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계해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속대전(續大典)》에, ‘무릇 결장(決杖) 대상자는 시종(侍從)이라 할지라도 가리지 않고 결장하되, 겸방어사는 곧 2품관이므로 그 관직만 파면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왕 때 광주 부윤(廣州府尹)이 무슨 일로 결장을 받게 된 것을 대신이 당(唐)나라의 고사 및 형벌이 상대부에게는 가해지지 않는다는 의리를 내세워 다른 벌로 고쳐서 내릴 것을 청하니, 윤허되었고, 당저조(當宁朝)에 들어와서도 전 풍덕 부사(豐德付使) 이여적(李汝迪)과 전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이조(韓頤朝)가 다 같이 2품관을 거친 관계로 결장을 면제하고 파직만 하라는 명을 내린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전 경주 부윤(慶州府尹) 정홍제(鄭弘濟)가 전임 남양 군수(南陽郡守) 때의 일로 인하여 결장의 율로 감죄되었으나, 이미 2품의 실직을 거쳤으므로, 결장을 면제하고 속전(贖錢)을 받은 다음 유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어머니를 죽인 죄인 악지(惡只)가 사형을 받았다. 악지는 공홍도 보은현 백성인데,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병중에 악몽을 꾸었는데, 배 안에 갇혀 있던 중, 어떤 관원이 곁에 있는 뱃사공을 가리키며, ‘이 사공을 죽이고 나서야 네가 살 수 있다.’라고 하기에 칼로 찔렀습니다. 잠을 깨어서 보니 바로 제 어머니였습니다."
하였다. 공홍 감사 홍봉한(洪鳳漢)이 사유를 갖추어 장문(狀聞)하였는데, 경차관을 보내어 안문하여 사실을 알아낸 다음, 의금부에 잡아올려 삼성 추국(三省推鞫)196) 을 설행하여 죄안을 결정하고 법대로 정형(政刑)을 집행한 것이었다.
10월 2일 갑자
조상명(趙尙命)을 대사간으로, 남유용(南有容)을 의정부 사인으로, 민계(閔堦)를 집의로, 박홍준(朴弘儁)·정한규(鄭漢奎)를 지평으로, 홍서(洪曙)를 정언으로, 윤광소(尹光紹)를 부교리로, 김시형(金始炯)을 좌참찬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재로가 민택수의 상소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해직을 빌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도 진사 이진흥(李震興)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비답하기를,
"돌아가 학업이나 닦으라."
하였다.
10월 3일 을축
병조와 도총부에 명하여 향군(鄕軍)에게 동옷을 골라 주라고 하였다.
10월 4일 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달이 남두(南斗)로 들어갔다.
남유용(南有容)을 부응교로, 윤지태(尹志泰)를 사간으로 삼았다.
황해도 유생 김갑린(金甲鱗)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 송시열·문정공 송준길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시사자(試射者)에게 상을 내릴 적에, 육량시(六兩矢) 한 발을 1백 50보 거리에서 맞힌 자는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수령의 경우 당상은 20삭(朔), 당하는 30삭, 시종은 15삭으로 한정하여, 비록 승서(陞敍)의 명이 있더라도 약간 오래된 뒤에는 이 규정을 적용하지 않게 하였다. 예빈시와 전옥서의 참봉 두 자리는 중인·서얼의 자리로 할 것을 모두 법식으로 정하도록 하였는데, 그뒤에 우의정 정석오(鄭錫五)가 말하기를,
"예빈시와 전옥서의 참봉을 중인·서얼의 자리로 한다면, 구애되는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 청컨대 사대부·중인·서얼 간에 융통하여 차의(差擬)하기를 일체 지난날의 오부(五部) 참봉의 규례처럼 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5일 정묘
황경원(黃景源)을 의정부 사인으로 삼았다.
10월 6일 무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7일 기사
심육(沈錥)을 대사헌으로, 이양원(李養源)을 지평으로, 송명흠(宋明欽)을 자의로, 김약로(金若魯)를 공조 판서로, 서명신(徐命臣)을 집의로, 윤동준(尹東浚)을 사간으로, 이득종(李得宗)을 정언으로, 민백창(閔百昌)을 수찬으로, 황경원(黃景源)을 교리로, 윤지태(尹志泰)를 필선으로 삼고,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에게 문충(文忠)의 시호를, 증 영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충헌(忠憲)의 시호를, 이조 판서 정세규(鄭世規)에게 경헌(景憲)의 시호를, 증 이조 판서 박훈(朴薰)에게 문도(文度)의 시호를, 증 좌찬성 김식(金湜)에게 문의(文毅)의 시호를 내렸다. 이 때에 임금이 송인명의 시호를 곧장 의논하지 않는다고 누차에 걸쳐 칙료를 내리므로, 홍문관에서 문민(文敏)으로 올렸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춘방(春坊) 때부터 이미 충성이 드러났는데, ‘충’ 자의 시호를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고 어필로 충민(忠敏)으로 고쳤는데, 뒤에 연신(筵臣)이 충민은 국조의 선휘(先諱)에 구애되는 바가 있다고 앙달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시호도 처음에 이 시호로 정하다가 선대에 구애가 되기 때문에 충경(忠敬)으로 고쳤다. 내가 과연 잊고 있었다."
하고, 시호 단자를 들여오라고 명하여 어필로 ‘민(敏)’ 자를 ‘헌(獻)’ 자로 고친 다음, 하교하기를,
"고 좌상의 시호를 이미 친히 썼기 때문에 준례에 따른 서경은 할 수 없다. 해조로 하여금 곧장 선시(宣諡)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에서 나이 90세가 넘은 부인들을 뽑아서 관작을 봉해 줄 것을 청하였으니, 옛 규례였다.
10월 8일 경오
어떤 별이 삼성(參星) 밑으로 흘러갔다.
처음으로 영변(寧邊)에 사부(四部)를 설치하였다. 처음 형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영변은 중요한 요충지인데도 군위(軍衛)가 취약하니, 청컨대 안주(安州)의 전례에 따라 사부를 설치하여 관방을 튼튼히 하소서."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품정한 것이었다.
10월 10일 임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어떤 별이 삼성 밑으로 흘러갔다.
10월 11일 계유
김약로(金若魯)를 판의금으로, 이덕중(李德重)을 대사간으로, 홍봉한(洪鳳漢)을 승지로 삼았다.
왕세자가 궁관을 보내어 증 영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치제하게 하였다.
우참찬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아울러 하사한 식품도 사양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서 돈독히 불렀다.
10월 13일 을해
형조 참판 정익하(鄭益河)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계하(啓下)된 일차 죄수(日次罪囚)197) 가 21명이나 되고 본조의 일차 죄수도 21명이나 되며, 이밖에 죄명이 심히 무거워서 갑작스럽게 함부로 의논할 수 없는 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모릅니다. 또 수감된 기간을 살펴보면 혹은 10여 년 혹은 4, 5년이나 되고, 형문 횟수를 물어 보면 혹은 백여 차례, 혹은 수십 차례라고 합니다. 이미 일차에 들어갔으므로 그 체제는 나름대로 구별이 되었다고 하겠으나, 형문관이 된 자는 오직 준례대로의 가형을 일삼을 뿐이고 죄수가 된 자는 죽기를 한하고 아픔을 참을 궁리를 할 뿐이니, 필경에 가서 죄안을 닦아 입계하는 자는, ‘종전의 공초와 아무 가감이 없다.’라고 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성덕으로서는 비록 측달한 마음이 다하여도 구중 궁궐 깊은 곳에서 이와 같은 사정들을 어떻게 다 통촉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신의 관직을 체차하고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서, 전원이 회좌한 자리에서 먼저 계하한 일차 죄수 중 조금 억울하다 싶은 자를 상세히 고안(考案)한 다음, 말미에 자기의 의견을 덧붙여서 상재(上裁)의 자료가 되도록 하고, 다음에는 본조의 일차 죄수 중 누차 형을 받고도 승복하지 않은 자를 그 죄범에 따라 다시 신문한 다음, 의심쩍은 데가 있는 자는 가벼운 죄에 부치고 의심쩍은 데가 없는 자는 종전대로 형신을 가하도록 하여, 옥사가 지체됨으로 해서 화기를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등대 때에 품처하라고 비답하였다. 뒤에 연중(筵中)에서 임금이 정익하에게 말하기를,
"계하한 일차 죄인과 본조 일차 죄인을 복계 때의 단초(單抄)에 의하여 내가 경을 불러 처리하겠다."
하였다.
10월 14일 병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상도 유학 신후형(愼後亨)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 송준길(宋浚吉)의 안음 서원(安陰書院)에 사액을 내릴 것을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동지(同知) 김응호(金應豪)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들의 선조인 신라 경순왕의 능묘를 오래 전에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장단(長湍)에서 그 지석(誌石) 및 신도비(神道碑)가 나왔으나, 왕묘에 대한 일은 사삿집의 무덤과는 그 사례가 달라서 벌목을 금지하는 절차와 석물을 세우고 수호자를 두는 일은 조정의 지시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조정에서 사정을 참작하여 규정을 허락하여 준다면, 위로는 전대(前代)를 추념하는 성주(聖主)의 뜻을 드러낼 수 있고, 아래로는 추원 보본(追遠報本)하려는 신들의 정성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대신들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함경 감사 이종성(李宗城)을 인견하였는데, 이종성이 아뢰기를,
"격려하는 도구로는 반드시 상격(賞格)이 있어야 하는데, 본도는 무명이 극히 귀합니다. 청컨대 요군목(遼軍木)198) 1백 동(同)을 얻어 두 해 동안의 상을 주는 밑천을 마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에 품처하라고 명하고, 또 활 30장(張)을 내리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무사들을 권장하는 데 쓰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5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홍문록(弘文錄)199) 을 시행하여 민백상(閔百祥) 등 26명을 취하였다.
10월 17일 기묘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8일 경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승지와 유신을 불러 어제(御製) 심감문(心鑑文)을 받아 쓰게 한 다음, 이어서 하교하기를,
"황형(皇兄)께서는 나와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서연이나 소대를 할 적이면 번거로움도 꺼리지 않고 자주 친림하여 이따금씩 글을 먼저 읽고 나서 나에게 읽어 볼 것을 권하였으므로, 시강원의 관원들이 옥음(玉音)을 들을 수가 있었다. 아! 지금에 와서는 비록 조강과 주강을 열고는 있으나, 그 누가 와서 들으며 그 누가 권면하겠는가?"
하고, 이어 오열하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10월 19일 신사
이 때에 서울과 지방에 도둑이 많이 발생하였으므로 연신(筵臣)이 도둑의 체포를 엄히 하지 못한 토포사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진실로 어루만져 주고 감싸준다면 아무리 흉년을 만났더라도 백성들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혹시 기찰을 하더라도 양민이 죄 없이 걸려드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0월 20일 임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23일 을유
이정보(李鼎輔)·이유신(李裕身)을 승지로, 김상적(金尙廸)을 대사간으로, 이세사(李世師)를 정언으로, 권상일(權相一)을 집의로, 최규태(崔逵泰)를 장령으로, 윤광소(尹光紹)를 헌납으로, 안윤행(安允行)을 지평으로, 김시찬(金時粲)을 응교로, 윤득재(尹得載)를 수찬으로 삼았다.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을 호위 대장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대망(臺望)을 허통하여 주고서도 아직 실천하지 못한 수령은 또한 시종의 예에 따라 15삭(朔) 만에 승진시키고, 새로 허통된 자일 경우에는 이 삭수에 상관없이 주석을 달아서 비의(備擬)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병조 판서 원경하(元景夏)가 훈련원 정에 허통된 외임(外任) 무신 역시 대망에 허통한 예에 따라 삭수를 구애받지 않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24일 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종신 광춘군(光春君) 이권(李棬)이 상소하기를,
"중종 대왕의 난역을 물리치신 반정(反正)은 하늘에 응하고 인심에 순응한 것인 만큼, 묘호를 ‘조(祖)’로 함이 마땅하지, ‘종(宗)’으로 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존호를 추상(追上)하는 일은 명나라의 고사에서도 고징할 수 있고, 휘호를 더 올리는 일은 본조(本朝)의 옛 제도에 엄연히 있으며, 중흥의 세월이 거듭 돌아오면서 재건의 공업이 더욱 빛나고 있으니, 만약 이러한 때에 서둘러 휘호의 추상을 거행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성세(聖世)의 결례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은 막중하고도 막대하여 2백여 년 동안 열성께서도 하지 못한 일이다. 오늘날에 어찌 감히 경솔하게 논의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25일 정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27일 기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 【지평 안윤행(安允行)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산 부사(理山府使) 민광우(閔光遇)는 전지(銓地)에 아첨하여 갑자기 비옥(緋玉)200) 에 올랐다가 열 달 안에 지레 체직되었는데도 자급을 환수하는 조치가 없으니, 국가의 금석 같은 법전이 당시 재상의 사인(私人)으로 인하여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민광우에게 제수한 가자를 준례에 따라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8일 경인
지중추 부사 이재(李縡)가 졸(卒)하였다. 이재의 자는 희경(熙卿)이요, 본관은 우봉(牛峯)이니, 고 상신(相臣) 이숙(李䎘)의 손자였다. 품성이 맑고 순수하며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인망이 당대에 뛰어났었다. 신축년·임인년의 화가 일어났을 적에 그의 숙부인 판서 이만성(李晩成)이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죽자, 드디어 어머니를 모시고 인제(麟蹄)의 설악산으로 은퇴하여 벼슬길에 생각을 끊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을사년201) 경화(更化) 이후에는 누차 부름을 받았으나, 단 한 번 서울에 들어와서 임금을 뵙고 만언(萬言)의 봉사(封事)를 올려 입을 다물고 어물어물하기만 하는 시론(時論)의 폐단을 진술하였다. 하지만 이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탕평책에 뜻을 기울이고 있는 참이어서, 그의 말을 등한히 여겨 받아들이지 않자, 드디어 용인(龍仁)으로 물러나 살았다. 이에 사방에서 배우러 찾아온 자가 매우 많았고, 근세의 모든 선비들이 그를 종장(宗匠)으로 삼았다. 한원진(韓元震)은 선정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인데, 그가 심성(心性)을 논한 말이 이재의 말과 합치되지 않아서 이재가 시를 지어 변론하기도 하였다. 이때에 와서 죽으니, 나이 67세였다. 학자들이 도암 선생(陶菴先生)이라고 일컬었다.
10월 29일 신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밤에 어떤 별이 묘성(昴星) 밑으로 흘러갔다.
홍문관 제학 원경하에게 명하여 태학에서 선비들을 시험 보이고 장원을 한 진사 심국현(沈國賢)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서명신(徐命臣)을 사간으로, 이게(李垍)를 정언으로, 오언유(吳彦儒)를 교리로, 홍익삼(洪益三)을 수찬으로 삼았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망우초(莽牛哨)에 관군(官軍)을 설치하려던 일을 중지시켰다고 자문이 이미 나왔습니다. 이번의 사은 표문(謝恩表文) 속에 책문을 물리는 것과 관군의 설치등 두 가지의 사항으로써 말을 잘 만들어 자문을 다시 지어 사신이 가는 편에 곧 부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민광우의 일만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수일 뒤에 하교하기를,
"민광우의 일은 이것이 서로 버틸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좇았으나, 다시 살펴보니, 《대전(大典)》에 실린 것은 열 달 이내에 도체(圖遞)202) 하는 일인데, 민광우의 경우는 도체가 아니고 바로 특체(特遞)이니, 그 자급을 내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진주 정사(陳奏正使) 여선군(驪善君) 이학(李壆), 부사 조영국(趙榮國)을 인견하였다. 이 때에 책문을 물리는 것과 관병의 설치를 중단하는 일로 인하여 진주사를 보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학 등이 복명(復命)을 하므로,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예부의 회자(回咨)에 이르기를,
"예부에서 〈귀국이〉 국경 문제를 우려하여 양해를 바라는 일에 대하여, 주객사(主客司)가 안정(案呈)을 하여 본년 7월 23일에 병부의 자문을 준(准)하여 무선청리사(武選淸吏司)가 병과(兵科)에 안정을 하여 오므로, 본부가 제주(題奏)한 종전의 안건 등에 대하여 건륭(乾隆) 11년(1746) 7월 21일에 제주하여 그날로 황지(皇旨)를 받든 바, 망우초(莽牛哨)에 관병을 증설하여 국경을 순찰하는 안건은 이전에 병부의 논의에 의거하여, 다시 해당 장군을 시켜서 마음을 써서 참작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어 달이당아(達爾黨阿)의 주본(奏本)에 의거하여 웅악(熊岳)의 부도통(副都統) 서이문(西爾們)을 시켜 친히 가서 관군을 설치한 곳을 조사하도록 하니, 조선과는 실로 서로 길이 통하지를 않아 혼잡해서 소요가 증가될 염려는 없었고, 또 국경 안팎의 백성들에게 다같이 유익한 점이 있는데, 해국왕(該國王)이 또 진주하여 불편하다고 하니, 그 사연이 간절하여 현지의 정세가 실제로 어떠한지를 끝까지 알 수가 없으므로, 병부 상서 반제(班苐)를 시켜 역마를 타고 달려가서 서이문과 함께 현지의 정세를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관군을 설치하는 곳이 중국 국경 안이어서 해국(該國)과는 털끝만큼도 서로 관계되지 않는다고 하니, 이러고 보면 관병을 증설하고 관방(關防)을 두는 것은 불법 행위를 막고 변방(邊防)을 숙청(肅淸)시키는 일로 의당 시행하여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해국왕이 간청한 것을 시행하는 것도 불편합니다. 만약 그곳이 혹시라도 개의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면 백성들이 뒤섞여 살 수도 있을 것이므로 실상에 의거하여 주문(奏聞)하였더니, ‘짐(朕)이 별도의 유지를 내릴 때까지 기다려서 종전의 논의를 따르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달이당아의 주문을 접수한 바, 연변의 토지를 개간하는 안건은 해국왕이 이미 봉황성(鳳凰城)의 책문(柵門) 바깥쪽에 1백여 리의 빈 땅을 남겨 두어 국경 안팎을 멀리 띄워 놓았으므로, 인민이 집중되면서 서로 뒤섞이어 사건이 증가되는 일은 모면할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이 주문은 곧 시행하여야 할 일입니다. 봉황성의 책문을 늘리는 곳은 해국왕의 정지해 달라는 청을 참조하여 해부(該府)로 하여금 전유(傳諭)하게 하였으니, 해국왕은 아십시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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