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65권, 영조 23년 1747년 2월

싸라리리 2025. 9. 30.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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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신유

주강을 행하였다.

 

2월 5일 을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당시 관서(關西)에 크게 기근이 들었으므로, 감진 어사(監賑御史) 임박(任璞)이 곡식 3만 석을 옮겨다 진구(賑救)하도록 청하자,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정석오(鄭錫五)·우의정 민응수(閔應洙)가 모두 앞서 이미 5만 석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우선 앞으로의 상황을 관찰하면서 더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풍(永豐)에 진(鎭)을 설치하는 일의 편부(便否)에 대해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영풍은 바로 안변(安邊)의 서쪽 경계로 강원·함경·평안·황해 네 도가 서로 모이는 곳인데, 지세가 또 매우 험하여 해마다 기근이 들었다. 골짜기 속에는 도적이 많아서 적단(賊團)이라고 불리워졌는데 이곳 저곳에서 출몰(出沒)하였다. 김한철(金漢喆)은 흡곡읍(歙谷邑)의 소재지를 영풍으로 옮겨 제어[控御]하는 곳으로 삼도록 건의하였고, 전 함경 감사 이수항(李壽沆)은 덕원읍(德源邑)의 소재지를 이곳에다 옮기려고 하였으며, 이종성(李宗城)은 첨사(僉使)를 두고자 하였다. 임금이 대신에게 하문하자, 우의정 민응수(閔應洙)가 말하기를,
"서북(西北) 지방에 옛날에는 도적이 드물었지만, 근래에는 도적의 무리가 서북 지방으로 많이 넘어 오니, 영풍은 실제로 요충(要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鎭)을 설치하고 읍(邑)을 두자는 의논이 있는데, 이것은 굶주린 백성들이 한때에 서로 불러모아 무슨 단(團)이라고 불리워진 데 불과하며, 양산박(梁山泊)의 유(類)와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장리(長吏)가 그들을 무휼(撫恤)하면 적자(赤子)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용사(龍蛇)가 될 것이니, 시끄럽게 이와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의논이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다.

 

어영 대장 구성임(具聖任)에게 명하여 도성을 수호하는 절목(節目)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당시 병비(兵備)가 허술하여 조정에서 늘 근심하였는데 의논하는 자들이 더러는 강도(江都)029)  가 수호할 만하다고 하고, 더러는 도성이 수호할 만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구성임이 전적으로 도성을 수호해야 한다는 의논을 주장하자, 시의(時議)가 모두 이를 좇았으므로, 구성임의 의논이 마침내 시행되어 강상(江上)의 모든 창고를 철거하여 성안으로 옮기되, 금위(禁衛)의 두 창고를 먼저 옮겨서 세웠으며, 성을 돌아가며 성랑(城廊)을 쌓았다. 이때에 이르러 또 도성을 수호하는 절목을 만들어 오부(五部)의 주민은 진신 사족(搢紳士族)을 제외하고 아울러 오위 장(五衛將)에게 나누어 소속시키도록 하였는데, 김약로(金若魯)가 동생 김상로(金尙魯)와 함께 의논해서 찬정(撰定)하여 바치니 비국에 비치하도록 하고, 아울러 절목을 가지고 종사(從事)하도록 명하였다.

 

2월 6일 병인

황해 감사 이천보(李天輔)가 치계(馳啓)하여 가까운 고을의 상정미(詳定米)030)   3천 석을 얻어다 성역(城役)을 돕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비국에서 1천 석을 지급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관(禮官)과 상방(尙方)031)  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면복(冕服)의 제도를 의논하여 정하게 하였다. 상방에 옛날의 면복도(冕服圖)가 있었는데, 바로 명나라에서 내려준 것으로서, 제도가 오래 되어 잃어버린 것이 많아서 조수(組綬)와 패대(珮帶)는 모두 중국 시장에서 사 가지고 왔는데, 격식에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모두 도식(圖式)대로 직방(織房)에서 고쳐 만들도록 하자,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지금은 중국 물품을 금지시키고 있는데, 중궁전(中宮殿)의 법복(法服)을 향직(鄕織)으로 만들어 착용하니, 빛깔이 변하여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바탕이 닦여진 뒤에 하는 것이니 비록 빛깔이 변했다 하더라도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2월 8일 무진

밤에 달이 오거성(五車星)을 범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연달아 조용히 조섭하는 중이어서 법강(法講)을 열 수 없었다. 당시 동궁(東宮)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임금이 몸소 가르친다는 뜻으로 가끔 경연(經筵)에 나오기는 하였지만 오래 앉아 있는 것이 피곤하여 불과 10여 차례 행하다가 중지하였다.

 

2월 9일 기사

유성(流星)이 필성(畢星)의 아래에서 나왔는데, 모양은 주먹만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尺)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이 상방(尙方)에서 직조(織造)하는 것을 회복시키도록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무늬가 있는 주단(紬緞)을 이미 금지시킨 뒤에 대비전(大妃殿)과 중궁전(中宮殿)에서 착용하는 의복에 맞지 않는 물품이 많았기 때문에 김시형이 건의하여 회복시키기를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초년에는 직조(織造)를 파하였다가 말년에는 늘려서 7백 인에 이르렀었으니, 생각이 매번 여기에 이르면 오히려 두려움을 깨닫게 된다. 나는 늙었으니 그래도 면할 줄을 알지만, 뒷날 계승하는 임금이 어떻게 할는지 모르겠다. 다만 곤복[袞衣]의 착용은 빠뜨릴 수 없다."
하고, 마침내 하교하기를,
"곤복의 웃옷에 쓰이는 것은 바로 용포의 앞뒤와 어깨에 용(龍)의 무늬를 짜는 것이다. 예문(禮文)이란 바로 교명(敎命)의 바탕이다. 면복(冕服)·강사포(絳紗袍)·후수(後綬)는 그전의 경우 연경의 시장에서 샀는데, 운문(雲紋) 외에 무늬 있는 주단을 엄중히 금지시킨다면, 비록 면복에 쓰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바로 금지된 물건이며, 또 그 빛깔이 그전에 비교하여 점차 달라져서 잡색(雜色)에 가까우니, 그것도 정해진 제도에 어긋난다. 이후로는 교명에 의거하여 직조(織造)하되, 으레 상방(尙方)에서 조성(造成)하도록 할 것이며, 빛깔은 《오례의(五禮儀)》를 참작하여 적(赤)·청(靑)·현(玄)·자(紫)·녹(綠)의 빛깔의 무늬를 없애고, 하단(下段)의 3백 20의 제도도 고례(古禮)에 의거하여 만드는 것이 옳다."
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2월 10일 경오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서명빈(徐命彬)을 대사헌으로, 조상명(趙尙命)을 대사간으로, 이하술(李河述)을 장령으로, 남덕로(南德老)를 지평으로, 이형만(李衡萬)을 정언으로, 오언유(吳彦儒)·조명채(曹命采)를 부교리로, 윤광소(尹光紹)를 교리로, 정순검(鄭純儉)을 수찬으로, 이영복(李永福)을 사서로, 조관빈(趙觀彬)을 예조 판서로, 정우량(鄭羽良)을 홍문관 제학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2월 14일 갑술

임금이 생원(生員)·진사(進士) 복시(覆試)의 1소·2소의 시관(試官)들을 불러다 보고 친히 생원시의 제3인인 허증(許增)을 발탁하여 장원(壯元)으로 삼고 여러 시관(試官)들의 직임을 특별히 파면하였다. 국조(國朝) 이래로 생원시와 진사시의 장원은 반드시 명망이 있는 선비를 뽑았고, 매번 출방(出榜)할 무렵에는 풀로 봉(封)한 부분을 엿보고서 발탁하여 제일(第一)로 삼았었다. 그것은 대체로 국초(國初)부터 문학(文學)을 숭상하고 장려하여 사림(士林)으로서 명망을 쌓는 것은 반드시 생원시와 진사시의 장원에서부터 비롯된 까닭이었다. 그러나 당의(黨議)가 터지면서 세속의 풍습이 옛날같지 않아서 출방하는 무렵에 서로 뒤얽혀 싸워 세력이 강한 자는 이기게 되니, 시배(時輩)의 자제(子弟)가 아닐 것 같으면 아무리 명망이 사림에서 정중하다고 하더라도 선발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고시(考試)한 뒤에 시관이 빈청(賓廳)으로 나아갔는데, 이른 아침부터 밤새도록 회의하여 비로소 결정하여 이재관(李在寬)을 진사시의 장원으로, 이담(李潭)을 생원시의 장원으로 삼았다. 이재관은 고 판서 이조(李肇)의 손자이고 이담은 이기진(李箕鎭)의 조카인데, 명성이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공의(公議)에 맞지 않았었다. 아침에 빈청에 나아가 밤 삼고(三鼓)032)  가 되어서야 비로소 방(榜)을 내었다. 도승지 홍상한(洪象漢)이 입시하자, 임금이 하문하였는데, 홍상한이 그 까닭을 아뢰니, 임금이 마음속으로 미워하여 여러 시관들을 불러 시권(試券)을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어필(御筆)로 친히 허증의 시권에다 삼상(三上)이라고 썼는데, 허증은 송경(松京)033)  사람이었다. 하교하기를,
"생원 세 사람과 진사 여섯 사람은 반드시 시골 사람인 중인(中人)과 서얼(庶孽)로 채우게 하였는데, 서울 사람이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여 반드시 시골 사람과 함께 하도록 한 것이니, 너무나 가련하다. 조금 전에 지신(知申)034)  의 말을 듣건대, 출방(出榜)할 때에 풀로 봉한 것을 엿보아 그 지망(地望)을 가려 뽑고서 고례(古例)라고 일컫는다 하니, 이는 매우 놀랄 만하다. 그리고 또 임금은 삼무사(三無私)035)  를 받드니 하늘이 비나 이슬을 내릴 적에 어찌 지역을 가려서 내리겠는가? 송도(松都) 사람이 어찌 반드시 세 사람을 뽑는 생원의 대상이 되겠는가?
그리고 또 출방(出榜)하기 전에 봉한 것을 엿보고서 장원의 차례를 매기는 것은 매우 올바르지 못하다. 내가 이정(釐正)하는 것은 불가한 바가 없다. 이제부터 소과(小科)도 한결같이 대과(大科)의 방목(榜目)에 의거하여 단지 장원과 등급만 차례를 매기되, 풀로 봉한 부분을 뜯기 전에 찾아서 엿보는 자는 과장(科場)에 관한 율을 시행하게 하라. 그리고 이것이 비록 이번의 시관(試官)들이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국가의 체모에 있어서 경계함이 없을 수 없다. 여러 시관들을 아울러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2월 16일 병자

밤에 달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고, 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었으며 무리 아래에는 이(履)가 있었고 흰 무지개가 달을 꿰뚫더니 한참 있다가 없어졌다.

 

임금이 도감 당상(都監堂上)을 불러다 보고서 의주(儀註)를 강정(講定)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저께의 처분(處分)을 경들은 어떻게 여기는가?"
하자, 영돈녕부사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의도하는 바는 오로지 삼무사(三無私)를 받들겠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마는, 우리 나라의 규모(規模)로는 끝내 공경(公卿)의 자식을 서인(庶人)으로 만들 수 없고, 서인의 자식을 공경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이 규모를 변경시켜 제거하지 않은 채 단지 생원시와 진사시의 장원(壯元)에 대해서만 전해 내려오는 옛 규례를 변경한다면 이는 곧 시마복(緦麻服)과 소공복(小功服)을 살피는 격036)  입니다. 생원시와 진사시의 장원에 대하여 기필코 지망(地望)을 가리는 것은 바로 조종조(祖宗朝)에서 현관(賢關)037)  을 소중히 여기는 뜻입니다. 지금 만약 하루 아침에 혁파하여 없앤다면, 신은 아마도 삼무사(三無私)를 받드는 도리가 아닌 듯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은 진달하도록 하라."
하자, 김시형(金始炯)·정우량(鄭羽良)·원경하(元景夏)가 대답하기를,
"견해는 대신과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평소 내가 의지하고 위임한 이는 대신이었는데, 이와 같다. 정우량의 강직하고 방정함과 원경하의 숨김이 없음과 김시형의 성실하고 순후함으로도 모두 나와 같지 않으니 내가 장차 어디를 믿어야 하겠는가?"
하였다.

 

호서 안핵 어사(湖西按覈御史) 권숭(權崇)이 복명(復命)하였다. 사인(士人) 유민(柳慜)은 참판 유복명(柳復明)의 조카로 음란하고 방탕하여 좋은 행실이 없었다. 그의 서구모(庶舅母)038)  가 예쁘다 하여 훔쳐서 아산(牙山)으로 도망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었으므로, 그 내막을 캐내어 다스리고자 임금이 권숭을 파견하여 조사하여 그가 간음한 상황을 끝까지 추궁하도록 하였는데, 유민이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승정원에서 흰 무지개가 달을 꿰뚫은 것을 아뢰었다. 당시 동조(東朝)에 존호를 올리는 기일도 멀지 않았고, 또 상위가(象緯家)가 달은 후비(后妃)의 상징이라고 말하니, 임금이 듣고서 매우 놀라 근심하면서 천원 옥력(天元玉曆)을 가져다 그 점상(占象)을 상고하도록 명하고, 인해서 내일 빈대(賓對)할 것이니, 자리에서 아침까지 기다리도록 명하였다.

 

2월 17일 정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변고는 옛날에도 간혹 있었지만, 달을 꿰뚫는 변고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드문 일이다. 문안 때에 동조(東朝)께서도 이 때문에 지나치게 놀라 염려하시면서 경사스러운 의식을 물려서 거행하고 싶다는 하교가 계셨는데, 내가 옥책(玉冊)을 이미 간행한 까닭에 물려서 거행하기가 어려울 듯하다는 뜻으로 우러러 대답하였다. 의문(儀文) 가운데 혹시라도 절약하고 줄일 방법이 있으면, 자성(慈聖)의 뜻에 우러러 부응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자성께서 오늘 하교하기를, ‘바야흐로 서글픈 마음이 간절하던 가운데 이러한 그전에 없던 재변(災變)을 만났으니, 지금 비록 일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물려서 거행하여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미처 봉진(封進)하지 못한 기영(畿營)의 물선(物膳) 및 의정부·육조의 물선도 진봉을 정지하도록 하라.’고 하교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우리 자성께서 옛날에 하늘을 공경하던 뜻과 조심하고 삼가는 덕을 체득하신 것이지만, 책보(冊寶)를 올리는 의식과 반사(頒赦)하는 절차는 옥책(玉冊)을 올리는 날을 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로 종묘와 사직에 고해야 하므로 정말 조금이라도 물리기가 어려우니, 그대로 정한 날에 절제해서 거행하도록 하라. 대내(大內)에서 상전(賞典)을 친히 주거나 더하는 예(例)는 나 스스로 참작하여 마땅히 자성의 덕에 우러러 부응할 것이다. 물선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바로 의문(儀文)이라 하나, 자교(慈敎)가 이에 이르렀으니, 뜻을 봉양하는 도리에 있어서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교에 의거하여 봉진을 정지하도록 하는 일을 즉시 해조(該曹)에 분부(分付)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정석오(鄭錫五)·우의정 민응수(閔應洙)가 재변을 만나 벼슬을 사면하는 뜻으로 정승의 직임을 해임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위로하여 유시하였다. 민응수가 인하여 탕평(蕩平)의 폐단에 대해 극력 말하고, 전후에 국사를 말하였다가 죄를 얻은 자들을 석방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민응수가 또 시관(試官)에 대한 처분은 너무 지나치며 고례(古例)는 폐(廢)할 수 없다는 뜻을 누누이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단지 여러 시관들을 모두 서용(叙用)하도록 명하였다. 정석오가 말하기를,
"경기 감사 이명곤(李命坤)이 상소하여 양근(楊根)으로 소재지를 옮기는 일은 역사를 이미 시작하였는데, 기근(饑饉)이 든 해의 고군(雇軍)이 혹시라도 주민들을 소요스럽게 할까 염려되어 〈기일을〉 조금 물려줄 것을 청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하자, 임금이 대신에게 하문하였는데, 민응수가 말하기를,
"지금 도신(道臣)이 기근이 든 해에 주민들을 소요스럽게 할까 염려스럽다고 말을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조처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병조 참판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소재지의 터는 비록 옮기기에 적합하다 하더라도 옮길 곳이 토호(土豪) 집안의 터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저지당했다고 합니다. 조령(朝令)을 이미 내렸는데, 이미 시작하였다가 중간에 중지한다면 진실로 법과 기강에 관계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령이 된 자가 토호가 저지하고 방해하는 것으로 인하여 어찌 저지당하여 물러날 수 있겠는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간악함을 적발하게 한 뒤에 즉시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2월 18일 무인

도승지 홍상한(洪象漢)이 재이(災異)로 인하여 상소하여 진계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2월 19일 기묘

임금이 친히 책보(冊寶)를 대왕 대비전에 올리고 가상 존호(加上尊號)를 강성(康聖)이라고 하였다. 하루 전날 액정서(掖庭署)에서 전하의 판위(版位)를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 위 중앙에 북향하여 설치하고, 소차(小次)를 전계(殿階) 위 서편에다 설치하였다. 책보를 임시로 안치할 안(案)을 전의 안쪽 북쪽에 가깝게 남향하여 설치하였다. 전의(典儀)가 종친과 문무 백관의 자리를 전정(殿庭)의 동쪽과 서쪽에 설치하기를 일반 의식과 같이 하였다. 장악원(掌樂院)에서 헌가(軒歌)와 현가(懸歌)를 전정에다 진열하고, 협률랑(協律郞)의 거휘위(擧麾位)를 서쪽 뜰 위에다 설치하였다. 집사(執事)가 책보를 받들어 먼저 안(案)에 두었다. 북을 울려 초엄(初嚴)039)  을 알리자 병조에서 의장(儀仗)의 호위를 진열하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이 여(輿)를 합문(閤門) 밖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종친과 문무 백관은 모두 조복(朝服)을 갖추었다. 【5품 이하는 흑단령(黑團領)이다.】  북을 울려 이엄(二嚴)을 알리자 명정전 문밖 자리로 나아가고, 좌통례(左通禮)가 합문에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을 계청(啓請)하였다. 북을 울려 삼엄(三嚴)을 알리고 북소리가 그치자, 안팎의 문을 열고 좌통례가 꿇어앉아 외판(外辦)을 아뢰니,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여(輿)를 타고 나왔는데, 산선(繖扇)과 시어(侍御)는 평상시와 같았다. 헌가가 음악을 연주하면 좌우 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리기를 계청하고, 임금이 여에서 내려 소차로 들어가니 음악 연주가 그쳤다. 인의(引儀)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인도하여 정해진 자리로 들어갔다. 대왕 대비가 통명전(通明殿)으로 나왔는데, 시위(侍衛)는 일반 의식과 같이 하였다. 인의가 사자(使者)를 인도하여 첨계(簷階) 아래로 나아가 서향하여 서고,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차(出次)하도록 계청하자 헌가가 음악을 연주하였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도록 계청하자, 근시(近侍)가 규를 올리고, 좌우 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판위(版位)로 나아가 북쪽을 향해 섰다. 【음악이 그치면 산선(繖扇)·화개(華蓋)·금월부(金鉞斧)를 뜰 아래의 좌우(左右)에다 미리 진열한다.】  전의(典儀)가 네 번 절하라고 외치자 좌통례가 네 번 절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국궁(鞠躬)하면 음악이 연주되는데, 네 번 절하였다. 종친과 문무 백관은 꿇어앉았다. 봉책관(捧冊官)이 책안(冊案) 앞에 나아가 책함(冊函)을 받들고 나와 꿇어앉아 근시(近侍)에게 주고, 〈근시가〉 서로 받들고 서향하여 꿇어앉아 올리니 임금이 그것을 받았다. 근시가 마주 들고서 정사(正使)에게 주고, 정사가 나아가 동향하여 꿇어앉아서 받아 정문(正門)을 경유하여 들어가 도로 안(案)에다 두었다. 그리고 동문(東門)을 경유해서 나와 첨계(簷階) 아래 동쪽 가까이 서향하여 섰다. 봉보관(捧寶官)이 보안(寶案) 앞으로 들어가 보록(寶盝)040)  을 받들고 나와 꿇어앉아서 근시에게 주고, 근시가 서로 받들고 서향하여 꿇어앉아 올리니, 임금이 그것을 받았다. 근시가 마주 들고서 정사에게 주자, 정사가 동향하여 꿇어앉아 받아서 정문을 경유하여 들어가 도로 안(案)에 두었다. 그리고 동문을 경유하여 나와 첨계 위의 동쪽 가까이 서향하여 섰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고 네 번 절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규를 잡고 엎드렸다가 일어나면 음악이 연주되는데, 네 번 절하였다. 종친과 문무 백관도 똑같이 하였는데, 음악이 그쳤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의식이 끝났음을 아뢰자, 좌우 통례가 임금을 인도하여 북쪽 뜰에서 내려와 남쪽을 향해 섰다. 정사는 책함을 받들고 부사는 보록을 받들고 정문을 경유하여 중계(中階)에서부터 나왔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국궁하도록 계청하자 임금이 국궁하였으며, 지나가면 평신(平身)하도록 계청하여 임금이 평신하였는데, 종친과 문무 백관도 똑같이 하였다. 사자(使者)가 책함과 보록을 각각 요여(腰輿)와 채여(彩輿)에 안치하면, 【요여와 채여는 명정전(明政殿) 문 밖에 있다.】  세장(細仗)과 고취(鼓吹)가 앞에서 인도하며 헌가가 음악을 연주한다. 좌우 통례가 임금을 인도하여 승여(乘輿)에 이르자,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를 놓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규를 놓으니, 근시가 꿇어앉아 규를 받았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輿)에 타도록 계청하자, 임금이 여를 타고 들어갔는데, 산선과 시위는 평상시 의식과 같이 하였다. 임금이 내전(內殿)에 이르자, 음악이 그쳤다. 인의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인도하여 나오고, 좌통례가 꿇어앉아 해엄(解嚴)하기를 계청하니, 병조에서 하교를 받아 의장을 놓게 하였다. 사자가 문정문(文政門) 밖에 이르러 책함과 보록을 상전(尙傳)에게 주어 들여가게 하고, 사자가 도로 전정(殿庭)의 동북쪽에 이르러 서향하여 섰다. 사자가 꿇어앉으니, 정사가 복명(復命)하기를,
"삼가 하교를 받들어 대왕 대비전에 존호 책보(尊號冊寶)를 올렸습니다."
하였다. 의식을 마치자, 구부렸다가 일어나 네 번 절을 하니, 근시가 계문하였다.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하례를 받고 반교(頒敎)하여 국중(國中)에 대사(大赦)하였는데,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보갑(寶甲)이 돌아오니 우러러 큰 복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요첩(瑤牒)을 성실하게 이어받으니 다행히 대왕 대비의 마음을 빨리 돌이키게 되었다. 이에 떳떳한 전례를 법으로 따르니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왕 대비전하께서는 형황(珩璜)041)  같은 지극한 덕으로 시례(詩禮)를 훌륭하게 본을 삼아 주(周)나라 궁궐에서 귀의 장식품을 제거해 버린 것042)  같이 영고(寧考)를 큰 공으로 도우셨고, 한(漢)나라 궁전에서 누인 명주 옷을 입은 것043)  같이 아름다운 교훈을 과궁(寡躬)에게 물려 주셨으니, 장락궁(長樂宮)044)  에는 기쁨과 환희가 융성하고 하늘이 도와 강릉(岡陵)같이 장수하시라는 축원을 하게 하였다.
자성(慈聖)의 춘추가 70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우리 조정에 두 번째 있는 아름다움이다. 경자년045)  을 돌이켜 생각하여 겸양함은 비록 지난날을 서글프게 생각하는 데 기인하였으나, 진실로 병오년046)  에 〈존호를 가상하는 일에〉 부합되니, 정성은 선대의 뜻을 계승하는 데 간절하였다. 대비전에서 겸양의 뜻을 밝히고서 어찌 소자(小子)에게 간절한 정성을 맡기셨겠는가? 궐정에서 부르짖으며 흉금을 털어놓은 데서 뭇 신하들이 크게 바라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 겸양하시던 마음을 돌려 힘써 따라 주시니, 이에 빛나는 존호를 크게 천명할 수 있게 되었다. 옥검(玉檢)047)  을 받들어 공경히 올리니, 보록(寶籙)을 계승하시어 받으소서. 이미 본년(本年) 2월 19일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혜순 자경 헌열 광선 현익 대왕 대비(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大王大妃)로 가상(加上)하고, 존호를 강성(康聖)이라 하였다. 〈춘추〉 12세가 넘어서야 영명(永命)의 때를 만나 깊은 궁중에서 요순(堯舜)같은 임금을 받들었으며, 27세가 되시던 해에는 〈존호를 올리게 되어〉 후천(後天)의 수를 늘리셨기에 명령(冥靈)048)  처럼 장수하시를 바랐었다. 성대한 의식은 꿩의 깃으로 장식한 왕후의 의복에서 빛이 나니, 이미 옛날의 법을 따라 거행하였고 아름다운 법식은 고운 옥에서 더욱 드러나도다.
어버이를 돋보이게 하려는 정성을 다하여, 이에 자성의 깊은 인애를 따라 온 나라에 후한 은택을 내리려 한다. 오늘 매상(昧爽) 이전부터 잡법(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없애주고, 관직에 있는 자는 각기 한 자급을 더해 주며, 자궁(資窮)049)  인 자는 대가(代加)하도록 하라. 아! 큰 복을 오복(五福)에서 첫 번째 말한 장수에다 크게 하였으니, 실제로 기성(箕聖)050)  의 구주(九疇)에 합당하고, 온유한 교화를 팔방(八方)에다 펴시니 모두 문모(文母)051)  같은 가르침에 얽매었도다. 그래서 이렇게 교시하니 마땅히 모두 알도록 하라."
하였다. 【예문관 제학 원경하(元景夏)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48책 65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40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의생활(衣生活) / 어문학(語文學)


[註 039] 초엄(初嚴) : 의식을 행할 때 처음에 울리는 북소리. 광화문(光化門)의 큰 북을 두드리는데, 초엄에는 백관이 모이고, 이엄(二嚴)에는 문밖에 나오고, 삼엄(三嚴)에는 뜰에 들어오는 것임.[註 040] 보록(寶盝) : 어보(御寶)를 넣은 궤.[註 041] 형황(珩璜) : 패옥(佩玉).[註 042] 주(周)나라 궁궐에서 귀의 장식품을 제거해 버린 것 :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정무(政務)를 게을리하며 늘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므로 강후(姜后)가 일찍 일어나 귀의 장식품을 제거해 버리고 영항(永巷)에서 대죄(待罪)하며 말하기를, "첩(妾)이 변변치 못하여 사군(使君)으로 하여금 예의를 상실하게 하여 늦게 일어나는 데 이르도록 하였기에 감히 죄받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선왕이 마침내 깨닫고 정무를 부지런히 하여 주나라를 중흥시켜 명성을 이루게 했다는 고사(故事).[註 043] 한(漢)나라 궁전에서 누인 명주 옷을 입은 것 :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후(后)인 명덕 마황후(明德馬皇后)가 궁중에서 늘 대련(大練)을 입고 치마의 단을 두르지 않았는데, 초하루와 보름에 제희(諸姬)들이 조청(朝請)을 주장하면서 황후의 엉성하고 거친 것을 바라보고는 도리어 무늬가 있는 고운 명주 옷을 입고 나아가 보이며 웃으니, 황후가 말하기를, "이 명주 옷은 특별히 염색하기에 알맞기 때문에 착용하였을 뿐이오." 하자, 육궁(六宮)에서 그의 검소함에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는 고사.[註 044] 장락궁(長樂宮) : 한(漢)나라 고조(高祖) 5년에 모후(母后)를 받들기 위하여 세운 궁전. 혜제(惠帝) 이후 황제의 모후는 모두 이곳에 거처했는데 황제의 미앙궁(未央宮)은 서쪽에 있었는 데 반해 이 궁은 동쪽에 있었으므로 동조(東朝)라고 하며, 흔히 대왕 대비(大王大妃)와 대비전(大妃殿)을 가리키는 말로 쓰임.[註 045]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註 046] 병오년 : 1726 영조 2년.[註 047] 옥검(玉檢) : 옥함(玉函).[註 048] 명령(冥靈) : 거북.[註 049] 자궁(資窮) : 당하관(堂下官)의 품계가 더 올라갈 자리가 없이 된다는 뜻으로, 당하 정3품을 말함.[註 050] 기성(箕聖) : 기자(箕子).[註 051] 문모(文母) : 주나라 문왕(文王)의 비(妃) 태사(太姒).

 

도감 제조 조현명(趙顯命), 제조 김시형(金始炯)·정우량(鄭羽良) 등이 대명(待命)하였다. 당시 옥보(玉寶)의 전자(篆字)로 된 획이 잘못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는데, 옥보를 올린 뒤에야 비로소 알았기 때문에 대명하니, 임금이 대명하지 말도록 명하고 여러 대신들을 불러 옥보를 다시 만드는 일의 편부(便否)에 대해 의논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일이 미봉하는 데 가깝습니다. 올린 뒤에 새 옥보를 다시 만드는 것은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백급(白芨)으로 옥보의 떨어져 나간 부분을 메우게 하소서. 오래되면 분변하기 어렵게 됩니다."
하였다. 여러 대신들의 의논도 모두 같았으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옥공(玉工)을 불러다 떨어져 나간 부분을 메우도록 하였다.

 

진하(陳賀)가 끝난 뒤에 하교하기를,
"임금이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우하면 백성들은 효도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니, 이는 우리 동방에 두 번째 있는 경사이다. 추은(推恩)하기를 한결같이 선조(先祖)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에 의거하여 하도록 하라."
하고, 마침내 실록(實錄)을 상고해 내어 조신(朝臣) 4품 이상으로 나이 70세 된 이와 사서인(士庶人)으로 80세가 된 이에게는 가자(加資)하도록 하고, 대신 및 자궁(資窮)인 이에게는 음식물을 가지고 찾아가서 안부를 묻도록 명하였다.

 

정우량(鄭羽良)을 우참찬으로, 김형로(金亨魯)를 경상 좌수사로, 이장오(李章吾)를 전라 좌수사로, 유우기(兪宇基)를 사간으로, 박수(朴璲)를 헌납으로 삼았다.

 

2월 20일 경진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좌의정 정석오(鄭錫五)·우의정 민응수(閔應洙)가 재이(災異) 때문에 차자를 올려 진계(陳戒)하고, 인해서 면직해 주도록 바랐으나, 임금이 아울러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도감 제조 조현명(趙顯命) 등이 구대(求對)하고 말하기를,
"신이 국가의 대사(大事)를 맡아 성실하지 못하고 삼가지 않아서 이러한 결함이 있게 하였습니다. 성상께서 비록 관대히 용서하여 떨어져 나간 부분을 메우도록 하셨습니다만, 사체(事體)가 가볍지 않습니다. 지금 다행히 남은 옥(玉)이 있는데, 품질이 정본(正本)보다 못하지 않으니 바라건대 고쳐서 만들도록 명하시어 먼저 들여 보낸 것은 부본(副本)으로 삼고, 뒤에 들여 보낸 것을 정본으로 삼게 하신다면 아마도 뜻에 어긋나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진실로 옳지만 만약 정본에도 불행하게 손상이 있게 되면 고쳐서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마침내 대궐 안에서 감독하도록 명하였다.

 

공조 판서 원경하(元景夏)가 진소(陳疏)하고 교외(郊外)로 나가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고 위로하여 유시하였다. 원경하가 배척받은 이후 항상 실의(失意)하여 행동거지가 평온을 잃었는데, 반열에서 하례하는 의식이 겨우 끝나자마자 동작(銅雀) 나루터로 나가 소장을 남겨두고 떠나기를 바랐었다.

 

향군(鄕軍)으로 상번(上番)한 가운데 무신년052)  에 출전(出戰)했던 사람을 명소(命召)하고, 시사(試射)에 친히 나아갔다. 인하여 군사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니, 더러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이번 나라의 경사는 바로 우리 조정에 두 번째 있는 경사이니 옛날에 애휼(愛恤)하던 일을 따르고 자성(慈聖)의 덕의(德意)를 본받아 오늘날 백성과 함께 즐기려고 한다. 도성 주민의 기쁨과 슬픔은 공시(貢市)에 관계가 되니, 지부(地部)053)  와 혜청(惠廳)054)  에서 무릇 공물(貢物)을 매김에 있어 공평하고 균등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백성을 침탈하는 자는 대소(大小)의 관원을 논할 것이 없이 경조(京兆)055)  와 추조(秋曹)에서 듣는 즉시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그리고 제도(諸道)에서 민폐가 더욱 심한 것이나 간혹 원통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자는 조목으로 나열하여 장문(狀聞)하고, 계하(啓下)한 뒤에 등대(登對)하여 아뢰도록 하는 뜻을 서울의 경우는 비국과 추조에, 지방의 경우는 팔도의 도신(道臣)에게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존숭 도감 제조 이하 및 존호를 올렸을 때의 정사(正使)와 여러 관원들에게 아울러 노고를 보답하는 은전(恩典)을 시행하고, 그 나머지 장역(匠役) 등에게는 각각 차등이 있게 상(賞)을 베풀었다.

 

예조에서 진하(陳賀)하고 반교(頒敎)한 뒤에 과거를 베풀어 인재를 뽑는 일을 품지(稟旨)하니, 정시(庭試)를 거행해야 하는데 다른 여러 과거가 거듭 중첩이 된다 하여 9월이 되기를 기다려 날짜를 가리도록 비답하였다.

 

이보다 앞서 봉조하(奉朝賀) 이병상(李秉常)이 상소하기를,
"신이 비록 휴치(休致)하였으나, 그래도 봉조하로 부르는데, 사시 명절의 조회와 나라의 경사에 하례하는 일을 일체 폐기하고 있으니, 명분과 실상이 어긋납니다. 바라건대 신의 봉조하 칭호를 삭제하소서."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하례하는 반열에 참석하지 못한 것 때문에 상소하여 인책하면서 앞서의 계청을 거듭 반복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생원(生員)·진사(進士)의 방방(放榜)에 친히 나아갔으며, 생원·진사의 복색(服色)을 처음으로 연건(軟巾)과 난삼(襴衫)을 착용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옛날의 제도를 보고 싶다."
하고, 마침내 친히 나아갔다. 생원시의 장원(壯元) 허증(許增)이 의리를 끌어대며 즉시 방방에 응하지 않자,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방하(榜下)의 사람들이 모두 부끄럽게 여길 것인데, 저가 감히 방방에 응하지 않겠는가?"
하고, 연달아 엄중한 하교를 내리자, 허증이 그제서야 명을 받들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하례(賀禮)에 참여하고 다시 정고(呈告)하자, 비답하기를,
"안심하고 조리(調理)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무릇 71번째였다.

 

《국조어첩(國朝御牒)》과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정비하도록 명하였는데, 종부시(宗簿寺)에서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구관 당상(句管堂上)과 교정관(校正官)을 차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역사를 감독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24일 갑신

밤에 유성(流星)이 문창성(文昌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056)  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3, 4척(尺)쯤 되고, 빛깔은 흰 색이었다.

 

2월 25일 을유

남태온(南泰溫)을 대사간으로, 이광식(李光湜)을 사간으로, 남태혁(南泰赫)을 헌납으로, 유우기(兪宇基)를 집의로, 이수봉(李壽鳳)·이수관(李壽觀)을 지평으로, 유건(柳謇)을 정언으로, 송창명(宋昌明)을 부응교로, 임집(任)을 부교리로 삼고, 서명신(徐命臣)·윤동준(尹東浚)에게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더하였는데, 존숭 도감(尊崇都監)의 공로 때문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다시 구성필(具聖弼)을 남행(南行)으로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구성필은 어영 대장 구성임(具聖任)의 동생이다. 일찍이 음사(蔭仕)로 출신하였는데, 용렬하고 비루하여 윗사람을 잘 섬겼었다. 송인명(宋寅明)이 장수로서의 재능이 있어서 임용할 만하다고 추천하여 마침내 해서 병사(海西兵使)에 임명되었었고, 민응수(閔應洙)가 이조 판서가 되었을 적에는 또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는데, 곧바로 개정(改正)하도록 명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성응(金聖應)·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구성필에 대해서는 이미 개정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음관(蔭官)도 아니고 무인(武人)도 아니어서 적당하게 기용할 곳이 없고, 군문(軍門)과 양전(兩銓)에서 모두 받아들이지 않으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하고, 민응수도 그를 음관으로 조용(調用)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말하니, 임금이 개정하는 것을 중지하고 그전대로 조용하도록 명하였다.

 

이조 판서 김약로(金若魯)를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참판 이철보(李喆輔)를 이천 부사(利川府使)로 특별히 전보시켰다. 김약로는 그의 종형(從兄)이 바야흐로 원보(元輔)057)  의 지위에 있다는 것으로 전형(銓衡)의 직임을 극력 사양하였고, 이철보는 윤봉오(尹鳳五)의 상소를 가지고 자기 주장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2월 26일 병술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재숙(齋宿)하고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였는데, 축문에 잘못 쓰여진 부분이 있으므로 도승지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지금 고쳐 쓰기는 어려우니, 몇 자를 도필(刀筆)로 긁어내고 고쳐서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27일 정해

임금이 친히 영희전(永禧殿)에서 제사를 지내고 두루 충훈부(忠勳府)에 임어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광묘(光廟)와 원종(元宗)058)  이 일찍이 정사(靖社)·호성(扈聖)의 훈록(勳錄)에 참여하였고, 〈초상화가〉 충훈부에 간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이 감회가 일어나 이런 거조가 있었다. 기공각(紀功閣)에 나아가 여러 공신(功臣)을 선소(宣召)하였는데, 분무 공신(奮武功臣)으로 들어와서 참석한 이로는 단지 조현명(趙顯命)·박찬신(朴纉新)·김중만(金重萬) 세 사람뿐이었다. 임금이 선온(宣醞)059)  하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성종(成宗)과 중종(中宗) 때에 본부(本府)에 친히 들르셨는데, 오늘까지 합하면 세 차례가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연히 서로 합치되었는데 서글픈 회포가 갑절이나 더하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태조(太祖) 이후로 21차례의 훈맹(勳盟)이 있었는데, 열조(列祖)에서는 이런 공신 때문에 〈왕조를〉 처음으로 열어 지금까지 전해지며 시행하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열조의 어렵고 큰 기업(基業)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분발하고 힘쓰셔서 중흥(中興)의 업을 정비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중흥시키려고 하더라도 누가 나를 도와 다스리겠는가?"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끝내 발을 더듬는 씩씩한 기상060)  이 없으십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시상(時象)으로 말할 만한 것이 없는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어제 전관(銓官)에 대한 처분에 대해 신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철보(李喆輔)는 이미 삼사(三司)의 배척이 있었으므로, 의리상 공무를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약로(金若魯)에 이르러서는 비록 고집한 바가 있었다 하나, 전하께서 으레 경계하는 데 불과하였고, 실제로 나가기를 독촉한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지방으로 전보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김약로 같은 자는 아마도 전하께서 얻기 어려울 듯하므로 신은 실로 조정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이날 좌의정 정석오(鄭錫五)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번 연중(筵中)에서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의 일을 가지고 진달한 바가 있었는데, 그때에 성명(聖明)께서도 죄가 있으면 처벌해야 되고 처벌이 행해지면 서용해야 한다고 하셨으므로, 이미 수용(收用)하여 서임(叙任)하였습니다. 따라서 저절로 성헌(成憲)이 있는데, 지금 어찌하여 다시 의논하라고 하교하실 수 있습니까? 중신(重臣)이 서임받은 뒤에 〈그가〉 그전부터 추천하고 의망하였으면, 갑자기 빼버릴 수 없는 것이니, 사리에 어둡고 막힌 견해로는 마침내 구차스럽게 영합(迎合)할 수 없습니다. 막중한 전관(銓官)의 의망을 즉시 주의(注擬)하여 들이지 않았으니, 그 까닭을 캐어 보면 신의 죄가 아님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배척하여 물러나게 하셔서 국가의 일을 다행스럽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나의 뜻도 이와 같았으므로 장차 하교하려고 하였었다. 진달한 것은 옳으니, 그것을 전조에 거듭 경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춘제(李春躋)를 대사헌으로, 남주기(南奏耆)를 집의로, 이홍직(李弘稷)을 장령으로, 이사관(李思觀)을 정언으로, 남유용(南有容)을 응교로, 이태중(李台重)을 보덕으로 삼았다.

 

2월 28일 무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햇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고 햇무리 아래에는 이(履)가 있었는데, 안쪽은 붉고 바깥쪽은 푸르렀으며, 백기(白氣)가 양이에서 나와 햇무리 위로 구불구불 지나가다가 잠깐 후에 없어졌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임석헌(林錫憲)을 결성 현감(結城縣監)으로, 임집(任)을 홍원 현감(洪原縣監)으로 내쫓아 전보시켰다. 당시 개강(開講)하라고 명하고 대전(大殿)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으나, 임석헌 등이 유신(儒臣)으로서 끝내 패초(牌招)061)  를 받들지 않았다. 조명리(趙明履)가 기조(騎曹)062)  에 입직(入直)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부제학(副提學)으로 임명하여 개강하고, 세 명의 신하는 모두 출보(黜補)한 것이었다.

 

2월 29일 기축

영돈녕부사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충훈부(忠勳府)에 두루 임어하셨을 적에 철물 병문 파수장(鐵物屛門把守將)에게 병조로 하여금 곤장을 집행하라고 명하셨다고 합니다. 말로 전하는 분부를 듣고 시행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병가(兵家)에 있어서 첫번째 도리이니, 만약 영기(令旗)가 없을 경우 수장(守將)이 문을 열지 않는 것은 바로 그의 직무인 것입니다. 신이 중영(中營)의 집사(執事)를 불러서 물어 보았더니, 과연 영기를 보내지 않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죄는 파수장(把守將)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중군(中軍)과 집사에게 있는 것입니다. 〈한(漢)나라 때〉 세류문(細柳門)을 지키던 군사 역시 천자(天子)가 왔음을 알았지만, 장군의 명령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거절하고 들여보내지 않았으니, 가상하게 여겨 죄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수장에게 곤장을 집행하도록 한 명을 중지하시고 해당 영(營)의 중군은 도태시키시고, 집사는 종중 결곤(從重決棍)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충훈부에 두루 임어하였을 적에 파수장이 즉시 문을 열지 않아 전상(前廂)이 지체되도록 하였는데, 병조 판서가 처벌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대신이 상소하여 언급한 것이었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주례(周禮)》를 강독하였다. 참찬관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신이 《주례》를 살펴보건대,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는 모두 검찰(檢察)하는 정치가 있었고, 조정 안에서도 또한 규정(糾正)하는 신하가 없지 않았습니다. 국가에 대신(臺臣)이 있는 것은 백관을 검찰하려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대신의 지위가 비록 낮다고 하더라도 〈직무는〉 대신(大臣)과 동등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언제나 대간의 소장을 가지고 대신에게 물으시는데 신은 그윽이 불가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주운(朱雲)의 일을 장우(張禹)063)  에게 묻겠는가?"
하자, 검토관 이이장(李彝章)이 말하기를,
"언로(言路)는 넓히는 것이 마땅하고, 단속하며 살피는 일은 명백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동궁(東宮)이 시좌(侍坐)하였는데, 임금이 궁관(宮官)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동궁에게 전날 배운 글의 음(音)을 읽게 하였으며, 임금이 글뜻을 물었다. 임금이 동궁에게 말하기를,
"네가 내 모습을 살펴본다면 내가 어찌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겠는가마는, 억지로 일어나서 경연(經筵)을 여는 것은 바로 너를 위해서이고 또한 나라를 위해서이다."
하였다.

 

충청 감사 서종급(徐宗伋)을 이조 판서로 삼고, 어필(御筆)로 박문수(朴文秀)의 이름을 전장(銓長)의 망(望)에 써서 내렸다. 당시 전장의 자리가 오래도록 비어 있었는데, 김재로(金在魯)·정석오(鄭錫五)·민응수(閔應洙)가 서로 차자(箚子)를 진달하였으므로, 천망(薦望)할 수 없었다. 그러자 임금이 전망(前望)을 가져 오도록 명하고, 어필로 박문수를 첨가하여 써 넣었는데, 누가 감히 끝까지 시끄럽게 하겠는가?
사신은 말한다. "임금의 처분은 도리를 따라서 행해야만 평탄하게 구애됨이 없는 것이다. 전관(銓官)의 추천이 시끄러운 것은 박문수 때문이었는데, 죄가 정석오에게 있으면 정석오를 처벌하고, 죄가 민응수에게 있으면 민응수를 처벌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아니하고 대신의 일을 〈임금이〉 낮추어 행하니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킴이 또한 큰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8책 65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42면
【분류】인사(人事)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임금의 처분은 도리를 따라서 행해야만 평탄하게 구애됨이 없는 것이다. 전관(銓官)의 추천이 시끄러운 것은 박문수 때문이었는데, 죄가 정석오에게 있으면 정석오를 처벌하고, 죄가 민응수에게 있으면 민응수를 처벌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아니하고 대신의 일을 〈임금이〉 낮추어 행하니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킴이 또한 큰 것이다."

 

윤득재(尹得載)를 교리로, 한광회(韓光會)를 수찬으로, 조재민(趙載敏)을 필선으로, 구택규(具宅奎)를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2월 30일 경인

중사(中使)를 보내어 연령군(延齡君)과 상산 부인(商山夫人)에게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는데, 연령군은 바로 임금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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