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4일 계해
수찬 김상복(金相福)이 상소하여 조명리(趙明履)를 외직에 전보시킨 명을 중지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후에 칙려하게 하였으나, 마치 바람이 귀를 스치며 지나가는 것처럼 여기니, 특별히 그의 관직을 파면하고 그 소장은 돌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정석오(鄭錫五)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양택(金陽澤)이 종이에 가득히 나열한 내용은 모두 신이 평소에 자신의 마음으로 반성하여 많이 병통으로 여겼던 것들이었습니다. 비록 한두 가지 분별할 만한 것이 있으나, 이미 천감(天鑑)으로 굽어 통촉하셨는데, 더욱 어떻게 떠들썩하게 말을 다투어 분변하지 말라는 경계를 범(犯)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구구하게 스스로 마음이 상하는 것은 신으로 하여금 당초에 소심(素心)을 지킬 수 있게 하여 헤아린 뒤에 들어오게 하였더라면, 반드시 어진 이를 방해하여 일을 그르친 죄를 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뒤에 분수를 헤아려 자신을 단속하고 어려움을 알고서 중지하였더라면, 반드시 오늘날의 낭패(狼狽)를 당하는 근심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차자가 들어가자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위로하여 유시하였다. 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유시하여 즉시 일어나서 함께 돕도록 권면하였다.
4월 5일 갑자
임금이 예조 판서 권적(權𥛚)과 예조 참판 김상로(金尙魯)를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모든 제향(祭享)에 난도(鑾刀)로 희생(犧牲)을 자르고 축사(祝史)가 모혈(毛血)을 취(取)하는데, 이 예(禮)가 정말 《오례의(五禮儀)》에 기재되어 있는가?"
하자, 김상로가 말하기를,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난도는 우리 조정에서 당초에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중간에 폐지하였었다. 제향에는 희생이 중대하니 솥에다 채우고 찬만(饌幔)에 나아가 갑(匣)에다 채운다. 이미 옛날의 예를 회복시켰으니 사관(祀官)이 재인(宰人)080) 을 거느리고 난도로 희생을 베게 하며, 축사는 각기 반(盤)으로 모혈을 취하기를 이번 대향(大享) 때부터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친경(親耕)하고 관예(觀刈)하는 것은 자성(粢盛)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이다. 친행(親行)하는 여부(與否)를 세수(歲首)에 품정(稟定)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7일 병인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망묘례(望廟禮)를 행하였다. 그리고 묘내(廟內)를 봉심(奉審)하고 성기위(省器位)에 나아가 세척(洗滌)하는 것을 살폈으며, 미시(未時)에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희생을 살폈다. 지금부터 친향(親享)의 경우에는 《주례(周禮)》를 준용하여 대종백(大宗伯)081) 으로 하여금 정확(鼎穫)을 보살피게 하고, 섭향(攝享)의 경우에는 《오례의(五禮儀)》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을 법령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4월 8일 정묘
4경(更)에 임금이 면복을 갖추고 대향(大享)을 의식대로 친행(親行)하였다.
4월 9일 무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 그리고 세 통신사(通信使)를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통신사가 사용하는 예단(禮單) 중의 문단(紋緞)과 금선(金線)은 우리 나라에서 이미 금지하고 있으니, 예단을 다른 주단(紬緞)으로 바꾸어 봉(封)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자, 영돈녕부사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혹시라도 금법(禁法)이 해이해질까 염려하시어 문단과 금선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시는데, 다만 왜인(倭人)은 교활하여 아마도 사단을 일으킬 염려가 있을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민응수(閔應洙)는 말하기를,
"왜인들은 마음이 교활하고 사악하므로, 틀림없이 약조(約條)를 가지고 다투며 고집할 것이니 어찌 민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는 원수(元數)가 많지 않으니, 이번에는 전례대로 지급하게 하고, 이 뒤로는 중국에 무역한 숫자를 계산해서 참작하여 정한다면, 지나친 무역과 금법이 해이해질 염려는 없을 듯합니다."
하고, 원경하(元景夏)는 말하기를,
"지금 예단 때문에 다시 무역해 온다는 것은 너무나 구차스러운 데 관계됩니다."
하고, 홍계희(洪啓禧)는 말하기를,
"왜인에게는 신의(信義)로 책망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신의가 돼지와 물고기에 미쳤다082) 는 말이 있다. 왜인이 비록 교활하기는 하지만 돼지와 물고기와는 다를 듯하다."
하였다.
4월 10일 기사
함경도 삼수(三水)·갑산(甲山) 두 고을에 매일 계속해서 눈이 내렸다.
4월 14일 계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별고미(別庫米)는 곡상(斛上)으로 3승(升) 외에는 절대로 지나치게 받아들이지 말도록 엄중히 경계하여 백성들의 폐단을 없애주도록 하였는데, 우의정 민응수(閔應洙)가 청한 바를 따른 것이었다.
4월 16일 을해
달이 심성(心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도성(都城)을 수비하는 홀기(笏記)를 열람하고, 한성부에 명하여 매번 식년(式年)마다 한결같이 대·중·소의 호수(戶數)에 따라 대호(大戶)는 3명, 중호(中戶)는 2명, 소호(小戶)는 1명으로 정하고, 인구(人口)와 명수(名數)를 총괄해서 기록하여 성책(成冊)하고 시기에 임하여 도성을 수비하는 계책을 삼도록 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북경(北京)에서 보내온 필단(疋緞)을 금군청(禁軍廳)에 내려 주고, 칠번 금군(七番禁軍)083) 의 군복(軍服) 및 전대(戰帶)·요대(腰帶)를 나누어 만들게 하였다.
4월 17일 병자
임금이 선혜청(宣惠廳)의 갑주미(甲胄米) 1년 조(條)를 삼군문(三軍門)에 내려주고, 그것으로 포루(鋪樓)와 포기(鋪器)의 경비(經費)에 보태어 쓰도록 하였다.
김상익(金尙翼)을 대사간으로, 이위보(李渭輔)를 집의로, 홍득후(洪得厚)를 장령으로, 여선응(呂善應)을 지평으로, 이명희(李命熙)를 정언으로, 조명정(趙明鼎)·오언유(吳彦儒)를 부교리로, 이이장(李彝章)·이세사(李世師)를 부수찬으로, 황합(黃柙)을 수찬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승지로 삼았다.
4월 20일 기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임진년084) 에 의주(義州)로 향했던 것은 명나라로 갈 뜻이 있었지만, 갑자년085) 〈이괄(李适)의 난 때에〉 공주(公州)로 행했던 것은 장차 어디로 가려는 것이었는가? 우리 나라에서 성(城)을 지킬 만한 곳은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불과하다. 그러나 석두성(石頭城)086) 의 험처(險處)로써도 강중(江中)에 쇠사슬을 걸어놓고 적이 건너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고, 촉도(蜀道)087) 의 험처로써도 적이 모전으로 싸서 내려 보내는데는 어쩔 수 없으니, 이는 덕(德)을 베푸는 데 달려 있고 요해처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반드시 나의 도성을 수호하려는 계책을 오활(迂闊)하다고 여기겠지만, 나는 위로 종묘 사직을 위하고 아래로 군사와 백성을 위해야 하는데, 만약 불행한 일이 있을 경우 이곳을 버리고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묘(墓)를 수치(修治)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지금 김일호(金一豪) 등의 비지(碑誌) 인본(印本)을 보건대, 그것이 경순왕의 묘임을 의심할 것이 없다. 1천 년 가까이 된 후 오늘날에 찾게 되었으니 기이하다고 말할 만하다. 전대의 다른 능(陵)과 비교하여 사면(事面)이 더욱 중대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관심을 가지고 수치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미 치제(致祭)하였으니 비석(碑石)을 세울 때에 역군(役軍) 또한 돌보아 돕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보다 앞서 그의 자손이 진소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4월 22일 신사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동궁에게 시좌(侍坐)하도록 명하고, 춘방(春坊)의 상번·하번도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동궁에게 《통감(通鑑)》을 읽도록 명하였는데,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읽던 글 가운데 천황씨(天皇氏)부터 진 시황(秦始皇)까지 그 사이에 누가 성군(聖君)이었느냐?"
하자, 동궁이 아뢰기를,
"요(堯)·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우연히 네가 볍씨의 파종하는 것을 보았을 것인데 만물 가운데 파종할 만한 것이 많다. 네가 볍씨의 파종하는 것을 보고 어떤 의미를 취하였느냐?"
하자, 동궁이 말하기를,
"그것이 곡식이기 때문에 결실하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볍씨에게 적합한 것은 물이다. 만약 물기가 없이 건조한 땅에다 파종하면 어떻게 그것이 결실하기를 바라겠는가? 인재를 기용하는 것으로 비유하건대, 임용하였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스러우면 임용하지 않아야 하니, 물이 있는 땅에다 벼를 파종하는 것과 같아서 그 결실의 성효(成效)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잘 임용하지 못하고 임용하고서 또 참소하는 말로 인해 이간 당하면, 도리어 그 정성을 다하고 그 재능을 다할 수 없을 것이니, 벼를 건조한 땅에 심어 결실할 수 없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리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비유하건대, 너의 요속(僚屬)이 충성스런 말과 곧은 논의를 날마다 너에게 올리더라도 네가 간혹 들어주기를 아득하게 한다면, 뒷날 간언을 거절하는 근본이 실제로 여기에서 기인할 것이니, 벼를 건조한 땅에 심어 저절로 시들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모름지기 벼를 파종하는 마음에 미루어 읽고 배우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또 춘방으로 하여금 권면하고 경계하는 내용을 미루고 넓혀 원량(元良)에게 써서 올려 아침 저녁으로 살피고 열람하는 데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광익(李光瀷)을 지평으로, 황재(黃梓)를 부제학으로, 조재덕(趙載德)을 교리로, 남유용(南有容)을 보덕으로 삼았다.
4월 24일 계미
교정청(校正廳)의 당상관과 낭청 이하에게 차등이 있게 상을 주었는데, 《어첩보략(御牒譜略)》을 감독한 노고 때문이었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또 동궁에게 시좌(侍坐)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시냇가에서,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는구나.’ 한 데 대하여 무엇을 취하였는가?"
하자, 동궁이 아뢰기를,
"쉬지 않는 뜻입니다."
하였다. 그때 뻐꾸기가 금원(禁苑)에서 울었는데, 임금이 그 소리를 듣고 동궁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새가 비록 미물(微物)이라 하나, 봄이 되어 우는 것은 그의 직분이기 때문이다. 봄 이후로 울지 않는 때가 없으니, 너의 학문(學問) 또한 너의 직분인데, 어찌 간단(間斷)하는 때가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새를 가지고 비유하였으니, 그 의미가 절실하다. 너는 그것을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5일 갑신
주강을 행하였다. 어의(御醫)를 보내어 좌참찬 박필주(朴弼周)의 병을 간호하게 하고, 호조로 하여금 식물(食物)로 돌보아 돕도록 하였다.
송익보(宋翼輔)를 대사간으로, 윤지태(尹志泰)를 사간으로, 유우기(兪宇基)를 집의로, 안식(安栻)·김한운(金翰運)을 장령으로, 정언유(鄭彦儒)를 헌납으로, 유언국(兪彦國)·홍서(洪曙)를 지평으로, 박홍준(朴弘儁)·이성억(李聖檍)을 정언으로, 홍우한(洪羽漢)을 교리로, 홍중효(洪重孝)를 수찬으로, 한광회(韓光會)를 부수찬으로, 김시찬(金時粲)을 필선으로 삼았다.
4월 26일 을유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8일 정해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부수찬 한광회(韓光會)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홍득후(洪得厚)에 대한 처치(處置)는 대체로 동료의 의논을 채택하여 한 것으로, 신 혼자만의 견해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때가 지나고 사건이 오래된 뒤에 갑자기 노여움을 옮겨 공공연히 멋대로 헐뜯고 무함하기를 마치 관계가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신이 어떻게 차마 끌어다 비교하겠습니까? 오직 자취를 감추어 활동을 멈추고 자정(自靖)하기만을 도모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이보다 앞서 정언 유건(柳謇)이 〈한광회가〉 전관(銓官)에게 아첨하여 언관(言官)을 논박하여 체임시켰다는 것으로 상소하여 배척하였기 때문에, 한광회가 상소하여 인책(引責)한 것이었다.
장령 안식(安栻)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장흥 부사(長興府使) 민광우(閔光遇)는 외람되게 청현직(淸顯職)에 올라 오로지 아첨하기만 일삼았는데, 더구나 이러한 흉년에 자목지임(字牧之任)에 배치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리고 충청 수사(忠淸水使) 유형(柳瀅)은 돌을 깎고 재목을 모아서 사사로이 뇌물거리를 장만하였고, 혐의로 인하여 중곤(重棍)을 사용하다가 억울하게 인명(人命)을 살해하였으니, 청컨대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민광우는 부임하여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터이니, 아무리 탐욕스럽다 하더라도 어느 겨를에 미치겠는가? 그리고 유형은 잡아다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9일 무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또 소대를 행하였다.
정언 박홍준(朴弘儁)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일찍이 벼슬을 조급하게 다투는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사국(史局)088) 과 전랑(銓郞)의 구례(舊例)를 혁파하여 다투는 바가 없게 하셨으나, 옥서(玉署)089) 를 청환(淸宦)으로 여기면 옥서를 대상으로 다투고, 문임(文任)090) 을 화직(華職)으로 여기면 문임을 대상으로 다툴 것이니, 전하께서 또 앞으로 무슨 술책으로 구제하려 하십니까? 신이 일찍이 전배(前輩)의 유풍(遺風)을 듣건대, 대체로 선비는 행의(行誼)를 앞세우고 문예(文藝)를 뒤로 미루며, 명절(名節)을 숭상하고 공리(功利)를 물리친다고 하였는데, 요즈음 행의와 명절은 고요하여 들리는 것이 없습니다. 과거 공부는 익히지 않고서도 특별히 과거에 합격하는 자가 대부분인데, 심한 자는 몰래 교묘하게 그 길을 뚫으려 하여 이를 이루지 못하면 쉬지 않으며, 이미 얻은 뒤에는 청관(淸官)과 미직(美職) 보기를 본래 소유하고 있는 것같이 여기니, 선비의 신분으로 이와 같이 한다면 그가 출세한 뒤에 볼 만한 것이 없음은 해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아! 전하의 영토에서 생산된 것이라면 어느 것인들 유정지공(惟正之供)이 아니겠습니까마는, 궁방(宮房)의 전결(田結)에 이르러서는 더 거둬들이는 사사로움이 없지 않으며, 전하의 조정에 벼슬하는 자이면 누군들 충성스런 인사가 되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유독 종척(宗戚)의 족속(族屬)에 대하여 치우치게 총애하는 사사로움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관(小官)이 대관(大官)을 논하는 경우 대관은 아무 일이 없고 소관은 죄를 받게 되는데, 어찌 대관은 모두 죄가 없고 소관은 모두 무상(無狀)하다는 것입니까? 지난번 유신(儒臣)이 한 사람의 정승을 논하였다가 〈외직(外職)으로〉 쫓겨나 전보되는 데 이르렀습니다. 전하께서 배치한 정승이 과연 마땅한 사람을 얻은 것인데도 유신이 그것을 배척하였다면 내쫓는 것이 옳겠지만, 지금 이 상신이 보상(輔相)할 인재가 되는지 알지 못하겠으니, 유신이 논한 바가 도리어 무슨 죄입니까?"
하였다.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박홍준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그로 하여금 그 소장을 읽게 하였다. 임금이 옥당(玉堂)·전임(銓任)·문임(文任) 등의 말에 대하여 지적(指的)하는 자가 있느냐고 하문하자 전체적으로 논하였다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종척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김상복(金相福)과 이익정(李益炡)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좌의정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좌의정은 매사에 모른다는 것으로 말을 하는데, 만약 과연 모른다면 이는 그에게서 취할 바가 없는 것이고, 만약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면 이는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니, 반드시 이 가운데 하나에 해당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양택(金陽澤)을 위하여 이렇게 속여서 아첨하는 태도를 짓는 것인가?"
하고, 인해서 내쫓아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전보하였다.
임금이 내섬시(內贍寺)의 당상관과 낭청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본시(本寺)에서 권초(捲草)091) 를 어느 대(代)부터 시작하였는가?"
하자, 낭청 이명오(李明吾)가 말하기를,
"남자의 권초는 내자시(內資寺)에 봉안(奉安)하고, 여자의 권초는 내섬시에 봉안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기부(肌膚)를 친히 권초에서 받으니,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듣건대 미고(米庫)에다 간직해 두었다고 하는데, 해가 오래 되어 썩어서 벌레가 생길까 염려스럽다. 밤중에 생각하니 두려워짐을 깨닫지 못하겠다. 미고 가운데 한 칸에다 한 개의 시렁을 만들어 봉안하되, 이 뒤로 권초는 구례(舊例)대로 으레 내자시와 내섬시에 안치하도록 하라. 다만 3일 뒤에 태어난 방(房)에 보내되, 만약 곤전(坤殿)이나 빈궁(嬪宮)에 관계될 경우에는 관장하는 궁(宮)에 보내도록 하라."
하고, 또 제조(提調) 김상로(金尙魯)에게 하교하기를,
"원량(元良)의 권초는 경(卿)이 호조 판서와 함께 모여서 봉안에 관한 일을 상세히 서계(書啓)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뒤에 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의 주달(奏達)로 인하여 권초함(捲草函)을 내자루(內資樓) 안에 깨끗이 청소한 다음 칠을 다시 하여 차례대로 봉안하되, 유둔(油芚)으로 집을 만들어 덮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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