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경인
임금이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당시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총융청(摠戎廳)에 옮겨서 소속시켜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으므로, 비국 당상인 김시형(金始炯)·김상성(金尙星)·정익하(鄭益河)·김상로(金尙魯)를 구관 당상(句管堂上)으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강확(講確)하게 하였다.
도기과(到記科)를 베풀어 수석(首席)을 차지한 진사(進士) 김서응(金瑞應)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092) 하도록 명하였다.
5월 2일 신묘
임금이 친히 전강(殿講)093) 에 나아가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모경관(牟景觀)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5월 3일 임진
성천(成川)·상원(祥原)·이산(理山) 등 세 고을에 지난 달 13일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계란만하고, 작은 것은 새알만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사면(辭免)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위로하여 유시하였다.
우참찬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식물(食物)을 내려 주도록 한 명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수서로 답하였다.
5월 4일 계사
유성(流星)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부사직 원경하(元景夏)를 상소하기를,
"쇄마 구인(刷馬驅人) 82인이 심양(瀋陽)의 감옥에 갇혀 있는데, 거의 미처 듣지 못했으며, 통관(通官)이 불려간 뒤로 소식 또한 묘연합니다. 만부(灣府)에 분부하여 훈역(訓譯)을 봉황성(鳳凰城)에 들여 보내어 통관이 되돌아오는가를 상세히 탐지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별자(別咨)를 보내어 말을 사들인 일로 불화가 생기도록 한 데 대하여 사과하게 한다면, 피중(彼中)의 동정(動靜)도 더러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지금 원경하의 소장을 살펴보건대, 별자(別咨)가 있어야 적당하겠다고 하니, 뒷날 비국 당상이 일제히 모여서 상확(商確)하여 품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5월 5일 갑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려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명을 기다리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답하고, 지신사(知申事)를 보내어 함께 오도록 하였다.
5월 6일 을미
평안도 내에 전염병과 소의 전염병이 일시에 치성(熾盛)하여 죽은 사람과 소가 매우 많았다.
총융청(摠戎廳)의 북한 구관 당상(北漢句管堂上) 김시형(金始炯) 등이 입시하였다. 경리청(經理廳)을 혁파하고 총융청을 탕춘대(蕩春臺)로 옮기되 종사관(從事官) 1원(員)을 출사하게 하고, 총융사(摠戎使)는 훈련원(訓鍊院)과 어영청(御營廳) 두 군영의 예에 의하여 겸하도록 하였는데, 비국 당상이 그전에 비하여 체모가 중대해졌기 때문이었다.
5월 8일 정유
임금이 동궁으로 하여금 시좌(侍坐)하게 하였다. 궁관(宮官)을 불러 입시(入侍)하게 한 다음 《논어(論語)》를 강독(講讀)하도록 하고, 궁관에게 각각 녹비(鹿皮) 1영(領)을 내려 주었으며, 친히 훈계하는 글을 지어 세자에게 내려 주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올해는 바로 목묘(穆廟)094) 께서 왕위에 오르신 해이며, 오늘은 우리 성조(聖祖)의 휘일(諱日)095) 이다. 아! 목묘께서는 번저(藩邸)에서 강릉(康陵)096) 의 뒤를 계승하여 영구히 큰 공렬을 전하셨고, 우리 성조께서는 발란 반정(撥亂反正)097) 하여 의리를 당세에 세우셔서 후손들에게 오늘날까지 여유있는 도리를 전하셨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창업(創業)하기는 쉽고 수성(守成)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만약 창업과 중흥(中興)의 난이(難易)함을 알려고 한다면 어찌 삼대(三代)와 한(漢)·당(唐)·송(宋)의 연혁(沿革)이 있지 않겠으며, 만약 스스로 힘쓰려고 한다면 학문(學問)을 버리고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이것이 내가 오늘 너에게 시좌(侍坐)하도록 명하여 개강(開講)하게 한 것이며, 바로 또한 평상시의 훈계를 자료로 모아 자신의 의견을 서술하게 하려는 뜻이다. 아! 네가 과연 앞으로 학문을 잘 진취하여 나로 하여금 즐겁게 한다면, 어찌 나만 즐거울 뿐이겠는가? 하늘에서 오르내리시는 선대왕의 영령이 반드시 위에서 기뻐하실 것이고 우리 나라의 백성들도 바라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전철(前轍)이 수없이 많고 은감(殷鑑)이 가까운 곳에 있으니,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으며,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네가 두렵게 여기고 경계해야 할 것도 오직 학문에 달려 있다. 옛사람도 말하기를,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실행하기가 어렵다.’고 하였으니, 바로 너를 위해 한 말이다. 아! 원량(元良)은 더욱 힘쓰도록 하라. 옥루(屋漏)가 곁에 있어도 요속(僚屬)이 옆에 있는데, 동정(動靜)을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는가? 더욱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홍중일(洪重一)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구 관백(關白)의 예단(禮單)에 대한 일을 가지고 다투어 고집합니다."
하니, 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 예조 참판 김상로(金尙魯), 통신사 홍계희(洪啓禧) 등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강확(講確)하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의논은 그런 일은 전례가 없으니 허락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임금의 뜻은 구 관백이 비록 관백의 지위는 사임하였지만 30년 동안 통신(通信)한 의리에 있어서 예단이 없을 수 없고, 또 이로 인하여 불화가 생길 염려가 없지 않다고 여겨 그것을 허락하려고 하였는데, 의논을 결정하지 못하고 파(罷)하였다.
5월 11일 경자
이덕중(李德重)을 이조 참의로, 심성희(沈聖希)를 대사헌으로, 최규태(崔逵泰)를 장령으로, 이세사(李世師)를 정언으로, 홍익삼(洪翼三)을 교리로, 이이장(李彝章)을 수찬으로, 김상철(金尙喆)을 부수찬으로, 이위보(李渭輔)를 집의로, 권상일(權相一)을 사간으로, 이중조(李重祚)를 지평으로, 유만중(柳萬重)을 승지로, 조영로(趙榮魯)를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5월 12일 신축
부수찬 이세사(李世師)가 상소하여 진계하고, 말미에 진달하기를,
"영남(嶺南)의 일곱 고을 전세(田稅)를 충원(忠原)에 실어다 바치고 경창(京倉)에 수운(水運)하는 것은 바로 바꿀 수 없는 정해진 법입니다. 그런데 만약 작전(作錢)098) 하도록 한다면, 탐욕스런 수령과 간교한 서리가 그 나머지를 챙길 터이니 아래에서 덜어서 위에 보탤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지난해에 조정에서 이 폐단을 염려하여 이미 작전을 영구히 정지시키도록 한 성명(成命)이 있는데, 금년 봄에 일곱 고을의 쌀과 콩을 또 작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영남은 두 해 동안 흉년이 든 나머지인데 또한 어떻게 장만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일곱 고을에 작전하도록 한 명을 정지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마땅히 유념하겠다. 그리고 영남의 쌀을 작전하도록 한 일은 마땅히 하문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통신사 홍계희(洪啓禧) 등이 청대(請對)하고, 동래(東萊)에서 잔치를 베푸는 것은 전례대로 하되, 충주(忠州)·안동(安東)·경주(慶州) 세 고을에서 베푸는 잔치는 아울러 정지하고 줄이도록 하였다.
임금이 소대에 나아갔다. 검토관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주옥(珠玉)과 금수(金繡)를 불태웠는데, 바로 개원(開元)099) 2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4년에 이르러서는 남해(南海)에 가서 주취(珠翠)를 구하게 한 일이 있었으므로,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논평하기를, ‘시초가 있지 않음이 없지만 끝마무리를 잘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문단(紋緞)을 금지하게 하신 한 가지 절차는 즉위하신 뒤의 첫번째 정사(政事)로서, 이를 시행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여항(閭巷)에서의 길흉(吉凶) 등 예(禮)에 실질적인 성과가 매우 많았습니다. 일의 끝맺음과 시작은 오직 마음에 두고서 지키느냐 버리느냐에 달려 있으니, 원하건대 더욱 성의(誠意)를 돈독히 하여 견지하시고 흔들리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진달한 바는 절실하여 감동이 됨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겠다."
하였다. 김상철이 또 말하기를,
"국가에서 정승을 배치하였으면 마땅히 한 마음으로 위임(委任)하여야 하는데, 근래에 묘당과 국가의 계책에 중신(重臣)과 재신(宰臣)에게 참여하여 강확(講確)하게 하는 일이 많고, 대신이 가끔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비록 우연히 그렇다 하더라도 국체(國體)에 있어서 끝내는 미안(未安)한 데 관계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엄우(嚴瑀)를 승지로, 유우기(兪宇基)를 보덕으로 삼았다.
5월 13일 임인
달이 방성(房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인군(人君)은 정사를 들을 때 마땅히 정전(正殿)에서 해야 하는데, 전하께서는 요즈음 크고 작은 인접(引接) 및 유신(儒臣)의 전강(殿講)도 모두 환경전(歡慶殿)에서 하시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원량(元良)이 거처하는 곳과 서로 가깝다는 것을 취하였으나, 진달한 바가 옳다. 이 뒤로 일차(日次) 및 법강(法講)은 희정당(熙政堂)에서 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5월 14일 계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권일형(權一衡), 감진 어사(監賑御史) 임박(任璞), 가도사(假都事) 성범석(成範錫)을 아울러 먼저 파면한 뒤에 잡아 오게 하고, 감사(監司) 이기진(李箕鎭)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는데, 의주의 문시(門市)100) 에 관한 일 때문이었다.
별도로 재자관(䝴咨官)을 정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는데, 원경하(元景夏)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심양(瀋陽)의 장수가 목책을 물리자는 의논을 주장한다는 것을 듣고 북경(北京)에 이자(移咨)하니, 청나라 황제가 정지하도록 명하였는데, 심양의 장수가 이 때문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번 사행(使行)이 돌아올 때에 달마(撻馬) 12필(匹)이 책문(柵門)에서 붙잡히고 의주의 쇄마 구인(刷馬驅人)들이 심양에서 체포되어 옥에 갇혔는데, 그것은 대체로 심양의 장수가 문어사(門御史)에게 지휘하여 형찰(詗察)해서 붙잡도록 하여 반드시 우리 나라에 대하여 불화를 일으키려고 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었다.
5월 15일 갑진
좌의정 정석오(鄭錫五)가 상소하여 면직되기를 바라니,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이종적(李宗迪)을 대사간으로, 최익수(崔益秀)를 장령으로, 이응협(李應協)을 지평으로, 조재민(趙載敏)을 수찬으로, 김시찬(金時粲)을 응교로 삼았다.
5월 16일 을사
임금이 빈양문(賓陽門)에 나아가 선농단(先農壇)의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승여(乘輿)를 따라 나가 동정(東庭)에서 지영(祗迎)하였는데, 향을 지영하는 일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5월 17일 병오
임금이 동적전(東籍田)에 나아가 관예(觀刈)하였다.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친히 대(臺) 위에 나아가자, 예의사(禮儀使) 권적(權𥛚)이 부복(俯伏)하여 관예하기를 주청하였다. 적전령(籍田令) 윤동하(尹東夏)가 동계(東階)에서부터 올라와 꿇어앉아 보리 베기를 주청하니, 독시관(督視官) 2원(員)이 서인(庶人)으로 청의(靑衣)와 청건(靑巾)을 착용한 자 40인을 인솔하여 각기 기계(器械)를 잡고 동·서로 나누어 밭 이랑으로 들어가 차례로 두 사람이 나란히 베었는데, 독시관이 동·서에서 서로 향하여 서면 음악이 연주되고, 베기를 마치면 음악이 그쳤다. 임금이 자성(粢盛)에 관한 일은 소중하다고 하여 어탑에서 내려와 앉으니, 봉상시 정(奉常寺正) 이도석(李度錫)이 대나무로 만든 상자에다 보리를 담아 꿇어앉아 경적사(耕籍使) 김시형(金始炯)에게 주고, 김시형이 동계(東階)에서부터 올라가 대(臺) 위로 나아가 꿇어앉아 도승지 홍상한(洪象漢)에게 주자, 홍상한이 꿇어앉아 안상(案上)에 올려 놓았다. 임금이 손으로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잘 익었다."
하자, 예의사가 부복하여 말하기를,
"태상(太常)101) 에 간직하게 하여 자성(粢盛)에 대비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홍상한이 받들고 물러났다. 예의사가 아뢰기를,
"베기를 마쳤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매우 성대한 거사이다. 그 근본이 세 가지가 있으니 자성(粢盛)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농사를 근본으로 삼는 것과 기로(耆老)를 공경하는 것이다."
하였다. 경적사가 동계에서부터 올라가 서쪽을 향하여 서자, 기민(耆民) 40인이 청의(靑衣)와 청건(靑巾)을 갖추고 대(臺) 아래로 나아가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였다. 주찬(酒饌)을 하사하여 위로하도록 명하고, 동·서로 벌려서 기민(耆民)과 서인(庶人)을 인도해서 겹줄로 앉게 하였는데, 한 줄에 20인씩이었다. 좌통례(左通禮)가 뜰 위에 서서 선교(宣敎)하기를,
"기민(耆民)을 공경하고 위로하라."
하자, 기민이 네 번 절하였다. 예의사가 의식이 끝났음을 아뢰자, 기민에게 각기 한 자급을 더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몸소 베고 수확하는 것을 관람한 것은 가뭄을 민망하게 여기는 마음이 바야흐로 안정이 되지 않아서이니, 승정원에서 이 뜻을 가지고 팔도의 방백(方伯)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하유(下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어가(御駕)가 돌아올 때에 관왕묘(關王廟)에 들렀다.
5월 18일 정미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가지고 입시하도록 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친경(親耕)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보고 한 것이고, 관예(觀刈)는 의리를 상기시켜 한 것이었는데, 마침 명(明)나라 조정의 고사(故事)와 서로 부합이 되니, 더욱 서글픈 마음 간절하다. 이번 선농단(先農壇)의 제사 때에 친행(親行)하려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매우 힘써 간하여 비록 섭행(攝行)하도록 명하였으나, 마음은 편안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밤에 의복을 단정하게 입고 앉아서 기필코 밤을 지새우려고 하였었다. 내가 일경(一更) 동안 앉아 있으면 나의 일경 동안의 정성을 펴는 것인데, 기력을 감당할 수 없어 마침내 잠자리에 들고 말았으니, 나의 원기가 그전만 못함을 알 수 있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옛사람은 비가 내리기를 마음속으로 구하였으니, 비가 내리고 내리지 않는 것은 단지 정성이 있고 없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하자, 부수찬 조재민(趙載敏)이 말하기를,
"한 번 마음을 먹기에 따라 경성(景星)이 나타나기도 하고 경운(慶雲)이 일어나기도 하니, 성상의 하교가 정말 그러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성품이 조급하여 이틀 동안 비가 내리면 장마가 진 것이라고 생각하여 반드시 곡식을 손상시킬 것이라고 우려하니, 하늘이 어찌 난처하지 않겠는가?"
하자,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임금은 백성에 대해 역시 하늘과 같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정사나 한 가지 명령이 조금이라도 백성에게 해로움이 있으면, 백성들이 임금을 원망하기를 자식이 아비를 원망하는 것처럼 합니다. 그러나 인군(人君)으로 하여금 하늘이 만물을 길러 자라게 하는 법을 본받아 비가 내리고 볕이 나는 것을 순조롭게 한다면 무슨 원망이 있겠습니까?"
하고, 조재민은 말하기를,
"하늘의 역할을 하고 임금의 역할을 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어제 관예(觀刈)하던 마음과 오늘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정성을 정사(政事)에 미루어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다.
김상성(金尙星)을 대사헌으로, 윤광소(尹光紹)를 필선으로, 신회(申晦)를 문학으로, 이태중(李台重)을 동래 부사로 삼았다.
5월 19일 무신
임금이 약방(藥房)의 세 제조(提調)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당시에 임금이 여러 날 근로(勤勞)한데다가 밤에 또 새벽까지 사대(賜對)하여 옥후(玉候)가 불편하였으므로, 도제조 조현명(趙顯命)이 직숙(直宿)과 정후(庭候)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동조(東朝)에 염려를 끼칠까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아니하고, 변방의 실정과 민사(民事) 외에 급하지 않은 것은 모두 승정원에 보류하도록 명하였다.
5월 20일 기유
약방(藥房)에서 또 입진(入診)하였다. 제조 원경하(元景夏)가 직숙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단지 의관(醫官) 1인만 직숙하도록 명하였다. 이날 조정에서 기거례(起居禮)를 행하려 하였는데,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선농단(先農壇)의 헌관(獻官)과 집사(執事) 그리고 관예(觀刈) 때의 예의사(禮儀使) 이하에게 친경(親耕)의 예에 의거하여 아울러 차등있게 상(賞)을 주도록 명하였다.
홍중징(洪重徵)·정광제(鄭匡濟)를 승지로, 민계(閔堦)를 집의로, 이형만(李衡萬)·이명희(李命熙)를 지평으로, 한광회(韓光會)를 교리로, 이태상(李泰祥)을 전라 좌수사로, 구선행(具善行)을 충청 수사로, 김몽규(金夢煃)를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유신에게 《자성편(自省編)》을 읽도록 명하였다.
기우제(祈雨祭)를 설행하도록 명하였다.
5월 21일 경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의 강학(講學)에 대해 도제거(都提擧)가 진달한 것으로 인하여 문왕(文王)이 세자로 있으면서 시탕(侍湯)한 의리를 가지고 석강(夕講)을 줄이도록 명하였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건대, 문왕이 비록 시탕하였지만 본래 저절로 성인(聖人)이었으므로 강학은 그 가운데 있었으나, 평범한 사람 이하가 어찌 감히 바라겠는가? 원량(元良)이 강학하고 강학하지 않는 것은 관계됨이 작지 않다. 비록 조석(朝夕)으로 개강(開講)한다 하더라도 하루 세 번 조회하는 겨를이 저절로 있으니, 전례대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2일 신해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유신(儒臣)에게 《자성편(自省編)》을 읽도록 명하였다.
5월 23일 임자
김우태(金遇兌)를 제주목(濟州牧)에다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약방 제조 원경하(元景夏)가 김우태는 이익을 탐하기로 이름이 났고 남북(南北)의 백성들이 해를 당한 것이 가장 심하다고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5월 24일 계축
임금이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금오(金吾)와 전옥(典獄)의 죄가 가벼운 죄수를 관대히 처결하여 석방하도록 하였는데, 가뭄을 근심한 까닭이었다. 하교하기를,
"우리 조정에서 유학[儒術]을 천양(闡揚)하여 이단(異端)의 부류를 크게 물리쳤으니, 이것이 우리 나라가 우리 나라답게 된 까닭이다. 아! 음사(淫祠)의 부류는 어찌 이단에 비교할 뿐이겠는가? 내가 젊어서 《소학(小學)》을 강독하였는데, 아직도 안씨(顔氏)의 교훈에 무격(巫覡)과 부장(符章)을 언어(言語)에서 단절시킨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안씨도 오히려 그렇게 하였는데, 하물며 인군(人君)이겠는가? 세상을 현혹시키고 뭇사람들을 속이며 백성들의 재물을 고갈(枯渴)되게 하니, 바로 하나의 고질적인 폐단이다. 아! 태학(太學)은 바로 당당한 현관(賢關)이니, 옛날에는 이목(李穆)의 직절(直截)102) 을 가상히 여겨 장려하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저하면서 결정을 짓지 못하는 것이 풍습을 이루었다. 이목(耳目)의 구실을 하는 지위에 있는 자로 누가 이목의 기풍이 있는가? 내가 이제 만년에 만약 이 습속을 엄중히 금지하지 않는다면 어찌 안지추(顔之推)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경조(京兆)에 경계하여 일체 엄중히 금지하도록 하여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속이는 폐단을 영원히 제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5일 갑인
전라 감사 조영로(趙榮魯)를 불러 보고 말하기를,
"호남(湖南)의 잡기(雜技)는 폐단이 매우 심하니 감여(堪輿)103) 와 상복(相卜)104) 으로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속이는 자들을 일체 엄중히 금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라도의 유학(幼學) 이정흡(李廷翕)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5월 28일 정사
하교하기를,
"삼릉 비각 영건청(三陵碑閣營建廳)의 당상관인 예조 참의 신사건(申思建)과 공조 참판 이중협(李重協)에게 모두 가자(加資)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9일 무오
강화 유수(江華留守) 한현모(韓顯謨)가 내탕고(內帑庫)의 은화(銀貨)와 은기(銀器)를 도둑맞았다고 장문(狀聞)하니, 하교하기를,
"관가의 은화를 잃은 것은 전임 관원의 불찰이겠지만, 은기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옛날의 제기(祭器)이니, 은전(銀錢)을 도둑맞은 것과 비교하여 경중(輕重)이 다르다. 규정대로 결안 취초(結案取招)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목 정사를 행하여 김상중(金尙重)을 동래 부사로, 이태중(李台重)을 의주 부윤으로, 조영국(趙榮國)을 평안도 관찰사로, 조명교(曺命敎)를 대사헌으로, 홍계희(洪啓禧)를 대사성으로, 이형만(李衡萬)을 교리로, 김시위(金始煒)를 부수찬으로, 김상철(金尙喆)을 교리로, 김상적(金尙迪)·민계(閔堦)를 승지로, 김상익(金尙翼)을 대사간으로, 조명정(趙明鼎)을 부교리로, 이영조(李永祚)를 지평으로, 유언민(兪彦民)을 문학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사서로, 유한숙(兪漢肅)을 설서로, 이익보(李益輔)를 응교로, 민우수(閔遇洙)를 집의로, 전일상(田日祥)을 전라 우수사로, 최명주(崔命柱)를 경기 수사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서종급(徐宗伋)과 병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의 정사(政事)이었다.
헌납 정언유(鄭彦儒)가 구 관백(關白)의 예단(禮單)에 대한 일을 가지고 진소하기를,
"관백의 전통은 대대로 일정하게 있는 일이 아니며, 국가 간에 사신을 서로 보내는 것은 해마다 파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벌써 청하였는데 우리가 만약 굳게 거절한다면, 청이 꺾여서 저지당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유감을 쌓고 시비의 단서를 불러 일으키는 일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한(漢)·송(宋) 두 임금이 원호(元昊)105) 에게 뜻을 굽힌 것과 송나라 신하 부필(富弼)이 사명을 받들어 세폐(歲幣)를 늘리도록 한 것은 국가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은 차왜(差倭)의 말에 불과하다. 관백을 위해서 주도록 청하는 것은 대신(臺臣)의 체모가 아니니 한심스럽다고 말할 만하다."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65권, 영조 23년 1747년 7월 (0) | 2025.09.30 |
|---|---|
| 영조실록65권, 영조 23년 1747년 6월 (1) | 2025.09.30 |
| 영조실록65권, 영조 23년 1747년 4월 (0) | 2025.09.30 |
| 영조실록65권, 영조 23년 1747년 3월 (0) | 2025.09.30 |
| 영조실록65권, 영조 23년 1747년 2월 (0) | 2025.09.30 |