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신묘
창의문(彰義門) 밖에서 돌을 떠내는 것을 금지시켰다. 당시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이 그의 아버지 묘소에 비석을 세우려고 상암(裳巖)을 깎아 귀부(龜趺)064) 를 만들다가 역부(役夫)들이 깔려 죽은 이가 많아 원망하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탱은 품계가 높은 종신(宗臣)으로 그의 아우인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과 횡포가 심하였지만, 경조(京兆)와 오부(五部)의 관원들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금지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뒤에 헌신(憲臣) 이영조(李永祚)가 상소하여 논한 것으로 인하여 탱은 순안현(順安縣)으로 귀양보내고, 당시 경조의 수당(首堂)이었던 김성응(金聖應) 또한 파직(罷職)시키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3월 2일 임진
임금이 예조 참판 김상로(金尙魯)를 불러 보고 하문하기를,
"황단(皇壇)의 친향(親享) 때에 세자가 만약 함께 참석하면 내가 초헌(初獻)과 아헌(亞獻)을 아울러서 행하고 세자는 종헌(終獻)을 하여야 하는가?"
하자, 김상로가 말하기를,
"지난날의 경우는 대전(大殿)께서 삼헌(三獻)을 아울러 행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중대한 의식이니 경솔하게 할 수 없다."
하고, 대신과 지방에 있는 유신(儒臣)에 묻고 의논하도록 하였다. 황단 친향 의주(皇壇親享儀註), 왕세자 배제 의주(王世子陪祭儀註), 대신 섭행 의주(大臣攝行儀註), 망위례 겸 행 성생 성기 의주(望位禮兼行省牲省器儀註)를 합쳐서 한 책(冊)을 만들고, 황단의 신탑(神榻)·의장(儀仗)·제기(祭器)·악기(樂器)는 모두 이름을 쓰고 아울러 배치하는 것을 기록하여 또 한 책을 만들되, 첫째권에는 단유(壇壝)·신실(神室)·재전(齋殿)에 대하여 각기 영건(營建)한 월일(月日)을 쓰고, 제2장(第二張)에는 제물 도식(祭物圖式) 및 여러 집사(執事) 이하의 서립 도례(序立圖例)를 적어 한 본(本)은 황단의 신실에다 간직하고 한 본은 강화도(江華島)의 정족 산성(鼎足山城) 사고(史庫)에 간직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또 황단에 본래 의궤(儀軌)가 없다 하여 예관(禮官)과 유신에게 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상의하여 찬집(纂輯)하게 하였다.
3월 6일 병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도승지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숭품(崇品)의 중신(重臣)을 내쫓아 지방의 고을에 전보시킨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김약로(金若魯)의 형제가 억세고 사나워 사람들에게 미움 받지만 핑계를 대며 회피하려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세도(世道) 때문이다. 기봉(機鋒)이 사방에 펼쳐져 있으니, 전관(銓官)이 된 자로 누군들 그것을 즐겨하겠는가? 내가 내직(內職)으로 옮겨주고 싶지만, 한 달 동안에 세 차례나 체임하는 것은 백성들의 폐단에 관계가 있으므로, 전관(前官)을 그대로 유임시키려고 하는데, 아마도 전례가 없는 듯하다."
하자, 홍상한이 말하기를,
"제왕(帝王)은 스스로 일을 일으키기도 하고 시작하기도 하는데, 어찌 전례를 물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왕(嗣王)에게 마음 편하게 하는 일을 인도할 수는 없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인주(人主)는 마음 편하게 할 수 없으니, 옛날부터 제왕(帝王)의 덕(德)을 상실하는 경우가 한결같이 여기에 연유하였었다. 그런데 홍상한의 말은 어찌 사리에 어긋나기가 이에 이르는 것인가? 재상(宰相)은 모름지기 식견과 사려가 있는 사람을 기용해야 하는 법이니, 옛날 사람이 어찌 우리를 속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48책 65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42면
【분류】사법(司法) /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인주(人主)는 마음 편하게 할 수 없으니, 옛날부터 제왕(帝王)의 덕(德)을 상실하는 경우가 한결같이 여기에 연유하였었다. 그런데 홍상한의 말은 어찌 사리에 어긋나기가 이에 이르는 것인가? 재상(宰相)은 모름지기 식견과 사려가 있는 사람을 기용해야 하는 법이니, 옛날 사람이 어찌 우리를 속이겠는가?"
주강을 행하고, 이어서 석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유시하기를,
"지금의 국사(國事)는 한심스럽다고 말할 만하다. 믿을 곳이라고는 오직 경(卿) 등 두세 사람 뿐인데, 한편에서는 이런 저런 말을 하고 한편에서는 벼슬에서 떠나니, 그전에 염매(鹽梅)065) 하던 이로는 오직 경 한 사람 뿐이었다. 조섭(調攝)한 지 이미 오래 되어 전의 병이 거의 나았고, 한 해가 넘도록 심단(尋單)하여 염우(廉遇)도 펴졌으니, 나의 오늘날의 심사(心事)를 민망하게 여겨 마음을 편안히 가져 사임하지 말고 이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아울러 좌의정과 우의정에게도 유시하였다. 당시 김재로(金在魯)가 4개월 동안 심단(尋單)하였는데, 정석오(鄭錫五)·민응수(閔應洙)가 전망(銓望)을 추천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모두 인입(引入)하여 빈대(賓對)에 참석하지 않는 날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었다.
3월 7일 정유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윤휘정(尹彙貞)을 대사간으로, 김상복(金相福)을 사간으로, 정광운(鄭廣運)을 장령으로, 권기언(權基彦)·이장하(李長夏)를 지평으로, 남태회(南泰會)·이성억(李聖檍)을 정언으로, 홍우한(洪羽漢)을 교리로, 신회(申晦)를 수찬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충청 감사로, 임위(任瑋)를 설서로, 조재덕(趙載德)을 필선으로, 이구령(李耉齡)을 집의로, 윤득재(尹得載)를 보덕으로 삼았다.
정언 유건(柳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한광회(韓光會)가 전지(銓地)에 아부하여 언관(言官)을 논박하여 파면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그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한 사람의 재상(宰相)을 위하여 공의(公議)를 돌보지 않았으니, 그의 뜻과 태도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견책하여 관직을 삭탈하는 법을 시행하심이 적합하겠습니다. 그리고 재령 군수(載寧郡守) 이겸좌(李謙佐)는 정무(政務)를 간악한 아전에게 맡기고 오로지 가렴 주구(苛斂誅求)만 일삼았으며, 김천 군수(金川郡守) 허반(許槃)이 양대(兩臺)에 하직하지 않고 바쁘게 서둘러 내려 갔으니, 모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한광회의 일은 지나치다. 허반의 일은 아뢴 대로 하고, 이겸좌는 잡아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8일 무술
우박(雨雹)이 내렸는데, 크기가 콩만하였다.
북경(北京)에 간 역졸(驛卒) 가운데 죽은 자는 본도(本道)에서 고향으로 운송(運送)하도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역졸로 사신의 행차를 따라 북경에 가다가 죽었을 경우 인솔하여 가던 역관(譯官)이 〈시신(屍身)을〉 거두어 염습(殮襲)하여 의주(義州)에 도착하면 그 집안 사람이 운반하도록 하였으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의주에 버려 두었으므로 승지 이하종(李夏宗)이 그 사실을 아뢰자, 이런 명이 있었다.
서명신(徐命臣)을 승지로 삼았다.
3월 9일 기해
달이 귀성(鬼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황단(皇壇)에 나아가 망위례(望位禮)를 행하였다. 당시 초10일에 황단에 제사를 지내려고 한 것을 임금이 편찮아서 친향(親享)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날 직접 향(香)을 전하고 보련(步輦)으로 영화당(暎花堂)을 나가 단소(壇所)에 이르러 의식을 행하였는데, 왕세자도 따랐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친향하지 못할 경우 더러는 세자가 섭행(攝行)하거나 아니면 대신이 섭행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신이 병이 들었다고 이유를 대므로 종신(宗臣)에게 대신해서 행하도록 하였는데 그 전에 없었던 일이었다.
윤득재(尹得載)를 특별히 임명하여 승지로 삼았다.
3월 10일 경자
달이 헌원성(軒轅星)에 들어갔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참찬관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대신이 송언(送言)하여 관서 어사(關西御史)가 상소한 일을 신으로 하여금 등대(登對)하여 아뢰게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양서(兩西)066) 를 대우함이 다른 도와 달라서 어사를 보내어 진휼 상황을 감독하게 하였으니, 그가 곡식을 청한 것은 떳떳하다. 그런데 대신이 지난(持難)하고 있으니, 그것이 가한지 모르겠다."
하였다. 홍상한이 말하기를,
"앞서 이미 7만 곡(斛)을 나누어 주었는데, 지금 만약 더 나누어 준다면 일곱 고을 백성의 목숨을 살릴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태종조(太宗朝)에 영남에 기근(饑饉)이 들었으므로 임금이 30만 석(石)을 지급하도록 명하여 진휼을 마치도록 하였었는데, 도신(道臣)이 더 보태어 주기를 청하지 않으니 태종이 하교하기를, ‘지난번 호서(湖西)에 거듭 기근이 들어 곡식 30만 석을 지급해서 겨우 진휼을 마칠 수 있었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굶주리는 자가 있었다. 영남은 호서보다 지역이 큰데도 도신이 더 보태어 주기를 청하지 않으니, 이는 백성들의 고통을 두루 알지 못한 것이다.’ 하고, 도신을 죄주었다. 제왕이 백성을 사랑하기를 본래 이와 같이 하였는데, 대신만 오로지 그것을 듣지 못해서인가?"
【태백산사고본】 48책 65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42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구휼(救恤) / 역사-사학(史學)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財政)
[註 066] 양서(兩西) : 황해도와 평안도.
사신은 말한다. "태종조(太宗朝)에 영남에 기근(饑饉)이 들었으므로 임금이 30만 석(石)을 지급하도록 명하여 진휼을 마치도록 하였었는데, 도신(道臣)이 더 보태어 주기를 청하지 않으니 태종이 하교하기를, ‘지난번 호서(湖西)에 거듭 기근이 들어 곡식 30만 석을 지급해서 겨우 진휼을 마칠 수 있었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굶주리는 자가 있었다. 영남은 호서보다 지역이 큰데도 도신이 더 보태어 주기를 청하지 않으니, 이는 백성들의 고통을 두루 알지 못한 것이다.’ 하고, 도신을 죄주었다. 제왕이 백성을 사랑하기를 본래 이와 같이 하였는데, 대신만 오로지 그것을 듣지 못해서인가?"
12일에 조참(朝參)을 행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지난번 육상묘(毓祥廟)에 거둥하였을 때 형조 판서 유엄(柳儼)을 압반(押班)하였는데, 황단(皇壇)에 제사하는 일을 종신(宗臣)이 대신해서 행하였으니, 사체(事體)가 한심스럽다. 어원(御苑)에 꽃이 난만(爛漫)하게 피었는데도 아직 한 번 구경하지 못했다. 나의 마음과 힘이 벌써 그전과 같지 않기에 억지로 자신을 책망하면서 분발하고 면려하는 뜻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이런 명이 있었다.
3월 11일 신축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주례(周禮)》를 강하였는데, 춘관(春官)의 총인(冢人)에 이르자 특진관(特進官)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주례》의 총인은 묘지(墓地)의 구역을 관장하였는데, 다투는 것을 중지시키려 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다투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은 대체로 대신에게 달려 있는데, 누가 이 일을 맡을 수 있겠는가? 국가의 일은 오로지 고굉지신(股肱之臣)에게 의뢰하는 것인데, 마침내 찌끼가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자, 조영국이 말하기를,
"찌끼가 비록 있다 하더라도 오래되면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여선응(呂善應)을 정언으로, 이이장(李彝章)을 부교리로, 조명채(曹命采)·이형만(李衡萬)을 수찬으로 삼았다.
3월 12일 임인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사방이 컴컴하여 먼지가 내리는 듯하였다.
임금이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받았다. 좌의정 정석오(鄭錫五) 등이 죄를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경 등을 보고 위로하여 유시하는 바가 있어야 마땅하겠지만, 나는 형식적인 것을 하지 않겠다. 이번의 일은 우의정이 잘못하였다."
하자, 우의정 민응수(閔應洙)가 말하기를,
"신 등이 당초에 의심하거나 저지하는 마음이 없어서 비록 차자를 올려 다투던 때에도 화기(和氣)는 잃지 않았습니다. 신 등이 오래도록 조정에 나아가지 않은 채 서로 버티는 듯함이 있었는데, 이는 병폐이지만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신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염려하지 마시고 오직 세도(世道)를 근심하소서. 그리고 또 영의정이 출사하지 아니하여 신 등이 비록 정승의 자리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본래 인망(人望)이 부족하여 일에 두서(頭緖)가 없습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영의정이 출사하도록 권면하소서."
하였다. 당시에 임금이 오래도록 정무를 보살피지 못하여 정승의 자리도 갖추어지지 않았고, 합계(合啓)는 오히려 삼사(三司)에 달려 있는데도 서로 정고(呈告)하였으며, 품계가 높은 중신(重臣) 또한 완인(完人)이 없었다.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지금 이렇게 조용히 조섭(調攝)하는 가운데 억지로 일어나셔서 조회에 나오셨는데, 이로 말미암아 조정의 기강이 진작되고 엄숙해질 것이니, 국사의 다행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기뻐하며 다행으로 여기는 것 또한 도덕이 쇠미(衰微)한 세상에서 나온 뜻이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인군(人君)이 하루라도 정무를 보살피지 않으면 국가에서 그 병폐를 받게 된다. 조참(朝參)을 정지한 것이 자칫 세시(歲時)를 넘기게 되니, 반행(班行)이 가지런하지 않은 것과, 신료(臣僚)가 일없이 날짜만 보내는 것이 거의 여기에 연유한다. 한 번 조회에 좌정하자 좌의정과 우의정이 출사(出仕)하였고, 문무 백관도 오히려 반열을 이룰 수 있었으니, 변화시키는 기틀이 유독 임금에게 달려 있지 않겠는가?"
【태백산사고본】 48책 65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43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역사(歷史) / 사법(司法)
사신은 말한다. "인군(人君)이 하루라도 정무를 보살피지 않으면 국가에서 그 병폐를 받게 된다. 조참(朝參)을 정지한 것이 자칫 세시(歲時)를 넘기게 되니, 반행(班行)이 가지런하지 않은 것과, 신료(臣僚)가 일없이 날짜만 보내는 것이 거의 여기에 연유한다. 한 번 조회에 좌정하자 좌의정과 우의정이 출사(出仕)하였고, 문무 백관도 오히려 반열을 이룰 수 있었으니, 변화시키는 기틀이 유독 임금에게 달려 있지 않겠는가?"
여주 목사(驪州牧使) 김약로(金若魯)와 이천 부사(利川府使) 이철보(李喆輔)를 내직(內職)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조영로(朝榮魯)·이유신(李裕身)을 승지로 삼았다.
3월 13일 계묘
형조에 중수(重囚)를 적어서 올리도록 명하였다. 당시에 큰 의식을 치르게 되면 으레 소결(疏決)을 행하였다. 형조에서 중수를 적어서 아뢰니, 대신을 모아 죄를 의논하게 하였는데, 형조 참판 정익하(鄭益河)가 그 일을 주장하고, 판서인 유엄(柳儼)은 자리만 채웠을 뿐이었다. 적은 것이 모두 9단(段)이었는데, 6인(人)은 참작해서 섬으로 귀양보내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사면(赦免)한 뒤에 소결하는 것은 일이 계복(啓覆)067) 과 동일하다. 형벌에 대해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가벼운 법을 적용하지만, 어지러운 나라에서는 무거운 법을 적용한다. 단자(單子)에 9안(案)을 적어 올렸는데, 부생자(傅生者)가 6인이었으나, 대신 이하가 오로지 정익하(鄭益河)의 구기(口氣)만 쳐다 보고 조금도 가부(可否)에 대해 말이 없었으니, 또한 장정위(張廷尉)068) 로 여긴 것인가? 그리고 이세청(李世淸)이 살아날 수 있게 한 것은 올바른 법이 아니니, 탄식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48책 65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43면
【분류】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註 067] 계복(啓覆) : 복심(覆審)을 아룀. 사죄(死罪)는 신중히 심리하기 위하여 세 번의 복심, 곧 초복(初覆)·재복(再覆)·삼복(三覆)을 거치는데, 복심 때마다 임금에게 아룀.[註 068] 장정위(張廷尉) : 한나라 문제(文帝) 때의 직신(直臣) 장석지(張釋之).
사신은 말한다. "사면(赦免)한 뒤에 소결하는 것은 일이 계복(啓覆)067) 과 동일하다. 형벌에 대해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가벼운 법을 적용하지만, 어지러운 나라에서는 무거운 법을 적용한다. 단자(單子)에 9안(案)을 적어 올렸는데, 부생자(傅生者)가 6인이었으나, 대신 이하가 오로지 정익하(鄭益河)의 구기(口氣)만 쳐다 보고 조금도 가부(可否)에 대해 말이 없었으니, 또한 장정위(張廷尉)068) 로 여긴 것인가? 그리고 이세청(李世淸)이 살아날 수 있게 한 것은 올바른 법이 아니니, 탄식할 만하다."
3월 14일 갑진
임금이 옥대명(玉帶銘)을 친히 지어서 써서 내렸다. 숙종 을해년069) 에 선조[宣廟]의 옥대자(玉帶子)를 중수(重修)하여 진어(進御)하고 집상전(集祥殿)에 간직하고 있었는데, 동조(東朝)에서 그 일을 임금에게 말하자, 임금이 도승지 홍상한(洪象漢)을 불러 친히 대명(帶銘)을 짓고, 홍상한을 시켜 그것을 쓰게 하고는 말하기를,
"경(卿)은 바로 목릉(穆陵)070) 의 자손이니 경을 부른 것은 까닭이 있어서이다. 명년은 바로 선조께서 즉위하신 해이니, 우연한 일이 아니다. 모레 문과 전시(文科殿試) 때에 내가 이 대(帶)를 두르고 전(殿)에 나아갈 것이니, 모두 알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이보다 앞서 송인명(宋寅明)이 정우량(鄭羽良)과 임금 앞에서 논쟁(論爭)하면서 탕평책(蕩平策)은 단지 한편의 사람들을 이롭게 하거나 굴종(屈從)시키는 것이 된다고 하였었는데, 송인명이 이미 죽자 탕평책을 공격하는 자들이 모두 그 말을 주장하였었다. 당시에 이조 참의를 통의(通擬)하려고 하는데, 한편의 사람들은 이석표(李錫杓)·이종적(李宗迪)을 수망(首望)으로 삼고, 한편의 사람들은 이천보(李天輔)·이정보(李鼎輔)·홍계희(洪啓禧)를 수망으로 삼았는데, 모두 촉망을 받는 대상자였다. 그러다가 이주진(李周鎭)이 이조 판서가 되고 홍상한(洪象漢)이 이조 참판이 되자, 몇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으면서 군의(群議)를 극력 배척하였다. 그리고 심성진(沈星鎭)·조명리(趙明履)를 통의하자, 당시의 의논이 크게 격렬하여 정우량이 그렇게 하였다고 여기고는 정우량과 아울러 공격하여 노소(老少) 양쪽이 준열하였는데, 마침내 서로 합쳐졌었다. 이때에 이르러 강(講)하기를 마치자, 검토관 이이장(李彝章)이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적이 살펴보건대, 전하께서 요즈음 저술(著述)에 대단한 관심을 두시는데, 전하께서는 황극(皇極)의 높은 지위에 처하였으므로, 천하의 일은 모두 목전(目前)에서 처리해 가야 하니, 덕택(德澤)은 생민(生民)에게 달려 있고 공업(功業)은 사관(史官)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하의 문장(文章)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구구하게 이러한 데에 관심을 두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유신(儒臣)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근심스럽다. 그러나 하늘과 땅에도 가끔 혼돈(混沌)한 경우가 있으니 이미 혼돈하게 되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였다. 시강관 윤광소(尹光紹)가 말하기를,
"신에게는 일찍이 마음에 숨겨진 근심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고심(苦心)하며 적당히 조절하시지만, 세도(世道)가 없어져 염치(廉恥)를 모르고 부조(父祖)를 배반(背叛)하는 자가 모두 뜻을 이루었으니, 고 좌상의 한편의 사람들을 이롭게 하거나 굴종(屈從)시킨다는 말은 진실로 무망(誣望)한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분당(分黨)했던 것은 각기 고집하는 바가 있어서였는데, 지금은 오로지 이로움이 있기 때문에 모여서 당이 될 뿐입니다."
하였는데, 이이장이 말하기를,
"세도가 이에 이른 것은 심성진(沈星鎭)이 이조 참의가 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심성진이 감히 당파(黨派)를 세운 사람은 아니지만, 인망(人望)이 가벼운데도 차례를 뛰어넘어 진용(進用)되었기에 항상 사람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정사를 집행함에 있어 〈범위가〉 크면 구간(苟簡)하고 작으면 교묘히 하는 데 손상이 됩니다. 전 판서 김약로(金若魯)와 심성진은 혐의가 있는데, 김약로가 출사하지 않은 것은 대개 심성진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성진은 자처(自處)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녹봉을 유지하고 은총을 보전하려는 계책이 아님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성진을 통의(通擬)하였을 적에 내가 과연 의심하였지만, 그의 사람됨이 인정이 많고 성실하다는 것으로 기용하였다. 그러나 조급하게 다투는 때에는 인정 많고 성실한 것이 일에 매우 방해가 되기도 한다."
하였다. 당시 심성진이 패초(牌招)를 어겨서 이조 참판의 궐원이 있었으므로 대신에게 문의(問議)하여 차출하도록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윤광소가 정우량을 공격하여 흔들었는데, 그것은 대체로 사사로운 원한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이른바 당(黨)을 모았다고 한 것은 정우량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정우량 등이 패한다면 윤광소의 무리가 어찌 그들만 보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심성진을 이조 참의에 통의(通擬)한 것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만족하게 할 수는 없었다. 심성진이 명성과 인망이 본래 부족하다는 것은 성상께서도 아셨으니 그 말이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당연하다."
【태백산사고본】 48책 65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43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사법(司法) / 정론-간쟁(諫諍) / 인사(人事)
사신은 말한다. "윤광소가 정우량을 공격하여 흔들었는데, 그것은 대체로 사사로운 원한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이른바 당(黨)을 모았다고 한 것은 정우량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정우량 등이 패한다면 윤광소의 무리가 어찌 그들만 보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심성진을 이조 참의에 통의(通擬)한 것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만족하게 할 수는 없었다. 심성진이 명성과 인망이 본래 부족하다는 것은 성상께서도 아셨으니 그 말이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당연하다."
나주 목사(羅州牧使) 서명형(徐命珩)이 상소하여 장항포(獐項浦)를 굴착하는 폐단을 성대하게 진달하고, 성명(成命)을 정지하되, 전선(戰船)은 그전대로 죽포(竹浦)의 옛 항구에 매어 두게 하여 한 고을의 고달픈 민정(民情)을 위로해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본주(本州) 삼향면(三鄕面)의 백성들이 수영(水營)에 거짓으로 호소하자, 장문(狀聞)하여 장항포(獐項浦)를 굴착하도록 청하는 데 이르렀으며, 옮겨다 설치하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3월 15일 을사
신만(申晩)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당시 서종급(徐宗伋)을 이조 판서로 삼았는데, 미처 올라오지 않았고, 이조 참의 심성진(沈星鎭)이 탄핵을 당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동궁(東宮)에게 글을 써서 유시하였는데, 이때 동궁의 나이 13세였다. 임금이 밤중에 궁관(宮官) 및 부제학 조명리(趙明履), 예조 참판 김상로(金尙魯)를 불러 하교하기를,
"한밤중에 잠이 오지 않아 생각하니 두렵다. 오늘날의 모든 일이 동궁을 가르치는 것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밤중에 불러서 학문을 권면하는 뜻을 적게 하는 것은 까닭이 있어서이다."
하였다.
승정원에 명하여 형조의 수안(囚案)을 상고하여 죄가 중한 자는 그대로 두고 가벼운 자는 석방하도록 하였는데, 용서받은 자가 40여 명이었다.
서명신(徐命臣)을 동부승지로, 김시찬(金時粲)을 집의로, 조경(趙擎)을 사간으로, 강봉휴(姜鳳休)를 장령으로, 정언유(鄭彦儒)를 헌납으로, 이중조(李重祚)·이응협(李應恊)을 지평으로, 정기안(鄭基安)·윤광찬(尹光纘)을 정언으로, 이익보(李益輔)를 부수찬으로, 김약로(金若魯)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3월 16일 병오
임금이 친히 식년 문과 전시(式年文科殿試)에 나아가 심국현(沈國賢) 등 34명을 뽑았다.
대독관(對讀官)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며칠 전에 동궁에게 《논어(論語)》 주(註)를 진강(進講)하는 일을 가지고 우러러 진달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진강하는 규정을 자주 바꾸는 것은 중대하고 난처하다."
하였다. 독권관(讀券官) 민응수(閔應洙)가 말하기를,
"합쳐진 주(註)가 만약 지리(支離)하다면, 변통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고, 승지 김상적(金尙迪)은 말하기를,
"《논어(論語)》는 대문(大文)을 법강(法講)으로 삼도록 하고, 《통감(通鑑)》은 소대(召對)하게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이는 조명정 한 사람만의 견해가 아니고 여러 신하들의 뜻이 모두 그렇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조복양(趙復陽)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오늘날의 궁관(宮官)은 원량(元良)에게 순종하는 장생(長栍)이 되어 약(略)071) 을 통(通)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원량에게 아첨하는 것이다. 오늘날에 아첨한다면 뒷날에는 어떠하겠는가? 내가 실로 개탄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김상적이 말하기를,
"지금 나이 젊은 궁관이 들어가게 되면 황공(惶恐)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세도(世道)는 원량이 충분히 탄압(彈壓)할 만하지만, 중관(中官)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마음을 만약 신료(臣僚)들에게 옮긴다면, 민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3월 18일 무신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주례(周禮)》 제루장(鞮鞻章)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악공(樂工)은 음악을 결단코 할 수가 없다."
하였는데, 시독관(侍讀官) 윤광소(尹光紹)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오늘날의 악공을 버리시고 어느 곳에서 제루씨(鞮鞻氏)072) 를 얻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언제나 구이(九夷) 가운데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셨는데, 조종(祖宗)께서 물려 주신 백성을 버리고 장차 어디로 가시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기자(箕子)가 동방(東方)으로 오면서부터 야만국이 변해서 문명국이 되었었는데, 지금부터 이 뒤로는 세도가 마침내 점차 사리를 분별할 수 없는 캄캄한 밤중과 같은 지경으로 들어갈 것이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자, 윤광소가 말하기를,
"캄캄한 밤을 혼자서 다시 밝힐 수 없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누가 촛불을 잡을 수 있겠는가? 내가 스스로 잡아야 하겠는가?"
하자, 윤광소가 말하기를,
"촛불을 만약 잘못 잡았다면 어떻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일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말은 마침내는 찌꺼기가 있다."
하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현신(賢臣)을 가까이 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하라고 한 것은 후한(後漢)의 제갈양(諸葛亮)이 사군(嗣君)인 〈후주(後主)에게〉 고한 내용의 글이다. 이 뒤로 신자(臣子)가 만일 혹시라도 이것을 핑계대면서 편당을 만드는 마음을 행하거나 사왕(嗣王)을 현혹시킨다면, 이는 천도(天道)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나이 젊은 신하들은 마땅히 이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노량(露梁)의 육신묘(六臣墓)에 비(碑)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육신묘가 노량에 있었는데, 황폐해져도 손질하지 않았으므로, 지경연사 권적(權𥛚)이 그 사실을 아뢰니, 이 명이 있었다.
동궁(東宮)의 강(講)하는 규정을 고쳐 정하였다. 사시(巳時)에 서연(書筵)에서 《논어(論語)》를 강하되 궁관(宮官)이 모시고 10번 강하고, 신시(申時)에 소대(召對)하여 《소미통감(少微通鑑)》을 강하되 궁관이 모시고 3번 읽게 한다. 날마다 그렇게 하되 시각(時刻)은 아래에서 직접 청하여 그대로 합문(閤門) 밖에 나아가며, 10일이 차면 앞서 배우고 읽은 것을 복습하도록 하였다. 이를 승지로 하여금 써서 궁관에게 주게 하였다.
권적(權𥛚)을 예조 판서로, 조관빈(趙觀彬)을 판돈녕부사로, 이세사(李世師)를 지평으로, 한광조(韓光肇)를 정언으로, 김상철(金尙喆)을 문학으로, 정광제(鄭匡濟)를 우승부지로, 윤동준(尹東浚)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월 19일 기유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동궁이 어탑(御榻) 곁에 시좌(侍坐)하니, 임금이 춘방(春坊)의 상번(上番)·하번(下番)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동궁으로 하여금 《통감(通鑑)》의 총론(總論)을 강하게 하였다.
3월 20일 경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춘방의 상번·하번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새로 강(講)하는 규정을 정하여 이미 연달아 실행하였을 것인데, 원량(元良)이 과연 고무되어 움직이는 뜻이 있는가?"
하자, 보덕(輔德) 조명정(趙明鼎)이 대답하기를,
"외거나 읽는 데 막힘이 없는 것이 그전보다 나은 듯합니다. 또 싫증을 내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날의 어제 강규(御製講規)를 보덕이 써서 춘방(春坊)에다 현판(懸板)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3월 21일 신해
사간 조경(趙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계 현령(新溪縣令) 윤광덕(尹光德)은 심상(沈鋿)이 죽은 뒤에 임명된 지 열흘 남짓 지나지 않았는데, 아객(衙客)을 잡아가두고 장례 행렬을 쫓아 보내었으므로, 도신(道臣)이 듣고서 딱하게 여겨 관리를 보내어 장례를 돌보도록 하고, 아객도 석방하여 보냈다 합니다. 무릇 백성의 상사(喪事)에도 오히려 급히 달려가야 하는데, 서로 교대하는 사이에 핍박하고 위협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와 같이 도리에 어긋나고 망령된 사람을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광덕의 사건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풍문(風聞)은 믿기가 어려우니 잡아다 신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 충청 감사 서종급(徐宗伋)이 임천군(林川郡)의 선조 대왕(宣祖大王) 태실(胎室) 비(碑)의 글자가 깎여서 없어졌다고 임금에게 아뢰자, 임금이 대신에게 물었다. 좌의정 정석오(鄭錫五)가 말하기를,
"비(碑)의 글자가 깎여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중요하게 여겨야 할 바가 있으니, 해조(該曹)에서 복계(覆啓)하기를 기다렸다가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뒤에 예조 참판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앞면에는 묘호(廟號)를 쓰고 뒷면에는 새로 고쳐 세우는 시(時)·월(月)·일(日)을 숭정(崇禎)073) 의 간지(干支)로 쓰고, 그 아래에다 주석(註釋)하기를, ‘햇수가 오래되어 글자가 마멸되었기 때문에 다시 세운다.’고 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언 정기안(鄭基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동궁을 인도하여 깨닫게 하는 책임은 요속(僚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부빈객(右副賓客) 홍상한(洪象漢)은 지체와 재능은 모두 진실로 넉넉하지만, 문식(文識)과 아망(雅望)은 본래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니, 아마도 보도(輔導)를 책임지게 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즉시 체개(遞改)하여 그 선발을 중하게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은대(銀臺)074) 의 직임은 주로 지밀(至密)을 가까이하는데, 승지 정광제(鄭匡濟)는 사람 됨됨이가 거칠고 용렬하며 지망(地望)이 본래 가벼우니 개정(改正)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홍상한을 체임하도록 청한 뜻은 과연 공정한가? 그리고 정광제에 대한 일은 지나치다."
하였다.
장령 강봉휴(姜鳳休)가 상소하기를,
"황해 병사 조호신(趙虎臣)이 성을 쌓는 역사를 핑계대고 오로지 침학(侵虐)하기만 일삼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그리고 전 수사(水使) 이건(李鍵)은 행실이 이미 인륜(人倫)을 손상시켜 살고 있는 고향에서도 버림받았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해 버리소서. 그리고 양천 현령(陽川縣令) 박시진(朴時晋)은 진휼(賑恤)을 이미 아전에게 위임하여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호신의 일은 지나치다. 이건이 이미 윤리를 손상시켰다고 말한다면 잡아다 추문하고, 박시진도 잡아다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형복(鄭亨復)·정이검(鄭履儉)을 승지로, 임정(任珽)을 대사간으로, 김약로(金若魯)를 좌빈객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좌참찬으로, 홍계희(洪啓禧)·남태기(南泰耆)·조명채(曹命采)를 통신 상사(通信上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3월 22일 임자
부수찬 김양택(金陽澤)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을 알 수 있습니다. 두터운 의임(倚任)을 받고 지나친 대우를 받지만, 진실로 그 사람들을 논하면 가장 어질지 못하니, 그 정태(情態)가 가증스럽고 간범(干犯)한 바를 용서하기 어려움은 전하의 영명(英明)함으로 또한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나 안면(顔面)이 이미 친숙해져 비록 멀리 버리고자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는 바가 있고, 비록 죄를 주고 싶어도 차마 하지 못하는 바가 있으니, 이와 같은데도 어떻게 세도(世道)가 진작되고 치도(治道)가 만회되기를 바라겠습니까?
옛날에 나라를 잘 다스린 자는 오직 사람을 기용하는 데 신중히 하였습니다. 제도와 문물(文物)을 비록 혹 찬연하게 모두 안다 하더라도 진실로 사람을 기용하는 데 그 도리를 상실하게 되면, 역시 끝내는 어지럽게 될 뿐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자질로 죽을 죄를 지으며 가만히 전하께서 인재 기용하시는 것을 엿보건대, 그 요령을 터득하지 못하여 재능과 지혜가 있는 자를 구하면 아첨하여 현혹시키기를 잘하는 자가 진출하고, 순박(淳朴)한 사람을 구하면 어리석어 감당하지 못하는 자가 이릅니다. 미관(微官)과 서직(庶職)도 오히려 마땅한 사람을 얻는 것을 귀중하게 여겨야 하겠지만, 보상(輔相)의 중임은 또 특별히 해야 합니다. 지금의 좌의정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전하께서는 마땅한 사람을 얻었다고 여기십니까, 그렇지 못하다고 여기십니까? 말수가 적은 것은 간략(簡略)한 것 같지만 그의 졸렬함을 엄폐하려는 것이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명백한 태도가 없는 것은 겸손하여 양보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비굴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무엇을 취하셔서 모든 관원을 총괄하는 직임에 발탁하여 배치하셨습니까? 제목(除目)이 한 번 나오자 진신(搢紳)과 여대(輿儓)075) 가운데 웃음거리로 전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 이르기를, ‘이 사람이 정승이 되었다고.’고 하였으니, 시사(時事)를 알 만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그의 재능과 기량이 직임을 감당할 만하고 문장[文詞]이 임용할 만하다고 여기신 것입니까? 아니면 지론(持論)이 화평하여 조절하는 정치에 보탬이 될 만하다고 여기신 것입니까?
부서 기회(簿書期會)076) 에 대해서는 만홀하고 살펴서 아는 것이 없어서 서리[胥徒]에게 미루어 위임하고, 공무(公務)의 재결은 단지 정례의 제사(題辭)만 활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당상관에게 의뢰하니 그의 재능과 기량을 알 만하고, 심상한 서독(書牘)이나 차계(箚啓)도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손에 의뢰하고 있으니 그의 문장 또한 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신축년077) 과 임인년078) 의 흉계(凶啓)에 함께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전후로 반복해서 두 사람이 맡아 지었고 명리(名利)가 균등하지 않다는 설(說)과 전관(銓官)을 특별히 임명하도록 주청한 데 이르러서는 더욱 그가 배우지 못하여 식견이 없음을 알 수 있는데, 그래도 지론이 화평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김양택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하문하기를,
"그대의 소장 가운데 윗 부분의 두터운 의임(倚任)을 받고 지나친 대우를 받지만, 간범한 바를 용서하기 어렵고 정태가 가증스럽다고 한 자는 누구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원경하(元景夏)와 박문수(朴文秀)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첨하여 현혹시키기를 잘하는 자와 어리석어 감당하지 못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유엄(柳儼)·심성진(沈星鎭)·이주진(李周鎭)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가 신축년과 임인년의 흉계(凶啓)를 가지고 좌의정을 배척하였는데, 신축년과 임인년의 사건을 그대가 차마 제기하여 말할 수 있는가?"
하였는데, 김양택이 말하기를,
"신의 이 소장은 단지 국가를 걱정하고 세상을 걱정하여 올린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광성 국구(光城國舅)079) 의 집안에 단지 그대 한 사람만 있는데, 어떻게 차마 이런 당습(黨習)을 하는가? 내가 그대를 엄중히 견책하여 찬축(竄逐)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는가마는, 생각하는 바가 많아서 지금은 쫓아내어 지방으로 전보시키려고 한다. 그대는 모름지기 가서 당초에 먹었던 마음을 씻어버리고 다시 와서 나를 섬기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아! 세도(世道)가 날마다 떨어져 온갖 괴변(怪變)이 겹쳐 발생하여 아침에는 남쪽에서 저녁에는 북쪽에서 일어나니, 정신이 착란하여 분간하기 어렵다. 그 가운데 경알(傾軋)하는 글과 의심하여 저지하는 마음이 대부분인데, 이 무리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붙좇는 것은 형세가 본래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그 근본을 바로잡은 후에야 그 말단을 다스릴 수 있고, 가까운 데를 신칙한 후에야 먼 곳을 면려할 수 있는 것인데, 나의 정성이 얕음으로 인하여 성신(誠信)으로 감동시킬 수 없었으므로, 마음에 늘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었다. 그가 이른바 사람을 구차스럽게 논한다면, 가장 어진 바가 없는 자라고 한 것은 바로 윤봉오(尹鳳五)의 남은 문장을 주워 모은 것이고 이게(李垍)의 남은 뜻을 배운 것이며, 아첨하여 현혹시키기를 잘하고 어리석어 감당하지 못하는 자라고 말한 것은 바로 김굉(金硡)과 이석신(李碩臣)을 보좌하는 것이니, 심하다.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고 김양택의 무리가 날마다 공격하고 날마다 진출한다면, 조정에는 완전한 사람이 없어질 것이며, 내가 수십 년 동안 고심(苦心)한 것도 이로 인하여 이지러질 것인데, 하문한 뒤에야 그것을 알았다. 좌의정은 어진 정승의 자손으로 나를 섬긴 지 몇 년이 되었지만, 당습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화목하고 길한 어진 정승이라고 말할 만하다. 두려운 세상에 폐단을 구제하려고 한다면, 이보다 누구를 먼저 버려야 할 것인가? 아! 저 김양택이 그 누구를 속이려는 것인가? 칙려(飭勵)하고자 한다면 이런 사람에게 먼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특별히 산음 현감(山陰縣監)으로 전보시켰다.
삼성 죄인(三省罪人) 정운필(鄭運弼)을 참(斬)하였다. 정운필은 바로 승지 정필녕(鄭必寧)의 서얼 종질(庶孽從姪)이었다. 그의 어미 홍성(洪姓)의 여인이 갑자기 간 곳이 없어졌으므로, 정운필이 그 흔적을 엄폐하려고 발상(發喪)하고 일가에 부음(訃音)을 알렸는데, 그의 어미가 꼭두새벽에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발상했기 때문에, 그 어미로 하여금 방 가운데 누워 있게 한 다음 이불로 덮어 두고 일가의 부물(賻物)로 초상을 치르면서 흙을 담아다 관(棺)에 넣고 거짓으로 빈소(殯所)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그의 적족(嫡族)이 그 연유를 알고 관아에다 고발하자, 발포(發捕)하게 하고 즉시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취초(取招)하니, 지만(遲晩)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3월 23일 계축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좌의정 정석오(鄭錫五)에게 유시하고 함께 오도록 명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정석오가 김양택(金陽澤)이 상소하여 배척한 일로 인해서 과천(果川)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3월 24일 갑인
유신(儒臣)을 소대(召對)하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춘방(春坊)의 상번·하번을 불러 동궁의 강학(講學)에 대한 근만(勤慢)을 하문하였다.
3월 25일 을묘
임금이 새로 과거에 급제한 심국현(沈國賢) 등을 환경전(歡慶殿)에서 인견(引見)하였다.
경기(京畿)의 고양군(高陽郡)에 소가 죽은 새끼를 낳았는데, 몸뚱이 하나에 머리가 둘, 귀가 셋, 눈이 넷이었다.
3월 26일 병진
황해도 신계현(新溪縣)에 이달 초8일에 눈이 내렸었는데, 땅에 쌓인 것이 반 자쯤 되었다.
3월 27일 정사
이종적(李宗迪)을 대사간으로, 홍익삼(洪益三)을 헌납으로, 안윤행(安允行)을 지평으로, 이수관(李壽觀)을 정언으로, 성천주(成天柱)·민백상(閔百祥)을 수찬으로, 김상복(金相福)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3월 28일 무오
부제학 조명리(趙明履)가 상소하여 김양택(金陽澤)을 외직(外職)으로 전보시키도록 한 명을 정지하기를 청하였다.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조명리에게 입시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비록 미관(微官)이나 서료(庶僚)라 하더라도 그 임금이 고심(苦心)하여 칙려(飭勵)하였으면, 어찌 감히 다시 당습(黨習)을 일삼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위가 재상(宰相)의 반열에 있으면서 감히 마음으로 달갑게 여기면서 한쪽의 편을 드니 이것이 당심(黨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고, 특별히 운산 군수(雲山郡守)로 전보시켰다.
3월 29일 기미
어둑새벽에 서리가 내렸다.
임금이 승지를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주서를 좌의정 정석오(鄭錫五)에게 보내어 함께 오도록 명하고 돈독하게 권면하였는데, 내용이 매우 은근하고 진지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돈녕부사 조현명(趙顯命), 우의정 민응수(閔應洙)가 임금이 바야흐로 정섭(靜攝)하는 중이므로 태묘(太廟)의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친행(親行)할 수 없다는 뜻을 누누이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조현명을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경 등은 어찌하여 조상(朝象)이 합심하여 서로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나로 하여금 아무 일을 하지 않고도 저절로 다스려지도록 하지 않는가?"
하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근래에 떠들썩한 것은 참으로 빈 구멍에서 바람이 일어난 것이라고 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형(兄)과 영상 홍치중(洪致中), 좌상 이집(李㙫)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였다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하였다. 민응수가 말하기를,
"듣건대 며칠 전에 김양택(金陽澤)을 처분하였을 때에 천노(天怒)가 두려웠고 성기(聲氣)가 너무 지나쳤다고 하니, 신은 진실로 근심하여 탄식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복택(金福澤)을 한두 가지 문자(文字)로 죽였었기 때문에 내가 후회하였다. 김양택을 처음에는 기장 현감(機張縣監)에 제수하려 하였는데, 차마 풍토병[土疾]을 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산음 현감(山陰縣監)에 옮겨서 임명했을 뿐이다."
하였다.
황단(皇壇)의 의궤(儀軌)가 이루어졌으므로 세장 고취(細仗鼓吹)를 갖추도록 명하고, 향실(香室)에 봉안(奉安)하게 하였다. 대체로 황단의 대향(大享)에 대한 의주(儀註)는 있고 의궤는 없었기 때문에, 예관(禮官)과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찬집(纂輯)하도록 하였는데, 이때적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알려 왔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65권, 영조 23년 1747년 5월 (0) | 2025.09.30 |
|---|---|
| 영조실록65권, 영조 23년 1747년 4월 (0) | 2025.09.30 |
| 영조실록65권, 영조 23년 1747년 2월 (0) | 2025.09.30 |
| 영조실록65권, 영조 23년 1747년 1월 (0) | 2025.09.30 |
| 영조실록64권, 영조 22년 1746년 12월 (0) | 2025.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