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4권, 영조 22년 1746년 8월

싸라리리 2025. 9. 2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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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갑자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기 감사의 장계에 양근(楊根)의 익사자와 압사자가 30인이라고 하였는데,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8월 2일 을축

부호군 신이진(愼爾晋) 등 5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축년151)  ·임인년152)  의 변고를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오직 우리 경종 대왕께서 춘추는 만년으로 접어들어 후사[儲副]를 이을 가망이 끊겼고, 삼종(三宗)153)  의 혈맥은 단지 우리 전하 한 분뿐이셨으니, 뒷날 종사(宗社)를 맡을 분은 전하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그리하여 경묘께서 자성(慈聖)의 분명하신 전교를 받들어 이에 대책(大策)을 정하게 된 것입니다. 환히 드러난 그 의리가 중천(中天)의 해와도 같이 그 광명 정대함은 천지간에 우뚝 설 만하다 하여도 잘못된 말이 아닌데, 그 사이에 누가 감히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오직 저 역적 유봉휘(柳鳳輝)는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진 뒤에도 불만의 뜻을 드러내며 앞장서서 흉소(凶疏)를 올리어 위아래를 놀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서 기어코 뒤흔들어 놓고야 말고자 하였으니, 그의 심성의 소재는 길가는 사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역적 조태구(趙泰耉)의 혐의를 무릅썼다는 말과 양옥(梁獄)154)  의 비유에 이르러서는 성궁(聖躬)을 무함하고 핍박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는데, 음모와 역절(逆節)이 덮으려 해도 덮어지지 않자,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느니 불문에 붙이기 위해서였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 강변을 하여, 밖으로의 노출을 차단할 계책을 쓰기까지 하였으니, 더더욱 간교하고 흉참합니다. 더구나 흉측한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그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일이 있을 적마다 반드시 의논하여 올린 소는 맞장구를 친 것이 자명하고, 요사스러운 윤성시(尹聖時)·서종하(徐宗廈)의 무리가 사우(死友)가 되어 의견을 달리하는 자를 물리친 글장은 사주를 받은 것임을 숨기기 어렵습니다. 안팎으로 배포(排布)하고 흉언(凶言)을 선동하여 효경(梟獍)155)  의 무리들로 하여금 꼬리를 물고 일어나도록 한 결과 역적 목호룡·박필현(朴弼顯)은 앞에서 주창을 하고 심유현(沈維賢)·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은 뒤에서 화답을 하여 몰래 흉계를 쌓아 오다가 마침내는 무신년156)  의 변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 때 만약 황천(皇天)이 음(陰)으로 도와주지 않고 조종(祖宗)이 말없이 보우하시지 않았더라면 국가가 오늘날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 김일경·목호룡·이인좌·박필몽의 무리로 말한다면 그 어떠한 흉역입니까마는, 그러나 조태구·유봉휘에 비하여서는 오히려 지엽입니다. 다만 왕법(王法)이 엄하지 못하고 의리가 밝지 않은 탓으로, 이른바 주토(誅討)를 한다는 것도 김일경·목호룡·이인좌·박필몽의 무리 몇몇 역적들에 그치고 말았고, 정작 원흉 대악은 목숨을 보존하여 안방에서 고이 죽게 하였으니, 이것만도 형벌에 있어 크게 실수한 것입니다. 그러한데 또 대신의 옛 관질을 그대로 띠고 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러한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까? 오늘날 전하를 섬기고 있는 자로서 그 누가 울음을 머금고 피를 뿌려 그 죄를 한번 주토함으로써 군부의 원수를 갚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상의 도량이 하늘같이 넓어 어질고 인자함이 너무 지나치시니 안정에만 힘쓰고 지나간 일을 다시 제기하고자 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정 안에서 우려와 울분의 논의가 한두 번 없지는 않았으나 문득 저지를 당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사건은 이미 옛일이 되어버려서, 인심은 근계(近計)에 몰두하고 대의는 당의(黨議)에 가려진 나머지 ‘징토(懲討)’ 두 글자는 마치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으니, 청구(靑丘)의 예의지방(禮義之邦)이 장차 이적(夷狄)·금수(禽獸)로의 전락을 면치 못할 판입니다. 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근일의 일을 가지고 한번 말하여 본다면, 산림(山林)에서 토죄하자는 논의가 한번 나오자 국정을 맡아 보고 있는 모든 신하들이 마치 취몽(醉夢)에서 갓 깨어난 것처럼 하여 한 번 상소하여 준엄한 하교를 받고 나서는 곧장 머리를 수그린 채 다시는 이 의리를 언급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전하의 조정 신하들이 어찌하여 한결같이 이다지 적적하기만 합니까?"
하였는데, 상주되었으나, 비답하지 않았다.

 

심성희(沈聖希)를 이조 참판으로, 조명정(趙明鼎)을 교리로, 홍중효(洪重孝)를 부수찬으로, 송창명(宋昌明)을 겸 보덕으로, 신사관(申思觀)을 필선으로 삼았다.

 

8월 3일 병인

호조 판서 정석오(鄭錫五)가 신천군(信川郡)이 양전(量田)을 한 뒤로 감축(減縮)된 전결(田縮)이 자그마치 1천 7백여 결(結)에 이른다 하여 해당 고을 수령을 추문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8월 5일 무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여러 도(道)의 가을 조련을 행하도록 하고, 비변사 낭청을 내보내서 삼남(三南) 지방의 저치미(儲置米)를 적간(摘奸)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사관(史官)을 보내어 우참찬 박필주(朴弼周)에게 별유(別諭)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요사이 요양하는 겨를에 이남(二南)157)  을 반복하여 익히다가 우연히 터득한 것이 있기에 사관의 편에 함께 부치었으니, 경은 온축(蘊蓄)하고 있던 것을 써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매번 관저장(關雎章)158)  을 가지고 강관(講官)에게 질의를 하였는데, 더러는 문왕(文王)의 작품이라고도 하고 더러는 궁인(宮人)의 작품이라고도 한 일이 있었으므로, 이에 설문을 작성하여 박필주에게 물은 것이었다.

 

8월 8일 신미

어떤 별이 묘성(昴星) 아래로 흘러갔다.

 

8월 10일 계유

임금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알현하고 친제(親祭)를 의식과 같이 행하였다. 이날 대가(大駕)가 서빙호(西氷湖)에 이르렀을 무렵 배가 작아서 군마(軍馬)가 곧장 건너가지 못하자, 공조 낭청 신경민(申景閔)을 잡아들이도록 명하고 엄교(嚴敎)를 내리기를,
"배를 타고 포를 쏜 뒤에도 군사가 아직 건너지 못할 것 같으면 네 목을 베어 조리를 돌리고 공조 판서는 곤장을 치리라."
하였다. 이어서 지나는 길에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들려 배례를 행하였고, 이현궁(梨峴宮)에 가서 조금 쉬었다가 환궁하였다. 그리고 승지를 동관왕묘·남관왕묘에 보내어 치제(致祭)를 하고 용포(龍袍)와 좌우 소상(塑像) 및 담장을 모두 보수하라고 명하였다.

 

8월 11일 갑술

어떤 별이 직녀성(織女星) 아래로 흘러갔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졸(卒)하니, 임금이 애도하는 하교를 내리고 치부(致賻)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송인명은 사리 판단이 빠르고 권모가 많아서 춘방(春坊)에서부터 임금에게 지우(知遇)를 받았고, 조문명(趙文命)과 더불어 탕평론(蕩平論)을 극력 주장하였고, 노론·소론 중 언의(言議)가 평완(平緩)한 자를 취하여 조정에 등용하여 조정(調停)의 계책을 삼으니, 임금이 드디어 깊이 신임하고 권병(權柄)의 자리에 중용하였다. 20년의 오랜 세월 동안 세도(世道)가 갈수록 타락하면서 자중 자애하는 선비들은 모두 뒷걸음질 치며 물러가 버리고 말았는데, 경신년159)   이후 국시(國是)가 조금 정착되자 이에 송인명이 시세(時勢)를 조금 내다보고서 옛 투식을 변혁하고자 선비들을 끌어다 쓰려고 하였으나, 조현명이 고집을 세워 이를 따르지 않으니, 당시 ‘조송 이론(趙宋異論)’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끌어다 쓰려고 한 것은 역시 일시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였지, 참으로 선비들을 아껴서 그랬던 것은 아니였다."


【태백산사고본】 47책 64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21면
【분류】인물(人物)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註 159] 경신년 : 1740 영조 16년.
사신은 말한다. "송인명은 사리 판단이 빠르고 권모가 많아서 춘방(春坊)에서부터 임금에게 지우(知遇)를 받았고, 조문명(趙文命)과 더불어 탕평론(蕩平論)을 극력 주장하였고, 노론·소론 중 언의(言議)가 평완(平緩)한 자를 취하여 조정에 등용하여 조정(調停)의 계책을 삼으니, 임금이 드디어 깊이 신임하고 권병(權柄)의 자리에 중용하였다. 20년의 오랜 세월 동안 세도(世道)가 갈수록 타락하면서 자중 자애하는 선비들은 모두 뒷걸음질 치며 물러가 버리고 말았는데, 경신년159)   이후 국시(國是)가 조금 정착되자 이에 송인명이 시세(時勢)를 조금 내다보고서 옛 투식을 변혁하고자 선비들을 끌어다 쓰려고 하였으나, 조현명이 고집을 세워 이를 따르지 않으니, 당시 ‘조송 이론(趙宋異論)’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끌어다 쓰려고 한 것은 역시 일시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였지, 참으로 선비들을 아껴서 그랬던 것은 아니였다."

 

8월 12일 을해

유언술(兪彦述)을 사간으로, 민백상(閔百祥)을 정언으로, 윤봉오(尹鳳五)·이명희(李命熙)를 지평으로 삼았다.

 

8월 14일 정축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의 묘소에 치제(致祭)를 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날은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기일[忌辰]이었다.

 

윤득재(尹得載)를 수찬으로, 조명건(趙命健)을 필선으로 삼았다.

 

8월 17일 경진

어떤 별이 천봉성(天棓星) 아래로 흘러갔다.

 

청주(淸主)가 병부 상서 반제(班苐)를 보내어 망우초(莽牛哨)의 지형을 간심(看審)하므로, 우리 나라에서 사람을 보내어 위문하였다. 이때에 청주가 우리의 자문(咨文)을 보고 나서 곧바로 소청을 준허(準許)하고, 드디어 퇴책(退柵)의 논의를 파하고 이어 반제로 하여금 간심하도록 했던 것인데,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평안 병사에게 명하여 소와 술을 가지고 국경을 넘어가서 위문하라고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청나라 사람이 이미 우리 국경을 넘어오지 않았는데 어찌 사신을 보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병사의 위문 사절이 도착하였을 때쯤이면 저들은 이미 돌아갔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8월 18일 신사

동적전(東籍田)160)   1백 묘(畝)에 구곡(九穀)을 심는 제도를 회복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자성(粢盛)161)  의 천신(薦新)이 유명 무실하여졌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 농민들이 적전을 뒤섞어 경작하여 경계를 다 잃을 판이어서, 예(禮)에 따라 복구할 것도 명하였다.

 

북도의 도과(道科)를 설행하여 주형질(朱炯質) 등 4인을 뽑았다.

 

8월 19일 임오

해흥군(海興君) 강(橿)을 동지 사은사로, 윤급(尹汲)을 부사로, 안집(安𠍱)을 서장관으로 삼았으니, 퇴책(退柵) 문제를 준청하였기 때문에 사은사를 겸하여 보내는 것이었다.

 

박성원(朴盛源)을 설서로 삼았다.

 

8월 21일 갑신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8월 22일 을유

임금이 ‘현령소덕왕묘(顯靈昭德王廟)’여섯 글자를 친히 써서 동관왕묘·남관왕묘 두 묘(廟)에 걸었으니, 이는 임진 왜란 때 관왕(關王)이 현신한 뒤에 건립한 것이고, 명나라에서 또 사액(賜額)하였으므로, 임금이 그 공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었다.

 

감시 초시(監試初試)를 보일 적에 이소(二所)의 장옥(場屋)이 비좁아서 〈응시자를〉 다 수용하지 못하여 유생들이 태반이나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자, 시관이 명륜당(明倫堂) 안뜰에 통하게 할 것을 계청하였다. 대개 초시는 매번 일소(一所)·이소 두 곳으로 나누어 예조로 일소를 삼고 성균관으로 이소를 삼아서 비천당(丕闡堂)에서 개장을 하는 것이 해마다의 상례인데, 이 때 와서는 유생이 미어지게 몰려와서 개장을 하지 못하였으니, 과장이 엄하지 못하여 함부로 응시한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시관을 통절히 꾸짖고 해당 금란관(禁亂官) 역시 감처(勘處)토록 하였다.

 

유건기(兪健基)를 대사헌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대사간으로, 조관빈(趙觀彬)을 형조 판서로, 권적(權𥛚)을 한성부 판윤으로, 심육(沈錥)을 제주(祭酒)로, 윤봉구(尹鳳九)를 진선(進善)으로, 윤지태(尹志泰)를 집의로, 박필간(朴弼幹)을 헌납으로, 민백상(閔百祥)·이중조(李重祚)를 지평으로, 안윤행(安允行)을 정언으로, 김한운(金翰運)을 장령으로, 정익하(鄭益河)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유봉휘(柳鳳輝)의 일을 가지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말하기를,
"만약 좌상이 있다면 나의 뜻을 개유하고 싶은데 불행스러울 뿐이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좌상이 있을 적에도 다른 뜻은 없었고, 일찍이 징토(懲討)하는 데 엄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우상이 이른바 ‘공을 가지고 허물을 보충한다.’는 말은 곧 심단(沈檀)을 공격하여 물리치는 일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의 죄가 어떠한 죄악인데 공을 가지고 속죄시키려 한단 말입니까?"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심단은 모색한 것이 별로 없으니, 조태구에게 비한다면 공이라 할 것이 없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윤성시(尹聖時) 등이 모두 심단의 계사에 참여하였는데 그렇다면 육적(六賊)162)  도 공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어 조태구·유봉휘에게 죄가 있는지의 여부를 여러 사관(史官)에게 물으니, 모두가 토죄(討罪)하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예조의 낭관(郞官)을 불러서 관왕묘를 배알할 때의 복색(服色)과 의주(儀註)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마땅히 곤룡포를 사용해야 합니다."
하였다.
우참찬 원경하가 말하기를,
"무성왕(武成王)이라는 호를 붙인 것은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이라고 한 것과 같은 의리로, 모두가 당(唐)나라 때에 나온 것입니다. 지금 이미 동관왕묘·남관왕묘를 보수하도록 명한 이상, 안동(安東)·성주(星州)·고금도(古今島) 세 곳의 관왕묘도 일체 보수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홍우정(洪宇定)은 영남의 절사(節士)입니다. 병자 호란을 당한 이후 태백산 속에 은거하여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하여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으므로, 영남의 인사(人士)가 오늘날까지도 ‘숭정 처사(崇禎處士)’라 일컫고 있습니다. 그의 절의는 매우 탁이(卓異)하니, 포장하는 도리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듣고 보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증직을 내리고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경하가 또 아뢰기를,
"영천(榮川) 고(故) 참판 김늑(金玏)의 집에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하사한 《대학연의(大學衍義)》 한 부(部)가 있는데, 권수(券首)에 두 개의 옥새가 찍혀 있어 하나는 ‘광운지보(廣運之寶)’, 하나는 ‘흠문지새(欽文之璽)’로, 인주가 아직 선명합니다. 선조 때 신종 황제가 하사한 복두(幞頭)·난삼(欄衫) 두 벌(櫳)이 한 벌은 태학에 있었고 한 벌은 안동 향교에 있었는데, 태학에 있던 것은 이미 임진 왜란 때 불타버렸고, 안동에 있는 것은 지금까지 완전합니다. 가정(嘉靖)163) 경자년164)  에 중묘(中廟)께서 경회루 아래에서 상화연(賞花宴)을 베풀었는데, 고 찬성 권벌(權橃)이 술이 취하여 물러나는 순간 소매 속에서 《근사록(近思錄)》 한 권을 떨어뜨린 것을 중묘께서 취해서 보신 일이 있는데, 이 책이 지금 병조 좌랑 권만(權萬)의 집에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영남 감영으로 하여금 《대학연의》와 난삼·복두를 올려 바치도록 하고, 권만으로 하여금 《근사록》을 올려 바치도록 명하였다.

 

8월 24일 정해

장령 윤택후(尹澤厚)의 관직을 체차하고 거제부(巨濟府)로 유배하였다. 윤택후가 언사소(言事疏)를 올렸는데, 그 상소 가운데에 ‘항양(桁楊)·질곡(桎梏)’ 등의 말이 들어 있어서 임금이 윤택후를 불러다 놓고, ‘항양·질곡은 누구를 두고 이르는 말인가?’ 하고 힐문하였는데, 윤택후가 처음에는 분명히 말하지 않다가 마지막에 가서 송익휘(宋翼輝)·윤광천(尹光天)이라고 대답하자, 임금이 크게 노하여 드디어 그 관직을 체차시키고 곧바로 투비(投畀)의 명을 내린 것이었다.

 

8월 28일 신묘

임금이 남관왕묘에 가서 곤룡포와 익선관을 갖추고 재배례를 행하고, 또 동관왕묘에 임어하여서도 처음과 같이 행하였다.

 

8월 30일 계사

우참찬 원경하(元景夏)가 임금에게 말하기를,
"남원성(南原城)이 함락될 적에 명나라 총병(摠兵) 중군(中軍) 이신방(李新芳)·천총(千摠) 장표(蔣表)·모승선(毛承先)이 우리 나라 접반사 정기원(鄭期遠)·병사 구복남(丘福男) 등과 동시에 전사하였는데, 충렬사(忠烈祠)에는 다만 우리 조정의 순절 제신(殉節諸臣)들만을 향사(享祀)하고 명(明)나라 장수는 향사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흠전(欠典)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명나라 장수를 주향(主享)으로 하고 우리 조정의 순절 제신들은 배향(配享)으로 하라"
하였다.

 

선무사(宣武祠)와 충만사(忠愍祠)에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길주(吉州)의 방영(防營)을 성진(城津)으로 이설(移設)하였으니, 성진은 해방(海防)의 요충지였다. 이곳에 방영을 혹은 설치하였다가 혹은 옮겼다가 한 것이 대개 이미 오래 되었는데, 작년에 심리사(審理使) 윤용(尹容)이 성진으로 도로 이설할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윤허했다가, 뒤에 함경도 어사 엄우(嚴瑀)의 말로 인하여 일이 문득 정지되더니, 이때에 이르러 다시 성진으로 도로 이설할 것을 명한 것이었다. 방어사의 인신(印信)을 주조하여 보내고, 첨사(僉使)는 혁파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신을 그전대로 두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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