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4권, 영조 22년 1746년 7월

싸라리리 2025. 9. 29.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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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 정유

백관(百官)이 진하(陳賀)하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으니, 임금의 환후가 평복(平復)된 것을 경하(慶賀)한 것이었다.

 

심성희(沈聖希)를 이조 참판으로, 조명정(趙明鼎)을 부교리로, 홍중효(洪重孝)를 부수찬으로, 송창명(宋昌明)을 겸 보덕으로, 신사관(申思觀)을 필선으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4일 무술

예조에서 갑자년132)  의 예(例)에 의하여 임금의 환후가 평복(平復)된 데 대한 경과(慶科)를 설행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여러 도에 별유(別論)를 내려, 보민(保民)의 대책을 강구하여 경사스런 기쁨을 같이 누릴 수 있도록 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때 임금이 환후가 회복되고 나서 백성들의 고생이 더한층 염려되어서 이런 명을 내린 것이었다.

 

중외(中外)에 신칙(申飭)하여 강도가 아닌 경우에는 도둑을 다스리는 형벌을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경조(京兆)133)  의 여러 당상관을 파직하였으니, 여염집을 빼앗지 말라는 금령이 조금 느슨해졌기 때문이었다. 전 지평 윤경주(尹敬周)는 여염집을 빼앗은 일로 도배(徒配)되었다.

 

형방 승지를 보내어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7월 5일 기해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봉사(奉祀)를 그 집안의 의논이 둘로 갈라진 관계로 인하여 아직도 결정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정찬술(鄭纉述)의 증손으로 후사를 세우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조 판서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마음을 알아주거나 신을 죄주거나 하는 일은 모두가 신의 차자(箚子)에 있으니, 바로 후세를 기약하는 것이요, 참으로 오늘날의 군자들에게 감히 양해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다툼질로서는 이보다 더 큰 일이 없는 만큼, 참으로 명백히 효유하여 각기 돌아갈 길을 가리켜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서로 버티기만 하고 결단을 내리지 않은 채 출장(出場)할 기약이 없으니, 신으로서는 참으로 황공스럽고 부끄럽습니다. 대저 천하의 이치란 옳음과 그름의 두 갈래 뿐인데, 성명(聖明)께서 보고 행하시는 바를 상고해 보면, 옳은 일도 완전히 옳지 못하고 그른 일도 완전히 그르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이러한 도리를 행하여 온 지 수십 년인데 이미 그렇게 하였다는 증거가 자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번 이 일의 처분만해도 만약 한결같이 끝을 내지 않고 전철을 밟기만 하신다면, 신은 조신(朝臣)들의 다툼질은 갈수록 격하여지고 세도의 퇴폐는 갈수록 심해져서 그 형세가 위망에 이르기 전에는 그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근일 진신(搢紳)들의 상소로 말한다면, 그 일은 바로 신에게서 연유된 것입니다. 신이 수죄(首罪)이고 다른 사람들은 지엽인데도 수죄는 갖은 은총을 내려 불문에 부쳐 두고, 지엽은 경재(卿宰) 5, 60명이 잇따라 감옥으로 들어갔으니, 이것이 어찌 신으로서 감히 잠시라도 마음 편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오직 저 소수(疏首)의 신하는 관질로 말한다면 대신의 반열이고 늙은 것으로 말한다면 나이가 80세에 가깝게 되었으니, 전하께서 그를 대우함에 있어서는 별다른 조처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처음 의금부에 나아가 심리를 받게 하라는 명을 내리고는 끝내 또 복직(復職)의 명을 내리지 아니하여 마치 용서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것처럼 하셨으니, 동참한 모든 신하들이 진퇴 유곡이 되어 자리가 거의 텅 비게 되었습니다. 어찌하여 이다지도 스스로 반성하는 성군의 본지와 상반된다는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돈면(敦勉)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이르기를,
"신이 망령된 말로 기미(機微)를 거슬려서 위욕(危辱)을 받았으니, 이를 데 없는 준엄한 성토와 가공스런 그 기세가 진신(搢紳)들의 상소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습니다.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름이 진신의 소장 가운데 들어 있으니, 상신의 관직에 다시 더 무릅쓰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은 탕평책(蕩平策)으로 전하께서 등극하신 이래 20년 동안 조정이 거의 안정되고 세도(世道)가 조금이나마 바로 잡혔다고 여겼으나, 한번 바람이 불어 풀이 흔들리면서 장차 사방으로 붕괴될 형국이니, 탕평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이 말을 가지고 전하를 속이고 작록을 절취하여, 전하로 하여금 백왕을 능가하는 지업(志業)을 모두 허투로 돌아가고 말게 한 것은 다 신의 죄입니다. 신이 총재(冢宰)134)  의 두 번째 소를 보건대, 신을 논박하는 바가 마치 조종하는 듯하였으니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처음 올린 소를 보니 지극히 성실 하고 화평하기에 신은 그윽이 갸륵하게 여겼습니다. 신의 소와 박문수(朴文秀)의 소는 총재가 눈으로 직접 본 바이고, 신이 박문수를 논한 일은 총재가 귀로 들은 바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기의 눈과 귀는 믿지 않고 혹자의 말만 믿어서, 신이 군부 앞에서 제 마음을 속였다고 의심하기에 이르렀으니,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신의 형이 죽을 때를 당하여 쓴 소에 이르러서는 신 형제의 의논한 본말 및 신의 형이 불충을 자술한 내용을 전일 연중(筵中)에서 이미 대략 진달하였는데, 총재가 미처 듣지 못하여서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얻어 들은 말을 가지고서 남의 형제 사이를 경솔하게 의심하였는데, 덕망 높은 이의 말이 이와 같음은 아마도 마땅하지 못할 것이니, 신은 또한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전유(傳諭)하였다.

 

7월 6일 경자

이하종(李夏宗)을 승지로,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조적명(趙迪命)을 대사간으로, 이광익(李光瀷)을 지평으로, 이구령(李耉齡)을 사간으로, 권기언(權基彦)을 정언으로, 조명건(趙明健)을 장령으로, 김시형(金始炯)을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홍상한(洪象漢)을 좌윤으로, 김상로(金尙魯)를 우윤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의 장계에 여역(癘疫)으로 사망한 사람이 1천 3백 85인이었다.

 

7월 7일 신축

예조에서 아뢰기를,
"관무재(觀武才)135)  에 친림(親臨)할 때에는 으레 문신 정시(文臣庭試)와 유생 정시(儒生庭試)를 돌려가며 대거(對擧)하게 되어 있는데, 지난 갑자년136)  에 이미 문신 정시를 대거하였으니, 이번에는 유생 정시를 거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연일 큰 장마가 져서 평지의 수심이 한 길 이상이나 되어 도로가 불통되었으며, 집이 떠내려가고 성안의 사람과 가축도 많이 빠져 죽었다.

 

7월 8일 임인

김상적(金尙迪)을 승지로, 김상로(金尙魯)를 동의금으로 삼았다.

 

7월 9일 계묘

사대문에서 영제(禜祭)137)  를 지냈으니, 오랫동안 비가 개지 않기 때문이었다.

 

정언 이제화(李齊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진(城津)은 마천령(摩天嶺) 밑에 위치하고 있어서 길주(吉州)와 비교할 때 그 형세가 조금 나으며, 애초 방영(防營)을 성진에 설치한 것으로도 조종조(祖宗朝)에서 구획에 만전을 기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오늘날에 와서 방영을 길주로 옮기고 성진은 중군(中軍)으로 강등하였습니다. 관방(關防)의 중요한 지역이 이와 같이 허술하니, 청컨대 방영을 성진으로 이설(移設)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전 홍충도 병마 우후(洪忠道兵馬虞候) 정숭(鄭崇)은 군량을 팔아서 그 절반은 사복을 채우는 데로 돌아갔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엄히 처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막중한 관방의 일을 어찌 사람마다 가벼이 의논할 수 있겠는가? 정숭의 일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1일 을사

하교하기를,
"서계문(誓戒文) 가운데 ‘불종주(不縱酒)’라는 문구가 들어 있는데, 즐겨 마시는 자야 술을 마시고서 방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뒤에는 ‘종’ 자를 ‘음(飮)’자로 고치게 하라."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수재(水災)로 인하여 면직을 비니,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시사(時事)를 논함으로 인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 경이 점차 한쪽으로 기울고 있으니, 내가 매우 의혹스럽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축년138)  ·임인년139)   이후로 노론·소론의 어울리기 어려움은 초월(超越)·빙탄(氷炭)140)   정도가 아닙니다. 때문에 신이 고(故) 상신(相臣) 조문명(趙文命)과 더불어 지성으로 조제(調劑)하여 서로 어우러지기를 기약했던 것이고, 때문에 이쪽 저쪽의 사람들 중에 의논이 평완(平緩)한 사람이라면 다 진용(進用)하려고 애썼던 것이나, 시행한 지 수십 년에 시상(時象)이 너무 달라져서 오직 함묵(含默)과 구용(苟容)만을 일삼으며 모두가 아첨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그 폐단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의 경우는 피차가 거의 화합에 도도달하고 있으므로 종전의 규정을 조금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진용하기 어려운 사람을 쓰려고 하는 것도 참으로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한 말은 바로 당습(黨習)에 젖은 사람들을 쓰고 싶다는 말인데, 이것을 어찌 할 수 있는가?"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은 다만 재국(才局)이 있다면 쓰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과거 사목(科擧事目) 가운데 〈시권(試券)을〉 대필로 써서 함부로 끼워 넣거나 주초(朱草)141)  를 농간하는 등의 일은 바로 전가 사변(全家徙邊)의 율에 해당되지만, 지금은 이미 혁파하였으니, 어떤 율을 적용하여야 마땅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유형(流刑) 3천 리로 고치라고 명하였다.

 

권적(權𥛚)을 발탁하여 지중추(知中樞)로 삼고 이어서 함경도 도과 시관(咸鏡道道科試官)으로 차정하였다.

 

7월 12일 병오

좌참찬 김유경(金有慶)이 치사(致仕)142)  하였다. 김유경이 서산(瑞山)에 물러나 살다가 이때에 이르러 서울에 들어왔으므로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더니, 김유경이 치사[休致]하기를 극력 빌므로 임금이 윤허하였는데, 이 때 나이가 78세였다.

 

민원(閔瑗)을 장령으로, 임경관(任鏡觀)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좌상이 노론·소론 가운데 준론(峻論)을 펴는 자를 써서 불울(怫鬱)의 기운을 풀고자 하였는데, 조제(調劑)하는 자를 아첨한다고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뒷날의 폐단이 극심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른바 오늘날 ‘준소(峻少)’라는 것은 무엇을 이르는 것인가?"
하니, 승지 조재호(趙載浩)가 말하기를,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무리는 참으로 말할 것도 없지만 김일경과 박필몽의 혈당 가운데 오히려 용서할 만한 자가 있으므로, 신들과 더불어 의논이 합치되지 않아서 지금까지 여전히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 때문에 저들을 일러 준엄하다고 하고 신들을 일러 느슨하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완론을 펴는 것을 함묵과 구용(苟容)으로 몰고 이쪽 저쪽의 사람들 중에 준론자만 쓴다면, 그 길이 도리어 좁아져서 반드시 한편이 나아가고 한편은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7월 13일 정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전 사직 윤양래(尹陽來)를 직첩을 주어 서용하고,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도 직첩을 주었으며, 문출 죄인(門黜罪人) 신만(申晩)은 놓아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박필주(朴弼周)가 여러 차례 사직하고 나오지 않자, 임금이 강권할 수 없음을 알고서 체직을 허락하고, 정우량(鄭羽良)으로 대신하라고 명하였다.

 

7월 16일 경술

유복명(柳復明)을 도승지로, 이창수(李昌壽)를 승지로 삼았다.

 

7월 18일 임자

임금이 태묘(太廟)를 알현하고 나서 지나는 길에 육상묘(毓祥廟)를 배알하였는데, 거가(車駕)가 종가(鐘街)에 이르러서는 형방 승지를 보내어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시켰다.

 

7월 21일 을묘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를 행하였다. 전 병사 정천술(鄭纉述)이 시관으로 입시하자, 임금이 서도의 관방의 정세를 물었는데, 정찬술이 변방의 정세를 매우 자세히 말하니, 임금이 기특하게 여겼다. 뒤에 이것을 가지고 연신(筵臣)에게 물었는데, 원경하(元景夏)가 대답하기를,
"정찬술은 신의 마을에 사는 무부(武夫)인데, 사람됨이 꾸밈이 없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 합니다."
하였다. 정찬술은 장수다운 재국(才局)이 있어 무신년143)  의 변란(變亂)을 당하여서는 변군(邊郡)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적정을 예측하여 승리를 이끄는 방략(方略)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 밖에서 나왔으나, 당시 재신(宰臣)들이 그의 강개한 논변을 꺼려서 이를 숨긴 채 계문하지 않았으니,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어영 대장 구성임(具聖任)·총융사 박찬신(朴纉新)의 병부를 빼앗아서 장전(帳殿)으로 가지고 들어갔다가 이윽고 용서하여 주었다. 구성임과 박찬신은 다같이 시사(試射)에 참여하여야 하는데 질병을 핑계로 들어오지 않으므로, 임금이 노하여 정장(廷杖)144)  하려 하였으나 그가 군대를 거느리고 있음을 감안해서 분간(分揀)하여 용서한 것이다.

 

남태온(南泰溫)을 승지로 삼았다.

 

7월 23일 정사

지평 남혜로(南惠老)가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귀양(歸養)을 비니, 임금이 양성(陽城)의 말145)  을 인용하여 윤허하였다.

 

7월 24일 무오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친림(親臨)하여 관무재(觀武才)를 행하고, 이어 문과 정시(文科庭試)를 거행하여 이명희(李命熙) 등 5인을 뽑았다. 이때 어떤 유생이 종이를 메고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는데, 임금이 물어보니, 바로 이산(尼山)의 유생 홍천보(洪天普)였다. 그의 할아비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는 곧 숙신 옹주(淑愼翁主)의 부마(駙馬)인데, 조가(朝家)에서 별도로 내려 준 문서 가운데 태조 대왕의 어필이 들어 있고, 또 숙묘의 친필 서문이 있으나, 집이 가난하여 봉안할 곳이 없어서 조정에 바치러 온 것이라고 하였는데, 대개 그의 의도가 벼슬을 구하자는 데 있는 것이었다. 임금이 그 글을 모사한 뒤에 내어 주라고 명하고, 이어 홍천보를 녹용(錄用)하도록 하였다.

 

남태량(南泰良)을 대사성으로, 이주진(李周鎭)을 예조 판서로, 임정(任珽)을 이조 참의로, 조명정(趙明鼎)을 교리로, 박홍준(朴弘儁)·정순검(鄭純儉)을 정언으로, 이익정(李益炡)을 호조 참판으로, 박필주(朴弼周)를 우참찬으로, 이규휘(李奎徽)를 장령으로, 황경원(黃景源)을 지평으로, 홍낙성(洪樂性)을 설서로, 김상복(金相福)을 필선으로 삼았다.

 

7월 26일 경신

도성의 무너진 곳을 개축하였다.

 

7월 28일 임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첫 번째 정사(呈辭)하니, 임금이 돈면(敦勉)하였다.

 

봉조하(奉朝賀) 김유경(金有慶)이 소를 남겨 두고 귀향을 고하면서 시사(時事)를 덧붙여 진달하기를,
"전하의 성스러운 자품은 하늘이 낸 것이기에 학문은 날로 더 빛나가고 춘추가 만년에 접어들었는데도 의지를 더욱 가다듬어 온갖 정사(政事)를 몸소 살피고 부지런하여 마지 않으시니, 요순(堯舜)의 정치인들 어찌 본받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다만 인주(人主)의 한 마음은 실로 온갖 조화의 근본인데도, 전하께서 마음을 잡아 두는 것이 확고하지 못하여 게으름과 소홀함이 틈타기가 쉽고 의리를 성찰하는 것이 정밀하지 못하여 편견의 집착을 버리기가 어려운가 하면, 언어와 행동에 성실성이 전혀 부족하고 일을 시행하는 즈음에 착오가 많습니다. 신료들을 경시하고 간쟁을 듣기 싫어하는 데 이르러서는 이는 본래부터의 병통이기는 하나, 근년 이래로 지나친 거조를 때때로 하시어서 모든 일에 시비를 따지지 않고, 오직 하고 싶은 일이라면 반드시 행하고야 마시는가 하면, 비위에 조금만 거슬려도 문득 위노(威怒)를 가하시니, 곧은 말을 하는 대신(臺臣)이 형구 아래에서 죽을 고비를 겪고, 항소(抗訴)를 올린 여러 신하들이 감옥에서 머리를 잇대고 있는 판입니다. 이 밖에도 심상하지 않은 처분과 타당하지 못한 형정(刑政)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대신은 총애받은 자리를 굳게 보전하는 것을 가장 좋은 계책으로 여기고 삼사(三司)는 죄벌을 회피하는 것을 상책으로 여긴 나머지, 침묵만으로 나날을 보내고 군덕(君德)의 과실에 대해서는 예사로 보아 넘기며, 한 사람도 극력 간쟁함으로써 광구(匡救)하는 충성을 바치려는 자는 없으니, 이는 참으로 개탄스럽고도 수치스런 노릇이라 하겠습니다. 세태가 점점 저하되면서 아첨이 습성을 이루어서 일마다 영합하여 뜻을 굽혀 가며 순순히 따르는가 하면, 전하께서 비록 지나친 분부를 내리셔도 반복하여 아뢸 생각이 없고, 비록 옳지 못한 거조가 있어도 감히 바로잡으려 드는 자가 없어서, 임금의 마음으로 하여금 스스로 성군인양 거만해진 나머지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인물의 진퇴와 상벌의 시행을 오직 당신의 기쁨과 노여움에 따라 처리하므로, 인심이 복종하지 않고 국가의 기강이 날로 무너져 가고 있으니, 신은 그윽이 한심스럽게 여깁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고 사총(四聰)을 트시어, ‘어떤 말이 마음에 거슬리거든 반드시 도에서 찾을 것이며, 어떤 말이 뜻에 순종되거든 반드시 비도에서 찾으라.[有言逆心 必求諸道 有言遜志 必求諸非道]’라고 한 〈《상서(尙書)》 태갑(太甲)의〉 옛 교훈을 잘 따라서 성덕(聖德)을 빛내소서. 아! 역적을 토벌하는 한 가지 일은 자못 신의 집안 일과도 같기에 앞뒤의 봉함에서 여러 차례 진심을 털어놓았거니와, 경술년146)  의 상소는 더더욱 자세하여 제 스스로도 극언(極言)·갈론(葛論)의 축에 들 만하다고 여겼습니다. 그 소장은 이미 불살라졌더라도 그 의리만은 아마 성상의 심중에 기억되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진부한 말을 다시 주워 모아 옛 버릇을 되밟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눈앞의 일들을 말하겠습니다.
지난번 유현(儒賢)의 수차(袖箚)는 대개 그가 평생 동안 품어 온 뜻이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그의 고심을 이해하시고 대의(大義)를 밝히고자 하여 상확(商確)하여 처분하라는 뜻을 보이셨으니, 무릇 혈기가 있는 사람으로서 그 누구인들 용동(聳動)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뜻하지 않게 ‘멸륜 사당(蔑倫死黨)’이라는 말이 도리어 전하께서 수십 년 동안 의지하고 믿었던 훈상(勳相)·훈장(勳將)에게서 나왔습니다. 아! 이를 차마 어찌 말하겠습니까? 대저 질병은 성인(聖人)도 면치 못하는 것이니, 선왕의 환후는 원래 숨길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난역(亂逆)의 무리들만은 ‘휘질(諱疾)’ 두 글자로 흉계를 드러낼 기반을 삼았으니, 이는 대개 질병을 숨겨야만 세제 책봉과 대리 청정을 역모로 몰아붙일 수 있고, 역적 유봉휘(柳鳳輝)의 흉소(凶疏)라든가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교문(敎文) 등 무릇 성궁(聖躬)을 속이고 핍박한 여러 흉측한 말들을 모두 실증할 수 있으며, 무리들이 중간에서 작용하여 속이고 농간하며 국본(國本)을 흔들고 충현(忠賢)을 죽인 죄악을 또한 숨길 수 있다고 여긴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화근을 추구해 볼 때 이는 단적으로 질병을 숨긴 데 있다 하겠습니다. 이번에 유현(儒賢)의 차청(箚請)은 다만 무함한 말의 본원을 명확히 말하여 모든 역적들의 죄안을 통쾌히 바로잡자는 의도였습니다. 이것이 전하의 효성과 우애의 마음에 무슨 상관이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이에 ‘차마 지나간 일을 다시 제기하여 전하의 지정(至情)을 손상시킬 수 없다.’고 하였으니,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만약 부형(父兄)이 불행하여 질병을 앓고 있을 경우, 효성스러운 아들이나 공손한 아우의 입장에서 아무리 마음이 조이고 타기로서니, 어찌 차마 말할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다고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사리에 닿지 않는 이 말을 가지고 전하의 귀를 공동(恐動)시켜 질병을 숨긴 흉계를 통쾌히 분변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 의도의 깊고 음흉함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주자(朱子)가 이른바, ‘빗나간 의논을 주창하여 위아래를 협박했다.’라는 말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말입니다. 이른바 ‘갑을의 역적[甲乙逆]’이라는 말은 더욱 놀랍고 패악한데다, 얼굴을 바꾼 박문수(朴文秀)의 소가 또 나와서 앞뒤 역적의 옥안(獄案)에 대한 말로 이어 놓았으니, 그 은밀하게 마음 먹은 것과 사리에 어그러진 조어는 거의 심한 데가 있습니다. 이에 감히 공이나 바라는 하찮은 부류들로써 은연중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한 역적에 견주어 장차 은밀히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무옥(誣獄)을 더 다져서 같은 맥락의 흉측한 말을 하늘과 땅 사이에 영원히 남기자는 의도이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며, 어찌 통탄스러운 노릇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이러한 말은 반드시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나왔을 것이니, 박문수 같은 자는 족히 괴이쩍어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저 상신(相臣)이야말로 받은 은총이 어떠하고 스스로 보는 것이 어떠하며, 처지가 어떠합니까? 그럼에도 오히려 또 마음 달갑게 역적을 두둔하며 버젓이 대론(大論)을 저지할 계책을 썼으니 이러한 일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다른 것이야 무엇을 믿을 것이 있겠습니까? 주자가 말하기를, ‘역적을 용서해야 한다고 하면 이는 곧 역적편에 든 사람이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그 ‘공을 가지고 속죄(贖罪)한다.’는 말은 용서하자는 정도뿐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붕당에 간여한 사람을 먼저 다스리는 율(律)에 비추어 그들의 죄는 어떻게 해야 마땅하겠습니까? 아! 타고난 이성이란 사람마다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고 보면, 저 장상(將相)의 신하들도 어찌 본시부터 이와 같이 하고 싶었겠습니까? 다만 마음을 세움이 한번 틀어짐으로 해서 언의(言議)가 점차 어긋나고 심지어는 간악한 역적을 두둔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론이 사람을 그르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은 다시 한 번 세도를 위해 마음 아프고 개탄스럽습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오직 성상께서 유현이 지켜 온 의리를 쾌히 펴시고 전장(典章)을 속히 집행하여 엄히 주토(誅討)를 가함으로써 군신간의 의리가 다시 밝아지고 신인(神人)의 울분이 조금이나마 펴지게 하신다면, 참으로 큰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몸은 비록 이미 물러나 있으나 간절한 일념은 스스로 가시지 않습니다. 한강(漢江)을 한번 건너고 나면 다시 올 기약이 없을 듯하여, 남산[終南]을 두돌아보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이에 혈성을 다하여 우러러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는 바이니, 행여라도 성상께서 신이 늙고 혼암하다는 이유로 말조차 버리지 않으신다면, 신은 살아서는 태평(太平)을 즐거워하는 백성이 되고 죽어서는 안심하고 죽는 귀신이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소가 상주되자, 임금이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노신(老臣)이기 때문에 너그러이 용납하였다. 김유경이 비록 노퇴(老退)를 고하고 떠나갔으나, 그 충군 애국의 정성을 잊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니, 당시 여론이 매우 옳게 여겼다.

 

김시찬(金時粲)·김상복(金相福) 등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김시찬 등이 한권(翰圈)147)  을 주관하면서 송문재(宋文載) 등 6인을 뽑았는데, 임금이 사람을 널리 취하지 않았다 하여 삭탈 관직을 명한 것이었다.

 

제주 사람 홍달한(洪達漢)을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홍달한은 효행이 있고, 또 경자년148)  ·갑진년149)   〈숙종·경종의〉 국상에 똑같이 방상(方喪)150)  의 복제를 행하며 삭망(朔望)마다 반드시 높은 곳에 올라 배례를 하였는데, 목사(牧使) 한억증(韓億增)이 이를 계문하므로 이 명이 내려진 것이었다.

 

7월 29일 계해

윤금(尹汲)을 부제학으로, 서명신(徐命臣)을 부응교로, 임집(任)을 부수찬으로, 유언민(兪彦民)을 지평으로, 조재민(趙載敏)을 겸 문학으로, 윤택후(尹澤厚)를 장령으로, 홍낙성(洪樂性)을 정언으로, 황경원(黃景源)을 수찬으로, 서명신을 겸 필선으로, 송창명(宋昌明)·황경원을 겸교서관 교리로, 이광익(李光瀷)을 지평으로 삼았다.

 

우의정 조현명이 김유경의 상소로 인하여 분의를 내세워 성 밖에 나가서 상소하여 면직을 빌었는데, 그 소에 이르기를,
"저 노신은 곧 신과 더불어 어린 시절부터 같은 마을에서 살았던 장로(長老)인데, 평소 정의가 남달리 좋은 사이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사심에서 신을 미워하여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각기 소견을 개진하는 데는 사리를 공평하게 말하여야 되는데, 도리어 골목길 어린 아이의 입버릇으로 공공연히 매도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머리가 흰 노성(老成)한 사람의 체모라 하겠습니까? 신이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머리에 ‘역적편에 든 사람[賊邊人]’이라는 세 글자를 뒤집어쓴 이상, 태연히 도성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
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돈면(敦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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