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갑오
임금이 환경전(歡慶殿)에 나아가니, 왕세자가 시좌(侍坐)하였다. 궁관(宮官) 이형만(李衡萬) 등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강론케 하였는데, ‘허물 듣는 것을 부끄러워한다.[恥聞過]’는 구절에 이르러 임금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혹시 허물이 있어서 너에게 말하기를 부끄러워한다면 이것이 허물 듣기를 부끄러워하는 일이요, 오늘의 글뜻을 네가 혹시 알지 못하고서 궁관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한다면, 이것 역시 허물 듣기를 부끄러워하는 일이니라. 예전에 문묘(文廟)께서 동궁으로 계실 적에는 성삼문(成三問)의 자(字)를 부르며 달 밝은 밤이면 친히 직소(直所)로 가서 그와 더불어 강론을 하였으니, 이는 본받아야 할 일이다. 사석에서 글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곳이 있을 경우, 어찌 중관(中官)에게 묻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형만이 말하기를,
"정자(程子)가 강관(講官)이 되었을 적에 임금에게 말하기를, ‘인주(人主)가 하루 동안에 어진 사대부를 접할 적이 많고 환관·궁첩을 가까이할 때가 적으면 기질이 함양되어 덕성이 훈도(薰陶)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저하(邸下)께서는 지금 어리신 나이로 막 덕성을 함양할 시기이니, 바로 궁료(宮僚)를 친근히 할 때입니다. 무릇 물으실 만한 것이 있으면 궁료에게 물어 보시고, 궁료가 적합한 사람이 아닐 것 같으면 물리치셔도 됩니다. 지금 성상께서 ‘어찌 중관에게 묻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하교를 하시니, 신은 그윽이 개연스럽습니다. 예전에 명나라 태조는 내시들에게 글을 읽거나 글자를 익히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성군(聖君)의 심원한 생각입니다."
하니, 임금이 척연(惕然)히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를,
"진달한 말은 옳은 말이다. 일에 따라 진계(進戒)를 하니, 내가 가상히 여기노라."
하고, 특별히 숙마(熟馬) 한 필을 내렸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일 을미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으니,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과 병조 판서 김약로(金若魯)의 정사였다. 이석표(李錫杓)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삼사(三司) 【부제학 윤급(尹汲)·사간 유언술(兪彦述)·지평 민백상(閔百祥)·정언 안윤행(安允行)·수찬 황경원(黃景源)이다.】 에서 합계하기를,
"무신년165) 의 역란을 주창한 자는 바로 신축년166) ·임인년167) 의 군흉(群凶)이고, 신축년·임인년의 군흉 중에서도 그 괴수를 논한다면 바로 조태구(趙泰耉)입니다. 아! 조태구의 죄상을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적부터 조태구가 속으로 두렵고 꺼려하는 마음을 품고서 반드시 위핍(危逼)하고자 하여 ‘모혐(冒嫌)’ 두 글자를 만들어내어 무한한 화근을 빚어 내었는가 하면, 세제(世弟)의 지위가 결정됨에 이르러서는 먼저 역적 유봉휘에게 소를 올리도록 하여 놓고는 뒤이어 신구(伸救)하는 차자를 올려서 전혀 꺼려하는 바가 없이 충성심으로 추켜세워 주고, 대리 청정의 분부가 있고 나서는 대간(臺諫)의 계사를 업신여기고 돌연히 몸을 내밀어 정원(政院)을 거치지도 않은 채 북문으로 갑자기 들어갔으니, 그의 은밀한 형적과 방자한 죄상은 김자점(金自點)의 희인문(熙仁門)보다도 더 심합니다. 목호룡(睦虎龍)의 상변(上變)에 있어서는 감히 양옥(梁獄)은 구명하지 말라는 말을 개진하여 전하를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두고자 시종 주장하고 단련하며 오직 무옥(誣獄)이 성립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백망(白望)의 초사(招辭)가 나옴에 이르러서는 세 종류의 지적168) 으로 볼 때 자기가 수죄자인데도, 도리어 ‘〈백망이〉 죽음 가운데서 살 길을 찾고자 한 것이다.’라는 말로 핑계를 대고는 잠시 인입(引入)169) 하였다가 태연히 안옥(按獄)을 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다지도 기탄하는 바가 없단 말입니까? 대개 조태구의 앞뒤 흉언이 한 번 옮겨 가서 유봉휘의 상소가 되고, 두 번 옮겨 가서 김일경의 교문이 되었으며, 세 번 옮겨 가서 무신년의 여러 역적들이 천일(天日)170) 을 후매(詬罵)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가지고 말한다면 조태구는 곧 신축년·임인년 군흉의 거괴(臣魁)이자, 무신년 여러 역적의 주창자입니다. 김일경·목호룡·이인좌·박필몽의 무리에게는 왕장(王章)이 이미 행해졌으나, 저 조태구만은 살아서는 목숨을 보전하고 죽어서는 관질(官秩)을 여전히 지니고 있습니다. 앞뒤의 합사(合辭)에서 여러 차례 밝혔으나, 그때마다 가로막혀 버려서 난신 적자가 징계되어 두려워할 바가 없고, 공의(公議)는 갈수록 억울해 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고 영의정 조태구를 추탈 관작(追奪官爵)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신축년의 세제 책봉은 곧 우리 경묘께서 숙고(肅考)의 유의(遺意)를 본받고 자성(慈聖)의 밝으신 명을 받들어서 억만년의 무궁한 기반을 정한 일인데도, 저 유봉휘의 무리들이 속으로 불만을 품고 급급히 투소(投疏)하여 마음대로 뒤흔들어 놓은 것은 어떠한 심장에서 나온 것입니까? 수서(手書)를 직접 건네주어 처분이 광명한데도, 그것을 ‘총망 중에 명령하듯 독촉하듯 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종사를 의탁할 수 있게 되어 팔역(八域)이 다같이 기뻐하는데도 ‘인심이 의혹을 품고 있어 오랫동안 가라앉을 줄 모른다.’라고 하였으며, ‘인신의 예절이 없다.[無人臣禮]’는 네 글자에 이르러서는 바로 한(漢)나라 때의 어사(御史)가 폐립(廢立)을 마음대로 한다171) 고 탄핵한 말인데도 곧바로 이 말을 삽입하였으니, 그 지향하는 바의 의도를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경묘께서 끝내 사속(嗣續)이 없으신 일에 이르러서는 이는 실로 중외가 다같이 걱정한 바이니, 어찌 저만이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럼에도 종사(螽斯)172) 의 경사를 크게 우러러 바란다는 말로써 세제 책봉의 일을 기어코 경거 망동한 행위로 돌리려고 하였으니, 그 마음의 소재는 길가는 사람들도 다 알 만합니다. 이것이 실로 질병을 숨기자는 논의의 시초이자 이인좌·정희량의 모의의 발단입니다. 그가 이른바 ‘성명(成命)이 이미 내려졌으므로 다시 의논할 수 없다.’고 한 말은 더더욱 음흉하고 참독합니다. 대개 미처 완전히 저지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불만과 분노의 뜻이 말끝에 넘쳐 있었으며, 역적 김일경이 뜻을 얻게 되자, 그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흉악한 모의와 비밀스런 계획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무신란의 흉적들이 마침내 왕위까지 노렸지만, 앞장서서 효시(嚆矢)가 된 자는 오직 유봉휘입니다. 을사년173) 의 가벼운 유배로는 왕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고, 정미년174) 의 복관(復官)으로 여론이 한층 격렬하여졌으니, 이번에는 형벌을 소급 시행하여 신과 사람의 분노를 풀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고 좌의정 유봉휘를 추탈 관작하소서."
하였고, 또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신축년·임인년의 일과 무신년의 일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흉역의 무리들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 그 크게 포장(包藏)하고 지극히 음휼한 자를 논한다면, 분명히 분별하지 않을 수 없고 준엄히 토죄하지 않을 수 없는 자는 바로 이광좌(李光佐) 같음이 없습니다. 그는 병신년의 처분175) 에서부터 분노와 원한을 품어 오던 중 신축년·임인년에 이르러 뜻을 이루게 되자 은밀히 흉모를 주도하였고, 감히 대리 청정의 명이 내려지던 날에 방자하게 ‘나라는 기필코 망할 것이며 신하의 절의가 없다.’는 말로써 조당(朝堂)에서 고함을 쳤습니다. 대저 대리 청정의 조치는 선조(先朝) 때부터 있어 온 옛 법인데, ‘나라가 기필코 망할 것이며 신하의 절의가 없다.’는 말은 어찌 그지없이 흉폭한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그의 흉측한 심장이 진실로 여지없이 다 드러났습니다. 역적 목호룡의 변서(變書)는 오로지 성궁(聖躬)을 위태롭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인데도, 조금도 놀라워하는 기색이 없이 제 직성이 다할 때까지 단련하여 점차 확산시킬 계책을 하였는데, 그 은밀히 주무(綢繆)한 실상이 백망의 초사에서 다드러났습니다. 김일경이 국문을 받던 날에 이르러서는 목호룡이 절통하다는 말을 억지로 하였는데, 목호룡은 어찌 다만 절통할 뿐이겠습니까? 또 이미 그의 절통함을 참으로 알았다면 어찌하여 고변을 할 때에 토죄할 것을 청하지 않고 확증이 다 드러나서 소굴이 무너지는 날에 가서야 비로소 말하는 것입니까? 역적 김일경의 교문에서 역절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토죄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병조 판서에 의망하여 마치 공로라도 포상하듯이 하는가 하면, 이잠(李潛)의 흉한 말을 추겨세워서 무릉(武陵)176) 에 비교하였습니다. 또한 역적 김일경의 교문이 나오자 그는 또 그대로 좇아서 포상을 계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광좌와 김일경의 똑같은 심장을 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정미년에 다시 조정에 들어와서는 무옥(誣獄)을 모두 회복하여 세제 책봉과 대리 청정을 다시 역모의 죄안으로 환원시켜서 역적 목호룡의 무고의 일을 사실화시켜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가 어찌 감히 역적 목호룡이 처형을 받은 뒤에 다시 이처럼 방자한 주장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끌어들여 육성한 자들이 남태징(南泰徵)·이사성(李思晟)·이명언(李明彦)·권익관(權益寬)·정사효(鄭思孝)·홍계일(洪啓一)·이유익(李有翼)의 무리인데, 무신년의 역란을 이끌어 낸 자들 모두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갑진년177) 경종의 병세가 위독할 적에는 그가 약방에 있으면서 증상을 숨기고 약의 이름을 고쳐서 심유현(沈維賢)·이인좌(李麟佐) 같은 극한 역적들에게 구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대개 10년 동안 경영하고 배포한 것이 모두 나라를 망칠 흉모가 아닌 것이 없고, 필경에는 하늘을 업신여기는 화를 빚어 내어 종묘 사직을 뒤엎을 뻔하였으니, 그는 다만 신축년·임인년의 원흉일 뿐만 아니라, 실로 무신년의 괴수입니다. 그의 죄범이 이와 같았는데, 다만 음흉한 것을 덮어 씌우고 몰래 무리를 규합하였으며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는 수법이 또한 김일경·박필몽·조태구·유봉휘와 같아서, 밝고 거룩하신 전하로서도 그 간흉한 실상을 다 통촉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분명히 분별하지 않을 수 없고 준엄히 토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처형을 하기도 전에 천벌이 먼저 가해져서 편안히 죽었으므로, 신(神)과 사람들이 다같이 분통해 하고, 여론이 갈수록 더욱 답답해 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고 영의정 이광좌를 추탈 관작하소서."
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신축년·임인년의 무옥(誣獄)은 사첩(史牒)에도 없었던 일인데, 이를 시종 주도한 자는 바로 최석항(崔錫恒)입니다. 가령 그의 의도가 착한 사람들을 해치려는 데 있었다 하더라도 그 죄는 용서할 수 없는데, 더구나 배포하고 단련한 행위가 오로지 성궁을 위태롭게 하려는 데서 나왔고 그 수법이 아주 교묘하고 지극히 흉악한 것이겠습니까? 아! 왕세제 책봉의 주청(奏請)을 인준(認准)받고 돌아오는 주청사의 선래(先來)178) 가 막 도착하자마자 역적 목호룡의 고변서가 과연 올라왔고, 그것이 백망의 초사와 똑같았으니, 그가 꾸며낸 흔적이 덮을 수 없이 환히 드러났습니다. 고변서가 올라오자 전하께서 세제위를 사양하려고까지 하셨으니, 무릇 신하 된 자로서 그 누가 놀라고 뼈아파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저 최석항은 전하를 위하여 이 일을 밝혀 보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이, 이에 말이 동궁을 범하였다는 이유로 이를 쓰지 말 것을 청하였습니다. 대저 말이 동궁을 범한 것이 이 어떠한 대역(大逆)인데 피를 뿌려 토죄를 청하지는 않고, 다만 쓰지 말 것만 요청하고 말았으니, 그의 마음의 소재를 환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이른바 쓰지 말라고 한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애석해 하는 듯하지만, 실은 전하를 애매하고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에 놓고자 한 것이니, 이는 조태구가 양옥(梁獄)을 불문에 붙이자고 한 말과 똑같이 흉악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국청을 옮기자고 계청한 의도도 실로 헤아리기 어렵거니와, 죄인으로 옭아매는 참혹한 행위를 3년이나 지속시키다가, 무옥이 이미 성사됨에 이르러서는 기어코 역적 목호룡의 녹훈을 계청하여 그 일을 확대시키고, 그것을 또 피중(彼中)에 주문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세력을 빌려서 위협을 가하고자 한 것이며, 스스로 그 흉모가 기필코 성사될 것만을 믿고, 전하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안옥(按獄)한 사건 하나만 가지고도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대리 청정의 명이 내려지던 초기에 최석항이 먼저 들어가서 표신을 지레 내린 일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서로 체결하여 주무(綢繆)한 실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박상검(朴尙儉)의 옥사를 느슨히 처리하여 〈죄를 범한 자들이〉 차례로 지레 물고되어 심문할 길이 끊기고 간사한 정상을 구명할 수 없도록 만들고 말았으니, 아!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대리 청정을 선위(禪位)에 비교한 것은 말의 뜻이 흉참하여 그 죄악을 구명하여 볼 때 〈하늘과 땅 사이에〉 차고 넘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법망이 하도 넓어서 왕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잠시 시행된 추탈 관작이 금새 또 취소되었으니, 장차 어떻게 백성들의 분노를 씻어 주고 난적을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고 좌의정 최석항을 추탈 관작하소서."
하였고, 또 아뢰기를,
"신축년·임인년의 흉적들이 흉언 패설을 문자로 표현한 것으로는 김일경이 가장 심하지만, 조태억이 지은 교문 역시 그 의도의 음흉함은 김일경의 흉언과 표리가 상응합니다. ‘정책 국로(定策國老)’179) 와 ‘문생 천자(門生天子)’180)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바로 당(唐)나라 때에 환관들이 혼암한 임금을 옹립하면서 쓰던 말인데도, 방자하게 이에 비교하면서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말하였으니, 이 여덟 글자만으로도 조태억의 단안(斷案)을 삼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김일경의 교문으로 말한다면 그때 조태억이 막 문형(文衡)을 맡고 있었습니다. 무릇 관각(館閣)에서 응제(應製)하는 문자는 반드시 문형의 감정(勘定)을 거친 뒤에 쓰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데 ‘접혈(蝶血)’181) ·‘행배(行盃)’182) 등의 말을 당연한 말로 보아 조금도 놀라지 않고 그대로 종이에다 등재하여 중외에 전파하였으니, 설사 그것이 그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실은 스스로 지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애당초 고치도록 하지 않았고 또 곧바로 죄를 성토하지도 않은 채 김일경이 처벌을 받던 날에 가서 그만 궁색한 말로 스스로 해명을 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사구(沙丘)’183) 두 글자를 긁어 버리도록 지시하였으니, 난상 토론을 한 흔적은 덮으려고 하여도 되지 않습니다. 그 누가 속겠습니까? 당일의 잘못된 행형에도 신과 사람이 함께 분개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관작이 그대로 있으니, 이러고도 국법이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고 좌의정 조태억을 추탈 관작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마땅히 승선에게 하교하겠다."
하였다.
양사에서 합계하기를,
"역적 김일경의 상소에 참여한 여러 역적들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상은 똑같은 심장에서 나온 것이니, 하늘 높이 쳐 놓은 그물에서 귀역(鬼蜮)184) 도 도피할 수 없습니다. 어떤 자는 형벌을 받고 어떤 자는 형장 밑에서 물고되었으나, 유독 정해(鄭楷)만은 무신년 이전에 방안에서 편안히 죽었기 때문에 드러난 처형을 시행되지 못하고 관작도 그대로 있어서, 형정(刑政)에는 얼룩이 진 아쉬움이 남아 있고, 신(神)과 사람은 울분이 쌓여 가고 있습니다. 청컨대 추탈 관작하소서."
하였고, 또 아뢰기를,
"권익관(權益寬)은 신축년·임인년 흉도의 하나로서, 김일경·목호룡의 역모가 그를 통하여 도움받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문침(問寢)’·‘시선(視膳)’이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그의 단안(斷案)이 되기에 충분하며, 〈임금을〉 위협하고 모멸한 그 정상은 실로 조태구·유봉휘와 다를 것이 없는 만큼 이 일 역시 흉악 패도하기 그지없습니다. 또 무신년 변란의 초두에 북번(北藩)으로 나가서는 박창제(朴昌悌)·황부(黃溥)·한성흠(韓聖欽) 등의 역적들과 연락을 취하여 비밀 모의를 한 다음, 섬에 들어가서 배를 제조한 사실과 영하(營下)에서 군졸을 훈련시킨 행적이며, 간장으로 무명을 물들이고 군량미로 마른 식량을 만든 사실이 안무사의 사장(査狀)에 이미 분명히 드러났고, 그의 소공(疏供) 역시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남쪽으로는 이인좌·정희량의 지시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이사성과 손발을 맞춘 역모의 정절이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특별히 권세에 빌붙은 힘으로 인하여 형벌이 가해지지 못한 채, 잠깐 가벼운 유배를 당하였다가 천벌을 받아 지레 죽은 뒤에 관작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으니, 백성들의 분노가 세월이 오랠수록 더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청컨대 추탈 관작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소견하여 남강(南康) 묘암도기(茆庵圖記)를 지어 내리고, 이어 하교하기를,
"화본(畫本)을 3층으로 정하여, 어제(御製)는 상층에 쓰고, 어류(語類)의 본문은 중층에 쓰며, 묘암도는 하층에 그리도록 하라."
하였다.
9월 3일 병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도제조 조현명(趙顯命)에게 유봉휘의 일을 물었는데, 조현명이 말하기를,
"유봉휘의 상소가 나온 뒤에 조정에서 장차 역모의 죄로 국문을 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신이 겸 설서로서 숙직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판부사 유척기(兪拓基)가 보덕으로서 신에게 찾아와 묻기에, 신이 답하기를, ‘이것은 노론과의 쌓인 불신에서 나온 데에 지나지 않으니, 역모로 보는 것은 지나치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초 신의 소견은 이와 같았으나, 신축년에 와서는 그의 조처한 일이 매우 어그러졌습니다."
하자, 임금이 묻기를,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유봉휘의 심사가 아직 왕세제께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마땅히 문을 닫고 스스로 조심하여 그 본심을 스스로 밝혀야 함에도, 방자하게 행공을 한 것은 김일경·박필몽과 서로 안팎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처지와 인망이 김일경·박필몽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고 꺼려하였으니, 그 당시의 이른바 청론(淸論)이 김일경과 박필몽을 토죄하지 못한 것도 유봉휘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신의 형이 늘 마음 아파하면서도 이러한 곡절을 통절히 개진하지는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불충을 자책한 일단입니다. 무신년 변란 이후에는 신이 안죽(安竹)에서 돌아와 해은 부원군(海恩府院君)185) 에게 말하기를, ‘유상(柳相)의 상소는 그 본심을 구명하여 볼 때는 그것이 꼭 역모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남인과 소론이 스스로 국가와 사이가 벌어진 것은 실로 이 상소에서 시작되었으니, 역란 이후 마땅히 근본을 찾아 추론하는 일이 있었어야 했다고 합니다." 하였더니, 해은 부원군이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하였습니다. 신이 유봉휘를 논한 일이라고는 이것에 불과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의 이 말은 참으로 혈성에서 나온 말이라 하겠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감난록(勘亂錄)》에 이른바 ‘머리말이 없다.[無頭書]’라는 것은 유봉휘를 괴수로 삼지 않은 이유 때문에 한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경의 말을 들으니 유봉휘가 상신에 제배된 뒤에 양양 자득하여 두려워 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으니, 어찌 방자한 행위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김일경·박필몽과 안팎으로 호응하였으니, 무신년 역란의 효시임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조태구·최석항의 일은 나중에 마땅히 처분하겠다. 유봉휘의 일은 대신의 진달을 들으니 매일같이 지난(持難)했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 태아(太阿)186) 가 나의 손에 있으니, 어찌 합계(合啓)를 기다린 후에야 청하겠는가? 이 소청은 특별히 윤허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또 권익관의 일을 묻자, 조현명이 대답하기를,
"박창제는 말을 점검한 일로 인하여 형장 밑에서 물고되었는데 도신(道臣)의 분부에 따른 것이라 하였고, 황부는 배를 만든 일로 인하여 형장을 맞고 물고되었는데 역시 도신의 분부에 따른 것이라 하였습니다. 말을 점검하거나 배를 만든 것이 역모의 행위였다면 이를 분부한 도신이 유독 역적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또 조태구의 일을 묻자, 조현명이 대답하기를,
"이 일은 지금으로서는 입을 열기가 어렵습니다. 대저 탕평론이란 나름대로 이를 주재한 사람이 있을 터인데 신의 생각으로는 신축년·임인년에 양쪽의 대신들이 모두 고의로 양비론(兩非論)을 한 것은 아니나, 오직 양비론 그것 때문에 양해론(兩解論)이 나왔고, 정미년에 와서는 한쪽은 완전히 쓰러지고 한쪽은 완전히 일어서므로, 순수하게 소론의 판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무신년 역란 이후에 신이 이종성(李宗城)과 더불어 분등론(分等論)을 상의하였으나, 이른바 양비·양해의 논의를 모두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신의 형이 불충을 자책한 일단입니다."
하였고, 원경하(元景夏)는 말하기를,
"양비론은 대신이 잘못한 것입니다. 신축년의 절목 속의 일이 비록 간혹 잘못 처리된 것이 있기는 하나, 그 사람들이 세제 책봉과 대리 청정의 일로 해서 모두 참혹한 화를 입었습니다. 이천기(李天紀)·김용택(金龍澤)의 경우는 신 역시 불령한 무리로 보고 있으나, 김일경·박필몽 등의 역적들이야말로 천고에 없는 흉악한 역적이니 어찌 양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좌 역시 잘못 처리한 점이 많았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신이 무신년에 고 판서 조상경(趙尙絅)을 만나보니 ‘수상이 합계를 장차 발의하려고 한다.’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만약 역모로 귀결시킨다면 나는 동참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앞뒤의 상소에서 시약청을 설치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이광좌의 죄로 삼고 있으나, 신으로서는 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정미년에 다시 들어온 뒤로 신축년·임인년에 가담한 사람들을 급급히 등용하고 세제 책봉과 대리 청정을 주장한 사람들은 다시 역적의 죄안에 오르게 되었으며, 소하(疏下)의 여러 역적들을 모두 출륙(出陸)시키기를 청하였으니, 이 한 가지의 일만 해도 용서하기 어렵거니와, 기유년187) 폐합(閉閤) 때 끝까지 들어오지 않았으니 더더욱 무상(無狀)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여 징토를 한다면 반드시 공공연하게 처리하여야 하는 법이다. 지금 반쪽의 나라와 징토하고 있으니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반쪽의 나라 외에 징토를 하지 않고 있는 자는 모두 우리 나라의 신하가 아니라는 말인가?"
하였다.
이석표(李錫杓)를 대사간으로, 남태혁(南泰赫)을 헌납으로, 김주(金霔)를 장령으로, 윤동준(尹東浚)을 부응교로, 홍익삼(洪益三)을 부수찬으로, 남태기(南泰耆)를 보덕으로, 엄우(嚴瑀)를 교리로, 윤봉오(尹鳳五)를 필선으로, 황경원(黃景源)을 겸 사서로, 남유용(南有容)을 겸 필선으로, 심발(沈墢)을 사서로, 임위(任瑋)를 설서로 삼았다.
9월 4일 정유
어떤 별이 삼성(參星) 밑으로 흘러갔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조태구·최석항의 일을 가지고 도제조 조현명에게 물으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한번 말을 내뱉으면 역적을 두둔한다고 하기 때문에 참으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신축년·임인년의 옥안을 무고의 옥안으로 본 이상, 신축년·임인년의 옥사를 단련한 사람을 어찌 옳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신축년·임인년의 일은 옥안을 번복한 뒤에, 안옥(安獄)한 일을 가지고 죄를 삼아야만 바야흐로 체제가 성립될 것입니다."
하였다. 제조 원경하가 말하기를,
"정미년 이후의 일은 모두 이광좌의 죄입니다. 고 상신 이집(李㙫)의 일파와 각기 문호를 수립하였는가 하면, 등용한 사람도 신축년·임인년 때의 준론이 아닌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세제 책봉을 주장한 사람들이 모두 죄벌을 받았으니 인심이 어떻게 격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태억은 조태채를 잡아 죽인 사람과 함께 같은 조정에서 서로 친밀하게 지냈으니, 이것이 어찌 인정이라 하겠습니까? 만약 교문을 가지고 죄를 삼는다면 끝내 문자를 꼬집어내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태구·최석항은 차등이 있는가? 그 경중을 알고 싶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조태구는 수상으로서 임인년의 무옥을 담당하면서 목호룡의 흉역은 토죄하지 않고, 다만 말이 동궁을 범하였으므로 쓰지 말자는 뜻만으로 연중(筵中)에서 청하고는, 국청을 내병조(內兵曹)에서 서둘러 본부로 옮겨서 마음대로 단련을 가하였으니,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사람이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이는 실로 조태구의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하교하기를,
"옥안을 번복할 적에 유봉휘·조태구·최석항 세 사람의 일만을 가지고 쟁론하였다면 내가 어찌 윤허에 인색하였겠으며, 내가 어찌 편당이라고 일렀겠는가? 대훈(大訓)을 중시하고 의리를 수립하는 도리에 있어서 한결같이 적막하게 있을 수만은 없다. 조태구·최석항에게는 특별히 삭탈 관작의 형벌을 시행하라."
하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번의 처분은 참으로 곡진한 처분입니다. 죄를 입은 자로 말하더라도 이미 옥안으로써 죄를 받는다면, 이는 이른바 법 때문에 죄를 받은 것이니 웃음을 머금고 땅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뒤의 일은 원경하로 하여금 진정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대신의 말은 잘못되었습니다. 대론(大論)이 발의된 뒤에 신이 어찌 진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9월 5일 무술
우레와 번개가 쳤다.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광좌에 대해서는 그가 역적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결코 윤허할 수 없다. 임금의 말이 이와 같은데 신하가 어찌 다시 쟁론할 수 있겠는가? 신축년·임인년 연간에도 ‘합계(合啓)’ 두 글자가 늘 듣기 싫더니, 이제는 혹 그 말을 들을 적이면 가슴이 두근거려 진정되지 않는다. 이따금 철물교(鐵物橋)를 지날 때면 늘 눈을 감고 지나게 되니, 이는 그 곳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이다. 오늘 이 전교는 이광좌·조태억이 무죄하다는 것은 아니다. 나 때문에 지나친 살상이 몇 사람이나 되었는가? 묵세(墨世) 등은 모두 하인배로서 아무 말없이 곤장을 맞아 죽었고, 김성행(金省行)은 실로 나와 본 일이 없는데도 나와 본 것으로 몰아붙여서 끝내 곤장을 쳐서 죽였으니, 그 당시 대신이 어찌 어제의 처분을 면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합계를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참으로 이 때문이다. 이 전교를 듣고도 그만두지 않는다면, 이는 나의 질병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하고, 이어 고 봉조하 이태좌(李台佐)의 사람됨을 논하기를,
"정성이 순수하고 한 마음을 지녀 딴 생각이 없었다."
하고, 드디어 어필로 ‘결신충군(潔身忠君)’ 네 글자를 써서 승지를 시켜 그 집에 전해 주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한 가닥의 실올로 솥을 붙들었다.[一絲扶鼎]’는 네 글자를 써서 최 봉조하188) 에게 내리던 뜻이다."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이 앞뒤로 당한 일을 들어 정승의 관직을 극력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6일 기해
우박이 내리고 밤에 천둥이 쳤다. 또 어떤 별이 묘성(昴星) 밑으로 흘러갔는데, 그 빛이 땅을 비추고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조관빈(趙觀彬)을 예조 판서로, 신만(申晩)을 동경연으로, 서종급(徐宗伋)을 우부빈객으로, 이섭원(李燮元)을 지평으로 삼았다.
우의정 조현명이 면직하였다. 임금이 약방 도제조 조현명에게 말하기를,
"이번의 처분은 내가 세도를 진정시켜 보려는 뜻이었는데, 내가 경에게는 개연한 마음이 없지 않다. 경의 처지가 아무리 말하기 어렵다 해도 필시 요량한 바가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한 마디의 말도 없다는 말인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신이 이 일에 대해서는 앞뒤로 욕을 당하고 있어서 의리상 입을 놀릴 수가 없으나, 조태구가 역적이라는 것은 끝까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무고(誣告)의 옥사를 담당한 것으로 죄를 삼는다면 죄를 입은 자가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어제 이미 이 뜻을 진달하였으니, 어찌 침묵만 지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약방 제조 원경하가 말하기를,
"어제의 처분은 의리를 분명히 바로잡았다 하겠습니다. 이미 무고의 옥사를 단련한 사람을 죄안에 올린 이상, 그때 나라를 위하여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도 당연히 표창을 하여야 합니다. 대신이 갑을의 역적[甲乙之逆]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처사입니다. 김성행(金省行)에 있어서도 그 때 조지(朝紙)에 보인 내용으로 볼 때 옥사에 관련되지 않았는데도, 처음부터 품처하기를 청하고 마침내 박살을 당하고 말았고, 그밖에도 억울하게 죽은 자가 매우 많습니다. 비록 미천한 사람일지라도 일체 표창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천기(李天紀)·김용택(金龍澤)은 신 역시 불령한 무리로 여기고 있으나, 김일경·박필몽에게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김일경·박필몽으로 말한다면 천고에 없는 흉악한 역적인데, 어찌 이천기·김용택과 함께 갑을의 역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를,
"제조의 말이 옳다. 이천기·김용택의 무리로 말한다면 위에 있는 자가 역적이라고 말하더라도 아래에 있는 자는 역적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제조가 대신의 처사를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말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대강(大綱)이 이미 정하여진 터에 또 표창을 할 것 같으면 표창이 범람될 우려가 있습니다. 경자년189) 6월 이후에 세제 책봉을 모의한 자는 혹 가하다고 할 수 있지만, 경자년 6월 이전으로 친다면 김용택의 무리야 어찌 역적이 아니겠습니까? 대훈(大訓) 가운데 이르기를, ‘또 그때를 상고하여 보건대, 이것이 과연 어디에 장심(將心)을 둔 것인가?’라는 말씀은 곧 단안이라 하겠습니다. 김일경·박필몽과 이천기·김용택을 무게로 달아서 비교한다면 비록 태산과 털끝의 현격한 차이가 있겠지만, 선비로서 본분 아닌 일에 간여한 것은 역시 잘못입니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예전에 어느 태상시 공인(太常寺工人)은 태자의 결백을 입증시키기 위하여 가슴을 갈라 심장을 내보였는데, 이것을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썼으니, 신분이 미천하다고 하여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백망(白望)·묵세(墨世)와 같은 미천한 무리일지라도 어찌 표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조현명이 말하기를,
"불령한 무리들뿐만 아니라, 위시(僞詩)의 일로 보건대 삼조(三朝)를 무함한 행위는 이치상 너그러이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김성행이 고문을 받을 적에 나졸에게 말하기를, ‘행여라도 머리가 흔들릴 것 같으면 승복한 것으로 우겨댈 것이다. 부디 나의 머리를 꽁꽁 묶어서 행여라도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 하더니, 모진 곤장을 연거푸 가하여도 끝까지 한 마디의 말도 없어서 마치 목석을 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가령 이때 김성행이 한 마디의 난초(亂招)라도 내뱉았더라면 사태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경의 말을 들으니, 일이 매우 잔혹하다. 강한 바람에 모진 풀을 알아본다고 할 만도 하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그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마땅히 휼전(恤典)이 있어야 한다."
하며, 전교를 글로 쓰라고 명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그때 난잡하게 간여한 자가 많았는데, 이 전교를 내리면 참으로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그 명을 보류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만약 김성행의 무리를 표창하지 않는다면 인신으로서 나라를 위하는 자를 어떻게 권장하겠습니까?"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본분 아닌 죽음은 표창할 수 없습니다."
하고, 원경하가 말하기를,
"대신이 만약 본분 아닌 것으로 죽었다 하여 표창할 수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시종 역적으로 몰겠다는 것입니까?"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어찌 이처럼 억지를 쓰십니까?"
하며, 두 사람이 서로 언쟁을 하다가, 조현명이 또 상직을 사임하자, 임금이 드디어 윤허하였다.
호조 판서 정석오(鄭錫五)를 우의정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영부사 김흥경(金興慶), 판부사 유척기(兪拓基), 봉조하 이병상(李秉常)을 추천하였는데, 임금이 더 추천하라고 명하므로, 정석오와 민응수(閔應洙)를 새로 추천하니, 정석오가 낙점되었다.
임금이 천둥의 이변으로 인하여 하교하여 자책하고 열흘 동안 감선(減膳)을 명하였다.
정원에서 천둥의 이변으로 인하여 진계(陳戒)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영의정 김재로가 입대를 청하여 진계하고 이어 상직을 사임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지난번 고 좌상의 말로 인하여 기묘 명현(己卯名賢)190) 들에게 모두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하셨습니다만, 허다한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다 시호를 내릴 수는 없습니다. 벼슬이 정경(正卿)으로서 시법상 시호를 내려야 할 이장곤(李長坤)·채세영(蔡世英) 등의 몇 사람 외에 기준(奇遵)·신명인(申命仁)·김구(金絿)·한충(韓忠)·윤자임(尹自任)·박세희(朴世憙)·박영(朴英)·유운(柳雲)·박훈(朴薰)·김세필(金世弼) 등 열 사람 및 종실인 파릉군(巴陵君) 경(璥)·시산정(詩山正) 정숙(正叔)은 학문과 명절이 특이한 만큼, 해조로 하여금 증직과 증시를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9월 7일 경자
어떤 별이 필성(畢星) 밑으로 흘러갔다.
이종성(李宗城)을 함경 감사로, 정찬술(鄭纘述)을 북병사로, 이주진(李周鎭)을 경기 감사로 삼았다.
영의정 김재로가 차자를 올려 퇴직을 비니, 임금이 사관을 보내어 돈독히 유시하였다.
승지 이종적(李宗迪)을 보내어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의 영당(影堂)에 치제하고, 이어 그의 봉사손을 녹용하라고 명하였으니, 임금이 이항복의 화상을 가져다 보고서 임진 왜란의 공로에 감격한 나머지 이 명을 내린 것이었다.
9월 8일 신축
어떤 별이 누성(婁星) 밑으로 흘러갔다.
승지를 보내어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청해백(靑海伯) 이지란(李之蘭)의 영당에 치제하고 그의 봉사손을 녹용하라고 명하였으니, 임금이 두 사람의 화상을 가져다 보고서 이 명을 내린 것이었다.
9월 10일 계묘
민응수(閔應洙)를 호조 판서로, 이광식(李光湜)을 사간으로, 권적(權𥛚)을 형조 판서로, 김시형(金始炯)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헌부 【장령 김주(金霔)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삼사의 합계는 한 시대의 커다란 의논인데도, 헌부의 장관과 옥당의 신하는 고의로 회피한 흔적이 분명합니다. 분묘(墳墓)가 무너졌다는 말은 아직 그 허실은 알 수 없으나,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바로 그때에 서로 잇따라 정사(呈辭)를 올려 거조가 전도되고 손발을 덜덜 떨었습니다. 조지(朝紙)가 한번 나오고, 사람들이 모두 입을 막았으니, 논죄하지 않고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대사헌 유건기(兪健基)와 응교 송창명(宋昌明)을 아울러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합계를 발의할 적에 유건기와 송창명이 잇따라 정사를 올리고 떠나 버리므로, 임금이 연중(筵中)에서 또한 미안한 하교를 하더니, 이 때 와서 비로소 대계(臺啓)가 발단되었다.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영당에 치제하라고 명하고, 이어 그의 봉사손을 녹용하라고 명하였으니, 임금이 그의 화상을 가져다 보고서 이런 명을 내린 것이었다.
9월 11일 갑진
홍문관 제학 원경하(元景夏)를 보내어 반궁(泮宮)191) 에서 선비들을 시험 보이고 유학 황인검(黃仁儉)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의 자격을 주라고 명하였으니, 반궁 제술에서 장원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3일 병오
화성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탄일 진하를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9월 15일 무신
어떤 별이 누성(婁星) 밑으로 흘러갔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6일 기유
토성이 자미원(紫微垣)으로 들어갔다.
평양(平壤)의 이 제독(李提督)192) 의 사당과 안주(安州)의 남이흥(南以興)의 사당에 치제하라고 명하였으니, 승지 남태온(南泰溫)의 계청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9월 17일 경술
이덕중(李德重)을 부제학으로, 윤양래(尹陽來)를 판돈녕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응교로, 임박(任璞)을 수찬으로, 조관빈(趙觀彬)을 예문 제학으로, 정기안(鄭基安)을 정언으로, 조재덕(趙載德)을 겸 사서로, 유엄(柳儼)을 판윤으로, 유언술(兪彦述)을 보덕으로, 황경원(黃景源)을 겸 문학으로, 민백상(閔白祥)을 사서로 삼고, 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특별히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교리 엄우(嚴瑀)를 특별히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다. 엄우가 명을 받들고 북관(北關)에 암행 어사로 나가서 7개월을 지난 뒤에 복명(復命)을 하더니 얼마 안 되어 이러한 명이 있었다.
9월 18일 신해
북관 사람들이 관직을 제수받을 때의 사은 숙배의 시한의 법을 개정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속대전(續大典)》에 외방에서 관직을 제수받는 자가 가까운 도는 30일, 먼 도는 40일이 넘도록 올라오지 않을 경우 계청하여 체직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임금이 북도 사람들은 길이 너무 먼 관계로 간혹 미처 알지 못하여 이 시한을 넘기고 체직되는 자가 있다 하여 비변사로 하여금 상의하여 변통하도록 하였다. 이때에 와서 비변사가 함경 북도 및 남도의 삼수(三水)·갑산(甲山)은 모두 50일로 시한을 고치고, 육진(六鎭)의 경우는 더더욱 멀다 하여 60일로 그 시한을 늘려서 규식을 정하여 시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9월 19일 임자
생원·진사의 창방(唱榜) 때에 복두(幞頭)·난삼(襴衫)을 착용하는 제도를 비로소 정하였다. 처음에 생원·진사의 창방 때에는 모두 유건(儒巾)과 청삼(靑衫)을 착용하였는데, 임금이 연신의 말을 듣고서 안동(安東) 향교에 있는 복두·난삼·대대(大帶)를 가져다 살펴보고 하교하기를,
"아! 복두와 난삼의 옛 제도를 지금 보았는데, 어찌 비풍(匪風)·하천(下泉)193) 의 감개가 다만 무량할 뿐이겠는가? 결코 한 고을에만 남겨 두어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이것으로 생원·진사의 창방 때에 복장을 삼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서 대신들에게 의견을 모으게 할 것을 명하였는데, 대신들이 이의가 없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옛 제도를 되찾을 수 있는 하나의 기회라 할 수 있다."
하고, 이어서 이 명을 내린 것이었다. 해조로 하여금 옛 제도대로 만들어 내어 태학에 간직하여 두고 옛것은 다시 안동 향교로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승지를 보내어 익안 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의 묘에 치제하고 위전(位田)을 정해 두게 하였다. 대군은 태조의 셋째 아들로서, 개국 정사훈(開國定社勳)에 책정되었고 마한공(馬韓公)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안양(安襄)이었다. 임금이 화상을 가져다 보고서 그의 11대손 이정희(李鼎熙)를 소견한 다음, 초사(初仕)의 관직을 제수하라고 명하고, 또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묘는 풍덕(豐德)에 있었다.
9월 20일 계축
어떤 별이 위성(危星) 밑으로 흘러갔다.
원필규(元弼揆)를 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9월 23일 병진
천둥이 치며 눈과 비가 내리고, 화성이 태미 서원으로 들어갔다.
정언 정기안(鄭基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박문수(朴文秀)의 직첩을 내어 주고 다시 서용하는데도 삼사(三司)가 논쟁을 하는 거조가 없으니 신은 적이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이며, 속히 환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태구·유봉휘 등의 역적들만도 실로 죄가 하늘에 사무치는데, 여기에 또 한세량(韓世良)이라는 자가 몰래 화심(禍心)을 품고 흉악한 상소를 올린 것은 실로 역적 김일경의 교문과 목호룡의 상변서와 더불어 서로 표리 상응이 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여러 역적들을 논계하는 과정에서 유독 누락되었으니, 한세량의 관작을 일체 추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 어느 대신(臺臣)이 대론(大論)을 주창하였는데, 전 장령 박첨(朴)은 이미 근실하다고 써 놓고 나서는 끝내 질병을 핑계대었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영성군(靈城君)의 일은 진술 내용이 지나치다. 박첨의 일은 그대로 시행하라. 도헌(都憲)과 유신(儒臣)은 상례대로 전지를 받들고, 한세량의 일은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전 대사헌 유건기(兪健基)와 전 응교 송창명(宋昌明)이 고의로 대론(大論)을 피하였다 하여 파직을 시키자는 계청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야 소급하여 윤허한 것이었다.
임금이 밤에 승지를 불러서 하교하기를,
"오늘의 추위는 겨울과 다름이 없다. 집안에서 담요을 깔고 앉아 있어도 추위를 느끼는데, 더구나 숙위를 하는 군병이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서 고석(藁席)을 제급(題給)하도록 하라. 왕자(王者)가 백성을 대함에 있어 죄수라 해서 어찌 차이를 두겠는가?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4일 정사
신만(申晩)을 대사헌으로, 이정보(李鼎輔)를 부제학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승지로, 남유용(南有容)을 응교로, 김상철(金尙喆)을 수찬으로, 황경원(黃景源)을 교리로, 윤동준(尹東浚)을 겸 보덕으로, 서종급(徐宗伋)을 공홍 감사로 삼았다.
9월 25일 무오
약방 제조 조현명 이하의 관원들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으니, 돌아가며 숙직을 한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상익(金尙翼)을 대사간으로, 민택수(閔宅洙)를 집의로, 이봉령(李鳳齡)을 장령으로, 한광협(韓光協)·권기언(權基彦)을 지평으로, 조윤제(曹允濟)를 헌납으로, 이육(李堉)을 정언으로, 조관빈(趙觀彬)을 빈객으로, 윤동준(尹東浚)을 응교로, 임박(任璞)을 수찬으로 삼았다.
판돈녕부사 윤양래(尹陽來)가 치사(致仕)하였다. 윤양래가 이때 나이 74세로 연이어 소장을 올려 나이를 끌어대며 퇴직을 빌더니, 이때에 이르러 윤허하였다.
사간 이광식(李光湜)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공조 판서 이춘제(李春躋)는 권익관(權益寬)의 직첩을 내어 줄 당시 승지로서 이미 과죄의 대상에 들어 있었으니 의당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여야 하는데, 많은 말을 늘어놓아 가며 변명을 하였으니, 그의 관직을 파직하여야 합니다. 영희전 령(永禧殿令) 정동한(鄭東翰)은 먼 외방의 한미한 신분으로서 등급을 뛰어넘어야 전중(殿中)의 벼슬을 하였습니다. 이번의 전중의 관직을 속히 개차하여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춘제의 일은 지나치다. 정동한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6일 기미
원경하(元景夏)를 병조 판서로, 조재호(趙載浩)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9월 28일 신유
집의 민택수(閔宅洙)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한세량(韓世良)의 여덟 자 흉언194) 에 대하여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저 보상(輔相)들은 20여년 동안 임금을 섬겨 왔으니 전임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오히려 제대로 진고(進告)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성상께서 하문을 하신 뒤에야 비로소 진달하였으니, 언로의 막힘이 국가를 망치는 길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더더욱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재호(趙載浩)는 풍릉군(豐陵君)195) 집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을 이어받아 ‘삼층설(三層說)’을 진달하기까지 하였으니, 조재호의 정확한 식견과 분명한 관찰이 아니었더라면 필시 입을 열어 진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인물을 진퇴시키는 관직을 제수한 만큼, 자세히 관찰하여 사정(邪正)이 뒤섞이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초3일 합계 때 간통(簡通)을 하고 나서 교묘하게 회피한 자와 부름에 응하지 않은 자와 패초의 명을 어긴 자들로서 지금까지 꾸물거리고 들어오지 않는 자는 모두 삭출의 벌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앞뒤의 대역적들이 복관될 적에 한 마디의 진언도 없이 순종한 것은 실로 신하의 분의가 아닙니다. 청컨대 널리 물어서 의논을 수합한 다음 엄격히 처리하여 왕의 기강을 세우소서."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유징귀(柳徵龜)는 역적 민암(閔黯)의 손자와 은근히 음모를 꾸몄으니, 마땅히 엄벌을 가하여야 하는데 가벼운 유배에 그치고 말았으니, 너무 가볍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먼 변방으로 유배시킴이 마땅하며, 금오 당상(禁吾堂上) 역시 중추(重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편의 사람들을 일망 타진하자는 의도인데, 이러한 버릇을 어찌 감히 오늘날에 써먹으려 하는가? 민택수의 관직을 특별히 체차하도록 하라."
하더니, 이어 개정하라고 명하였다.
김약로(金若魯)를 우참찬으로, 남유용(南有容)을 부응교로 삼았다.
지금부터는 해마다 황단(皇壇) 대제 때에 예조·호조의 당상관이 단상과 단하, 신실과 신문, 안팎의 담장, 제기와 악기 등을 봉심한 다음, 보수하여야 할 것은 즉시 보수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고, 또 봉상시에서 제기를 의장소(儀仗所)로 옮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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