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5권, 영조 23년 1747년 1월

싸라리리 2025. 9. 30.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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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신묘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인정전(仁政殿) 뜰에 나아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 전문(箋文)을 올리며 진하(陳賀)하였는데, 자전(慈殿)이 회갑을 맞이하는 경사 때문이었다.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내려 팔도의 도신(道臣) 및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칙려하였다.

 

1월 2일 임진

장령 홍득후(洪得厚)와 지평 이장하(李長夏)가 상소에 대한 비답 때문에 아울러 인피(引避)하자, 교리 한광회(韓光會)가 차자(箚子)를 올려 홍득후는 파직하고 이장하는 체임시키도록 청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하였다. 임금이 조정의 논의가 갈라지는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마음을 다하여 조절하였으나, 서로 한 당파에 치우쳐 반드시 배척하여 죄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권력을 마음대로 부리려는 신하는 전직(銓職)에 있는 자가 조금만 겸용(兼用)할 뜻을 두면 떼 지어 일어나 공격하였는데, 유언민(兪彦民)이 먼저 장전(長銓)001)  을 공격하였고, 홍득후가 또 심성희(沈聖希)를 공격하였다. 당시 한광회가 심성희에게 아부하였기 때문에 논박하여 체임시켰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하례(賀禮)하는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인구(引咎)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이제 삼가 황보인(皇甫仁) 등을 복관(復官)시키라는 윤음을 보건대, 성상께서 남모르는 억울함을 가엾게 여기셔서 선왕(先王)의 뜻을 계승하신 성의(盛意)는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고 화기(和氣)를 맞아들이기에 충분하므로, 신은 흠탄(欽歎)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좌익 공훈(佐翼功勳)을 정난(靖難)으로 쓴 것은 어긋남을 면하지 못하며 잇달아 연신(筵臣)이 아뢴 것으로 인하여 위사(衛社)로 고치도록 명하셨는데, 병자년(丙子年)002)  의 공훈은 바로 좌익(佐翼)한 것이었습니다. 좌익한 공훈은 비록 수충(輸忠)·위사·동덕 좌익(同德佐翼)으로 말을 하기는 하지만, 훈공(勳功)의 칭호는 으레 끝의 두 글자를 일컫게 되니 위사는 훈공의 칭호가 아닙니다. 그리고 을사년(乙巳年)003)  에 정순붕(鄭順朋) 등이 훈록(勳錄)에서 추삭(追削)당한 공훈은 바로 위사이었으니, 지금 비망기(備忘記) 가운데 위사로 고친 공훈의 칭호를 다시 좌익으로 고쳐서 부표(付標)하여 계하(啓下)하심이 마땅합니다. 인하여 삼가 생각하건대, 신이 애당초 수의(收議)하면서 황보인·김종서와 함께 죽은 여러 신하들도 달리 할 수 없다는 뜻을 대략 진달하였습니다. 정분(鄭苯)의 경우는 비록 일체로 복관시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만, 찬성 이양(李穰), 판서 민신(閔伸)·조극관(趙克寬), 감사 조수량(趙遂良), 참찬 허후(許詡),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皇甫錫),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金承珪)·김승벽(金承壁), 허후의 아들 허조(許慥) 등과 같은 이들은 차별 없이 베푸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모두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근거를 상고하여 아뢰도록 해서 일체로 복관시키소서."
하였는데, 차자가 들어가자, 승지에게 돈유(敦諭)하도록 명하였다.

 

1월 6일 병신

영중추부사 김흥경(金興慶)이 상소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쉬기를 빌었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김흥경이 일찍이 의정부에 있을 때 이석표(李錫杓)에게 논박을 당하였었는데, 마침내 기무(機務)에 해이해져 매번 연초[歲首]에는 번번이 상소하여 물러나 쉬기를 바랐지만, 한 번의 상소로 그쳤으므로 임금이 공의(公議)에 적합하지 않음을 깊이 알고서 물러나 쉬도록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대체로 그가 실상 떠날 뜻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황해 감사 이천보(李天輔)가 해주(海州)에 성을 쌓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각도의 제영(諸營)에는 모두 성이 있었으나, 해주에만 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월 10일 경자

병조 판서 원경하(元景夏)가 부신(符信)을 바치고 명을 기다렸다. 이보다 앞서 교리 김문행(金文行)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종조부(從祖父) 충헌공(忠憲公) 신 김창집(金昌集)이 경자년004)  의 대상(大喪)에 이르러 국가의 형세가 고단하고 위태로워져서 많은 사람들이 원한을 품고 틈을 엿보고 있었는데, 이러한 때를 당하여 신의 종조부는 돌보아주신 은혜를 돌이켜 생각하고, 국가의 일을 매우 염려하여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은 한편에다 버려둔 채 오직 경종[景廟]께서 편찮으신데도 국본(國本)을 의탁할 데 없다는 것으로 밤낮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에 마침내 두세 명의 대신과 마음을 합쳐 힘을 다하여 위로 우리 자전(慈殿)과 경종의 뜻을 받들어 드디어 큰 계책을 정하였으나, 화(禍)는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임금을 사랑한 한 마음만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에 임하여 가사(家事)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이 유독 말하기를, ‘진실로 동궁(東宮)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얻게 한다면, 내가 비록 죽더라도 돌아가 선왕을 뵙고 할 말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으니, 아! 이러한 그의 특이한 충성과 뛰어난 정성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만한데,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유유(悠悠)한 말과 방불(彷彿)하겠습니까?
대저 삼자(三字)에 대한 죄안(罪案)은 신이 참으로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워 그 까닭을 알지 못하지만, 만약 당일(當日)의 일을 가지고 논한다면,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은 오직 전하 한 분뿐이었으니, 일반 백성으로 은덕을 노래하며 소송을 제기한 자도 오히려 우리 임금의 아들이라고 떠받들었는데, 더구나 신의 종조부가 선왕의 한없는 은혜를 받아 기필코 후사(後嗣)에게 보답하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일찍이 민진원(閔鎭遠)과 계책을 정하는 일에 대해 말하기를, ‘오늘날 만약 왕자(王子)가 여럿이라면 사변(事變)은 오히려 측량하기 어렵겠지만, 우리 임금의 아들은 단지 한 분뿐이니,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귀속된 바가 있는데 다시 무엇을 염려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민진원이 일찍이 이 말을 전석(前席)에서 앙진(仰陳)하였으니, 대체로 민진원의 충성스럽고 정직한 마음으로 반드시 신의 종조부에게 사사로이 아첨하여 위로 천청(天聽)을 속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에서 신의 종조부의 한결같은 적심(赤心)을 알 수 있는데, 오히려 이신(李紳)의 불리한 참소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세 번 변경했다는 설(說)에 이르러서는 그 당시의 사세(事勢)는 아주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대체로 대리(代理)하라는 명이 건저(建儲)한 초기에 갑자기 내렸으니, 앞장서서 백료(百僚)를 거느리고 감히 도로 정지하도록 청하는 것은 진실로 사리로 보아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비지(批旨)가 간곡하고 측은하여 심지어 도우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궐정(闕庭)에서 호소하던 것을 도로 거두고 우러러 성명(成命)을 받드는 일 또한 사리로 보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정청(庭請)이 연차(聯箚)로 변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북문(北門)이 몰래 열려 역적 조태구(趙泰耉)가 그 틈으로 들어갔으니, 또 어떤 모양의 화기(禍機)가 순간에 박두해 있는지 모른 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들어갔던 것은 뜻밖의 변고를 미리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절목(節目)을 작환(繳還)한 것 또한 장차 목전(目前)의 위급함을 임시로 대처한 것이었으니, 나라를 위하는 성실한 정성은 진실로 일찍이 변하지 않았었습니다. 아! 앞뒤로 더러 청하기도 하고 더러 정지하기도 하면서 기미에 따라 변고에 대응한 것이 한편으로는 종사(宗社)를 위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성궁(聖躬)을 호위한 것이었으니, 진실로 조금이나마 사사로운 이해(利害)가 그 사이에 서로 엇갈려 섞여 있지 않았음은 천일(天日)이 이를 조림(照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흉도(凶徒)들의 온갖 계책으로 원한을 갚으려고 충역(忠逆)을 의심하여 혼란시키려는 자는 도리어 무안(誣案)이 이미 밝혀진 뒤에도 마음은 고치지 않고 낯빛만 바꾸어 이 설(說)을 창도(倡導)하며 허물이 없는 곳에서 허물을 찾으려고 몰래 현혹시키는 계책을 행하려 하니, 그것 또한 통분스럽습니다. 이미 복관하고 또 시호(諡號)를 회복시켰으며, 이제 사제(賜祭)하는 거사가 있는데도 오직 삼자(三字)와 삼변(三變)에 대한 설은 아직 흔쾌하게 분변하지 못하였습니다. 경신년005)  의 비망기(備忘記)에 인신으로서 감히 듣지 못할 부분이 많았으므로, 지금 논하는 자가 오히려 그 사건에 임하여 변고에 대처하는 즈음에 혹시라도 성상께서 소설(昭雪)하신 당초의 마음에 손상이 있는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것은 내가 깊이 알고 있다는 것으로 비답하였다. 소장 가운데 이른바 지금 논하는 자라고 한 것은 바로 원경하(元景夏)이었다. 원경하가 대소(對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안(誣案)이 신설되고 분변된 뒤부터 여러 대신들이 비록 복관(復官)되거나 시호가 회복되었지만 사제(賜祭)를 받지 못했으므로, 신이 일찍이 이것을 우러러 청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이 일이 도리어 유신(儒臣)이 원통함을 호소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니, 모르겠지만 신이 아뢴 가운데 어느 귀절의 내용이 이런 일을 이루게 하였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것을 무엇 때문에 개의(介意)하는가?"
하였다. 김문행이 또 상소하여 신변(伸辨)하도록 하자, 임금이 신변하도록 명했었다. 이에 원경하가 부신(符信)을 바치고 대죄하니, 임금이 명을 기다리지 말도록 명하였는데, 두 사람을 화해시키고자 한 때문이었다.

 

1월 11일 신축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주례(周禮)》를 강하였다. 이 당시 옹주(翁主)의 천연두 때문에 오래도록 인접(引接)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처음 개강한 것이었다. 좌의정 정석오(鄭錫五)·우의정 민응수(閔應洙)가 구대(求對)하여 동조(東朝)에 호(號)를 올릴 것을 청하고, 빈계(賓啓)에서 발의하여 아뢰는 것이 마땅하다고 우러러 아뢰니,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지 이철보(李喆輔)가 아뢰기를,
"새로 임명된 관원이 동궁(東宮)에게 숙배(肅拜)하지 않는 것은 크게 미안(未安)합니다. 지금은 이미 구기(拘忌)할 일이 없으니, 청컨대 전례대로 하도록 하소서."
하고, 지경연사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혹시 구기하는 때라 하더라도 대조(大朝)에 숙배한 뒤에 하루의 간격을 두어 동궁에게 숙배하도록 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이 말하기를,
"신사(信使)가 앞으로 닥칠 터인데 들려보내야 할 인삼(人蔘)이 2백 60근(斤)이나 되도록 많은 데 이르렀습니다. 작년에 본조에서 염출한 은(銀)을 제외하면 다방면으로 환무(換貿)해야 하는데, 지금 갖추지 못한 것도 1백 40여 근이나 됩니다. 지금 만약 이 숫자에 준하여 바꾸어 취하게 한다면, 마땅히 3만(萬)의 은자(銀子)를 준비해야 하니, 형세가 참으로 몹시 민망스럽습니다. 강계(江界)에서 인삼을 캘 때에 가서 또 사서 가지고 오려고 하는데, 듣건대 강변(江邊)에 흉년을 당한 백성들이 곡식을 원하고 은을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관서(關西)의 구세미(舊稅米) 1만 석(石)을 한정하여 가져다 활용할 것을 청하였었는데, 대신이 1만 석은 너무 많다고 하여 어렵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7천 석을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다.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참판 심성희(沈聖希)·참의 임정(任珽)을 체임시키고, 예조 판서 김약로(金若魯)를 이조 판서로, 승지 이철보(李喆輔)를 참판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참의로 삼았는데, 모두 중비(中批)006)  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세 전관(銓官)이 모두 인입(引入)하자, 정석오(鄭錫五)가 아뢰기를,
"도목 정사(都目政事)007)  를 아직 행하지 못하였으니, 전관(銓官)의 자리를 비워 둘 수 없습니다. 영의정이 병을 끌어대며 추천하지 않으니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좌의정의 뜻을 알 만하다. 추천하고 싶지 않아서 나로 하여금 임명하게 하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이 명이 있었다. 벼슬을 임명하는 것은 국가의 대정(大政)인데, 자신이 대신이 되어 중비하도록 청하는 데 이르렀으니 애석하다.

 

임박(任璞)을 관서 감진 어사(關西監賑御史)로 삼았다. 당시 관서 도신 이기진(李箕鎭)이 병으로 발순(發巡)할 수 없었고, 임박이 위유 어사(慰諭御史)로 마침 강변(江邊)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응교 남유용(南有容)이 차자(箚子)를 올려 군덕(君德)을 힘쓰도록 하는 열 가지 조목을 진달하기를,
"첫째 학문에 힘써서 많은 사람이 착하게 되는 길을 여소서. 둘째 성정(性情)을 다스려 간사한 소인배가 일어나는 문을 막으소서. 셋째 생각을 간략하게 하여 대공(大公)을 보존하소서. 넷째 사령(辭令)을 신중히 하여 신민(臣民)에게 모범을 보이소서. 다섯째 성실(誠實)을 힘써서 좋아하고 미워하는 정(情)을 없애소서. 여섯째 행동거지를 살펴서 시비(是非)의 단서를 공평하게 하소서. 일곱째 총명(聰明)만을 활용하지 말아서 모든 신하들이 화합하게 하소서. 여덟째 잗단 업무를 가까이 하지 말아서 모든 신하들을 권면하소서. 아홉째 받아들이는 아량을 넓혀서 권강(權綱)을 잡으소서. 열째 성찰(省察)을 민첩하게 하여 과오가 있으면 반드시 고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을 내리고 가납(嘉納)하였다.

 

1월 12일 임인

왕세자가 경덕궁(慶德宮)에서 궁관(宮官)을 보내어 문안(問安)하였는데, 이때부터 상례(常例)로 삼았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충원현(忠原縣)은 무오년008)  에 삼성 죄인(三省罪人)009)  이 입적(入籍)된 고을이라 하여 강호(降號)한 지 지금 벌써 10년이 되었으니, 승호(陞號)하여 목사(牧使)가 다스리게 하소서. 충주(忠州)는 이미 승호(陞號)하였으니, 공홍도(公洪道)를 충청도(忠淸道)로 회복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정우량(鄭羽良)을 예조 판서로, 홍상한(洪象漢)·김상적(金尙迪)을 승지로, 박규수(朴奎壽)를 장령으로, 이중조(李重祚)·정희신(丁喜愼)을 지평으로, 민백창(閔百昌)을 헌납으로, 임박(任璞)·이수관(李壽觀)을 정언으로, 정순검(鄭純儉)을 부교리로 삼았다.

 

예조 참판 홍상한(洪象漢)을 불러다 관예 의주(觀刈儀註)를 강정(講定)하게 하고, 하교하기를,
"친경(親耕)과 관예(觀刈)는 모두 옛날의 법으로, 자성(粢盛)010)  을 소중히 여기고 백성의 근본을 권면하는 뜻인데, 친경은 바로 시작하는 조리(條理)이고 관예는 바로 마무리짓는 조리이다. 지금 관예 의주를 의조 등록(儀曹謄錄)에는 넣을 수 없지만 《속오례의(續五禮儀)》의 길례편(吉禮篇) 아래에 부록(附錄)으로 써 넣고, 운관(芸館)011)  으로 하여금 내려 간인(刊印)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재자관(䝴咨官) 이명직(李命稷)을 감사(減死)하여 섬에 귀양 보내고 전인(廛人)으로 수범(首犯)인 자는 먼 곳에다 귀양보내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명직이 문단(紋緞)을 무역해 온 데 연좌되었으므로 추조(秋曹)012)  에 명하여 사문(査問)하여 아뢰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대신에게 하문하자, 모두 말하기를,
"법과 금지하는 것은 다르니 정한 법이 없으면 율(律)로 조치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 이런 명이 있었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이 뒤로 이를 범하는 시민(市民)은 곧바로 일률(一律)로 시행하고, 역관(譯官)과 상고(商賈)는 곧바로 만부(灣府)013)  에서 먼저 효시(梟示)한 뒤에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3일 계묘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알례(展謁禮)를 행하고, 인하여 육상묘(毓祥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밤이 되어서야 궁궐로 돌아왔다.

 

1월 15일 을사

당시 궁궐 안에 구기(拘忌)하는 병이 있었으므로 왕세자가 경덕궁(慶德宮)에 옮겨서 머물게 되었는데, 임금이 홍봉한(洪鳳漢)에게 명하여 별도로 입직(入直)하게 하였다가 곧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려 홍봉한은 잠시라도 직소(直所)에서 떠날 수 없다고 말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평안 병사 이일제(李日躋)가 아뢰기를,
"노계정(盧啓禎)이 이산 부사(理山府使)가 되어 별도로 장별군(壯別軍)을 모집해서 9백 명을 얻어 윤번(輪番)으로 모아 조련시켜 적의 내습을 막는 계책을 삼았으므로, 감사 이기진(李箕鎭)이 듣고서 가상하게 여겨 충의사(忠義士)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습니다. 서북(西北)의 인심은 언제나 군병(軍兵)이란 칭호를 부끄럽게 여기므로, 만약 사(士) 자로 군(軍) 자를 대신하게 한다면, 지방이나 훈국이나 향교에서 통용할 수 있어서 불가함이 없으며, 충의 두 글자를 더해 주어야만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 신도 이 방법을 옮겨 청남(淸南)과 청북(淸北)에도 활용해서 서로 본받게 함으로써 저절로 호응하여 화합하는 형세가 있을 수 있게 하고자 합니다.
관방(關防)에 이르러서는 구성(龜城)의 새장(塞牆)과 선천(宣川)의 좌현(左峴)이 가장 요해처가 되는데, 새장의 경우는 이미 역사를 시작하였으며, 좌현 같은 경우는 위에 있는 재[嶺]와 아래에 있는 바다에 중국과 통하는 한 가닥의 길이 그 가운데 뚫려 뻗쳐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조에서는 북구(北寇)를 언제나 통주(通州)에서 방어하였는데, 통주는 바로 지금의 선천으로 고려 사람들이 반드시 좌현을 귀중하게 여겼던 것을 지나간 일의 분명한 증거를 통해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림(西林)이 좌현의 전면에 있어 적(賊)의 선봉이 진격하여 핍박하는 곳이 되고, 효성(曉星)은 좌현의 후면에 위치하여 우리 군사가 먼저 웅거하는 요해처가 됩니다. 다만 서림과 효성의 윗 부분과 오른쪽 부분에 그전대로 망가진 곳을 보수한다면, 더러는 일은 절반으로 줄어들고 공은 갑절이 되게 할 수 있으니, 적당한 시기에 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스스로 병사로 있는 시기에 시작하려고 하는 것은 신이 비록 준공을 못한다 하더라도 후세 사람이 계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리 윤봉오(尹鳳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시세(時世)를 경력(經歷)한 지 이미 오래 되어 기사(機事)에 점점 익숙해지시니, 신하를 굽어보시며 한 번도 유의함이 없이 스스로 그 자품(資稟)을 믿고 스스로 그 총명을 우수하게 여겨 천심(天心)이 점차 너무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목전에 어려운 일이 없는 것처럼 여겨 조종하는 것이 간혹 일반적인 계책에서 벗어나지만 억지로 정견(正見)이라고 여겨 고집하고, 부리는 것이 위노(威怒)에서 나온 것임을 면하지 못하지만 반드시 자신의 뜻을 펴고자 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이 몸과 마음의 사이에서 병폐가 된 것이 이미 적지 않지만, 이를 미루어 처리하는 즈음에 더욱 중(重)한 폐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진출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군자가 자수(自守)하는 것인데 그것을 국가에 대한 정성이 적은 것으로 의심하고, 과감하게 말하는 것은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조정에서 사건을 일으킨다고 싫어하십니다.
아첨하는 것은 미워할 만하고 용렬한 것은 부끄럽게 여길 만한 것임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특별히 우리 전하께서 세상에 모범을 보인 것은 탕평(蕩平)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바야흐로 또 탕평의 뜻에 따르는 사람은 이를 존중하겠지만, 따르지 않고 벗어나는 사람은 이를 천하게 여기기 때문에, 저들이 이미 나의 뜻에 구차하게 영합하면 나의 일에 대해 해로움이 없어서 우선 당장에 일을 맡겨도 무방할 것이라고 여겨 한 세대의 일을 마무리지으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저들도 성상의 마음을 익숙하게 헤아려 스스로 계책을 얻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매번 성상에게 실책이 있는 경우를 당하면 반드시 뜻을 굽혀서 영합하여 단지 총애를 받아 발탁되고자 하므로, 마침내 실책은 성상께서 총애하는 데 달려 있는데도 스스로 자주 아래 관원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이러한데도 의리를 분변하는 일이 없으므로, 명절이 땅을 쓴 듯 없어져서 관방(官方)은 날마다 더 가볍게 되었고 요행을 바라는 문은 날마다 더 열리게 되었으니, 세도와 인심은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지난번 성명(聖明)께서 유현(儒賢)을 대우하는 것에 대해 아주 의아하게 여긴 바가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이조 판서로 발탁하여 천위(天位)를 함께 할 것을 생각하시어 소명(召命)을 내렸을 적에는 선비들이 모두 눈을 닦고 보았고, 유현도 특별한 대우에 감격하여 갑작스럽게 조정에 나아갔었습니다. 그리고 소매 속의 짧은 차자는 진실로 평상시 품고 있었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고, 역적을 성토하는 한 가지 조항 또한 대의(大義)에 있어서 늦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편전(便殿)에서 사대(賜對)하였을 때 전하께서도 그의 혈성(血誠)을 아시고 천안(天顔)이 아주 온화하여 말을 주고받음이 메아리 같았는데, 늠연(凛然)하게 처분할 뜻을 두시자 갑자기 이설(異說)을 느닷없이 올리니, 유현이 물러가 버렸습니다. 전하께서는 곧 주저하심을 면하지 못하여 물러난 지 며칠이 되었는데도 사지(辭旨)가 여러 번 바뀌었으며, 한 가지 일인데도 처음과 끝이 어긋난 의리를 논하던 것이 한갓 마무리 짓지 못한 안(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잇따라 천만 번 감히 듣지 못할 전교를 내리시고, 또 잠시도 감히 늦출 수 없는 일을 일으켜 마침내 유현으로 하여금 도피할 길이 없게 하고 죽을 계책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유현을 어질게 여기신다면, 진퇴에 대해 너그럽게 용납하심이 마땅한데,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더구나 또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로 하여금 서로 잇따라 대전(大殿)에 오르게 하여 양쪽이 화해하는 일을 미봉하여 처리할 것을 요구하셨으니, 전하께서는 진실로 유현이 차마 하루 아침에 조수(操守)하는 바를 바꾸어 한 마디 말하는 사이에 순종하도록 하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유현을 예로 대우하는 도리가 야박하다고 할 만합니다. 이는 전하께서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싫어하고 편안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위협하는 말에 동요된 것에 연유하였으며, 저 일종의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 또한 이미 성의(聖意)를 몰래 헤아리고, 먼저 형세를 만들어 방자하게 사리에 어긋난 의논을 함으로써 성명께서 어진 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거세게 저지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현에게 돌아가도록 허락하게 한 뒤에는 비로소 무식하고 망령된 말로 거짓 굴복하여 사죄하는 모습을 지으니, 아! 그 호탕하고 건장하게 서로 다투던 기상으로 어찌 도리어 이처럼 용렬한 태도를 짓는 것입니까?
더욱이 매우 놀라운 것은 전후로 요동시켜 농락하며 정태(情態)가 신출 귀몰(神出鬼沒)한 것 또한 원경하(元景夏)가 당초에 수차(袖箚)를 꺼내던 것만함이 없는데, 갑자기 차자에 대한 일을 은밀하게 숨기면서 오직 한두 사람의 친지(親知)가 참여하여 들은 말을 성상 앞에서 발설하고, 심지어 두 신하의 이름까지 들어 알소(訐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 수차에서 진달한 것은 진실로 한 세대의 큰 의리였는데, 당초에 어찌 은밀히 숨겼겠으며, 또 어찌 한두 신하가 참여하여 듣기를 기다렸겠습니까마는, 원경하가 바로 암담하게 사사로운 뜻이라는 입장으로 돌리려고 하였으니, 그것은 대체로 그가 현명한 이를 시기하고 능력이 있는 이를 미워하는 마음이 가슴속에 가득하여 기량을 발휘한 것이었습니다.
역적을 성토하는 의논에 이르러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호한 것 또한 그의 본색이니, 역적이 어찌 일찍이 새로운 일을 진달한 적이 있었습니까? 당초에는 역적에 대하여 진달한 내용을 근거없는 말이라고 하여 늦추려고 하였고, 중간에는 또 부득이 역적 유봉휘(柳鳳輝) 한 사람만 끄집어내어 거짓으로 징토하는 논의를 삼으며 미봉하는 계책을 꾸미도록 요구하였는데, 마침내 공의(公議)가 거세게 일어나고 연교(筵敎) 또한 준엄한 뒤에야 비로소 조태구(趙泰耉)와 최석항(崔錫恒)을 감죄(勘罪)하는 데 대해 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유독 성상께서 허락하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목숨을 버리고 부호하면서 오로지 혹시라도 다칠까 두려워하였고, 대계(臺啓)에서, ‘신은 마땅히 정지하겠다.’는 말을 연석(筵席)에서 공공연하게 하기에 이르러 편안하게 여기며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습니다. 아! 군부(君父)를 위하여 역적을 성토하는 일이 어떠한 대의(大義)인데, 2, 3개월 사이에 의논을 기준없이 되풀이하는 즈음에 전모가 모두 드러나 그 충성스럽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한 실상이 많은 사람들의 눈에 확실해졌으니, 예감(睿鑑)으로 보시는 바 정상을 엄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은총과 권세를 가탁하여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바가 없도록 하셨으니, 삼가 모르기는 하지만 전하께서는 원경하를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십니까? 그는 위포(韋布) 때부터 괴상한 논의를 주장하였고, 청현직(淸顯職)에 통하기에 이르러서는 여러 번 모습을 바꾸었으며, 대간의 지위에 있었을 때에는 이미 만언(萬言)의 글을 지어 시론(時論)을 극력 공격하며 동료에게 내보였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잠깐 사이에 이류(異類)들과 마음이 맞아 앞서 주장하던 말을 한 번에 바꾸어 1백 년 동안 이미 정해진 시비(是非)를 오히려 번갈아가며 어지럽히기를 꺼려하지 않았으며, 문묘(文廟)에 철향(腏享)된 대현(大賢) 또한 서로 거론하는 데 어렵게 여기지 않고 방자하게 비방하는 등 무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크게 미쳐 날뛰며 교만함을 그치지 않고, 두 잎이 줄기를 이루듯이 하여 이목을 가리고는 방자한 기세와 호건한 뜻이 날마다 한층 더하여, 선배(先輩)를 끌어대어 그 자손을 위협하여 욕보이고, 개인적인 원한을 쌓아 그 장료(長僚)를 핍박하여 내쫓고, 자신의 혐의를 돌보지 않은 채 장보(章甫)를 상소하여 알소하기에 이르러서는 방자함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천례(賤隷)를 열서(列書)하여 사죄를 청하는 데 이르러서는 외람되고 잗단 것이 극심하였습니다. 법연(法筵)에서는 크게 부르짖어 손뼉을 치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반드시 막으려고 여러 사람이 쳐다보는 즈음에 좌충 우돌하였으니, 재상(宰相)으로서의 체모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 이 사람을 뽑아 해마다 제수하고 천전(遷轉)시켜 갑자기 대사마(大司馬)014)  의 직임에 이르게 하여 가만히 승진시키기를 그만두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그 뜻은 전하께서 그가 편당이 없다는 말을 잘못 믿고서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이나, 그는 이러한 명목을 빌려 성세(聲勢)를 널리 펴서 자신의 사사로움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또 그는 사람됨이 거칠고 괄괄해서 교묘하고 치밀한 모습이 아닌 듯하므로, 전하께서 혹시라도 그가 윗사람을 섬기면서 숨김이 없다고 여기시지만, 실제로 겉으로는 어리석지만 속으로는 교활하여 자신을 위해 책략을 세우는 데 교묘할 뿐 충성스러운 뜻은 조금도 없습니다. 지난 겨울에 그의 집안에 천연두를 앓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비록 다른 방에서 거처했다 하나 난만(爛漫)하게 서로 통하였는데, 요사(夭死)한 것을 애처롭게 여겨 곡(哭)하던 날에 즉시 약원(藥院)에 나아가 진연(診筵)하는 자리에 드나들며 조금도 구기(拘忌)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만일 원경하가 조금이나마 근신하는 뜻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습니까?
몇 년 동안 경악(經幄)에서 일찍이 한 마디 광구(匡救)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고, 평생의 거조는 대부분 한없는 기관(機關)을 감추고 있었으니, 작은 원망까지 책에 기록한다면 질(帙)을 이룰 것입니다. 들어가서는 배척하여 알소하고, 나가서는 방자하게 농락하며 반드시 경함(傾陷)하는 데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모두 곁눈질하며 그의 입을 두려워하고, 중외(中外)에서 질책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유독 전하께서만 모르실 뿐입니다.
삼가 듣건대, 그저께 연중(筵中)에서 세 사람의 전관(銓官)을 특별히 임명한 일이 있었는데, 모두 구망(舊望)이었으나 유독 아전(亞銓)015)  만 초배(超拜)한 데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아! 중비(中批)로 임명하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니며, 예전에는 막았다가 지금은 박탈하니 더욱 물정(物情)이 답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적이 성조(聖朝)를 위해서 이런 거조를 애석하게 여길 뿐입니다. 명덕(命德)의 그릇은 명주(明主)가 소중히 여기는 바이니, 아울러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소장을 들이자 하교하기를,
"처음에는 하교하려고 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하교하여 그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나를 섬긴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벼슬한 뒤에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그 소장을 돌려 주도록 명하였다.

 

1월 16일 병오

달이 헌원성(軒轅星)의 좌각성(左角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에 나아가 밤을 새고 돌아왔다. 당시 왕세자가 옮겨서 머문 지 이미 여러 날 되었으므로, 궁관(宮官)을 보내어 사모(思慕)하는 뜻을 진달하자 임금이 그곳에 나아갔다.

 

1월 17일 정미

부제학 조명리(趙明履)에게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가자하였는데, 광묘(光廟)016)  의 《어제훈사(御製訓辭)》를 간인(刊印)하였을 때 감독한 공로 때문이었다.

 

대신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에 모여 대왕 대비전에 진호(進號)하는 일을 가지고 아뢰기를,
"이번 성모(聖母)의 회갑은 진실로 드물게 있는 큰 경사이니, 성명(聖明)께서 기쁘고도 두려워하는 심정과 신 등이 손뼉치며 기뻐하는 정성에 있어서 무릇 진호하고 존봉(尊奉)하는 데 관계된 절차를 의당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더구나 선조(先祖)에서 이미 시행한 성전(盛典)이 있으니, 더욱 구례(舊例)를 본받아 빨리 성대한 의례를 거행함이 마땅합니다. 단지 자성(慈聖)께서 겸양이 너무 지나친 까닭에, 해조(該曹)에서 지금까지 감히 거행하지 못하여 위로 성효(聖孝)를 펼 수 없고 아래로 뭇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기고 있으니, 중외에서 섭섭하여 실망하는 것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신 등이 전후에 연중(筵中)에서 여러 번 하교를 받았고, 우리 성상의 효성은 다시 신 등이 번거롭게 떠드는 것을 기다릴 것이 없겠지만, 자성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는 것이 아직 지체되어 성대한 의식을 미루다가 이에 이르렀습니다. 신 등은 구구하게 민망스럽고도 절박한 정성을 스스로 전달할 길이 없어서 감히 이렇게 서로 이끌고 와서 모여 죽기를 무릅쓰고 일제히 호소하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크게 축원하는 정성을 굽어 살피시고 우러러 자성께 품의하셔서 성효를 펴서 구례를 떨어뜨리지 마시기를 천만 번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는 옛날의 성사(盛事)인데, 우리 동방에서는 두 번째 있는 경사이니 그 전대의 업적을 빛내고 계승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경(卿) 등의 진청(陳請)을 기다릴 것인가? 그러나 효성이 얕은 것으로 인하여 자성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이킬 수 없고, 우리 자성에게 한갓 서글픈 회포만 더하도록 하는데, 경자년017)  을 돌이켜 생각하면 이런 회포가 갑절이나 될 것이다. 지금 자성의 마음은 진실로 겸손하여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 아님을 일찍이 이미 상세히 유시하였고, 지금도 대변하여 유시하셨다. 인자(人子)의 도리는 어버이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야 하는데, 맹자(孟子)가 증자(曾子)의 어버이를 봉양하며 오래도록 모시려고 한 마음을 칭송한 것이 이미 절실하였다. 경 등의 주청 또한 간절하였으나, 참으로 인도하여 전달하기가 어려우니, 얼음과 숯불이 마음에 뒤섞인 듯하여 단지 민망스럽고 답답할 뿐이다. 그래서 승선(承宣)에게 명하여 부르는 것을 적어서 경들에게 전하도록 하였으니, 오늘날의 나의 마음을 양찰하도록 하라."
하고, 인해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여러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경 등이 내일 시험 삼아 동조(東朝)께 직접 주청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월 18일 무신

대신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대왕 대비전에 아뢰기를,
"우리 자성(慈聖)께서 성실하고 깊은 덕으로 하늘의 도움을 받아 보령(寶齡)이 지금 회갑을 맞이하셨으니, 뭇 신하들이 식희(飾喜)하는 도리에 있어서 극진하게 하지 않는 바가 없어야 마땅합니다. 단지 자성의 마음에 겸양이 너무 지나침을 인연하여 진호(進號)하는 전례를 아직도 거행할 수 없으니, 참으로 민망스럽고도 답답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서로 이끌고 전하께 일제히 호소하여 우러러 자성의 마음을 감동시키도록 진달하기를 바랐었는데, 비지(批旨)가 간곡하고 측연하였습니다. 심지어 얼음과 숯처럼 상반된 의견이 마음에 섞여 있다는 것으로 하교하셨으니, 아! 신 등이 비록 아주 어리석고 사리에 어둡다 하더라도 어찌 우리 자성께서 이와 같이 굳게 거절하시는 뜻이 한때의 겸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모르겠습니까?
대체로 국가의 전례는 한 번 정해진 뒤에는 금석(金石)과 같으니, 만일 혹시라도 당연히 시행해야 하는데도 시행하지 않는다면 퇴폐되는 데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하여 선대의 사업을 계승하는 아름다움을 밝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숙고(肅考)께서 성덕(盛德)과 달효(達孝)로 이 예(禮)를 처음 시행하여 성헌(成憲)을 만드셨는데, 어찌 오늘에 이르러 편안하게 폐각(廢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전하께서 기쁘고도 두렵게 여기는 심정을 반드시 조금이라도 펴려고 하시지만, 자성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어서 성심이 근심스럽고 박절하여 심지어 답답하여 병이 생겼다는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신 등은 근심과 두려움이 절박하여 나아갈 바를 모르겠습니다. 자성께서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어찌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시고, 한결같이 돌보지 않으시며 우리 성상의 한없는 효사(孝思)를 염려하지 않으십니까? 삼가 원하건대, 조용히 깊이 생각하시고 거침없이 돌이켜 이해하셔서 빨리 신 등의 주청을 윤허하소서. "
하니, 답하기를,
"대전(大殿)께서 여러 차례 간청하였는데, 이미 나의 뜻을 다 말하였다. 경들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일으키는가? 비록 백 번 청한다 하더라도 정해진 뜻이 굳건하다."
하였다. 이 뒤에 잇따라 세 차례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도승지 홍상한(洪象漢)이 청대(請對)하고 말하기를,
"조금 전에 문안한 궁관의 말을 듣건대, 왕세자께서 직접 와서 안부를 여쭈려고 하면서 영(令)을 내릴 적에는 울먹이는 기색이 있었다고 하니, 효사(孝思)는 진실로 타고나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서 가상하게 여겨 감탄하고, 마침내 세자에게 환차(還次)하도록 명하였다.

 

1월 19일 기유

왕세자가 경덕궁(慶德宮)에서 환차하였다.

 

특별히 교리 윤봉오(尹鳳五)를 전보시켜 홍천 현감(洪川縣監)으로 삼았는데, 윤봉오가 또 상소하여 원경하(元景夏)에 대해 논하기를,
"그 근본은 오로지 환득 환실(患得患失)하여 기회에 따라 남이 하는 대로 적당히 처신하며 오직 이익만 따랐고, 처음부터 끝까지 섬롱(閃弄)하여 대론(大論)을 정지시키려 한 것은 길러 준 은덕을 잊지 않고 콩죽을 얻어 먹은 은혜를 갚으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니, 결단코 전하께서 가까이 할 신하가 아니며 바로 한 조정의 간사하게 아첨을 잘하는 신하입니다."
하였는데, 소장이 들어가지 이 명(命)이 있었다.

 

병조 판서 원경하가 상소하면서 부신(符信)을 바치고 성밖으로 나갔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일찍이 《역경(易經)》의 박괘(剝卦)를 읽다가 육사효(六四爻)의, ‘상(床)을 갉아먹는 것은 흉하다.’ 하는 데 이르러 일찍이 세 번 반복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신의 세 아들과 세 딸은 일찍이 천연두를 순조롭게 거쳤는데, 불행하게도 신의 손자가 천연두로 일찍 죽어 윤봉오가 헐뜯어 알소(訐訴)하는 바탕을 삼게 하였으니, 스스로 몹시 흥분스러운 마음을 진정하여 어찌 말하겠습니까? 신의 손자가 천연두를 앓았을 적에 마침 신에게는 연고가 있어 이미 다른 곳에 머물다가, 천연두에 걸렸다는 전갈을 듣기에 미쳐서는 신 자신이 왕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반(朝飯)과 석반(夕飯)도 인척 집에서 기식(寄食)하였었습니다. 윤봉오 역시 다른 집에서 거처했다고 말하였으니, 이런 상황에서 신이 일찍이 범염(犯染)되지 않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요사(夭死)한 손자를 애처롭게 여겨 곡(哭)하던 날에 곧장 약원(藥院)에 나아갔다고 말을 하니, 더욱 교묘하고 참람스럽습니다. 혹시라도 전하께서 신의 손자가 요사한 날이 언제이고, 약원에 문후(問候)한 날이 언제이냐고 하문하신다면 천신(賤臣)의 동이를 머리에 인 듯한 지극한 원통함을 거의 일월(日月)과 같은 밝음으로 통렬하게 분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타 허위로 날조한 바가 거창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신이 이광좌(李光佐)에 대해서는 의리가 길을 가는 사람처럼 아무 관계가 없는데, 어찌 한 사발의 콩죽 때문에 스스로 악(惡)을 비호하는 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천일(天日)이 환히 내려다보시니, 신은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경을 대체로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다. 김문행(金文行)이 논쟁하는 그 연유가 아무리 윤봉오를 편드는 데 있다 하나, 진실로 헤아리지 못한 것이었다. 약원의 일은 경이 원량(元良)을 위하여 일마다 근신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는데, 어찌 자신이 스스로 범하겠는가? 이는 참소하는 사람이 임금을 현혹시켜 협잡(挾雜)하려는 데 불과한 것이니, 1백 명이 경을 참소한다 하더라도 결코 경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1월 20일 경술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또 정청(庭請)하였다. 종신(宗臣)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 등도 서로 이끌고 진청(陳請)하니, 대왕 대비전에서 하교하기를,
"대전(大殿)께서 지성으로 간청한 데 대하여 이미 대전에 유시하였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종신·예관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동조(東朝)의 하교를 내보였는데, 이르기를,
"오늘날의 일을 가지고 신축년018)  을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서글픈 생각이 갑절로 일어남이 나나 그대들에게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이는 겸양하는 것이 아니고 서글픈 회포가 가슴에 뻗친 때문이다. 대신과 종신이 온종일 극력 주청하는데, 정말 억지로 거스르기가 어렵다. 다시 생각하니 여러 신하들의 주청은 옛날의 성효(聖孝)를 빛내려고 하는 것인데, 나의 서글픈 회포 때문에 그대들로 하여금 계술(繼述)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46년 동안 나를 대우해 온 뜻을 굽어 살피는 것이겠는가? 지금 주청하는 것은 바로 옛날에 신충(宸衷)으로 결단하여 시행한 것인 만큼 그것을 비록 억지로 따르기는 하겠으나, 칭상(稱觴)019)  하는 것과 같은 절차에 이르러서는 내가 금년에 어찌 차마 받겠는가? 이것을 대신과 종신에게 말하도록 하라."
하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일어나서 절을 하며 참으로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없다고 말하였다.

 

심성희(沈聖希)를 예조 참판으로, 신만(申晩)을 한성 좌윤으로, 정언섭(鄭彦燮)을 대사간으로, 서명신(徐命臣)을 부응교로, 정순검(鄭純儉)을 겸 문학으로, 조관빈(趙觀彬)을 홍문관 제학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예문관 제학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존숭 도감 도제조(尊崇都監都提調) 및 봉책보 정사(奉冊寶正使)로, 김시형(金始炯)·정우량·이주진(李周鎭)을 제조(提調)로 삼았다.

 

1월 22일 임자

임금이 도감 당상(都監堂上)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조에 등록(謄錄)이 있는가?"
하자, 김시형이 말하기를,
"본조와 예조에는 없고, 장악원(掌樂院)에 효묘(孝廟) 때의 등록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상하다."
하므로, 김시형이 말하기를,
"진연(進宴)하는 칭호는 효묘 정유년020)  에 시작한 듯한데, 당시 동조(東朝)에서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풍정(豐呈)을 받지 않고 대내(大內)에서 단지 술잔을 올리는 의절(儀節)만 마련하였었습니다. 풍정에 비교하여 약간의 명목을 줄여서 진연하였으니, 그것은 대체로 풍정과 구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경(政經)》을 경 등이 보았는가? 선왕의 수서(手書)인 《언지(言志)》 한 책이 동조께 있는데, 내가 평일에 차마 봉람(奉覽)하지 못했다가, 어제 자성(慈聖)에게 펼쳐 보여 주도록 우러러 주청하였다. 그 가운데에 정경찬(政經贊), 소서(小序) 및 시(詩)가 있었는데, 보묵(寶墨)이 새로운 듯하여 슬픔을 금할 수 없었다."
하고, 인해서 운관(芸館)에 명하여 인간(印刊)하도록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여 도감 도제조(都監都提調) 및 봉책보 정사(奉冊寶正使)의 직임을 해임하도록 청원하자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부도제거(副都提擧)를 허락하고, 조현명(趙顯命)을 존숭 도감 도제조(尊崇都監都提調)로, 이이장(李彝章)을 교리로, 한광회(韓光會)를 수찬으로 삼았다.

 

병조 판서 원경하(元景夏)를 면직시켰다. 당시 원경하가 부신(符信)을 바치고 도성 밖으로 나갔었는데, 임금이 입시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경은 김문행(金文行)의 상소 때문인가, 윤봉오(尹鳳五)의 상소 때문인가?"
하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김문행의 상소는 서로 격렬해진 데에서 나온 것이며, 화심(禍心)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정사년021)  에 신이 어사(御史)로 호남에 갈 때를 당하여 성상께서 삼공(三公)을 가서 보고 그의 지휘를 들으라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에 신이 이광좌(李光佐)를 가서 보았더니, 이광좌가 콩죽과 햇배를 내어다 권했습니다. 신이 그 당시 이천보(李天輔)와의 친분이 쇠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천보를 만나 콩죽을 대접받았던 일을 말하였었는데, 11년 뒤에 〈그것으로〉 신의 죄안(罪案)을 만들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재신(宰臣) 심성희(沈聖希)가 신에게 말하기를, ‘윤봉오가 또 20조(條)의 죄목을 나열하여 주머니 속에 넣어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윤봉오가 비록 외방에 전보되었다 하나, 신이 바야흐로 죄명을 감단(勘斷)하지 않은 가운데 있으니, 오직 빨리 형벌 받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신은 부자와 같은데, 어찌 서로 숨길 수 있겠는가? 내가 김창집(金昌集)에 대하여 단정하기를, ‘마음에 주장하는 바가 없어 처신(處身)이 깨끗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민창도(閔昌道)와 김성절(金盛節)의 무리가 어떻게 그의 문하(門下)에서 나오지 않았겠는가? 김문행(金文行)이 이미 종손(從孫)으로 상소한 것 또한 괴상하게 여길 것이 없으나, 만약 윤봉오·김문행이 나간 뒤에 또다시 잇따라 일어난다면, 이는 참소하여 이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의로 신하를 부리는 도리로써 이미 이조 판서를 체임하였는데, 오히려 경에 대해 허락하지 않겠는가?"
하고, 인해서 체임하도록 허락하였다.

 

경상 감사 남태량(南泰良)이 사폐(辭陛)022)  하자,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지금 듣건대, 관백(關白)이 새로 즉위하였다고 하니, 내가 실로 염려가 된다. 교활한 왜(倭)가 동래 부사와 부산진(釜山鎭)을 중대하게 보는데, 내가 경이 평소 강직한 줄을 아니 이러한 곳에 법을 세움이 마땅하겠다. 경은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3일 계축

신시(申時)에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이주진(李周鎭)을 병조 판서로, 원경하(元景夏)를 공조 판서로, 민백창(閔百昌)을 수찬으로 삼았다.

 

1월 24일 갑인

주강을 행하였다.

 

정언 이수관(李壽觀)이 상소하기를,
"10일 동안 전지(銓地)가 온통 비워 있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당연히 조절하는 도리를 더욱 힘쓰셔야 하는데, 십수 년 동안 고심(苦心)과 혈성(血誠)이 간혹 처음에는 부지런하였다가 마침내 게을러지는 염려가 없지 않았으므로, 신은 그윽이 민망하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보고 말하기를,
"이것도 협잡(挾雜)하는 것이 있는 듯하다."
하고, 답하지 아니하였다.

 

응교 남유용(南有容)이 상소하여 윤봉오(尹鳳五)를 구원하자, 비답하기를,
"윤봉오를 특별히 전보시킨 것은 참작에 참작을 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윤봉오의 마음과 같지 않은 자라면 어떻게 감히 그를 비호하겠는가?"
하고, 특별히 그의 관직을 체임하게 하였다. 이튿날 한광회(韓光會)가 연석(筵席)에서 남유용을 매우 힘껏 구제하자, 마침내 정지하였다.

 

1월 25일 을묘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 의정부의 서벽(西壁)023)  , 관각 당상(館閣堂上), 육조 참판(六曹參判) 이상을 명소하였는데, 모여서 대왕 대비의 존호(尊號)를 강성(康聖)이라고 의논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친히 존호 단자(尊號單子)를 받고, 인하여 인정전(仁政殿) 뜰 위에 나아가 네 번 절하고 전문(箋文)을 올리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홍문관 제학 조관빈(趙觀彬)이 존호를 의정(議定)할 때를 당하여 정석오(鄭錫五)와 혐의가 있었으므로 함께 조당(朝堂)에 모이지 않으려고 상소하여 자인(自引)하였고, 예문관 제학 정우량(鄭羽良)은 유언민(兪彦民)의 말을 가지고 또한 오래도록 자기 주장을 고집하면서 여러 번 경계하였는데도 함께 명을 받들지 않았다. 이에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신료(臣僚)는 바로 옛날의 신하들이니, 고묘(高廟)를 우러러보며 태후(太后)를 존봉(尊奉)하던 도리로 말한다면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나의 얕은 학문에서 연유한 것이니 하늘을 쳐다보거나 땅을 내려다보기에 부끄럽다. 올리고 낮추는 것은 분명하고 국가의 법은 광대하니, 당연히 조정에 와서 보살펴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도 도리가 있어서 마음대로 하도록 맡겨둔 것이다."
하였다. 하교를 내리자 정우량은 출사(出謝)하였으나, 조관빈은 그래도 명소를 어겼다. 존호를 의논하던 날에 양관(兩館)에서 끝내 올리는 전문을 준비하지 않았으므로, 의식이 끝나자 임금이 특별히 내쫓아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전보시켰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려 조관빈이 여러 번 명소를 어긴 것은 부득이한 사세에서 나왔으므로 조정에서 미루어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니, 마침내 이 명이 중지되었다.

 

1월 26일 병진

소대를 행하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였다.

 

임금이 존호를 올리고 경사를 기록하는 뜻으로 두 절(絶)의 〈시(詩)를〉 지어 내리면서 대궐에서 숙직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리도록 명하였다.

 

경상 우병영(慶尙右兵營)에서 옛날 도장 한 개를 바치면서 진주(晋州) 사람이 남강(南江) 가에서 주웠다고 하였는데, 바로 임진년024)   난리 때 병사 최경회(崔慶會)가 소지하고 있다가 물에 던진 것이었다. 전자(篆字)로 새긴 흔적이 약간 남았는데, 위에 만력(萬曆)025)  의 연호가 있었으므로, 임금이 보고서 감탄하며 하교하기를,
"옛날의 도장을 가져다 보니 바로 그 사람이 바치는 듯하다. 또 도장 위에 새겨진 연월(年月)을 보니 내 마음이 갑절로 숙연해진다."
하고, 창열사(彰烈祠)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고, 이조로 하여금 최경회의 후손을 조용(調用)한 뒤에 도장을 넣는 갑(匣)을 만들어 본 고을에 보내어 간직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스스로 명(銘)을 지어 갑 위에 새기기를,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1백여 년이 지났네.
다행히 남강에서 주웠던 도장에
새겨진 전자가 완연하니,
촉석루에서의 뛰어난 의열
상상하니 먼저 서글퍼지네.
영남의 병영에 보관토록 하여,
충절을 기리게 하노라."
하고, 또 말하기를,
"이른바 내 마음이 갑절로 숙연해진다는 것은 비풍(匪風)026)  과 하천(下泉)027)  을 생각한 때문이다."
하였다.

 

임금이 태묘(太廟)에는 모두 무늬가 없는 〈물품을〉 쓰는데, 어공 의장(御供儀仗)은 아직 무늬가 있는 것을 쓰니 불면(黻冕)028)  을 아름답게 하는 의도가 아니라 하고, 산개(繖盖)와 연여물(輦輿物) 및 대소(大小)의 예탁(禮卓)·예의(禮衣)는 모두 무늬가 없는 명주 종류를 쓰도록 명하였다.

 

1월 27일 정사

예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을 특별히 발탁하여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선조(先祖) 때 구종직(丘從直)이 한 번 탄핵을 당할 때마다 번번이 그의 자급을 승진시키니 당시의 의논이 이와 같이 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반드시 장차 대각(臺閣)에 들어올 것이라고 여겨 언자(言者)가 마침내 정지하였다고 한다. 예조 판서와 같은 이를 위에서 만약 부식(扶植)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이 명이 있었다.

 

함경 감사 이종성(李宗城)이 범월(犯越)한 사람 신준정(申俊正) 등의 사건을 치계(馳啓)하니, 본도에서 격식을 갖추어 초사(招辭)를 받아 정법(正法)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황진기(黃鎭紀)가 망명(亡命)한 지 20여 년이 되었지만 추포(追捕)할 수 없었는데, 간혹 황진기가 도망하여 피지(彼地)에 있다고 일컫기도 하였으므로 신준정이 삼(蔘)을 캐려고 범월하였다가 잡히게 되자, 스스로 역적 황진기를 뒤좇아 체포하려다가 잘못 변군(邊軍)에게 붙잡혔다고 말하였다. 사건이 알려지자, 임금이 말하기를,
"아무리 역적 황진기를 잡으려 했다 하더라도 범월한 사실은 의심할 것이 없으며 더구나 거짓으로 핑계댄 것이겠는가? 그러나 사람을 대벽(大辟)으로 처치하는 데는 기필코 신중히 심리하여야 한다."
하고, 인하여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1월 29일 기미

장령 권해(權賅)를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출보(黜補)하였다. 권해가 시론(時論)을 붙좇아 동조(東朝)의 존호(尊號)를 의논하였을 때 차출한 문임(文任)의 전망(前望) 9인 가운데 윤봉조(尹鳳朝)·이광덕(李匡德)·조명교(曺命敎)가 의망(擬望) 가운데 들어 있지 않다 하여, 권해가 상소하여 이조 참의 심성진(沈星鎭)을 탄핵하면서 윤봉조를 아무 까닭없이 빼버린 것은 정격(政格)에 크게 위배된다고 말하였다. 또 윤봉오(尹鳳五)를 구원하여 외직으로 전보시킨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가 마음을 맞추어 편드는 것을 미워하여 이런 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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