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임술
병조에서 봉수군(烽燧軍)을 선왕조의 수교(受敎)에 따라 빙역(氷役)에 동원하지 말도록 할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2월 2일 계해
봉상시에서 아뢰기를,
"동고(東庫)에 저장한 얼음은 오로지 제사에만 쓰는 것이므로 두께와 길이, 그리고 너비에 모두 규격이 있습니다. 종전에는 본시의 낭청이 이 일을 전관하여 빙고관(氷庫官)과 함께 직접 검사를 하며, 한강 가운데에서 얼음을 규격에 맞게 떠다가 빙고에 들여 놓았기 때문에, 얼음이 녹지 않고 또 아주 정결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는 갑자기 본 빙고에서 주관하면서 하리들의 농간으로 인하여 규격에도 맞지 않는 얼음으로 구차히 빙고만 채우고 있습니다, 청컨대 당초의 정식대로 본시에서 전관하여 거행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4일 을축
관상감에서 《시용통서(時用通書)》를 간행하여 공부하는 생도들의 연습 자료로 삼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2월 5일 병인
유엄(柳儼)을 형조 판서로, 정이검(鄭履儉)을 대사간으로, 유우기(兪宇基)를 집의로, 유건(柳謇)·정순검(鄭純儉)을 정언으로, 이광직(李光溭)을 지평으로, 홍봉한(洪鳳漢)을 승지로 삼았다.
약방에서 환경전에 입진하였다. 제조 원경하(元景夏)가 아뢰기를,
"지난번 홍익삼(洪益三)의 계달로 인하여 구성필(具聖弼)을 무인의 자격으로 조용하라고 명하셨습니다만, 병조의 금군 별장과 금위영의 중군 별장·천총은 모두 무인의 자리인데, 무과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차출한 전례는 아직 없습니다."
하니, 도제조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구성필은 장천(將薦)을 받아서 일찍이 병사가 된 적이 있는 만큼, 참으로 그의 재간이 감당할 만하다면 훈련 대장도 할 수 있을 터인데, 유독 중군을 하지 못하겠습니까? 대저 구성필은 예사로이 조용된 하나의 음관으로서 문·음·무에 아무 구애됨이 없이 두루 벼슬함으로 인하여 세상의 평판이 오래 전부터 해괴하게 여겼는데, 유신들의 연주(筵奏) 이후로 사람들이 다같이 옳은 처사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에 음직과 무변 두 길만을 가지고 내직(內職)의 총관이나 외직(外職)의 목사, 또는 병사·수사 중에 적당히 조용하는 것이 좋겠으며 중군 별장 같은 것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이는 아직 금한(禁限)의 제도가 없으니, 이른바 변경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였는데, 원경하가 그것은 안 될 일이라고 극력 주장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다시 상확하여야 하겠으니, 우선 두고 보라."
하였다.
구성필이 재간은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었으나, 안으로는 형제의 세력을 끼고 밖으로는 재상과 결탁하여 문·음·무 세 길의 벼슬을 두루 역임했으니, 공론에 매우 어긋났다. 다시 무인의 자격으로 제한을 두자, 군문(軍門)이 되기를 부끄러워한 나머지 기어코 회피하려 하였으니, 원경하의 아룀은 역시 그러한 구실을 만들어 주기 위한 의도였다. 조현명은 그를 너무 미워한 나머지 이처럼 항언을 하였는데, 구성필은 끝내 군문이 되지 않았고, 뒤에 홍상한(洪象漢)·김상로(金尙魯)가 극력 곡해(曲解)를 함으로 인하여 드디어 앞서의 하교가 중지되면서 종전이나 다름없이 출신에 구애를 받지 않게 되었다. 이날 원경하가 또 아뢰기를,
"무신이 변방의 방어사를 거친 뒤에야 곧 곤수(閫帥)의 길을 터주는 것은 근자에 규식(規式)이 되었으나 승지의 경우는 비록 방어사를 거치지 않아도 경력이 이미 우수하면 이 규식에 구애받지 말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하여 청풍 부원군(淸風府阮君) 김우명(金佑明)의 봉사손을 녹용하라고 하였으니,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기일로 인하여 추모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12월 6일 정묘
어떤 별이 어녀성(御女星) 밑으로 흘러갔다.
임금이 비국 당상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명년은 바로 자전(慈殿)의 회갑입니다. 청컨대 선조(先祖)의 계해년215) 에 이미 거행한 선례에 따라 정조(正朝)의 하례를 거행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기를,
"자전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나로서는 마땅히 자전의 하교를 따라야 한다."
하고, 마침내 윤허하지 않았다. 병조 참판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경기에서는 진구(賑球)를 청하여 오고 영남은 재결(災結)을 청하여 왔는데, 두 장계를 이미 비국에서 복주하였으나, 재계(齋戒)로 인하여 여러 날째 정원에 머물러 있으니, 민사가 지체되어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즉시 들여보내라고 명하고, 이어 이 뒤로는 민사에 관계되는 사안은 비록 재계와 상치될지라도 정원은 품계하여 들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수성 절목(守城節目)을 작성하고 호조와 선혜청 및 여러 군문들의 창고를 차례차례 성 안으로 옮기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도성을 수비할 계책을 논의하면서, 도성이 간간이 무너진 곳이 많다 하여 여러 군문에게 수축할 것을 명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임금이 어영 대장 구성임(具聖任)에게 말하기를,
"수축은 이미 끝났는가? 멀리서 바라보는 분첩(粉堞)이 아주 새로워져서 마치 헌 옷에다 새 깃을 단 것과 같아 보기에는 좋으나 이것으로 수비를 할 수 있겠는가? 경이 지난날 개진한 것을 지키는 일에 대한 논의는 구획한 바가 있으며, 오부(五部)의 방민(坊民)들도 이미 분속시켰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맡고 있는 40여 곳은 막 공사를 마쳤습니다만, 백성들을 분속시켜 지키게 할 방략에 대해서는 아직 상량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국가가 설사 위급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도성은 버릴 수 없습니다. 강가의 모든 창고를 성 안으로 옮기고 나서야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으며, 이것은 또 성을 지키는 근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어떤 이는 탕춘대(蕩春臺) 쪽은 긴요하지 않다고 의문을 갖는데,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구성임이 대답하기를,
"도성을 지키려면 이곳은 곧 하늘이 만든 요새지이니, 역시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 밖에 창고를 설치한 것은 참으로 도둑에게 양곡을 주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지난날 내가 창고 옮기는 사안을 가지고 대신에게 하교하였으나, 여태 한 마디의 강복(講覆)도 없으니, 이는 대신의 뜻이 나와 달라서이다. 오늘 내가 마땅히 여러 경들과 결정하겠다."
하고, 이어 성을 지키는 일의 여부를 가지고 연신(筵臣)에게 일일이 물으니, 모두가 지킬 수 있다고 말하며, 임금이 생각으로 결정하기를 청하였다. 또 구성임에게 묻기를,
"어영청의 재력으로 창고를 옮길 만한가?"
하니, 구성임이 대답하기를,
"창고를 옮기라고 만약 명령만 내리신다면 어영청의 소속의 창고는 신이 마땅히 곧장 옮기겠습니다. "
하였다. 드디어 하교하여 절목을 속히 작성하고 성 밖의 창고를 모두 옮기되, 창고를 옮기기 전에 받아들이는 곡물은 성 안의 창고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그후 절목이 작성되었다. 〈그 절목에 이르기를,〉
"1. 오부(五部)의 민호를 각기 가까운 데에 따라 삼영(三營)216) 에 분속시킨다.
1. 삼영(三營)이 나누어 받은 성첩(城堞)은 모두 5정(停)으로 나누어 전(前)·좌(左)·중(中)·우(右)·후(後)의 차례를 정한 다음, 돌에 글자를 새겨 표시를 한다. 【훈전(訓前)·훈좌(訓左)·훈중(訓中)·훈우(訓右)·훈후(訓後)로 표시하고, 금위영 어영청도 이와 같이 한다.】 1. 각 군문이 지킬 성첩을 다섯으로 나누고 만약 1영으로써 지킬 것 같으면 5부(部)를 나누어 5정을 만들고, 1부로 지킬 것 같으면 5사(司)를 나누어 5정을 삼으며, 1사로 지킬 것 같으면 1초(哨)를 나누어 5정을 삼는다. 1. 5부의 각계(各契)는 모두 조그마한 기를 만들되, 훈련 도감은 황색, 금위영은 청색, 어영청은 백색으로 하여 아무 부, 아무 계라는 것을 쓰고, 또 훈전·훈좌등의 글자를 써서 표시를 삼으며, 해당 영이 만들어서 해당 부에 지급하되, 평상시에는 본영에 간직하여 둔다. 1.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매 호(戶)마다 집을 지키는 노약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성을 지키고, 동서(東西) 양반의 현직·전직 및 유생(儒生)·출신(出身)·잡과(雜科)·한산인(牀散人)들까지도 일제히 성첩에 올라가서 힘을 합쳐 성을 지킨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성을 설치하는 목적은 장차 지키자는 것이다. 주현(州縣)의 조그마한 성일지라도 적의 침입을 보고 버리고 갈 수 없는데, 더구나 왕성이겠는가? 그러나 침입의 안팎과 형세의 완급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니, 성을 지킬 것인가의 여부를 어떻게 미리 정할 수 있겠는가? 또한 한양성(漢陽城)이 지키기 어렵다는 논란은 예로부터 있어 온 것이고, 강가에 창고를 설치한 것에 대해 3백 년이 지나는 동안 오늘까지 아무 이의도 없었다. 옛사람들이라고 모두가 겁쟁이고 꾀가 없었겠는가? 대개 성이란 높고 작으면 형세가 견고하여 안전을 기하기가 쉽고, 평평하고 넓으면 힘이 분산되어 지키기가 어려운 법이다. 강가의 창고는 평상시에는 강가에 사는 백성들이 이에 의지하여 생계를 이어 왔는데, 난리가 있으면 성 안으로 실어 들일 수도 있고 배에다 실어서 아무데로나 보낼 수도 있다. 오부의 백성들로 나누어 지키도록 한다는 데에 있어서는 군자들도 아직 말하지 않은 일이니, 설사 도성을 사수한다 하더라도 적군을 맞아 대응하는 데는 그 형편에 따라 변화가 무궁하고, 또 도성의 백성을 통제하는 것은 단 한 사람의 장수가 수행할 수 있는 일이니 억지로 나눌 필요도 없고 또 미리 나누어 둘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때에 임금이 사업에 뜻을 기울인 나머지 많은 개혁을 시도하여, 관제를 이미 수정하고 방례(邦禮)를 보완하며 법률을 밝히고, 아악(雅樂)을 바로잡았으며, 또 군비에 마음을 두었다. 이에 구성임이 도성을 지킨다는 말로 비위를 맞추고 나섰고, 또 그가 이른바 성을 수축한다는 것도 대개 분장하는 데에나 힘써서, 해묵은 석회가 굳어져서 벗겨지지 않는 곳은 날카로운 쇠끝으로 후벼내어 도색이 수월하게나 할 정도였다. 여러 창고를 헐어버림으로 인하여 삼강(三江)이 텅 비게 되고, 내창(內倉)으로 곡물을 운송하느라 손실이 수없이 많았으며, 두 역사에 따른 경비 또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대신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옳지 못한 처사임을 알면서도 극력 간쟁하여 만류하는 자가 없었으니, 참으로 아는 일이라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옛날 양신(良臣)의 의리에 비추어볼 때 부끄러운 노릇이다. 그럼에도 임금은 유독 구성임의 무리와 더불어 국가의 큰 계책을 결정하면서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주역(周易)》 〈이괘(履卦)의 구오(九五)에〉 이르기를, ‘결단코 이행하려 한다. 마음을 곧바르게 가져도 위태하다.[夬履貞厲]’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바르지 못한 것이겠는가? 아! 안타깝다."
【태백산사고본】 47책 64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30면
【분류】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재정-창고(倉庫) / 역사-사학(史學) / 출판-서책(書冊)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호구(戶口) / 인사-관리(管理)
[註 216] 삼영(三營) : 금위영·어영청·훈련 도감.
1. 각 군문이 지킬 성첩을 다섯으로 나누고 만약 1영으로써 지킬 것 같으면 5부(部)를 나누어 5정을 만들고, 1부로 지킬 것 같으면 5사(司)를 나누어 5정을 삼으며, 1사로 지킬 것 같으면 1초(哨)를 나누어 5정을 삼는다.
1. 5부의 각계(各契)는 모두 조그마한 기를 만들되, 훈련 도감은 황색, 금위영은 청색, 어영청은 백색으로 하여 아무 부, 아무 계라는 것을 쓰고, 또 훈전·훈좌등의 글자를 써서 표시를 삼으며, 해당 영이 만들어서 해당 부에 지급하되, 평상시에는 본영에 간직하여 둔다.
1.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매 호(戶)마다 집을 지키는 노약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성을 지키고, 동서(東西) 양반의 현직·전직 및 유생(儒生)·출신(出身)·잡과(雜科)·한산인(牀散人)들까지도 일제히 성첩에 올라가서 힘을 합쳐 성을 지킨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성을 설치하는 목적은 장차 지키자는 것이다. 주현(州縣)의 조그마한 성일지라도 적의 침입을 보고 버리고 갈 수 없는데, 더구나 왕성이겠는가? 그러나 침입의 안팎과 형세의 완급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니, 성을 지킬 것인가의 여부를 어떻게 미리 정할 수 있겠는가? 또한 한양성(漢陽城)이 지키기 어렵다는 논란은 예로부터 있어 온 것이고, 강가에 창고를 설치한 것에 대해 3백 년이 지나는 동안 오늘까지 아무 이의도 없었다. 옛사람들이라고 모두가 겁쟁이고 꾀가 없었겠는가? 대개 성이란 높고 작으면 형세가 견고하여 안전을 기하기가 쉽고, 평평하고 넓으면 힘이 분산되어 지키기가 어려운 법이다. 강가의 창고는 평상시에는 강가에 사는 백성들이 이에 의지하여 생계를 이어 왔는데, 난리가 있으면 성 안으로 실어 들일 수도 있고 배에다 실어서 아무데로나 보낼 수도 있다. 오부의 백성들로 나누어 지키도록 한다는 데에 있어서는 군자들도 아직 말하지 않은 일이니, 설사 도성을 사수한다 하더라도 적군을 맞아 대응하는 데는 그 형편에 따라 변화가 무궁하고, 또 도성의 백성을 통제하는 것은 단 한 사람의 장수가 수행할 수 있는 일이니 억지로 나눌 필요도 없고 또 미리 나누어 둘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때에 임금이 사업에 뜻을 기울인 나머지 많은 개혁을 시도하여, 관제를 이미 수정하고 방례(邦禮)를 보완하며 법률을 밝히고, 아악(雅樂)을 바로잡았으며, 또 군비에 마음을 두었다. 이에 구성임이 도성을 지킨다는 말로 비위를 맞추고 나섰고, 또 그가 이른바 성을 수축한다는 것도 대개 분장하는 데에나 힘써서, 해묵은 석회가 굳어져서 벗겨지지 않는 곳은 날카로운 쇠끝으로 후벼내어 도색이 수월하게나 할 정도였다. 여러 창고를 헐어버림으로 인하여 삼강(三江)이 텅 비게 되고, 내창(內倉)으로 곡물을 운송하느라 손실이 수없이 많았으며, 두 역사에 따른 경비 또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대신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옳지 못한 처사임을 알면서도 극력 간쟁하여 만류하는 자가 없었으니, 참으로 아는 일이라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옛날 양신(良臣)의 의리에 비추어볼 때 부끄러운 노릇이다. 그럼에도 임금은 유독 구성임의 무리와 더불어 국가의 큰 계책을 결정하면서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주역(周易)》 〈이괘(履卦)의 구오(九五)에〉 이르기를, ‘결단코 이행하려 한다. 마음을 곧바르게 가져도 위태하다.[夬履貞厲]’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바르지 못한 것이겠는가? 아! 안타깝다."
【태백산사고본】 47책 64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30면
【분류】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재정-창고(倉庫) / 역사-사학(史學) / 출판-서책(書冊)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호구(戶口) / 인사-관리(管理)
[註 216] 삼영(三營) : 금위영·어영청·훈련 도감.
사신은 말한다. "성을 설치하는 목적은 장차 지키자는 것이다. 주현(州縣)의 조그마한 성일지라도 적의 침입을 보고 버리고 갈 수 없는데, 더구나 왕성이겠는가? 그러나 침입의 안팎과 형세의 완급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니, 성을 지킬 것인가의 여부를 어떻게 미리 정할 수 있겠는가? 또한 한양성(漢陽城)이 지키기 어렵다는 논란은 예로부터 있어 온 것이고, 강가에 창고를 설치한 것에 대해 3백 년이 지나는 동안 오늘까지 아무 이의도 없었다. 옛사람들이라고 모두가 겁쟁이고 꾀가 없었겠는가? 대개 성이란 높고 작으면 형세가 견고하여 안전을 기하기가 쉽고, 평평하고 넓으면 힘이 분산되어 지키기가 어려운 법이다. 강가의 창고는 평상시에는 강가에 사는 백성들이 이에 의지하여 생계를 이어 왔는데, 난리가 있으면 성 안으로 실어 들일 수도 있고 배에다 실어서 아무데로나 보낼 수도 있다. 오부의 백성들로 나누어 지키도록 한다는 데에 있어서는 군자들도 아직 말하지 않은 일이니, 설사 도성을 사수한다 하더라도 적군을 맞아 대응하는 데는 그 형편에 따라 변화가 무궁하고, 또 도성의 백성을 통제하는 것은 단 한 사람의 장수가 수행할 수 있는 일이니 억지로 나눌 필요도 없고 또 미리 나누어 둘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때에 임금이 사업에 뜻을 기울인 나머지 많은 개혁을 시도하여, 관제를 이미 수정하고 방례(邦禮)를 보완하며 법률을 밝히고, 아악(雅樂)을 바로잡았으며, 또 군비에 마음을 두었다. 이에 구성임이 도성을 지킨다는 말로 비위를 맞추고 나섰고, 또 그가 이른바 성을 수축한다는 것도 대개 분장하는 데에나 힘써서, 해묵은 석회가 굳어져서 벗겨지지 않는 곳은 날카로운 쇠끝으로 후벼내어 도색이 수월하게나 할 정도였다. 여러 창고를 헐어버림으로 인하여 삼강(三江)이 텅 비게 되고, 내창(內倉)으로 곡물을 운송하느라 손실이 수없이 많았으며, 두 역사에 따른 경비 또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대신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옳지 못한 처사임을 알면서도 극력 간쟁하여 만류하는 자가 없었으니, 참으로 아는 일이라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옛날 양신(良臣)의 의리에 비추어볼 때 부끄러운 노릇이다. 그럼에도 임금은 유독 구성임의 무리와 더불어 국가의 큰 계책을 결정하면서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주역(周易)》 〈이괘(履卦)의 구오(九五)에〉 이르기를, ‘결단코 이행하려 한다. 마음을 곧바르게 가져도 위태하다.[夬履貞厲]’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바르지 못한 것이겠는가? 아! 안타깝다."
평안 감사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여 강변(江邊) 지방에 기근이 든 상황을 개진하고, 해서(海西)의 상정미(詳定米)를 옮겨다 진휼할 것을 청하니, 소를 비국에 내려보냈었는데, 우의정 정석오(鄭錫五)가 아뢰기를,
"해서의 쌀은 멀리 수송하기가 어렵습니다. 청남(淸南)의 별비곡(別備穀) 5천 석(石)과 강변의 창고에 남아 있는 환곡을 당기어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해 부사(寧海府使) 이징하(李徵夏)가 상소하여 본 고을의 병폐 세 조항을 개진하였는데, 이르기를,
"1. 양호(良戶)는 적고 군액(軍額)은 많으니, 이는 영해와 영양(英陽)이 예전에 한 고을이던 것을 두 고을로 나눈 뒤에, 군액을 나누지 않고 오로지 영해에만 책임을 지웠기 때문에 백성들이 많이 유망(流亡)하였으니, 병폐가 막심합니다. 청컨대 군액을 영양과 분할하여 영해 백성들의 힘을 펴 주소서.
1. 토지는 척박하고 조세는 무겁습니다. 청컨대 전등(田等)을 개량하여 주소서.
1. 영양·덕현(德峴)은 예로부터 봉수(烽燧)의 길이 매우 순탄하였는데, 중간에 와서 본부 광산(廣山)으로 이설하면서 산세가 험준하고 외져서 지키는 자가 고생을 견디지 못합니다. 청컨대 광산의 봉수를 폐지하고 다시 덕현으로 이설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소를 비국에 내려 보내니, 군액 분할과 전등 개량은 시행하지 않고, 봉수의 일은 도신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지형을 살펴본 다음에 계문하라고 하였다.
봉상시(奉常寺)에서 친경전 절목(親耕田節目)을 올리며 아뢰기를,
"옛날의 정전(井田) 제도를 상고하면, 대개 9백 묘(苗)로 1정(井)을 만든 다음, 1백 묘를 공전(公田)으로 삼고 8백 묘를 사전(私田)으로 삼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공전을 먼저 가꾸고 나서 감히 사전을 가꾸도록 하였으니, 이는 곧 9분의 1의 조세법으로서, 백성들에게 후한 혜택을 주면서 공전을 힘써 가꾸도록 하자는 의도입니다. 이번에 친경전 1백 묘를 전교에 따라 정전의 옛 제도를 대략 본떠 공전을 삼은 다음 동적전(東籍田) 11일 갈이를 백성들에게 준 다음, 조세를 감면하여 주고 공전을 힘써 가꾸도록 하되, 1백 묘에 심을 종자는 본 직전에서 내어 주도록 하소서."
하였다. 뒤에 도제조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친경전을 8일 갈이로 한다면 심고 가꾸어 수확을 할 때까지 힘이 너무 많이 들어서, 11일 갈이의 면세로도 감당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개 정전은 9분의 8을 사전으로 삼고 1을 공전으로 삼고 있는데, 오늘날 친경전은 10분의 8이고 면세의 사전은 〈10분의〉 2, 3에 그치고 있으니, 백성들이 원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청컨대 16일 갈이의 면세를 허락해 주어서 친경전을 같이 가꾸도록 하소서. 이는 곧 2분을 가지고 1분을 가꾸는 것이므로 비록 정전법에는 크게 못 미치나, 원하는 자가 더러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규정을 고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7일 무진
중궁전의 탄일 진하를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12월 9일 경오
북도 어사 엄우(嚴瑀)의 서계로 인하여 정탐한 사람인 남제극(南濟極) 등 6명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남제극은 북변 사람인데, 엄우가 어사로 나갔을 적에 남제극 등을 보내어 등등기(鄧鄧磯)를 정탐케 하니, 적정을 매우 잘 파악하여 왔으므로 엄우가 돌아와서 그 공로를 아뢰었는데,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시상 문제를 물으니, 어떤 이는 정탐의 공로로 시상을 하는 것도 온당치 못하거니와, 또 북도 사람들이 월경을 범하기가 더 용이해질 듯하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조정에서 이미 어사를 시켜 편의에 따라 정찰하도록 하였고, 이들이 또 죽음을 무릅쓰고 왕래하였으므로, 시상을 너무 박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스스로 월경을 범한 것과는 다르므로, 이번에 만약 시상을 하지 않는다면 후일 북도의 변경에 변란이 생기더라도 그 누가 선뜻 국가를 위하여 힘을 다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남제극 등에게 자급을 올려 주도록 하였다.
철원(鐵原)을 다시 부사로 승격시켰다. 이 해 봄에 철원이 강상 죄인의 태생지라 하여 부(府)를 현(縣)으로 강등시켰는데, 이 때에 와서 심리사 구택규(具宅奎)의 서계를 비국에서 복주함으로 인하여 춘천(春川)의 방영(防營)을 본 고을로 이설하였기 때문에 다시 부로 승격시킨 것이었다.
소대를 행하였다.
종신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이 졸하였다. 임금이 몹시 슬퍼하며 하교하기를,
"관대 안락하게 잘 마쳤도다[寬樂令終]."
하였으니, 곧 그의 시호였다.
12월 11일 임신
윤광소(尹光紹)를 사간으로, 조윤제(曹允濟)를 헌납으로, 신경(申暻)·이택징(李澤徵)을 장령으로, 임집(任)을 교리로, 민백창(閔百昌)을 부교리로, 성천주(成天柱)를 부수찬으로, 김약로(金若魯)를 예조 판서로, 권적(權𥛚)을 좌참찬으로, 이주진(李周鎭)을 공조 판서로, 김성응(金聖應)을 판윤으로, 구택규(具宅奎)를 지의금으로, 이명곤(李命坤)을 도승지로, 조재호(趙載浩)를 강원도 관찰사로, 남익령(南益齡)을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호서 안핵 어사 이태중(李台重)을 파면하고 병조 정랑 권숭(權崇)으로 대체하였다. 처음 보은(報恩)에 의옥(疑獄) 사건이 발생하여 이태중을 어사로 차출하여 안핵하게 하였는데, 아산(牙山)에 또 음옥(淫獄) 사건이 발생하여 함께 안핵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태중이 본래 시골에 있으면서 출사하지 않았으므로, 누차 신칙을 하여도 올라오지 않자, 특별히 파면하고 권숭으로 대체하였으니, 이는 병조 판서 원경하(元景夏)가 일찍이 권숭이 사리를 잘 판단한다고 칭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대를 행하였다.
전 명천 부사(明川府使) 유진두(柳鎭斗)를 통정 대부의 자급으로 올려 주고, 홍원 현감(洪原縣監) 김근(金根)에게는 준직(準職)을 주었으며, 전 경원 부사(慶源府使) 김수(金礈)에게는 옷감 한 벌을 내려 주었으니, 어사가 포계(褒啓)하였기 때문이었다.
12월 13일 갑술
어떤 별이 진성(軫星) 밑으로 흘러갔다.
사서(司書) 한광조(韓光肇)를 영남 암행 어사로 삼았다.
전조(銓曹)에 명하여 호남 사람 이이정(李頤正)·정민하(鄭敏河) 등을 녹용하라고 하였다. 이 때에 임금이 한광조에게 명하여 인재를 찾아내도록 하였는데, 수찬 이이장(李彛章)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호남 어사가 되어 이이정 등 다섯 사람을 천거하여 갑인년217) 에 서용하라는 전교가 있었으나, 아직 한사람도 서용하지 않은 채, 그 중 세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어사가 아무리 추천을 하더라도 한갓 형식으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갑인년 이후의 전관(銓官)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뒤에 승지 이하종(李夏宗)이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갑인년 이후의 정관(政官)은 대개가 대신이고, 정민하 등은 누차 의망에 올렸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쓰지 않은 것이지, 정관의 과실은 아니다."
하고, 정관을 추고하라는 명을 보류하였다.
12월 14일 을해
어떤 별이 필성(畢星) 밑으로 흘러가고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집의 유우기(兪宇基)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합사의 계청은 참으로 백년을 두고도 그만둘 수 없는 논계입니다. 계청을 발의한 이튿날에 세 가지 계청만을 윤허하고 유독 두 가지 계청을 도리어 구별을 짓고자 하는가 하면, 재차 계청하던 날에는 특별히 정지를 명하였다가, 정지가 되지 않자 이에 협제(脅制)한다는 죄목으로써 마침내 두 신하를 머나먼 외방으로 보직하신 일은 전하를 위하여 적이 안타깝습니다."
하니, 이미 대신에 대한 비답에 효유하였다고 비답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자의(諮議) 송명흠(宋明欽)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5일 병자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아뢰기를,
"이정필(李廷弼)의 합천(陜川) 문서를 10년 동안이나 금오(金吾)에 머물러 둔 채, 여태 개봉도 하지 않고 사람을 유죄도 무죄도 아닌 상태에 놓아 두고 있으니, 열어 보고 처리를 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정필과 이보혁(李普赫)은 서로 대립하였기 때문에 문서를 한 번 보고 바로 처리하기는 어렵다."
하였다.
도제조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그때 도신(道臣) 황선(黃璿)이 성을 버리고 적도를 놓아준 것으로 이정필의 죄를 삼았습니다만, 신이 지난날 영남에 안찰을 나가서 문안을 상고하여 보니 참으로 억울하였습니다. 그 당시 적의 형세가 매우 강성하여 본군의 쇠잔한 군병으로서는 막아낼 가망이 없으므로 이정필이 순영(巡營)에 지원을 청하였는데, 순영에서 우방장(右防將) 정양빈(鄭暘賓)을 시켜 지원하도록 하였으나 정양빈이 끝내 가지를 않으므로 이정필이 다시 병영(兵營)으로 달려가서 보고하였으니, 이는 성을 버리고 도망친 것이 아닙니다. 적 정상림(鄭商霖)을 잡아 가두어 놓고서 순영에 급히 보고하였으나, 순영에서 함부로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곧바로 죽이지 못하고 그 길로 병영으로 갔습니다. 그 사이에 적이 허점을 이용하여 군(郡)으로 들어가서 옥문을 깨뜨리고 적도를 풀어 놓았으니, 이것 또한 죽이지 않고 놓아준 것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이보혁과 서로 경쟁을 한 것 역시 까닭이 있습니다. 대저 이정필은 합천에서 적을 사로잡을 비밀 계획을 세웠고 이보혁은 성주에서 처음 합천으로 와서 군내에 주둔하면서 역시 정탐군을 세워 정탐을 하였지만, 두 사람이 애당초 계획을 상의한 적이 없는 상태인데다, 이윽고 이정필이 먼저 도착하여 적을 죽였으나, 그 수급(首級)을 처음 건네준 자는 바로 성주 주둔군이었습니다. 이에 또 각기 그 공을 빼앗길까 의심을 하게 되었고, 또 이보혁은 순영에 보고를 하였으나, 이정필은 순영에 보고를 하지 않고 병영에 보고하였기 때문에 도신 역시 이정필이 공을 빼앗은 것으로 의심하고 마침내 죄상을 이와 같이 정한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에 판금오(判金吾)에게 명하여 그 문안을 가지고 뒷날 등대할 때에 입시하도록 하였다. 뒤에 판의금 김시형(金始炯)이 문서를 가지고 아뢰기를,
"이것은 모두가 이정필의 장첩(狀帖)으로서 증거가 될 만한 것입니다. 지난날 문서궤가 불탈 적에 장부를 다 소실하였는데도 이것만은 남아 있는 것 역시 이상하다 하겠습니다."
하고, 사직 정익하(鄭益河)가 말하기를,
"이정필의 아들이 억울함을 호소한 것은 오로지 ‘군(郡)을 버리고 도주하였다.[棄郡逃走]’, ‘적도를 내보냈다.[放出賊徒]’는 여덟 글자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들여다 보신 문서에 대하여 곧바로 하교하기를, ‘이 여덟 글자는 과연 그렇지 않다.’라고만 하신다면 이것은 그만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정필이 참으로 측은하고, 문서가 소실을 면한 것 또한 이상하다. 그 사람이 대체로 경솔하였으니, 순영에 가지 않은 것 역시 경솔한 탓이다."
하였다.
임금이 시임·원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유신·대신 등의 여러 신하들이 동조(東朝)에 대한 경하를 극력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원경하(元景夏)가 경기 기병의 번제(番制)에 대한 책자를 올렸다. 원경하가 기병의 번제를 고치고자 하여 연중(筵中)에서 누차 진언을 하였고, 병조 판서가 된 뒤에 또 아뢰기를,
"신이 군총(軍摠)을 살펴보건대, 경기의 기병은 번을 세우기가 넉넉하니 군포(軍布)를 영원히 면제하여 주어야 합니다. 농번기와 농한기를 감안하여 번제를 잘 조절하고 다시 단속을 한다면 위급할 때에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고, 또 원도(遠道)의 경우에는 번을 없애고 군포를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사안이 새로운 법에 관계된다는 이유로 원경하에게 명하여 대신과 상의하여 그 규모를 논정한 다음, 책자로 만들어서 아뢰라고 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책자를 올린 것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조용히 친람하겠다."
하였다.
평안 도사 임집(任)을 파직하라고 명하고, 무늬 있는 비단의 반입 금지령을 어긴 이명직(李命稷)을 형조로 하여금 엄밀히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때에 재자관(䝴咨官) 이명직이 돌아오는 길에 비단을 사 가지고 오는 것을 평안 도사 임집이 수색하여 내어서 그 비단을 곧장 불태워 버리고 이명직은 순영의 감옥에 가둔 다음, 사유를 갖추어 써서 계문하였다. 이에 임금이 이명직이 맨 먼저 새로운 금지령을 범하였기 때문에 사형에 처하여야 하지만 아직 정해진 형률이 있지 않다 하여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금지된 물품을 몰래 사올 경우 법률상 본시 효시를 하게 되어 있으므로 정해진 형률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제정한 이 금지령은 성덕(聖德)을 빛낼 제도로서, 다만 나라 안에 시행하여 습속을 만회할 기회일 뿐만 아니라, 이미 천하에 알려져 있습니다. 대개 무늬 있는 비단은 연경(燕京)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소주(蘇州)·항주(杭州)에서 짜다가 우리에게 파는 것으로서, 연경의 상인 정세태(鄭世泰)가 새로운 금지령이 내려졌다는 소문을 듣고서 깜짝 놀라며 당장 강남(江南)에 연락하여 직조를 중지시키고 우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네 국왕으로서는 진실로 성덕(聖德)의 일이지만 우리들은 이제부터 살길이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좋은 소문의 영향은 멀리 미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명직을 죽이지 않는다면 진실로 법령이 흐트러져서 먼 곳 사람들의 웃음을 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좌의정 정석오(鄭錫五)는 말하기를,
"어복(御服)에 쓰이는 면단(綿緞)의 경우는 호조에서 해전(該廛)에 은을 주어 사오도록 한 다음 가져다 쓰는 것이 상례입니다. 신은 일행을 조사하여 보아서 과연 비단 외에 금지령을 범한 물품이 있다면 전민(廛民)을 죄주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조사를 하는 것도 옳거니와, 전민이 같이 범하였다면 역시 죽이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는데, 병조 판서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인명은 지중한 것인 만큼, 사형을 의논할 경우 급히 하는 데에 힘쓰는 것은 옳지 못하고, 형률을 억지로 끌어대며 구차히 증거하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애당초 정해진 형률이 없는데도 서둘러 죽인다면 이는 백성을 속이는 것이요, 그의 범행이 아무리 관무(官貿)가 아니라 하더라도 죽을 죄는 아닙니다. 지금부터 법조문을 분명히 세우고 나서 시행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고, 다른 여러 신하들도 조사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장석지(張釋之)의 말218) 과 같이 그 자리에서 효시를 하였다면 그만이겠지만 조정으로서는 마땅히 법률을 살펴보아서 처리하여야 한다."
하고, 이어 형조에 명하기를,
"이명직은 잡아와서 엄밀히 조사한 다음에 아뢰도록 하고, 도사 임집은 마땅히 효시할 것을 청하여야 했음에도 의례적으로 가두기만 하였는데, 그것은 직무 유기이니, 파직시키라. 의주 부윤(義州府尹) 권일형(權一衡)은 연명으로 장계를 하였는데, 역시 흐리멍덩한 처사이니, 종중 추고하게 하고, 평안 감사 이기진(李箕鎭)은 직책이 번신(藩臣)인 만큼, 마땅히 엄중히 징벌하는 것에 협조하여야 했음에도 의례적인 등문(謄聞)만 하였으니, 역시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이 말하기를,
"무늬 있는 비단의 반입을 금지하는 법령 역시 장애되는 바가 있습니다. 지금 통신사가 나올 날이 멀지 않았는데 왜인에게 줄 예폐는 으레 화주(花紬)를 써 왔고, 왜인은 성미가 편협하여 비록 더 좋은 대단(大緞)을 대신 주더라도 반드시 약조를 구실삼을 것이니, 말썽을 빚어낼 단서가 생기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 일은 교린(交隣)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참작하여 사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 이것을 금지한 것은 대개 사치를 싫어하였기 때문이니, 기이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멀리서 사다가 이웃나라의 사치를 돕는 것이 옳겠는가? 왜인의 상선이 남경(南京)을 왕래한다고 하니 혹 우리의 금지령을 들었을 법도 하고, 또 실로 우리에게 없어서 다른 물건으로 대신 주는 데는 우리도 할 말이 있다. 저들이 어찌 까다롭게만 나오겠는가? 지금 이것을 이유로 금지를 풀고서 이 사실을 사책에 쓴다면 나는 후세의 논평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 사람의 웃음을 사지 않을까 두렵다."
하였다.
12월 16일 정축
임금이 소대를 행하고 이 뒤로는 모든 연례(宴禮)에 다만 외습의(外習儀)만 거행하는 것으로 영원히 정식을 삼으라고 명하였다. 수찬 성천주(成天柱)가 글뜻으로 인하여 말하기를,
"앞으로도 또 칭상(稱觴)219) 의 예가 있을 것인데, 내연(內宴)에는 반드시 여악(女樂)을 쓰게 됩니다. 신이 일찍이 내습의(內習儀)를 본 적이 있었는데 선상(選上)된 기생 또한 많이 들어갔습니다. 지금 동궁께서 막 어린 나이에 있어서 의지가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밖으로부터의 유혹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외습의를 제대로만 한다면 내습의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습의는 그만두는 것이 역시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 말을 가상히 여겨 말을 내려 주어 장려하고 이어 이 전교를 내린 것이었다.
12월 17일 무인
비변사에서 관동 영애 방수 절목(關東嶺隘防守節目)을 올렸는데, 이르기를,
"1. 회양부(淮陽府)를 방수사(防守使)로 삼고, 이천(伊川)·평강(平康)·통천(通川)·고성(高城)·흡곡(歙谷)의 수령에게는 방수장(防守將)의 칭호를 가하여 방수사로 하여금 이들을 통솔하여 지휘하도록 한다.
1. 회양은 철령 방수시(鐵嶺防守寺)로 신지(信地)를 삼되, 다급한 상황을 만날 것 같으면 속오군(束伍軍)과 마군(馬軍)·보군(步軍) 전체 수효를 거느려 방수하고, 평상시에는 종전대로 방어영에 배속시켜서 매년 연습을 시킨다.
1. 북로(北路)에 다급한 일이 벌어지면 회양부가 반드시 먼저 이천 등지의 방수장을 지휘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각자의 신지를 지키도록 하되, 순영과 거리가 아주 멀 경우 방수에 관계되는 일은 바로 철원 방어사(鐵原防禦使)에게 보고하여 다시 순영으로 보고하도록 하고, 방수장 등은 방수에 관계되는 다급한 일이 있을 경우 먼저 방수사에 상의하여 차차로 통속하도록 한다.
1. 철령 방수시의 군기는 본부에 있는 것으로 적당히 옮겨 두고, 산마루에 나무와 돌을 모아 두었다가, 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 총섭(摠攝)이 본부에 보고한 다음, 마군·보군 및 무사(武士)·보사(步士) 등을 거느리고 힘을 합쳐서 방수한다.
1. 평강은 국사당(國師堂)으로 신지를 삼고, 이천은 방장(防墻)으로 신지를 삼아서, 상황이 다급할 경우 각기 부근의 속오군 중의 2초(哨) 및 작대군(作隊軍)을 거느리고 방수하고, 그 나머지 군병은 모두 철원 방어영으로 달려가도록 한다.
1. 고성은 유점(楡岾)과 장항령(鄣項嶺)으로 신지를 삼고, 통천은 추지령(楸池嶺)으로 신지를 삼되, 저유령(猪踰嶺)·판막령(板幕嶺)·쇄령(洒嶺) 세 곳 역시 왕래하는 길목인 만큼 이 세 길목은 추지령의 군병 중에서 차출하여 나누어 지키게 하고, 흡곡은 비운령(飛雲嶺)·상음천(霜陰遷)을 신지로 삼는다. 이상의 세 고을은 곧 강릉진(江陵鎭)의 소속이니, 철원 방어영으로 군병을 나눌 필요 없이 온 고을의 마군·보군 및 속오군을 통합하여 힘을 합쳐서 방수하되, 흡곡의 경우는 온 고을의 군병으로 비운령과 상음천 두 곳을 방수하게 한다.
1. 방수의 신지에는 평상시 거주할 곳이 없을 수 없는데, 회양은 이미 방수시가 있으므로 다시 설치할 필요가 없으나, 이천 등의 다섯 고을은 각기의 신지에 약간의 집을 세운 다음, 백성을 모집하여 지키도록 하되, 신역을 면제하여 주고 상주시켜서 창졸시에 달려올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여 둘 것이며, 다섯 고을에 나누어 준 상진 모곡(常賑耗穀)220) 10석 씩을 속히 마련하여 두도록 한다.
1. 유점 방수처는 유점 및 장안(長安)·표훈(表訓) 세 사찰(寺刹)의 승려들을 합쳐 방수하되, 세 사찰의 승려 중 적합한 자를 속히 총섭(摠攝)으로 차출하여 평상시에 통솔하고 있다가 상황이 다급할 때 거느리고 달려오도록 한다."
하였다.
12월 18일 기묘
부수찬 유언민(兪彦民)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의 잗단 과실들이 대개 너무 성급한 데에서 나오곤 하여, 점차 위에서는 의심을 하고 아래에서는 두려움을 가진 나머지 서로 마음이 맞지 않고 있으니, 이는 《대학(大學)》에 이른바, ‘성내는 바가 있으면, 그 올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과 불행스럽게도 가깝습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어느 연신(筵臣)이 우러러 규계(規戒)를 진술하니, 전하께서 자못 수긍을 하시어 다시는 지나친 거조를 범하지 않겠다는 하교를 하셨다고 하는데, 지난날 두 신하를 견책하여 외방에 보직하시고 그 하교의 환수를 아끼시니, 이는 이미 연신의 말을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처사입니다. 이러고도 어찌 수양의 효과를 거두어 지나친 거조가 없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맹자(孟子)의 말씀에서 얻은 바가 있기에 오늘 전하께 바치는 바입니다. 이르기를, ‘내가 가르칠 만한 사람을 신하로 삼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바로 전하께서 스스로 성스러운 체하는 병통이며, ‘목공(繆公)의 곁에 사람다운 사람이 없다.’는 것은 또 현자(賢者)가 나아올 수 있는 길을 막고 있어서 잘못을 바로잡아 줄 말이 좌우에 들리지를 않고 치우친 기쁨과 노여움이 전횡을 한 나머지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아! 지난 여름 유현(儒賢)이 낭패를 하고 돌아갈 적에 전하께서 처음에는 가을철을 기다려 다시 만나보고 싶다는 뜻을 누차 비답에 표현하셨으나, 여태 불러오지 않으므로 식자가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정성과 예의를 더욱 돈독히 하여 기어코 불러와야 합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아! 저 박문수(朴文秀)가 패악한 소를 올려 유현을 이간질한 것은 오로지 대론을 막아버리고 역적을 두둔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니, 붕당을 위하여 목숨을 걸겠다는 마음은 실로 길가는 사람도 다 아는 바입니다. 엊그제 간관이 논열을 할 적에 형률을 가볍게 마감한 것은 잘못이 없지 않으나, 정당한 그 논의는 역시 죄인을 징계할 만하였다 하겠습니다. 서둘러 수록(收錄)한 것에 이르러서는 너무 한심스러운 노릇입니다. 그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예나 다름없이 들어쓰는가 하면, 의정부의 수망(首望)에 올려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하여 마치 공로에 대한 시상이라도 하듯이 하였으니, 방자 무엄하고 조정을 경멸한 그 행위가 과연 어떠합니까? 총재(冢宰)가 된 신하가 본래부터 속임수로 지나친 은총을 받고, 인망이 모자라는 사람을 발탁하여 전형의 중임을 맡긴 것은 그에게 있어서 벌써 천만 부당한 은전이며, 전하께서 위임하는 기대 또한 예삿일이 아니었는데도, 은총에 보답할 길은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저들에게 아첨이나 하며, 두 마음 품는 자들을 은밀히 두둔했으니, 그의 마음 쓰는 것을 차마 바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를 엄히 출척하지 않는다면 제방이 크게 무너져 장차 국가의 근심이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속히 견책하여 파직시켜서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이셔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소가 올라가자 살펴보지도 않은 채 준엄한 하교로 꾸짖고 이어 관직을 개정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9일 경진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주례(周禮)》를 강하다가 시독관 윤봉오(尹鳳五)가 말하기를,
"옥당을 개정한다는 것은 선례가 없는 일입니다, 청컨대 유언민(兪彦民)의 관직을 개정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또 민택수(閔宅洙)의 관직을 개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회령 개시(會寧開市)가 이제 이미 끝났습니다.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자문을 짓도록 한 다음, 금군(禁軍)을 따로 정하여 의주(義州)로 내려 보내어 봉황성(鳳凰城)으로 전해 주어서, 장차 북경으로 들여보낼 바탕을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2월 20일 신사
우의정 민응수(閔應洙)가 잇달아 사직장을 올렸으나 상이 두터운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으니, 이 때에 이르러 마침내 출사하였다.
12월 21일 임오
전 고성 현감(固城縣監) 신사민(申思民)을 안주목(安州牧)으로 유배하여 5년 동안 금고(禁錮)하고, 한덕승(韓德升)을 해남현(海南縣)으로 유배하여 기한 없이 금고하였으니, 신사민은 관곡을 유용한 혐의이고, 한덕승은 재결(災結)을 멋대로 이용한 혐의 때문이었다.
평안도 성천(成川)에 어떤 백성이 한 태에서 두 딸을 낳았는데, 이마에서 배꼽까지는 한 몸체를 이루고 네 다리와 네 팔이 달려서 마치 두 사람이 서로 안고 누운 것 같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환경전(歡慶展)에서 인견하였다. 좌의정 정석오(鄭錫五)·우의정 민응수(閔應洙)가 동조(東朝)의 칭경(稱慶) 문제를 거듭 청하고, 또 영상이 입조하기를 기다려서 일제히 계정할 것을 말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임금이 민응수가 막 상신이 되었다 하여, 집정에 잘 협찬할 것을 면려하니, 민응수가 이에 사례하며 말하기를,
"신이 이미 외람되이 이 직임을 맡은 이상, 어찌 추거(推車)의 의리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사람의 견해란 각기 다른 법이고 또 구차하게 일치시킬 필요도 없으므로, 오직 소견대로 개진할 따름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근일 조정의 기상을 두고 어떤 이는 지난날보다 낫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자,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전하께서 신축년·임인년의 참혹한 살육에 덴 나머지 조정(調停)하고 보합하는 방도로 대처하시어, 수십 년 이래 조정이 조금 안정된 점은 약간의 효과를 거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원을 구명하지 않고 그 효과만을 성급하게 기대한 나머지, 시비를 양쪽으로 두고 구차하게 미봉하기에만 힘씀으로 해서 사대부들의 기풍이 여지 없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당쟁은 오히려 의리로 겨루었으나, 오늘날은 오직 사사로운 이해 관계만을 중시하고 문호를 나누고 갈라서 제각기 편당을 만들고 있으니, 신이 보기로는 더 나아진 점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이미 그 폐단을 진달하였으니, 이를 바로잡을 술법을 다시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민응수가 말하기를,
"언로를 여는 것보다 더 좋은 술법은 없습니다. 오늘날 대저 안으로는 묘당·전지(銓地)와 밖으로는 감사·수령이 모두가 구차스러운 생각만을 품고 거리끼는 바가 없는 것은 오로지 언로가 막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이란 이것저것 올리다 보면 참으로 함부로 떠들어대는 무리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진정시켜 가면 끝내는 저절로 일어났다가 저절로 없어지는 법입니다. 어찌 함부로 떠들어댄다는 이유로 그만 끊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언로를 막아 버렸다가 나라를 망친 경우는 많아도, 언로를 너무 터 놓았다가 함부로 떠들어대는 것을 견대지 못하여 위기에 이르렀다는 경우는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수어사 조관빈(趙觀彬)이 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가서는 연이어 편비(褊裨)를 시켜 병부를 반납하였는데, 우의정 민응수(閔應洙)가 아뢰기를,
"조관빈을 그냥 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장신(將臣)이 병부를 반납하는 일은 예전에 없었던 사례입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장신의 병부는 대신의 명소(命召)와 비교할 때 사체가 보다 더 엄중한데, 대신이 명소를 반납하는 예가 있다 하더라도 그 명소를 다시 전달할 적에 반드시 사관이 가서 직접 전해주는 것인데, 장신이 반납과 전달을 한낱 편비가 오가며 하게 하는 것은 사체가 참으로 한심스럽다. 이제 우상의 진달을 들으니, 이것은 바로 근래의 사례이지, 예전에는 이러한 사례가 없다고 하는데, 막중한 장신의 병부를 이처럼 설만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 이 뒤로 장신이 된 자는 비록 대명(待命) 중에 있더라도 직임이 체직되지 않았다면 선전관(宣傳官)에게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리기 이전에는 감히 임의로 병부를 반납하지 말 것을 법식으로 정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이 아뢰기를,
"본조의 미곡이 탕갈되어 반록(頒祿)·방료(放料) 및 추가로 쓴 공가(貢價)를 이어댈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선혜청의 미곡 3만 석을 얻어 쓰도록 하소서."
하니, 2만 석을 주라고 명하였다.
12월 23일 갑신
공조 참판 조영국(趙榮國)이 아뢰기를,
"목릉(穆陵)의 표석을 세 줄로 열서하라고 이미 하교하셨습니다만, 다른 능의 경우 ‘부좌(祔左)’로 썼지만 목릉은 왕비 두 위를 각기 다른 산등성이에 봉안하였기 때문에 이 선례를 적용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입시한 여러 대신들에게 물었는데, 모두가 ‘부(祔)’ 자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므로, 다시 예관에게 명하여 문의하라고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의논에 이르기를,
"예법에, ‘졸곡(卒哭)을 지낸 후에 부제(祔祭)를 거행하니, 부는 따라가게 한다는 뜻이므로, 꼭 동실(同室) 합궤(合匱)를 하고 나서야만 부라고 일컫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볼 때 오늘날 이 두 왕후의 능은 이미 대왕의 능과 같은 국(局) 안에 있어서 하나의 능호로 통일되었으므로, ‘부’ 자를 쓰는 것은 조금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모든 능의 표면에는 모두 ‘부좌’라고 썼는데, 지금 다만 ‘부’ 자를 쓴다면, 너무도 불분명하여 후세에 혹시 의문을 자아낼 수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부중강(祔中岡)·부동강(祔東岡)’으로 쓰는 것이 타당할 듯한데, 혹자의 말에는 ‘동강’·‘중강’으로 쓰려면 마땅히 후기(後記)에 써야 하니, 이는 중첩됨을 면치 못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신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무릇 ‘부좌’ 역시 후기에 써 놓고서 앞면에 또 쓰는 것을 꺼리지 않으니, 어찌 ‘중강’·‘동강’만이 중첩되는 것을 꺼리겠습니까? 이미 ‘동강’·‘중강’이라고 쓰고 나면 대왕의 능이 서강(西岡)에 있다는 사실은 이로 인하여 더욱 분명하여질 것입니다."
하고,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의 의논에 이르기를,
"‘부’ 자를 쓰고 안 쓰는 일은 ‘부’ 자의 의의를 따라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은(殷)나라 사람은 졸곡을 지낸 후에 부제를 지낸다.’라고 하였으니, ‘부’란 손자를 할아버지에게 부치는 것을 이르는 말로, 대저 따르게 한다는 뜻이지, 꼭 묘혈을 같이하는 것만을 ‘부’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이 두 왕비의 능은 비록 대왕의 능과 산등성이는 다르다 하더라도 하나의 국에 같이 봉안하였으니, 이를 일러 종장(從葬)이라고 합니다. 이미 종장을 한 이상 ‘부’ 자를 써도 의문의 여지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으며, 영부사 김흥경(金興慶)의 의논도 조현명과 같았다. 좌의정 정석오(鄭錫五)의 의논에 이르기를,
"영상의 헌의가 말이 매우 정밀하고 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영상의 의논대로 시행하되, 다만 ‘동’ 자는 ‘좌’ 자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시임·원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또 단자(單子)를 철회하고 같이 입시하자, 임금이 하유하기를,
"원일(元日)의 진하는 다행히 자전께서 뜻을 돌려서 반사(頒赦)·설과(設科) 등의 일들을 모두 윤허하셨으나, 상호(上號)만은 완강히 거절하고 윤허하지 않으셨다. 하례의 윤허를 이미 받아냈으니, 이 일은 그만둠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대신 및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전례(典禮)를 폐할 수 없으니, 계속해서 진청(陳請)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례를 거행하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마음으로 진하를 받겠는가?"
하고, 동조(東朝)에게만 진하를 거행하고 대전 이하는 모두 권정례(權停例)221) 로 치르라고 명하였는데, 대신과 예관이 굳이 청하였으나,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형조 판서 유엄(嚴儼)이 아뢰기를,
"《속대전(續大典)》이 이제 이미 간행되었으니, 율학 취재(律學取才) 때에 마땅히 일체로 시강(試講)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추조(秋曹)에 명하여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고 하였으니, 날씨가 춥기 때문이었다.
12월 24일 을유
부제학 조명리(趙明履)를 불러들인 다음, 임금이 친히 동조 원일 진하 치사문(東朝元日陳賀致詞文)을 지었다.
원경하(元景夏)를 지경연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지춘추로, 김상성(金尙星)을 대사간으로, 이명곤(李命坤)을 경기 관찰사로, 김상복(金相福)을 집의로, 홍득후(洪得厚)를 장령으로, 이장하(李長夏)를 지평으로, 오언유(吳彦儒)·윤광찬(尹光纉)을 정언으로, 남유용(南有容)을 응교로, 한광회(朝光會)를 교리로, 홍낙성(洪樂性)을 부수찬으로, 정익하(鄭益河)를 형조 참판으로, 서명구(徐命九)를 우윤으로, 이형만(李衡萬)을 사서로 삼았다.
12월 25일 병술
어떤 별이 오거성(五車星) 밑으로 흘러갔는데, 그 크기가 바리때[鉢]만하고, 흘러가는데 소리가 났다.
12월 26일 정해
주강을 행하였다.
밤에 유신을 불러들여 《주문초선(朱文抄選)》을 강(講)하여 버들가지를 꺾은 데 대하여 정자(程子)가 간쟁한 일을 논하다가, 임금이 말하기를,
"여기에서 ‘만물과 더불어 함께 봄을 즐긴다.’는 뜻을 찾아볼 수 있으니, 원량(元良)으로 하여금 이를 알도록 하라."
하고, 춘방에 명하여 베껴 들이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촛불이 희미한데도 부제학 조명리(趙明履)가 막히지 않고 빠르게 읽어 내려가자, 임금이 말하기를,
"평상시에 외워 두었는가?"
하고, 이어 보지 않고 외울 것을 명하니, 조명리가 십여 판(板)을 계속 해서 외웠다. 임금이 말하기를,
"부제학이 늘 나에게 《주문초선》을 권한 것이 어찌 이른바, 미나리를 먹어 보고 그 맛이 좋아서 임금에게 바친 것222) 이겠는가?"
하고, 《절작통편(節酌通編)》 한 질을 특별히 하사하면서, ‘마음에 그 공부를 가상히 여겨 이 책을 앞에서 준다.[心嘉其工 面賜是編]’는 여덟 글자를 손수 책머리에 써서 은총을 표시하였다. 이 때 임금이 누차 문자를 지었으나, 사실은 조명리에게 편차를 맡겼으니, 이것으로 해서 조명리가 사랑을 받게 되었고, 또 이 자리에서 임서(臨書)를 하여 가지고 일부러 외어서 재주를 과시한 결과 책을 하사받았다고 사람들이 비웃었다.
12월 27일 무자
문학 임박(任璞)을 관서 위유 어사로 삼고 입시를 명하였다. 이어서 ‘관서의 백성에게 하유하는 글’을 지어 주며, 관서로 가서 인민을 하유케 하였으니, 관서 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서 앞으로 진휼을 설행하려고 짐짓 하유를 하여 안정을 시키려는 것이었다. 또 ‘어사에게 하유하는 글’을 내렸으니, 이르기를,
"아!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하다.’라고 《상서(尙書)》에 이르지 않았던가? 아! 백성이 장차 유리한다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임금노릇을 하겠으며, 비록 공수(龔遂)·황패(黃霸)223) 의 재주를 가진 재신이 있고, 만 곡(斛)의 미곡이 있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만약 흩어져 버린다면 누구에게 진휼을 시행하겠는가? 지금의 급선무는 백성을 위로하여 안정시키는 일만한 것이 없고, 안정을 시킨 뒤에 당연히 살펴야 할 일은 오로지 진정(賑政)을 잘 경리하고 있는지의 여부와 수령들이 잘 시행하고 있는지의 여부이다. 아! 어사는 부디 임무를 잘 수행하여 특별히 파견하는 이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임박에게 말하기를,
"가서 도신(道臣)과 상의하여 적당히 장주(狀奏)하고, 염문(廉問)에 관련되는 모든 사항들은 일체 편리한 대로 처리하라."
하였다.
유신을 불러들여 《제범(帝範)》을 강하고 나서 단묘조(端廟朝)의 상신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정분(鄭苯)의 관작을 추복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황보씨와 김씨의 후손이 상언(上言)하여 신원을 청구하니 사안을 대신들에게 내려 보내어 의논케 하였는데, 대신들이 윤허하는 것이 좋다고 헌의하였으나, 임금이 정난(靖難)의 공훈에 광묘(光祖)224) 가 간여되었다는 이유로 난처해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옛날 태종께서는 정몽주(鄭夢周)를 죽이고 나서 곧바로 시호를 내려 포장하는 은전을 베푸셨는데, 두 상신의 일은 정몽주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김종서·황보인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정난의 거사를 이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광묘께서 어쩔 수 없이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종(睿宗)을 훈계함에 이르러서는, ‘나는 고난을 주었지만, 너는 태평을 주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예종께서 대리(代理)함에 이르러 드디어 당시 연좌되었던 모든 사람을 다 석방하셨으니, 그렇다면 당시에도 대개 이 두 상신을 역적으로는 보지 않았던 것이고, 선조(先祖)에서도 또한 신원하자는 의논이 제기된 적이 있었는데, 어떤 장애가 있어 신원의 일은 중지되었지만 그 자손들을 녹용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니, 성의(聖意)를 가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성상께서 훈적(勲籍)을 가지고 의문을 품으십니다만, 광묘께서 정극(正極)하신 이후 공훈을 어찌 논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성삼문(成三問) 등의 추복(追復)에 있어서도 또한 당시의 훈적에 대하여 혐의를 두지 않았는데, 유독 이 두 상신에게만 무슨 혐의를 둘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황보인의 묘가 파주(坡州)에 있는데, 비석의 앞면에 ‘영천 황보공지묘(永川皇甫公之墓)’라고만 쓰여 있고 관작과 이름은 쓰여 있지 않다고 하니, 더더욱 슬픈 일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결단코 시행하여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고, 영돈녕 조현명(趙顯命) 또한 아뢰기를,
"당시에 주살한 것은 종사를 위한 큰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후세의 포장은 백세의 공론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두 가지가 병행하여 서로 어긋남이 없습니다."
하였으며, 다른 여러 대신들도 다 같이 옳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삼문 등 여러 사람들의 일은 광묘의 정위(正位) 이후에 있었으니, 이는 바로 군상을 침범한 일이거니와, 두 사람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람의 일은 매우 가벼운 데에 속한다 하겠다. 그러나 다시 상량하여 보겠다."
하였다.
이날 밤 《제범》을 강하면서 교리 한광회(韓光會)가 말하기를,
"옥당에 또한 《제범》이 있는데, 광묘의 훈사(訓辭)가 뒷 부분에 붙어 있습니다."
하니, 즉시 들여오라고 명하여 계속해서 읽도록 하더니, ‘나는 마땅히 고난을 주었지만, 너는 마땅히 태평을 주라.’는 구절에 이르러서 임금이 세 번이나 감탄을 하면서 말하기를,
"아! 황보인·김종서 등의 일을 가리키는 것인가? 마치 귀를 잡고 직접 명령하시는 것 같다."
하고, 이에 당장 전교를 써서 황보인·김종서 등의 관작을 추복시켰다. 그러자 병조 판서 원경하(元景夏)가 또 아뢰기를,
"정분은 후사가 없어서 청원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은명(恩命)이 그에게만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때 같이 죽은 세 사람은 일체로 신원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이에 정분의 관작도 함께 추복시키게 하고, 하교하기를,
"김종서·황보인 등의 복관에 대한 일은 대신이 이미 헌의를 하였고 연신이 또한 모두 진달하였는데도, 내가 주저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고 판서 김진규(金鎭圭)의 헌의를 회상해서였다. 이제 어제(御製)의 훈사 서문 가운데 ‘나는 마땅히 고난을 주었지만, 너는 마땅히 태평을 주라.’는 교명을 받들어 읽고 나니, 마치 귀를 잡고 직접 하명하시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슬픈 감회가 인다. 그리고 훈사의 말미는 곧 지난날 육신(六臣)의 복관에 대한 일을 잘 계술하라는 뜻인데, 또한 어찌 잘 계술하지 않겠는가? 지난날의 교명을 본받는 것은 곧 자식된 자의 도리이고, 또 육신을 복관시키더라도 위사(衛社)의 훈명(勳名)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니, 이로 미루어볼 때 지금 세 사람을 복관시키더라도 그 훈적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 지금 훈사를 받들어 보니, 서문이 감격을 자아내어 마치 이곳을 오르내리시며 지도하는 것과 같으니, 아무리 신중을 기하기로서니 어찌 다시 주저할 것이 있겠는가? 김종서·황보인·정분을 특별히 복관시켜 성의(聖意)를 표창하노라."
하고, 이어 운각(芸閣)에 명하여 훈사를 간행하여 올리라고 하였다.
승지 홍봉한이 아뢰기를,
"근일 대신과 비국 당상이 입시할 적에 대간·옥당 및 사변 주서(事變注書)가 같이 입시하지 않는 것은 차대(次對)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승정원의 규정을 살펴보건대, 무릇 대신 및 비국 당상이 입시를 하게 되면 모두가 차대의 예와 같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일체 정해진 옛 규정에 의거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는데, 대신의 특대(特對) 및 비국 당상이 무슨 일로 인하여 입시할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않게 하였다.
12월 29일 경인
왕세자와 빈궁이 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니, 이 때에 화완 옹주(和綬翁主)가 마마를 앓고 있어서 약방의 여러 신하들이 신묘년225) 의 예에 따라 거처를 옮겨야 된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승지 홍봉한에게 군직을 체부(遞府)하여 따로이 입직케 하고, 또 약방·총부·병조의 분사관(分司官)을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조정·종반의 문안 및 숙배를 모두 동궁의 거처를 옮긴 뒤에는 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서로 내왕하는 것을 꺼려서였다. 또 삼전(三殿)의 문안도 모두 그만두라고 하였는데, 보덕 황경원(黃景源)이 상소하기를,
"원조(元朝)의 문안까지 전연 폐지하는 것은 정리(情理)에 잘못된 일입니다. 청컨대 춘방관을 출직(出直)시켜서 승령(承令)과 문안을 밖에서 전달받아 받들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훈련 도감에서 아뢰기를,
"흥화문(興化門)의 군병 1백명을 파총(把摠)·초관(哨官) 각 한 명에게 영솔시키고, 남영(南營)·북일영(北一營) 두 곳의 군병 50명씩을 초관 각 한 명에게 나누어 정하고, 영솔시켜 돌아가면 입직하도록 하소서."
하고, 어영청·금위영에서 아뢰기를,
"경덕궁의 궁장 밖의 별순라(別巡邏)를 을축년226) 의 예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모두 허락하였다.
장령 홍득후(洪得厚)가 상소하기를,
"전 대사간 조상명(趙尙命)이 얼마 전 정주(政注)의 일로 정관(政官)을 논척하며 견책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다가, 정관이 분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서둘러 그 집을 찾아가서 번거롭게 사죄하였다고 합니다. 아! 어제는 공거(公車)에 글을 올려 놓고서 오늘은 사실(私室)에서 깊이 사죄를 하였으니, 이러한 대관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정관으로 말한다면 한갓 전형 임무의 애중함만 알고 그 자리를 잃을 것을 걱정한 나머지, 언자(言者)의 사죄를 다행히 여겨 남들이 조롱하는 것도 아랑곳 없이 기회를 보아 뛰쳐나가서는 그대로 주저앉았으니, 염치와 기강이 장차 여기에서 무너질 판입니다. 청컨대 함께 파직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윗사람을 추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꾸짖었다.
지평 이장하(李長夏)가 상소하기를,
"무신년227) 에 공을 세운 출신(出身)의 무리들은 각 군문에서 따로이 명목을 설치하고, 아울러 오래 근무하면 승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으나, 훈국 별대(訓局別隊)만은 이 규정이 없어서 금위영·어영청에 비교할 때 은전이 고르지 못합니다. 청컨대 두 군영의 예에 따라 구근과(久勤窠)를 설치하소서."
하니, 바답하기를,
"이렇게 은전이나 간청하는 것이 너희의 직무인가?"
하였다.
부교리 김문행(金文行)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종조(從祖) 충헌공(忠獻公) 신 김창집(金昌集)이 40년 동안 조정에 있으면서 선대왕의 두터운 신임과 백발 단충(白髮丹忠)의 포장을 가장 많이 입어, 지우(知遇)에 감격한 나머지 죽음으로 보답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경묘(景廟)께서 병환이 위중하고 후사를 부탁할 사람이 없음에 이르러서는 밤낮으로 걱정하고 불안해 하다가, 마침내 두세 대신과 동심 협력하여 위로 우리 자전(慈殿)과 경묘의 뜻을 받들어 드디어 큰 계책을 결정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화를 당하였습니다. 임종 때에도 집안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말도 없었고 유독 고 봉조하 신 민진원(閔鎭遠)에게 말하기를, ‘동궁을 보위하기가 어려울 듯하오. 참으로 동궁만 안정시킬 수 있다면 내가 죽어서 선왕을 뵈어도 할 말이 있겠소.’ 하였고, 또 그 아들 고 승지 신 김제겸(金濟謙)에게 편지를 띄우기를, ‘하늘이 만약 송(宋)나라를 도와주기만 한다면 나라는 기필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충 위성(孤忠危誠)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는데도 성명(聖明)께서 오히려 아직 다 통촉하지 못하시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택군(臣擇君)이라는〉 세 글자의 죄인은 신으로서는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만, 삼종(三宗)228) 의 혈맥은 오직 전하 한 분뿐이어서 노래를 부르고 송사를 하는 일반 백성들까지도 오히려 우리 임금의 아드님이라며 추대를 하였는데, 더구나 신의 종조(從祖)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일찍이 민진원에게 대책을 결정한 일로써 말하기를, ‘오늘날 왕자가 많았다면 사변은 더욱 헤아리기 어렵겠으나, 우리 임금의 아드님은 오직 한 분뿐이고 또 천명과 인심이 이미 이리로 쏠리었으니, 다시 무엇을 염려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민진원이 일찍이 이 말을 가지고 어전에 앙달하였으니, 대저 민진원의 충직한 성품으로 반드시 사사로이 아부하여 임금의 귀를 속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삼변(三變)229) 의 설에 있어서는 그 때의 사세는 참으로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대개 대리 청정의 교명이 세제 책봉 초에 갑자기 내려졌으므로, 백관을 거느리고 감히 도로 거두어들일 것을 청하는 것은 사리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비답이 간절하여 ‘〈세제가 옳은가?〉 좌우의 〈신하들이〉 옳은가?’라는 전교가 내려지기까지 하였으니, 곧바로 정청(庭請)을 철회하고 성명(成命)을 받드는 것 역시 사세로 보아 당연한 처사였으니, 이것이 정청을 연차(聯箚)로 바꾸게 된 동기입니다. 북문을 몰래 열고 역적 조태구가 갑자기 들어가니, 또 무슨 모양의 화를 일으킬지 몰라 다급하여 호흡을 다투는 판이었으니, 앞뒤로 함께 들어간 것은 뜻밖의 변고를 막자는 의도였으며, 절목(節目)을 작환(繳還)한 것 역시 눈앞의 다급한 사태를 미봉하자는 의도였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한결같은 정성은 참으로 변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혹자가 이것을 가지고 질문을 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얼굴을 찌푸리고 길게 한숨지으며 말하기를, ‘지금의 세태를 보건대, 설령 성명을 봉행했더라도 하룻밤 사이에 변고가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우선 화를 일으킬 수 있는 단서를 없애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 하였습니다. 아! 앞뒤로 청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하며 사세에 따라 대응한 것들이 한편으로는 종사(宗社)를 위하자는 의도였고 한편으로는 성궁(聖躬)을 보위하자는 의도였으니, 실로 일분의 사심도 그 사이에 개입된 것이 없었다는 사실은 하늘의 해가 함께 밝혀 주고 있습니다. 고 상신 이이명(李頤命) 같은 이는 신의 종조와 참으로 생사를 같이하는 동지였는데도 당시에 해치려고 하였다는 말로 떠들썩하였으니, 이러한 일들을 또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신의 종조를 표창한 일이 또한 많기는 하나, 오직 이 ‘세 글자’ 및 ‘삼변’의 설만은 지금까지 분변하지 않고 있음으로 인하여 경신년230) 의 비망기에 아직도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말들이 많이 있으니, 지난날의 흉당들이 이를 구실로 삼아 무고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논하는 자들도 오히려 그때의 처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과거를 깨끗이 씻어버리려는 성상의 초심(初心)에 손상이 되지 않겠으며, 또 지하에서 품고 있는 억울한 원한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은 내가 깊이 알고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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