남(二南)131)  을 강론하였다.

 

6월 24일 무자

임금이 어제(御製)한 지로행(指路行)을 여러 신하들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 시(詩)가 선정신 이황(李滉)의 권의지로가(勸義指路歌)와 우연히 서로 합치되었으니, 실로 세상에 드물게 있는 일임을 느끼게 한다."
하니, 도승지 홍상한(洪象漢)이 관원을 보내어 선정의 서원(書院)에 치제(致祭)하여 세상에 드문 느낌이 있었다는 뜻을 붙이라고 청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25일 기축

엄우(嚴瑀)를 헌납으로, 박첨(朴)을 장령으로, 이중조(李重祚)·남혜로(南惠老)를 지평으로 삼았다.

 

6월 26일 경인

조명정(趙明鼎)을 교리로, 조재민(趙載敏)을 수찬으로 삼았다.

 

약방(藥房)의 윤직(輪直)을 철파하라고 명하였는데, 임금의 환후(患候)가 쾌차되었기 때문이었다.

 

승지와 유신을 불러서 《시경》의 이남(二南)을 강하게 하였다. 시독관 윤광소(尹光紹)가 말하기를,
"도산 서원(陶山書院)에 치제하라는 명에 대해 신은 참으로 흠앙하여 마지 않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지로가(指路歌)는 단지 여항(閭巷) 사이에 서로 전할 뿐이어서 선정(先正)이 지은 시(詩)인지 분명히 알 수 없으니, 조정의 거조를 신중히 하고 상세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도신으로 하여금 찾아 도신으로 하여금 찾아 탐문하여 아뢰게 하였다.

 

유건기(兪健基)를 도승지로 삼았다.

 

6월 27일 신묘

약방 도제조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는데, 윤직(輪直)한 노고가 있기 때문이었다.

 

6월 29일 계사

어떤 별이 누성(樓星) 아래로 흘러갔다.

 

6월 30일 갑오

홍상한(洪象漢)을 대사헌으로, 윤동준(尹東浚)을 부응교로, 김시찬(金時粲)을 겸 보덕으로, 조명건(趙明健)을 겸 필선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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