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계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11월 4일 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어떤 별이 묘성 밑으로 흘러갔다.
윤휘정(尹彙貞)을 대사간으로, 조윤제(曹允濟)를 장령으로, 조명건(趙明健)을 필선으로, 홍낙성(洪樂性)을 사서로, 이태중(李台重)을 겸 보덕으로, 민백창(閔百昌)을 겸 사서로 삼았다.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거행하여 이덕해(李德海) 등 6인을 취하였다.
선혜청 당상 정우량(鄭羽良)이 비축된 무명이 바닥이 나서 공가(貢價)를 지급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병조의 무명 1백 동(同)을 꾸어 줄 것을 청하였고, 병조 판서 원경하(元景夏)가 금위영의 말먹이 콩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선혜청의 콩 5백 석을 꾸어 줄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1월 5일 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고, 숙위하는 군병에게 짚방석을 지급하라고 명하였으니, 날씨가 춥기 때문이었다.
11월 6일 정유
임금이 사은 겸동지 정사 해흥군(海興君) 이강(李橿), 부사 윤급(尹汲), 서장관 안집(安𠍱)을 환경전(歡慶殿)에서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무늬 있는 비단의 반입을 각별히 엄칙하되, 이 일은 서장관이 주관하여 힘을 기울여 엄금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선온(宣醞)을 명하였다. 이때에 사치가 날로 더 심하여, 임금이 그 폐단을 깊이 염려한 나머지 무늬 있는 비단의 반입을 금지하라고 명하고 사행에게 신칙하여 사들여 오지 못하도록 하였었는데, 이때에 와서 또 직접 신칙한 것이었다.
11월 7일 무술
임금이 각사의 구임(久任)한 낭관을 소견하여 병폐들을 물어 보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우의정 정석오(鄭錫五)가 장차 도당록 회권(都堂錄會圈)을 시행하려고 비국에 일제히 모여 그 가부를 논란하였으나, 끝내 귀결을 짓지 못한 채 밤이 깊어서 드디어 자리를 파하고 사록(司錄)을 시켜 와서 아뢰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였다.
수어청에서 아뢰기를,
"연환(鉛丸)이 부족하니, 청컨대 강계(江界)의 목반동(木盤洞)에서 납을 채취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8일 기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환경전에 나아가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론하고 서문을 지어 내린 다음, 교리 황경원(黃景源)에게 이를 써서 운각(芸閣)에 보내어 출간시키라고 명하였는데, 황경원이 세종 때 지은 《사성통해(四聲通解)》를 《증보운고(增補韻考)》에 부주(附註)하여 간행할 것을 청하니, 수찬 홍익삼(洪益三)이 아뢰기를,
"형조 참의 홍계희(洪啓禧)가 여기에 뜻을 두어 또 책을 만들어서 수규(首揆)에게 참고를 얻었는데, 규모가 상세하고 치밀하니, 그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간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 회좌(會坐)에서 요상(僚相)은 도당록(都堂錄)의 사람 수가 양쪽이 서로 대등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반드시 그 비율을 먼저 정하고 나서야 권점(圈點)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천지가 인재를 냄에 있어 기어코 하나하나 서로 비율을 맞추어 내지는 않는 만큼, 이번에 다소의 격차가 있는 것은 형세가 본시 그러한 것이므로, 그 인물의 어떠한가를 따지지 않고 오직 비율에만 힘쓰는 것은 결코 사리가 아니라고 하여, 반복하여 논란하였으나, 끝내 합의를 보지 못한 채 밤은 이미 깊어 가고 결말을 지을 가망은 없기에 부득이 계문하고 물러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도당록 회권이 대료(大僚)들이 서로 합의를 보지 못함으로 해서 권점을 이루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니, 부끄럽고도 두려운 나머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성상께서 늘 호대(互對)하는 것은 옳지 못하므로 오직 인재를 추려서 써야 한다고 하교하셨으므로 신은 오직 인재를 추려 쓴다 해도 기필코 다 공정할 수는 없으므로 차라리 호대하는 편이 낫다고 아뢰었습니다만, 이번의 사세는 실로 구완(苟完)을 이루기도 어려운 데가 있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하였으며, 우의정 정석오도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붕당의 폐습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다만 관직과 명리가 공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칙려하시는 것이나 신들이 이어받드는 것이나 다같이 오직 공평하게 등용하여 편파됨이 없게 하자는 것인데, 이번의 도당록 회권은 이른바 공평하게 등용하여 편파됨이 없게 하자는 것인데, 이번의 도당록 회권은 이른바 반드시 다투어가며 하는 선발입니다. 여기에 혹시 조금의 편파라도 있다면 인심의 불평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어제의 회좌에서 가부를 지을 즈음에 논의가 서로 어긋난 것이 있는 이상, 신이 어떻게 억지로 굽혀가며 구차스럽게 행동을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상신들이 서로 화합을 이룬 후에야 국사를 처리할 수 있겠다고 비답하고, 이어 도당록 회권에 응당 참석할 경재(卿宰)들과 함께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11월 9일 경자
임금이 대신과 경재를 환경전에서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차자에 대한 비답은 이미 하유하였거니와, 서로 비율을 맞추는 정사(政事) 역시 색목(色目)의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오직 인재를 가려 쓰는 과정에서 저절로 비율이 맞는다면 좋겠지만, 만약 서로 비율을 맞추려는 마음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곧 색목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하니,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하늘이 인재를 낼 적에 어찌 이쪽에 한 사람, 저쪽에 한 사람으로 서로 비율을 맞추어 출생시킬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정석오는 말하기를,
"정미년203) 이후에 비로소 호대(互對)하는 정사를 펴 왔는데 의지할 만한 몇몇 대신들이 이제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이 병조 판서와 같이 전조에 있을 적에 주상께서 서로 호대하는 정사를 시행할 필요는 없다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에 본래의 규모를 버리기는 어렵다는 뜻을 앙달하였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조제(調劑)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이제는 또 분규를 푸는 것을 일삼아야 하겠다. 경들이 3백 년 이래 없었던 일을 벌이고 있으니, 동료들 간에 어찌 난처하지 않겠는가? 정선(精選)과 광취(廣取)를 물론하고 기필코 오늘 이내로 시행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정우량이 말하기를,
"정주(政注)에 있어 호대하는 것은 본시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극선(極選)을 하는데 어찌 호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벌만으로 사람을 취하는 것은 아주 옳지 못하다. 권점을 받은 사람이 그 직책에 걸맞지 않을 것 같으면 경들을 문책하겠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서 회권을 하였는데, 6점에는 정순검(鄭純儉)·민백상(閔百祥)·김양택(金陽澤)·윤동도(尹東度)·김문행(金文行)을 뽑고, 5점에는 임집(任)·김시위(金始煒)·성범석(成範錫)·이형만(李衡萬)·이이장(李彝章)·윤상임(尹尙任)·이응협(李應協)·조명채(趙命采)·조중회(趙重晦)·이규채(李奎采)·한광회(韓光會)·안집(安𠍱)·김선행(金善行)·홍우한(洪羽漢)·이의중(李毅中)·신회(申晦)·이게(李垍)·유언민(兪彦民)·성천주(成天柱)·홍낙성(洪樂性)·이세사(李世師)·황합(黃柙)·윤봉오(尹鳳五) 등 28명을 뽑았다. 이의중은 전 봉교(奉敎)로서 김재로의 소청으로 6품에 오르고, 성천주는 전 설서(說書)로 정우량의 소청으로 6품에 올랐다.
조명정(趙明鼎)을 사간으로, 김약로(金若魯)를 형조 판서로, 조영국(趙榮國)을 병조 참판으로, 서명신(徐命臣)을 보덕으로, 윤봉오(尹鳳五)를 필선으로, 민광우(閔光遇)를 승지로, 강봉휴(姜鳳休)를 장령으로 삼았다. 부사직 황정(黃晸)을 가선 대부의 품계로 올렸으니, 의릉(義陵)을 개축할 때에 예조 당상이었기 때문이었고, 이수연(李守淵)을 특별히 6품직으로 승진시켰으니, 초선(抄選)의 예에 따라 조용(調用)한 것이었다. 이수연은 영남 사람으로서 선정 이황(李滉)의 후손인데, 누차에 걸쳐 시직(侍直)·교관(敎官) 등의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는데, 이 때에 와서 정우량의 아룀으로 인해서 이 명이 내려진 것이었다.
유신들을 불러서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과 《성학십도(聖學十圖)》를 강하고는 도당록 단자를 들여오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예전에는 18학사가 있더니, 오늘날은 28학사가 있다."
하였다. 수찬 홍익삼(洪益三)이 말하기를,
"이응협(李應協)은 문장에는 여유가 있다 하겠으나 본래부터 광병(狂病)이 있어서 이따금씩 발작을 하니, 결코 강연(講筵)의 출입에는 부적합합니다. 이형만(李衡萬)은 재주는 있지마는 나이 젊은 문관이 명예의 길을 너무 조급히 서두른다는 비난이 있으니 역시 인망 밖의 사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무 지나치다. 그만두어라."
하였다. 홍익삼이 말하기를,
"근래 관방(官方)이 허물어져서 구성필(具聖弼)이 백도(白徒)의 음관으로서 문(文)·음(蔭)·무(武) 세 길에 아무 거침없이 판결사의 관직에 오르기까지 하였으니, 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병조의 군문(軍門)에 명하여 구성필을 무신의 예에 따라 조용하도록 하였다. 홍익삼이 또 외방의 절수(折受)204) 에 따른 폐단을 극력 진달하였는데, 이때 홍익삼이 충원 현감(忠原縣監)에서 막 체직되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혜국(惠局)205) 의 절수는 잘못된 사례이다. 명분 역시 바르지 못한 일이니, 일체 엄금하여 잘못된 사례를 말도록 하라."
하였다.
홍문관에 명하여 《율곡전서(栗谷全書)》를 가져다 베껴 써서 들이라고 하였으니, 유신 황경원(黃景源)이 간행을 주청하였기 때문이었다.
11월 10일 신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하원(李夏源)을 공조 판서로, 민응수(閔應洙)를 판의금으로, 이중협(李重協)을 도승지로, 조재호(趙載浩)를 승지로, 임정(任珽)을 이조 참의로, 민백상(閔百祥)을 부교리로, 윤봉오(尹鳳五)·성천주(成天柱)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칠원 현감(漆源縣監) 임석헌(任錫憲)을 특별히 부교리에 제수하였다. 임석헌은 임찍이 임금이 태학에 순시를 나갔을 적에 강생으로서 입시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임금이 임석헌은 어찌하여 도당록에서 빠졌는가를 물으니, 병조 판서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빼어 버리자고 극력 주장하였습니다."
하고,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이조 판서가 일찍이 임석헌을 멀고 나쁜 곳으로 좌천시켰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연유인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임석헌이 지난 날 춘방(春坊)에 있을 당시 대론(大論)이 한창 벌어지던 날에 성묘를 핑계대어 상소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었는데, 그뒤에 유건기(兪健基)·송창명(宋昌明)도 대신(臺臣)으로서 임석헌을 본받아 고의로 피하였습니다. 때문에 정우량이 이것으로써 임석헌에게 벌을 주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따로 조용하시겠다면 어찌 길이야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드디어 특별히 제수하라는 명을 내렸다.
영남 유생 김상기(金相箕)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 송시열과 송준길을 문묘에 종사(從祀)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원경하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며칠 전에 군마의 먹이 콩을 선혜청에서 빌려 쓸 것을 진달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만, 전례를 상고하여 보니 이러한 일은 없었습니다. 신으로부터 이러한 일을 창시할 수는 없습니다. 호조가 금위영에서 꾸어간 것이 그 수량이 매우 많으니, 이번에는 호조의 세태(稅太) 5백 석을 빌려 쓰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1월 11일 임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동지 하례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2일 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13일 갑진
호조에서 강계(江界)의 목반동(木盤洞)에서 은을 캐어다 경비에 보태어 쓸 것을 계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14일 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일기청 당상(日記廳堂上) 홍계희(洪啓禧)가 선정신 송시열의 기해 독대 연설(己亥獨對筵說)을 올렸으니, 이는 전에 이미 베껴들이라고 명한 것이었다. 임금이 친히 보고 나서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고 참판 이희조(李喜朝)가 올린 것을 보았는데, 이 본(本)과는 조금 달랐다."
하였다.
11월 16일 정미
천둥이 치며 우박이 내렸다.
조영국(趙榮國)을 대사헌으로, 조명겸(趙明謙)을 대사간으로, 심육(沈錥)을 성균관 좨주로, 김상적(金尙廸)·엄우(嚴瑀)를 승지로, 민계(閔堦)를 집의로, 이구령(李耉齡)을 사간으로, 전명조(全命肇)·김한운(金翰運)을 장령으로, 권기언(權基彦)을 지평으로, 정순검(鄭純儉)을 정언으로, 김희로(金希魯)를 호조 참판으로, 홍상한(洪象漢)을 예조 참판으로, 황정(黃晸)을 공조 참판으로, 유언민(兪彦民)을 문학으로, 조재덕(趙載德)을 헌납으로 삼았다.
정언 이게(李垍)가 상소하기를,
"지난날 유현(儒賢)은 세상에 드문 대우에 감격한 나머지, 멀리 은둔하려던 마음을 돌이켜서 변함없는 혈성(血誠)으로 군부를 위하여 흉역을 성토하였으니, 암흑의 오랜 세월 끝에 대의가 장차 밝혀지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박문수(朴文秀)는 유독 무슨 심장으로 감히 저지할 궁리를 내어 흉악 패도한 소를 올려 여러 역적들을 두둔하는 데 급급해 하고 또 감히 대훈(大訓)을 빙자하였다는 말입니까? 아! 전하의 그지없는 은혜를 저버리고 마음 달갑게 편당에 사정을 두어 대의와 겨루었으니, 그의 죄상을 어찌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습니까? 그 때의 연석(筵席)에서, ‘옛 버릇을 참지 못한다.’거나 ‘말이 잘못되고 패망한다.’ 등의 하교가 있었으니, 박문수의 죄상을 전하께서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특별히 평일에 권대(眷待)하던 뜻에서 차마 하루아침에 물리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잠시 가벼운 유배를 보내었다가 곧바로 서둘러 수용하여 묘당의 전형관 자리로 급급히 녹용하면서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여기고 있으니, 어찌 너무도 한심스러운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박문수에게 삭출(削黜)의 형을 시행하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박문수의 죄상이 저러하고 그 당시 진신들의 상소에서 그 죄를 성토한 것 역시 매우 준엄하였으니, 아무리 평일의 정분이 절친하다 해도 진실로 본시 엄격한 방한(防限)을 두어 징토하는 의리를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형조 참판 정익하(鄭益河)는 진신들의 상소 중의 한 사람으로서 박문수와 동시에 나포되어, 한 자리에 얼굴을 맞대고 대안(對案)하였는데, 다정스럽게 담소를 하며 반기고 좋아하는 모습이 평일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아! 한편으로는 토죄를 하고 한편으로는 친밀하게 사귀고 있는 그의 처사는 너무나 어그러졌으니, 옛사람의 목욕 청토(沐浴請討)206) 하는 의리는 아마도 이렇지는 않을 듯합니다. 신은 정익하를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부모의 원수와는 천하를 같이하지 않는다.[父母之仇 不共天下]’라고 하였으니, 성인이 남긴 교훈이 어찌 깊고 절실하지 않겠습니까? 근일 세도가 날로 허락되면서 인심이 극도로 타락하여, 명리의 길에 급급한 나머지 부모의 원수도 전혀 잊어버렸으니, 식자들이 한심해 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신천 군수(信川郡守) 이복상(李復祥)은 바로 고 상신 이건명(李健命)의 손자로서, 일찍이 성균관에서 양 대신(大臣)의 시체에 참형을 가하라는 상소에 참여하였던 자와 같이 식당에 들어간 일로 인하여 사람의 놀라움과 분노가 지금까지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또 전에 문화 현령(文化懸鈴)에 있을 당시 시체에 참형을 가하라는 장계에 참여한 사람의 아들을 찾아가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 승상이 후사를 잘 두지 못하였다.’라고 하는 말을 하게까지 하였습니다. 아! 신축년·임인년의 참화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써늘해지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은, 여느 사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그의 자손이겠습니까? 원통하고 억울함이 그 어떠한 일이기에, 원수를 금방 잊어버리기가 이다지 심하다는 말입니까? 신은 이복상을 사판에서 지워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준엄한 비답을 내리고 그의 관직을 체차시켰다.
우의정 정석오(鄭錫五)·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박문수를 의망한 일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잘못을 자술하니, 비답을 내려 위유하였다.
지평 안윤행(安允行)이 상소하기를,
"합계가 발의되고 난 뒤에 까닭없이 패초를 어긴 자와 외방에 나가 있었다고 핑계댄 대관(臺官)을 모두 견책하여 파면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7일 무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기안(鄭基安)을 지평으로, 이중조(李重祚)를 정언으로, 이광식(李光湜)을 집의로, 남유용(南有容)을 보덕으로, 유우기(兪宇基)를 필선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사서로, 박사눌(朴師訥)을 설서로, 이태중(李台重)을 부응교로, 윤동준(尹東浚)을 겸 보덕으로, 홍익삼(洪益三)을 겸 필선으로, 민백상(閔百祥)을 겸 문학으로, 임박(任璞)을 문학으로 삼았다.
호조 판서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여 현재 맡고 있는 선혜청 당상의 직책을 해임하여 줄 것을 청하였는데, 우의정 정석오(鄭錫五)가 말하기를,
"종전에도 겸하여 살핀 예가 많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체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수찬 홍익삼(洪益三)이 어제 있었던 우레의 재변으로 인하여 진계하고 진언을 구하는 전교를 내릴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수령을 각별히 선발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조에 명하여 십고 십상(十考十上)207) 인 사람은 경직·외직을 막론하고 먼저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9일 경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황정(黃晸)을 대사간으로, 윤지태(尹志泰)를 사간으로, 권항(權杭)·홍서(洪曙)를 정언으로, 이광덕(李匡德)을 우윤으로 삼았다.
임금이 삼복(三覆)208) 을 거행하여 두 죄수를 특별히 참작하여 처리하라고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옛날 당(唐)나라 현종(玄宗)은 인의(仁義)를 가차한 군주라고 하는데도 감옥이 텅 비어 까치가 와서 둥지를 쳤다고 하는데, 내가 부덕하여 임어한 지 몇 년이 되었는데도 교화가 행해지지 않아서 한 해 동안의 여수(慮囚)209) 가 10여 명에 이르렀으니, 마음에 늘 개탄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오늘날의 여수는 열 숫자 안에 들기는 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감옥에 가둘 죄수가 없어서 이러한 것이겠는가? 법의 기강이 해이하고 관리가 안락과 재물만을 탐하여 이러한 것이다. 한 달에 세 번 추문하는 것도 격식대로 거행하지 못하여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채 옥중에서 굶어 죽고 있으니, 아! 저 도둑들을 다스릴 적에 한결같이 혹형만 가하고 옥석을 가리지 못한 것이 그 얼마이겠으며, 몸이 관장이 되어 제 위세만 믿고 제 분노가 치미는 대로 죄없는 자를 함부로 죽인 것은 또 몇 사람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어찌 한갓 도둑을 다스리는 관리와 관장이 된 자만의 잘못이겠는가? 이는 위에 있는 자의 과실이니, 어찌 서로 면려하는 의리가 없겠는가? 경외의 도둑 다스리는 관리들을 엄히 신칙하고 또한 여러 도에 하유하여 각 고을들을 각별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남태량(南泰良)·유만중(柳萬重)·한덕전(韓德全)·김상익(金尙翼)·이철보(李喆輔)·송익보(宋翼輔)를 승지로 삼았다.
간관으로서 밖에 나가 있는 자를 모두 먼저 체차한 뒤에 금추(禁推)210) 하라고 명하였다. 곧바로 여러 대관을 차출하라고 명하였는데, 모두가 또 패초를 어기므로, 임금이 매우 노하여 그 관직을 파면시켰다. 형조 참의 유최기(兪最基)를 대사간으로 특별히 제수하였는데, 유최기는 곧장 나와서 숙배하고 지평 권기언(權基彦)·수찬 홍익삼(洪益三)과 함께 입시하였다. 유최기가 말하기를,
"근래 삼사의 합계로 인하여 대관이 된 자가 대부분 회피를 하고 한 사람도 행공(行公)하는 자가 없으니, 기강이 너무 해이해졌습니다. 국가에 만약 무슨 위급한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준엄하신 하교로 다그쳐 출척을 하심으로 인하여 언로가 막혀 버린 소치입니다. 이러고서야 충신·역적과 옳고 그름을 어느 때에 가서 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주달한 말이 옳다."
하였다. 홍익삼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매번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내리실 적마다 아래에 있는 신하들이 황공하여 위축됨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에 있는 사람이 비록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내렸다 하더라도 아래에 있는 자로서는 오직 마땅히 해야 할 소임을 다할 따름이다."
하였다.
유최기 등이 임금이 누차 엄중한 전교를 내려 이광좌(李光佐)에 대한 계사 중 약원을 설치하지 않은 한 대목을 빼어 버리도록 명하였다 하여, 전에 하던 합계를 거듭 아뢰니, 임금이 전교를 내려 통절히 꾸짖고 다그쳐 정계(停啓)하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세 사람에 대한 일은 이미 들어주었으니, 이 계사를 어찌 멈추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하니, 유최기가 말하기를,
"합계가 그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신이 감히 임의로 정계를 하겠습니까? 그리고 3백 년 이래의 대관의 체모를 전하께서 어찌 이처럼 협박하십니까?"
하자, 임금이 화를 버럭 내어 책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홍익삼을 불러 말하기를,
“너도 역시 나의 뜻을 받들지 않을 것인가?" 하니,
홍익삼이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유최기가 인혐(引嫌)하여 체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인피(引避)하면 개운하게 처리되겠지만 한 자리에서 강구하여 확정짓는 것만은 같지 못하다. 사피하지도 말고 물러나 대기하지도 말라."
하였는데, 유최기가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 아무리 다그쳐 정계를 하려 하더라도 신은 결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인하여 하교하기를,
"영상이 일찍이 어쩌면 정계를 할 수가 없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오늘 그 결말을 보자는 것이었는데, 저 홍익삼에게 속임을 당하였다."
하고, 이어 유최기에게 웅천 현감(熊川縣監)을, 홍익삼에게 남포 현감(藍浦縣監)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권기언이 인혐하여 체직을 청하기를,
"신은 두 신하와 더불어 합사로 논계를 하였으므로, 지금 같은 죄를 짓고서 다른 벌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체직을 윤허하였다. 영돈녕 조현명이 말하기를,
"유최기는 참으로 대관의 체모를 잘 지켰다 하겠습니다."
하고, 김약로(金若魯)는 말하기를,
"연석에 나아와 논계를 하고 돌아서서 정지를 한다는 것은 과연 대관의 체모가 아닙니다. 다른 신하인들 어찌 감히 하교를 받들겠습니까?"
하였으며, 예조 참판 홍상한(洪象漢)은 말하기를,
"유최기가 감히 하교를 받들지 못하는 것은 대관의 체모가 그러하기 때문인데, 엄교를 거듭 내려서 지나치게 꺾어 버리시니, 신은 걱정스러움과 개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
하였다. 승지 이중협(李重協)·조명리(趙明履)·조영로(趙榮魯) 등이 모두 나아와서 두 신하를 외방에 내쳐 보직(補職)하라는 명을 거두어들일 것을 청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승선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혹자는 두둔하고 혹자는 침묵을 지키는 것도 역시 편당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 모두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밤에 또 하교하기를,
"칙려(飭勵)를 하려면 마땅히 후원(喉院)211) 에 먼저 하여야 하는데, 오늘 입시한 승선들을 추고만 하고 그만둘 수는 없다. 모두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이튿날에 유최기는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홍익삼은 일신 현감(一新縣監)으로 바꾸어 제수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상소하여 혜릉(惠陵)에 표석을 세울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이어 목릉(穆陵)에도 일체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1일 임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윤신(李潤身)·이종하(李宗夏)를 승지로, 조상명(趙尙命)을 대사간으로, 윤동준(尹東浚)을 사간으로, 이명희(李命熙)를 지평으로, 강봉휴(姜鳳休)·유언국(兪彦國)을 정언으로, 황경원(黃景源)을 필선으로, 홍낙성(洪樂性)·유언민(兪彦民)을 부수찬으로, 신만(申晩)을 형조 참판으로, 이익정(李益炡)을 공조 참판으로, 이이장(李彝章)을 수찬으로 삼았다.
호조·예조 당상을 입시하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장릉(長陵)에 석물을 세운 뒤에 휘릉(徽陵)에는 석물을 세우지 않았으니, 같은 오릉(五陵) 안에 있는데도 거행하지 않는다면 다만 흠전(欠典)일 뿐만 아니다. 아! 자식 된 자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아야 하는데, 장렬 성후(莊烈聖后)께서는 자전(慈殿)으로서 삼조(三朝)의 받듦을 받은 만큼, 오늘날 나의 도리로서는 궐전(闕典)을 거행함에 있어 마땅히 이 능에 먼저 거행하여야 한다. 봄이 오기를 기다려서 일체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11월 22일 계축
예조 판서 조관빈(趙觀彬)이 상소하기를,
"간관이 상소로 이복상(李復祥)의 일을 논박한 것은 극히 엄정하고 날카로왔습니다. 신 역시 화를 입은 집안의 사람으로서 벼슬에 종사하는 자입니다만, 상소의 내용을 잠깐 보고도 문득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에 가슴이 미어지며, 종전의 출처가 크게 공의(公義)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어찌 차마 잘못을 알고 나서도 고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곧장 퇴직을 여쭈지 않는다면 끝내 세교(世敎)에 누를 끼치고 경반(卿班)에 모욕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하고, 이어 수어사의 밀부(密符)를 반납하고 성 밖으로 나가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곧장 성 안으로 들어와 행공하도록 하였다.
11월 23일 갑인
임금이 춘방에 궐직(闕直)이 많음으로 인하여 지금부터는 비록 어버이를 위하여 말미를 청한 자라 할지라도 한 사람만이 숙직하고 있을 경우에는 감히 지레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상번·하번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말미의 시한이 비록 차지 않는다 할지라도 정원(政院)에서 패초하여 입직시키도록 계청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대간들이 밖에 나가 있다고 핑계대는 자가 심히 많았다. 삼사의 합계는 나라의 대론(大論)이지만, 노론은 엄교를 두려워하고 소론은 일부러 회피하여, 정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연계를 하는 것도 아닌 상태로 거의 반년을 끌어 왔는데, 대청(臺廳)에는 먼지만 쌓이고 서리들은 서로 모여서 대청 안에서 노름판을 벌이고 있으니, 식자들이 한심스러워하였다.
11월 24일 을묘
이정보(李鼎輔)를 대사성으로, 조명리(趙明履)를 부제학으로, 남태량(南泰良)을 경상도 관찰사로, 정순검(鄭純儉)을 교리로, 윤봉오(尹鳳五)·김문행(金文行)을 부교리로, 이형만(李衡萬)을 수찬으로, 한광회(韓光會)를 부수찬으로, 서명신(徐命臣)을 겸 필선으로, 조명정(趙明鼎)을 필선으로, 윤봉오를 겸 문학으로 삼았다.
11월 25일 병진
이광세(李匡世)·이익정(李益炡)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26일 정사
한성 판윤 유엄(柳儼)이 입대를 청하여 들어와서 한성부의 잗단 업무들을 번다하게 계품하고, 또 서울 부근 지역에 백성들이 불법으로 묘를 많이 쓰고 있는데, 주인이 있는 무덤은 파 가도록 하고 주인이 없는 무덤은 뭉개 버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가엾게 여겨 말하기를,
"무덤을 뭉개어 없애 버린다면 호미나 쟁기가 닿는 곳에는 소와 양의 뼈와 같이 취급될 것이니, 이는 해골을 묻어 주어야 하는 의리가 아니다. 뭉게지 말고 새로 묘를 쓰는 것만 금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엄이 또 유최기(兪最基)의 사안을 처분할 적에 임금이 지나치게 많은 말씀을 허비한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학(理學)은 지극하시나 심학(心學)은 부족합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학과 심학이 서로 다른 점이 있는가?"
하였는데, 유엄이 답하기를,
"다릅니다. 전하께서 지금은 독서에 공력을 들일 것이 아니라, 다만 유신을 자주 인견해서 치도(治道)를 강론하여 자주 돌이키는 후회를 없애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옥당들의 금추(禁維)가 너무 많다는 일로 인하여 말하기를,
"오원(吳瑗)이 일찍이 말하기를 ‘옥당은 금추로 가계(家計)를 삼는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니, 도승지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세속의 떠도는 말에 이르기를, ‘어느 이름난 선비가 금추에서 풀려나 돌아오는데, 문을 지키고 있던 군졸이 그가 옥중에서 신던 삼신[麻履]을 달라고 하자, 주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저녁에 다시 들어와야 하므로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하니, 명사들이 금추를 예사롭게 보는 것은 예로부터 이미 그러하였습니다. 신이 음직(蔭職)에 있던 날에도 일찍이 옥당과 함께 죄수들과 같이 지내 보았습니다만, 따뜻한 장방(長旁)에서 술과 고기를 먹으며 농담을 하는 것이 전혀 고생스러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땅바닥에 금을 그어서 감옥을 삼아도 들어가지 않을 것을 의논하는 법인데, 도리어 높은 운치로 여긴다고 하니, 이상하다."
하였다. 이익정이 또 말하기를,
"신이 해번(海藩)212) 으로 있을 적에 배천(白川)에 사는 어떤 선비가 찾아와서 자신은 의안 대군(義安大君)의 먼 후손이라고 하며 어필 한 장을 내어 보였는데, 바로 의안 대군의 공훈을 적은 교문으로, 태종의 친필이었습니다. 신이 그때 이것을 가지고 와서 아직 올리지를 못하였는데, 지금 그 사람이 와서 찾아가려고 합니다. 바라건대, 한번 보신 뒤에 돌려주소서."
하니, 임금이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홍천보(洪天普)라는 자가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의 후손이라고 말하며, 태조의 어필을 가져다 바치고 벼슬을 얻은 일이 있었는데, 이 뒤로부터 어필을 가져다 바치는 자가 자못 많았다. 유엄이 특별히 와서 입대를 청하였으나, 주달한 사안이 잡되고 잗달았으며, 또 성학을 찬양하는 말투도 이와 같으니 듣는 이들이 놀라워하였다. 이익정이 한말은 더더욱 더러웠으니, 대저 경연의 체통이 근래에 와서 심히 근엄하지 못하여 상하간의 수작에 잡담과 해학이 많았다. 또 경연의 강관이 아직 글뜻을 개진하기도 전에 간혹 승지가 위차(位次)를 뛰어넘어 부주(敷奏)를 하는가 하면, 빈대(賓對)를 하는 대신이 막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간혹 재신(宰臣)이 나서서 앞질러 말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임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끄럽게 하면서 그치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니, 식자들이 걱정하고 개탄하였다.
집의 이광식(李光湜)이 대관(臺官)을 신칙한 하교로 인하여 상소하기를,
"대계(臺啓)의 정지 여부는 위에서 아래에 명령할 수도 없고 또 아래에서 위의 뜻만을 따를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고, 정언 유언국(兪彦國) 또한 상소하여 진면(陳勉)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정에 한 번의 사단이 있으면 그 때마다 전하께서 한 번의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전하께서 거둥마다 요순(堯舜)을 본받는다고 하시는데, 요순이 어찌 이러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9년의 홍수가 산을 삼키고 언덕을 잠기게 하여 만방이 침몰한 것을 볼 때, 오늘날 조정이 분열되고 붕괴된 것이 아무리 극에 달하였다 하여도 아직 홍수의 재해만은 못하였는데, 요(堯)임금이 우(禹)에게 치수를 명할 적에 그 화기로운 기상을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완악한 백성이 따르지를 않아서 이에 간과(干戈)를 동원할 것을 볼 때, 오늘날 붕당간의 공격과 배척이 아무리 극에 달하였다 하여도 어찌 양쪽을 같은 정도로 비교하여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순(舜)임금 때 두 섬돌 사이에서 간우(干羽)의 춤213) 을 추던 당시에는 규모가 안정되고 여유가 있어서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 본받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고 옳은 것은 옳다고 하며, 책할 것은 책하고 죄줄 것은 죄를 주되, 물(物)은 각기 그 물에 부치고 내가 간여하지 않는다면 성념(聖念)이 어찌 번뇌한 데에 이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한꺼번에 비답하기를,
"오늘날 뭇 신하들의 거조가 모두 한심스러우니, 스스로 면려하는 길은 아래에 달려 있지 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기강을 잡고서 아래를 신칙하였다면 어찌 이러한 폐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내가 스스로 면려하여야 할 바이다."
하였다.
대사간 조상명(趙尙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조 참판 심성희(沈聖希)의 어제 정사는 많은 대관(臺官)의 차출이 모두 한쪽 사람으로 몰렸습니다. 고르지 못한 그 의망도 진실로 눈에 거슬리거니와 또 사람들을 대하여 수작한 말을 들어 보니 이르기를, ‘합계는 이제 개운하게 처리되었다. 이 뒤에 대관의 자리는 반드시 모두 그 속에서 차출할 것이니 저들이 하는 대로 맡겨 두고 우리들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하고 하였습니다. 아! 세상이 어찌 한쪽의 합계는 정지할 수 있고 한쪽의 합계는 정지할 수 없는 의리가 있다는 말입니까? 일의 체모가 너무도 미안합니다. 청컨대 중추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장령 김한운(金翰運)은 행동 거지가 변화 무쌍하고 거조가 거칠어서 늙은 추태를 숨길 수 없으니, 보고 듣는 사람마다 놀라워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이번의 인피는 더더욱 군색스러워서 그야말로 어불성설입니다. 청컨대 개정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오늘날 시종신이 순백한 마음으로 군주를 섬긴다면 어찌 이러한 수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사로이 한 수작은 공거(公車)214) 에 올리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순수하고 근신하던 너의 마음으로 도리어 남의 허물을 들춰내어 적발이나 하고 있으니, 이러한 적발은 내가 취하지 않겠다. 김한운의 일은 진술한 내용은 옳다 하더라도 근래 개정의 법으로 인하여 서로간에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일은 내가 잘못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체차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대저 김한운이 자신의 대관직에 대하여 사직 단자를 올려 체차된 것인데, 또 재차 제배되어서는 갑자기 밖에 나가 있었다고 일컬었기 때문에 대간의 상소에 언급된 것이었다.
사신은 말한다. "이때 대간을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저으며 회피하였기 때문에 심성희의 정사에 대한 조상명의 상소가 이와 같았던 것인데, 임금은 양쪽이 다 그르다고 생각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7책 64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29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註 214] 공거(公車) : 소장.
사신은 말한다. "이때 대간을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저으며 회피하였기 때문에 심성희의 정사에 대한 조상명의 상소가 이와 같았던 것인데, 임금은 양쪽이 다 그르다고 생각하였다."
중외에 신칙하여 무릇 아비와 형으로 아들과 아우를 죽인 자 중에서 고의로 음흉하게 죽인 경우 외에는 그 댓가로 죽이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때에 남포(藍浦)와 김제(金堤)에서 모두 아우를 죽인 변고가 있었는데, 그 정상이 검토해 볼 여지가 있었는데도 해도와 해조가 범연히 살인죄로 처단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었다.
임금이 청나라의 기교한 물품들이 무늬 있는 비단뿐만 아니라 하여, 사신들을 신칙하여 모두 엄금하도록 하였다.
11월 27일 무오
조영국(趙榮國)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11월 28일 기미
부수찬 한광회(韓光會)가 상소하여 유최기(兪最最)·홍익삼(洪益三)을 두둔하여 말하기를,
"그의 말이 우직하여 비록 성상의 노여움을 사기는 하였으나, 집법관의 논계를 꺾어뜨리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청컨대 외직에 보직하라는 하명을 거두어 들이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1월 29일 경신
한림 삼월 서부법(翰林三月序付法)을 다시 제정하였다. 이보다 앞서 추천된 자를 서열에 따라 부직(付職)하고 달수의 제한을 두지 않았는데, 추천제를 권점제로 바꾼 뒤로는 대개 3개월의 시한을 두어서 부직하였다. 검열(檢閱) 이에 곧장 이덕해(李德海)가 시한이 오랜 것을 싫어한 나머지 곧바로 부직을 하고 다시 보름 만에 곧장 이조로 공문을 보냈으므로, 감사(監事) 정석오(鄭錫五)가 서리를 불러서 책망하고 이어 한림의 부직은 언제나 3개월의 시한을 지키도록 법으로 정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였다.
헌부가 거듭 전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향군(鄕軍)에게 동옷을 내어주라고 명하였으니, 날씨가 춥기 때문이었다.
11월 30일 신유
하교하기를,
"친경(新耕)과 관예(觀刈)는 모두가 옛 예식으로서 친경이 이미 자성(粢盛)을 장만하기 위한 것이라면, 관예는 곧 사전(祀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보리를 베고 벼를 베는 것이 각기 그 시기가 있는 것이니, 이러한 일들은 모두 시기에 맞추어 시행하여야 한다. 그런데 지난해 친경을 한 뒤에 1백 묘(苗)의 밭에 구곡(九穀)을 심으라는 내용으로 하교하였는데, 올해에 와서 물어보니 잘못된 버릇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 구곡을 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친경하는 밭을 수전(水田)으로 만들어 나물을 심게 하고는 곡식으로 조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때문에 그것을 바로잡으라는 명령을 내리기는 하였으나, 다만 종자를 내주고서 외방의 조세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막중한 자성을 이처럼 구차하게 하여서도 안 되거니와, 또 아무리 관예를 하고자 해도 시골 밭에서 농민이 곡식을 베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 일의 체모가 이래서는 안 된다. 그리고 친경의 경우도 농사를 짓던 백성이 속수무책으로 전지를 공가에 바치고 있어서, 이는 백성의 전지를 빼앗아다 친경을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 다같이 안 될 일이다. 아! 평양[箕城]의 정전(井田) 형태는 비록 옛 제도대로의 복원이 어렵다 하더라도 이런 기회를 통하여 왕성(王城) 동문 밖에다 정전의 제도를 본떠서 그 리(里)와 묘(苗)를 정한 다음, 조세를 감면하여 주고 1백 묘 공전의 종사에 힘을 기울이도록 한다면, 《시경(詩經)》에 이른바, ‘우리 공전에 내린 비가 우리 사전에도 내린다.[雨我公田 遂及我私]’라는 뜻과도 합치될 수 있을 것이다. 태상시(太常寺)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강정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렇게 한 뒤에 친경 또는 관예 때에는 이 백성들이 준비를 담당하도록 하되, 1백 마리의 밭갈이 소를 당장 마련하기는 어려울 듯하니, 이것은 임시로 준례에 따라 분정(分定)시킨다는 내용을 절목에 첨가하여 두도록 하라."
하였다.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이구령(李耉齡)을 사간으로, 남태혁(南泰赫)을 헌납으로, 김주(金霔)를 장령으로, 임석헌(林錫憲)을 수찬으로, 유언민(兪彦民)을 부수찬으로, 김시형(金始炯)을 판의금으로, 한광조(韓光肇)를 사서로 삼았다.
복상(卜相)을 명하였는데, 민응수(閔應洙)를 우의정으로 삼고, 우의정 정석오(鄭錫五)는 좌의정으로 승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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